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각의 달마어록5

2007. 6. 9. 16:15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달마혈맥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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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 닿을 수 없는 순간 순간이 곧 우리의 마음이다. 아주 간단하죠? 모든 순간들! 참 마음에 듭니다. 모든 순간. 이 한 문장에 달마대사의 정수가 모두 담겨있습니다. 한 가지 가르침 즉 우리의 언어가 범접할 수 없는 모든 순간과 순간이 바로 우리의 마음이다. OK! 마음은 말로 표현할 수 있지도 않고 분석도 이해도 철학적 설명으로도 안되고 또한 눈으로 볼 수도 없습니다. 인간의 언어가 닿을 수 없는 시간의 영역. 요체는 오직 이 것뿐! 즉 우리의 마음입니다. 책 덮어버리고 지금 당장 생활 속에서 수행으로 실천할 수 있습니다.

 

걸을 때 그냥 걸을 뿐! 먹을 때 오직 먹을 뿐! 들을 때 들을 뿐! 볼 때 볼 뿐! 이 보이는 것을 어떻게 이해할 수가 있습니까? 도대체 어떤 언어로 보는 것 듣는 것 맛보는 것을 완벽하게 전달할 수 있겠습니까? 언어가 말이 넘을 수 없는 영역 즉 순간 순간이 바로 우리의 마음입니다. 이 것뿐! 멀리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이런 점에서 달마대사의 가르침이 명백하다는 것입니다. 계속 나갑시다. 25쪽 하단. 만약 부처나 보살이 갑자기 네 눈 앞에 그 모습을 드러내더라도 경외하는 마음을 낼 필요 없다.

 

우리의 마음은 본래 텅 비어 아무런 형상이 없다. 만약 이런 모양에 집착하는 자가 있다면 그는 곧 마구니다. 이들은 도에서 멀어지게 될 것이다. 왜 마음에서 비롯된 허상을 섬기는가? 이를 아는 자들은 형상을 쫓지 않고 모르는 자들은 형상을 섬긴다. 형상을 섬기는 자들은 마음의 묘한 이치를 알지 못합니다. 반대로 본래 면목을 아는 자들은 형상 사람 대상 모양 존재 부처 보살 하나님 힘 명성 따위를 섬기지 않습니다. 본성품을 제대로 본 자는 이 같은 다른 대상에 의해 지배당하지도 않고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형상에 흔들리고 집착하고 열망하고 의존하는 사람들은 본 성품을 제대로 볼 수 없지요.

 

다시 한 번 달마대사는 하나님 부처 성령 어떤 형상이던지 눈 앞에 나타나면 숭배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제가 가끔 인용하는 이와 관련된 유명한 일화가 하나 있습니다. 스승이신 숭산 큰 스님께서는 스무 살 전후의 아주 어린 스님시절에 견성하셨습니다. 당시 공주의 원각산 마곡사 뒤에 있는 자그만 암자에서 아주 강력하고 집중적인 수행을 하셨어요. 잘 아시다시피 이 수행을 통해서 엄청난 통찰을 하시게 됩니다. 이 지혜로 많은 가르침을 펼쳐서 많은 사람들을 도우셨지요. 큰 스님께서 홀로 산꼭대기에서 물론 성품을 보시고 그 때가 아마도 1948년에서 1949년 경 이었을 것입니다.

 

그 것은 한국불교에서 아주 놀랄만한 사건이었죠. 어린 스님이 깨달음을 얻었으니까요. 강원<승가대학>도 기본선원도 경전학교도 구족계도 받지 않았고 석가모니 부처님처럼 특정한 스승도 없었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를 이룬 것입니다. 그리고 이 소문은 전국 곳곳 사찰로 퍼졌지요. 100일 동안 일말의 주저도 없이 오롯이 몸과 마음을 모아 모든 것을 내걸고 정진. 마침내 붐어마어마한 경험을 합니다. 그후 아시다시피 암자를 떠나 만행을 하시며 많은 경험을 하시게 되죠.

