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각의 달마어록4

2007. 6. 9. 16:13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달마혈맥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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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나 70-80년대 혹은 90년대까지도 고등학교나 대학을 다니신 분들 계실텐데요. 우리는 우주 대폭발에 대해서 배웠습니다. 빅뱅 빅뱅 이론요. 우주는 완전 텅 빈 공간이었는데 언젠가 모든 물질과 에너지가 한 점 속에 모두 응축되어 있었다는 이론이죠. 오직 한 점. 온 우주가 말입니다. 온 우주의 시공이 모든 물질이 여러분과 내가 마음 에너지 대양 수천 수 억개의 별들의 에너지가 한 점이었다는 것입니다. 한 점에 이 모든 것이 하나로 응축되어 있었단 거죠. 그리고 점차 팽창합니다. 외부로 점점 팽창하는 것이죠.

 

1970년 초반에 받아들여진 이론입니다만 1950년 경에 시작된 이론이고 실제로 수용되기 시작한 건 1970년대 경 우주의 상태에 관한 빅뱅 이론을 증명해낸 MIT대학 블럼 교수의 연구를 시초로 본격적으로 관심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최근에 새로 제기된 이론이 있습니다. 물리학에 반하는 이론입니다만 아주 흥미로운 이론이죠. 특히 불교신자들에겐 상당히 고무적이죠. 어쨌든 불교신자가 아니더라고 상관없지만요. 새로운 이론을 제기한 많은 과학자 중 한 사람인 스티븐 호킹 박사 한국말로 뭐라고 부르지요? 휠체어에 장착된 키보드로 의사표현을 하는 유명한 물리학자인 스티븐 호킹 박사가 지지한 이론이죠.

 

우주는 항상 실재했으며 주기적으로 생멸을 반복해 왔다. 즉 한 주기 안에 한 우주가 존재하지만 그 이 전에도 수 없이 많은 우주가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빅뱅 이론에는 없는 내용이죠. 빅뱅 이론에서는 아무 것도 없는 상태에서 그냥 뭔가가 생겨나는 그런 이론이라는 점에서 좀 설득력이 없긴 합니다. 마치 성경의 가르침과 같죠. 신이 나오기 전엔 뭐가 있었지? ? ? 이상해그리고 불교로 관심이 돌려지죠. 불교는 다르게 말합니다. 현재 물리학이 말하는 것처럼요. 우주는 항상 일정한 주기로 실재한다. 끝없이 무한한 주기로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그리고 아주 놀라운 것은 무엇이냐?

 

저를 믿지 말고 화엄경을 보세요. 화엄경에 나와있는 내용입니다. 우주는 이 뿐만 아니라 우리가 속한 이 우주는 긴 핫도그를 떠올려보세요. 또는 긴 풍선요. 수 많은 우주가 동시에 수평적으로 공존한다고 합니다. 놀랍죠? 무한한 우주. 하나의 우주가 아닌 무한한 대양과 같은 우주 속의 우주 속의 우주. 이 모든 것들이 끝도 없이 생겨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고 불교는 2500년 동안 말했죠! 최신을 달리는 현대 물리학에서 이제 겨우 발견하고 논쟁을 벌이고 있죠. 걱정 마세요. 우리가 결국 이길 거니깐요. 요지는 우리의 성품과 우주의 성품이 같다는 것입니다.

 

이 마음은 시작도 없는 다겁생래 이래로 단 한 번도 달라진 적이 없다. 한 번 더 강조하겠습니다. 용어가 마음에 내키지 않는다면 공간이라고 바꾸던지 아니면 하나님이라고 해도 좋고 뭐가 돼도 상관없어요. 개든 고양이든 내키는 대로 바꿔도 무방하겠습니다. 이 마음은 시작도 끝도 없는 다겁생래 이래로 단 한 번도 달라진 적이 없다. 죽지도 않고 살지도 않으며 생기지도 사라지지도 않는다. 늘어나지도 줄어들지도 않는다. 아주 흥미롭습니다. 빅뱅 이론에서는 모든 것이 끝없는 작은 한 덩어리에 응집되어 폭발 팽창하지만 그 전에는 아무 것도 없이 텅 비었다고 하죠? 상상도 잘 안되지만요.

