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후회의 땅 인도 인도 이야기
2007. 6. 9. 17:22ㆍ일반/역사·영어·컴퓨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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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회의 땅 - 인도
Land of regrets
인도에 있던 라즈들의 역사를 보면 영국인 남자나 여자들 중 한 특정 세대는 그 당시 인도에 없었다. “인도에 있었던 영국인 중 노인네들은 없었지요. 아마 60세쯤 된 사람들이 우리가 만날만한 가장 나이든 사람들이었을 겁니다.”
‘There were no old people among the British in India. A man of sixty was probably the oldest that one was likely to meet.’
이는 부분적으로 조기 은퇴가 원인이었다. 1904년 인도 경찰에 입대하려고 에치 티 위컴 씨와 같이 인도에 갔던 10명의 젊은 장교 중에는 인도에 도착하자마자 5개월 이내 2명이 바로 죽고, 10년 안에 또 6명이 죽었다.
20년 뒤에도 여전히 인도는 인도에 맞지않는 사람들만 주로 희생을 시켰다. 이에 대해 필립 메이슨 씨는 다음과 같이 회상을 했다. “저는 항해 중에 친구 두 사람을 사귀었는데, 이들 중 1명이 인도에 도착하자마자 첫번째 여름에 죽었지요. 그 친구는 전혀 인도라는 땅에 행복해 하지를 않았어요. 봄베이에 도착하기 바로 전 저에게 다소 비장한 어조로 “다시는 좋은 일이 생길 거 같지가 않아.” 라고 했는데 정말로 그렇게 돼 버렸지요. 그 친구는 자신이 처한 인도사회를 비판하지도 않았고, 자신이 갖고있는 불만을 말로 표현할 필요성도 느끼지 않았지요. 그 친구는 날씨가 아주 무더운 계절인 6월 달에 자선임무를 나갔다가 맹장에 걸려서, 사람들이 그 사람을 본부로 데려올 때쯤 보니까, 우마차에 실려 이틀간이나 여행을 했다고 그러더군요.”
‘I made two friends on the voyage out. one of them died in his first summer. He wasn’t happy in India at all. Just before he reached Bombay he said to me rather sadly, “I suppose I shall never again feel really well,” and he didn’t. He was not merely critical of the society he found himself in, but he felt he had to express his criticism. He went out on Famine Duty in the hot weather in June, and he got an appendix and by the time they got him into headquarters, a two day journey in a bullock cart, that was that.’
이와 비슷한 얘기 중 또 하나는 로사문드 로렌스 여사가 만났던 사람인데 이 사람도 인도에 대한 모든 걸 증오하였다. “그녀는 하인도, 날씨도, 음식도, 사람도 모두 싫어했어요. 승마나 마차 끄는 것도 배우려고 하지 않았어요. 하루 종일 투덜대고 모든 걸 증오했지요. 그런데 어느 날인가 의사가 말하기를 그 사람이 아프다고 했지요. 그래서 제가 “뭐가 잘못됐는데요?” 하고 묻자 “잘 모르겠어요. 아무튼 무척 아픈가 봅니다.” 라고 말을 했지요. 다음 날 그 여자는 죽었는데, 그 여자가 갖던 행복에 대한 개념은 교외의 별장이었지요.”
‘She didn’t like the servants and she didn’t like the weather, she didn’t like the food and she didn’t like the people. She wouldn’t learn to ride and she wouldn’t learn to drive. She just grumbled all day long and hated everything. And then one day the doctor told me that she was ill. I said, “Oh, what’s wrong with her?” and she said. “I don’t know, but she’d very ill.” The next day she was dead. Her idea of happiness was a suburban villa.’
이따금 인도는 인도에 간 젊은이들에게 이상적인 기준을 요구했는데, 심지어 너무 뚱뚱해 거동이 불편한 사람에게도 너무 지나친 비현실적인 기준을 요구했다. 올라프 캐로 씨는 북서전선의 주지사로 있었을 때의 한 예를 다음과 같이 회상을 했다. “전에 와지리스탄에서 근무한 적이 있던 한 남자의 아들이 주재관으로 왔는데, 한 번은 마후스드들에게 납치를 당해 억류돼 있어서, 저는 독하게 마음을 먹고 허풍작전을 폈지요. 그런 작전이 받아들여져서 석방이 됐고, 그 사람이 정부청사로 와서 나와 같이 있다가, 제가 “아무래도 전출을 가는 게 좋겠어. 하지만 먼저 있던 곳으로 당신을 다시 되돌려보내는 건 옳지 않은 것 같아.” 그러자 거의 무릎을 끓다시피 하고는 눈물을 흘리면서 다시 그 곳으로 보내달라고 간청을 했지요. 그 사람은 다시 그 곳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자기 자신에게나 그 어떤 사람에게도 결코 견딜 수 없는 일이 될 거라고 했지요. 그래서 “그럼 좋네. 당분간 만 그 곳으로 보내주지. 그리고 나서 다른 곳으로 보내겠네.” 하고서는 그 사람을 남 와지리스탄의 원 주둔지로 원대복귀를 시켰지요. 6주쯤 지났을까 “너무 오래 있었던 거 같군. 그만하면 됐으니, 어느 어느 곳으로 이동할 것을 제안하는 바임.” 이라고 제가 편지를 써 보냈지요. 그런데 이틀 뒤 전화가 와서 받아보니 그 사람이 총으로 자살을 했다는 거였지요. 그 사람 책상 위에 있던 제 편지는 개봉이 안된 채 놓여있었다고 하더군요. 아마도 그 사람은 그 편지 내용이 자신에 대한 내용이라는 걸 눈치챈 모양이에요.”
‘In Waziristan there was a political agent who was the son of a man who had been in Waziristan before him. He was kidnapped and held by the Mahsuds and I had to harden my heart and take air action. It was taken and he was released. He came and stayed with me in Government House and I said to him, ‘I think you’d better be moved. It’s not fair to send you back again to this place.’ And he begged me almost on his knees, with tears in his eyes, to send him back. He said he would never be able to stand up to himself or to anybody if he wasn’t sent back. So I said, ‘All right, I’ll send you back for a short time, and then we’ll move you on.’ So I sent him back to his original station in South Waziristan and after six weeks or so I wrote him a letter and said, ‘I think you’ve been there quite long enough. You must feel that you’ve proved yourself now, and I propose to move you to such and such a place.’ Two days later I was rung up and told that he had shot himself, and my letter was lying unopened on his deck. He had found it too much for him.’