 

당시 마곡사 인근의 한 스님은 어린 행원스님<숭산 스님의 법명>이 원각사의 작은 암자에서 견성을 했다는 소식을 듣고 그 스님은 행원스님과 똑 같이 한 번 해보고 싶었습니다. 100일 동안 하루에 서너 시간만 자고 솔잎만 먹고 신묘장구대다라니 염불만 하면서 심신을 한데 모아 보리라 마음 먹었죠. 나도 행원처럼 큰 깨달음을 이루리라. 그래서 같은 곳 같은 암자에서 같은 수행법과 같은 일정으로 모든 것을 똑 같이 따라했답니다. 하나만 빼고! 나는 진정으로 특별한 힘을 얻고 싶다! 진정으로 관세음보살님을 친견하고 싶어. 부처님 마음을 얻고 싶다! 행원스님은 수행 후에 어마어마한 힘이 생겼고 스님을 본 사람들은 그와 같은 에너지를 얻고 싶었던 것이죠.

 

그래서 그 젊은 스님은 행원스님과 똑 같이 집중적인 수행 특히 염불을 합니다. 그러던 중 관세음보살이 갑자기 나타납니다. 쫘악~ 아름다운 옷에 귀걸이와 목걸이 화장을 한 우아한 모습에 아마도 중성적 이미지의 이준기처럼 생겼나? 큰 깨달음! 큰 상황이 펼쳐졌습니다. 관세음보살이 나타나더니 아 스님! 행원스님처럼 수행을 정말 열심히 하는 군요. 그 스님은 완전히 놀라 넋이 나갔습니다. 관세음보살이 물었습니다. 당신은 행원스님처럼 깨달음을 얻고 싶나요? . 저도 깨달음을 얻고 싶습니다. 특별한 능력을 얻고 싶습니다. 그러자 관세음보살이 사라졌습니다.

 

그 이후 스님은 이전보다  더욱 맹렬하게 염불에 몰입했습니다. 그리고 며칠 후 다시 관세음보살이 나타났습니다. 스님! 당신은 정말 훌륭한 분입니다. 고행을 잘 견디고 있습니다. 아마 깨달음을 꼭 이룰 것입니다. 그러고 싶죠? 예 예 물론입니다. 행원스님처럼 엄청난 우주 에너지를 얻고 싶습니까? . 제발! 제발! 진정으로 원하는 바입니다.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거의 다 됐습니다. 관세음보살이 그렇게 다녀가자 그 스님은 염불에 더욱 더 전력투구를 합니다. 온 몸에 땀이 범벅이 되도록 혼신을 다해 말이죠.

 

며칠 후 다시 관세음보살이 나타났습니다. 스님 수행을 너무 강력하게 하십니다. 결단코 깨달음을 이루실 분입니다. 진정으로 깨달음을 원합니까? 예 예 행원스님처럼 똑 같이요. 게다가 특별한 힘도 얻고 싶지요? 예 특별한 힘을 얻고 싶습니다. 예 잘 알았습니다. 그리고 관세음보살이 사라졌습니다. 그러자 스님은 신묘장구대다라니 따따따다다다~.

 

그 암자는 말이죠. 굉장히 특이한데요. 저는 큰 스님께서 견성하신 그 암자에 한 번 가본 적이 있답니다. 구조가 아주 특이한 조그만 오두막인데 문 앞 약 2미터 앞에 낭떠러지가 있더라 구요. 그리고 절벽이죠.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그렇게 위험한 곳에 큰 스님께서 계셨다는 사실에 많이 놀라웠습니다. 떨어지면 천길 낭떠러지였기 때문에 매우 위험한데 말입니다. 가까이 가서 내려다 보기만 해도 놀라 물러설 정도로 아찔한 곳이랍니다. 어쨌든 그 스님은 열심히 염불했습니다.

 

그러자 하루는 관세음보살이 허공 중에 모습을 나타내었습니다. 스님! 곧 마무리할 시기가 도래할 것입니다. 이미 특별한 힘이 생겼다고 생각합니다. ! 정말인가요? . 특별한 에너지 말입니다. 보여주세요. 그러자 관세음보살이 여기 절벽에서 뛰어내리시오! 그대는 행원보다 더 잘 날 수 있소. 행원은 날지도 못하오! 스님은 날 수 있소이다. 제가 난다고요? 그렇소 당신은 날 수 있소. 만약 문제가 생기면 내가 잡아드리리다. 나는 관세음보살이요. 나를 믿지 않습니까? . 관세음보살님! 마침내 제가 날게 되었군요. 만약 떨어지면 잡아주실 거죠? 그렇죠? 물론이지요! 그래서 스님은 목탁채를 내려놓고 뛰어내렸습니다.

