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바바록의 영지 인도 이야기

2007. 6. 9. 17:04일반/역사·영어·컴퓨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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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바-록의 영지
The shrine of the BaBa-Log

“저는 밝은 햇살과 엄청 넓은 집안에서 동물들과 재미있게 놀면서 컸지요. 저는 백인이 더 우월한 민족이라고 믿으면서 자라났지요.”
‘I grew up in bright sunshine, I grew up with tremendous space, I grew up with animals, I grew up with excitement, I grew up believing that white people were superior.’
인도에서 첫해를 보낸 모든 조타 사히브나 미씨 바바 <꼬마 주인>들은 사실은 대개 영국육군 하사관의 아들이었지만, 자기들이 지방장관의 아들 딸이었으면 하는 감상적인 생각을 모두들 갖고 있었다. 여기에 인도의 지나친 크기도 직접적인 효과를 냈다. 인도하면 제일 먼저 기억에 떠오르는 건 모기장, 유모차 보다는 조랑말, 화장실에서 뱀을 죽이던 아버지의 모습이나 마마에 걸린 보모들 모습이었다. 내피어 가문의 유명한 군 주택지에서 살았던 로사문드 내피어 여사는 종종 다음과 같은 훈계를 받았다. “군인 딸 년은 결코 울지 않는 법이야!”
‘Soldier’s daughters never cry!’
그런가 하면 키플링이 자신의 책에 인용했던 카르낙 가계의 어린애 죤 리벳 카르낙 씨에 대해서는 하인들이 모두 다음과 같은 말들을 했다고 한다. “저 대위의 조그만 아들 놈은 틀림없이 군에서 장교가 될 거야.”
‘Without doubt the captain’s little son will be an officer in the army.’
아무튼 이 사람들이 인도에 관해 맨 처음 공통적으로 떠올리는 이미지는 아야 <보모>에 대한 것이었다.

☞ 원래 앵글로 인디언이란 말은 인도에 있던 영국인 모두를 통칭하던 것으로 공식적으로는 1900년 혼혈 후손 개개인을 부르다 나중에 유라시안이라는 말로 불리고 퍼지게 되었음. 그 후 40년 동안 이 말은 계속해서 같은 어원으로 사용되어 오다가, 필자는 본 책자에서 이를 구별하기 위하여 앵글로 인디언이란 말을 “인도에 사는 영국인” 그리고 “혼혈 후손 개개인”을 지칭하는 말로 구분해서 사용하게 되었음. 본 책자에서 ‘앵글로 인디언’ 은 영국인, 그냥 앵글로 인디언은 인도 태생의 영국인을 가리킴.

현지인 보모들 숫자가 앵글로 인디언 보모들 숫자보다 압도적으로 많았는데, 항상 사리나 블라우스를 입고, 팔찌나 발 목걸이를 한 채 코에는 링으로 코걸이를 했다. 그래서 보모가 이리저리 돌아다니면 1마일이나 떨어진 곳에서도 그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아주 모범적인 보모는 항상 부드럽고 아름다운 손을 가진 천성이 고운 여자로 거동이 우아하고 고상해야 했다. 보모들은 자신들만의 계급조직이 있었고, 마드라스 출신의 마드라씨 아야는 보모들의 수석으로서 미션 교육을 받은 훌륭하고 진보된 생각들을 많이 가진 사람들이었다.
교육 받은 보모는 아주 바람직한 보모의 덕목으로, 비어 버드우드 여사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을 했다. “보모들은 자신들이 돌봤던 어린 애들을 확실히 파악하는 능력을 가졌어요. 마치 특이한 방법으로 사람을 좋아하게 할 수 있는 사람들처럼 보였지요. 보모들은 자기들이 맡은 일에 아주 헌신적이고, 또 너무 애들에 대한 애착들이 강해서 훌륭한 보모라면 단 몇 시간 동안이라도 자신이 맡은 아이들에게서 손을 놓고있는 게 거의 불가능해 보이는 사람들처럼 보였지요.”
‘They had this capacity to completely identify with the children they looked after and it seemed as if they could switch on love in extraordinary way. They were so dedicated to their work, in a sense so possessive of their children that it was almost impossible for a good ayah to yield up her charge even for a few hours.’
보모들 중 전형적인 보모 한 사람이 바로 남인도에 살았던 루이 르 마르찬드 씨의 보모였다. “그녀는 마드라스 출신의 아주 뚱뚱한 보모로 머리는 항상 기름을 발라 반지르르 했지만, 발가락은 몇 일 동안 그 발가락에만 햇빛을 쏘인 듯 말라 비틀어진 쪽문 같이 엄청 크고 쫙 벌어져 있었지요. 만약 아침 일찍 쵸키다르 <주간 경비>가 아침 차와 비스켓을 더 갖다 주지 않거나, 문제가 생기면 보모에게 가서 고자질을 했는데, 그럴 때마다 항상 어떻게 든 그런 문제를 해결해주곤 했지요. 저는 보모 이름을 잘 몰라서 그냥 아야 <보모 아줌마>라고 불렀지요. 이따금 아주 버릇없는 태도로 보모에게 성깔을 부려댔지만, 보모는 결코 화를 내는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지 않았지요. 그럴 때면 못 본 척하고 베란다로 나가 다리를 꼬고 앉아있거나, 뜨개질 거리를 꺼내 들었지요. 아무튼 보모 이름을 자주 불러대면 불러댈수록 저는 무례하고 버릇없는 놈이 되었는데, 그럴수록 보모는 제 존재를 아예 무시해버렸지요. 그러다 나중에 “보모 아줌마, 정말 미안해요.” 하고 말하면 모든 일이 그럭저럭 아무 일 없었던 듯이 잘 넘어 갔지요. 낮에는 저를 온 종일 돌봐주었고, 이따금 저녁 때도 돌봐주었지만, 저를 목욕시키고 재우는 일만은 어머님께서 하셨는데, 왜 그랬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보모는 어머니가 따라와서 “꼬마 주인이 잠 들었구먼. 보모는 이제 돌아가도 좋아요.” 하고 말할 때까지 기다리다 필요하면 아동용 침실 문 밖에 있는 매트 위에 누워서 잠이 들곤 했지요.”
She was very fat and Madrassi and very, very oily about the hair. Her toes were quite enormous and cracked like dry wickets that had had the sun on them for few days. If the day chokidar didn’t give me another biscuit with my early morning tea or if there was any sort of trouble, I used to go to her and she usually managed to solve it. I didn’t know her name; I called her ayah. Sometimes, being a fairly naughty boy, I would anger her, she’d never show it. She’d turn her back and go and sit down cross-legged on the floor of the verandah and take out her knitting, and the more I called her or the more I was naughty or rude, the more she ignored me, until finally I would come along and say, ‘ayah, I’m sorry,’ and then all would be well. Ayah ministered after me during the day and very often during the evening, but it was mother’s privilege – heaven knows why – to bath me and put me to bed. Ayah used to wait and, if necessary, sleep outside the doors of her children’s rooms, lying down outside on the mat until such time as my mother would come along and say, ‘You can go, ayah, little master’s asleep.’
보모는 열린 문이었다. 그 문을 통해서 인도와 만나게 돼 있었다. 레지날드 쎄이보리 씨는 다음과 같이 말을 했다. “제가 여지껏 본 것 중 가장 매력적인 광경은 어린 아이를 안고 함께 운율을 떼면서 베란다에 쭈그리고 앉아있던 보모의 모습이었지요.”
‘One of the most charming things I’ve ever seen was the ayah squatting down on her haunches on the verandah with a little child, saying their rhymes together.’
보모들 대부분은 듣기에 이상한 앵글로 인디언 사투리로 의사소통을 하였다. “고양이야 고양이야 어디에 있었니? 나는 공주님 라니 의자 밑에서 나왔다.” 그러면 다른 사람이 “험프티 텀프티 기르 기야팟.” 하고 말을 했다. 또 하나 마프티 마이라는 말은 머페티 엄마는 풀 밭 위에서 응유를 먹고있다는 말이었다. 보모가 애들을 재우려고 불렀던 우루두어로 된 자장가가 있었는데, 그런 자장가 속의 말들은 아직도 많은 이들의 기억 속에 생생히 살아 남아 있었다. 로티, 마칸, 치니, 쵸타 바바 니니라는 힌디어의 말 뜻은 빵, 음식, 설탕, 아가야 잘 자거라 는 뜻이었다.

