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각의 달마어록3

2007. 6. 9. 16:12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달마혈맥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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Zen은 굉장히 명료하고 심플합니다. 사실 스승이신 숭산 큰 스님께서도 신도들이 큰 스님! 스님은 왜 항상 똑 같은 법문만 반복하십니까? 그러면 큰 스님께서는 그렇죠. 맨날 똑 같은 법문만 반복하지. 그런데 어느 누구 단 한 사람도 제대로 알아듣고 실천하는 사람이 없어. 정말 주목해야 될 대목이죠? 여기 달마대사의 가르침이나 어떤 법문을 보더라도 아무리 위대한 가르침이나 큰 스님의 가르침도 심지어 교회 목사님이나 신부님들에 대해서도 저분들은 맨날 똑 같은 설교만 하셔! 항상 지옥 간다는 말씀만 한다니까! 라고 얘기들 하죠? 그렇습니다. 여기 달마대사의 가르침만 보시더라도 계속 똑 같은 말씀만 반복하고 반복하십니다.

 

오직 하나에 대해서만 말씀하십니다. 오직 하나! 마음! 마음뿐입니다. 마음 외엔 아무 것도 없습니다. 어딘가에 뭔가 다른 것이 있을 꺼라 생각하지만 아무 것도 없습니다. 여기 이 책상이 있다고 믿지만 이 것 또한 망상입니다. 불법의 가장 어려운 부분은 달마대사의 가르침이나 불교가 아닙니다. 그런 것들은 어렵지 않아요. 불교는 결코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불교에서 가장 어려운 부분은 바로 우리의 개념적인 무지 다시 말해 지각적인 어리석음입니다. 우리가 하는 생각은 대부분 어리석음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수치로 따지자면 99% 정도 될 걸요.

 

무지! 그리고 그리고 필연적으로 고통이 따르게 되지요. 달마대사의 가르침도 아주 명백하게 이 것 한 가지에 대해서만 끊임없이 반복하고 있습니다. 제한된 시간 내에 법을 설하기 위해서는 계속해서 같은 소리를 반복할 수 밖에 없는 것이죠. 유감입니다만 달리 새롭게 표현할 길이 없군요. 이 사실을 염두에 두시고 달마의 가르침을 보시길 바랍니다. 여기엔 단 한 가지도 새로운 소식이 들어있지 않다구요. 특별한 진리가 따로 적혀있지 않다는 말씀입니다. 각 페이지를 잘 살펴보아도 전혀 다른 것이 없습니다. 오직 하나만을 가리키고 있을 뿐입니다.

 

바로 여기! 거울 같은 것이죠. 거울은 절대 새롭거나 특별한 기교를 부리지 않습니다. 그런 거울 보신 적 있으세요? 거울은 절대 특별한 기교를 부리지 않지요? ! 물론 둥근 모양이나 다른 색깔의 거울을 구할 수 있지만 거울의 역할은 하나뿐이죠. 비춰주는 것! 그냥 지긋지긋하게 비출뿐! 어떤 나라의 어떤 거울이든 항상 똑 같은 역할만 할 뿐입니다. 그냥 비출 뿐! 상당히 지겹죠?

 

여기 가르침도 이와 같습니다. 새로운 것이 하나도 없어요. 달마대사의 가르침도 이와 같습니다. 제가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싶은 부분은 처음에 나왔던 내용인데 마음이 곧 부처다. 이 마음 밖에서는 또 다른 부처를 구할 수 없다. 이 마음을 떠나면 관세음보살도 없습니다. 이 마음을 떠나면 하나님도 예수님도 부처님도 없습니다. 이 마음 밖에는 또 다른 진리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 마음 외엔 구원도 없습니다. 이 마음 밖에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아무 것도요! 이 것을 마음이라 이름하는 것 또한 큰 실수인 것입니다.

 

그러나 희소식이 하나 있죠! 여길 들여다 보세요! 마음을요! 저 소리. 어험!을 듣는 것은 무엇입니까? 어떤 물건이 듣습니까? 어떤 물건! 그 물건이 저 소리를 듣습니다. 그 무언가가 지금 저의 목소리를 듣고 있습니다. 그 한 물건이 말이죠. 그러나 우리는 들려오는 저 목소리에 신경을 씁니다. 그 소리에 귀를 기울입니다. 그러나 보는 것! 보는 그 것이 무엇인가? 티벳 불교에서는 그 물건을 뚜렷한 알아차림<Clear awareness>라고 이름 붙였습니다.