 

그러자 관세음보살은 연기처럼 푹하고 사라졌습니다. 스님은 진짜로 떨어졌습니다. 아래로 아래로. 그러나 다행스럽게 나뭇가지 사이에 걸렸습니다. 나무가 없었다면 죽었겠지요. 여기저기 아주 심하게 골절상을 입었답니다. 그리고는 깨달았습니다. ! 관세음보살이 아니었구나. 많은 스님들도 나중에 그에게 아이고! 이 사람! 바보같으이. 그 것은 환상이었습니다. 간절히 관세음보살을 보고자 염원하면 마음의 작용으로 관세음보살이라는 환상을 만들어냅니다. 그러면 관세음보살을 보는 겁니다. 특별한 마술 같은 것이 절대 아닙니다.

 

여기 계신 분들 중에서도 이와 유사한 경험을 하셨을 겁니다. 누군가와 사랑에 빠지면 그 사람과 완전히 하나가 되죠? 그러다 그 사람이랑 사별하거나 헤어지면 진정으로 그 사람이 다시 보고 싶어지나요. 온통 그 사람 생각뿐이죠. 그러나 언뜻 누군가를 보면서 그 사람을 봤다고 착각하기도 하죠! 순간 그 사람을 봤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착각을 아주 오래합니다. 부모 자식간의 밀접한 사랑일 경우 자녀가 먼저 죽었다면 부모들은 꿈 속에서나 일상생활 속에서도 가끔 아이의 목소리를 듣거나 아이의 얼굴을 봅니다. 그리고 아이들이 아직은 세상 어딘가에 살아서 그들과의 대화를 시도한다고 믿기도 합니다. 그러다가 일부는 도가 지나쳐서 돌아버리기도 하죠. 이 스님의 경우도 이와 같은 상황입니다. 뭔가를 간절히 원하고 결국 관세음보살을 보게 된 것이죠.

 

간단합니다. 허깨비에 집착하면 눈 앞에 나타나고 진짜라고 믿게 됩니다. 많은 종교가 이와 같습니다. 수 많은 종교가 말입니다. 어떤 형상이 나타나면 그 것을 계시라고 합니다. 성모 마리아의 경우가 흔한 예가 되겠군요. 이해를 돕기 위해 자주 인용하는 이야기입니다. CNN에 나온 뉴스인데 보스턴 부근의 한 병원에서 유리창을 보기 위해 수 많은 인파가 모여들었다고 합니다. 그 창에 성모의 형상이 나타났다는 것이죠. 성모 마리아처럼 보일 수도 있겠지만 만약 중국이었다면 관세음보살로 둔갑하겠네요?

 

전 세계에서 심지어는 필리핀에서도 이를 보기 위해 모여들었다고 하네요. 병원 2층 창에 나타난 그 이미지 앞에서 경배까지 했다고 합니다. 병원에서 일하시는 분의 말에 따르면 원래 이중 창인데다 외벽 창에 난 작은 구멍으로 물기가 스며들고 성모 마리아의 형상이 만들어진 것이라 했죠. 그러나 세인들은 성모와 관세음보살을 보고자 염원하기 때문에 어떤 형상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입니다. 어떤 조각상이나 예수상이 피를 흘리거나 불상에서 꽃을 피우는 경우도 마찬가지겠죠?

 

달마대사는 이 점에 대해 명백하게 말씀하십니다. 만약 부처나 보살이 갑자기 네 눈 앞에 나타나더라도 경외하는 마음을 낼 필요 없다. 우리의 마음은 본래 텅 비어 아무런 형상이 없다. 만약 이런 모양에 집착하는 자가 있다면 그는 곧 마구니이며 이들은 도를 벗어나게 된다. 마음에서 비롯된 허상을 왜 섬기는가? 이를 아는 자는 형상을 쫓지 않고 모르는 자들은 형상을 섬긴다. 형상을 섬기게 되면 마구니에 현혹된다. 나는 그대가 이를 모를까 염려되어 일러준다.

