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와 관은 함께 수행해야 함을 밝힘

2007. 6. 9. 16:40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대승기신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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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행자는 오고 가며 앉고 눕는 모든 삶 속의 모든 생활에서 모두 지와 관을 함께 수행해야 한다.

이른바 모든 법의 자성이 생겨나지 않았다는 것을 생각하지만 다시 인연화합을 통해 선과 악으로 나타나는 괴로움과 즐거움 같은 과보가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생각하고 비록 인연화합을 통해 선과 악으로 나타나는 과보를 생각하지만 또한 그 자성은 얻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사마타는 한 대상에 집중하므로 그칠 止를 쓴다. 그러나 위파사나는 움직이는 놈이 대상이라 알아차릴 觀을 쓴다. 몸의 움직임 생각의 흐름을. 위파사나는 일상생활 속에서도 닦을 수 있다. 먼저 지행을 하면서 관행을 한다. 진여엔 不變과 隨緣이 있다. 불변은 空이며 수연은 不空이다.

 

컵 하나에는 현상의 모습과 본질의 공한 모습을 다 갖고 있다. 사마타만 닦으면 컵 자체의 텅 빈 모습은 볼 수 있지만 현상계의 상호관계 속에 흘러가는 모습은 볼 수 없다. 그러면 어떻게 봐야 하나? 현상계는 매 순간 인연을 갖고 모습을 달리해 가며 동시에 그 속엔 자아와 실체가 없는 것이 같이 가는 것으로 봐야 한다.

 

이와 같은 사실을 모르면 어떤 결과를 초래할까? 선악 손익 같은 상대적인 것이 나타나고 고통이 따른다. 사람도 자연도 모든 관계성 속에 있다. 하지만 독립된 실체가 없다는 것을 모르고 현상계가 있다 생각하면 아둥바둥 살아가게 된다. 하지만 이 것을 아는 수행자라면 자유로워질 것이다. 현상계와 본질은 원래 하나다. 텅 비어 있는 것은 사마타로 꿰뚫어 보고 바깥 세계의 관계성을 갖고 있는 것은 위파사나로 꿰뚫어 보는 것이다. 이 두 관계는 서로 분리돼 있는 것이 아니다.

 

止를 닦는다면 세간에 대한 범부의 집착을 다스리고 지를 닦는 것이라면 두 가지 허물을 여읜다. 하나는 바로 범부의 집착을 없애 그가 집착한 아집과 법집의 고정관념을 없애주기 때문이다. 오음에 대한 이승의 약하고 두려운 생각을 버릴 수 있으며

 

집착엔 아집과 법집 내 속에 뭐가 있다는 아집과 나와 분리되어 뭔가 있다는 법집이 있다. 사마타 수행을 하면 아집과 법집을 다스리게 된다. 사마타 수행을 하면 반드시 증가 또는 감소하는 것이 있다. 마음이 고요해지고 맑아지는 것이 증가하고 반대로 번뇌는 감소한다. 관을 닦는다면 자비가 없는 이승의 좁은 마음을 다스리고 좋은 일을 하지 않는 범부의 마음을 떠날 수 있다.

 

오음=오온 색수상행식<육체 감수 표상 의지 판단>을 말한다. 색은 물질이다. 예를 들면 떡을 보고 맛있겠다 생각하고 떡에 손이 가고 먹어보고 맛이 없다 판단하는 것이다. 이렇게 육체와 정신이 같이 혼합된 것이 인간이다. 육체는 변하기 때문에 두렵다. 사마타 수행을 하면 두려움이 사라진다. ? 계속 공부해 마음이 맑아지면 바깥 경계를 찾을래야 찾을 수 없고 안의 자기 모습을 알래야 알 수 없다. 안과 밖이 텅 비어 있기 때문이다. 비어 있는 놈은 일어나고 사라지는 생멸이 없다.

 

사람은 삶과 죽음을 얼마나 두려워하는지 모른다. 나이 들면서 점점 더 두렵게 생각한다. 사마타 수행을 하면 몸이 가벼워지는 현상이 생긴다. 번뇌가 감소해서 일어나는 현상이다. 대신 머리는 무겁다. 마음의 나쁜 것이 빠져나가는 현상이다. 마음이 가벼워지면 몸도 가벼워지고 기쁨이 인다. 여기서 우리는 몸과 마음이 상호관계를 갖고 있다는 사실을 빨리 알아채야 한다. 몸 상태는 마음의 상태다. 그래서 자세를 보면 마음 상태를 알 수 있는 것이다.  

 

사마타 수행을 하게 되면 범부의 집착이 다스려지고 자신의 몸과 마음이 변해가는 모습에도 두려움이 없어지고 위파사나 수행을 하면 좁은 마음이 없어지고 큰 마음이 생기며 게으른 마음이 없어진다.