Talli. Talli badja baba 손뼉을 치렴 아가야
Ucha roti schat banaya 시장에선 맛 있는 빵을 만드는데
Tora mummy kido 엄마한테도 좀 주고
Tora daddy kido 아빠한테도 좀 주렴
Jo or baki hai 하지만 남거들랑
Burya ayah kido 네 늙은 보모에게도 좀 주지 않으련

자장가와 마찬가지로 에코 브라 빌리 다 <커다란 고양이가 있었지>로 시작되는 얘기들도 있었고, 좀 큰 애들에겐 무섭고 불길한 얘기들을 들려주곤 했다. 죤 리벳 카르낙 씨는 조그만 아이가 침대 밖으로 나가면 다리 귀신이 그 애 다리를 채간다는 다리 잡아먹는 귀신 얘기를 기억했다. “우리는 침대 밖으로 다리가 나가는 것을 몹시 무서워해서 침대에 올라가기만 하면, 꼼짝도 하지 않았지요. 또 숲 속에 사는 헝클어진 검은 머리를 한 늙은 노인이 정글에서 나와 어린애들 침대로 가서 간지럼을 태워 죽인다는 얘기도 있었지요. 이 얘기는 다리를 잘라먹는 귀신 얘기보다 더 무서워서 어느 날 저녁엔 이 얘기를 듣고는 너무나 놀라서 침대에서 박차고 일어나 귀신이 다리를 잡아채지 않게 침대에서 가능한 멀리 점프를 해서 부모님이 대 연회장으로 쓰시던 식당으로 뛰어들어 갔지요. 그런 뒤 다시 침대로 자러 가려면 상당히 어르고 달래야만 했지요.”
‘We were terrified of getting out of bed and once we’d been put to bed we stayed there. The other story was about an old man of the wood, black and hairy, who used to come from the jungle into small children’s bedroom’s and tickle them to death. This proved even more frightening than the leg-eaters and one evening we got so terrified that we leapt from our beds – jumping as far as possible away from the bed so as not to lose our legs – and dashed into the dining room where my parents were having a big dinner party. We took a great deal of persuading to go back to bed.’
그런데 완전히 상수를 치던 짓 굳은 아이들이 많이 있었다. “보모는 우리가 완전히 잠들었다고 생각할 때까지 부드럽게 우리를 토닥거렸지요. 그리고 나서는 좀 쉬려고 문 쪽으로 살금살금 조용히 기어갔지만, 문에 닿자마자 우리는 눈을 크게 뜨고 또 “아줌마!” 하고 부르면 할 수 없다는 듯 다시 되돌아와서 우리를 토닥거려 주었지요.”
‘Ayah would pat us gently until she thought we were asleep and then creep silently to the door, and just as she reached the door we would open our eyes and say, “Ayah!” and she had to come back and pat us again.’
만약 보모 잘못이 있다면, 그건 전적으로 보모들이 아이들 응석을 받아줘 버릇이 없어지게 돼서 그랬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규율 부족을 보모들 탓으로만 돌리지는 않았다. “바로 이런 것 때문에 인도인들이 심하게 낙담을 했지요. 왜냐하면 보모들은 애들을 너무나 사랑했기 때문에 어떤 규율도 가르칠 수 없었고, 그래서 인도 하인들에 의해 전적으로 자라난 아이들은 지극히 모두들 버릇이 없는 걸로 평판이 나 있었지요.”
‘This is the one thing over which the Indian fell out badly. Because he loved children he was quite incapable of exercising any sort of discipline over them, and therefore children brought up entirely by Indian servants were reputed to be extremely undisciplined.’
그런데 빅토리아 여왕 시대의 카레 라이스의 날에서 유래한 부작용이 하나 있었는데, 보모들이 애들을 자게 만들려고 손끝에 아편을 조금씩 묻혀둔다는 무서운 소문이 암암리에 널리 퍼져나갔다. 그래서 영국은 임시방편으로 해결방안을 하나 마련하였는데, 가급적이면 보모나 정부 시종들을 영국에서 데려오던지 아니면 애들을 영국으로 다시 돌려보내자는 얘기였다. 그러나 이것을 극적으로 시행할 단계 바로 직전에 임시 유예기간을 몇 해 갖게 되었는데, 보모 말고도 다른 하인들이 대기하고 아이들 응석 받을 준비를 하면서 일이 삐그러져 버렸다. “다시 말하면 만약 보모나 유모가 바쁘면 인도에서는 남자 하인을 한 명 시켜서 우리를 돌보게 했는데, 남자 하인들은 아이들을 즐겁게 해주려고 자신들의 모든 시간을 할애해서 아이들이 만드는 진흙 샌드 파이를 만들어주거나, 아이들이 하는 일이 무슨 일이든 아이들의 삶에서 무료함을 완전히 해소해주었기 때문에 당연히 아주 놀라운 존재들이 돼버렸지요.”
‘If nanny or mummy was busy, one of the Indians manservants was detailed to look after us, which meant that he would devote the whole of his time to entertaining us, to making sandpies or whatever it was that we were doing, and this of course was simply wonderful because boredom was completely eliminated from our lives.’
인도 하인들은 어린 아이들과 같이 놀 때는 신분상의 차이를 까맣게 잊어버리고 그 때만은 완전히 어린 아이가 되서 같이 노는데 특별한 재주들을 갖고 있었다. 레드클리프 싸이드 버텀 씨는 객실 주위를 도는 파탄인을 뒤쫓던 청소부와 같이 어깨에 아이들을 하나씩 둘러엎고 다녔는데, 종교가 서로 다른 키가 6피트4인치나 나가던 이교도 파탄인 하인을 보았던 기억을 하기도 하였다.
방갈로 <시골 집> 밖에는 넓은 공터가 있었고, 거기에는 같이 놀아줄 사람들이 더 많이 있었다. 세 자매 중에서 가장 어렸던 낸시 포스터 여사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억을 했다. “말리스 <정원사>는 우리가 나무에 집 짖는 일을 와서 거들어주거나, 놀이 장터를 세워주거나, 보통 때면 결코 꺾을 엄두를 내지 못하던 꽃으로 화환을 만들어주거나 또는 놀이 장터에서 팔려고 야채를 뽑아서 우리한테 가져오던 문제 등으로 항상 우리 부모님과 불편한 관계를 만들었지요.”
‘The Malis, the gardeners, were always getting into difficulties with my parents for coming and helping us build houses in trees or set up a bazaar or to make wreaths from flowers that they would never normally think of picking – or perhaps for pulling up vegetables and bringing them to us to sell in mock bazaars.’
그런가 하면 또 대문 앞에는 항상 한 남자가 서있었다. “데완 <문지기>은 우리들의 가장 훌륭한 친구로 기회만 있으면 우리들 장난에 동참하곤 했지요. 우리가 자주 반복하던 장난 중 하나는 여러 종류의 꽃을 모아서 차를 끓여보거나 염료를 만들어보는 것이었지요. 그래서 문지기는 자기가 입고있던 흰색 정복이나 옷에다가 어느 정도까지는 장난을 하게 놔둬서 노랗게 물을 들여 보이기도 했는데, 이 일 때문에 문지기는 나중에 대단히 큰 고초를 겪었지요.”
‘The Dewan was perhaps one of our greatest friends and he used to join us in our games whenever he possibly could. one of the games that we used to have again and again was collecting various flowers and making up a brew and dyeing things, and he joined in to such an extent that he let us have all his clothes and his white uniforms, which was dyed yellow – and he got into great trouble for this.’
