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각의 달마어록8

2007. 6. 9. 16:18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달마혈맥론

728x90

육감이 실제가 아님을 깨닫고 오온이 허구이며 육신의 내부에는 아무 것도 없음을 인식한 자야 말로 부처의 참 뜻을 이해한 자이다. 경에 이르기를 오온<색수상행식>이 한데 모인 동굴이 선의 마당이다. 내면의 눈을 떠야 대승의 문에 다다를 수 있다. 무엇이 이보다 더 명료할 수 있는가?

 

육감이 실재가 아님을 알고 오온<형상 감정 인식 욕구 의식>이 허구임을 알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형상<모양> 여러분 이 모양이 실체가 있다고 믿으시죠? 위는 위고 아래는 아래라고 생각하시고요? 이 모두가 그러하다고 믿으시죠? 여기가 아래이고 저기가 위라고요? 여러분의 이해를 돕기 위해 제가 자주 이 방법을 사용하는 데요. 원을 그리며 돌라고 합니다. 여러분의 생각에 근거한 위 아래 여러분의 생각이 고정적이면 그 현실도 고착화됩니다. 계속 돌고 돌다가 멈추면 위 아래가 분명하지 않지요? 그리고 넘어질 수도 있고요. 오른 쪽 왼 쪽도 더 이상 분명하지 않게 됩니다. 

 

더욱이 어떤 사람의 형체도 여러분의 머리가 좌우로 흔들리고 나면 분명치 않습니다. 그래서 이런 형상이 허상임을 알게 된다면 감정 또한 실체가 없음을 알게 되지요. 감정이 진짜라고 생각들 하시죠? 그리고 그 것이 실재한다고 믿지요. 그러나 감정은 항상 변하죠? 그래서 감정은 독립적인 실체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 감정을 여러분은 실재라고 믿습니다. 그리고 그 감정에 반응을 하죠? 그 감정에 의존하고 매달리죠. 그 감정을 근거로 행동양식을 결정합니다. 그 감정으로부터 도망치기도 하고요. 나쁜 감정 두려운 감정 초조한 감정 염려하는 감정 시기하는 감정.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진짜가 아닙니다. 허상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모양과 감정 그리고 인식 또한 허상입니다. 술에 만취해 본 사람은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알 겁니다. 혹은 극도로 피곤해 본 적이 있었던 분 아실 거구요. 형상 감정 인식 그리고 욕구 즉 Karma 입니다. 업입니다. 여러분은 업이 진짜라고 믿지만 허상입니다. 그림자와 같다고 말할 수 있어요. 그림자가 진짜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여전히 그림자일 뿐이죠? 업장! 업은 그림자일 뿐입니다. 그 것이 실재라 믿기 때문에 업에 반응하여 더 많은 그림자를 만들어내는 것이죠.

 

형상 감정 인식 욕구<> 의식 이 모두가 공한 것입니다. 의식! 모든 의사들도 의식이 허상임을 설명할 수 없습니다. 만약 여러분을 세게 내리쳤을 때 의식을 잃었다면 그 때 여러분의 의식은 어디에 있을까요? 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 필름이 끊어진 경험 하신 분들 계시죠?  한국사람들이 필름 끊어졌어요 하는 말 가끔 들었는데 맞죠? 여전히 의식은 존재하지만 필름이 끊어졌다는 거예요? 의식은 진짜가 아닙니다. 어떤 물<>이 그 위대한 의식을 사라지게 한 걸까요?

 

다음 날 아침 일어나면 무슨 일이 있었나 잘 기억도 안나죠. 그러니깐 형상 감정 인식 욕구 의식은 실재가 아닙니다. 이 모든 것은 본질적으로 공한 것입니다. 아주 일시적일 뿐. 아주 가볍게 서로 얽혀있을 뿐<인연>입니다. 아주 옅고 약하게 말입니다. 여러분 감기 걸렸을 때 냄새 잘 맡지 못하시죠? 냄새도 잘 못 맡고 맛도 잘 못 봅니다. 냄새랑 맛을 못 느낄 때는 여러분의 의식도 이와 같이 달라집니다. 달라지죠? 플라스틱처럼 상황에 따라 변형됩니다.