 

부처의 본래 면목은 어떤 특정한 모양을 가지고 있지 않다. 부처의 근본 성품은 저 불상과 같은 모양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참 부처는요. 유감입니다만 저런 불상의 형상이 아닙니다. 진귀한 어떤 것이 모습을 드러내더라도 이 마음을 굳건히 하여 형상을 받아들이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우리의 마음은 본래 청정하다는 것을 의심하지 말라. 어떻게 그런 형상이 청정한 마음에 자리 잡을 수 있겠는가? 마음 이외에 어떻게 형상이 나타날 수 있겠는가? 도대체 어디 그런 여지가 있단 말인가? 성령 마구니 신이 나타나더라도 두려워하거나 존경을 표하지 말라.

 

우리의 본래 마음은 텅 비었을 뿐! 형상이 있는 모든 것은 허깨비다. 형상에 집착하지 말라. 부처 법 보살의 형상을 마음 속에 그린다면 그대 스스로 마구니 권속으로 떨어지게 한 것이요. 바른 이해를 구하고자 한다면 나타나는 어떠한 모양에도 집착하지 말라! 그러면 뜻한 바를 이룰 것이다. 나는 그 것 이외에 다른 어떤 충고도 할 것이 없네. 경에 이르기를 형상이 있는 모든 것은 허상이다. 이들은 본래 일정한 형상이 없다. 이는 모두 일시적일 뿐이다. OK?

 

모든 형상에서 자유로워진 자가 진정한 부처입니다. 여기 이 불상들은 임시방편적인 것이지 부처의 참 모습이 아닙니다. 진정한 부처는 이러한 형상을 가지고 있지 않지요. 그래서 저는 절에 많은 불상을 모시는 것을 참 좋아합니다. 수백 수천의 불상들 심지어 어느 곳은 만불전 삼천불전도 있습니다. 불교는 오직 부처의 이미지를 이용하여 부처는 오직 한 명이다 라는 개념을 부수어버립니다. 다른 모든 종교에서는 유일신을 주장합니다. 오직 하나의 구세주 유일한 힘 유일한 신성 유일한 도를 주장하죠.

 

그러나 이채롭게도 불교는 수천 수만 개의 부처 형상으로 유일의 개념을 완전히 깨버립니다. 여러분! 이렇게 많은 수천의 불상 중 어떤 것이 참 부처입니까? 수백의 불상 중 참 부처는 어디 있냐고요? 준한스님 하나 물어봅시다. 여기 화계사에 수천 수백의 불상이 있습니다. 어떤 것이 진불입니까? 나는 장님이라 그대 손을 못보니 다시 대답해 보세요. ! 한 발 늦었네요. 하하하! 그 뿐인가요?

 

좋습니다. 더 열심히 정진하세요. 모든 형상에서 자유로운 자. 그가 곧 부처이다. 만약 불상을 가르킨다면 여전히 저 형상에 집착을 보이는 것입니다. 달마께서 이미 지적하셨듯이 모든 형상을 여윈 자가 바로 부처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그 걸 경험할 수 있을까요? 아주 심오한 내용인 것 같은 데요. 아주 간단합니다. 절대 어렵지 않습니다. 나는 누구인가? 이렇게 물으면서 생각이 일어나는 그 자리를 직시하면 그 자리에서 우리의 생각은 완전하게 차단됩니다. 절대 비집고 들어갈 수 없습니다.

 

어렵지 않게 실제로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 자리에는 어떠한 형상도 색깔도 이름도 부처도 종교도 기독교도 나도 여러분도 한국도 미국도 유럽도 오늘도 남북도 그 자리엔 어떠한 형상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좀 전에 기침소리 들은 것 지금 밖에 풍경소리 듣는 것 바로 그 것을 우리가 부처라고 이름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것을 어떤 물건이라고 해도 옳지 않지만요 형상이 없는 것 그 것이 바로 부처입니다.

 

마귀나 귀신은 모습을 나타내는 능력이 있다. 수 많은 모양으로 보살을 만들어낸다. 그러나 이 모두가 거짓이다. 그 중 어떤 것도 부처는 아니다. 우리의 마음이 부처이다. 그대의 섬기는 마음을 욕하지 말라. 사람들은 가끔 중요한 결정이나 상황을 앞두고 꿈에서 예지를 받는 경우가 종종 있죠?

