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 6. 9. 16:09ㆍ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달마혈맥론
달마대사는 인도와 중국을 거쳐 한국으로 이어지는 선맥의 초조로 알려진 분이며 중국 선종의 창시자이기도 합니다. 오늘 이야기는 이론적인 것이 아닙니다. 저는 학구적이지도 않고 교수도 아니며 또한 불교학자도 아닙니다. 달마대사에 대한 연구로 박사학위도 받지 않았습니다. 사실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불법 선 또는 달마대사와 같은 것에 대해서는 박사학위가 필요치 않습니다. 이 모든 것은 우리의 본성품을 가리키고 있을 뿐이지요.
자 그럼 우리의 본성품에 대해서 달마대사는 어떤 가르침을 주셨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솔직히 이 분 가르침에 대해 저는 많은 실수를 범할 것입니다. 이 가르침에 대해 입을 여는 것 그 것 자체로 이미 엄청난 실수이기 때문입니다. 달마대사의 가르침을 제자들이 글로 남긴 것 또한 큰 실수로 선은 우리의 근본 마음을 직지 바로 가르키는 것인데 이렇게 말이나 글로 하는 것은 이미 실수인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종교들이 그림 또는 글로도 마음자리 또는 신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고 강조해온 것입니다. 그 것이 신성이던 어떤 깨달음의 경지든 간에 말로 표현했다면 그 건 이미 그르친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께 입을 열어 범하게 될 앞으로의 저의 실수에 대해 미리 용서해주실 것을 기대하며 앗! 벌써 입을 열었네요. 이왕 이렇게 입을 열었으니 여러분의 수행에 대한 발심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수 있다면 가치있는 일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늘은 달마대사의 혈맥론 법문을 택했는데요. 이 것이야말로 달마대사의 핵심 가르침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아마 여러분 달마대사에 대해서는 이미 그림을 통해 잘 알고 계실겁니다. 좀 무시무시하고 누더기를 걸친 모습에 눈은 부리부리하게 크고 아주 강렬한 인상이죠. 그 것은 선에 대한 그의 굳건한 마음을 표현하기 위해 그렇게 그려진 것 같습니다. 그 당시 중국은 대부분 어떤 의식이나 형식 또는 신앙에 귀의하는 것들을 강조하던 시기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우리의 본성품을 직지 곧바로 바라보도록 가르친 것입니다.
경험해 보셨겠지만 버스 터미날이나 비행기에서 잡지난 여흥거리 없이 그냥 묵묵히 앉아만 있어야 할 때 왜 곤욕스럽지 않으십니까? 아무 것도 할 게 없을 때 말이죠. 사실 오늘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아무 것도 할 거리가 없을 때는 조금 불안해지기도 합니다. 그래서 달마대사는 굳건히 자신의 내면에 집중하라고 강조했습니다. 다른 것은 아무 것도 하지 말고요. 생각이나 개념 또는 어떠한 모양에도 집착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우리의 마음자리를 보라고 한 것입니다.
이 가르침을 통해 여러분 스스로의 내면을 있는 그대로 주시하시길 우리 모두의 문제를 해결하시길 바랍니다.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달마대사라는 인물 그 자체도 아닙니다. 그 분의 가르침 그 자체도 아니며 설법하시는 곳에는 많은 대중이 모여 있었죠. 항상 진리에 대해 설하셨기 때문에 다만 오직 이 가르침을 통해서 어떻게 우리의 마음을 볼 것인가? 바로 이것에 초점을 맞추겠습니다.
이 가르침은 거울과 같습니다. 우리가 앞으로 나누게 될 달마대사의 가르침은 단지 거울일 뿐입니다. 거울 그 자체는 흥미롭지도 않으며 그 자체로 특별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거울은 특별한 기능이 있습니다. 있는 그대로 비추어주는 것이지요. 이게 바로 거울의 역할입니다. 제가 하는 말이 옳던 그르던 간에 이 거울을 통해서 여러분 스스로의 모습을 반조해 보시기 바라며 앞으로 입을 열어 범하게 될 제 실수를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자 그럼 시작해 볼까요? 잘 아시다시피 달마대사는 인도의 반야다라 밑에서 수행한 아주 유명한 승려였으며 서기 400년경 중국으로 건너갑니다. 배를 타고 말레이지아 국경 근처를 건너가 중국에 도착하는데 3년이 걸렸다고 합니다. 달마께서 중국에 도착해 보니 이미 그곳에는 불교가 성행하고 있었습니다. 많은 분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달마께서 불법을 들여온 것이 아닙니다.
당시 중국에는 이미 2000개가 넘는 상당히 많은 절이 있었습니다. 사찰이 200개나 되고 비구와 비구니 승려 수가 36000에 이르렀습니다. 아마 현재 한국 조계종에 소속된 승려 수의 3배 수나 그 이상에 해당될 겁니다. 중국에서 그가 수행을 시작한지 4-5년 정도 되었을 때 중국의 불교는 엄청나게 성장했습니다. 중국에 도착한지 채 3년도 되기 전에 중국내 사찰 수가 30,000개가 되었습니다. 삼만이요! 그리고 승려 수는 2백만에 달했습니다.
