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마어록6

2007. 6. 9. 16:15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달마혈맥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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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품을 보지 않고서 무상정각을 이뤘다고 하는 자는 거짓말쟁이다. 석가모니의 십대제자 중 아난다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배우는데 단연 으뜸이었다. 아난다는 불제자 중에서 가장 명석한 두뇌를 가진 슈퍼 울트라 PH.D, 박사스님이었어요. 그러나 이렇게 명석한 아난다도 부처를 진정으로 알지 못했다. 그가 한 것은 단지 공부하고 기억하는 것이었다. 아라한은 진짜 부처를 알지 못한다. 이들은 깨달음을 얻는 수행에 대해서는 모든 것을 알지만 인과에 얽매여 자유롭지 못하다. 이들은 생사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는 중생의 업과 같다.

 

부처가 말한 바와 정반대로 행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들은 부처를 모독하고 욕보이는 것이다. 이들은 죽여도 허물이 안 된다. 죽여도 허물이 안 된답니다. ~ 놀랍습니다. 경에 이르기를 외도들은 믿을 수 없으며 이들을 죽이는 것은 죄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믿는 사람은 부처의 경지에 이를 수 있다. 이 뿐입니다. 말에 집착하고 교리와 이론을 분석하고 연구하는 사람들 불교 관련서적을 더 읽으라고 권유하는 사람들은 사실상 불교의 가르침을 훼손하는 자들입니다.

 

반면 본성품에 대한 제대로 된 통찰력을 지닌 사람들은 비방할 수도 없고 죄도 없다 하겠습니다. 성품을 바로 보지 않고는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다른 사람들의 선행을 비판하면 안된다. 자신을 속이는 것은 아무 이득이 없다. 선과 악은 명백하다. 인과도 명백하다. 극락과 지옥이 바로 그대 눈 앞에 있느니라. 그러나 어리석은 자들은 이를 알지 못하고 끝 간데 없는 암흑의 나락으로 곤두박질친다. 이를 믿지 못하도록 하는 것은 두터운 업장 때문이다. 

 

빛처럼 존재하는 성품을 믿지 않는 자들은 맹인이나 다름없다. 놀랍네요! 사람들은 자신의 본성품을 바로 보지 않습니다. 바깥에서 들려오는 분명한 저 소리를 믿지 않는 것과 같아요. 여러분들께서 기침을 자주해 주셔서 기쁩니다. 왜냐 하면 우리의 성품을 볼 수 있는 아주 흥미로운 동기를 마련해 주니까요. 바로 여기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평소에 잘 듣지 못합니다. 지금 밖에 부는 바람소리도 못 듣고 계셨구요.

 

듣지 못하고 믿지 못하게 하는 유일한 것! 대상으로서의 소리가 아닌 듣는 순간<알아차리는 순간>의 경험을 믿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유일한 것은 바로 여러분의 두터운 업장 때문입니다. 이 것뿐입니다. 집착하는 생각 즉 마음의 습기 이 뿐입니다. 이들에게 제 아무리 설명하려 해도 그들은 눈 뜬 장님이기 때문에 아무 소용없다. 눈을 감고 사는 이들이 어떻게 빛을 구분할 수 있겠는가?

 

삼악도<축생 아귀 지옥>와 빈곤에 허덕이는 중생들도 이와 마찬가지다. 이들은 죽지도 살지도 못한다. 이들은 고통을 받으면서도 천상의 신만큼 행복하다고 말할 것이다. 비록 스스로 좋은 곳에 태어났다고 믿는다 해도 모든 일체 중생은 빛을 알지 못한다. 두터운 업장에 가리워진 자들은 믿지도 못하고 자유도 얻을 수 없다. 아주 중요한 부분입니다. 불법의 가르침은 지금 이 자리에서 일어나기 때문에 아주 즉각적입니다. 성품을 보는 것은 내일 일어나는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항상 어떤 과정적인 것으로 인식합니다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지금 당장 탕! 이와 같습니다.           

 

마음이 곧 부처라는 것을 바로 본 사람은 머리를 깎을 필요가 없다. 속인들도 역시 부처니까 성품을 보지 못하면 머리 깎은 자라 해도 광신자일 뿐이다. 자신의 본분을 다하지 못하면 머리 깎는다고 해결되지 않습니다. 자신의 성품을 봐야 합니다. 그러나 결혼한 속인들은 성생활을 포기하지 못하는데 어떻게 도를 이룰 수 있냐고요? ~ 흥미로운 대목이네요. 나는 단지 성품을 보는 것에 대해 말할 뿐. 달마대사는 오직 본성품을 보는 것에 대해서만 언급하고 계십니다.

 

난 섹스에 대해 얘기하지 않는다. 오직 그대가 성품을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대가 성품을 보기만 하면 성은 실체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리라. 결국 그대가 느끼는 즐거움과 함께 사라질 것이다. 만약 어떤 습기가 남아있다 하더라도 이는 그대에게 해를 끼치지 못한다. 성품은 본래가 청정하기 때문이다. <습기>가 남아있다 하더라도 상관없습니다. 우리의 성품은 본래 청정하기 때문입니다.