적응을 못하는 사람들은 그렇다 치고, 인도는 여러 다른 방법들로 많은 사람들을 희생시켰다. 이에 대해 노리 여사는 다음과 같이 회상을 했다. “인생이란 게 참 허무했어요. 많은 이들이 그랬지만 – 누군가 앓다 죽으면 바로 그날 매장을 했지요. 그런 식으로 아주 갑자기 서로 헤어져서, 사람들에게 두려운 인상을 심어주었지요.”
‘Life was so very short. When anybody got ill and died – and lots did – they were buried the same day. It made the parting so sudden and it made an awful impression upon people.’
그렇다고 해도 그런 게 인도의 특징이었다. “인도에서는 모든 게 갑자기 일어났지요. 갑자기 땅거미가 지듯이 사람들도 갑자기 죽었지요. 선생님과 아침에 같이 식사를 한 사람도 오후면 죽을 수 있었는데, 그 게 선생님이 살던 인도의 현실이었지요.”
‘Everything is sudden in India, the sudden twilights, the sudden death. A man can be talking to you at breakfast and be dead in the afternoon – and this is one of the things you have to live with.’
새파랗게 젊은 남자와 그 남자보다 더 앳된 여자들과 또 이들이 낳은 어린 자식들의 무덤으로 가득찬 캘커타나 U.P 주의 옛 공동묘지에는 적당히 사전에 주의를 하지 못하고 살다간 사람들의 운명적인 기념비들이 많이 서 있었다. 한편 숭고하고 헌신적인 목적을 갖고 살았던 예외적인 경우도 많이 있었는데, 적의나 심지어 위험한 반대에 직면해서도 건강과 복지를 개선하면서 투쟁을 했던 개척자들이 있었는데, 이 사람들은 심라 지방에서는 릭샤를 개선하고, 델리에서는 집에다 소들을 기르지 못하게 사회운동을 벌인다든가 했는데, 군의관들 중에는 그런 사람들이 많지 않았다.
아이리스 포르탈 여사가 시골에서 심하게 병을 앓게 됐을 때, 가장 가까운 의사한테 가려고 해도 50마일이나 떨어진 곳으로 차를 보내야 했다. “마침내 차가 돌아와서 보니, 남편은 무지하게 큰 빨간 코와 마마 자국에 얽은 얼굴을 한 의사가 차에서 나오는 걸 보고는 그만 사색이 돼 버렸지요. 그리고 나서 술에 떡이 된 의사가 잘 들리지 않는 쉰 목소리로 말하기를 “틀림없이 말라리아나 장티푸스 아니면 콜레라일 거요. 한데 콜레라나 장티푸스는 아닌 게 분명하구만. 그렇다면 말라리아가 틀림없을 거요. 아무튼 당신 부인에게 하루에 30 그레인 <0.0648 그램/ 1 그레인>의 키니네를 주도록 하시오.” 하고서는 테이블에다 키니네 몇 알을 꺼내놓고는 다시 차를 타고 가버렸지요. 제가 본부로 돌아가서 여러 종류의 검진을 받아봤더니, 그게 아니고 저는 발진티푸스에 걸린 적이 있다고 하더군요.”
‘When it returned my husband was absolutely horrified to see emerging from the car first an enormous red nose, then a very pock-marked face, and then a very drunken doctor who said in muffled tones, “It must be malaria, or typoid, or cholera. It obviously isn’t cholera or typhoid, so it must be malaria. Give your wife thirty grains of quinine a day.” Then he tossed pills on the table and was driven away again. When I got back to headquarters I had various tests and was told that I had had typus.’
훌륭한 의료상의 배려가 있든 없든, 기피 투미스 라는 열대지방 여행자가 자주 걸리는 설사병, 뼈와 근육이 아픈 뎅기 열병, 말라리아 같은 병들은 계속해서 삶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이에 대해 케네스 워런 씨는 다음과 같이 기억을 했다. “매일 우리는 2정의 키니네를 먹고는 했지요. 그걸 먹지않은 사람은 누구나 말라리아에 걸리게 돼 있었지요.”
‘We always used to take two grains of quinine every day and anybody who didn’t take it was bound to go down with malaria.’
예방을 한다고 해도, 어떤 형태로든 찾아온 말라리아는 사실상 어떤 지역에서는 풍토병이나 마찬가지였다. 케네스 워런 씨는 다음과 같이 간헐적으로 여러 증상을 보였다. “저는 한 이틀간은 잘 지냈는데, 셋째 날 그 병이 대략 12시 15분 전쯤에 찾아왔지요. 저는 문 밖에 나돌아 다니다가 그 학질에 걸리지를 않기를 바래서, 방갈로로 바로 돌아갔지요. 그런데 돌아오자마자 채 10분도 안 되서 온몸이 떨리고, 이빨이 딱딱 부딪치더니 땀이 비오듯 나오더군요. 그런데 다음 날 아침이 되니까 또 병이 어디로 가버렸는지 싹 없어졌지요.”
‘I had two good days and then on the third it used to come on at about a quarter to twelve. I didn’t want to be caught wandering about out of doors with this ague, so I used to go back to the bungalow just in time and then in about ten minutes I shook all over, my teeth chattered and I sweated. By next morning it had gone.’
마나님들은 쉽게 말라리아에 걸렸다. “저녁 먹으러 가서 보면 열이 화씨 100도까지 올라 갔지만, 그다지 개의치 않았지요.”
‘You go to dinner and you know your temperature’s up at about a hundred and something, but you just don’t bother.’
해충들도 하도 많아서 이 게 또 사람들을 불편하게 하는데 크게 한 몫을 거들었는데, 눌러 죽이면 물거나 쏘거나 했을 뿐 아니라, 어떤 놈들은 책들을 구멍 내거나 가구를 야금야금 먹어치워 가구들을 못쓰게 망쳐놓는 놈들이 있었다. 그래서 이따금 가죽 가방을 들고 보면, 가방 밑 바닥이 푹 꺼져있었고, 밤에 마루 바닥에 장화를 벗어놓고 잠을 잔 뒤 아침에 일어나 보면 장화 밑창이 통째로 없어졌다.
또한 십중팔구 사람을 보면 뱀이 먼저 피해서 도망을 갔지만, 잠잘 때 혹 모르고 재수 없이 밟을 수가 있었는데, 그러면 최악의 결과로 고통을 받게 되는 뱀의 잠재적인 위협이 도사리고 있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인도에서 전 생애를 다 보내 보고도, 뱀을 한 번도 보지 못했다는 경우도 있었다. 레이몬드 버네드 씨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을 했다. “제 경우는 그렇게 여러 달이 지나고 지나도 뱀을 한 번도 보지 못한 기억이 나네요.”