물론 나라가 크긴 하지만 불교가 굉장한 속도로 퍼져 나갔던 것이지요. 어쨋든 달마대사가 중국으로 불법을 들여온 것이 아닙니다. 반면에 중국에 당도해서 본 당시의 중국불교는 소위 말해서 주술적인 행위가 만연했습니다. 달마대사는 그런 식으로 왜곡된 불법의 모습을 직시했고 이들을 올바르게 가르칠 방도를 생각하셨습니다. 그는 선승<수행승>이었기 때문이죠. 진정한 불법은 어떤 의식이나 형식에 중점을 두는 것이 아니라 오직 우리의 본성품을 있는 그대로 관조하는 것임을 분명히 아셨고 그의 모든 가르침은 이 것에서 벗어나지 않으셨습니다.
자 그럼 한 번 볼까요! 먼저 달마대사에 관한 유명한 이야기를 하나 해보겠습니다. 많은 분들이 달마대사의 가르침을 공부하신 적은 없어도 이 이야기는 많이 들어보셨을 줄 압니다. 달마대사가 양무제를 만난 이야기입니다. 양의 무제 시기는 강력한 왕조였으며 그의 불교에 대한 지원은 대단했습니다. 아주 강력한 후원자였는데 중국에서 불교가 그만큼 확장한 데에는 양무제의 후원이 한 몫 했다 합니다. 엄청난 양의 돈을 기부하고 경전을 출간하고 사찰을 짓고 그 당시는 인쇄기계가 없어서 일일이 사람의 손으로 작업을 해야 했는데 이 모든 불사들에 어마어마한 양의 돈을 보시한 것입니다. 이 모든 비용을 국가예산으로 지출했습니다. 그래서 스스로에게 자부심이 대단했습니다.
그 때 인도의 큰 스님 위대한 선승께서 중국으로 건너오셨다는 소식을 접하게 됩니다. 당시 많은 사찰단이 인도를 오갔기 때문에 달마대사가 당도하기 전부터 그에 대해 익히 전해 듣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달마께서 당도하는 대로 궁으로 모시고 오라는 명을 내리고 달마대사는 궁궐을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그저 평범하고 허름한 승복 차림이었습니다. 무제는 상당히 멀리 왕좌에 앉아있었기 때문에 달마대사를 가까이 모셔오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달마대사께 예를 올리고 축원을 받들었습니다. 멀리 인도에서 오신 달마대사님! 제가 이 곳의 황제 입니다. 부디 이 곳 중국 땅에서 편안히 지내시길 바라며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그리고 앞으로 대사님께서 이 곳에서 훌륭한 가르침을 펴실 수 있도록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겠습니다.
저로 말씀드릴 것 같으면 중국불교 발전을 위해 상당히 많은 일을 해오고 있습니다. 수 천개가 넘는 사찰을 지었고 비구 비구니 스님들을 위해 엄청난 양의 돈을 보시했고 수 많은 비구 비구니 강원과 불교대학을 건립했고 수 많은 경전을 발간하는 데 지원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큰 탑들을 많이 세웠습니다. 제가 이 일을 다 했습니다.
어떤 불교경전을 보면 좋은 일을 하면 복을 많이 쌓는다고 하지요. 복 짓는 일이라고 말이죠. 사실 많은 종교단체들이 그 종교를 위해 현금을 내거나 지원을 하면 그 대가로 어떤 영적인 힘을 얻는다고 이야기 합니다. 천국이나 혹은 내세에 말이죠. 성 베드로도 이런 식으로 로마에 큰 교회를 짓기도 했지요. 돈을 내면 지옥에 떨어지지 않고 보상을 받는다는 전도방식으로 말이죠. 그래서 양무제는 달마대사께 제가 이 모든 일을 해냈습니다 라고 말합니다. 아마도 달마대사가 인도에서 왔기 때문에 당신은 공덕을 많이 쌓았습니다 하고 인정하면 정말 공덕을 쌓은 게 되리라 생각했던 모양입니다. 불교의 본 고장인 인도에서 오신 분이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달마대사를 쳐다보면서 제가 불교를 위해 이렇게 많은 일을 했는데요 저는 얼마나 많은 공덕을 쌓았습니까? 얼마나요? 공덕! 영적인 힘을 얼마나 얻었나. 다시 말해 얼마나 위대해졌나 하는 거죠. 달마대사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아무 공덕도 없습니다. 無! 당신은 한 푼 어치의 공덕도 얻지 못했습니다. 제로! 달마대사가 미국인 이었다면 제로라고 하셨겠죠? 하나도 없소! 왕에게 이렇게 말을 한거죠. 그것도 중국의 황제에게 말입니다. 무한한 권력을 가지고 있는 그런 자란 말씀입니다. 그의 말 한 마디로 수 많은 사람을 죽이고 살릴 수 있는 그래도 문제 될 게 하나도 없는 자리에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 황제가 엄청난 충격을 받았습니다.