 

지수화풍 사대로 된 육신에 의지해 살지만 성품은 본래로 청정하다. 그래서 더럽혀지는 법이 없다. 진신<법신>은 감각도 배고픔도 갈증도 덥고추움도 아픔도 사랑에 대한 집착도 기쁨도 고통도 선악도 길고짧음도 강약도 아무 것도 없다. 실제로 여기엔 아무 것도 없습니다. 아무 것도! 뭔가가 있을 거라 생각하죠? 뭔가 순수한 것! 즉 어떤 마음이 있다고 믿어서 깨끗하게 보존해야 한다고 착각하죠? 어떤 마음이 있어서 항상 바르게 간직해야 한다고 착각합니다. 죄업으로부터 지켜야 할 무엇이 있다고 말입니다. 그러나 아무 것도 없습니다.

 

오사마 빈 라덴이나 조지 부시 또는 성인이나 죄인 할 것 없이 모두 동일한 텅 빈 성품을 가지고 있습니다. 얼마나 많은 죄를 악행을 나쁜 짓을 했건 상관없이 있는 그대로 성품 그 자체는 결코 변하지 않습니다. 악취가 방에 진동한다고 합시다. 아주 역겨운 냄새요. 모두 경험해 보신 적 있죠? 악취가 진동하는 방 그런데 악취는 결국은 사라지잖아요. 머물러 있을 수가 없습니다. 공간은 공간 속에서 한 행위에 의해 그 자체로서 변하는 법이 없습니다. 우리의 성품도 이러합니다.

 

우리의 진신은 본래로 청정하다. 그래서 더럽혀질 수 없는 것이다. 감각도 배고픔도 갈증도 덥고추움도 아픔도 사랑도 집착도 기쁨도 고통도 선악도 길고짧음도 강약도 없고 본래 한 물건도 없는 것이다. 마음이 본래 텅 비어 있어 있어요. 번뇌도 마찬가지로 텅 빈 것이고. 육신에 집착하기 때문에! 이 육신의 경험에 매이기 때문에 때문입니다. 오직 이 육신! 여기 여기. 배고프고 목마르고 덥고춥고 아픈 것이 모두 이 육신의 집착으로 생긴 것입니다. 오직 이 육신에만 관심이 있기 때문이지요.

 

아픔 건강 춥고더운 것 슬픔 행복 두려움 즐거움에 끌려다니는 것은 오직 이 몸뚱이에 집착하기 때문입니다. 불교가 이 몸뚱이를 무시하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오해 마세요. 명상수행이라는 것이 생각을 완전히 끊어버리는 것도 아니고요. 사실 우리는 생각을 절대 하지 않을 수 없지요. 회광반조. 따뜻하다고 느끼는 이 것! 춥다고 느끼는 이 것! 슬프다! 걱정하는 이 것이 도대체 무엇인가?  그 자리! 그 자리를 자세히 들여다 보면 텅 비어있어요!

 

출가하기 두 해 전에 경험했던 일인데요. 캠브리지 선원에서 안거를 나고 있을 때였어요. 참선이 처음이라 제대로 앉는 것도 익숙하지 않았습니다. 두 무릎이 바닥에 제대로 닿지도 않아서 이렇게 앉아있을 수 밖에 없었어요. 너무 고통스러웠어요. 특히 무릎이학생 때 미식축구 같은 스포츠를 많이 했었는데 하버드 재학시절 근처 캠브리지 Zen센터에서 3일간 단기 결제를 한 적이 있답니다. 당시 입승스님은 굉장히 엄격한 분이셨죠. 어떤 움직임도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조금만 움직여도 뱀! 조금만 소리내도 뱀! 아주 엄격해서 조금도 움직이지 못했지요. 아마도 일본 선불교에서 수행한 분이었는지 약간 사무라이 스타일이었습니다. 여러분도 이런 스타일의 방법을 한 번 경험해 보세요. 어쨌든 꼼짝도 못하고 앉아있어야 했습니다. 한 곳으로 혼신을 다해 집중했지만 제대로 앉아 있기도 힘들었습니다. 그런데 오른 쪽 무릎의 통증이 마치 칼이나 바늘이 무릎 깊숙이 들어가는 듯한 통증이었거든요. 왜냐 하면 미식축구할 때 무릎 부상을 당했었거든요. 일어설 수도 통증 부위를 주무를 수도 없었어요. 그냥 앉아있어야만 했습니다. 물론 아주 잘 하고 싶기도 했고요.

 

이 무엇인가? 하면서 내면을 들여다 봤습니다. 내가 지금 고통을 받고 있다! 내가 아프구나! 내가 고통스러워하는데 근데 정말 흥미로운 것은 당시 저에게 선택권이 없었던 거죠. 오직 도대체 누가 고통스러워하는가? 에 대한 의심만 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죠. 물론 내가 고통스러운데 도대체 그 나라는 고통을 받고 있는 그 나의 실체는 무엇인가? 라고 내면을 관했을 때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내면을 봤을 때 고통스러워하는 나는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고통 받는 그 사람은 어디에 있는가?  하고 보고 보고 보면 어떤 곳도 없습니다. 고통 받는 한 물건도 없습니다.

