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을 닦는 방법

2007. 6. 9. 16:41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대승기신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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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하고 편안하게 살았던 사람들도 나이 들면 허무를 느낀다. 한번도 고통을 느껴보지 못하고 산 사람들이 어떻게 고통에서 벗어나려는 생각을 갖겠나? 외로움에 대한 자각이 있어야 대비심이 일어난다. 대비관 뿐 아니라 서원관을 세워야 한다.

 

이런 생각을 하고 곧 용맹스럽게 바라옵건대 제 마음이 분별을 떠나 시방세계에 두루하고 착한 모든 공덕을 수행하며 미래가 다하도록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방편으로 모든 중생들을 괴로움에서 건져 그들에게 열반의 즐거움을 얻게 하고자 합니다 하고 큰 서원을 세워야 합니다. 이런 원력을 일으킴으로 모든 삶이 있는 곳에서 좋은 모든 일들을 능력에 따라 처리하고 배우고 익히는 일을 버리지 않아 마음에 게으름이 없어야 한다.  

 

이런 생각이란? 대비심 곧 중생들이 깨치지 못하고 사는 것을 안타까워하는 마음이다. 부자가 되려 해도 계획을 세워야 한다. 성실해야 하고 원칙을 지킬 줄 알아야 하고 신의와 인내심을 갖춰야 한다. 하지만 아무리 다 갖춰도 부자가 되겠다는 마음을 갖추지 않으면 부자가 못 된다. 수행도 마찬가지다. 진리를 깨쳐야겠다는 마음을 내야 한다. 그 다음 정진관이다. 그 전엔 무상 고 무아 같은 법의 모습을 잘 관찰하는 법상관이 있다. 이 것이 위파사나다.

 

聞思修 법을 듣고 사용하고 닦으며 지혜를 이루기 때문에 전부 위파사나다. 법엔 아공 법공이 있다. 아공은 자아<眞我>가 있는데 공하고 법공은 자성<>이 있는데 공하다. 그래서 불교는 一切智者는 존재하지만 창조적 神은 존재하지 않는다 말한다. 힌두는 그와 반대다. 왜냐 하면 불교는 위파사나가 있어 이렇게 주장하는 것이다. 自我는 명백하지 않고 神은 사유는 가능하지만 현실에서 증명이 안 된다.

 

그러므로 사유 분석을 통해 밝혀낼 수 밖에 없다. 만약 자아나 신이 영원히 독립된 실체로 존재한다면 우리와는 관계가 없다. 기도를 해도 감응이 안 온다. 감응이 온다면 상호관계이므로 독립된 실체라 볼 수 없다. 자아도 독립된 실체가 아니다. 매 순간 바뀌는 자아다. 상호관계성 속의 연기다. 그래서 중생이 있기 때문에 부처가 있는 것이지 중생이 없으면 부처가 필요 없다. 진성연기 부처와 중생 사이엔 참 성품이 연기하는 것이다. 불보살은 실체가 없는 여여다. 텅 비어 일어나고 사라짐이 없다. 사유를 하면 아공과 법공은 다 번뇌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러면 실제 어떻게 증명하나? 수행 닦아보자는 것이다. 정념은 관 직관이다. 어떤 사상이 개입되어 보는 것이 아니고 보고 바로 알아차리는 것이다. 모두 매 순간 무상하게 바뀐다. 바뀌는 속에 자아나 성품은 존재하지 않는다. 불교의 사유는 반성적 비판적 사유다. 선정을 바탕으로 분석적 사유를 하는 것이다.

 

이 세상엔 2가지 원인이 있다. 직접원인과 간접원인 그 것을 인연이라 한다. 진리를 깨칠 수 있는 인연은 열심히 심어야 한다<선근>. 고통을 일으키는 원인은 열심히 제거해야 한다. 제거하는 방법이 바로 사유 정념 알아차림을 통해 확인해 가며 확인하는 것이 바로 닦음이다.

125. 이상 지운스님 관을 닦는 방법2<대승기신론> 강론 중에서

               

아난존자와 마등가 이야기에서 부처님은 몸이 얼마나 부정한 것인지 설법하셨다. 몸은 내가 아니고 내 것이 아니구나 확실히 깨닫게 하는 방법 부정관이다. 1.凡夫覺<감각>감각을 잘 관찰하면 몸이 사라진다. 몸 삼매를 얻는다. 2.相似覺<의식>탐진치교만의 51개 요소를 타파하면 묘관찰지. 3.隨分覺<말라식>말라식을 타파하면 평등성지 2-7 4.究竟覺<아뢰야식>아뢰야식을 타파하면 대원경지 8-10지에 이른다. 범부각만 이뤄도 음욕이 자제 된다. 상사각은 초지 아라한의 경지다.    

 

모든 중생이 시작이 없는 때부터 모두 무명이 훈습한 것 때문에 마음이 생멸하게 되어 이미 모든 몸과 마음의 큰 괴로움을 받았고 현재도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다그침이 있으며 미래에 받을 괴로움이 그 끝이 없어 버리고 떠나기가 어려운 데도 이를 깨닫지 못하니 참으로 불쌍하다는 사실을 생각해야 한다. 

 

나옹스님이 말했다. 생사란 실제로 나고 죽는 것이 아니다. 한 생각 일어나는 것이 생이고 사라지는 것이 사다. 실제 있는 것이 아니다.

 

중생들이 고통 속에 있으면서 못 헤어나오는 것을 원효스님은 대비관이라 했다. 대비심이 일어나면 보리심이 일고 보리심 때문에 바른 깨달음을 얻는다. 자아는 불평등을 야기한다. 그래서 남의 어려움을 보고도 외면하게 된다.

설산동자 무상게. 諸行無常 是生滅法 生滅滅而 寂滅爲樂 세상의 모든 일은 항상 하지 않고 바뀐다. 한 번 나면 반드시 없어진다. 나고 죽음에 끌려가지 않는 마음이 없어지면 적멸의 고요가 즐겁다. 고통 번뇌가 다 소멸한 적멸은 참으로 소중하다. 자기 한 몸을 희생해 많은 사람을 구하겠다는 것이 대비관이다. 인과 연이 일어났다 사라지는 모습을 잘 분별하는 것이 위파사나다.     

124. 이상 지운스님 관을 닦는 방법1<대승기신론> 강론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