뭐요!!! 공덕이 하나도 없다고? 말도 안돼! 공덕이 없다니! 좋소 공덕이 없다면 도대체 불법의 근본 대의란 무엇이요? 당신이 추구하는 신성한 진리란 도대체 뭐란 말이오? 당신이 믿는 그 종교의 성스러운 최상의 경지 성취가 무엇이란 말이요? 그러자 달마대사는 성스러운 것은 하나도 없지! 성스러운 것은 하나도 없어! 텅 비었을 뿐 완전히 공하다는 말씀이오. 이 것이야 말로 불교 최상승의 진리지. 신성할 것도 없고 온 법계가 공할 뿐!
그러자 황제는 완전히 넋이 나갔습니다. 지금껏 들은 내용을 도저히 용인할 수 없었던 거죠. 거기다 달마대사는 매우 스스럼 없는 모습이었고 그 앞에 서있는 대신들은 모두 머리를 조아리고 있었습니다. 달마대사는 수 많은 신하들 앞에서 황제를 모욕한 것이죠. 어덯게 감히 그에게 그런 식으로 말하는 것이요? 도대체 당신의 정체는 뭐요? 혹시 달마 행세를 하는 가짜 달마라고 생각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너는 누구냐? 그러자 모른다 나도 그 걸 모르지... 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리곤 자리를 떴습니다.
중국불교의 수준을 한 단계 높이고자 황제를 찾아갔지만 별 소득이 없을 것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신 것이죠. 황제는 오직 불교의 의식이나 모양 사찰 본사 또는 영적 보상을 바라는 즉 영적 예금통장 같은 것에만 집착했기 때문입니다. 어떤 영적 행위를 하고 바라는 복을 쌓는 복 통장 같은 것 말입니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보시를 합니다. 비단 불교 뿐만 아니라 기독교나 이슬람교나 이 밖의 많은 종교들이 착한 일을 하면 천국의 천사가 이 걸 일일이 다 기록하고 또 나쁜 일을 하면 지옥에 있는 악마가 이 걸 또 일일이 다 기록한다고 하더군요. 그리고 선생님들은 자주 요녀석! 너에 대한 기록은 천국 보다는 지옥에 더 많을 꺼다! 좋은 일 많이 하면 천국 가고 나쁜 일 많이 하면 지옥 간다. 이런 것이 다 그런 맥락의 가르침입니다.
불교뿐 아니라 모든 종교의 보편적 이론이지요? 좋은 일 많이 하면 천국 가고 나쁜 일 많이 하면 지옥 간다. 황제도 우리 대다수가 이해할 수 있는 그와 같은 보편적인 믿음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 수행자들 중에도 상당수가 이 같은 마음으로 종교를 믿고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뭔가를 얻고 구하기 위해서 말이죠. 보다 나은 지위 보다 나은 조건을 구하기 위해 신앙생활을 하고 있지는 않으십니까?
양무제도 이런 마음으로 불교를 믿었던 것입니다. 달마대사는 이를 완전히 갈파하신 겁니다. 그래서 황제가 나는 이렇게 훌륭한 일을 많이 했습니다. 이에 대한 복은 과연 얼마나 되는 것입니까? 라고 물은 것입니다. 하나도 없지요~ 이 것이 달마대사의 첫번째 가르침입니다. 복을 얻고자 하는 보시는 정도가 아니다. 영적인 보상 명성을 구하고자 하는 것은 올바른 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두번째 가르침은 황제가 영적인 명성 또는 보상은 하나도 받지 못하고 이러한 불사가 하느님이나 부처님을 기쁘게 하는 것이 아니라면 도대체 불법의 대의는 무엇입니까? 라는 질문입니다. 당신의 신성한 가르침의 요지는 무엇입니까? 황제가 말한 신성은 높고 낮음의 분별에서 비롯된 관념일뿐 그래서 달마대사는 신성한 것은 없다! 불법은 신성한 것에 관한 것이 아니다. 진정한 불법은 온 법계가 청정하게 텅 비어있다는 것 바로 공 도리를 깨닫는 것이다. 공함을 깨닫는다. 보상 등 어떤 것을 얻는 것이 아니고 주고 받는 그런 조건적인 것은 올바른 종교가 아니지요. 경제논리 같은 것이 아니란 말씀입니다. 성스러운 것에 관한 것이 아니라 오직 공함을 깨닫는 것 이 것 뿐입니다.
이에 무황제는 큰 충격을 받은 것입니다. 텅 빈 청정하고 무한한 우주와 같이 공하다는 말을 듣고 말이죠. 그래서 황제는 감히 당신이 누구길래 나에게 그런 식으로 가르치려 하는 게요 하며 그렇게 무례하고 엉터리 같은 달마대사를 믿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도대체 누구길래 어떻게 감히 내게? 도대체 당신의 정체는 뭐냐? 달마대사는 이렇게 대답을 합니다. 오직 모를뿐… 이라고 이 것이 달마대사의 가르침입니다. 영적인 복덕은 그 실체가 없고 대신에 텅빈 그 자리를 바로 보아야 한다. 어떻게 텅 빈 그 자리를 바로 보는가? 한 생각도 일어나지 않는 생각 이전의 마음 바로 이 모를뿐의 마음이 요체인 것입니다.