‘I can remember months and months of not seeing a snake at all
그러나 한 번은 욕실에서 코브라 한 마리를 죽여야 했고, 그 다음은 코브라와 동종인 벵갈산 독사인 우산뱀 크라이트를 응접실에 있던 쿠션 방석 아래서 발견했다. 그래서 이 뱀을 더 나은 장소에 둘 필요가 있어서 우편 사서함 박스에 똬리를 틀어 단단히 집어넣고 나서는 잊어먹고 있었다. 다음날 호기심이 많은 청소부가 경칩을 열자 이 놈이 갑자기 튀어나와 덮치는 바람에 모두들 놀래 가지고 자지러지는 비명을 질렀다.
마나님들은 남편들보다 겁이 더 많았다. 이에 대해 싸이밍톤 부인은 다음과 같이 회상을 했다. “전 뱀이라면 딱 질색이었지요. 하루는 애들 장난감 상자에 뱀이 한 마리 들어가 있었는데, 제가 상자를 열자 홱 하고 불쑥 튀어나왔지요. 또 한 번은 헐렁한 카바가 씌워진 의자에 앉아 있었는데, 제가 일어나자 유모가 대신 그 의자에 앉았지요. 제 생각에 유모는 제가 앉아있을 때보다 좀 더 거북살스럽게 보였는데, 왜 그런가 하고 보니까 뱀 한 마리가 슬그머니 기어 나오더니 마침 의자에 앉아있던 제 어린 딸애 쪽으로 곧장 방을 건너가더군요.”
‘I hated snakes. The children’s toy box had a snake in it one day and when I opened it out it popped. on another occasion I’d been sitting on a chair that had a loose cover, and when I got up the nanny went and sat on it and I suppose she was rather heavier than I was because a snake slithered out and went straight across the room to my little girl who was sitting in her chair.’
어떤 사람들은 뱀을 갖고 노는데 싫증이 난듯한 태도를 보이기도 했다. 예를 들면 라즈 푸트나 사막에 주둔해 있던 에드 브라운 부대의 군인들은 쥐구멍에 숨어있는 여러 마리의 뱀을 발견했다. “우린 하키 채로 골프 공을 치곤 했는데, 이 걸로 뱀이 구멍 위로 삐죽이 올라오면 골프 공을 내치듯이 후려쳤지요. 어떤 뱀은 코브라여서 동료 중 한 명은 넝마 조각으로 약을 올려 그 놈이 자기 이빨로 꽉 물게 해 가지고 잡던 일이 기억에 남아요. 그 친구는 세면장 욕조에 그 놈을 집어넣었는데, 사람들은 그게 뭔지, 그 놈이 죽었는지 살았는지 구경을 하려고 주변에 몰려들었지요. 그런데 이 놈이 죽지않고 자기 머리를 욕조 가장자리 위로 꼿꼿이 쳐들었는데, 저는 사람들이 그렇게 놀라 우르르 도망치던 모습을 결코 본 적이 없었어요.”
‘We used to tee off with hockey sticks and golf balls and try and hit these snakes when they put their heads up out of the holes. Some of the snakes were cobras and I remember one of our fellows catching one with a piece of rag by letting him strike and catch his teeth in it. He put it in a bath of water in the wash-house and everyone crowded round to see what it was and whether it was dead – which it wasn’t. It put its head over the rim of the bath and I’ve never seen such a stampede!’
팩스 브리태니카 <영국 지배하의 평화주의>로 인해서 영국인이나 인도인들은 확실히 안심들을 하고 일상생활을 해 나갔다. 그래서 무더운 날씨가 계속되면 거의 대부분의 유럽인들은 완전히 안심을 하고 아무런 방해도 받지않은 채 문밖에서 잠들을 잤다. 그렇다고 해서 북서전선에서의 폭력을 특별히 잘 통제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개인을 향한 폭행은 드물었지만, 일어나기는 일어났다. 벵갈 지방의 한 특정 지역에 치안판사로 퍼시발 그리피스 씨가 부임했을 때, 그는 3명의 전임자들이 모두 폭도들에게 총을 맞은 사실이 있다는 걸 알게 됐다. “그 세 사람들 때문에 좀 슬펐지요. 왜냐하면 그 중 두 사람은 특별히 벵갈 지방을 좋아했고, 벵갈 사람들을 위해서 엄청나게 많은 공적인 일들을 했지요. 알고 보면 총질은 개인적인 어느 한 사람에 대해서 한 것이 아니라, 라즈들을 대리한 영국을 향해서 총질을 한 거였어요.”
‘It was rather sad because of those three, two were specially known for their fondness for the Bengali and for the tremendous amount of public work that they were doing for the Bengali. The shooting was not directed at them as persons, it was directed at them as representatives of the British Raj.’
비협조 운동과 스와라지라는 물품 불구매 운동과 데모가 세력을 얻어 극성을 부릴 때도 유럽인들은 실제로 신체적 위험을 거의 느끼지 않았다. 이에 대해 싸이밍톤 여사는 다음과 같이 말을 했다. “우리만 남아있었는데도 결코 무례하게 굴거나 적대감이나 그 어떤 위협도 느끼지 않았어요. 제 남편이 무질서와 폭동을 진정시키려고 밖에 나다녔어도, 물론 약간은 신경이 쓰였지만 어떤 위험한 일들이 남편에게 닥칠지 모른다는 느낌을 받지는 않았지요. 아무튼 우리는 공격 당할 거라는 생각을 추호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항상 모든 집의 대문을 전부 열어놓고 다녔지요.”
‘We were left alone. I never had any rudeness or hostility or was ever frightened about anything. When my husband went away to quell a disorder or a riot I used to feel a bit nervous but I never felt that any harm would come to him. The whole house was always open, because we never felt that we were going to be attacked.’
이 게 그 당시의 모습이었다. 클라우드 오친레크 씨가 인도에 왔던 50년 전의 마나님들 태도는 아주 많이 달랐다. 그 당시는 폭동이 사람들 머리 속에서 잊혀지지 않았을 때였다. 클라우드 오친레크 씨의 부친은 장교로 출정해 폭동에서 싸웠던 사람이었다. “그 폭동은 영국인 사회에 상처를 남겨놓았지요. 그러나 군인들이 보기에 폭동은 그렇게 중요한 사건은 아니었지요. 하지만 폭동 때 있었던 영국여자들은 폭동을 기억하고, 어느 정도는 자기 남편들의 감정과 행동에 영향을 끼쳤지요.”