 

본성품 자성 참나 진아 등등 아주 이름을 많이 붙였습니다. 티베트식 표현이 참 이채롭습니다. 그냥 또렷하게 알아차림이라! 이 것이 바로 우리의 의식이며 영혼이라는 것이죠. 뚜렷한 알아차림. 상당히 강력하죠? 우리의 관심사가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죠. 사실 제가 보는 것에 그다지 관심이 없습니다. 듣는 것에도 별 신경 안씁니다. 냄새나는 그 어떤 것에도 의미를 부여하지 않습니다. 이미 찰나적으로 자나가 버리기 때문이죠. 그 것은 내가 아닙니다.

 

그러나 대상을 보는 것 듣는 것 냄새나는 것 그 것! 그 것이 무엇인가? 그 놈이 바로 흥미로운 놈입니다. 그 것은 무한하고 시공을 초월해 있죠. 그래서 그 놈을 관하고 그 것을 잘 보고 있으면 그제서야 우리는 진짜 자신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감각을 떠나 대상을 쫓아다니면 우리는 그저 중생의 삶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다시 한 번 읽겠습니다.                     

 

이 마음 밖에서는 결코 부처를 볼 수 없다. 이 마음을 떠난 자리의 깨달음이나 열반의 추구는 불가능하다. 마음 밖에서 열반 깨달음 또는 원하신다면 구원이라 해도 좋아요. 구원과 같은 것을 마음 밖에서 찾는 자는 바보입니다. 결코 찾을 수도 없고 역사상 그런 식으로 찾은 자도 없습니다. 예수님도 마음 속에서 찾아내셨습니다. 알고 계신가요? 예수님도 천국은 내 안에 라고 하셨잖아요? 바로 여기! 저 밖이 아니라 여기! 부처님도 마음 안에서 찾으셨고 달마대사도 원효대사도 수 많은 분들이 모두 이 마음 속에서 찾아내셨습니다. 우리 역시 마음 속에 가지고 있습니다. 달마대사 가르침의 요체입니다.

 

바로 여기! 지금 이 순간! 결재를 10번 마치고 나서도 아니고 불교대학을 마치고 나서도 아닌 바로 여기! 바로 이 자리에서 냄새 맡을 수 있고 볼 수 있고 맛볼 수 있습니다. 이 것뿐입니다. 굉장히 명쾌하게 직시하고 있기 때문에 아주 존경하는 가르침입니다. 굉장한 내용이 하나 더 있습니다.

 

교재 있는 분은 5쪽 입니다. 며칠 전 유럽에 있을 때 본 사실인데요. 동양 사람들은 유럽인들이 얼마나 불교에 심취해 있는지에 대해 상당히 놀라워 합니다. 유럽의 불교에 대한 관심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엄청납니다. 믿기지 않을 정도에요. 심지어 미국보다도 더 하답니다. 지금 불교는 서양에서 엄청나게 붐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암스테르담 프랑크프르트 베를린 등지나 특히 네덜란드 경우 길거리 어디를 가나 여기 저기 불상이나 불화가 즐비해 있는 것을 볼 수 있을 정도입니다. 더욱 놀란 건 심지어 식당 커피 숖에 갔을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저를 믿지 마시고 직접 가셔서 한 번 확인해 보세요. 수 많은 불화와 불상들

 

예 어쩌면 유행일 수도 있겠지만요. 그러나 지금 전 세계적으로 불교는 열풍이 불고있습니다. 이유가 뭘까요? 많은 한국 사람들은 왜 불교가 퍼져나가는지 궁굼해 합니다. 이미 그런 나라들은 외부적 조건들 더 이상 그러한 외적인 조건들로는 물질과 종교적으로 최대한 발전이 되었지만 오랜 역사를 통해서 더 이상 그런 외적인 것들로는 자신들을 구원할 수 없다는 것을 인식했기 때문입니다. 외부적인 힘 즉 어떤 신이나 물질의 풍요 안락함 또는 사회적 부가 자신을 구원시킬 수 없음을 그래서 스스로 찾아야만 함을 깨닫게 된 겁니다. 자신의 마음을 애써 들여다 보면 스스로 구할 수 있다고 말입니다.