 

참선 경험을 시작한 저에게 큰 경험이었습니다. 깊이 있게 들어가 보면 고통을 일으키는 곳은 아무 데도 없구나 하고 느꼈습니다. 여러분이 느끼는 통증 그 자체 속으로 들어가 보면 아무 것도 없습니다. 고통 그 자체로는 실체가 없습니다. 이 막대를 우리가 경험하는 고통의 길이라고 가정하고 오롯이 고통이나 통증 속을 관하면 마치 한 점처럼 모입니다. 이해가 되십니까?

 

아이고! 너무 힘들어. 언제쯤 끝날까? 라고 생각할 때 이 모든 것이 고통의 길이입니다. 그래서 고통이 따릅니다. 그러나 제가 속가에 있을 때 경험했듯이 고통 그 자체를 들여다 보면 실제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냥 텅 비었을 뿐입니다. 이는 어떤 신비로운 명상적 경험이 아닙니다. 어렵지 않습니다. 달마께서는 아무 것도 없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참선할 때 내면을 관하면 처음엔 고통이 대상으로 존재합니다. 그 다음엔 주체인 나로 존재합니다. 고통 받는 내가 누구인가? 하고 주체를 관하면 아무 것도 없습니다. 말 그대로 아무 것도 없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게다가 주체가 겪고 있는 대상 즉 통증도 들여다 보게 되면 텅 비었습니다. 직접 한 번 경험해 보십시오. 아주 흥미롭습니다. 어쨌든 퉁증을 피해갈 수는 없습니다. 흔히 그러듯이 통증을 외면하지 마시고 한 번 잘 들여다 보십시오. 그 자리에 대고 물어보세요.

 

통증 느끼는 놈이 누구냐? 결재뿐 아니라 평상시에도 느끼는 건데요. 우리 몸뿐 아니라 감정 즉 화도 어떤 주기가 있습니다. 우리는 화라는 감정이 실재한다고 믿습니다. 그렇게 믿으면 화에 힘을 실어주는 꼴입니다. 사실이라고 믿으면 사실이 됩니다. 거기다 대고 화내는 것이 무엇이냐? 하고 물으세요. 화를 어떤 대상으로 삼고 관하기 보다는 도대체 화란 놈이 어디서 왔는가? 하고 계속 관하면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알아차리게 됩니다. 아무 것도 없이 텅 비었을 뿐입니다.

 

달마의 의미가 바로 이 것입니다. 이는 어떤 이론도 아니고 배워서 믿는 가르침도 아닙니다. 여러분 경험으로 직접 체득해야 하는 것입니다. 실제 경험을 통해 간파해야 하는 것입니다. 바로 우리 코 앞에 놓여있습니다. 집착을 끊고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본다면 생사에서 조차 자유로워질 것이다. 그리고 모든 것을 변화시킬 것이며 걸림없는 영적 에너지를 지니게 된다. 그리고 어디에 있든 평안할 것이다. 이를 조금이라도 의심한다면 그 어느 것을 통하더라도 결코 알 수 없을 것이다. 그대는 차라리 아무 것도 안 하는 것이 나으리라. 행동할 때마다 생사의 굴레를 피할 수 없게 될 것이다.

 

그러나 본성품을 보기만 한다면 그대는 부처이다. 비록 백정으로 생업을 삼는다 하더라도 성품을 보고나면 그가 곧 부처입니다. 그러나 백정은 짐승을 도축하는 업을 짓는데 그런 그들이 어떻게 부처를 이룰 수 있습니까? 나는 오직 성품을 보는 것에 대해서만 말할 뿐이다. 업을 짓는 것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무엇을 하든 우리의 업은 우리를 잡아두지 못한다. 업은 우리를 구속하지 못한다. 아주 중요합니다. 업은 우리를 구속하지 못합니다. 허공을 거머쥘 수 없듯이 잡아둘 것이 아무 것도 없는 거겠죠? 허공과 같을 진대 업이 무슨 수로 우리의 성품을 구속하고 가로막을 수 있을까요? 어떻게 텅 빈 것이 텅 빈 것을 억누릅니까? 어불성설입니다.          

        

그러나 중생들은 업이 우리를 구속한다고 믿습니다. 슬픈 업 화난 업 두려운 업 후회 업 의심 업 야망 업 욕망 업 등 한 생각을 일으키게 되면 그 순간 무슨 업이든 우리를 가로막게 됩니다. 그러나 생각하는 놈이 누구냐? 라고 물으면 업이 머물만한 곳이 없습니다. 말로 이해하는 것은 여러분께 도움이 안됩니다. 스스로 내면을 관해야 합니다. 스스로 체득한 것이 실제 여러분 살림살이가 됩니다. 제 입을 통해 마구 쏟아지는 어떤 미사여구도 재미있는 이야기도 전혀 도움이 안됩니다. 그저 말 잘 하는 말쟁이 정도 밖에 안되겠죠?