‘It had left scars on the communal memory. So far as the men were concerned, the Mutiny meant nothing to them. But the Englishwomen out there remembered the Mutiny and they influenced to a certain extent the behaviour and the feelings of their menfolk.’
그래서 영국인 마나님들은 상당한 비난을 들어야 했다. 이에 대해 죤 모리스 씨는 다음과 같이 말을 했다. “여편네들 중 대부분은 아주 합리적이고 예의 바른 영국소녀 적부터 시작을 했지요.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많은 여자들이 아주 무서운 마귀 할멈들처럼 돼 버렸지요. 저는 영국인과 인도인 사이의 관계를 망쳐버린 아주 큰 책임이 여편네들한테 있다고 생각을 해요. 영국 여인들이 전혀 인도에 오지않던 초창기 때, 영국 관리들은 인도인들과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면서 인도인들을 더 잘 알게 되었고, 인도인들의 언어나 기타 다른 것들도 잘 알게 되었지요. 반면 영국여자가 인도에 도착하기 시작하면서, 그 여자는 남편이 자기하고만 시간 보내기를 고대해서, 영어 단어 몇 마디만 알고있던 주방장만 빼놓고는 어느 누구와도 말을 하지 않았지요. 그래서 오락도 친구도 거의 전적으로 남편만을 의지하지 않을 수가 없었지요. 저는 그게 얼마나 심각하고 위험한 일인지 여자들이 깨닫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지 않아요.”
‘Most of them started out as perfectly reasonable, decent English girls and many of them in the course of time developed into what I can only describe as the most awful old harridans. And I think they were very largely responsible for the break-up of relations between the British and the Indians. In the early days, before the Englishwoman went out to India at all, British officers spent much of their time with Indians, got to know them better, got to know the language well and so on; whereas once the Englishwoman started to arrive in India she expected her husband to spend his time with her. She couldn’t communicate with anybody except her cook who knew a few words of English, so she was forced to rely almost solely upon her husband for amusement and company. I don’t think that she realized what a menace she was.’
다른 사람들도 여편네들을 똑같이 비난했지만, 거기엔 다른 이유도 있었다. 이에 대해 죠지 캐롤 씨는 다음과 같이 회상을 했다. “인도에서 제가 살던 한 시기에, 저는 백인 여자들에게 아주 반감이 많았어요. 왜냐하면 그 여자들은 무더운 계절마다 남자들은 평지에 내버려둔 채 산으로 올라가 우리의 체면을 크게 깎아 놓기 쉬운 사람들이라고 생각을 해서 그랬지요. 여자들이 고산지대로 올라간 것은 부도덕한 생활을 하기 위한 것이라는 게 보통 사람들의 생각이었고, 대부분의 경우 그런 게 사실이었지요.”
‘At one stage of my life in India I was very much against the white women because I considered that they were apt to let us down in prestige by going off to the Hills every Hot weather and leaving one down below. The general understanding was that they went up there to lead a life of immorality, and in many cases it was true.’
그러나 비평가들 조차 여자들의 태도가 바뀌고 있었다는 데는 의견을 같이 했다. “1차 대전 전의 여자들은 확실히 더 보수적이었으며, 떨어져 사는 별거 문제에 관심을 더 많이 뒀는데, 전쟁 후에 보니까 그런 게 모두 없어지기 시작했지요.”
‘Womenfolk before the First World War were definitely more reserved and more concerned with preserving their separation. After the war that began to disappear.’
무더운 날씨에 대처하는 조건들이 많이 개선되면서, 점점 더 많은 부인네들이 남편들과 함께 평지에 머무르게 되었다. 그런데도 키플링에 의해 시작되었던 영국 마나님들의 신화적인 이미지는 그 이후로도 쭉 연보에 실려 사람들의 뇌리에 고정돼 있었다.
프란시스 스마이스 씨는 이런 현상을 어느 정도는 그 안에 진실성이 들어있는 일반화된 현상들이었다고 다음과 같이 주장을 했다. “인도에 있던 영국 여자들은 다른 데 있던 영국 여자들과 마찬가지였어요. 그들은 대부분 개인주의적이었지요. 그러나 이 면엔 어쩌면 다른 데 살던 영국 사람들과는 다른 어떤 생활태도를 선생님께서는 보셨을 거예요. 그 건 인도인들과 자주 어울리지 않는다든가, 이를테면 당신이 영국인이라는 걸 내세워 그런 식으로 하인들을 대한다든가 하는 것들이었지요. 그래서 좀 나이든 여자들은 선생님과 함께 모여서 불만스러운 태도로 “이 보세요, 가서 그렇게 해 가지고는 남편들에게 도움이 될 게 없어요.” 라고 말을 했지요. 그러나 선생님이 훌륭한 주부라면, 아마도 “좋아, 그렇다면 나는 그렇게 하지않으면 되지 않아.” 라고 생각을 했겠지요.”
‘British women in India were like British women anywhere else, they were a lot of individuals. But there were certain attitudes which you took up, perhaps, from all the others. Such as, you don’t mingle with Indians too much; you remember that you’re British; and in the way you treat your servants. The older women would get together with you and say, “You know, you won’t do your husband any good, my dear, by going and doing those sort of things,” in a disapproving way. And so, if you were a good little wife, you probably thought, “Well, I’d better not.”’
그러나 그런 식으로 압력을 가하는 일이 반드시 어디나 똑같지는 않았다. “민간인 부인들과 군인 부인들 사이에는 커다란 차이점이 있었어요. 십중팔구 민간인 부인네들은 소규모 주둔지에서 자기 남편들 일에 훨씬 더 밀접하게 참여함으로써 눈에 두드러진 활동들을 했지만, 반면 군인 부인네들은 남편들 직업과는 정말 아무런 상관도 없이 지냈지요.”
‘There was a great difference between the civilian wives and the military wives. The civilians were for the most part stuck out in small stations where the wives took a much closer part in their husbands’ work, whereas the military wives really had nothing to do with their husbands’ jobs.’
큰 도시에서는 영국보다 훨씬 더 영국적으로 살았던 사람들이 아주 많이 있었는데, 아주 번번히 인도는 그런 사람들을 제대로 모르고 지나쳤다. 그런가 하면 다른 요인들도 영국 여자들이 인도라는 나라에서 많은 역할을 해보려던 일에 낙담을 주었다.