 

논리적으로 따져보면 처음엔 아무 것도 없었는데 어떤 것이 갑자기 생겨났다? 좀 석연치가 않죠? 이 모든 것들이 도대체 어디서 생겨나서? 그리고 팽창하는가? 불교는 흥미롭게도 이렇게 말합니다. 시작은 없다. 시작도 없고끝도우리가 단지 시작이 있길 원할 뿐이죠. 왜냐 하면 이야기 전개상 시작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니깐요. 시작이 있어 의미가 생겼는데 일이 꼬여서 결국 끝나는... 우리 인생과 같이 말이죠. 마치 역사나 미국역사 영화 전쟁 등과 같은. 아무 것도 없었는데 뭐가 생겨나고 그 게 커져서 결국 사라지고 마는그러나 불교는 단 한 번도 시작한 적이 없다 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부처님께 이 우주가 어떻게 시작되었습니까? 라고 여쭈면 ……<침묵>. 오직 마음뿐입니다. 일체유심조! 이 말 한 마디를 가지고 MIT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딸 수도 있을 것입니다. 달마대사가 남기신 이 짧은 한 마디가 엄청나게 심오한 내용을 담고 있기 때문이죠. 이제서야 최첨단의 현대 물리학이 이 것을 증명하고 있지요. 물리학의 천재들이 말이죠. 절 믿지 마시고 구글에 가서 보세요. 천문학이나 물리학 스티븐 호킹 박사의 논점이나 빅뱅 또는 여러분이 아는 유사한 주제어를 아무 거나 넣고 검색해 보시라고요. 거기 나오는 내용들이 달마대사의 가르침을 얘기하고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빅뱅 학자들은 마치 성경의 가르침과 유사하기 때문에 이와 같이 주장할 수가 없죠. 아무 것도 없는데 뭔가가 하나 생기고 그 것이 계속되다가 일그러져서 사라지는 것 바로 빅뱅 식이죠? 그러나 이 가르침은 다르죠! 초현대 물리학이 뒷 받침하는이 마음은 시작도 없는 다겁생래 이래로 다겁생래 이래로 시작도 없는 이 마음은 결코 변한 적이 없다.

 

죽지도 않고 살지도 않으며 생기지도 사라지지도 않는다. 늘어나지도 줄어들지도 않는다. 깨끗하고 더러운 것도 아니며 선한 것도 악한 것도 과거도 미래도 아니다. 진실도 거짓도 아니고 여자도 남자도 아니고 출가자도 재가자도 늙은이도 젊은이도 아니며 현자도 어리석은 자도 아니며 부처도 중생도 아니다. 이 것은 깨달음을 추구하지도 않고 업으로 인해 고통받지도 않는다. 우리의 마음 즉 우리의 본성품이 말입니다. 이 것은 깨달음을 얻기 위해 고군분투 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 이미 완전하니깐!

 

업으로 인해 고통스러워 하지도 않으며 힘이나 모양도 없다. 이는 마치 허공과 같다. 와우! 빈 허공과 같다!!? 법문 전에 책을 읽지도 않았는데! 여러분 앞에 앉기 전에 책을 미리 펴보질 않거든요. 정말 신기하네요. ! 허공과 같다!!? 소유할 수 없어요. 그리고 잃을 수도 없고요! 아이고! 내 인생은 쫑 났어! 어떻하면 좋아~ 아이고. 지난 주까지는 좋았는데 한 번의 실수로 내 모든 걸 잃었어. 완전 망했다. 아니야! 그렇지 않아! 이 바보야! 망상 피우지 말고! 잃은 것이 하나도 없어요~ OK?

 

이 마음은 시작도 없는 다겁생래 이래로 단 한 번도 달라진 적이 없다. 죽지도 않고 살지도 않으며 생기지도 사라지지도 않는다. 늘어나지도 줄어들지도 않는다. 깨끗하지도 더러운 것도 아니며 선한 것도 악한 것도 아니다. 과거도 미래도 아니다. 진실도 아니고 거짓도 아니다. 승려로 나타나지도 않고 재가 불자도 아니며 늙은이도 젊은이도 아니며 현자도 어리석은자도 아니며 부처도 중생도 아니다. 이 것은 깨달음을 추구하지도 않고 업으로 인해 고통 받지도 않는다. 힘이나 모양도 없다. 이는 마치 허공과 같다. 소유할 수도 없다. 그리고 잃어버릴 수도 없다.