 

그러나 실제로 아하! 체득하면 그 때는 뭔가 소용이 있을 겁니다. 나는 무엇인가? 또는 관세음보살 또는 옴마니반메훔. 입으로만 반복하면 안 됩니다. 옴마니바메훔 하는 놈이 누구냐? 관세음보살 하는 놈이 누구냐? 저 아이소리 듣는 놈이 누구냐? 누가 듣느냐? 한 번 물어보면 아무 것도 없습니다. 오로지 텅 비었을 뿐입니다. 아무 것도 없어요. 이 것이 우리의 성품입니다. 또 실수를 범했네요.

 

집착을 끊고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본다면 생사에서 조차 자유로울 것이다. 그리고 모든 것을 변화시킬 것이며 걸림 없는 영적 에너지를 지니게 된다. 그리고 어디에 있든 평안할 것이다. 이를 조금이라도 의심한다면 그 어느 것을 통하더라도 결코 알 수 없을 것이다. 그대는 차라리 아무 것도 안 하는 것이 나으리라. 행동할 때마다 오히려 생사의 굴레를 피할 수 없게 될 것이다. 그러나 본성품을 보기만 한다면 그대는 부처이다. 비록 백정으로 생업을 삼는다 하더라도.

 

이 것이 요점입니다. 자신의 성품을 보는 것! 이 것뿐입니다. 바로 이 것이 부처입니다. 처음이자 과정이고 그리고 끝입니다. 성품을 발견하는 것 이 것뿐입니다. 무엇을 하던지 업은 우리를 가로막을 수 없다. 시작도 없는 다겁생래 이래로 사람들은 제 성품을 바로 보지 않았기 때문에 지옥에서 고통 받았다. 단지 성품을 보지 못했기 때문에 지옥을 만들어 냅니다. 사람이 업을 짓는 한 끝없이 생사윤회를 반복한다. 그러나 성품을 알아차리게 되면 더 이상 업을 짓지 않는다.

 

성품을 보지 않았다면 그가 백정이든 아니든 상관없이 염불로도 자신을 업으로부터 구할 수 없다. 그러나 성품을 보고 나면 모든 의심은 사라진다. 백정의 업이라 해도 전혀 상관없다. 실제로 업<Karma>이나 성품은 둘이 아닙니다. 본래 공한 실체는 같습니다. 업도 공하고 성품 또한 본래 공합니다. 그러나 생각이 일면 업이 실제라고 믿습니다. 슬픈 업은 슬픔을 느낍니다. 좌절한 업은 좌절감을 느낍니다. 욕망의 업은 욕망을 느낍니다. 욕망이 실재라고 생각하면 그 것이 업이 됩니다.

뭔가가 비었다고 느낍니다. 이는 오직 생각 때문에 말이죠.

 

데카르트가 말하길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보다 적절하게 말을 바꾸면. 나는 생각한다 고로 생각을 일으킨 나  라는 것이 존재한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가 존재한다. 미국적 나는 미국적 사고로 인해 존재합니다. 한국적 사고는 한국적 나를 만듭니다. 우리나라라는 생각. 미국적 생각으로 미국적 나 즉 우리가 최고야! 우리는 초강대국이야! 라는 생각을 만듭니다. 이 것뿐입니다. 오직 생각이 만들어낸 것뿐입니다. 그러나 본질은 텅 비었습니다. 불법은 성품의 본래 경험으로 돌아가라는 겁니다.

 

말이나 행동 견해 개념은 수시로 변화하는 마음의 작용이다. 모든 움직임이 바로 마음의 움직임이다. 움직임은 마음의 작용이다. 움직임과 별개로는 마음도 없고 마음과 별개로 움직임도 없다. 그러나 움직임은 우리의 참 마음이 아니다. 마음도 움직임이 아니다. 움직임은 본래 마음이 없고 마음 또한 본래 움직임이 없다. 그러나 움직임은 마음 없이 존재하지 않고 마음 또한 움직임 없이 존재하지 않는다. 만약 한 생각 일으키면 그 것이 마음이고 생각입니다. 그 생각이 바로 마음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공합니다. 이 뿐입니다.

 

마음이 움직이고 거기에 집착하면 달마께서는 그 것을 움직임이라 했습니다. 그러나 사실상 움직임이 전혀 없습니다. 한 생각 일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생각을 쫓아다니기 바쁩니다. 여러분 지금 저처럼 이 앞에 손가락 하나 세워보세요. 손가락은 움직이지 않습니다. 먼저 저를 보고 난 다음에 따라 해보세요. 손가락은 그대로 두고 얼굴을 도리질 쳐보세요. 아주 빠르게 돌립니다. 도리질 치면서 손가락을 보려고 해보세요. 계속합니다. 계속~. 이제 그만요. 마음이 움직였습니다. 그렇죠? 도리질 칠 때마다 마치 손가락이 움직이는 것처럼 느꼈을 겁니다. 손가락이 움직이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인터뷰할 때 자주 해 봅니다. 어떤 분이 말하길 저는 생각이 한 시도 가만있지 않습니다. 온 세상이 항상 움직이고 변하는 것 같습니다. 저는 어린애처럼 일어서서 원을 그리며 계속 돌라고 합니다. 계속 뱅뱅 돕니다. 불법은 일체 모든 것이 있는 그대로 본래 고요하다고 합니다. 결국 여러분이 마음을 고요하게 하지 못함입니다. 절대 마음을 고요하게 다스리지 못합니다. 왜냐 하면 본래 아무런 동요 없이 고요하니까요. 여러분의 일상은 모든 것이 움직이는 것처럼 보입니다. 항상 바쁘게 돌아가니까요. 그러나 여기에 집착하면 온 세상이 바삐 움직이는 것 같이 보입니다. 현기증을 느낄 정도로.