 

그래서 누구든 육감이 실재가 아니고 오온이 허상이며 이러한 것들 즉 형상 느낌 인식 욕구 의식은 우리 몸 안 어디에도 존재할 수 없음을 아는 사람들은 부처의 말을 이해한 것이다. 경에 이르기를 오온이 선의 마당이다 라고 했다. 우리의 수행도 이 오온 속에서 할 수 있자나요? 형상의 세계 안에서 감정의 세계 안에서 인식의 세계 안에서 업의 세계 안에서 의식의 세계 안에서 이 세계 안에서 수행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내부의 문을 여는 것은 대도의 문을 여는 것이다.

 

육안을 일컫는 말이 아니라 내면의 눈을 말씀하시는 거죠. 바로 이 것이 대도의 문을 여는 것입니다.                   

어찌 이보다 더 명백할 수 있으랴? 어떤 생각에도 집착하지 않는 것이 선이다. 이를 알면 걷고 서고 앉고 눕는 것 우리가 하는 일체 모든 것이 바로 선 아님이 없다. 마음이 공하다는 것을 아는 것은 곧 부처를 보는 것이다. 마음이 텅 비었음을 알아차리는 것 바로 그 것이 부처를 보는 것입니다. 부처라는 것이 우리가 볼 수 있는 어떤 대상 물체가 아니죠? 마음이 공함을 깨닫는 것 그 것을 알아차는 것 자체가 부처입니다. 마음이 공함을 깨닫는 것! 그러니 깨어나세요.

 

시방세계 모든 부처는 마음이 없다. 마음이 없음을 보는 것이 부처를 보는 것이다. 아주 간단하고 선명합니다! 완전히 단도직입적입니다. 무심을 보는 것이 부처를 보는 것이다. 후회없이 네 자신을 포기하는 것이 가장 위대한 자비이다. 움직임과 고요함을 초월한 것이 최상의 참선이다. 중생은 움직이지만 아라한은 고요하다. 그러나 이 둘을 초월한 경지가 바로 최상의 참선이다. 이러한 이해에 도달한 자는 애쓰지 않고 모든 형상에서 걸림이 없으며 치료하지 않고 모든 병을 치유한다. 이러한 것이 선의 위대한 힘이다. 주목해야 할 부분이 이어집니다.

 

현실을 보기 위해 마음을 쓴다는 것은 망상이다. 여러분의 생각하는 마음으로 현실을 보고자 애쓰는 것은 허깨비와 같습니다. 마음을 내지 않고 현실을 보는 것이 진정 깨어있음 이다. 아주 중요한 부분입니다. 생각의 마음을 쓰지 않고 진리를 보는 것이 알아차림이고 깨달음입니다. 질문있습니까?

 

DNA는 무엇입니까? 의사에게 가세요. 많은 학자들의 말에 따르면 우리 인간은 생존기계라고 말을 하는데요 재생하고 재상하고 또 재생해내기 위해 우리가 여기 존재하는 거라는 군요. 복제 복제 복제! 먹고 자고 섹스하고. 먹고 자고 섹스. 또 다른 개체를 또 만들어내고 이 같은 행위를 계속 반복하는 제조기계라는 것이죠. 여기서 질문은 DNA가 과연 무엇인가 입니다. 우리는 DNA에 의해 번식되는 기계 즉 생물체입니다. 맞는 말 같죠? 마음의 성품을 보지 못한 자에게는 이 말이 맞습니다. DNA는 재생해내는 단순 기계일 뿐입니다. 많은 과학자들이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일전에 말씀하신 책 이기적 유전자<Selfish genes>에 의하면 과학자들은 우리의 존재 이유가 단지 DNA를 자손에게 물려주기 위한 것이라고 피력한 바 있습니다. DNA를 실어나르기 위해 존재할 뿐 학교에 가기 위해서도 직장을 구하기 위해서 이성과 사랑에 빠져서 결혼을 하거나 여행을 하거나 불법을 공부하기 위해서도 또한 월드컵에 우승하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요?  유감입니다만 가끔은 존재의 이유를 철저하게 월드컵 우승에 부여할 때도 있었죠? 자본주의적 DNA 부품의 삶. 아자! 아자! 월드컵 파이팅! 승리를 위해 이 물건을 사세요.