 

이 마음의 움직임을 산이나 강 바위 벽 따위로도 막을 수도 없으며 막을 수 없는 이 힘은 오온의 산이나 윤회의 강도 꿰뚫는다. 업도 이 진신을 막을 수 없다. 아무리 많은 악행을 저질러도 우리의 마음은 아무 장애를 받지 않습니다. 여러분의 악업이나 원죄도 우리의 성품을 어쩌지 못합니다. 부처께서 말씀하시길 사람들이 미혹하여 끝없는 윤회의 강에 계속해서 뛰어드는 구나. 그래서 빠져나오려고 하면 할수록 더 깊이 가라 앉을 뿐이다. 정말 놀라운 대목입니다! 부처님께서 사람들이 단지 미혹하다고 합니다.

 

대혜 스님의 유명한 가르침입니다. 중국말로는 다위 입니다. 중생들은 미혹하여 본성품을 잊어버리고 망상을 쫓아 다닌다. 아주 심오한 부분입니다. 개인적으로 아주 존경하는 가르침입니다. 마치 칼과 같이 정통으로 핵심을 자릅니다. 중생은 미혹하였다. 그 이유는 오직 하나뿐!!! 오직 한 가지 즉 자신의 성품 자리를 놓쳐버리기 때문입니다. 그 자리를 망각하고 세상 일을 쫓아 다닙니다. 벤즈나 BMW 음식 섹스 돈과 같은 물질뿐 아니라 머리 속의 망상들을 쫓아 다닌다 구요. 불법에서는 우리는 한 순간 부처도 되었다가 중생도 된다 선택은 우리 몫이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결정은 우리 몫! 오직 결정은 네가 할 뿐! 아무도 대신해 줄 수 없습니다. 우리의 부모님이? 우리가 사는 사회가? 혹은 정당이? 미국이? 아무도! 오직 당신뿐! 정신을 차릴 것인지 꿈 속을 헤맬 것인지 여러분이 결정하세요! 오직 결정은 너! ! !                                                   

 

그래서 아주 흥미롭습니다. 부처께서 말씀하시길 사람들이 미혹하여 끝없는 윤회의 강에 계속해서 뛰어드는 구나. 그래서 빠져나오려고 하면 할수록 더 깊이 가라 앉을 뿐이다. 이 것은 모두 스스로의 성품 자리를 놓치기 때문이다. 중생은 성품 자리를 잊어버리기 때문에 미혹한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한없이 순수하고 무한한 그리고 이미 완전한 그 것을 말입니다. 그 것을 철저히 망각하고 망상을 쫓아 허구한 날 헤매고 돌아다닐 뿐입니다. 어떤 선사님께서는 아침에 잠자리를 빠져 나오기 전에 그 짧은 순간에 얼마나 천당과 지옥을 많이 오가는가?

 

일본의 도겐 선사님이 하신 말씀입니다. 아침에 자리에서 일어나기도 전 천당과 지옥을 얼마나 수없이 오가는가? 자명종 소리에 깹니다. 띠리리링~ 띠리리링~ 아이고 일 나가야 해. ~ 정말 지긋지긋 해! 넌더리 나. 어휴~ 특히 그 사장 놈! 오늘 그 놈 만나야 돼! 얼마나 치사한 자식인지! 아이고 더러운 놈! 차라리 죽어라! 이렇게 이미 살인을 짓습니다. 살인자가 되는 것이죠. 아침에 일어나기도 전 얼마나 수없이 천당과 지옥을 오갑니까? 정말로요.

 

바로 이 겁니다. 중생은 미혹한 자들입니다. 왜냐? 본성을 망각하니까~ 그리고는 망상을 쫓아다닙니다. 좋고 즐겁고 슬프고 화나고 걱정되고 의기소침한 망상 어찌됐건 죄다 망상이죠? 만일 망상을 쫓지 않는다면 여러분이 있는 그 자리가 바로 부처의 자리입니다. 아무 것도 할 필요 없습니다. ~무 것도. 서산대사의 선가귀감 중 제가 가장 좋아하는 한 구절을 인용하면 본래 마음 자리 단속만 제대로 하면 그 것이 곧 최고의 정진이다. 즉 수본진심 제일정진 이라고 하셨습니다. 수본진심 제일정진 바로 이 마음 자리 즉 탁! 듣는 이 자리가 부처입니다.