이 일화에는 3가지<사실 모두 하나의 가르침이지만> 요점이 있습니다. 지금 이 순간으로 되돌아오는 것입니다. 지금 이 순간엔 어떤 영적 보상과 같은 것이 실재하지 않습니다. 취하거나 잃어버리거나 쌓아두거나 줄어 듦이 이 순간에 실재하지 않는단 말씀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지금 이 순간 모든 것은 있는 그대로 본래 공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생각들이 실재로 존재한다고 믿으시겠지만 사실 제대로 보면 없습니다.
지금 살고있는 집이 여러분의 소유물이라고 생각하시죠? 이 손도 자기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아닙니다. 단지 일시적인 형상일 뿐입니다. 물리학에 따르면 지금 이 책상 조차도 완전히 비었다고 말합니다. 현대물리학은 이 책상을 포함한 모든 물체는 그대로 완전히 공하다는 것을 증명했습니다. 여러분의 책상 여기 법당 마이크 우리 육신 소리 냄새 이 모든 물질이 그 본질이 비었다는 것을 입증했습니다. 단지 잠깐 동안 인연따라 그 모습을 나타냈을 뿐입니다.
실제로 물리학적으로 보면 지금 제가 방석 위에 앉아있는 것도 아닙니다. 방석의 소립자와 제 몸의 소립자 에너지가 서로 밀어내고 있는 중입니다. 여러분도 지금 바닥에 밀착해서 앉아있다고 생각하시죠. 그렇게 생각하시겠지만 아닙니다. 여러분이 입고계시는 옷이 몸 위에 걸쳐져 있다고 생각하시겠지만 몸과 지금 여기 방석처럼 서로의 소립자 에너지들이 반대방향으로 밀쳐내고있는 것뿐입니다. 그래서 그냥 방석 위에 앉아있다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물리학적으로도 증명된 사실입니다. 정말로요.
다시 첫째로 공덕도 없고 둘째로 완전한 공을 깨닫는다. 우주의 본질 말입니다. 한 물건도 아닌 불교만의 것도 아닌 우주의 본질 즉 진정으로 공함을 꿰뚫어 보아야 하는 것 그리고 마지막으로 어떻게 볼 것인가? 멀리 있지 않습니다. 현미경도 필요치 않고 MIT에 진학할 필요도 없고 바로 지금 이 자리 우리 내면의 마음을 바로 바라보는 겁니다. 나는 누구인가? 무황제가 달마대사에게 물었듯이 당신 누구요? 그러자 몰라요 모릅니다 하는 바로 이 모를 뿐인 마음을 간직하면 되는 것입니다. 매우 중요한 사실입니다.
달마대사와 양무제가 만난 이 일화를 통해서 실상 여러분은 달마대사의 가르침을 모두 배웠습니다.
바로 이 일화에 모두 담겨있다는 말씀입니다. 공덕도 없고 아무 것도 없습니다. 단지 순수하게 텅 빈 그 자리 오직 모를 뿐인 그 마음을 깨닫는 것 뿐입니다. 그 이야기 속에도 이 것 밖에 없습니다. 나머지 달마대사의 가르침에 대해 뭐라고 계속 떠들어봤자 다 실수일 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법문을 계속 요청하셨기 때문에 저의 실수는 당분간 계속될 예정입니다. 방금 전의 일화는 달마대사의 가르침을 잘 보여줬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가르침들을 어떻게 진정으로 깨달을 수 있을까요? 이론적인 것도 또는 다른 종교와 비교를 하기 위한 개념적인 것도 아닙니다. 그는 과연 무엇을 가르키는 것인가요?
달마대사의 혈맥론 법문을 통해 그가 어떻게 이 문제를 다루었는지 좀 더 살펴보겠습니다. 가지고 계신 교재 9쪽 처음부터 보겠습니다. 달마대사의 혈맥론입니다. 삼세에 걸친 즉 과거 미래의 모든 부처님들께서 언어를 초월하여 마음과 마음으로 가르침을 전하셨다. 이 거 아주 중요합니다. 여러분이 접해본 모든 종교적 일화 말씀 가르침 철학 이 모든 것들은 사실상 말을 사용한 개념이라고 할 수 있겠죠? 불교에서는 과거불 현재불 미래불에 대해 얘기합니다. 선불교에서는 한 번에 모든 것을 깨우치는 것<돈오돈수>과 점진적으로 깨닫는 것<돈오점수>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깨달음에 대한 어떤 정의 같은 것이지요.