 

꿈에 부처가 나타나거나 한국의 경우는 용이 자주 나타나죠? 언젠가 한 미국인이 숭산스님께 물었습니다. 당시 LA에 있는 절에서는 많은 한국인과 미국인이 같이 수행을 했는데요 어떤 한국 보살님이 지난 꿈에 백룡인지 황룡인지가 나타나서 어쩌구저쩌구 하라고 했다고 큰 스님께 여쭤봤다고 했다는 겁니다. 황금 거북이나 백색 용 따위가 나타나서 이 것 저 것 하라고 시켰답니다. 새로 태어난 손자한테 이런 이름을 지어주라 하기도 하고요.

 

그래서 미국인 제자가 큰 스님께 여쭤봤습니다. 큰 스님! 왜 한국 사람들은 중요한 시점에 용이나 거북이 꿈을 꾸는 겁니까? 왜 맨날 용이랑 거북이 꿈 얘기만 하는 거죠? 저는 한 번도 용이나 거북이 꿈을 꾼 적이 없는데요? 왜 거북이랑 용은 한국 사람 꿈에만 나오나요? 왜 미국 사람 꿈에는 자주 안나타나는 거죠? 하하하~ 참 재미있습니다.

 

큰 스님의 가르침도 참 기억에 남습니다. 예 한국사람들은 어릴 적부터 용이나 거북이를 항상 보면서 자랐습니다. 주변에 예술품 조각 비석 그림 심지어 할머니한테 들은 옛날 이야기에도 항상 용이나 거북이가 등장했습니다. 그래서 꿈에서도 거북이가 나타나는 겁니다.

 

그러나 미국 문화권이나 예술계에서는 용과 거북이가 별로 중요한 이미지가 아니지요. 그러니까 미국인 꿈에는 나타나지 않는 것이오. 용을 생각하면 용이 꿈에 나타나고 거북이는 너무 귀하고 중요해 라고 생각하면 거북이 목걸이랑 팔찌까지 구입하죠. 요즘 핸드폰 줄에 18K 금 거북이를 달고 다니는 사람들 많이 보셨죠? 예쁘고 좋습니다. 나쁘다는 얘기가 아닙니다. 아시아 문화권에서는 거북이와 용의 이미지를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에 중요한 대소사를 앞두고 고민하면 꿈에 이들이 나타나서 실마리를 준다는 것이죠.

 

여기서 큰 스님 말씀은 다 자기들 마음이 지어낸 거야! 하신 거죠. 그래서 한국 사람에게만 나타나는 것이죠. 정말 일리있는 말씀입니다. 그렇죠? 어쨌든 아무런 형상도 만들지 마세요. 그러면 자유로워집니다. 산스크리트어로 부처란 깨어있는 마음을 일컫는다. 대답하고 인식하고 눈썹을 찡그리고 손발을 움직이는 이 모두가 온전히 그대의 깨어있는 의식이다. 한국 불교의 큰 스님이신 안국선원의 수불스님께서는 항상 대중에게 말씀하십니다. 이 손가락 움직이는 놈이 누구죠?

 

달마대사도 같은 말씀을 하십니다. 대답하고 인식하고 눈썹을 찡그리고 손발을 움직이는 이 모두가 온전히 그대의 깨어있는 의식이다. 즉 깨어있는 마음 어떤 이는 이를 부처라고 부르죠. 바로 이 깨어있음이 우리의 마음이고 이 마음이 부처다. 이 부처가 곧 도이며 이 도가 바로 참선이다. 이 선이라는 글자에 대한 설명도 단지 중생을 혼란에 빠뜨릴 뿐이다. 성품을 바라보는 것이 선이다. 성품을 보지 못하고서는 선이라 말할 수 없다.

 

수 많은 경전을 이해하고 설명할 수 있다해도 성품을 보지 않고서는 그대의 가르침은 중생의 학식에 불과하다. 결코 부처의 가르침은 될 수 없다. 참 도는 규정할 수 없이 무량하다. 알량한 일개 말로 담아낼 수 없다. 이 글이 다 무슨 소용인가? 이 책이 다 무슨 소용입니까? 여러분이 당장 죽는다면 이 책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요? 그 순간에 책을 얼마나 이해했는가가 뭐 그리 대수입니까? 그러나 일자 무식쟁이라도 성품을 바로 본 자가 있다면 그가 바른 길을 찾은 자다. 그가 곧 부처이다. 참 부처는 본래 청정하기에 그가 말한 모든 것은 모두 마음을 밝힌 것이다.