 

부처는 부처를 구원하지 않는다. 마음을 내어 부처를 보고자 한다면 결코 부처를 보지 못할 것이다. 만약 밖에서 부처를 구하고자 한다면 만약 하나님을 마음 밖 다른 곳에서 찾고자 한다면 결코 볼 수 없다. 불교신자가 아니더라도 이렇게 달마대사의 뜻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이죠. 달마대사의 가르침은 문자 자체에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직 이 것<마음>을 가리킬 뿐!!! 불교 언어를 사용하든 하나님 언어를 사용하던 상관 없어요. 모두 같은 곳을 가리키기 때문이죠. 제가 저를 이렇게 가르키고 저 쪽에 계신 스님도 저를 가리킨다면 손가락은 두 개지만 한 지점을 가리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깐 불교 신자가 아니더라도 달마대사의 가르침의 요지를 이해할 수 있는 겁니다.

 

불교는 말에 문자에 얽매이지 않습니다. 단지 문자를 사용해 여기<마음>을 가리킬 뿐! 이 책에 써 있는 글도 아니고 달마대사 인물도 금강경도 아니고 화엄경도 모든 불교도 그 자체로는 전혀 특별할 것이 없는 것입니다. 팔만대장경 역시 마찬가지 이 모두가 가리키는 것. 바로 이 것! 이 것이야말로 진정 흥미로운 것이죠. 일전에 금강경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책을 볼 때 너무 글에 얽매이지 마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그냥 시간 낭비이고 빈손으로 허송세월할 뿐입니다. 그러나 그 요체를 제대로 직시하시면 아하! 그때부터 여러분의 삶이 조금씩 바뀔 것입니다. 더 이상 외부의 조건들에 끌려다니거나 즉 특정한 믿음 사람 전통 어떤 신학 누군가를 설득시키고자 하는 꼬임에도 흔들리지 않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여길 보세요. 이 것 뿐이에요. 정말로. 다른 사람이 대신 증명해 보일 수도 없고 그들의 견해도 필요 없어요. 어느 누구의 가치관도 당신의 이 것<마음>만큼 당신을 도울 수 없는 것입니다. 이 것 뿐입니다. 부처로 부처를 섬기지 말라. 부처에게 빌기 위해 마음 내지 말라. 부처는 경전을 암송하지 않고 계를 지키지도 않으며 이를 범하지도 않는다. 부처는 그 어떤 것도 지키거나 범하지 않는다. 부처는 선행도 악행도 저지르지 않는 법.

 

햐아~ 얼마나 시원해요? 허공이 이스라엘에 문제를 야기 시켰다고 할 수 있겠어요? 허공은 결코 이스라엘에 문제를 일으킬 수 없겠죠? 이스라엘의 현안 문제들이 허공 속에서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겠죠. 그런데 이 빈 공간이 그 문제를 일으킨 건 아니잖아요?

 

본성품은 이와 같은 것입니다. 부처는 즉 다시 말하면 본성품은 고통을 만들지 않습니다. 당신의 이 것<부처>은 깨달음을 만들어내지 않습니다. 오직 우리의 망상만이 문제를 만들 뿐입니다. 그러니깐 내면을 관조해야 합니다. 부처를 보고자 한다면 본 성품을 보게 된다. 부처를 보고자 한다면<신을 보고자 한다면> 오직 당신의 본성품만 보면 된다. 이 것뿐입니다. 누구든 자신의 본 성품을 본 자가 있다면 그가 곧 부처이다.

 

본성품을 보지 못한 채 부처를 구하고 경전을 암송하고 보시를 하고 계를 지키더라도 다 소용없다. 부처에게 비는 것은 좋은 업을 쌓고 즉 나무아미타불 이렇게 하면 좋은 업을 쌓게 되고 경을 외우는 것은 좋은 기억력을 얻게 되고<물론 다른 좋은 점도 있겠지요> 계를 잘 지키면 내생에 좋은 곳에 태어난다. 아주 좋은 곳에 태어납니다. 여러분 모두는 아마도 전생에 계를 아주 잘 지켰나 봅니다. 여기 대부분이 훌륭한 전통과 맛있는 음식의 나라 대한민국에 태어나셨기 때문이죠. 열심히 수행하시면서 계를 잘 지키셨나봐요. 그래서 이렇게 좋은 상황에 나신 겁니다. 그러니까 저는 약간                       

수준 낮은 미국에서 태어 났죠.