 

많은 사람들이 인류는 DNA 제조공장이며 DNA에 의해 만들어졌으며 그 것의 전수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생물학적 관점으로 보셔도 생애 최고의 순간은 바로 2세를 만들어내는 과정에 있죠? 2세를 탄생시키는 것은 DNA를 전해주는 것과 다를 바가 없겠죠? 꽃은 져서 사라지지만 그 것의 DNA는 유전되는 것과 같은 원리입니다. 원초적 본능이죠? 이론가들은 이 것이 인류의 유일한 존재 이유라고 말합니다. 옥스포드 대학의 리처드 도킨스 교수의 유명한 책 이기적 유전자에 소개된 이론 맞나요? 아주 흥미롭습니다. 인류의 유전자나 DNA는 이기적이라는 이론입니다.

 

DNA는 스스로의 생존을 위해 우리 안에 존재하며 인류를 지속시킵니다. 그 외 다른 이유가 없다는 군요. 아주 특이할 만한 지적이고 사실 그러합니다. 동물적 생존본능의 관점에서 보면 말이죠. 딱 맞아 떨어지는 이론입니다. 그러나 주목해야 할 점이 하나 더 있습니다. 인간으로서 우리는 의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마음 즉 귀하고 섬세하고 신성하고 유일한 의식이라고 하는 것에 대한 인식 없이 산다면 우리가 DNA 복제 기계일 뿐이라는 것에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저도 100% 믿을 수 밖에 없습니다. 그 것이 싫어서 제가 승려가 되었는지도 모르겠어요.

 

그러나 우리는 또한 생각을 하고 산다는 것을 압니다. 생각이란 것은 자동적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죠? 누군가를 때립니다. 이렇게 때리면 동물의 경우는 바로 달려듭니다. 그러나 인간은 나이가 들면 점점 더 복잡한 사고체계를 가지게 되죠? 물론 동물도 생각을 하긴 합니다. 개도 생각을 하죠. 덕숭총림 수좌스님이시고 화계사 회주이신 설정 큰 스님께서 외국 스님들과 함께 한 자리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동물들도 생각을 합니다. 단지 차이가 있다면 그 생각을 표현할 수 없다는 것.

 

수덕사 암자 근처에 개가 두 마리 있는데 어떤 개는 아주 슬픈 업을 가졌고 한편 다른 개는 항상 Boss의 업을 가지고 있었어요. 그래서 손님이 와 약한 개에게 먹이를 주어도 두목 개는 아주 멀리서도 쫓아와 그 먹이를 혼자 다 먹는답니다. 손님이 절에 오면 처음에는 막 짖어대다가 점점 안면이 익으면 좋다는 표현을 하더라구요. 처음에 짖는 의미는 내가 너보다 여기 먼저 왔다 라는 일종의 텃새이겠죠? 내가 여기 먼저 왔다. 이와 같이 개도 생각이 있습니다. 단지 말로 표현하지 못할 뿐입니다.

 

또 하나 다른 점은 인간만큼 복잡하게 생각하지 못한다는 거죠. 그렇기 때문에 자아성찰 반조를 못하는 것입니다. 동물의 수준에서 볼 때 한 방 때리면 곧 바로 반응을 하죠. 또한 많은 인간들도 이렇습니다. 이 몽둥이로 거리에 나가 지나가는 사람10명에게 직접 실험해 보십시오. 십중팔구는 아마도 10명 전부 바로 반응이 올 겁니다. 동물적 본능의 차원에서 이기적 유전자는 명백한 이론입니다. 동식물적 생존 차원에서는 그렇겠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생각이 점점 맑아진다면 이유 없이 한 방 때려도 왜 때리시는지? 제가 뭘 잘못했는지요? 라고 반응을 할 것입니다.

 

예수님도 누가 왼쪽 뺨을 때리면 이렇게~ 하셨죠? 단순한 이 행동에 아주 값진 교훈이 담겨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반조를 할 줄 알면 이기적 유전자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의식의 자각을 통해 DNA의 통제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입니다. 저항하거나 도망가는 것은 DNA의 본능적 반응이지만 동물적인 차원이죠? 동물은 오로지 물어뜯는 반응을 보이거나 자기보다 강한 상대를 만날 경우 도망갈 뿐입니다. 대부분의 인간도 이와 같죠?