 

그러나 참 부처에 대한 표현도 일체가 텅 비었으므로 말로써 찾고자 한다면 그릇된 것이다. 이는 팔만대장경에서도 찾을 수 없다. 해인사에 가서 팔만대장경을 아무리 뒤적여 봐도 부처는 찾을 수 없습니다. 수 많은 경전을 아무리 뒤져 봐도 부처는 결코 그 곳에 없습니다. 해인사 통도사 화계사 수덕사? 아니요. 부처는 절대로 이런 데서 찾지 못합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찾을 수 있어요.

 

여기요. 어흠! 저 소리 듣는 그 것. 어흠 흠 흠. 저 소리 듣고 웃는 바로 그 것! 그 것만이 부처를 찾아가는 유일한 통로입니다. 바로 이 순간 듣는 그 것! 향 냄새 맡는 바로 그 것! 이 온도를 체감하는 그 것! 바로 그 것이 여러분이 찾는 부처입니다. 도는 본래 완전하다. 더 완전해질 필요가 없다. 우리의 마음은 더 완전할 수 없습니다. 도는 형상이나 소리가 없다. 이는 아주 미묘해서 알아차리기 어렵다. 마치 물을 마시는 것과 같다. 마시면 얼마나 차고 더운지 알지만 다른 이에게 말하기 어려운 것과 같은 이치다.

 

다른 사람에게 말해줄 수 없어요. 불가능해요. 부처도 다른 사람에게 마음을 말해줄 수 없습니다. 오직 마음을 어떻게! 그 자리로 갈 수 있는지 가리킬 뿐입니다. 부처님도 여러분의 마음을 줄 수 없습니다. 부처님 마음도 여러분한테 줄 수 없어요. 하지만 부처님은 보여줄 수는 있지요. 모든 경전 이 책 절 한국불교는 절대로 여러분의 마음을 줄 수 없습니다. 절대로!

 

오늘 지하철을 탔는데요. 서울역에서 화계사까지 타고 왔습니다. 오늘 일요일죠? 멋진 신사 한 분이 사랑이 그윽한 눈빛으로 점잖게 저한테 다가와서 일러주더군요. 지옥 가지 마세요. 이단을 믿으면 안됩니다. 그러면 지옥에 떨어집니다. 참 흥미롭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런 옷에 이런 수행을 한다는 것만으로도 지옥 갈 거라 생각합니다. 진짜 지옥을 몰라서 하는 소리지요. 바로 여기! 생각으로 천국도 만들고 지옥도 만든다는 걸!

 

도는 본래 완전하다. 완전함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도는 형상이나 소리가 없다. 이는 아주 묘해서 알아차리기 어렵다. 마치 물을 마시는 것과 같다. 마시면 얼마나 차고 더운지 알지만 다른 이에게 말하기 어려운 것과 똑 같은 이치다. 이는 인간도 신도 알지 못하고 오직 여래만이 알 뿐이다. 중생의 인식은 이에 미치지 못한다. 미혹하여 형상에 매이는 한 영영 도를 찾을 수 없다. 아주 단순합니다. 전에도 언급했던 대혜스님께서 중생이 미혹하고 어리석어 자신을 잊어버리고 바깥 것들을 쫓아다닌다고요. 우리 고향인 이 집을 떠나서 바깥에서 형상을 쫓아 헤매는 것이죠. 부처와 중생의 차이는 이 것뿐입니다.

 

또 한 가지 재미있는 일화가 떠오르는 데요. 벌써 한 40년 전 이야기가 되겠네요. 숭산 큰 스님의 한 어린 제자가 프로비던스 선원에서 수행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책에 매우 심취한 매일 같이 책만 읽는 예일대를 나온 수재였지요. ! 제 얘기는 아니고요. 어쨌든 열중해서 책을 읽는데 순간 누가 탁탁 치면서 말했답니다. 고향이 그리운 게구나! 쯧쯧 고향이 그립나 보구나. 어 아닌데? 난 부모님도 집도 하나도 그립지 않은데 이렇게 놀라서 뒤를 돌아보니 큰 스님께서 서 계셨습니다. 등을 토닥거리면서 말씀하셨던 거죠. 제자는 놀라서 어! 아닌데? 부모님을 그리워하지도 않는데 라고 생각했답니다.