그러나 달마대사의 가르침은 참 흥미롭습니다. 과거와 미래의 모든 붓다께서는 말에 구애받지 않고 마음과 마음으로 가르침을 전한다. 우리 본성에 대한 진정한 통찰은 말이나 개념으로 정의할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평가도 내릴 수 없고 판단할 수 있는 성질의 것도 아니지요. 그래서 불교의 가르침을 진정으로 실천하시는 분들은 다른 사람을 평가하지 않습니다. 여러분도 이미 느끼셨겟지만 불교의 가르침은 특별한 데가 있습니다. 불교는 절대 다른 종교를 비판하거나 그들의 경험을 판단하고 간섭하지 않기 때문이죠. 그리고 서로의 수행을 겨루거나 다른 이의 수행에 대해 폄하하지도 않고요 왜냐 하면 내면에 대한 진정한 통찰은 말에 의존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물론 불교적인 개념이나 정의도 마찬가지죠. 가령 누가 깨달음을 성취했다고 합시다. 그럼 불자입니까? 아니면 그렇지 않습니까? 선행을 실천했다면 좋은 불자입니까? 나쁜 불자입니까? 불법은 어떤 말에 의존하지 않습니다. 삼세에 걸쳐 그 모습을 드러내는 모든 것들은 일체 마음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 일체 모든 것! 다 말입니다. 일체유심조! 일체의 모든 것은 오직 마음 작용이라는 것이지요.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일체 모든 현상들 이 것들은 모두 마음이 만들어낸 생각일 뿐입니다.
여러분 과거가 있다고 믿으시죠? 어제 뭔가를 했으니까요. 지난 주 저는 미국에 있었습니다. 지난 주 미국엘 갔다 왔거든요. 그래서 여러분은 제가 지난 주에 미국엘 갔다 왔다고 생각하실 겁니다. 맞죠? 진짜 갔다 왔을 거라고요. 이 생각이 이제 실재하는 현실이 돼 버렸을 것입니다. 하지만 제가 미국을 갔다 왔다고 말하는 것은 거짓 말일 수 밖에 없습니다. 왜냐 하면 그 것은 오직 생각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제가 미국에 가긴 갔지요. 하지만 이 것은 오직 기억으로서만 존재하는 가상일 뿐입니다. 오직 마음이 만들어낸 실체가 없는 생각인 것입니다.
여러분 지금 화계사에 있다고 생각하시죠? 이 것 또한 마음이 만들어낸 것입니다. 누가 여기를 화계사라고 했나요? 그냥 사람들이 화계사라고 부르니까 우리도 그냥 화계사 화계사 하는 겁니다. 누가 당장 내일부터 거꾸로 계화사 라고 부른다면 다음 주부터 아마 일요법문은 계화사에서 라고 이야기 하겠죠? 이와 같이 모든 것들은 마음이 만들어냈을 뿐입니다. 저 위에 날아다니는 새한테 물어볼까요? 여기가 화계사냐? 너 지금 화계사 위를 날고 있지? 새는 그냥 짹짹짹 하면서 날아갈 뿐 화계사라는 생각조차 안합니다. 그냥 이리 저리 날아다닐 뿐입니다.
여기 나무 많은데요. 나무한테도 한 번 물어보세요. 너 화계사 나무냐? 종한테도 물어보세요. 너 화계사 종이냐? 너 종이 맞긴 맞아? 삼세의 모든 것들은 마음이 지어낼 뿐입니다. 미래도 역시 마찬가지 입니다. 내일이 월요일이라고 믿고 있죠? 월요일이라서 모두 일을 시작할 것이고요. 내일 저는 유럽으로 갈겁니다. 웃기는 말입니다. 내일이 도대체 어디 있습니까? 어떤 사람은 내일에 대해 걱정합니다. 웃기는 일이에요. 지금 이 순간 내일은 없는 데도 말입니다. 그러나 있다고 믿기 때문에 내일이 오기도 전에 내일에 대해 미리 걱정합니다.
아주 재미있는 관점이죠? 과거 현재 미래 삼세의 모든 것 모양이 있거나 혹은 모양이 없거나 욕망의 세계 등의 일체 모든 것들은 마음이 만들어낸 것 뿐이에요. 어디를 찾아 헤매도 찾을 수 없는 실재로 존재하지 않는 가상이란 말씀입니다. 이와 같이 모든 것은 마음에서 시작되고 마음에서 비롯되니 과거 미래 모든 부처님께서는 오직 마음과 마음으로 가르침을 주십니다. 문자나 개념을 초월해서 말입니다.
부처님께서 하루는 진리에 대해 법문을 하셨습니다. 진리 말입니다… 진리에 대해서 말씀을 하시려고 말이죠. 교회에 나가도 진리에 대해 많은 얘기를 합니다. 진리에 대해서요. 불교도 진리에 대해 이야기 합니다. 진리란 무엇인가? 도교 유교에서도 진리에 대해 말하고 실천방법을 말합니다. 미국에서도 사우디에서도 어느 곳에서도 진리에 대해서 말을 합니다. 이렇게 부처님께서도 하루 진리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설법하시는 곳에는 많은 대중이 모여 있었죠. 항상 진리에 대해 설하셨기 때문에 오늘은 어떤 법문을 하실까? 하고 기대하고 있었지요. 부처님께서 자리를 잡아 앉으시고 진리에 대해 말씀을 하시려고 합니다.
