2007. 6. 9. 15:17ㆍ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오매일여
불자들아! 모든 중생이 진실로 여래의 마음을 알지 못하니 만일 관찰해 알고자 하면 2가지 인연 있으니 1.눈으로 보는 것 2.들어서 보는 것이다. 금강경에 부처님께서는 오안이 있다 했다. 육안 천안 혜안 법안 불안. 육안이란 육신의 눈 천안은 하늘 즉 천상인의 눈 혜안은 지혜의 눈 법안은 이치의 눈 불안은 부처님의 눈이다. 부처님께서 몸으로 하는 업을 본다면 이 것이 곧 부처님인줄 알 수 있다.
사람을 볼 때 안목이 있다면 좋은 사람 좋지 않은 사람 훌륭한 사람 어른인지 아이인지 하는 행동 보면 알수 있다. 이 것이 바로 눈으로 보는 것이다. 부처님께서 입으로 하는 업을 보면 곧 부처님인줄 아니 이 것은 들어서 부처님을 본다는 것이다. 예로 여래의 거룩한 모습은 눈으로 보는 것이고 여래의 미묘한 음성은 들어서 보는 것이다. 부처님께서 몸으로 짓는 나쁜 업으로 누군가가 더해 내몰아친다 해도 성내지 않으면 이 것이 여래인줄 알 수 있다. 부처님 성품은 탐진치가 없기 때문이다. 이런 것이 들어 아는 것이다. 보는 것과 듣는 것으로도 여의치 않다면 어찌할 것인가?
불자들아! 열매를 2가지 사람에 비유한 것은 진실로 알기 어렵다. 알기 어려워 나는 함께 있어야 한다 말했다. 함께 있어도 모르겠거든 오래 있어야 하며 오래 있어도 모르겠거든 지혜를 써야 하며 지혜로도 모르겠거든 깊이 관찰해야 하니 관찰하는 까닭으로 계행을 가짐과 계행을 파함을 안다.
불자들아! 함께 있고 오래 있고 지혜를 쓰고 깊이 관찰하는 4가지를 구족한 연후에야 계행을 가지고 계행을 파함을 안다. 불자들아 계행에 2가지 있고 가지는 것도 2가지니 하나는 끝까지의 계행이요 다른 하나는 끝까지가 아닌 계행이니 어떤 사람이 인연이 있어 계율을 받아 가지거든 지혜있는 사람이면 이 사람이 가지는 계행이 이양을 위함 인지 끝까지 가짐인지를 관찰하라. 여래의 계율은 인연이 있는 것이 아니므로 끝까지의 계율이라 이름한다.
출세간 적으로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어찌 내게만 적용되고 다른 사람에게는 전혀 무관하겠는가? 어떤 이는 어렵고 힘들 때 함께 하고자 하고 즐거운 일을 함께 하고자 하는 사람도 있지만 사무량심이라는 자비심을 드러내 보살행을 하는 이도 있다. 자신이 넉넉할 때 잘 지내는 것이야 누구든 할 수 있지만 늘 평상시처럼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어렵다. 그러나 그렇게 해야 한다. 세상 살아가는 데는 이양을 위해 사느냐 아니면 가치 있는 삶을 위해 사느냐 생각해 봐야 한다. 불가에서는 최소한의 양식으로 최대한의 삶을 살아가는데 최대한의 삶이란 이양거리를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끝가지 불성을 놓치지 않고 내 마음을 가지면서 언제 어느 곳에 있더라도 여여히 살아가는 것이다.
켄트케이스의 그.래.도 중에서 - 당신이 착한 일을 하면 사람들은 다른 속셈이 있을 거라고 의심할 것이다. 그래도 착한 일은 해라. 착한 일은 말이 아니라 행동이다. 마음을 주고 손길을 주고 발길을 내닫는 것이다. 착한 일을 하고 살기가 갈수록 어려워지는 세상이다. 그래도 누군가는 해야 한다. 그 누군가가 내가 되면 얼마나 좋을까요?
해탈은 번뇌가 끊어진 것이고 열반이란 번뇌가 일어나지 않는 것이다. 중생이란 번뇌망상이 가득한 자리요 부처란 본래 번뇌망상이 없는 것이라 공부했지만 언어로 명쾌하게 설명할 수는 없다. 그러나 열반이든 해탈이든 삶이든 죽음이든 행복이든 자기 스스로 깨달을 수 있고 깨달아 가야 하는 것이다. 진리는 진실한 것이요 정직한 것이다.
고통은 존재하지만 고통 받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 했다. 지옥의 고통은 존재하지만 지옥에서 받을 고통과 괴로움을 받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欲知前生事 今生受自是 浴知來生事 今生作自是 전생을 알고 싶다면 현재 나의 모습을 보고 내생을 알고 싶다면 현재 내가 하는 것을 보라.
열반은 존재한다. 그러나 그 것을 추구하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 자리는 청정무구한 자리로 다만 내가 알지 못할 뿐이다. 보살은 비록 나쁜 중생들의 상애함을 받더라도 성내지 않으므로 여래는 끝까지 가지는 계행과 성취한 계행을 지녔다. 끝까지 흔들림 없는 규범 속에서 자유롭게 살 수 있었다. 이양을 바라지 않고 기도와 정진과 수행을 한다면 그렇게 될 수 있다. 기도 정진 수행은 원하는 바에 대한 확신과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신념을 지니게 해서 백척간두에서도 진일보 할 수 있는 지혜와 힘과 용기를 가지게 한다.
알기 어려운 것을 알기 위해서는 많이 봐야 하고 많이 들어야 하는데 보는 눈은 안목 있는 눈이요 귀는 열린 귀라야 한다. 그 것이 여의치 않으면 함께 있어야 하고 그래도 모르겠거든 오래 있어야 하며 오래 있어도 모르겠거든 지혜를 써야 하며 지혜로도 모르겠거든 깊이 깊이 관찰해야 한다. 관찰하는 까닭으로 그 사람이 여래인지 어른인지 불자인지를 알 수 있는 것이다.
여한 없는 인생을 살기 위해서는 규범 속에서 살아야 한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가르침 속에서 살아야 한다. 평상심이 얼마나 중요한 것이고 평상심으로 살기가 얼마나 어려운 가는 현실속에서 충분히 인식 할 수 있을 것이다.
뿌리깊은 나무는 뽑기 어렵지만 뿌리 얕은 나무는 흔들리기 쉽고 흔들리는 나무는 결국 쓰러지게 되어 있다. 고로 번뇌망상이 얕게 박히고 신심과 원력이 깊이 박혔다면 태산준령과 같은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은 입장에서 기도하고 정진하고 수행하는 불자가 되어야 하겠고 이양거리를 위한 기도와 수행정진이 되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
이상 정우스님 부처님의 마음 강론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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