 

하지만 예수나 부처 간디 마틴 루터 킹 존 레넌과 같은 분들은 우리에게 다른 길을 보여주었습니다. ! 나에게 안 좋은 일이 생겼을 때 죄송합니다. 제 잘못입니다. 또는 제가 어떻게 변하면 되겠습니까? 다신 이런 일이 없도록 제가 당신께 어떻게 해야 될까요? 이런 차원은 더 이상 DNA적 차원을 벗어난 경지이겠습니다. 동물적 본능에서 벗어난 자유로운 경지입니다. 이렇게 되면 오직 일체중생을 이롭게 하기 위해 DNA를 잘 활용할 수 있을 것입니다. 죄송합니다.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아주 중요한 가르침이죠? 진정으로 동물만이 아니라 대부분의 인간들이 이렇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DNA의 욕구에 지배당하면서 말입니다.

 

아까 이 거사님께서 질문을 아주 잘 표현해 주셨는데요 DNA가 신입니까? 그렇습니다. 신보다 더하죠.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말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DNA는 신보다 더 강력할 것입니다. DNA는 신이라는 개념과 비슷한 것 같습니다. 우리의 삶을 완전 지배하니깐 말입니다. 이런 이유에서 DNA가 생물학적으로 유기적으로 유기체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많은 학자들도 DNA가 신이라고 칭합니다.

 

그러나 나는 무엇인가? 하며 내면에 물으면 모든 잡념이 멎습니다. 보고 또 보다 보면 진짜 한 물건도 없다는 것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 자리! 생각이 일어나기 전 그 자리에는 한 물건도 없다는 말씀입니다. 욕구도 없고 화도 없고 두려움도 없고 애욕도 텅 비어 있습니다. 그 실체가 없다는 말씀이지요. 이 진리를 깨닫게 되면 진정 자유자재의 삶을 살 수 있을 겁니다. 반응뿐만 아니라. 모든 것은 여러분의 선택입니다. 한 대 치든지 미안하다고 하든지.

 

예수님처럼 다른 쪽 뺨을 내밀 수도 있겠지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처형되었을 때도 아버지! 저들을 용서하소서 저들이 무슨 짓을 하는지 모르나이다. 예수께서 너희들 틀렸어. 모두 지옥으로 향하리라 하지 않았습니다. 사실 예수님은 스스로에게 말을 하고 있었던 것이죠. 실제로 누군가가 여러분에게 아주 나쁜 짓을 했다면 과연 몇 번이나 예수님처럼 반응했습니까? 저 사람을 용서해야지! 저 사람은 자기도 모르고 행동한 것이니깐. 이렇게만 한다면 DNA의 본능적 동물적인 세상에서 초월할 수 있는 것입니다. 습관적이고 동물적이며 무의식적인 기계적 반응에서 말입니다. 이를 끊으면 자비와 사랑을 실현하는 진정한 인간이 되는 것입니다. OK?

 

마음을 제대로 들여다 보면 DNA따위는 신도 아니고 파워도 없고 기계도 아님을 알 수 있을 겁니다. DNA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DNA DNA가 아닙니다. 그러나 마음을 제대로 살피지 않으면 DNA가 명령하는 대로 살아갈 수 밖에 없게 될 것입니다. 아시겠죠? 아주 좋은 질문이었습니다. 모든 것은 마음에 의존한다. DNA에 대해서 아무리 잘 이해한다 해도 삶에 궁극적인 도움이 되지는 못합니다.

 

자신의 마음을 잘 볼 수 있다면 어떠한 상황에서도 물론 우리는 가끔 화도 나고 짜증도 나지요. 인간이니깐요. 일부에서는 완벽한 인간이 되고자 수행한다고 하는데요. 저는 이렇게 자주 얘기합니다. 수행은 완벽해지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걸림없이 살기 위해 수행하는 것입니다. 화나면 화내세요. 부모 되시는 분들 아이들 키우다 보면 가끔 화내잖아요? 친구 때문에도 실망하거나 힘들게 해서 화가 나죠? 누구라도 걱정을 하며 삽니다. 걱정을 안 한다면 무감각한 사람이겠죠? 누구나 가끔은 슬퍼집니다. 우리는 인간이기에. 그러나 이런 것에 집착하지만 않으면 되는 것입니다. 이 것이 요점입니다.