 

이제부터 계를 더욱 잘 지켜서 다음 생에는 한국에서 태어나야 하겠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는 고통을 받고 살고 있죠. 한국에 나든 미국에 나든 부자로 또는 가난하게 나더라도 생각이 만들어내는 고통은 계속됩니다. 보시는 미래에 대한 축복이지만 부처는 될 수 없다. 제가 좋아하는 구절입니다. 다른 건 다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부처는 안돼요. 무슨 게임 같네요. 잘 하셨습니다. 거의 다 이겼어요! 그러나 부처가 되기엔 아직 멀었군요. 스스로 이해가 되지 않는다면 생사를 끝까지 가서라도 스승을 찾아야 한다. 그러나 만약 그 스승이 성품의 맛을 보지 못했다면 그는 스승 될 자격이 없다.

 

아무리 팔만대장경을 줄줄 꿰고 있다 할지라도 결코 생사를 벗어날 수 없다. 대자유에 대한 가망 없이 삼계를 떠돌며 고통받을 뿐이다. 부처를 찾으려거든 본성품을 보기만 하면 된다. 네 성품이 곧 부처다. 부처는 대자유인이며 모든 계획과 근심으로부터 자유롭다. 성품을 보지 못하고 천지사방으로 하루 왠종일 돌아다녀 봐도 절대로 부처를 구할 수 없다. 사실인즉 아무 것도 구할 수 없는 것이다. 구할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데요! 아무 것도요! 이 사실을 알기 위해서는 스승의 도움이 필요하고 자신과의 사투도 벌여야 한다. 생사는 귀한 것이니 공연히 스스로를 쓸 데 없는 고통의 삶에서 헤매지 말게 하라. 삶을 좀 멋지게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자신을 속야 봤자 아무 것도 득 될 것이 없다. 만약 네가 보석이 산더미처럼 쌓여있고 갠지스 강의 모래알 수만큼 많은 하인을 거느렸다 해도 오직 눈을 뜰 때만 보게 되리라! 제 아무리 좋은 걸 많이 가져도 눈을 떠야 그 것이 소용있겠죠? 그러나 두 눈을 감으면 어떨까요? 저도 지금 눈을 뜨니 많은 도반들을 볼 수 있네요. 여러분 모두 좋은 친구들입니다. 그러나 두 눈을 감아버리면이 것은 도대체 나에게 무슨 의미가 있나요? 여러분이 살아있을 땐 수 많은 목표를 가지고 좋은 기회도 찾아오지만 죽으면 도대체 뭐가 남습니까? 무슨 의미가 있냐고요? 죽으면눈에 보이는 일체의 모든 것은 죽으면 도대체 뭐가 남습니까? 무슨 의미가 있냐고요? 죽으면눈에 보이는 일체의 모든 것은 다 허깨비일 뿐이라는 것을 알아차려야 한다.

 

만약 빨리 스승을 찾지 못한다면 공연히 인생을 허비할 것이오. 자네에게 불성이 있다는 건 명백한 사실이오. 아주 자명한 일이지. 그러나 스승의 도움 없이는 이 것조차 알아차리기 어렵다. 오직 백만 명 중 한 사람만이 스승의 도움없이 깨칠 수 있다. 그렇다 할지라도 어떤 인연법에 따라 부처가 뜻하는 바를 아는 이는 스승이 필요하지 않는 법이요. 그런 사람은 어떠한 가르침보다 뛰어난 각성을 타고난 사람이다. 만약 자네가 그렇게 걸출한 사람이 아니라면 정말 열심히 수행해야만 하네. 그러면 도를 얻을 수 있을 것이네.

 

이 모든 것의 요점은 우리가 바로 그 것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오직 그 한 가지 그 것이 있단 말입니다. 유일하게 필요한 한 가지! 그 것이 이미 우리에게 있다고요. 우리 각자에게 필요한 유일한 부 유일한 지식 유일한 지혜 유일한 힘을 이미 갖추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갖고 올 필요없이 이미 갖고있어요. 그러나 단지 이해의 수준에 머문다면 삶에 별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달마대사의 요점도 바로 내면을 직시하고 그 것을 발견하라는 데 있습니다.