 

아아~ 잘 모르겠어. 대체 뭐지? 이 게 맞나? 틀리나? 잘 모르겠어.이렇게 생각을 일으키고 이를 따라 나서면 바로 중생입니다. 아주 명백하게 듣는 순간 탁! 저 소리 듣는 자가 부처입니다. 바로 이 자리에서 작용합니다. 제가 이래서 불교가 좋다니까요. 어떤 점차적인 과정이 아니고 바로 이 자리에서 작용합니다. 선택은 여러분 몫! 정말 아름다운 것은 여러분이 선택한다는 것! 만약 사람들이 미혹하지 않았다면 왜 바로 눈 앞의 것을 자꾸 묻겠는가? 대단한 부분이 이어집니다.

 

만약 사람들이 미혹하지 않았다면 왜 마음에 대해 묻는 것일까? 바로 눈 앞에 있는 것을? 마치 여러분께 내게 코가 붙어있소? 라고 묻는 것과 같아요. 내가 혹시 코가 있나요? 이 것 보세요! 아주 크죠? 혹시 내가 코가 있나요? ~ 한 번은 코가 책에서 보고 들었는데 실제로 코 있으면 안 죽는다고 그래서 말인데요. ~ 그래서 코가 있는지 없는지 저도 잘 모르겠어요. 바로 여기 있잖아! 여러분이 미혹하지 않다면 코가 붙어 있나요? 와 같은 질문은 하지 않겠죠? 그래서 여기 계신 분들 중 일요법회가 계속된 이래로 한 분도 코가 있는지 물어오신 분은 없습니다.

 

이미 코가 있는지 아니까요. 어떠한 여지 없이 명백한 사실이니까요. 입이 있는지 물어온 분도 없습니다. 눈도 마찬가지로. 너무도 명백하니까. 그 걸 통해서 보니까. 사용하고 있으니까. 코들 사용하시죠? ~ ~ ~ ~ 이래서 저는 코가 있는지 알아요. 저는 여러분이 보여요. 그래서 눈이 달려 있는지 압니다. 제가 좋아하는 커피를 맛봅니다. 그래서 입 안에 혀가 있는지도 압니다. 그러나 아직도 마음에 대해서는 허구한 날 묻습니다. 

  

우리는 마음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하하하하! ~상에! 어의 없죠? 기가 찰 노릇 아닙니까? 마음을 쓰고 있자나요. 그러나 아직도 불성에 대해 묻습니다. 불성! 자성! 자성을 어떻게 하면 발견할 수 있죠? 항상 성품 찾는 길을 묻습니다. 이미 그 것을 사용하고 있으면서도 질문을 던지는 그 순간 조차도 마음을 쓰고 있는데 말이죠. 정말 웃기는 파라독스지요. 만약 사람들이 미혹하지 않았다면 왜 바로 눈 앞에 것을 보지 못하고 묻겠는가? 그들 중 어느 누구도 제 손발이 움직이는 이치를 아는 자가 없다. 부처는 틀림 없다. 단지 미혹한 자들이 자신을 잊고 있을 뿐이다. 이 것뿐입니다. 부처는 틀리지 않습니다. 단지 미혹한 중생들이 스스로를 망각했을 뿐입니다.

 

이 묘한 이치는 다름아닌 부처만이 알 수 있다. 오직 지혜로운 자만이 이 마음을 안다. 이 마음은 불성이며 해탈이라 이름한다. 생사도 이 마음을 가로막을 순 없다. 이 세상 그 무엇도 마음을 막을 순 없다. 삶과 죽음 즉 이 육신의 삶과 죽음도 이 마음을 막을 수 없습니다. 그러니 염려 붙들어 매십시오. 전혀 걱정할 것 없습니다. Don’t worry. Be happy 노래 가사처럼 말이죠. 정말 간단하죠? 걱정 마세요. 살고 죽고 오고 가는 것 슬픔 분노 좌절 걱정 두려움 회한 일체 걱정하지 마십시오.