하지만 부처님께서는 계속 가만히 앉아 계십니다. 그냥 앉아 계실 뿐… 말씀을 안하고 계시니까 사람들은 부처님께서 졸고 계시거나 피곤하신 걸로 여기고 뒷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헛기침을 하기도 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고요하게 깨어 있으셨던 것이죠. 그리고 꽃 한 송이를 집어 들어 보이십니다. 모두들 의아해 하며 올려다 봅니다. 아무도 영문을 모릅니다. 대중의 맨 뒤에 계신 스님 한 분 오직 마하가섭만이 환하게 미소를 지어 보였습니다. 아하! 와~ 대단합니다. 굉장합니다. 부처님 마음과 마하가섭의 마음이 일치된 겁니다. 이 것으로 이미 진리에 대한 법문은 끝난 것입니다.
사람들은 뭔가 불가사의하고 어떤 비밀스러운 가르침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 게 아닙니다. 꽃 한 송이 집어 들었을 뿐 정말 대단하죠? 마음과 생각이 모든 작용을 일으키기 때문에 삼세의 모든 부처님께서는 진리를 전하기 위해 생각을 이용했던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꽃을 집어 들어 올리시고 이 것이 보이느냐고 무언으로 묻고 다시 제자리에 내려 놓습니다. 입도 뻥긋하지 않은채 진리에 대한 법문을 이미 마치신 겁니다. 작년에 살펴봤던 금강경의 어떤 부분을 인용하면 진리는 말로 설명할 수 없다 라는 구절이 있죠? 무슨 뜻이냐고요? 그 대목은 그냥 넘겨버리시고….
모든 것은 있는 그대로 진리일 뿐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진리에 대해 말을 사용하지 않으셨습니다. 모든 것이 마음 작용이고 생각으로 지어냈기 때문에 말을 떠나 진리를 바로 가르키신 겁니다. 그래서 불법의 가르침이 매우 특별한 것입니다. 진리를 바로 보여주니까요. 이 건 우리만의 진리라는 편협함이 없습니다. 오늘날의 세상을 한 번 생각해 보세요. 이스라엘은 이스라엘의 진리를 레바논은 레바논의 진리만을 고집합니다. 수 년전 미국과 한국의 진리는 서로 많이 닮았었습니다. 하지만 부시의 말처럼 미국만의 진리 이 처럼 미국은 미국대로 한국은 한국대로 자신만의 진리를 지닌거죠. 진리가 서로 갈라선 겁니다. 북한은 북한대로 남한은 남한대로 자신들만의 진리가 있고 정당들은 자신들만의 진리를 고집합니다.
이렇게 상황마다 갈라지는 건 진정한 진리가 아니지 않겠습니까? 망상적 진리 혹은 개념적인 진리일 뿐. 부처님은 이렇게 가르치지 않으시고 진리를 곧 바로 가르치신 것이죠. 한 번은 세종문화회관에서 제가 법문을 할 때 질의응답 시간이었습니다. 이해를 돕고자 그 날 법회에서 예수님과 유교 이야기를 인용했는데 점잖게 차려입은 신사 한 분이 일어나 질문을 했습니다. 스님께서 하신 말씀 모두가 참으로 흥미롭습니다만 제 생각엔 당신네 불교의 진리랑 우리의 기독교적 진리는 다르다고 봅니다. 여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래서 선생님 제가 죄송하지만 잠깐만 앞 쪽으로 나와 주시겠습니까? 그러자 그 신사분이 나오셨습니다. 또한 관중 석 앞줄에 카톨릭 수녀님도 한 분 계셨는데요. 수녀님께서도 실례지만 잠깐 앞으로 나와 주시겠어요? 그리고 원불교 정녀님도 그 곳에 계셔서 정녀님도 잠깐 나와 주시겠어요? 하고 저는 정녀님께 물었습니다. 여기 이 손가락이 몇 개로 보이시나요? 5 개요. 카톨릭 수녀님은요? 5개요. 그리고 그 신사분께도 여기 이 손가락이 몇 개로 보이시나요? 라고 묻자 으흠… 5개요. 저도 역시 5개로 보입니다. 원불교도 5개요. 카톨릭 수녀님도 5개요 불교도 똑같이 5개 입니다. 이 것이 바로 진리입니다. 손가락이 5개라는 진리! 정녀님 이 손가락 몇 개죠? 3개요. 수녀님도 3개 기독교 신사분도 몇 개죠? 으흠 음… 뭐라구요? 안들려요. 3개요. 맞아요! 저도 3개로 보입니다.
진리는 이와 같은 것이죠? 입을 열어 진리에 대해 설명하려고 하면 기독교 진리도 있고 불교 진리도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볼 때 그냥 보시고 들을 때 그냥 들으세요. 냄새 맡을 때 그냥 맡고 맛 볼 땐 그냥 맛 보세요. 말이나 표현 그 이전 자리의 진리는 항상 하나 입니다. 아주 간단하죠? 불교에서는 종종 이런 식으로 이 자리를 표현하곤 하죠. <주장자 소리> 탕! 지금 이 순간 여러분 모두 똑 같은 진리를 경험하시는 겁니다. 그러나 이 것을 진리라고 이름 붙인다면 실수입니다. 미국 캐나다 한국 이태리 이스라엘 러시아 인도 사람 모두 제각각 다른 마음과 다른 생각 다른 종교 다른 믿음 다른 신념 다른 감정 모두 이러한 관념적인 진리에 빠져 삽니다. 그러나 탕! 이 시점에 우리는 모두 하나가 됩니다. 여러분 모두 똑 같은 경험을 하잖아요. 달마께서 전하고자 하는 바가 바로 이 것입니다.