이런 외부 지향적인 사회에서는 예상대로, 여자들은 그냥 남자들의 기대감에 따라 순응하며 살았다. “그 당시엔 여자들이 더 똑똑해서는 안 된다는 강박관념 같은 게 있었어요. 여자들은 치장을 하거나, 지적으로 보이거나, 공손히 남의 말을 경청하는 사람으로 보이는 건 좋았지만, 똑똑한 체하며 앞으로 나서면 안되었지요. 만약 우연치 않게 누군가 그런 사람이 있으면, 그런 사람은 그냥 집 구석에 숨겨두었지요.”
‘There was a very strong feeling that women were not supposed to be clever. They were supposed to be decorative and intelligent and good listeners, but they weren’t supposed to be clever and, if by any conceivable chance anyone was, they kept it pretty dark.’
그런가 하면 영국 여자들도 인도인들과 어울리면 불이익을 당했다. 왜냐하면 인도 여자들은 사회생활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인도 여자들은 거의 다 프르다 제도에 갇혀서, 만날 기회가 아주 드물었다. 이런 불균형은 독립 때까지 실제로 하나도 변치 않고 그대로 남아있었는데, 인도 여자들과 우정을 쌓거나 프르다 파티를 함으로써 남성 우월주의적인 벽을 허물었던 많은 일부 마나님들의 역할엔 상당한 인물의 힘을 필요로 했다. 그런가 하면 일반적으로 에드워드 시대의 중류계급의 여자들은 교육에 전혀 무관심한 것에도 문제가 있었다. 가정에서는 자기 자매들 같이 단순히 독서를 하거나 살림을 잘 하는 그 이상의 교육을 시키지 않았는데, 인도에서 여자들은 주로 살림만 돌보며 살았다.
이런 많은 장애 요인에도 불구하고 20년대 초에는 앵글로 인디언들의 풍습을 타파하기 시작했던 예외적인 사람들이 30년대 말쯤엔 급속히 하나의 관례처럼 퍼져나가고 있었다. 부인네들은 자신들을 위해서 남편 일을 돕거나, 영국 동네 밖에서 간호나 안내역 그리고 많은 자발적인 형태의 일거리를 취함으로써 개인적으로나 사회 봉사자로써 유용하고 가치 있는 역할을 찾고 있었다.
남자 자신들도 모든 사람들을 대등하게 대해 주려고 노력들을 했고, “필요하면 서로 밀어주고 도와줘야 한다는 공동체적인 항상 같이 한다는 감정”을 갖고 있었다.
“and to the feeling of sticking together, that you must always back each other up, if necessary.”
어떤 사람들은 이런 사조를 불행한 남편들 주위에서 작은 영국을 만들어 보려는 경향을 가진 혁신적인 마나님들의 또 다른 표현 성향으로 보았다. 그러나 이유야 어쨌든 간에 예술적으로나 문화적인 면을 추구하려고 노력했던 분위기는 아니었다. 이에 대해 아이리스 포르탈 여사는 다음과 같이 단언을 했다. “선생님도 사람들이 고향 집에서 살던 방식대로 사회적 패턴의 삶을 되풀이하면서 살고있다는 걸 아셨을 거예요. 그 당시 영국인들은 생각만큼 그다지 아주 교양 있는 인종은 아니었지요. 물론 총독부에는 좀 더 문화적인 생활 때문에 향수병에 걸려있던 아주 교양 있고 지적인 사람들이 있었지만, 단지 교양을 쌓기 위해서 인도로 근무를 하러 갔던 타입의 사람들이 상류계급 중에는 많지가 않았지요. 저는 겨울이면 저의 아버님과 집을 나눠 쓰던 총독부의 아주 유능한 한 직원이 기억에 남는데, 그 사람은 자기 욕실에 바하의 전축 판을 계속해서 돌리면서 자신에 대해 걱정하곤 했지요.”
‘You found repeated the social patterns of the way people lived at home and the British were not in those days a very cultured race. It was not fashionable among upper-class people of the type who went into the services to be very cultural, although you did find in the ICS very highly cultured, intellectual people who did get homesick for a more cultured life. I remember a very able member of the Indian Civil Service who shared a house with my father one winter and used to worry him by constantly playing gramophone records of Bach in his bathroom.’
적어도 한 가지 정도의 어려움은 남자나 여자 양 쪽 모두에게 공통적으로 있었다. 이에 대해 루위 르 마르찬드 씨는 다음과 같이 말을 했다. “애틋한 이별의 슬픔은 인도에선 항상 대두되었던 문제였지요.”
‘The heartaches of separation are ever present in India.’
특히 군에서는 아주 현실적인 문제였다. “네가 저 떠돌이 고수와 결혼하면, 어디를 가던 따라다녀야 한다.”는 말이 있었지만, 순전히 한 곳에 머물러 살지를 못하고 멀리 파견을 나가 떨어져있어야 될 경우가 너무나 많았어요. 부인네들에게 그 말은 “잘 있어요, 애기 아빠, 산으로 내가 아이들을 데려가겠어요. 그러니 휴가 때 당신 보기를 정말로 고대하겠어요.” 라는 말로 비쳐졌지요.”
‘Although the saying is “If you marry the drum you’ve got to follow it,” there are many times when you simply cannot stay with it and you’ve got to be sent away. For the wife it is, “Goodbye, husband, I’ll take the kids up to a hill station and we’ll expect you on leave when we see you.”’
남편들이 번번히 군 임무로 전선으로 떠나가야만 했기 때문에 많은 군인 부인들은 그런 경험들을 공유하고 있었다. 이에 대해 데보라 드링 여사는 다음과 같이 말을 했다. “제 남편과 저는 항상 떨어져 살았지요. 한 때는 외지 근무로 13년간 살면서 햇수로만 3년 같이 살아 봤을 뿐이에요.”
‘My husband and I were always being separated. I once worked out that in thirteen years we’d only spent three whole years together.’