아이들이 동네 단지 너머로 장난질을 치러 갈 때도 이 사람은 열심히 에스코트를 하며 따라다녔다. 어린 시절을 알라하바드에 살았던 낸시 버네드 여사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억을 했다. “마부는 아마도 제가 알았던 최고의 하인이었지요. 왜냐하면 매일 저는 조랑말을 타곤 했는데, 제가 했던 일이라고는 고작 해야 마부가 제 옆에 붙어 서서 따라 걷거나 뛰는 동안 집 밖에 난 길을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면서 말을 타고 걷거나, 속보로 가거나, 천천히 구보를 했다는 것 뿐이었지요. 아마 그때 우리는 쉬지않고 서로 말을 했을 거예요. 나는 거의 모든 말을 그 사람한테서 배웠고 지금도 그 사람이 제게는 가장 좋은 친구였다는 생각이 들어요.”
‘The Syce was probably the servant I knew best, because I used to ride my pony everyday. All I really did was either walk or trot or canter slowly up and down the road outside our house while the Syce either walked or jogged along by my side. I think we carried on a non-stop conversation. I learnt nearly all my languages from him and he was one of my best friends.’
바바-록들이 의사소통을 하는데 특별히 언어가 장벽이 되지는 않았다. “우리는 힌두어로 하인들과 얘기했어요. 사실 대부분의 어린이들은 영어를 배우기 전에 먼저 힌두어부터 배웠지요.”
‘We used to talk to our servants in Hindunistani. In fact most children learnt Hindunistani before they learnt English.’
어른들은 애들이 힌두어로 인도인과 말하기를 바라던 이유가 있었다. 낸시 버네드 여사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을 했다. “저의 부모님은 항상 하인들이 한편으론 애들이 인도 말을 배울 수 있고, 또 한편으론 초기 영어를 가르치러 갔던 사람들이나 웰시 <웨일즈 출신> 같은 인도에 파견된 선교사들로부터 유래한 것으로 믿어지는 씽쏭 액센트를 가진 경박한 치치 영어를 우리가 배우는 걸 원치 않아서 힌두어로 말해주기를 바랬지요.”
‘My parents always told the servants to speak us in their own language partly so that we could learn the languages, and partly because they didn’t want us to keep the Chee-Chee English accent, a sing-song accent rather like welsh which I believe originated from the original missionaries in India who were Welsh and were the first people to teach English.’
그러나 그런 친밀한 감정과 호의에도 불구하고 아이들과 하인들 사이에는 결코 넘볼 수 없는 장벽이 있었다. 그래서 다음과 같이 말들을 했다. “선생님을 항상 존대하고, 작은 주인님이라고 불러서, 선생님도 그걸 당연한 사실로 생각했지요.”
‘You were always treated with respect. You were called little master and you just took it for granted.’
그러다 보니 작은 주인님은 특별히 그런 사회적 신분상의 지위를 즐기고 있었다. 인도 하인들이 꼬마 주인에게 하던 이 말은 원래 연배의 노인네들, 특히 종교적 고승이나 사두에게 말을 걸 때 쓰던 용어인데, 어찌 된 일인지 그런 존칭이 막 남용되었다.
젊은 시절의 죠지 캐럴 씨는 내가 바로 작은 주인님이라는 사실을 단지 보여주려고 칸다하르에서 로버트 경과 군 복무를 함께 했던 한 제대 군인인 자신의 차프라시 <사무실 사환>를 어떻게 내 쫓아버렸는지 서글픈 표정으로 회고를 했다.
아무튼 사히브 록 <유럽인> 태생이란 말은 그에게 이상한 관념을 심어 주었다. “저는 인도인에게 위대한 백인여왕으로 알려졌던 퀸 빅토리아 여왕이 사실은 전지전능한 사람이 아니어서 자기 의지로는 어떤 사람도 총살시키거나 살해하거나 교수형에 처하도록 명령을 내릴 수 없던 사람이라는 걸 알았을 때 정말로 실망이 컸던 일을 기억하지요.”
‘I remember my utter disappointment when I learnt that the great queen Victoria, who was known as the great white queen to all Indians, was not omnipotent and she could not, of her own will, order any person to be shot or killed or hanged.’
죤 리벳 카르낙 씨는 이러한 경의와 충성심이 자신을 위대한 사람으로 생각하도록 만들었다고 했다. “제 아버님께 보였던 똑같은 존경심으로 나도 마치 집안의 어른들처럼 대했던 많은 하인들과 전령들이 있었지요. 그 결과 저는 만년에도 내가 인도인에게 살해당하거나 위험에 빠질 수 있다는 마음이 전혀 들지않을 만큼 거드름을 피웠지요.”
‘There were many servants and orderlies who treated me as if I was an adult, with the same respect as they treated my father. The result was that I got a very great idea of my own importance, so much as that in later life it never crossed my mind that I could be killed or be in any danger from an Indian.’
심지어 죠타 싸히브 <작은 주인님>와 놀 때도 특권 신분을 잊어버릴 수 없었다. “우리는 경기에서 항상 이길 수 있게 장비를 갖추었지요.”
‘Games were rigged so that we always won.’
푸나 군 병영지에서 첫해를 살았던 테렌스 스파이크 밀리간 씨는 다음과 같이 회상을 했다. 그러나 만약 장비를 갖추고 하지 않으면, 경기 결과는 항상 똑같았다. “저는 푸나에 있는 영국 상점인 티모시 화이트에서 산 훌륭한 하키 스틱을 갖고 있었지만, 그들은 나무로 만든 복제 스틱을 갖고도 게임에 이기곤 했어요. 모든 면에서 저를 능가했지요. 아직도 약간은 인도인이 열등한 민족이라는 면만 제외하고는, 어떤 다른 점이 있다는 생각은 들지 않아요. 아무튼 저는 최고로 우수한 민족이라고 믿게끔 태어났지요.”
‘Even though I had a fine hocky stick from Timothy Whites, the English stores in Poona, they would win the game with a stick taken out of a tree. They beat me at everything – yet I never thought of anything else except the Indians being inferior. I was born to believe that we were the top people.’
그런데 심지어 아래 사람들도 권리라는 게 있어서, 보면 하인들 사이에도 우두머리는 신분계급인 카스트를 갖고 있었다. 죤 알렌 씨는 정원에 있는 꽃에 물을 주려고 했을 때 이런 사실을 알게 되었다. “정원사의 오두막 집 밖에서 아주 괜찮은 오지 그릇을 보고 그걸 집어 들었지요. 그런데 말리 <정원사>가 갑자기 숙소에서 뛰쳐나오더니 격한 모습으로 그 종재기를 제 손에서 홱 하니 낚아채 가지고는 다시 땅바닥에 내동댕이를 쳤지요. 그건 그 사람 종재기였는데, 불가촉 신분인 제가 그 걸 만짐으로써, 그 종재기를 만질 수 없게 상황을 만들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 사람이 종재기를 깨버렸던 거였지요.”
Outside the gardener’s hut I saw a nice little earthenware bowl so I picked it up. The mali came rushing out of his hut and he was furious. He picked this bowl out of my hands and dashed it to the ground. This was his bowl, and by touching it I had made it untouchable for him, and so he broke it.’
그리고 그 밖의 다른 금지구역도 관찰할 수 있었는데, 그것은 부모나 아이들 어느 누구도 사전경고나 허락 없이 하인들의 처소로 무작정 쳐들어가는 것으로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다.
또한 현지인들이 가는 시장도 금지구역 밖의 별난 곳으로, 데보라 드링 여사가 말하듯이 모든 유럽의 어린 애들에게 그곳은 지속적으로 사람을 끄는 힘이 있는 곳이었다. “저희 부모님은 우리가 시장에 가면 뭔가에 온통 정신이 팔려 돌아다닐 거라는 생각을 항상 했지요. 조그만 노점마다 막대 사탕, 은 종이나 과일더미가 수북이 쌓여있었고, 조그만 불꽃을 켜놓았지요. 바느질 옷감에는 나이 든 소년이 걸터앉아 있었고, 커다란 요리 단지에서는 무언가가 열심히 끓고 있었어요. 아마 그 냄새는 도저히 잊지 못할 거예요. 아주 강한 향신료와 향 냄새, 사람들의 후끈대는 열기와 움직임, 울긋불긋한 색채며 말이에요. 그리고 둘레 사방에다 조그만 청동 종을 일렬로 쭉 매달아 놓은 조그만 사당이 하나 있었는데, 당신이 진실한 힌두 신자라면 지나가면서 종을 전부 칠 수 있었지요. 그래서 저는 “와! 굉장하구나! 지나가면서 종 몇 개만 쳐볼 수 있어도 좋을텐데.” 하고 생각하던 기억이 납니다. 그러나 그렇게 할 수가 없었지요. 아무튼 제가 어렸을 때 시장은 가서는 안 되는 금지구역 이었어요. “
‘Our parents always thought we’d catch something if we went down to the bazaar as being too exciting. All those lovely stalls covered with sticky sweets and silver paper and piles of fruit and those little flares they lit, the old boys sitting stitching clothes or boiling things in huge dekshis. I’ll never forget the smell – partly a very strong spice, an incensy smell – and all the heat and the movement and the people and the colour. There was a little temple which had rows and rows of little brass bells all around. If you were a good hindu you jingled all the bells as you passed, and I remember thinking, ‘Now that’s marvellous! If only I could go past and jangle a few bells.’ But no, the bazaar was a forbidden land when I was a child.