과거 미래 삼세의 모든 부처님은 말에 의존하지 않습니다. 이심전심 말에 구애받지 않고 오직 마음으로 전할 뿐입니다. 그러나 요즘 우리의 불교에서도 여기에 그다지 충실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한국 불교의 경우 단박에 깨치느냐<돈오돈수> 점진적으로 깨치느냐<돈오점수>에 대한 문제에 대해 오랜 동안 논쟁이 있었습니다. 돈오냐 점수냐 하는 문제를 놓고 말입니다. 일부에서는 돈오돈수만을 주장합니다. 한 번 깨치는 그 순간 모든 이치를 꿰뚫어 끝장을 낸다고 말하죠. 업이 모두 사라진다고 하죠? 그 걸 돈오돈수라고 주장합니다.
반면 일부에서는 아니야 돈오점수가 맞아. 깨닫고 나서도 계속 수행해서 완전함을 이뤄야지 무슨 말이야? 이렇게 양단 간의 논쟁이 쭈욱 이어져 오고 있습니다. 약 7-8여년 전 동국대에서도 이 같은 논쟁이 있었습니다. 일본 미국 한국 중국 유럽 등지의 수 많은 불교학자들이 한 자리에 모여 돈오와 점수에 대해 논의를 한 적이 있었습니다.
첫날은 서로 무난했습니다. 안녕하세요. 박 교수님. 반갑습니다. 아! 네 좋습니다. 안녕하세요. 스미스 교수님 반갑습니다. 마가토시 나가토미 교수님 안녕하세요? 아! 네 반갑습니다. 첫날은 아주 좋았습니다. 와인이랑 치즈를 함께 들며 우리 대학에 한 번 방문하십시오. 아! 네 우리 절에도 언제 한 번 들러주십시오 하면서 말이죠. 서로 즐거운 분위기 속에서 가볍게 대화하고 부인도 소개하고 가족 사진도 보여주고 얘가 우리 아들인데요 이번에 대학을 졸업했어요. 아! 잘 됐네요. 어쩌고 저쩌고…. 서로 악수도 나누고 시종일간 화기애애한 분위기였습니다.
회의가 진행되자 돈오 쪽 사람들은 돈오만 주장하면서 상대편 사람들을 그다지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습니다. 점수 쪽도 마찬가지로 자신들 주장만 하면서 상대편을 불쾌하게 여겼습니다. 그래서 둘째날은 약간의 긴장감이 돌았습니다. 쌍방이 조금씩 서로 섞이지 않는 것입니다. 셋째날 넷째날은 아주 힘들었습니다. 돈오 쪽 사람들은 점수의 주장을 상당히 폄하했습니다. 점수 쪽 사람들도 돈오 쪽의 주장을 엉터리라고 반박했습니다. 당신네들은 불법의 정수를 몰라 이렇게 완전히 갈라섰습니다.
드디어 네번째 날 난리가 났습니다. 당신네들 책은 순 졸작이야! 거짓말쟁이 엉터리로 가르치고 있어 어떻게 돈오를 완전히 엉터리야! 뭐? 엉터리라고? 점수도 엉터리야. 그 건 불법의 가르침이 아니야 라면서 말입니다.
어떤 정의이던지 간에 비록 그것이 깨달음에 관한 것일지라도 그건 이미 실수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말이나 언설로 진리를 설명하지 않으셨습니다. 부처님의 요지는 이심전심입니다. 진리가 무엇이라고요? 돈오일까요? 점수일까요? 부처님의 대답은 이와 같습니다. 지금 밖에 비가 내리고 있네요. 저 빗소리가 단박인가요? 이해가 가시죠? 달마께서 주장하신 바는 이렇게 특별한 것입니다. 어떤 글이 됐건 어떤 연설이 됐건 그 것으로 진리를 담아낼 수 없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깨달음은 물론이고 마음도 설명해낼 수 없습니다. 바로 마음을 가리키는 것 직지인심 그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입니다.
마음을 정의할 수 없다면 마음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만약 마음을 설명할 수 없고 표현할 수 없고 이와 같은 책이나 글 말로써 배울 수가 없다면 그렇다면 도대체 마음이란 놈이 무엇입니까? 너의 묻는 그 것이 네 마음이고 나의 대답하는 이 것이 내 마음이다. 내가 마음이 없다면 어떻게 대답을 하겠느냐? 네 마음이 없다면 어떻게 묻겠느냐? 믇는 그 것 그 것이 네 마음이다. 시작도 없는 다겁생래 이래로 네가 무엇을 했던 어디에 있었건 지금 네 질문이 너의 진정한 마음이다. 바로 그 자리 그 것이 너의 자성불이다. 이 마음이 곧 부처다. 즉심시불 이 마음 밖에서는 결코 부처를 찾지 못한다.