 

이런 감정적 경험에 집착할 때 그러면 슬픔의 감옥 두려움의 감옥 질투의 감옥 속에 갇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마음을 제대로 보면 이 모든 경험이 현실도 아니며 현실이 아닌 것도 아니라 오직 공함을 알게 됩니다. 현실이라고도 비현실이라고도 이름 붙이지 마세요. 그냥 관합니다. 이 것이 참선의 힘 정력입니다. 나는 무엇인가? 하며 참선을 하면 모든 생각이 일어났다 사라지고 다시 일고 사라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혹자는 참선을 모든 것을 끊는 것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완전히 텅 비어야 한다고 말이죠. 그런 것이 아닌데 말씀입니다.

 

생멸하는 모든 과정을 지켜보는 것! 일어나는 것도 공하고 사라지는 것도 공함을 바라보다 보면 이 생멸 자체가 본래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것이 진정한 자유입니다. 이렇게 걸림이 없어지면 화 두려움 걱정 따위가 일어나도 자유로우며 일어나지 않아도 아무 문제가 없게 되는 것이죠. 이 것이 생사로부터의 자유입니다. 아주 흥미로운 부분이죠? 혹시 질문 있습니까? 없군요. 좋습니다. 28쪽 보겠습니다. 마지막 부분입니다.

 

깨달은 자는 일체가 모두 나에<내 마음>에 달려있음을 아는 자이고 깨닫지 못해 알지 못하면 나는 일체 현상에 끌려다니게 되는 것이다. 실체에 끌려다니게 되면 본래 가짜인 것이 진짜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그대가 현상들에 의존하면 진실이 거짓이 된다. 그대가 현상에 의존하면 모든 것이 거짓이 된다. 일체 모든 것이 그대를 의존할 때 모두 진실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현자는 실체를 찾기 위해 마음을 쓰지 않으며 마음을 찾고자 실체를 쓰지 않으며 마음을 찾고자 마음을 쓰지도 않으며 실체를 찾고자 실체를 쓰지도 않는다. 그의 마음도 일어나지 않고 실상도 일어나지 않는 것이다. 마음과 실체 이 둘은 본래 고요하기에 그는 항상 삼매에 들어있는 것이니라. 대단한 대목입니다. 흥미롭습니다.

 

현실<실체>! 우리는 현실이라는 개념에 대해 계속 얘기하고 있습니다. 현실<실체>이 무엇일까요? 요즘에는 Rality TV라는 프로그램도 방영되고 있죠? 그 것이 실제 현실이라면 맙소사! 큰 일 난 거죠? 다행스럽게도 우리는 그 현실이 현실이 아님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TV 속의 현실이라 부르죠. 단지 Show 자나요? 진짜가 아닌 우리는 현실을 이해합니다. 며칠 전에 발생한 아주 비극적인 사건인데요. 시골의 한 초등학교 교사가 소풍을 가서 술에 취했습니다. 어제 실린 인터넷 신문에 의하면 그 교사가 만취 상태에서 학생을 강간했다는 내용입니다.

 

그 사건 전에는 이 건 좋고 나쁘다는 것이 모두 분명했습니다. 그러나 술을 마신 후에는 나쁜 짓을 저질렀습니다. 그런데 술에서 깨자 오~ 맙소사! 내가 지금 무슨 일을 저지른 거야? 이렇게 어떠한 상태에 끌리면 실수를 범하게 됩니다. 정신이 말짱한 상태에선 하지 않는 일을 술에 취하게 되면 그 또 다른 상태<현실>에서 자기도 모르게 일을 저지른 것이죠. 그래서 사람들은 이렇게 멍청한 일을 저지르는 것입니다. 술 취하면 그 건 술 취한 현실이거든요. 즉 뭐든지 맘대로 할 수 있는 현실이 되죠? 다시 말해서 나만의 자유 상태라고 표현할 수도 있겠어요. 아주 감정적인 자유요.