매일의 일상적인 일들은 잘 짜여져 있었다. 아이들은 까마귀 소리를 듣고 일찌감치 깨어나서는 쵸타 하즈리 <아침 차>와 바나나 하나 아니면 과일 주스 한 잔을 먹고는 아침 운동을 했다.
그리고 나서 바로 유모차 타는 일은 그만두고, 대신 “굴러 떨어지지 않게 둘레에 종을 매단 안장에 당신을 앉히고는 마부가 끌고서는 산보를 나갔지요.”
‘You were placed in a saddle which had a ring round it so you couldn’t fall out, and you were led by a Syce and taken out for a walk.’
한 시간쯤 말을 탄 뒤에 목욕을 하고, 여자 애들이라면 꽤 복잡한 절차대로 옷을 갈아입었다. “하얗게 풀 먹인 속 치마인 페티 코트, 무릎 아래를 끈으로 헐렁하게 묶는 풀 먹인 니커즈, 원피스 같은 실내용 아동복인 풀 먹인 무명 프록 등을 모두 목 둘레에 있는 끈에다 끌어올려 매서 몹시 더웠어요. 무슬린이나 무명으로 만든 모자도 풀을 먹이고 난 뒤에 토피 모자 위에 딱 맞춰 쓰려고 귀까지 덮이는 헐렁한 모자로 옛날에 실내에서 여성이 흔히 썼던 모브 모자같이 끈을 잡아맸지요. 그런데 이 것들이 조금이라도 습기를 먹으면 맥없이 주저앉아 얼굴을 모두 가려버렸어요.”
‘White starchy petty coats, white starchy knickers, starchy cotton frock, all of which were pulled up on tapes round one’s neck and were so hot. Hats made of cotton or muslin which were starched and then hauled up like a mob cap on a string to fit over your Topee. When they got the slightest bit damp they flopped all over your face.’
아침식사는 부모님과 같이 했는데, 이따금 베란다나 나무 아래서 했다. 그리고는 나이 먹은 애들은 공부를 시작하고, 쬐끄만 애들은 아주 날씨가 뜨거워질 때까지 정원에서 놀았다. 햇빛 밖으로 나올 때는 여지없이 헬멧을 써야 했다. “아무튼 머리에 토피 헬멧을 안 쓰고는 햇빛 비치는 데로 못 나가게 했어요. 그 걸 잊고 나가면 심한 벌을 받았답니다. 모두들 아주 예뻐 보이기는 했지만, 대신 말도 못하게 몹시 불편했지요.”
‘We were never allowed out in the sun without a topee on our heads, and we were very severely punished if we forgot our Topees. They were very pretty, but very uncomfortable.’
조금 일찍 간단히 점심을 때운 뒤에는 낮잠을 한 숨 잔 뒤 더 많이 치장을 해댔다. 낸시 포스터 여사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얘기를 계속했다. “오후가 얼마나 더운 시간인지는 그리 중요하지 않았어요. 우리는 항상 허리에 두르는 긴 천 조각으로 풀을 먹인 하얀 테두리 장식이 있는 옷들을 번갈아 가며 입었지요. 아주 예뻐 보이기는 했지만, 찜통 더위 때문에 참을 수가 없었지요. 아침이면 시원하라고 머리를 둥근 빵 모양 매듭을 틀어서 머리 위에다 얹었지만, 오후가 되면 어떤 이유 때문인지 어깨 너머로 머리를 풀어 내리게 하고는 예쁘게 빗질을 했는데, 사실 이러고 다니는 게 보통 덥고 성가신 일이 아니었어요. 그래서 우리는 거의 아무 것도 걸치지 않고 이리저리 뛰어다니던 인도 애들을 무지하게 부러워했지요.”
‘It didn’t matter how hot it was in the afternoons.’
‘we were always changed into white, frilly dresses, usually starched with big sashes. Very pretty but intolerable in the heat. In the morning we were allowed to have our hair screwed up in a bun on the top of our heads for coolness, but for some reason in the afternoons we had to have our hair hanging down over our shoulders and very well brushed and this was very hot indeed. We were full of envy of the little Indian children running about with almost nothing on.’
차 마실 시간쯤이면 아버지가 모습을 보였고, 스쿼시나 테니스 경기를 하러 클럽으로 나가기 전에 의자에 파묻혀 두 다리를 꼬고 등나무 뿌리에 발을 위로 쭉 펴올린 채 차 한 잔을 맛보거나 버터를 바른 토스트에 멸치과의 작은 물고기로 절여 만든 앤쵸비 소스를 곁들여 먹었다.
어린 애들은 차 마시러 나가면 대신 자신들만의 우유를 갖고 갔는데, 아무도 다른 집 엄마들이 우유를 적절히 끓이는지 어떤지 미덥지 않게 생각들을 해서 그랬다. 그런가 하면 누구나 다 장티푸스나 이질 등 여러 가지 병에 걸릴 수 있었기 때문에 세균 문제를 상당히 의식하고 있었다. 그래서 모든 애들은 밖에 나가서는 얇고 보드라운 화장지로 둘러싼 우유 병에 차를 따라 마시곤 했다. 우유는 아이리스 포르탈 네 목장에서 기른 보모들 소에서 짰는데 가이 왈라 <우유 배달부>가 아침마다 베란다 주위에 갖다 놓았다. 이 사람들은 항상 영국인 스코티시 보모 앞에서 우유를 짰는데, 보모는 우선 손은 깨끗한지, 두 번째로 우유 속에다 물은 안 집어넣는지를 항시 확인하고는 우유 짜는 일을 감시했다.
만약 애들이 시골이나 꽤 큰 거주지에서 살았다면, 차 문제를 아주 중요한 문제로 취급하기도 하였다. “우린 일반적으로 클럽에서 다른 애들을 만나곤 했지요. 인도에 있던 대부분의 영국인 클럽들은 정원이 아주 훌륭해서 보모와 같이 그런 곳에 가기를 좋아했고, 보모들은 클럽 밖에서 자기들끼리 수다떨기를 좋아했지요.”
‘We generally used to meet other children at the club. Most English clubs in India had very good gardens so all our nannies used to like going there and chin-wagging to each other outside the club.’
보다 규모가 작은 거주지에 살던 아이들은 어쩔 수 없이 어른들을 친구로 삼을 수 밖에 없었다. 인디고<콩과 낭아초 속의 관목으로 그 잎과 줄기에서 인디고이드 염료를 채취함> 경작자의 외동 딸인 죠안 알렌 여사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억을 했다. “근처에서 제일 가까운 유럽 아이가 정확히 20마일이나 떨어져 있었고, 또 한 애는 거기서 30마일쯤 더 떨어진 곳에서도 살았지요. 우리는 정말로 아주 드물게 한 번씩 만났어요. 한 애는 제가 9살 때 4 살이었든 꼬마 애가 한 명 있었는데, 그 애가 와서 같이 놀 때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지요. ”
‘I think nearest European child must have been twenty miles away, with another about thirty miles away. It was very, very seldom that we met. one was a little boy who was about four when I was about nine, and yet I used to be frightfully pleased when he came over and played with me.’