 

그래서 요즘 사람들은 인간관계나 마음에 질환이 많이 생깁니다. 모든 것이 너무 빨리 돌아가듯이 보이니까요. 이는 마치 원을 그리며 뱅뱅 도는 사람처럼 방이 돈다고 생각하는 것과 같습니다. 여러분 한 번 해보세요. 방이 아주 빨리 뱅뱅 돌겁니다. 그러다 갑자기 멈추면 취한 사람처럼 정신 못 차립니다. 그러나 움직인 건 아무 것도 없습니다. 나는 조용히 앉아서 보고만 있었어요. 나는 절대로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창도 바닥도 벽도 절대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생각과 경험 개념에 집착하는 사람에게는 온 세상이 움직이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일체유심조! 즉 일체 모든 것은 마음 하나로 비롯되었다고 하는 것이죠. 마음에 마음의 경험에 집착하면 온 세상이 온 세상이 계속 돌고 돌 뿐입니다. 여러분의 마음도 돌고 돌 뿐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돌기 때문에 그래서 고통받는 것이죠.

 

방에서 한 번 돌아봤자 최소 한 30초 정도 아님 그 이하겠죠? 그런데도 멈추기 전에 많은 사람들이 쓰러졌습니다. 정말 넘어졌습니다. 저는 가만히 앉아서 재미있게 지켜봤을 뿐입니다. 뱅뱅 돌다가 넘어지는 거죠. 왜 넘어지지? 방이 온통 돌아서 라고 하겠죠? 아니요. 방은 가만히 있었는데요. 방은 절대로 움직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그 경험에 집착하기 때문에 방이 돈다고 믿는 것입니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이 방이 통제불능으로 뱅뱅 돌았다고 생각해 그러므로 나도 뱅뱅 돌았어. 일체 모든 것은 이 마음 하나로 비롯되었다. 마음이 움직임을 경험하면 세상이 움직이는 것입니다. 슬픔에 집착하면 온 세상이 슬픕니다. 시기에 사로잡히면 모든 것이 불만스럽습니다. 통증 고통 화에 집착하면 모든 것이 고통스럽습니다. 그래서 불법은 정말 놀랍습니다.

 

다른 상황 즉 심리학의 경우는 뱅뱅 도는 그 자체를 분석해서 해결방안을 모색합니다. 이 것이 불법과 심리학의 차이입니다. 심리학이 엉터리라는 얘기는 아닙니다. 심리학을 공부하고 싶다면 그래도 문제될 것 없겠죠. 그러나 이는 마치 누군가는 뱅뱅 돌고 이를 지켜보는 사람은 이 회전을 분석합니다. 누가 회전시키죠? 돌면 어떤 감정적 영향을 끼치나요? 회전할 때 기분이 어때요? 좀 울어보세요. 다 좋습니다. 그러나 회전에 대한 분석은 근본적으로 회전을 멈추게 할 수 없습니다.

 

회전에 대한 이해 즉 이 이야기를 통해 아시겠지만 불교는 회전에 대해 신경 쓰지 마라고 합니다. 그만! 그냥 멈춰! 그리고 원래 자리로 돌아가는 즉 모든 생각을 내려놓으라고 합니다. 이 것뿐입니다. 생각을 억지로 누를 필요 없습니다. 그냥 생각을 흘려보내세요. 그러면 더 이상의 회전은 없습니다. 성냄! 내려놓으세요. 그러면 더 이상 화는 없습니다. 화는 있지만 그러나 공합니다. 즉 화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잡고 늘어지면 실재하는 것입니다. 간단하죠?

 

불법은 일체 모든 것은 오직 마음으로 비롯되었다. 즉 일체유심조! 입니다. 최상승의 가르침입니다. 이를 아셨으면 어떻게 하면 되죠? 나는 무엇인가? 이렇게 지극하게 물으면 아무 것도 없습니다. 슬프고 화나는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아주 간단합니다. 아시겠죠?