이런 끝날 거 같지 않은 최악의 별거 상황과 두려운 이별을 해야 하는 사람들 중에는 어린이들이 있었다. 관습상 교육 때문에 또는 인도의 무더운 날씨에서 풀어주기 위해서 영국으로 보내야 할 때가 왔는데, 어머니들마다 어린이와 남편 사이에서 양자택일을 해야 했고, 어느 한 쪽은 희생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마르조리 캐시모어 여사가 묘사하듯이 남편 곁에 남기로 한 사람들은 자식들을 희생시켜야만 했다. “우리는 주교한테서 맏 애는 5살이 넘어서는 떼어놓지 말라고 해서, 애가 3살 때 할머니한테 보내야 했지요. 결론적으로 말해서 5년간 그 애를 한 번도 보질 못했는데, 그 당시 편지 받는데 만 6주씩이나 걸려서 5년이 끝날 즈음 다시 데리고 와 보니 아이는 완전히 우리에겐 남남이나 마찬가지였지요.”
‘We were told by our bishop that we mustn’t keep our eldest child out over the age of five, so when she was only three we had to send her to her granny. That meant that for five years we didn’t see her. In those days it took six weeks to get a letter and by the end of the five years when we got her back again she really was a stranger to us.’
근무를 하던 초창기 시절엔 박봉이나 아니면 빈번하게 왕래가 자주 없는 노선 때문에 별거나 외로움을 더 겪어야 했다. 영국을 왕래하는 보조 항로도 비교적 늦게 개선이 되었다. 죤 코튼 씨는 자기 부친에 대해 말을 하면서 다음과 같이 회상을 했다. “1916년과 1926년 사이에 아버님은 전혀 영국에 돌아오지 못해서, 저희는 그 십 년 동안 아버님을 전혀 보지 못했지요.”
‘Between 1916 and 1926 he never came back to England at all, nor did we see him during any of those ten years.’
고급 관리들 특히 후한 연금을 받는 총독부 직원들의 봉급과 극단적으로 대조를 이루던 하급 관리들이 받는 낮은 급여는 인도의 모든 관청에서는 아주 보편적인 일이었다. 이로 인해 지독한 불안감이 생겼고, 라즈들 생활의 가장 공통적인 특징 중 하나가 바로 이런 불안감으로, 일종의 가족에 대한 노후보장을 확실히 해둘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저축하고 또 저축하는 일 뿐이었다. 이런 방법이 인도에 있던 대다수 관리들이 행했던 어쩔 수 없는 방법이었지만, 아버지들이 근무하던 초창기 시절에는 이런 이유로 인하여 가족들이 궁핍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그러나 한가지 점에서 이 스파르타식 수칙만은 예외로 적용하지 않았다. “애들 교육시키는 문제만큼은 돈을 아끼지 않았는데, 왜냐하면 이것이야 말로 모든 방법 중 가장 확실한 노후 보장책이라고 생각들을 했기 때문이었지요.”
‘The one thing that was never saved on was the children’s education, because this was considered the greatest security of all.’
인도는 영국인들에게 견디기 어려운 곳이었지만, 마찬가지로 영국인 자신들도 영국과 인도 사이에서 힘들게 살아가고 있는 계층의 사람들보다 더 심하지는 않았지만 영국인 자신들에게나 인도인에게 참고 견디기 어려운 상황을 만들었다. 이에 대해 이렌느 에드워드 여사는 어린 아이 때의 일을 다음과 같이 기억을 했다. “벤치가 있었는데, 하나는 유럽인 전용이라고 표시돼 있고 다른 하나는 인도인 전용이라고 표시를 해 놓았던 기억이 납니다. 역시 유럽인 전용 혹은 인도인 전용이라고 표시된 대기실도 있어서, 인도 태생의 앵글로 인디언 아이로써 저는 어느 쪽에 앉아야 될지 잘 알지를 못했지요.”
‘There were benches, one marked “European only”, one marked “Indians only”. There were also the waiting rooms marked “European only” and “Indians only.” As an Anglo-Indian child I never knew which one to occupy.’
앵글로 인디언들에 대한 태도는 아주 다양했다. “하층계급이나 기타 계급들은 자기들 클럽이나 메쓰에 앵글로 인디언이 들어오는 걸 환영하고, 심지어 결혼까지도 했지요. 그러나 상류계급으로 올라가면 갈 수록 앵글로 인디언들에 대한 편견이 더욱 더 심했지요.”
‘The lower classes and the Other Ranks welcomed the Anglo-Indians into their clubs and messes. They even married them. But the higher up you went the greater was the prejudice against the Anglo-Indians.’
돌이켜 보면 이런 편견은 비난 받을만한 일이었다. 이에 대해 아이리스 포르탈 여사는 다음과 같이 말을 했다. “우리는 그렇게 심하게 비난을 받고 있을 수는 없었어요. 그러나 제가 어렸을 때, 다들 – 심지어 저의 부모님 같이 깬 사람들도 – “블랙키 화이트” 나 “1루피에 12 애나” 하는 식의 농담을 하던 사람들처럼 저도 판에 박은 보수적인 태도를 취했지요.”
‘We can never be sufficiently blamed. When I was very young I took the conventional attitude which everybody took – even enlightened people like my parents – of making jokes about “blackie-whites” and “twelve annas in the rupee”.’
인종적 편견은 양 쪽에서 다 같이 심했다. 이에 대해 이렌느 에드워드 여사는 다음과 같이 말을 했다. “인도인들도 인도 태생의 앵글로 인디언들을 깔봤지요. 왜냐하면 그 사람들도 선생님이 이 쪽도 저 쪽도 아니라고 생각해서 그랬지요. 그 사람들은 우리를 쿠챠 부챠라고 불렀는데, 그 얘기는 반 쪽만 구워진 빵이라는 소리였지요. 피부 색깔이 검은 정도에 따라서 3/4 정도는 틴 파오, 1/2 정도나 거의 하얀색 피부면 아드하 시어 같은 말로 구분해서 부르곤 했어요.”
‘The Indians looked down on the Anglo-Indians because to them you were neither one nor the other. They used to call us Kutcha butcha, that is to say, half-baked bread, and depending on the shade of your colour they used to talk about the Anglo-Indian as being teen pao, three-quarters, or adha seer, half a pound, if you were nearly white.’
인도 태생의 앵글로 인디언들은 영국인 동네 옆 철길 동네라는 곳에서 같이 살았는데, 그 사이에는 깊은 만이 있는 곳이었다. “사람들이 그렇게 불친절하게 대하던 곳은 아니었지만, 일종의 사회 금지구역 같이 터부시한 곳이었지요.”
‘It wasn’t that one was unfriendly; it was a sort of social taboo.’