 

마음 즉 불성 성품자리는 장애도 없고 억지로 누를 수도 없고 더럽혀지지도 않으며 근심도 없고 제한할 수도 없고 죽일 수도 없습니다. 무슨 수를 쓰더라도 이 마음자리는 어찌할 수가 없습니다. 그 어떤 것도 이를 제재할 수 없다. 이를 이름하여 여래 생각을 떠난 자리 신성 영원불멸 위대한 성자라고 부르지만 이 모든 것이 허울뿐 정수는 아니다. 이와 같이 부처도 다양하다. 여기 이 부분 굉장하죠? 제가 매료된 부분입니다. 부처도 이와 같이 여러 모습으로 나타나지만 아무도 이 마음을 떠나지 않는다. 부처도 각양각색입니다.

 

여기 계신 모든 부처님들! 각자 다 다르잖습니까? 정말 아름다운 대목입니다. 부처도 제 각각이지만 그 어느 부처도 이 마음을 떠나지 않는다. 바로 이 겁니다. 이 마음의 능력은 한량없으며 마음의 발현 또한 무량하다. 눈으로 형태를 보고 귀로 소리를 듣고 코로 냄새를 맡고 혀로 맛을 보는 그 모든 순간이 바로 그대의 마음이다. 말이 닿을 수 없는 모든 이 순간들이 곧 너의 마음이다. 언어가 근접할 수 없는 매 순간 즉 말을 초월한 그 순간들이 바로 우리의 마음입니다. 우리 말이 닿을 수 없는 곳이 과연 어딜까요? 

 

좀 생뚱 맞게 들리죠? 유럽에도 막 다녀 왔는데 말입니다. 말이 갈 수 없는 것이라니? 유럽도 가고 미국도 가고 중국도 러시아도 그리고 아주 조심하면 평양까지도 다녀올 수 있는 이 마당에 말이 갈 수 없는 곳이라니? 말을 초월한 곳 대체 거기가 어디란 말입니까? 집중하세요. ! 이 것이 뭐냐? ! 누가 듣는가? 진정으로 보시면 우리의 말이나 망상이 절대로 닿을 수 없는 곳을 알 수 있습니다. 팔만대장경도 이 순간을 설명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수행하는 것이 바로 이 것입니다. 그 외 아무 것도 없습니다.

 

나는 무엇인가?... 이렇게 질문을 던질 때 일체의 생각이 끊어집니다. 이 질문을 던지면 일어나는 생각이 비집고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이 질문을 물고 늘어지면 머리로 책으로 묻는 개념적 질문이 아니라 바로 직진합니다. 한 생각 일으키기 전 바로 그 자리 한 생각도 일어나기 전 바로 그 지점 바로 그 자리가 여러분의 마음입니다. 그 자리를 마음이라 부르면 이미 실수죠. 지금은 법문 중이라 말을 내뱉어야 하니 죄송합니다만 어쩔 수 없네요. 말이 닿을 수 없는 곳 그 자리가 네 마음이다. 그러나 그 자리를 설명하는 순간 생각을 일으킨 것입니다. 아주 흥미롭습니다.            

             

이 마음의 능력은 한량없으며 마음의 발현 또한 무량하다. 눈으로 형태를 보고 귀로 소리를 듣고 코로 냄새를 맡고 혀로 맛을 보는 그 모든 순간이 그대의 마음이다. 이 모든 것을 행할 때 바로 그 때 그 자리가 아니면 나중에 다른 곳에서는 찾을 수 없습니다. 말이 닿을 수 없는 순간 순간이 바로 우리의 마음입니다. 이 공부에는 박사학위 따윈 필요 없습니다. 사실은 마음자리에서 십만 팔천리가 떨어지게 할 뿐입니다. 그래서 제가 박사학위를 취득하지 않았는지도 모릅니다.

 

경에 이르기를 여래의 모습은 한량없고 그 깨어있음 또한 끝이 없다. 여래의 모습은 무한하고 깨어있음 또한 끝이 없다. 수 없이 많은 모습은 이 마음에서 비롯되었다. 모든 것이 다 달라보입니다. 생각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이죠. 그 모습이 어떻게 변하든 모든 것을 구별해 내는 능력은 마음의 깨어 있음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 마음은 어떠한 형상도 없으며 그 깨어 있음에도 끝이 없다. 그래서 여래의 모습은 한량없고 그리고 그 깨어 있음도 무한하다 라고 말하는 것이다. 여기까지 질문 있습니까?