이와 비슷한 얘기 중엔 또 산림 감시관의 아들 딸들이 있었는데, 아버지의 직업이 그렇다 보니 깊숙이 오지로 들어가서 오늘날의 모글리 부족처럼 거의 원시상태에 가까운 생활을 했다. 당시 야생동물에 둘러싸인 벵갈 지방의 한 밀림에서 성장한 죤 리벳 카르낙 씨는 다음과 같이 말을 했다. “우린 완전히 제멋대로 나무도 타고, 조그만 새도 잡고, 새 둥지도 찾아보고 얼마나 밀림 속으로 더 멀리 들어갈 수 있는지 내기를 했지요. 밤이면 정글 속에서 데려온 고산족 아이와 같이 살쾡이를 잡으려고 그물을 치곤 했는데, 그 애는 우리를 돌봐주고 전통적인 정글지식을 가르쳐 주려고 데려온 아이였어요. 그 애는 무엇이 위험하고 위험하지 않은지 우리에게 알려 주었지요. 우린 돌을 던져 위험한 독사를 죽이는 걸 아주 재미있어 했지요.”
‘We ran completely wild, climbing trees, shooting small birds, looking for birds’ nests and seeing how far into the forest we could go. We used to set traps for wild cats at night with a hill boy from a jungle tribe who helped to look after us and taught us jungle lore. He showed us what was dangerous and what was not. We used to get a lot of fun turning stones over for dangerous snakes, which we killed.’
인도에서 뱀은 유럽인들에겐 그렇게 위협적인 존재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여전히 기피의 대상이었다. 가끔 독이 있는 뱀을 잘 죽이는 몽구스가 도움이 되긴 했지만, 뱀 문제에서 벗어날 수 있는 아주 좋은 또 한 가지 방법은 뱀 부리는 마술이었다.
루위 르 마르찬드 씨는 한 번은 뱀 부리는 사람이 와서 자기 아버지 사무실 아래서 킹 코브라를 자세히 관찰하게 되었다. “글쎄 몇 시간 동안 계속해서 그 사람이 이상하게 생긴 피리를 불던 생각이 나요. 그렇게 몇 일간 계속했는데, 사태는 아무것도 변한 게 없었어요. 그러자 하인들이 “이제 곧 뭔 일인가 있겠지. 두고 봐 뱀을 끌어낼 거야.” 라고 하자, 드디어 고목과 같이 살고 죽는다는 길이가 6 피트쯤 되는 해머 드라이어드 독사가 말 그대로 아버지 사무실 처마 밑에 있는 뱀 굴에서 스르르 빠져 나왔지요. 그 뱀이 몸을 음악에 맞추어 이리저리 꼬리를 흔들면서 기어 나올 때, 마침 아버지와 조수 한 사람이 각각 12 구경 장총을 들고 황급히 나타났지요.”
‘I can remember the fellow playing this extraordinary flute instrument for hour after hour after hour. This went on for several days but nothing happened and the servants would say, “oh, yes, it will happen, we’ll get him out.” Then finally this huge snake, a hamadryad probably about six feet long, was piped out, literally, from its lair underneath my father’s office. It came out swaying to the music and by that time my father and his assistant were both there with 12-bore guns and despatched it.’
유럽 아이들에게 훨씬 더 위협스런 존재는 광견병이었다. “우리는 절대로 개들을 어루만지지 못하게 돼 있었어요. 무시무시한 광견병에 대한 공포심이 항상 따라다녔거든요. 그래서 이 문제 때문에 오랫동안 개를 기르지 못했지요.”
‘We were never allowed to stroke dogs; there was always the fear of rabies. For a long time we weren’t allowed to have dogs because of this.’
종종 그런 우려가 현실로 나타나기도 했다. 에프 씨 하트 씨는 5살 때 개한테 물렸다. “글쎄 어느날 아침엔가 밥을 먹고 있는데, 개 한 마리가 우리 집으로 들어오더니 테이블 아래에서 제 정강이를 물었지요. 그리곤 오후 늦게 다시 와 가지고는 내 남동생을 물었는데 아주 심하게 물었어요. 그래서 개를 죽이고 보니 광견병이 발견되었지요. 그래서 그 즉시 심라 고산지대 카사울리에 있는 인도에 하나밖에 없는 파스퇴르 연구소로 올려보내라고 해서, 그날 밤 바로 떠나게 됐는데, 거기까지는 약 4백 마일 거리나 됐어요.”
‘This dog came into our house one morning while I was having breakfast and bit me on the shin under the table. Later in the afternoon it returned and attacked my younger brother, bringing him rather severely. Eventually the dog was killed and found to have rabies. We were immediately ordered up to the only Pasteur Institute in India, at Kasauli in the Simla hills, and we left that night. This was a distance of about four hundred miles.’
3주간 계속 치료를 받았으며, 그 중엔 위장 속까지 뚫고 들어가는 피하주사 치료도 포함돼 있었다. 그러나 그 때까지도 하트 씨 가족의 고초는 그렇게 심한 편이 아니었다. 그 애가 병원을 퇴원하기로 예정된 바로 전날 그 아래 동생 애보고 딱 하루 밤만 더 있어 볼 것을 권유하였다. “그날 밤 보모들이 저녁으로 커스타드 푸딩을 준비하고는 제 동생을 좋아했기 때문에 동생에게 좀 먹고 싶은지 어떤지를 물었지요. 어린 애니까 그랬겠지만 먹고 싶다고 말하자 옆 침대에 있던 조그만 여자 애한테도 푸딩을 줘서 함께 나누어 먹었는데, 그날 밤 그 애 2 명하고 보모 14명이 그 걸 먹고는 모두 아시안 콜레라로 다 죽어버렸지요.”
‘That night the nurses had some custard pudding for their dinner and, liking my brother, they asked him if he would have some. Being a child he said yes, so they gave him some pudding and some also to the little girl who was in the bed alongside his. That night fourteen nurses and these two children died of Asiatic cholera.’
죽음과 질병은 끊임없이 주의를 요해야 할 모든 사람들의 관심사였다. “선생님께서 결코 잊지 못할 광경이 아주 많이 있었지요. 팔 다리가 없는 거지나 문둥병자들이 있었는데, 선생님께서 그런 사람들을 보려고 하면 선생님 하인이 다른 데로 데려가곤 했지요.”
‘There were many, many sights that you never forgot. The armless and legless beggars and the lepers. You would see them and your servant would take you away.’
어느 해던가 전국적으로 유행병이 돌던 해로 비어 버드우드 여사가 심라에 있는 학교로 말을 타고 갈 때, 도로 양 옆 도랑에 매장하지 않은 시체들이 꽉 들어차 있었는데, 아무튼 그런 광경을 어떻게 든 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제가 아주 좋아하던 한 19 살쯤 먹은 마부가 한 사람 있었는데, 학교에 이르는 심라 도로를 따라가며 서로 잡담을 나누곤 했지요. 하루는 그 사람이 병에 걸렸다는 소리를 들었는데, 이틀 뒤에 죽어버렸다는 거예요. 그런데 이상하게도 잔뜩 길 옆에 쌓인 시체 더미들도 마부의 죽음만큼 그렇게 서글프고 심각한 생각이 들지는 않았어요.”
‘I had a Syce of about nineteen of whom I was very fond and we used to chat as we went along the Simla roads to school, and then one day I heard that he he had been struck down and, two days later, he was dead. In a strange way the piled-up corpses meant much less to me than the death of my syce.’
그러나 일정한 주기로 축제가 있었고, 축제는 인도인에게나 영국인에게 큰 기분전환이 돼 주었다. 낸시 포스터 여사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을 했다. “우리는 인디안 축제를 아주 좋아했지요. 우리 같은 애들은 전혀 참여할 수 없던 홀리 같은 축제는 아주 무시무시했어요. 우리들은 집 꼭대기에서 구경을 하곤 했는데, 어떻게 보면 황홀해 보이기도 했지만 어떻게 보면 소름 끼치게 무섭기도 했지요. 또한 어떤 여신상들은 아주 아름다웠지만 어떤 여신상들은 보기에 끔찍했어요. 우린 조랑말을 타고 나가 마을에서 철사와 밀집과 흙으로 아주 아름답고 실감나게 만들던 광경들을 보고 다녔지요. 우리가 아주 무서워했던 유일한 신상은 칼리<힌두교 시바신의 비로 광포, 잔학한 죽음과 파괴의 여신인 파르바티의 별명> 신상이었다고 생각해요. 우리는 칼리 여신을 결코 좋아하지 않았어요. 우리 눈엔 괴이한 모양이었지만, 다른 신상들은 아주 아름다웠지요.”