그때라야 진정 우리 것이 됩니다.

 

부처님께서 하신 유명한 이야기입니다. 어떤 친구가 많은 돈을 가지고 멀리 여행을 가게 되자. 친구들이 염려가 되어 그 돈을 친구의 저고리 안주머니에 넣고 실로 꿰메어 버렸습니다. 안 쪽 주머니에다 돈을 넣고 실로 완전히 꿰매서 봉해 버렸어요. 그 친구는 며칠 돌아다니면서 돈을 다 쓰고 나니 한 푼도 없는 거예요. 그는 돈이 하나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아이고 돈이 하나도 없네 라고요. 밥은 어떻게 사먹지 굶어 죽을 꺼야! 그렇지만 그 와중에도 그의 수중에는 이미 많은 돈이 있지요? 친구들이 돈을 안주머니에 많이 넣어뒀잖아요. 만약 여러분께서 그 것이 없다고 생각한다면 없는 것과 마찬가지가 됩니다. 없다고 생각하면 없고 부족하다고 생각하면 부족한 겁니다.

 

생각이 그렇게 만들어 버리죠. 사실은 우리 모두 백만장자입니다. 불교의 수행은 오직 이 마음을 직시하고 깨닫는 것입니다. 이 것뿐입니다. 하나도 어려운 공부가 아닙니다. 질문 있나요? 7쪽 한 번 살펴볼까요? 누구든 본성품을 본 자는 그가 곧 부처다. 자신의 성품을 본 자는 부처이고 그렇지 못한 자는 곧 중생이다. 이 것뿐 중생과 부처는 둘이 아닙니다. 중생은 생각이 실재라 믿고 그 것을 쫓아다닐 뿐이죠.

 

누구든지 생각은 떠오르기 마련입니다. 우리 모두는 생각을 합니다. 큰 스님이든 위대한 선사님이든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중생은 화나는 생각 걱정하는 생각 두려운 생각 의심하는 생각 부끄러운 생각들이 떠오르면서 열심히 쫓아다닙니다. 아주 부지런히 생각을 쫓아다닙니다. 그리고는 고통을 받습니다. 그래 놓고 울고불고 화내고 치고받고 빼앗아 옵니다. 우리는 생각이 떠오르면 그 것이 실재라 믿고 그 것을 따라다닙니다. 이 것이 바로 중생입니다. ! 부처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 생각에 집착하지 않을 뿐입니다. 본성품 자리를 놓치지 않습니다.

 

부처도 생각을 합니다. 금강경 보세요. 부처님도 공양 마치며 발우를 씻고 제 자리에 올려놓은 다음 가사를 벗어서 챙겨놓고 좌선에 들기 전에 발을 씻으시죠. 찰나찰나 생각이 일어나지만 집착하지 않습니다. 중생들은 생각을 쫓아다니고 부처는 그 생각에 집착하지 않습니다. 이 것이 중생과 부처의 유일한 차이! 수행을 얼마나 많이 했는가? 얼마나 오래 스님이었나? 염불과 절을 얼마나 많이 했나? 경전을 얼마나 이해하는가? 어떤 큰 스님을 스승으로 모시고 있는가의 문제가 아닙니다. 이런 것 하고는 하등의 상관이 없습니다. 생각이 일어났을 때 얼마나 그 생각을 쫓지 않는가? 수 많은 생각들 속에서 온전하게 본성품 자리를 잃지 않는가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누구든지 본성품을 본 자는 그가 곧 부처다. 그렇지 못한 자는 중생이다. 만약 불성이 마음 밖의 어딘가에 따로 있다고 생각한다면 도대체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의 성품이 딴 데 있다면 그 곳이 도대체 어디냐고요? 우리의 중생심이 곧 불성이다. 실체는 같습니다. 마음을 떠난 자리에 부처는 없다. 우리 마음이 부처다. 부처의 의미는 곧 우리의 본성품입니다. 분리된 어떤 개체가 아니고 어떤 신적 존재도 아니고 어떤 지도자도 아닙니다. 단지 말이고 형상일 뿐이죠. 어리석은 말 장난일 뿐. 가리키는 요체는 바로 여기! 이 곳입니다.