 

아주 간단합니다. 뭔가라고 부르는 순간 어떤 종교를 불문하고 불교에 국한된 문제가 아닙니다. 뭐라고 이름 붙이는 순간 이미 아니올시다. 불교는 불교에 관한 공부가 아닙니다. 진정한 불자들의 공부는 불교 그 자체에 관한 공부가 아닙니다. 불교는 전혀 재미있는 연구 분야가 아닙니다. 기독교나 이슬람 그 무엇이 되었건 이 마음 만큼이나 흥미로운 공부거리가 아니란 말씀입니다. 이 마음에 대해 연마하면 그 것이야 말로 진정한 수행이라 하겠습니다. 그리고 진정한 기독교적 이슬람교적 신앙이라 하겠습니다. 바로 여기! 외에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다시 한 번 강조하겠습니다.

 

말이 닿을 수 없는 곳 즉 인간의 생각이 범접할 수 없는 바로 거기가 우리의 마음자리입니다. 전통적으로 항상 이 이야기를 인용합니다. 소크라테스도 이와 같은 가르침을 폈습니다. 소크라테스도 매일 똑 같은 소리만 했습니다. 여러분은 아마도 매일 똑 같은 소리만 해댄다고 하겠지만요. ! 사실 그렇기도 하구요. 저보다 소크라테스가 훨씬 더 많이 똑 같은 소리를 했을 겁니다. 저보다 나이가 많으니까요. 매일 너 자신을 알라! 너 자신을 알라! 너 자신을 알라! 고어체로 바꾸면 너 자신을 알지어다!

 

맨날 그러자 한 제자가 여쭈었습니다. 그러는 스승님께서는 스스로를 아십니까? 그러자 소크라테스가 대답했습니다. 모른다. 그러나 생각이 근접할 수 없는 곳을 인식하고는 있다 고 했습니다. 즉 자아에 관한 성찰입니다. 너 자신을 알라! 나는 무엇인가? 누군지 알고 싶으시죠? 그러면 속에다 대고 물어보세요. 나는 무엇인가? 나는 무엇인가? 이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질 때 자아에 대해 진정으로 물으면 어떠한 생각도 가서 붙을 수가 없습니다. 일체의 생각이 그 자리를 뚫고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생각이 비집고 들어갈 틈도 없습니다. 여러분의 생각도 내 생각도 부처님의 생각도 일체의 생각도 가서 붙을 수 없습니다.        

 

부처도 스스로를 알 수 없었습니다. 나는 무엇인가? 질문 대신에 스스로를 알았다면 보리수 아래서 깨달음을 얻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자리하고 앉아 나는 무엇인가? 하고 스스로를 찾아 나선 겁니다. 부처도 몰랐습니다. 알 수가 없었습니다. 개념적으로 말입니다. 이는 마치 돌멩이로 문을 열려는 것과 같습니다. 작은 열쇠구멍에 큼지막한 돌멩이를 쑤셔넣고 문을 열려는 것과 같다 말입니다. 생각으로는 삶의 해답을 풀 수 없습니다. 뭔가를 설명하고 대화를 풀어 나가기 위해서는 도움이 될지 모르지만 추론을 해내거나 아! 그래서 이런 코가 붙어있는 게로군! 우리 아빠가 독일 사람이라서 코가 이렇게 생겼어. 그래 이제야 알겠어! 맞습니다.

 

생각으로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무엇인가? 는 생각으로 알 수 없습니다. 아무도 그렇게 알아낸 사람이 없습니다. 그래서 구약성경의 모든 증언이 침묵하라! 즉 생각을 쉬어라! 생각하지 마라! 생각을 내려놓아라! 나는 무엇인가? 라고 물을 때 잡념이 끊어진 생각을 쉬는 상태 즉 한 생각이 일어나기 바로 그 전 상태 말입니다. 바로 그 자리입니다. 멀리 갈 필요 없어요. 이미 그 자리에 있습니다. 정말 경이로운 불가사의 이 가르침의 결정체입니다. 이 모든 가르침 중에 믿고 새겨야 할 오직 한 가지는 바로 여기 있다는 것!