직장 이외에 사회적으로 사람을 만날 수 있는 곳은 철로협회 댄스 파티에서 였다. 존 알렌 씨는 다음과 같은 일들을 인정하였다. “우리는 약간은 겸손한 태도를 가지고 이런 댄스 장에 가고는 했지요. 우리는 그 사람들에게 공손하게 대했는데, 훨씬 더 구식으로 보이는 다른 세상 속으로 들어간 것 같았어요. 왜냐하면 여자 애들은 댄스 상대와 앉아있었던 게 아니라, 항상 자기 부모들 뒤 쪽에 가 서있었지요. 저는 그 여자 애들이 촌티 나는 구닥다리 복장을 하고 와서, 그 여자 애들을 쳐다보고 비웃곤 했는데 지금 생각하니 좀 미안한 생각이 드는군요. 아무튼 그 여자 애들은 몇 년 전 유행하던 옷들을 입었고, 현대적인 유행은 따라올 생각들을 아예 하지 않았던 사람들 같았어요.”
‘We used to go to these dances in rather a condescending manner. We’d go to be polite to them and it was like moving into a different world, a much more old fashioned one, because the girls would never sit with their dancing partners but were always taken back to their parents. I’m afraid we used to rather laugh at them because they seemed to be such frumps. They always seemed to be dressed about several years back and never seemed to quite catch up with modern fashions.’
영국인들 입장에서 보면, 영국인과 앵글로 인디언 사회 사이에 결혼은 심히 얼굴을 찌프릴만한 사건이었지만, 앵글로 인디언들의 입장에서 보면 그렇지 않았다. “여자 애들은 영국 군인들과 어떻게 든 결혼을 해야 한다는 말이 있었지요. 종족 번식 때문이 아니라 혈통을 개선시키기 위해서 그랬지요. 그래서 우리 목표는 인도 태생의 앵글로 인디언 남자들이 아니라 영국 군인들과 결혼하는 것이었지요.”
‘An unwritten rule was for the girls to try and marry the British soldier. Not to propagate the species but to improve the strain, so our aim was to marry British soldier, not to marry Anglo-Indian men.’
영국 군인들은 유럽에 있는 처녀들로부터 고립되어 떨어져 있는 상황이어서, 이런 소망은 많이 실현되었다. 이에 대해 스테픈 벤틀리 씨는 다음과 같이 단언을 했다. “저는 인도 태생의 앵글로 인디언 여자들을 아주 많이 만났는데, 정말로 사람을 끌지않는 여자가 없었어요. 그 여자들은 두 나라의 좋은 점만을 다 갖추고 있었지요. 모두들 멋지게 춤을 춰서, 그 여자 애들이 댄스에 나오려고 꾸미고 있을 때는 항상 그 애들만 보았지요. 그러나 여자 애들이 출연을 하지 않으면 못 봤지요.”
‘I met hundreds of Anglo-Indian girls and I can’t think of one that was really unattractive. They had the virtues of the two nations. They were all wonderful dancers and you always saw them when they were made up for a dance. You never saw them when they were “off-parade”.’
이 점에 대해서 이 에스 험프리 씨는 다음과 같이 되 받았다. “유라시안 여자 애들은 화장을 하는데 모두들 전문가 수준이어서, 몸에다 기가 막힌 쟈스민 향수를 띠게 만들어서 실제 모습보다도 훨씬 더 매력적으로 보였지요. 어떤 경우는 영국 군인들을 어떻게 든 재촉을 해서 약혼도 하고, 결국엔 정말로 결혼도 했지요. 그러나 그런 일들은 영국군 지휘부의 눈쌀을 찌프리게 해서, 결혼을 막으려고 백방으로 노력들을 했지요.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주 많은 수의 여자들이 어떻게 든 결혼들을 했지요. 제가 데리고 있던 사병 중 한 명은 거의 당신이 쓴 모자 색깔만큼이나 까맣게 생긴 예쁘장한 유라시안 여자와 약혼을 하게 됐지요. 그래서 제가 그런 일에 대해 엄중히 경고 조처를 취했는데도, 그 친구가 계속해서 고집을 피워대서, 다른 주둔지로 전출 시켜 버렸지요.”
‘The Eurasian girls were experts at making themselves up and the aroma from their bodies was tinged with the wonderful scent of jasmine which made them probably far more attractive than they really were. In some cases they managed to persuade a British soldier to become engaged and ultimately to marry. It was frowned upon by the British Command, but despite all the efforts to quash it a vast number did manage to get married. one of my own soldiers elected to become engaged to a lovely Eurasian who was almost as black as your hat. I took steps to warn him against it, and when he persisted I made arrangements for him to be transferred to another station.’
2차 대전 때문에 앵글로 인디언들에 대한 것들을 포함해서 많은 태도들이 달라졌다. 이런 변혁에 대한 동기는 자신들의 충성심이나 가치 양면을 다 입증해 보려고 기회를 노리던 인도 태생의 앵글로 인디언들로부터 나왔다.
이에 대해 아이리스 포르탈 여사는 다음과 같은 경험을 하였다. “2차 대전 때 델리에 있던 인도병원에 간호사로 갔을 때 저는 제 태도를 완전히 바꾸게 됐지요. 거기서 저를 도우러 와서 함께 일했던 여자들은 역시 저의 절친한 친구들 중 한 명이었던 유라시안 의사의 부인 뿐이어서, 그 때 저는 그런 생각들이 모두 다 터무니 없는 생각들이라는 걸 깨닫게 되었지요.”
‘I changed my attitude completely in the Second World War when I went to nurse in the Indian hospitals in Delhi, where the only woman who could help me and came in and worked with me, was the Eurasian wife of a Eurasian doctor who became one of my best friends. And I realized then what nonsense it all wa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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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회의 땅 - 인도
Land of regrets
인도에 있던 라즈들의 역사를 보면 영국인 남자나 여자들 중 한 특정 세대는 그 당시 인도에 없었다. “인도에 있었던 영국인 중 노인네들은 없었지요. 아마 60세쯤 된 사람들이 우리가 만날만한 가장 나이든 사람들이었을 겁니다.”
‘There were no old people among the British in India. A man of sixty was probably the oldest that one was likely to meet.’
이는 부분적으로 조기 은퇴가 원인이었다. 1904년 인도 경찰에 입대하려고 에치 티 위컴 씨와 같이 인도에 갔던 10명의 젊은 장교 중에는 인도에 도착하자마자 5개월 이내 2명이 바로 죽고, 10년 안에 또 6명이 죽었다.