‘We loved Indian festivals. Some were very frightening, like the Holy festivals in which we were never allowed to join. We used to watch from the top of the house, rather facinated but rather frightened. Some of the godesses were beautiful, some were terrible. We used to ride out on our ponies and watch them being made in the villages from wire and straw and clay, very cleverly and beautifully modelled. I think the only one that put any terror into us was Kali. We never liked Kali, She was grotesque in our eyes, but the others were very beautiful.’
또한 홀리의 봄 축제와 마찬가지로 모후람 <회교력 제 1월>이라는 회교 축제도 있었는데, 원래는 비통하고 우울한 축제였지만 데보라 드링 여사와 그녀의 자매들은 그런 성격의 축제에 더 관심이 많았다. “우리는 크리스마스나 부활절보다 모후람 축제를 더 고대했지요. 남자들도 말 같이 옷을 치장하고는 우리 정원에 들어와 뛰어 놀았고, 우리 집 앞에서 아주 기이한 춤들을 췄지요. 그런데 이 사람들이 우리에게 절대로 줘서는 안 되는 사탕을 주곤 했는데, 우린 그런 사탕을 받아먹곤 했지요. 정말로 어디 하나 흠잡을 데 없는 완전무결한 축제였어요”.
‘We looked forward to the Mohurram far more than Christmas or Easter. Men used to come gambolling into our garden dressed up as horses and do a most extraordinary dance in front of our house. They used to give us sweets – which was absolutely forbidden – which we used to eat. It seemed quite the most perfect festival.’
우기가 지나면 디왈리 <힌두교의 등명제로 10월 또는 11월에 행해지는 전 인도의 축제일>라는 힌두의 불꽃놀이 축제가 있었는데, 아이들은 하인들을 흉내내서 조그만 토기 그릇에 기름을 붓고 면실을 꼬아 불을 붙인 뒤 이걸 창문, 계단, 집 주변, 벽 또는 대문 위 여기저기에다 쭉 늘어 놓았다.
크리스마스는 큰 캘커타 소매 상점, 육.해군 상점, 화이트웨이나 래이드로스 가게, 홀 이나 앤더슨 가게들이 보낸 카다록에서부터 시작됐다. 이런 카다록 중 단연 최고는 대형 육.해군 카다록이었다고 영 스파이크 밀리간 씨는 기억을 했다. “그 카다록은 크리스마스 때 선생님께서 살펴보고 물건들을 주문할 수 있게 충분히 시간을 갖고 크리스마스 3개월 전에 보내고는 했지요. 대부분이 군 병참에 관한 것이었고, 책장 전부가 군 피크닉은 어떻게 가는가에 대한 내용이었어요. 텐트도 있었고, 그 반대 편엔 짧은 반바지에 무릎까지 오는 각반을 하고 장화와 토피 헬멧을 쓴 피크닉 복장을 한 신사를 등장시켰지요. 또 비슷한 복장을 한 두 아이와 함께 모기로부터 얼굴을 보호하기 위해 망사를 댄 모자를 쓴 여자도 있었고, 여자들이 스커트 허리받이를 할 수 있게 뒤가 큰 의자와 여러 종류의 의자 그림이 있었지요. 그리고 훨씬 조그맣고, 당신이 “뭣 좀 주세요.” 하고 소리칠 수 있는 측면에 구멍이 뚫린 꽤 조잡한 하인용 텐트가 있었지요. 저는 이 책을 들여다 보는 게 소년 년감을 보는 것보다 훨씬 더 재미가 있어서 빨간 연필로 갖고싶은 병정 인형들에다가 표시를 하곤 했는데, 그러고 나면 크리스마스 아침에 빨간 박스에 질주하는 아랍 말과 푸르고 하얀 헬멧을 모두 쓰고 돌격하는 왕실 해병군악대와 카메론 고산족 방패 의장이 들어있는 육.해군에서 보낸 소포가 놓여 있었지요.”
‘It used to arrive three months before Christmas which was just enough time for you to rush through it and order things for Christmas. A large part was devoted to the military services and I remember this complete page of how to go on a military picnic. There was the tent and there was a gentleman opposite with this picnic outfit on, which consisted of shorts, gaiters up to the knee, boots and a topee. There was a lady with a hat and a great net over her face to stop the mosquitos, with two children likewise garbed. And then there was a series of stools, one made very large to take the bustle of the lady. And there was a servant’s tent, much smaller and inferior, with a hole in the side through which you could shout, ‘I want so and so!’
I found it more interesting to look through this book than the Boy’s Own Annual. I used to mark with a red pencil all the toy soldiers I wanted and then on Christmas morning there would be a parcel from the Army and Navy Stores with the band of the Royal Marines in a red box, all with blue and white helmets, a box of Cameron Highlanders charging and Arab horsemen at the gallop.
영국식 크리스마스를 해보려는 시도는 거의 실현시켜 보기가 어려웠다. 인도 서부지방에서 크리스마스는 낙타를 타고 오거나 다른 지역에선 코끼리를 타고 왔다. 철로가 발달한 지역에서는 기차를 타고 많이 왔다.
좀 더 큰 도시에서는 피크닉이 있었고, 물론 가장복 파티도 있었지만, 인도 실정에 맞는 지방에서의 크리스마스 전통은 역시 크리스마스 캠프였다. “모든 것 중에서도 우리가 최고로 좋아했던 크리스마스는 아버지와 같이 캠핑 하면서 정글 속을 거슬러 올라가곤 했을 때였지요. 우리는 코끼리를 타고 나가서는 사냥하는 걸 지켜보거나, 캠프를 치거나 고기를 잡고는 했는데, 그게 최고의 크리스마스 선물이었어요.”
‘The Christmas we liked best of all was when we used to go up into the jungle camping with my father. We used to go out on the elephants and watch the shooting, and we’d camp and fish. That was the best Christmas present.’
공식적인 의무 행사처럼 많고 많은 훌륭한 아버지들이 여행을 시도했고, 캠프 지역은 서늘한 날씨의 특징을 보였다. 차가 널리 이용되기 전에는 그 시절만의 특이한 방법으로 여유 있게 여행을 하였다. 아이리스 포르탈 여사는 자신의 어린시절을 다음과 같이 회상하고 있었다. “거대한 대평원 위로 누빈 라즈푸트 드레싱 가운에 싸인 핑크 빛을 머금은 막 떠오른 태양이 피터와 폴리라고 부르는 두 마리의 조랑말이 끄는 마차 속으로 쏟아져 들어왔고, 그 마차에는 부모님이 타고 계셨지요. 우리는 낙타에 캠프 장비를 실어야 했기 때문에 천천히 일을 시작했지요. 우리는 특별히 보모 낙타 한 마리를 갖고 갔는데, 빨간 터번을 쓴 사람이 그 낙타를 몰았지요. 이따금 보모 낙타가 쓰러지면 모든 일이 엉망이 되는 재수없는 날이 됐지요. 선발대는 다음에 머물 장소에다 우리를 위해서 텐트 몇 개를 미리 쳐놓았어야 했는데 그렇게 하지 못해서, 우린 제 시간에 도착했지만 아침을 늦게 들 수 밖에 없었지요. 그리고 나서 아버지는 찾아오는 사람들을 위해서 책상을 펴고, 보모와 어머니도 찾아오는 주민들 진료를 도와주느라고 매우 바빴지만, 우리는 보모가 지켜보는 가운데 텐트들 한 가운데서 장난감을 갖고 밖에서 놀 수 있게 해줬지요. 우린 텐트에서 미끄럼을 타지 말라는 주의를 받았지만, 텐트 덮개 자락을 잡고 기어올라가서는 미끄럼을 타고 내려오는 놀이를 아주 많이 했지요. 나는 아버지가 청탁하러 온 사람들에 둘러싸인 채 나무 아래 앉아있는걸 보면서 아버지 테이블 주위에 사람들이 죽 둘러서 있는 걸 보니 틀림없이 아버지는 아주 중요한 사람일 거라는 생각을 했지요. 그런데 알고 보니 그게 아니라 맹숭한 벌판 한 가운데 달랑 나무 한 그루만 있어서, 그 아래에다 나무책상을 펴놓고 일을 봐야 했기 때문에 그렇다는 아주 단순한 이유를 알게 되었지요. 그 당시 지방 관리들은 대개 그런 식으로 일을 했지요. 캠프 마지막 날쯤엔 아버지와 어머니는 그 당시엔 게임이 많았기 때문에 찬거리로 무언가 사냥하러 총을 들고 나가고는 하셨지요. 그런데 어느 날인가 아버지는 정글 주변에서 곰 한 마리를 쐈는데, 저도 그 때 장총을 들고 그 옆에 서 있도록 했지요. 그 때 저는 그 곰이 정말로 죽었는지 확신을 할 수가 없어서 아주 무서웠어요. 곰 냄새, 라이플의 무연 화약냄새 등이 기억에 남는데 아주 대단히 인상적이었어요. 그런데 애들이 갖고있는 장난감 곰을 보니 총에 맞아 죽은 곰 처지가 참으로 서글퍼 보였지요.”