다시 한 번 살펴봅시다. 누군가 어떻게 마음이 있다고 증명해 보일 수 있습니까? 마음은 글로도 설명이 안되고 사진으로 찍을 수도 없는데 어떻게 마음이 있는지 알 수 있나요? 라고 한다면 달마께서는 네가 물었으니 그 것이 네 마음이다. 내가 듣고 대답했으니 그 것이 내 마음이라고 하실 겁니다. 이렇게 불교는 매우 과학적입니다. 절대 맹신이 아닙니다. 맹목적인 믿음이 아니라는 거죠. 아주 선명한 가르침입니다. 명백하게 증명해 보일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자성 저의 자성이 모두 같습니다. 본성 자성 마음 의식이라고 이름 붙여도 하등의 상관이 없습니다. 이런 것들은 단지 말일 뿐입니다. 말로는 마음을 보여줄 수 없어요. 그럼 여러분 자성과 나의 자성이 같다고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당신은 한국사람 나는 미국사람이에요. 아마도 나의 자성이 당신보다 더 나은 건 아닌지? 우리가 사는 세상엔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 있습니다. 매가 뭘 믿는데 내가 믿는 이런 류의 종교는 특별해 그래서 나의 영혼은 어떤 면에서 당신보다 더 나아. 당신이 내 종교를 믿지 않으면 지옥으로 떨어질 게 뻔해. 그렇다면 물론 지옥으로 갈 수 있겠죠. 그러나 불교는 절대로 이런 이야기를 하지 않습니다. 왜냐 하면 불성은 모두가 똑 같기 때문입니다. 여러분과 저의 불성이 완전히 같다 이 말씀입니다. 우리는 본질적으로 정확하게 또 같은 불성을 지녔습니다. 말이 아닌 것로 어떻게 증명해 낼 수 있냐고? 증명해 드릴까요?
아주 간단합니다. 불법은 정말 과학적이기 때문입니다. 믿고 자시고 할 것도 없습니다. 그냥 집중하세요. <주장자 소리> 탕! 모두 들으셨지요? 같은 시점 같은 순간 같은 방법으로 모두가 동일한 경험을 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 모두의 불성이 같다는 증거입니다. 우리의 능력 배경 경험 종교 국가 이 모두가 각기 다릅니다만 우리의 본 성품은 이런 것 하고는 상관없이 똑 같습니다. 이 소리를 똑 같이 들으니까요. 여러분이 이 걸 믿거나 말거나 상관없이 말이죠. 우리의 불성이 하나라는 건 변함이 없으니까요. 그래서 네가 물으니 그 것이 네 마음이고 내가 대답하니 이 게 내 마음이다 하신 겁니다. 제가 이렇게 내리치면 여러분은 그 소리를 들었습니다. 저도 들었고요. 그 것이 여러분의 마음 여러분의 본성입니다. 그러나 볼 수 있는 어떤 것이 아닙니다. 자기 눈으로 자신의 눈을 직접 볼 수 있나요? 그래도 눈이 있는 건 명백하잖아요? 여러분 뭔가를 보죠? 그 것이 눈입니다. 여러분 뭔가를 듣습니다. 그 것이 귀입니다. 마음은 이것을 인식합니다. 그래서 마음이 있는지 압니다.
만약 여기 개가 있다면 개도 멍멍하고 짖는 제 소리를 듣습니다. 개도 불성이 있으니까요. 제가 자주하는 유명한 이야기인데요. 아주 좋아하는 이야기이기도 합니다만 이미 알고있는 분들께는 죄송합니다. 너무 자주 들었을 것 같네요. 춘성 큰 스님께서 자성에 대한 법문을 하실 때 이야기 입니다. 물론 불법의 가르침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주장자를 높이 처들고 이 것이 보이느냐? 그리고 주장자를 탕! 내리쳤습니다. 들리느냐? 모두들 조용했습니다. 그 때는 아주 더운 여름철이었습니다. 말복 쯤 이었는지 바깥은 아주 덥고 법당 마루 밑은 시원했을 테죠. 마루 밑에 개가… 아마 주장자 내리치는 소리를 들었나 봅니다. 춘성스님께서 보이느냐 이어 대답이 없자. 들리느냐 그러자 법당 마루 밑에 있던 개가 왈! 왈! 왈! 왈! 하고 짖어댔습니다. 하하하!... 저 놈의 개가 자성이 분명하구나. 여기 대중들 보다 더 명백하구나 명백해!!!
그래요 같은 불성입니다. 당신도 듣고 또 당신도 듣고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겁니다. 그러나 이 경험 탕! 이것은 아주 명명백백합니다. 여러분도 있고 저도 있고 여러분들은 이것을 마음이라 부르기도 합니다만 이 자리른 이름을 붙일 수 없습니다.
이상 현각스님 달마어록 1 강론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