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자가 도에서 물러나지 않는 방편을 보여줌

2007. 6. 9. 16:39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대승기신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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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 염불 발원 모두 원이다. 기도는 개인의 이익을 위한 것이다. 하지만 아상이 더욱 심해진다. 열심히 기도해도 성불은 못한다. 깨닫지 못한다. 기도는 수행이 아니기 때문이다. 부처 되는 길은 자기 노력해야 한다. 내적관찰이다. 수행하다 어려워 불보살에게 보호를 요청할 때 필요한 것이다. 그래서 불교에선 기도란 말을 잘 쓰지 않는다.

 

염불은 극락왕생 하는 것이다. 발원은 연민심이다. 윤회하는 중생들을 구제하겠다는 원이다. 염불은 부처를 계속 생각하는 것이다. 계속 부르면 돌아보게 돼있다. 자꾸 반복하는 자체가 수행이다.

 

이는 경에서 만일 어떤 사람이 한 마음으로 서방 극락세계에 계신 아미타불을 생각하고 그가 닦은 마음의 좋은 뿌리를 회향하여 부처님의 세계에 태어나기를 바란다면 곧 태어나 언제라도 부처님을 보기 때문에 끝내 공부에서 물러날 일이 없다고 말한 내용과 같다. 부처님의 진여에 있는 법신을 보고 늘 부지런히 닦아 익히면 마침내 그 세계에 태어나서 바른 선정에 머물 수 있기 때문이다.    

 

극락엔 여자가 없다. 연꽃에서 태어나기 때문이다. 이 곳에 태어나면 오로지 부처가 될 뿐이다. 과거를 얘기하는 것은 생각 相이고 미래를 얘기하는 것은 생각 思다. 어떤 일을 조작하기 때문에 思다. 念은 현재다. 그러므로 호흡이 끊어질 때마다 바로 부처에게 가는 것이다. 부처님은 어디 계시나요? 어디나 계신다. 그러나 우리 업이 두터워 보지 못할 뿐이다.

 

기도를 하든 염불을 하던 발원을 하던 반드시 회향을 해야 한다. 회향이 없으면 아만이 심해지기 때문이다. 상이 조금이라도 남으면 마구니에게 걸릴 수 있다. 신령스런 거북이는 지나간 자리에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 흔적을 남기면 사냥꾼에게 잡히니까. 그래서 한 생각도 일으키지 않았다는 그 생각까지도 놓으라 말한다. 회향은 흔적을 지우는 방법이다. 다 돌려주는 것이다.

 

염불도 화두와 똑같이 反聞聞自性 소리 듣는 것을 반문하고 자신의 자성을 듣는다. 소리가 들리느냐? 예 들립니다. 그러면 새소리 듣고 있는 그 자아를 들어봐라. 무슨 소리 들리느냐? 아무 것도 안 들리는데요? 그래 그 것이 관음의 법문이니라. 이 것이 자성으로 드는 길이다. 많은 번뇌 망상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중생에게 연민심을 느끼는 것이다. 연민심을 느끼면 번뇌 망상이 사라지고 보리심이 생긴다. 진여란 주관과 객관이 없는 자리다.

 

염불도 염주를 굴리며 느낌을 가지고 하라. 처음엔 잘 안 된다. 염불할 때 자기 소리를 먼저 듣는 일을 하면 의식의 지평이 점점 넓어진다. 그러면 알 하나 하나의 느낌까지 관찰이 된다. 반복하면 마음이 고요해진다. 뭔가 나타나길 바라고 현몽하길 바라지 마라. 바라는 마음이 번뇌다. 설사 뭔가 나타나더라도 집착하면 안 된다. 기도자도 불보살도 다 비어있기 때문이다. 거기서 뭘 바란다면 삿된 길로 마구니에게 가는 것이다. 남편 바람 피운다고 조상신 부르면 온갖 잡신 다 붙어 떨어지지 않는다. 그러니 뭘 부르지 말라. 부르면 온다. 뭔가 욕심의 틈이 조금만 있으면 달라 붙기 때문이다.            

129. 지운스님의 수행자가 도에서 물러나지 않는 방편을 보여줌3<대승기신론> 강론 중에서

 

止觀修 사마타와 위파사나를 같이 닦는다. ? 지는 집중이고 관은 분석이다. 2가지 다 균형이 맞아야 한다. 위파사나의 힘이 강하고 사마타의 힘이 약하면 마음이 산란한 도거에 빠진다. 이와 반대면 혼침에 떨어진다. 예로 촛불=위파사나 바람막이=사마타 바람=경계라면 바람막이가 약해지면 촛불이 흔들리는 이치와 같다. 사마타를 해서 선정에 든다. 선정이란 마음의 동요가 없고 흔들리지 않고 대상에 끄달리지 않는 것이다. 이런 선정의 힘에 의지해서 위파사나를 하는 것이다.

 

사마타 止. 무엇에 집중하는 것인가? 空 無我 마음 의식의 깨어있음에 집중하는 것이다. 주관과 객관이 해체하면서 나타나는 것이 공이다. 사실 공과 무아는 같다. 계속 집중하면 선정이 생긴다. 하지만 집중이 잘 되면 반면 보지 못하는 부분이 생긴다. 예로 몸이 다 사라지면 몸 삼매 상태인데 이는 집중이 잘 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 때 엉덩이 부분의 감각이나 호흡을 관찰한다. 호흡관찰도 들숨 날숨 사이의 틈이 있다. 틈을 보면서 온 몸에서 일어나는 감각의 현상을 같이 관찰한다. 집중이 너무 잘 되면 분석관찰의 힘이 약해져 안되기 때문에 이런 방법을 쓰는 것이다.        

 

祈禱는 빌祈 빌禱 빈다는 뜻이다. 기도+명상이 되어야 한다. 기도란 자기 힘으로 안될 때 불보살이나 신의 힘을 빌어 자신의 원을 성취하는 것이다. 기도는 단순히 화를 면하고 복을 구하는 방법이다. 기도+명상은 염불이 되고 발원이 된다. 기도에도 염불에도 원이 있다. 그러나 염불은 기도가 아니고 기원 발원이다. 불교에서 최고의 발원은 발보리심이다. 진리를 깨치고자 하는 원이 최고의 원이다. 

 

眞性緣起 참 성품이 서로 연기한다. 기도 드리는 자와 받는 자와의 관계는 연기의 관계다. 마치 전기 줄 연결되듯이 서로 둘이 아닌 不二 반야의 상태가 된다. 기도하는 자도 비어 있고 받는 자도 비어 있다. 공이다. 염불은 현재 이 순간의 깨어 있음이다. 자기가 듣는 다는 것은 마음이 과거로 미래로 왔다 갔다 하는 것을 깨우는 것이다. 깨어 있음을 알아차린다는 것은 마음 챙김이다.  

128. 지운스님의 수행자가 도에서 물러나지 않는 방편을 보여줌2<대승기신론> 강론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