 

제가 똑 같은 얘기를 너무 많이 반복하죠? 아닙니까? 좋습니다. 하하. 계속 반복할 뿐이죠. 부처가 본성품이고 본성품을 떠나면 부처는 없다. 부처를 떠난 자리에는 그 어디에도 다른 성품 또한 없다. 예 일부에서는 불교적 성품 기독교적 성품 이스라엘 성품 히브리 성품이 각기 존재한다고 믿기도 하죠. 최근에 어떤 분께서 미국사람들은 한국사람의 영혼을 이해할 수 없어요. 예 요즘이야 어느 정도 일리가 있을 수도 있지만 그러나 요지는 그 것이 아니죠 본성품은 동일한 것입니다. 단지 생각이 한 번 일어나고 나면 네 생각 내 생각 이렇게 분리되는 것이죠.

 

생각을 단박에 동강내 버리면 다시 말해 생각에 집착하지 않는다면 내 성품과 네 성품이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같아요. 모든 말말말! 성품이 같다! 성품이 하나다! 불성은 하나다! 성품은 하나다! 일부 불교인들 일부 기독교인들은 의심스러워 합니다. 어떻게 성품이 같은지 알아요? 어떻게 증명하죠? 불교는 대단히 과학적인 종교입니다. 내 성품과 네 성품이 둘이 아닌 것을 어떻게요? 요즘 세상에 이런 주장은 좀 파장이 큰 표현인데 말이죠. 달마대사의 가르침도 이와 같습니다. 본성품 본성품 밖에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특별한 수행이나 특정한 선행이 아니라선한 일 짓지 마세요. 선한 일에만 집착하지 마세요. 아휴! 지겨워 하지 않고 방편으로 삼아 다른 사람을 도울 수 있습니다.

 

만약 제가 저의 본성을 보지 못한다 하더라도 부처를 생각하고 경전을 독송하며 보시하고 계를 지키고 불법에 헌신하고 선을 행하더라도 여전히 깨달음을 성취할 수 없습니까? 달마대사님! 가능하지 않겠어요? 안된다. 할 수 없다. 왜요? 네가 어떤 것을 성취할 수 있다 하더라도 그 것은 모두 인연에 의한 것이며 좋은 업일 뿐이다. 아직도 생사의 바퀴를 돌리는 것이지 생사의 바퀴를 계속 굴리는 한 깨달음은 없는 것이다. 깨달음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의 성품을 보아야 한다. 그 것을 보지 못하는 한 인과에 대한 이 모든 말이 무의미할 뿐이다.

 

부처는 무의미한 수행은 하지 않는다. 업으로부터 인연의 사슬에서 자유로운 이가 바로 부처인데 만약 네가 부처는 어떤 것을 성취한 자라고 하면 그 것은 부처를 모욕하는 것이다. 부처가 무엇을 성취할 수 있겠는가? 마음을 집중하고 힘을 모으고 어떤 견해를 갖는 것은 부처에게는 불가능하다. 부처는 어느 한 쪽에 치우친 존재가 아니다. 본성품은 본질적으로 공하며 순수하지도 부정한 것도 아니며 나쁜 것도 좋은 것도 아니고 신성하지도 사악하지도 않다. 부처는 수행이나 깨달음을 초월한 자다. 부처는 인과에서 자유로운 자다. 개인적으로 이 부분을 강조하고 싶군요. 달마대사의 핵심 가르침이라고 할 수 있겠어요. 

 

부처는 계율에 관여하지 않는다. 좋은 일도 나쁜 일도 행하지 않는다. 부처는 활기차거나 게으르지도 않다. 부처는 아무 것도 짓지 않는 자이며 부처라는 생각에 집중조차 하지 않는 자다. 부처는 또한 부처가 아니다. 바로 이 부분 부처에 대해 생각하지 마라. 내가 말하는 바를 진정 이해하지 못한다면 결코 자신의 마음자리를 보지 못할 것이다. 좋은 도반을 만났어요! 라고 말하는 친구처럼 착하고 마음도 순수하다고요. 우리는 부처는 어떤 특정한 방식 오직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 표현이나 행동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죠. 스승이신 숭산 큰 스님께서 종종 말씀하시길 진정한 보살 진정한 부처는 60% 정도 인기가 있답니다. 나머지 40%는 싫어한답니다. 100% 좋다 한다면 뭔가 문제가 있는 게 아닌가 말씀하셨습니다. 하하하!