 

부처는 그대의 진신 즉 본래 마음이다. 이 마음은 모양도 특징도 인과도 힘줄도 뼈대도 없다. 이는 마치 허공과 같다. 이 얘기 아마 5백 번 정도 했을 것 같네요. 마음은 마치 빈 허공과 같아서 손에 쥘 수 없다. 이는 유물론자나 허무주의자의 마음이 아니다. 이 부분 흥미롭네요. 이 것은 허무주의가 아닙니다. 마음이 없다. 일부에서는 불교를 허무적이고 부정적이라고 내몰기도 합니다. 그런 것이 아닙니다. 불법은 분명히 과학적입니다. 실제 과학입니다. 자신을 한 번 잘 들여다 보세요. 아무 것도 없습니다. 이를 알면 자유입니다. 대상적 물질주의가 아닌 유물론적 사고와 물질 마음의 함정에서 자유로워집니다. 아무 것도 없는 데 어떻게 구속하고 함정에 빠뜨릴 수 있겠습니까?

 

아무 것도 없습니다. 유물론적이나 허무주의적 마음이 아니다. 여래를 제외하고는 중생도 미혹한 자도 그 어느 누구도 이를 알지 못한다. 그러나 이 마음은 지수화풍 사대로 생긴 육신의 바깥 어딘가에 있는 것이 아니다. 마음이 몸을 떠난 어디 다른 곳에 있는 것이 아니란 말씀이죠?

 

마음이 없이 우리는 움직일 수 없다. 육신은 자각이 없다. 이 육신은 자성이 없습니다. 식물이나 바위처럼 육신은 자성이 없다. 그런데 그 자체로 어덯게 움직이겠는가? 움직이는 것은 마음이다. 이 것도 역시 말입니다.

 

말과 행동 견해나 개념은 모두 움직이는 마음의 작용들이다. 그러니 여러분의 생각에 집착하지 마세요! 달마의 가르침은 모두 이 얘기 뿐입니다. 아휴~ 이 법문 그만 해야 하겠어요. 또 같은 얘기만 계속 반복하네요. 선은 정말로 지름길입니다. 왜냐 하면 개념적인 이해를 요구하지 않기 때문이죠.

 

티벳 불교를 연구하는 제 친구들이 꽤 있는데요. 티벳 불교는 전통이 있고 전세계 수 백만의 가없는 중생을 이롭게 하는 훌륭한 가르침이죠. 그러나 Zen은 좀 다릅니다. 불법에도 마음의 요체에 도달하기 위한 방편으로 이해를 중점적으로 해서 접근하는 종파가 있습니다. 마음이란 이렇고 저런 것이며 마음을 이루는 구조는 이러이러 하다는 식으로 이해를 필요로 합니다. 탱화나 그림에 나온 것과 같은 모양이며 신의 규칙은 이러저러 하고 구조는 이러저러 하고 이 모든 상세한 교리는 달마께서 앞에서 말씀하신 이해와 생각이 닿을 수 없는 곳에 이르기 위해 이해를 사용할 뿐입니다.

 

선은 독특합니다. 왜냐 하면 이해를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이죠. 생각이 닿을 수 없는 영역에 대한 경험. 그 것만을 가리킬 뿐입니다. 이 것뿐입니다. 바로 이 곳. ! 이 것뿐! 선은 이 경험만을 요합니다. 아주 단순하죠? 어려워 보일 수도 있겠지만요.

 

그러므로 경전은 우리에게 움직인바 없는 움직임 떠난바 없는 떠남 보는 바 없는 봄. 보는바 없는 봄. 웃은바 없는 웃음. 들은바 없는 들음. 아는바 없는 앎. 즐거운바 없는 즐거움. 걷는바 없는 걸음 머무른바 없는 머무름에 대해 말하고 있다. 경에 이르기를 언어를 초월하라. 생각을 초월하라. 우리는 이를 일컬어 생각 이전의 자리라고 부릅니다. 심플하게 오직 모를 뿐! only don’t know.

 

道 우리의 길입니다. 기본적으로 보고 듣고 아는 것은 완전히 텅 비었다. 여러분의 성냄과 즐거움은 모두 꼭두각시 인형의 고통과 다를바 없습니다. 너무 괴로워! 너무 비참해! 죽고 싶어! 본인에겐 고통이 당장 실제 같지만 제대로 알아차리면 사실 여러분의 고통이 아닙니다. 마치 꼭두각시 인형이 받는 고통과 같아요. 이 고통은 독립적인 실체가 없습니다. 오직 마음에 의존하여 생겨났을 뿐! 마음을 떠나서는 존재하지 않을 뿐더러 여러분도 원하지 않는 것이잖아요.

 

어떤 사람이 힘들어하면 우리는 가끔 아이고! 왜 저렇게 힘들어 하는 거야! 바보같이! 그럴 필요 없는데. 참 답답해! 반면 막상 자기에게 그런 일이 닥치면 넌 이해 못해. 네가 나를 알아? 실제상황이라고! 라고 하죠? 그렇습니다. 실제 꿈입니다. 일어나는 모든 생각에 집착하지 마세요. 고통이 일면 고통 받되 절대로 집착하진 마세요. 그러면 고통은 점점 사라집니다. 반면 그 것이 실재라 믿고 물고 늘어지면 점점 더 고통만 따를 뿐입니다.