 

그 걸 어떻게 아느냐고요? 여러분 스스로 찾을 수 있습니다. 그 길엔 아무 것도 필요 없습니다. 저도 불교도 화계사도 해인사도 명동성당도 여의도 순복음 교회도 필요치 않습니다. 하나도 필요 없습니다. 간혹 용도에 맞게 사용하면 도움이 될 수는 있겠죠. 이 가르침의 가장 뛰어난 부분은 바로 이 자리 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 스스로 볼 수 있다는 것! 스스로를 위해 재발견 할 수 있습니다. 저에게 보여주어 인정을 받을 필요없이 매일 스스로를 재발견 하십시요.

 

매일 안 주머니에 많은 돈을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모르셨지만 그런지도 모르고 매일 허송세월을 보냈었지만 돈을 갖고 있었는데! 이미 있었는데~ 그러나 모르고 있었지요? 그래서 아직도 빈털터리죠. 그래서 부처와 중생이 둘이 아니라고 합니다. 중생은 스스로가 부처임을 모릅니다. 그래서 중생입니다. 부처는 오직 모를 뿐! 입니다. 그 것이 바로 부처입니다. 아주 명백하죠?

 

놀라운 사실은 불교가 요즘 서양 특히 미국에서의 관심이 엄청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특히 유럽의 정도는 상상을 뛰어 넘습니다. 어마어마 합니다. 왜냐 하면 외부로 향한 그들의 노력은 이미 한계에 다다랐음을 알게 된 것이죠. 이미 수 없이 많은 시도를 해왔습니다만 50여 년 전 인류 역사상 최악의 유혈사태를 겪은 유럽조차도 그렇게 신앙심이 많은 유럽이 서로를 처참하게 죽이고 살해한 현장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어느 누구도 와서 그들을 구원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들의 인류 역사를 통해서 나는 나 밖에 구원할 수 없다는 것을 조금씩 알게 된 것이죠. 그래서 내면을 들여다 보기 시작한 것입니다. 수행에 대한 달마대사의 가르침은 이 책이 아닙니다. 만약 달마대사의 가르침 그 자체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면 달마대사의 본래 면목에 대해 알고 싶다면 달마가 서쪽으로 온 이유를 알고 싶다면 달마에 대해 뭐든 알고 싶다면 그 무엇이 됐건 그렇다면 앉아서 여기다 대고 물으세요. 나는 무엇인가? 그리고 관하세요. 그냥 관하세요. 어떤 무엇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냥 관하세요.

 

나는 무엇인가? 아무 잡념 없이 집중합니다. 한 생각도 일으키기 전! 바로 거깁니다. 나와 우주와 완전히 하나됩니다. 그러면 부처도 달마대사도 하나님도 필요 없습니다. 오늘 법문은 여기까지 입니다. 참석해 주신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기억하셔야 될 것은 이 책 내용 집에 가서 다시 검토하지 않는 겁니다. 집에 가시면 이 책은 그냥 내려두십시오. 모여서 다시 이야기하기 위해 꺼낼 때 조차도 보지 마십시오.

 

진정으로 달마대사의 진면목을 부처님의 대의를 알고자 한다면 이 육신 지금 걸치고 있는 옷 뭐가 됐건 알고 싶다면 그냥 앉으세요. 10분만이라도 이른 아침 10분만이라도 앉으세요. 10분간 나는 무엇인가? 저를 위한 것도 불교를 위한 것도 아닙니다. 자신의 내면을 바라보세요. 그러면 뭔가 맛을 볼 것입니다. 바라옵건데 주중은 다 건너 띄우고 일요일마다 법문 때만 참석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이 모든 것들은 쇼 거리 밖에 더 이상 의미가 없습니다. 법문이 흥겨울 필요는 있지만 흥미거리가 되고 싶진 않습니다. 조만간 더 이상의 쇼는 없을 겁니다.

 

한 번 해 보세요. 진 맛을 볼 겁니다. 여러분이 맛 본 그 것이 바로 여러분입니다. 멋지지 않습니까? 다시 한 번 이렇게 좋은 날 참석해 주셔서 감사 드립니다.     

이상 현각스님 달마어록4 강론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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