‘I can remember the sun just rising, pink on the huge, great plain and being wrapped up in a quilted Rajput dressing-gown and put into the cart pulled by two ponies called peter and polly, while my parents rode. We proceeded slowly along because the camp kit had to be put on camels. We had a special nursery camel and the man who drove it had a red Puggaree, and there was a terrible day when the nursery camel fell down and everything was broken.
An advance party would have struck few tents for us at the next stopping place and we would get there in time for a late breakfast. Then my father would set up his table for petitions and we would be turned out with our toys to play among the tents, with nanny keeping an eye on us – Although she and my mother also did a lot of first aid and medical work for villagers who came in. We were always told not to slide down the tents but, of course, it was a great temptation to scramble up part of the tent flap and come sliding down.
I can remember watching my father sitting under a tree with this crowd of petitioners around him and thinking what an important person he must be because he had all these people standing round table. But it was the simplest thing, just a tree in the middle of an open plain and a wooden table underneath it, and that was how a district officer did his job in those days.
Towards the end of the day he and mother would go out with a gun to shoot something extra for our meals, because in those days game abounded. I can remember one camp on the edge of the jungle where father went out and shot a bear and I was made to stand beside it holding the rifle. I was very frightened because I didn’t feel quite sure that the bear was dead. I remember the smell of the bear and the cordite of the rifle, which made a great impression on me one had toy bears and it seemed so sad that the bear should be shot.
총독부 관리의 딸 중에 낸시 버네드 여사가 한 명 있었다. “우린 대부분 코끼리를 타고 이 캠프에서 저 캠프로 여행을 다녔지요. 코끼리 잔등에다가 딱딱한 매트리스를 깔고, 로프로 단단히 잡아매고는 그 위에 앉아 갔지요. 진짜 정글 속으로 들어가면 수풀이 우리 키를 넘게 자라고 있었고, 코끼리는 아주 조용하게 천천히 움직여 나갔지요. 그러면 아주 많은 야생 동물들을 볼 수 있었지요.”
‘We seemed to travel mostly on elephants from camp to camp. We had a rough mattress thrown across the elephant’s back and tied with the rope and we just sat on top. If we ever went into the real jungle the grass would be well above our heads and the elephant would move through slowly and very, very quietly and one could see many more wild animals.’
밤에는 아주 안전한 느낌을 주는 모기장 아래에 누워서 아이들은 정글소리를 들었는데 그 중에서 특히 재칼의 울부짖음은 “죽은 힌두 시체 냄새가 나는 구만! 어디에 있는 거지? 어디냐 구? 그러면 어디긴 어디야 바로 여기야! 여기!” 하는 듯한 기분 나쁜 소리로 들렸다.
‘I smell the body of a dead Hindu! Where? Where? Here! Here! Here!’
서늘한 날씨는 3월 중순이 되면 갑자기 끝나버렸다. 그러면 해마다 고산지대 쪽으로 마나님들과 아이들이 거처를 이동하기 시작했다. 이에 대해 낸시 포스터 여사는 다음과 같이 얘기를 했다. “우린 항상 3월 말쯤 떠나서는 우기가 시작될 때쯤 돌아왔지요. 그래서 항상 무더운 여름철을 멀리 떨어져서 보냈지요. 그래도 이따금 찜통처럼 무더워서 땀띠 때문에 지독하게 고생을 했는데, 밤은 결코 잊지 못할 더위였어요. 얼굴에 줄줄 흐르는 땀 때문에 자다 깨다 했으며, 조금이라도 시원해지려고 침대 끝에다 몸을 걸치고 잠을 잤지요.”
‘We usually left about the end of March and came back when the monsoon had broken, so we were usually away for the very hot months. But even then it got so hot sometimes that you got terrible prickly heat, and that was a thing you never forgot at night. You would wake up with sweat pouring down your face and you’d hang over the side of the bed trying to get cool.’
제일 가까운 고산지대 거주지로 가려고 해도 기차로 몇 날 몇 일 밤을 가야만 했다. “항상 아래 위 침대가 2개 있어, 침대가 모두 4개인 일등 칸을 혼자서 전부 빌려 타고는 바닥 중앙에다가 양철욕조를 놓고는 역마다 갈아주는 커다란 얼음 덩어리를 깨넣고서 조그만 두개의 선풍기를 아래로 불게 하면 정말로 시원했지요. 우리는 이런 여행을 좋아했는데, 한 밤중에 역에 정차해 있을 때 밖을 보면, 플랫폼에 아무렇게나 쓰러져 자는 온갖 군상들 사이로 오르락 내리락 거리면서 물건을 파는 잡상인들을 보거나, 잡상인들이 내는 여러 종류의 호객소리를 들었지요.”
‘Usually you had a whole carriage to yourself, a first class carriage with four bunks in it, two up, two down. You’d have a tin bath in the center of the floor with a great big block of ice which used to be renewed at the stations and there would be two small fans that used to blow down on the ice and keep you really very, very cool. We loved these journeys. At night when you stopped at the stations and you looked out you saw the vendors going up and down past all the forms asleep on the platforms and heard the various calls they used to make.’
스파이크 밀리간 씨도 역시 기차여행을 했는데 부모님에게는 정말로 지겨운 일이었지만 그 자신에게는 훌륭한 경험이었다. “어느 날인가 기차를 타고 쭉 올라가고 있는데, 영국 부대병력 전부가 우연히 강에서 완전히 옷을 홀딱 벗고 목욕하고 있는 걸 보게 되었어요. 그러자 제 어머니가 에일린 아주머니에게 “에일린. 밖을 보지 마라! 죄다 사내 놈들이라 구!” 라고 말하던 게 기억 나는군요. 한 번은 아주 어두운 밤인데 기차에 있는 쇠사슬 체인을 올려다보고는 “이 건 뭐 하는데 쓰는 거야?” 하고 묻지도 않고 잡아 당겼더니, 그만 인도의 그 산악지역 중턱에서 금속성의 삐익하는 미끄러지는 소리를 내면서 멈춰 서버렸지요. 그리고 누군가 천천히 걸어오는 소리가 나더니, 고아네스 경비가 “도대체 여기 어떤 작자가 쇠사슬을 잡아당긴 거요?” 하고 묻자 제 어머니는 그 말에 그만 사색이 되고 말았지요.”
‘One time we are going along and we came across a whole British regiment bathing stark naked in a river. I remember my mother saying to my Aunty Eileen, “Don’t look, Eileen, don’t look, they’re all males.” Then one dark night I was lying looking up at this chain and I thought, “I wonder what it’s for?” and I just pulled it. The train came to a grinding halt in the middle of some mountainous area of India and there was a slow walk of footsteps and the Goanese guard said, “Did somebody here pull the chain?” my mother was terrified.’