 

한 번은 스승님께 제가 여쭈었습니다. 큰 스님께서는 매일 아침 화계사의 4층 선방에 오셔서 영어로 법문을 해주셨는데요. 제자들이 질문이 있으면 대답해주시곤 했습니다. 큰 스님은 항상 명쾌하고 간명했습니다. 하루는 제가 질문을 드렸습니다. 여러분도 테이프로 직접 들을 수 있습니다. 스님 그렇다면 인간은 왜 고통 받습니까? 스님의 대답은 너무 명쾌했습니다. 제가 하는 그 어떤 말도 큰 스님의 이 한 마디 보다는 명쾌하지 못할 거예요. 가능하다면 직접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그냥 한 문장입니다. 아까 8글자보다 반이나 짧은 4글자! 다음은 2글자. 결국은 이 것으로 끝내버립시다. !

 

저는 물었습니다. 이런 훌륭한 가르침이 있는데 왜 인간은 고통받습니까? 성품이 공하고 고통도 실재가 아닌 것을 아는데 왜 고통받습니까? 하자. 왜냐 하면 그들이 고통을 좋아하거든 하고 웃으셨지만 재미있어 하신 것이 아니라 너무 아이러니 해서 그랬던 거죠. 인간이 왜 고통을 받을까요? 왜냐 하면 고통 받길 좋아하거든. 고통을 즐기게 된다. 습관이 되어버린 것이죠. 고통을 겪으면서 강해지고 살아있다는 존재감을 느끼는 일종의 습관이죠.

 

아무도 나를 함부로 할 수 없다는 강력한 에너지를 느끼기도 하고요 누구도 날 건들 수 없어. 아주 심한 고통도 참는 걸! 내 인생은 의미심장 해! 너희들은 나를 모르지! 내가 왜 고통을 즐기는지 너희들은 모를 것이다! 이런 마음일 것입니다. 인간은 왜 고통 받을까요? 고통을 좋아하니까! 상당히 일리있는 말이죠? 그런가요?

 

경에 이르기를 언어를 초월해야 한다. 생각을 초월해야 한다 고 했다. 기본적으로 보고 듣고 아는 것은 완전하게 텅 비었다. 너의 화 즐거움 고통은 마치 꼭두각시가 느끼는 것과 같다. 살펴볼 수는 있어도 한 물건도 찾아낼 수 없을 것이다. 전에 언급했던 이야기와 같은 맥락입니다. 제 무릎의 통증이 엄청났습니다만 무릎도 제 생각도 모두 고통스러웠지요. 왜냐 하면 참선 중에 꼼짝도 못하게 했거든요. 움직이면 입승스님이 때리니까. 짜증나잖아요. 고통이 진짜라고 믿으면 고통스러워질 수 밖에 없죠.

 

그러나 내면을 관하고 고통이 공함을 알면 달마의 말씀처럼 꼭두각시의 그 것과 같이 고통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아요! 진짜로! 고통이 시작되는 곳도 없고 고통 그 자체를 제대로 직시해 봐도 공 합니다. 말 그대로 찾을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누군가 고통에 시달릴 때 그 사람의 몸을 가르고 열어봐도 고통이라는 놈은 흔적도 찾아볼 수 없겠죠? 물론 병증은 육안으로 감지가 되지만 병증 자체는 고통과는 별개입니다. 고통 그 자체를 바로 봐 보세요. 공함을 볼 수 있을 겁니다. 네가 아무리 찾아봐도 결국 한 물건도 찾아낼 수 없을 것이다. 지금 제 얘기를 들어서 아시겠지만 앞으로 여러분이 실제로 체득할 수 있는 경험이 될 것입니다.    

 

경에 이르기를 악행은 고통을 낳고 선행은 복을 짓는다. 성내는 사람은 지옥으로 가고 즐거운 사람은 극락으로 간다. 그러나 즐거움과 노여움이 본래 공함을 알고 이를 내려놓는다면 그대는 업으로부터 자유로워질 것이다. 마지막 문장 엄청납니다. 성품을 보지 않고서는 경전의 인용도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한다. 그러니 달마어록에 대해 들은 내용이나 TV내용을 돌아가서 친구들한테 강요하지 마십시오. 친구한테 읽어주지도 마세요. 아무 도움이 안 될 거에요.

 

나는 계속 설법할 수는 있다. 마음 보는 이 설법을 계속할 수는 있겠지만 여기서 그만 두겠다. 마지막 문단이었습니다. 성경이나 코란 팔만대장경에 보시면 나쁜 짓은 고통을 불러오고 착한 일은 복을 불러온다고 하죠. 악행은 지으면 지옥으로 가고 선행을 쌓으면 천국으로 갑니다. 성내는 사람은 지옥행이고 즐거운 사람은 천당행이다. 그러나 즐거움과 노여움이 본래 공함을 안다면 무엇이든 성냄이 본래 공함을 안다면 즐거움이 본래 공함을 본다면 아픔이 본래 공함을 본다면 슬픔이 본래 공함을 안다면 좌절 질투 두려움 걱정 등의 내면을 제대로 직시하고 텅 비었음을 인식하고 이를 내려놓는다면 바로 그 순간! 그대는 모든 업으로부터 자유로워질 것이다. 오직 그 순간만이라도!