 

취한 사람과 멀쩡한 사람이 둘 있다고 칩시다. 취한 사람에게는 그 세계가 실제고 자기만의 현실입니다. 그러나 말짱한 사람이 보면 미쳤군. 제 정신이 아니야 하겠죠? 달마대사의 요지가 바로 이 것입니다. 현실에 끌려다니면 즉 자신이 만들어낸 현실에 의존하면 스스로를 잃게 된다. 반면 현실이 여러분께 의존한다면 그 때는 얘기가 달라지겠죠?

 

누구라도 참선으로 진정으로 내면을 관하면 일체가 공함을 알게 될 것입니다. 일체는 본래 공하다. 그래서 즐거울 땐 즐거울 뿐! 슬플 땐 슬퍼할 뿐! 집착 없이 말입니다. 일체 현상이 당신의 마음에 의존한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현실과 비현실의 개념에서 멀어졌을 때 진정한 자유를 얻는 것입니다. 다시 한 번 보겠습니다.

 

깨달아 알면 실체가 그대를 따르고 깨닫지 못해 알지 못하면 그대가 실체를 따르게 된다. 슬픈 현실 실망스런 현실 미친 현실 바쁜 현실 실체가 그대를 따르게 되면 실체가 아닌 것 또한 실체가 된다. 그러나 그대가 실체를 따르면 실체 또한 허구가 된다. 그대가 실체를 따르면 모든 것이 거짓이 된다.

실체가 그대를 따를 때만이 모든 것이 실재인 것이다

 

그러므로 현자는 실체를 찾기 위해 마음을 쓰지 않는다. 현실을 찾고자 마음을 쓰지 마십시오. 마음을 찾고자 실체를 쓰지 않으며 마음을 찾고자 마음을 쓰지도 않으며 실체를 찾고자 실체를 쓰지도 않는다. 그의 마음은 실체에 나타나지 않으며 실체 또한 그의 마음 속에 나타나지 않는다. 마음과 실체 이 둘은 고요하기 때문에 즉 공하다는 말씀입니다. 마음도 공하고 실체도 공하기 때문에 그는 항상 삼매 속에 머문다.

 

여러분의 현실이 실재라고 믿습니다. 친구한테 화가 났다고 합시다. 화가 난 당신의 현실과 친구의 현실이 분리되어 존재하겠죠. 당신은 화가 났고 친구는 헷갈릴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의 화난 현실이 실제라고 믿으면 진짜 그렇게 되는 것이에요! 그래서 사람들은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고 싸우는 겁니다. 왜 당신은 나의 세계를 이해하지 못하는 거야? 친구는 나름대로 자신의 헷갈리는 세계만을 고집합니다. 그래서 화를 내는 친구의 세계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둘 모두 공을 통찰한다면 마음도 비었고 특히 당신의 특별한 현실이 말입니다. 이를 곧 삼매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즉 흔들림 없는 마음.

 

화나면 화내고. 슬프면 슬퍼하고. 즐거울 땐 즐거워하고. 웃을 땐 웃고. 그러나 이 모든 감정에 집착하지 않는다면 본질적으로 이 모든 것이 공함을 안다면 비록 그 감정적인 경험을 겪고 있다고 하더라도 실제라 믿고 집착하는 것과는 천지 차이가 납니다. 이 때는 고통이 따를 수 밖에 없는 것이죠. 그 감정이 계속 여러분에게 남아있기 때문이죠. 계속 어깨에 메고 있으니깐요. 네가 먼저 내려놓지 않으면 나도 내려놓지 않을테야! 그 때까지 절대로 난 화를 참지 않을 것이다! 도대체 뭘 잡고 있는 겁니까? 있지도 않은 걸 말이에요?                     

 

이 진리를 깨닫게 되면 화는 화일 뿐! 슬픔은 그냥 슬픔일 뿐! 두려움도 두려움일 뿐! 행복은 행복일 뿐! 어떠한 상황에서도 여러분은 자유롭게 될 수 있습니다. 비록 인간일지라도! 이 것이 요점입니다.