 

그러자 큰 스님께서는 네 마음의 원래 고향 말이다. 그러자 그 제자는 조용히 눈물만 흘렸답니다. 우리는 밖에서 뭔가를 열심히 찾아 헤맵니다. 찾는 대상이 뭐가 됐던 말이죠. 심지어 불교에서도 개념적으로 설전을 벌이죠. 돈오돈수냐 돈오점수냐를 놓고 어떤 것이 옳고 그른지. 이 사람이 이렇게 말했어. 저 사람이 저렇게 말했어. 이렇게 벌써 본분 자리를 망각하고 개념과 사상과 설법만을 쫓아다닙니다. 바로 여기다 두고 말입니다. 내면을 들여다 보는 것이 돈오돈수냐 돈오점수냐 하는 것보다 훨씬 이롭습니다. 여기만 보세요!

 

일체의 모든 것이 마음에서부터 비롯된다는 것을 안다면 형상에 집착하지 마라. 집착한다면 절대 마음을 알 수 없다. 어떤 것에 매인다면 깨어있는 마음을 놓치게 됩니다. 숭산 큰 스님의 아주 유명한 어구인 네가 생각을 하면 눈을 잃게 된다. If you are thinking, You lose your eyes. 아주 짧지만 대단한 가르침입니다. 생각하면 눈을 잃는다 8글자. 생각을 일으키게 되면 두 눈이 있다는 것을 잊자나요. 눈은 계속 붙어있지만요. 참선할 때 혹은 지하철에 앉았을 때 친구랑 이야기 할 때 방에 누워있을 때 일어나는 생각들을 쫓으면 내일은 이 걸 해야되고 다음 주에는 저 걸 해야되고

 

이러다 보면 지금 저 밖에 매미 우는 소리를 놓치게 됩니다. 끊임없이 일어나는 생각을 따라다니다 보면 두 눈을 망각하게 됩니다. 두 눈을 멀쩡히 뜨고있지만 생각만을 쫓기에 그 순간에 보고있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죠. 생각하는 순간 귀도 잊어버립니다. 지금 저 소리도 못 듣습니다. 듣는 귀를 여기 달고 있는데 말입니다. 이 귀를 수백 만번 놓칩니다. 여전히 귀가 있는데도 말이죠. 생각을 따라가면 이 생각에 통제받게 되고 그 순간 저 소리를 듣지 못합니다. 이 것뿐입니다. 눈 귀 코 입 몸의 느낌 마음을 놓치게 됩니다.

 

제가 아주 많이 하는 이야기입니다. 제가 어린 아이였을 때 그랬으니 저는 반드시 스님이 될 수 밖에 없었겠죠? 어린 제 눈에 제대로 정신차리고 사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가끔 친구하고 대형 마트에 가곤했는데 슈퍼가면 음악 흐르잖아요? 딴 따다다. 백화점 같은 데 가면 흐르느 음악이요. 사람들은 쇼핑을 하면서 생각 속에 완전히 빠졌지요. 아주 대형 마트 였는데 친구와 저는 여기저기 기웃거리면서 사람들이 다 잠에 빠졌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는 진열대 사이를 돌아다니는데 한 녀석은 망을 보고 주로 목청이 크고 괴짜였던 제가 일을 저질렀지요. 물건 보는 척 하면서 뻑! 소리를 지르고 둘러봤는데 아무도 이에 반응이 없었습니다. ! 딴따다다. 이상한 소리가 갑자기 났는데도 안들렸나봐요? 바비. 내려놔! 싸우지 좀 말고 안돼 내려놔! 나중에 줄께! 내려놔! <!> 안돼 그러지 마. 이렇게 못 알아챕니다. 마음을 완전히 잃었습니다. 그래서 생각을 하면 즉 생각에 집착하면 눈을 잊는다는 뜻입니다. 귀 코 입 몸 마음도 모두 잃습니다. 아주 깊은 가르침입니다.