 

부처는 계율을 지키지 않는다. 좋은 일도 나쁜 일도 행하지 않는다. 부처는 활기차거나 게으르지도 않다. 부처는 아무 것도 짓지 않는 자이며 부처라는 생각조차 내지 않는 자이다. 부처는 부처가 아니다. ! 너무 난해해요. 너무 어려워 불교는. 왜 이렇게 어렵냐고. 부처가 부처가 아니라니. 이 게 도대체 무슨 소리냐고? 오우 맨날 격무에 시달리고 어려운 사무 처리해야 하고 복잡한 계산에 골머리 썩히고 너무 머리 많이 굴리고 살아서 피곤한데 좀 쉬려고 절에 모처럼 왔더니 도대체 어려운 말만 해대고. 부처가 부처가 아니라니! 이 게 도대체 무슨 말이야? 너무 어려워. 90% 정도는 아마 이렇게 생각하실 겁니다.

 

가끔 택시를 타는 데요. 한국의 택시 기사들 참 재미있습니다. 특히 한국에서는요. 정치에 관한 민심을 알고싶다면 문화적 쟁점에 대한 민심의 동향을 살피고 싶다면 택시를 타세요. 무슨 문제든 민심을 알고 싶다면 택시를 타세요. 기사분들과 한 번 얘기를 나눠 보세요. 택시 뒷좌석에 타면 거울에 비친 제 머리랑 누비 두루마기에 큰 코에 파란 눈을 보고 우와! 스님이세요? 불교 공부 하세요? ! . 화계사로 가 주세요. 대단하십니다. 아닙니다. 기사분 하시는 일이 훨씬 더  대단합니다. 사실 그렇게 생각합니다. 맨날 사람들하고 실랑이 벌이고 주행 중에 통화하고 여보세요~ 네 네 알았어요. 조금 있다 가겠습니다. 네 네! 자주 벌어지는 일입니다. 실제로 한국 택시 기사분들 대단합니다. 기사분들을 통해서 뭐든지 알 수 있거든요. 불교나 다른 주제에 대해 일반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도 금새 알 수 있어요. 한 가지 재미있는 것은 항상 대단해요 불교 공부하시는 군요. 불교는 너무 어려워요. 상당히 머리가 좋으신가 봐요 라고 합니다. 아니에요!

 

달마대사의 가르침으로 돌아와 볼까요? 부처는 부처가 아니다. 어려운 것 같긴 하네요. 너무 철학적이고 심오하고 추상적으로 느껴지죠? 부처는 부처가 아니다. 사실상 많은 사람들이 불교는 종교 같지 않은 것 같아요. 철학에 가까운 것 같아요 라고 말합니다. 이 모두가 사실 그렇지 않습니다. 달마대사의 가르침을 상당히 쉽게 증명해 보일 수 있어요. 아주 쉬워요. 쉽다니까요. 증명해 드릴까요?

 

부처는 부처가 아니다. 쉬워요. 여기 공간 보세요. 이 거 공간 맞죠? 제 손이 이렇게 공간 속을 왔다 갔다 하죠? 공간을 느낄 수 있어요. 느낄 수 조차 있습니다. 공간을 이런 식으로 왔다 갔다 하면서요. 지금 저처럼 해보세요. 느껴지시죠? 공간이? 그러나 공간은 공간이 아닙니다.

 

공간아! 공간아! 너 이리와 봐! 공간 우리가 그냥 공간이라 부르는 것뿐이죠. 우와 정말 멋진 공간이야. 이 건 큰 공간이고 와! 이 건 작은 공간이야. 이 손에 잡힌 공간도 그외 공간도 똑 같은 공간입니다. 같잖아요? 제 입 속의 공간도 이 것 또한 공간입니다. 그러나 그 공간은 공간! 공간! 말 좀 해봐! ! 공간! 공간 우리가 공간이라 부릅니다만 그 공간은 공간이 아닙니다. 단지 우리의 개념일 뿐! 그래서 부처는 부처가 아니다. 어떤 것이 아닙니다. 개념도 아니고 아무 것도 아닙니다.