 

중생심이 생기면 불성은 사라지고 중생심이 사라지면 불성이 나타난다. 마음이 나타나면 실체가 사라지고 마음이 사라지면 실체가 나타난다. 그 무엇도 본래 서로 의존하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된 사람은 도를 찾은 것이다. 그 어떤 것도 다른 것에 의존하지 않는다. 즉 아무 조건이 없다는 말입니다.

 

이렇다면 이러할 것이고 저렇다면 저렇게 느낄 것이다 의 조건적인 것이 아니라 모든 조건이 본질적으로 텅 비었음을 깨닫는다면 그 것이 도를 찾는 것이다 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정도를 말씀입니다. 그리고 마음은 그 어디에도 의존하지 않는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항상 깨달음의 상태에 머무는 자이다. 여기까지가 달마어록의 결론에 해당되겠습니다.

 

사실 정말 말이 길어졌는데요. 너무~ 말을 많이 했습니다. 이 모든 것들은 오직 한 곳을 가리키고 있을 뿐입니다. 우리의 내면을 바로 보라! 마음을 들여다 보십시오. 마음을 보기 위해 마구 생각을 일으키지 마시고요 마음을 어떤 대상으로 보라는 말씀도 아니고요. 나는 무엇인가? 다른 잡념에 빠지지 말고 나는 무엇인가? 하고 내면으로 들어갈 때 What am I? 라고 묻는 그 것은 도대체 무엇인가? 무엇이 나는 누구인가? 하고 묻는가? 어험 소리를 듣는 것이 누구인가? 누가? 무엇이?

 

이렇게 바라볼 때 중국말을 빌리자면 회광반조 본 마음의 빛을 따라가는 것! 내면의 빛을 바라보는 것! 외부적인 요소들 즉 감정 인식 경험 기억 게임 쇼 영화 꿈 그림자 세상 말고요. 이러한 알아차림은 어디에서 오는가? 이를 보는 놈이 누구인가? 보고 또 보고 볼 때 아무 것도 없이 텅 비었어요. 완전하게 텅 비었을 뿐입니다. 그 것! 입니다. 이 것이 바로 우리가 수행하는 바입니다.

 

지난 몇 주 동안 봤던 모든 글들은 오직 이 것만을 가리키고자 할 뿐입니다. 나는 무엇인가? 이해도 개념도 철학도 아닙니다. 불법은 실제로 바로 보는 것입니다. 실제로 보고 텅 비었음을 깨닫는 것을 성취하고 그리고 공함을 사용하는 것! 어떤 것이 아니라 그 경험을 사용해서 일체 중생을 이롭게 하는 것입니다. 지난 몇 주간 계속된 법문에 참석해 주셔서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여러분이 지금 실천해야 할 것은 오직 한 가지! 여러분은 너무 많은 준비과정을 겪었고 너무 많은 말을 들었습니다. 아마 달마대사나 부처님께서 저를 때리실 겁니다. 숭산 대선사 님께서도 저를 심히 나무라실 겁니다.        

 

오직 할 뿐! 매일 10분간만! 10분만 앉으셔서 나는 무엇인가? 물어보십시오. 이뿐입니다. 이 모든 가르침의 핵심입니다. 이렇게 해보시면 정말 경이로운 경험을 하실 겁니다. 일체가 완전히 공함을 체득하시게 될 겁니다. 그렇게 되면 그 어떤 것도 여러분을 어쩌지 못합니다. 그 어떤 것도 여러분을 흔들리게 할 수 없으며 통제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 어디에도 빌고 매달릴 필요 없습니다. 두려워할 것도 아무 것도 없습니다.

 

오직 나는 무엇인가? 할 뿐! 내면을 관하다 보면 뭔가가 환해질 것입니다. 본래 환했던 것이 환하게 밝아올 것입니다. 바라옵건대 순간 순간! 걷고 서고 눕고 움직이나 정지하거나 매 순간마다 어떠한 경우에도 나는 무엇인가?를 놓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 것이 바로 달마대사께서 전하고자 하신바 달마어록의 요지이며 동시에 불법의 본질이기도 합니다.

이상 현각스님 달마어록8 강론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