각 지방에는 주부나 아이들 또는 고위 관리들이 피신을 가 무더운 날씨나 비를 피하고 쉴 수 있는 고산지대 거주지가 있었다. 남쪽엔 오타카문드, 히말라야 지역엔 무쏘우리, 심라, 나이니 탈, 다르질링 등이 끝없이 이어져 있었다. 무더운 여름 말복쯤이면 비가 왔는데, 무지막지한 비가 통째로 퍼붓다가 그치고는, 또 다시 억수 같은 비가 끝없이 쏟아져 내렸는데, 그러면 잠시나마 그 지독한 열기에서 벗어날 수가 있었다.
데보라 드링 여사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을 했다. “그럴 때면 모두 밖으로 우르르 뛰쳐나가서 빗속에 서서 막 퍼붓도록 내버려두어 속까지 흠뻑 비에 젖었지요. 우리 경우는 옷을 자꾸 벗으면 벗을 수록 좋았어요. 그렇게 쫄딱 젖고 나서, 아마도 호되게 볼기를 맞곤 했지요.”
‘we used to rush out and stand in it and let it pour over us, and we were soaked to the skin. If we could take our clothes off so much the better. We’d be soaked and probably come into a jolly good spanking.’
처음의 어린시절에는 어두운 그늘이 거의 없었다. 그러나 좀 더 관찰력이 있는 관리의 딸들은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면 무일푼으로 남게 될 가족들의 근심과 저축에 대한 부모들의 관심사를 알아챘어야 했는데 그러지를 못했다. 그 건 확실히 마음에 상처로 남게 될 두려운 일 같은 것이었지만, 행복에 정말로 위협이 되는 진짜 문제는 인도에서 태어난 영국 아이들과 함께 있는 부모들은 누구도 결코 잊어버릴 수 없는 다음과 같은 이별에 대한 걱정거리가 있었다.
캐슬린 그리피스 여사는 그 당시 다음과 같은 착잡한 생각에 젖어있었다고 회상을 했다. “제 큰 아이가 도착했을 때, 저는 그 아이를 물끄러미 쳐다보면서, 아이고 애야! 너도 곧 5 - 6살이 될 테고, 그러면 영국에 있는 집으로 데리고 가서 거기다 떼어놓고 헤어져야 할 텐데.”
‘When my first so arrived, I looked at him and I thought, “Oh dear, you’ll soon be five or six and then I will have to take you home and leave you there and be separated from you.’
이건 항상 마음 뒤 쪽에 두고 있다가 결국은 헤어져야 하는 문제로 대두됐는데, 어떤 이들은 이를 두고 부모들의 가장 가치 있는 목표 그 목표를 이루고자 애들이 치룬 희생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애들은 결코 그렇지 않았다. 낸시 포스터 여사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회상을 했다. “우린 결코 영국이 고향이란 생각이 들지 않았어요. 따라서 인도가 고향이 아니라는 말은 결코 생각할 수 없는 말이었지요. 또는 스파이그 밀리간 씨가 상상하던 대로 영국은 여기저기 딸기가 피고 4개월마다 한 번씩 밀봉한 깡통에든 군용 캐드베리 쵸코렛을 우리에게 보내곤 했던 우유와 꿀이 흐르는 땅이며, 데일리 미러지와 타이거 팀 코믹지를 우리에게 보냈던 땅이며, 1페니로 한꺼번에 초콜릿과 아이스 크림을 살 수 있는 나라 라고 어머니가 저에게 말했던 땅이었지만, 사실은 결코 그렇지 않았어요. 영국은 음울하고 음침한 회색의 땅이었지요.”
‘We never thought of England as home. It never occurred to us that our home wasn’t India. England was a land of strawberries everywhere, or, as Spike Milligan imagined it, a land of milk and honey that used to send us cadbury’s military chocolates in a sealed tin once every four months. England was the land that sent us the Daily Mirror and Tiger Tim comics. England was a land where you could get chocolate and cream together for a penny, That’s what my mother told to me. But it never happened like that – England was a gloomy, dull, grey land.’
캐슬린 그리피스 여사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억을 했다. “내가 두 아이를 영국의 고향 집으로 데려왔을 때 우리는 기차를 탔지요. 다섯 살 박이 좀 아래 애가 사람들이 가득 탄 객실 앞에서 큰 소리로 말을 했지요. “엄마! 왜 저 경비가 따라와서 엄마에게 언제 기차를 출발시킬까요?” 하고 허락을 구하지 않지요? 그래서 대답하기를 “애야! 우린 지금 아빠가 있는 곳에 있는 게 아니야. 여기 있는 사람들은 그렇게 묻지를 않아. 그 사람들이 엄마한테 와서 출발시켜도 좋은지 어떤지를 이젠 묻지 않아. 여기는 영국 땅이야. 그러니 너도 이젠 영국관습을 익혀야 한단다.”
‘We got into the train and the younger one, aged five, piped up in front of a carriage full of people, “Mummy, why hasn’t the guard come along and asked your permission to start the train?” and I replied, “Darling, we are not in daddy’s district now! They do not come along and ask me if they may start the train here. This is England, you must get used to English customs now!”’
그래서 이제야 아이들은 앵글로 인디언 관습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 대부분 어렸을 때 부모와 떨어져 살아서 그렇다는 걸 알게 되었다. 만약 그 게 부모에게 어려운 일이었다면, 아이들에게 두 배는 더 어려운 일이었다. 애들은 부모에게 버림받게 되었을 뿐 아니라, 그 애들에게 익숙해진 삶 자체도 빼앗은 결과가 되었다.
낸시 버네드 여사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을 했다. “우린 친구들과 공통점이 하나도 없었어요. 브레인 피버 새가 뭔지 쟈칼의 울부짖는 소리가 뭔지도 못 들어봤고, 코끼리도 타본 적이 없고 뭐 하나 우리 사이엔 공통점이라는 게 전혀 없었어요.”
‘We had nothing in common with our new friends. They’d never heard of the brain fever bird or the sound of jackals, and they’d never ridden on an elephant. We just had nothing in common.’
단절의 시간이 지나가면서 아이들과 부모의 부실해진 고리를 잇기 위해서 정기적으로 주일 우편물을 교환했다. 프란시스 스마이스 씨는 부모님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을 했다. “부모님이 휴가차 돌아오시면 다른 세상에서 온 사람들 같았어요. 그건 제가 사는 세상이 아니었지요.”
‘When they came back on leave, they were like beings from another world – but it wasn’t my world.’
반대로 비어 버드우드 여사는 다음과 같이 말을 했다. “부모님의 사랑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고 할 정도까지, 헤어져 살다 보니 그 게 우리를 아주 독립심이 강하게 만들었지요. 제 기억으로는 동생은 8살쯤부터 학교 책가방을 혼자서 꾸렸고, 여행 준비든 무슨 일이든 스스로 준비를 하는데 아주 일찍부터 버릇을 들였지요. 아마도 그것 때문에 19살의 어린 나이에 인도에 가자마자 바로 그 넓은 지역을 통제하고, 막중한 책임감을 갖고 영국에 있는 그 동년배들이 경험했던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알게 됐던 거지요. 왜냐하면 삶이란 문제에 직면하여 아주 중요한 나이에 어떻게 든 자신들의 힘으로 꾸려나가야 된다고 조건 지어져 있었기 때문이었지요.”
‘Separation made us immensely independent, and to some extent independent of love. I think it probably hardened us. My brother, I remember, would pack his school trunk alone from about age of eight. We got used very early on to making our own arrangements for travelling or doing whatever it was. Perhaps it also helped young men to go out to India at the age of nineteen and immediately take control of vast districts, take on enormous responsibilities, far and away beyond anything which their contemporaries were experiencing in England, because they had been conditioned earlier at a very vital age to managing on their own, coping with life.’
그러나 인도는 결코 잊혀질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아이리스 포르탈 여사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을 했다. “저는 학교에 있거나 커가면서도 내내, 인도는 약속의 땅으로 돌아가야 할 그 무엇이었지요. 그 당시 사람들은 반드시 인도로 돌아가겠다는 생각 때문에 그런 지루한 시간들을 견딜 수 있었지요.”
‘All through the time I was at school and growing up, India was a land of promise, something I would go back to. one was sustained throughout all those years by the thought that one would go ba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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