 

이 걸 이해하신다면 당장이라도 붙잡고 있는 집착을 그냥 놔 버릴 수 있습니다. 부처에 대한불교의 가르침에 대한 이 게 맞나 틀리나에 대한 전에 들은 다른 법문과 비교해서 이 법문이 옳은지 그른지에 대한또는 달마대사에 대해 이미 들은 것에 대한또는 저에 대해 익히 들은 바에 대한또는 불교에 대한모든 집착을 내려놓을 수 있습니다. 왜냐 하면 불교는 불교가 아니니까요.

 

불법도 불법이 아니고 그 어떤 것도 아니다! 부처는 부처가 아니다. 그냥 내려놔요! 내려놔!!! 달마대사의 지적이 참 흥미롭습니다. 내면에 기본을 두어야 하는 것! 진정으로 내면에 기반을 둔 것이라야 아무 것도 하지 않은 것이며 진정한 무위입니다.

 

본성품을 보지 못한 자들이 항상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서 수행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자들은 거짓말쟁이에 어리석은 자들이다. 밑도 끝도 없는 허공에 빠져들어 술취한 것처럼 선악을 구분할 줄도 모른다. 만약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을 닦고자 한다면 먼저 논리적인 사고를 끊고 자신의 본성품을 봐야 한다. 만약 무위를 실천하고 싶다면 성품을 보셔야 해요. 먼저 성품을 보세요. 본성품을 보지도 않고서 깨달음을 얻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성품을 보지 않고서는 깨달음에 이를 수 없답니다. 깨달을 수 있는 다른 방도가 없답니다.

 

다른 종교에 소속된 분들을 위해 용어를 다시 정리해 드리죠. 성품을 보지 않고서 천국 가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절대 불가능 합니다. 내 안에 있는 통로를 통하지 않고서는 천국으로 향하는 길은 없습니다. 유감스럽지만. 오직 여기만이 유일한 통로입니다. 사람들은 업이 공하다는 것을 주장하면서 여전히 많은 악행을 저지른다. 일체가 공하므로 악행을 저지르는 것이 잘못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 자는 벗어날 희망이 없는 밑도 끝도 없는 어둠 속으로 떨어질 것이다.

 

지혜로운 사람은 공개념에 집착하지 않는다. 일부 사람들의 경우입니다. 수행을 좀 하시거나 아마 굳건하게 수행하시는 분들은 일체가 비었다는 것을 체득하게 됩니다. 알 수 있습니다. 아하! 일체가 공하구나! 내 생각도 비었구나! 지난 날도 비었구나! 어디 있냐고요? 텅 비었을 뿐인데. 그렇잖습니까? 아까 제가 방망이 내려쳤을 때 여러분 모두 동일한 경험을 하셨습니다. 그 경험이 지금 어디 있습니까? 어디 있냐고요? 제가 했던 그 행위 지금 어디 갔나요? 어디로?

 

우리 모두 같이 경험했잖아요? 바로 10분 전에. 그래요 일체가 공하게 돌아갑니다. 공하게 드러났다가 다시 공하게 돌아갑니다. 그러나 요지는 만약 일체가 공하다는 것에 집착한다면 업도 공하잖아요 라고 할 수 있겠죠. 맞습니다. 업도 공합니다. 사실입니다. 그러나 업이 공하다는 것에 집착한다면 사람 죽이고서도 문제될 게 없겠네요. 일체가 공하니까. 누군가를 때려 눕혀도 문제될 것 없어! 왜 성질내는 거야? 업은 원래 공한 거라고! 네 업도 공하고 내 업도 공하니 문제될 거 없잖아? 흥미롭군요.

 

달마께서 말씀하십니다. 사람들도 업이 공하다는 것을 주장하면서 여러가지 악행을 저지른다. 일체가 공하므로 악행을 저지르는 것이 잘못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 자는 벗어날 희망이 없는 밑도 끝도 없는 어둠 속으로 떨어질 것이다. 지혜로운 사람은 공에 집착하지 않는다. 그러나 모든 상황이 일어날 때마다 그 것은 바로 우리의 마음이 됩니다. 그런데 왜 몸이 죽었을 때 우리는 이 마음을 보지 못합니까? 사람이 죽었을 때 왜 마음을 볼 수 없을까요? 달마께서 마음은 항상 실재하고 명명백백하다. 네가 단지 보지 못할 뿐이다 라고 하십니다. 실재한다. 거기 있다고 보지 못할 뿐!

이상 현각스님 달마어록3 강론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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