 

모든 것이 마음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안다면 집착하지 마라. 집착하게 되면 이를 알지 못하게 된다. 그러나 일단 성품을 보고 나면 팔만사천경이 모두 단지 문자일 뿐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모든 팔만사천 장광설은 결국 청정한 마음에서 나온 것이다. 진정한 이해는 마음에서 비롯된다. 독트린<경전>들이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궁극의 도는 문자를 초월해 있다. 최상의 도는 문자를 초월합니다. 바로 저기! 바로 저기가 궁극의 진리 자리입니다. 어떤 불가사의함을 구할 필요없이 저 기침소리 들으세요! 저 기침소리! 하지만 우리는 일상에서 자주 저 소리를 챙기지 못하죠? 이 것뿐입니다. 심플하죠?

 

궁극의 도는 말을 떠난 자리이다. 가르침 교리 법문 오직 말일 뿐이다. 이는 참 도가 아니다. 참 도는 말없는 자리이다. 말은 허상이다. 이는 단지 꿈 속에 나타나는 허상과 같을 뿐 진귀한 보물이나 훌륭한 궁궐이라 할지라도 허상일 뿐이니 기뻐할 게 하나도 없다. 가끔 찾아와서 이상한 말씀하는 분들 있습니다. 스님! 현각스님! 정말 섭섭합니다. 어쨋거나 종종 있는 일이니까 크게 개의치는 않지만요. 왜요? 왜 저 때문에 화가 나셨죠? 스님이 제 꿈에 나타나서 호되게 꾸중을 했습니다.   그래요? 예 제 꿈에요. 제가 특별히 잘못한 것도 없는데 호되게 꾸짖던데요. 그래서 좀 섭섭합니다. 허허~ 그 참! 그래요?

 

자기 꿈 속에서 내가 한 것을 가지고 실제로 그런 것처럼 섭섭해 하니. ~ ! 이 것이 바로 꿈 속에서 사는 것입니다. 엄연히 몸은 깨어났는 데도 꿈이 실제라고 여전히 믿습니다. 꿈 속에 사는 것이죠. 그러나 달마께서는 이 점에 이 점에 있어서 아주 명쾌하십니다. 참 도는 말없는 자리이다. 말은 허상이다. 이는 단지 꿈 속에 나타나는 허상일 뿐 진귀한 보물이나 훌륭한 궁궐이라 할지라도 허상일 뿐이니 기뻐할 게 하나도 없다. 이 모든 것들이 생사윤회의 요람일 뿐이다. 이 구절 참 대단하지요?

 

뭐든지 집착한다면 이는 생사윤회의 요람이다. 계속 생사윤회를 돌고 돌게한다는 것입니다. 임종을 맞이하는 순간에도 이를 명심해야 한다. 바깥 경계에 매이지 않으면 그대는 모든 장애를 뛰어넘을 것이다. 한 순간이라도 머뭇거린다면 마구니의 권속이 될 것이다. 그대의 진신은 본래 청정하여 더럽혀지지 않는 법이다. 여러분의 진짜 몸이 대상이 아니라 진짜 몸 즉 진신 말입니다. 진신은 본래 청정하여 더럽혀지지 않는다. 그러나 미혹하여 이를 알지 못한다. 오직 미혹함 그 하나 때문이다.

 

딴 게 아니라 미혹함 하나 때문에 이를 알지 못합니다. 멀리 떨어져 있거나 찾기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참선이 어렵거나 불교가 어려워서도 아닙니다. 여러분이 집착하는 오직 한 가지 미혹함 때문에 업 Karma로 인해 공연히 고통스러워 한다. 어디든 즐거운 곳에는 반드시 구속이 따르는 법이다. 뭐가 됐건 우리는 즐거움에 집착하면 거기에는 반드시 구속이 있습니다.

 

그러나 본래 자성인 마음을 본다면 다시는 어떤 것에도 얽매이지 않는다. 세속적인 것을 추구하기 위해 초월적인 것을 단념한 자는 그 모습을 불문하고 다 중생이다. 부처는 좋고 나쁜 운명에 관계없이 자유를 발견한 자이다. 좋은 상황에도 자유롭고 나쁜 상황에도 자유롭다면 그 것이 부처입니다. 부처는 좋은 상황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평화롭고 순결하고 은혜롭고 좋은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이상 현각스님 달마어록5 강론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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