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할 때 일어나는 마구니 장애14

2007. 6. 9. 16:42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대승기신론

728x90

지금 이 가운데 대승의 止門에서는 오직 진여의 이치에만 마음을 모으는 선정만 수행하고 다시 다른 곳으로 나아감이 없으므로 첫 번째 법인 선정으로 연마하는 것과 아울러 두 번째 법인 본디 했던 수행에 기대는 것 말고 달리 다른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본디 했던 수행인 대승의 지문에 따라 정념으로 머물라 한 것이다.

 

집착하지 않는다 말한 것은 삿된 법은 바른 법을 어찌하지 못하고 저절로 없어진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마음이 집착하면 바른 법을 버리고 삿된 법을 이룬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집착하지 않는다면 삿된 법이 물러나고 바른 법이 드러난다. 이 것으로 삿된 법과 바른 법은 집착하느냐 않느냐에 따라 그 내용이 달려있다는 사실을 알 것이다. 집착하지 않는 자는 어떤 장애도 여의지 못할 것이 없으므로 이 모든 업의 장애를 여읜다고 말한 것이다.    

 

주관과 객관이 상대하지 않도록 하면 마음이 안으로 모이며 진여의 자리로 들어간다. 집착은 오직 마음 밖에 없다는 사실을 전제로 한다. 오직 마음뿐이다 했을 때 밖의 것에 집착할 필요가 없다. 그래서 마군이가 나타나는 것도 마음에 의해 나타나는 것이다. 번뇌마 오온마 사마 천자마 4마도 마음이 집착해서 일어나는 것이다. 집착하지 않으면 없다.

 

판과 막대기를 마찰하면 타면서 불이 나온다. 불은 어디서 왔나? 판 막대기 아니면 바람에서 생겼나? 인연에 의해 일어난 것이다. 불이 어디 소속되었다 나타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림도 마찬가지다. 붓과 물감과 사람 같은 인연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점은 아무리 인연이 갖춰줘도 그려질 수도 있고 안 그려질 수도 있다. 그리는 사람의 마음에 따라.

 

원효스님은 그러므로 오직 마음뿐이요 마음 밖에 다른 경계가 없음을 알아야 한다고 말했다. 지혜란 비고 고요함을 안다는 것이다. 매 순간 변한다면 고정된 색깔과 모습은 없다. 고정시킬 수 없다는 것은 잡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 것은 비어있는 것이다. 비어 있다는 것은 고요하다는 얘기다. 그래서 몸과 마음이 매 순간 바뀌어 가는 것을 지켜보라는 것이다. 그러면 사물을 고정시켜 보던 우리의 고정관념이 착착 깨져버린다. 어떤 모양과 색깔이 있다는 것은 과거나 미래다.

 

그래서 유식에서 생각=사물이라 말한다. 생각이 왜 사물이냐고? 우리는 사물이란 것이 밖에 있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사실은 마음이 만들어 보는 것이다. 책상에 있는 이 꽃도. 모든 존재는 끊임없이 변하는 파장의 세계다. 끊임없이 변하므로 일정한 모양과 색깔이 없다. 전자 현미경으로 보면 금방 알 수 있다. 이런 모양과 색깔을 마음이 재구성시킨다. 파장의 세계를 모양과 색깔로 구성시켜 보는 것이 마음이다. 생각이 밖으로 튀어나가 보는 세계가 바로 모양과 색깔이 있는 이 세계다. 그러니 생각이 사물이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생각이 사라져버리면 사물도 같이 사라져버린다. 상의 작용이 사라져 버리면 눈을 떠도 이 세계가 보이지 않는다. 접촉이 생기면 감각이 생기고 딱딱하다든지 차다든지 하는 이미지 상이 생기고 상 다음엔 갖가지 변화와 생각들이 일어난다. 상이 사라지면 감각만 있고 아무 것도 없다. 그 때 아! 사물이란 마음이 만드는 구나 알게 된다. 무상<변화>은 공<텅 비어 있음> 불생불멸이다.

 

과거불가득 현재불가득 미래불가득은 末後一句 부처님 최후의 한 마디다. 이 것을 알면 깨닫는다 했다. 과거 현재 미래는 무상의 세계다. 몸이 무상하고 마음이 무상함을 알게 되면 이 것이 심화될 때 보는 마음이 마치 불빛과 같이 대상도 비추면서 동시에 비추는 주체도 비춘다. 그리고 주체도 비어 있음을 보게 된다. 그 때 비로소 마음이 비고 고요함을 알게 된다. 안과 밖이 텅 비어 있게 된다. 알아차림이란 대상도 알아차리지만 주관도 동시에 알아차리는 것을 말한다. 안과 밖에.

 

성성적적이란 말을 쓴다. 객관이 비면 주관도 같이 빈다. 적적이다. 주관이 비추면 대상도 같이 비춘다. 주객을 같이 비추니 성성이다. 성성적적은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주관과 객관은 같이 비어 있고 동시에 같이 비춘다는 말이다.

 

집착하지 않는다는 무슨 말인가? 인식할래야 인식할 대상이 없고 동시에 인식하는 주체도 없다는 말이다. 이랬을 때 집착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다. 마군이가 나타나고 설사 부처님이 법을 하더라도 비고 고요함을 지키고 있으면 마군이가 사라진다. ? 모든 현상은 머물지 않기 때문이다. 아무리 부처님 모습이라도 형상을 같고 있는 것은 오래 머물지 않는다. 그래서 약이색견아 이음성구아 시인행사도 불능견여래. 그리고 쇠로 만든 부처는 용광로에 못 들어가고 흙으로 만든 부처는 물을 못 지나가고 나무로 만든 부처는 불 위를 못 지나간다 했다. 

 

아무리 부처님 형상이라도 상이 있는 것은 무상이란 진리 앞에 속절이 없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나의 형상을 보지 마라. 진짜 부처를 찾으려면 연기를 보라. 연기법을 보는 자만이 부처를 본다 하셨다. 연기는 상호관계성이다. 상호관계란 독립적인 개체는 없다. 공이라는 말이다. 모든 전체가 분리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 것이 부처다. 끊임 없이 변하는 그 자체가 바로 부처의 모습이다. 그러니 내게 절하지 말라 말씀하셨다.               

 

또 하나는 6씨앗에 있는 성품에 있는 길이다. 여기에서 처음에 있는 그 習種性과 그 다음 性種性은 그 위치가 보살이 닦아야 할 10가지 머무는 마음과 보살이 닦아야 할 10가지 행과 보살이 닦아야 할 10가지 회향의 3종류 지위에 있는 현인이 머무는 위치에 있으며 수행의 힘으로 완성된다. 이 뜻은 본엄경과 인왕경에 나온다. 그 가운데 자세한 것은 일도의 가운데 자세히 말한 내용과 같다.

 

또 한 마음으로 부지런히 이 삼매를 배우고 익힌 이는 지금 세상에서 10가지 이익을 얻으니 무엇이 그 10가지 인가? 사마타 수행을 하면 10가지 이익이 있다. 수행은 경제다. 몸이 건강해지고 정신이 맑아지니까. 하지만 수행의 가장 큰 이익은 삶과 죽음의 문제를 해결한다는 데 있다. 

121. 이상 지운스님 공부할 때 일어나는 마구니 장애14<대승기신론>강론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