126강 지운스님의 지와 관은 함께 수행해야 함을 밝힘<대승기신론>강론 중에서     

 

사마타를 닦고 마음이 고요한 상태에서 위파사나를 닦는다. 위파사나 수행은 인연에 의해 일어나고 사라지는 선악의 모습 아름답고 추한 모습을 관찰하는 것이다. 생멸의 모습을 관찰하면서 생멸의 모습이 본래 없음을 아는 것이다. 인연으로 이루어진 세계는 자아가 없고 독립된 실체가 없다. 사마타 수행은 아집과 법집을 타파한다. 또 하나 매 순간 정신과 육체가 바뀌는 두려움에서 벗어나는 이익이 있다. 사마타 수행을 하면 집착과 번뇌에서 벗어나고 위파사나 수행을 하면 사랑과 연민심이 자꾸 커진다.

 

이 뜻으로 지와 관은 서로 돕고 떨어질 수 없다. 지와 관을 함께 닦지 않는다면 깨달음에 들어갈 수 있는 길이 없다.

 

<-禪定-不動-> 사마타 止는 선정을 얻는데 아주 유용하다. 선정이란? 깨끗하고 밝아지는 마음이 증장하고 번뇌가 없어지면서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 부동 쪽으로 간다. 부동은 空의 모습이다.

<-智慧-緣起<隨緣>-不空> 위파사나 觀은 지혜를 얻는 방법이다. 지혜란? 연기는 동하는 모습이다. 인연을 따라가는 모습 수연이다. 수연은 바로 不空이다.

 

지관쌍수란? 예로 들면 등불<지혜>이 바람<경계>에 꺼지지 않게 하려면 바람막이<선정>가 필요하다. 대상에 따라 마음이 동요된다는 것은 선정심이 약해 그렇다. 그러나 선정만 닦으면 어찌되나? 사물을 꿰뚫어 볼 수 있는 지혜가 생기지 않는다. 그래서 보고 있지만 보지 못하는 부분이 생긴다는 것이다. 잘못하면 혼침이 온다. 대신 지혜만 닦고 선정을 닦지 않으면 바깥 경계에 계속 마음이 끌려 다닌다. 잘못하면 마음이 들뜨는 도거가 온다. 그래서 지와 관을 쌍수 했을 때 지혜의 등불은 선정이란 든든한 방패막이에 의해서 꺼지지 않고 계속 비출 수 있다.      

 

몸이 사라진다는 것은 몸 삼매다. 집중력에 의해 사라진다. 그러면서 마음의 동요가 없는 선정에 들게 된다. 그러면 의식만 남게 되고 이 때부터 의식이 정화되기 시작한다. 결국 뭐가 사라지나? 몸은 마음의 현상이므로 모양과 색깔을 결정하는 고정관념이 타파된다. 그 중 모양 상<->이 사라진다. 想의 심리가 사라지면 몸이 없어진다. <-作의식<마음의 동요>-感覺--선악구별 思>. 화두선이 바로 지관쌍수다. 지관수행 화두선이 따로 아니다. 지관쌍수는 화두 일문에 다 포함된다.  

 

止와 觀이라는 두 가지 수행이 서로를 완성시키는 것은 반드시 새의 두 날개와 같고 수레의 두 바퀴와 같다. 두 바퀴가 다 갖추어진 수레가 아니라면 물건을 실어 나를 수가 없고 날개가 하나 밖에 없는 새라면 어찌 그 새가 하늘을 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지와 관을 함께 닦지 않는다면 깨달음에 들어갈 수 있는 길이 없다고 한다.

 

또 중생들은 이 법을 배우면서 바른 믿음을 갖고자 하지만 그 마음이 약하다. 그 까닭은 이 사바세계는 언제나 모든 부처님을 만나 친히 공양할 수 없다는 것을 스스로 두려워하고 있기 때문이다. 믿음은 이루기 어렵다고 걱정하며 공부에서 물러나려고 하는 사람들은 마땅히 여래께서 뛰어난 방편이 있어 믿음을 거두고 보호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이는 한 마음으로 부처님을 생각한 인연 때문에 부처님께서 바라는 사람의 원대로 다른 부처님의 세계에 태어나 늘 부처님을 보고 영원히 나쁜 길을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을 말한다.

 

부처님이나 보살과 감응하려면 기도해야 한다. 기도+명상. 명상하면 기도의 힘이 증폭된다. 믿음엔 외적인 信仰과 내적인 信心이 있다. 眞性緣起 참 성품이 연기한다. 줄로 상호 연결되어 있다. 진성 참 성품은 空이다. 主客이 비어있다. 하지만 아무 것도 없다는 소리가 아니다. 관계성 속에 객체의 실체나 자아가 결여되어 있다는 것을 空이라 한다. 전기 줄도 비어 있기 때문에 전달이 가능하다.          

 

念佛의 念은 기억하는 것 잊어버리지 않는 것이다. 생각 생각이 계속 이어지는 念念相續이다. 이 때문에 부처님과 줄이 연결돼 감응이 일어나는 것이다. 늘 부처님 생각하고 부르면 감응되지 않겠나?

127. 지운스님의 지와 관은 함께 수행해야 함을 밝힘<대승기신론> 강론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