 

스승님께서는 업으로부터의 자유에 대해 말씀하시곤 했습니다. 업으로부터의 자유! 업으로부터의 해방은 자신의 업을 제대로 인식하는 것에서 출발한다고 하셨습니다. 종종 저희가 어떻게 업에서 자유로울 수가 있습니까? 라고 물으면 그렇게 자유를 원한다면 자신의 업을 제대로 알아야 한다고 하셨어요. 그 다음은 자신이 알고 있는 그 업에 집착하지 말아야 하겠죠? 달마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일체가 공함을 알고 내려놓으란 말씀입니다. 업에 끌려다니지 마시고 그러면 자신의 업을 일체중생을 위해 활용할 수 있습니다. 대단하지요?

 

업을 인식하고 이가 본래 공함을 알고 나서 모두 내려놓고 대신 이 업을 제대로 사용하면 고통 받는 모든 사람을 위해서 말입니다. 고통 그 자체는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아닙니다. 문제는 업에 얼마나 집착하는가? 입니다. 이 것이 마음을 흐리게 합니다. 이 것뿐입니다. 여기까지가 혈맥론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여러분의 성품을 발견하지 않고서는 TV 채널이나 여타 종교방송에서 하듯이 경전의 인용만으로는 전혀 도움이 안됩니다.

 

오늘 지하철 타고 서울역에서 화계사까지 오는 길에 멋진 신사분이 머리로만 알고 있는 경을 인용하여 저에게 말했지만 저에게는 전혀 도움이 안되었어요. 단지 본인의 업만 계속한 것이죠. 나한테 흥미로운 것. 과연 그 것이 내 삶을 도울 수 있을까요? 그러나 우리의 본성품을 깨닫게 된다면 누구를 만나더라도 좋은 하루 되세요 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겠죠? 사실상 이 말 한 마디가 성경보다 팔만대장경보다도 훨씬 낳습니다.

 

달마의 혈맥론 이 책 자체로는 하나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이 자체로 공부 삼아야 할 관심사가 아닙니다. 솔직히 저는 달마대사의 경전에 아무 관심이 없어요. 전혀 관심 없습니다. 수 차례 경을 인용했지만 그 대목들이 기억나지도 않습니다. 기억력이 아주 나쁘거든요. 이 책을 읽으면서 조금이라도 발심을 하셨으면 책 내용을 그냥 잊으세요! ! 이 것이 아니었구나. 어떤 것도 나를 구할 수 없구나. 돈 명예 두려움 화 걱정 권력이 아무리 많아도 내게 아무런 도움이 안 된다는 거.

 

내면의 나를 직시하지 못한다면 종교도 역시 아무 쓸모가 없습니다. 오직 내 안의 진리만이 나를 구원합니다. ? 왜냐 하면 나는 이미 구원받았으니까요. 다른 말로 나는 이미 완전한 존재이니까요. 어떤 것도 무엇을 구원할 수 없습니다. 이미 구원되어 있기에! 그 다음 문제는 어떻게 모두를 위해 살아갈 것인가? 이죠. 일체중생을 위해서! 이 것뿐입니다.

 

달마의 가르침은 달마의 가르침에 관한 것이 아닙니다. 입을 여는 것 자체로 엄청난 실수를 범한 거나 같아요. 말을 하면 할수록 말하는 업만 지을 뿐. 이제 TV에 까지 나와서 떠들어대지 않습니까? 이제는 떠들다가 TV 시청하는 업까지 짓고 있습니다. 큰 과오입니다. 그러나 스승님의 말씀처럼 업을 제대로 직시하고 그 업에 집착하지 않으면 일체 중생을 위해 그 업을 굴려 활용할 수 있습니다. 이러하니 여러분! 모두 이 가르침을 거울삼아 자신의 내면을 가만히 바라보십시오. 나는 무엇인가?

 

그러면 이 가르침이 무엇인가 스스로 느낄 날이 있을 것입니다. 내면을 바라보지 않으면 이 모든 것은 입술의 들썩거림에 불과합니다. 그림자 세상이라고 할까요? 제가 내뱉은 모든 말이 여러분의 성품을 가리는 그림자에 불과할 것입니다. 바라건대 이 말을 거울삼아 내면을 바라보십시오. 고해의 바다 한 가운데서 완전한 평화를 찾을 것입니다. 그 때 일체 중생을 도울 수 있습니다.

 

그러면 지하절에서 누군가 다가와 재미있는 말을 건네도 전혀 성내는 마음이나 걱정하는 마음이 일지 않고 흔들림 없이 좋은 하루 되십시오! 할 수 있을 것입니다.그 때 제대로 나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 뿐입니다. 참석해주신 여러분 대단히 감사합니다. 몇 분들의 건의가 있어 다 주는 달마대사의 불승론을 살펴보겠습니다.

이상 현각스님 달마어록6 강론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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