20년 뒤에도 여전히 인도는 인도에 맞지않는 사람들만 주로 희생을 시켰다. 이에 대해 필립 메이슨 씨는 다음과 같이 회상을 했다. “저는 항해 중에 친구 두 사람을 사귀었는데, 이들 중 1명이 인도에 도착하자마자 첫번째 여름에 죽었지요. 그 친구는 전혀 인도라는 땅에 행복해 하지를 않았어요. 봄베이에 도착하기 바로 전 저에게 다소 비장한 어조로 “다시는 좋은 일이 생길 거 같지가 않아.” 라고 했는데 정말로 그렇게 돼 버렸지요. 그 친구는 자신이 처한 인도사회를 비판하지도 않았고, 자신이 갖고있는 불만을 말로 표현할 필요성도 느끼지 않았지요. 그 친구는 날씨가 아주 무더운 계절인 6월 달에 자선임무를 나갔다가 맹장에 걸려서, 사람들이 그 사람을 본부로 데려올 때쯤 보니까, 우마차에 실려 이틀간이나 여행을 했다고 그러더군요.”
‘I made two friends on the voyage out. one of them died in his first summer. He wasn’t happy in India at all. Just before he reached Bombay he said to me rather sadly, “I suppose I shall never again feel really well,” and he didn’t. He was not merely critical of the society he found himself in, but he felt he had to express his criticism. He went out on Famine Duty in the hot weather in June, and he got an appendix and by the time they got him into headquarters, a two day journey in a bullock cart, that was that.’
이와 비슷한 얘기 중 또 하나는 로사문드 로렌스 여사가 만났던 사람인데 이 사람도 인도에 대한 모든 걸 증오하였다. “그녀는 하인도, 날씨도, 음식도, 사람도 모두 싫어했어요. 승마나 마차 끄는 것도 배우려고 하지 않았어요. 하루 종일 투덜대고 모든 걸 증오했지요. 그런데 어느 날인가 의사가 말하기를 그 사람이 아프다고 했지요. 그래서 제가 “뭐가 잘못됐는데요?” 하고 묻자 “잘 모르겠어요. 아무튼 무척 아픈가 봅니다.” 라고 말을 했지요. 다음 날 그 여자는 죽었는데, 그 여자가 갖던 행복에 대한 개념은 교외의 별장이었지요.”
‘She didn’t like the servants and she didn’t like the weather, she didn’t like the food and she didn’t like the people. She wouldn’t learn to ride and she wouldn’t learn to drive. She just grumbled all day long and hated everything. And then one day the doctor told me that she was ill. I said, “Oh, what’s wrong with her?” and she said. “I don’t know, but she’d very ill.” The next day she was dead. Her idea of happiness was a suburban villa.’
이따금 인도는 인도에 간 젊은이들에게 이상적인 기준을 요구했는데, 심지어 너무 뚱뚱해 거동이 불편한 사람에게도 너무 지나친 비현실적인 기준을 요구했다. 올라프 캐로 씨는 북서전선의 주지사로 있었을 때의 한 예를 다음과 같이 회상을 했다. “전에 와지리스탄에서 근무한 적이 있던 한 남자의 아들이 주재관으로 왔는데, 한 번은 마후스드들에게 납치를 당해 억류돼 있어서, 저는 독하게 마음을 먹고 허풍작전을 폈지요. 그런 작전이 받아들여져서 석방이 됐고, 그 사람이 정부청사로 와서 나와 같이 있다가, 제가 “아무래도 전출을 가는 게 좋겠어. 하지만 먼저 있던 곳으로 당신을 다시 되돌려보내는 건 옳지 않은 것 같아.” 그러자 거의 무릎을 끓다시피 하고는 눈물을 흘리면서 다시 그 곳으로 보내달라고 간청을 했지요. 그 사람은 다시 그 곳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자기 자신에게나 그 어떤 사람에게도 결코 견딜 수 없는 일이 될 거라고 했지요. 그래서 “그럼 좋네. 당분간 만 그 곳으로 보내주지. 그리고 나서 다른 곳으로 보내겠네.” 하고서는 그 사람을 남 와지리스탄의 원 주둔지로 원대복귀를 시켰지요. 6주쯤 지났을까 “너무 오래 있었던 거 같군. 그만하면 됐으니, 어느 어느 곳으로 이동할 것을 제안하는 바임.” 이라고 제가 편지를 써 보냈지요. 그런데 이틀 뒤 전화가 와서 받아보니 그 사람이 총으로 자살을 했다는 거였지요. 그 사람 책상 위에 있던 제 편지는 개봉이 안된 채 놓여있었다고 하더군요. 아마도 그 사람은 그 편지 내용이 자신에 대한 내용이라는 걸 눈치챈 모양이에요.”
‘In Waziristan there was a political agent who was the son of a man who had been in Waziristan before him. He was kidnapped and held by the Mahsuds and I had to harden my heart and take air action. It was taken and he was released. He came and stayed with me in Government House and I said to him, ‘I think you’d better be moved. It’s not fair to send you back again to this place.’ And he begged me almost on his knees, with tears in his eyes, to send him back. He said he would never be able to stand up to himself or to anybody if he wasn’t sent back. So I said, ‘All right, I’ll send you back for a short time, and then we’ll move you on.’ So I sent him back to his original station in South Waziristan and after six weeks or so I wrote him a letter and said, ‘I think you’ve been there quite long enough. You must feel that you’ve proved yourself now, and I propose to move you to such and such a place.’ Two days later I was rung up and told that he had shot himself, and my letter was lying unopened on his deck. He had found it too much for him.’
적응을 못하는 사람들은 그렇다 치고, 인도는 여러 다른 방법들로 많은 사람들을 희생시켰다. 이에 대해 노리 여사는 다음과 같이 회상을 했다. “인생이란 게 참 허무했어요. 많은 이들이 그랬지만 – 누군가 앓다 죽으면 바로 그날 매장을 했지요. 그런 식으로 아주 갑자기 서로 헤어져서, 사람들에게 두려운 인상을 심어주었지요.”
‘Life was so very short. When anybody got ill and died – and lots did – they were buried the same day. It made the parting so sudden and it made an awful impression upon people.’
그렇다고 해도 그런 게 인도의 특징이었다. “인도에서는 모든 게 갑자기 일어났지요. 갑자기 땅거미가 지듯이 사람들도 갑자기 죽었지요. 선생님과 아침에 같이 식사를 한 사람도 오후면 죽을 수 있었는데, 그 게 선생님이 살던 인도의 현실이었지요.”
‘Everything is sudden in India, the sudden twilights, the sudden death. A man can be talking to you at breakfast and be dead in the afternoon – and this is one of the things you have to live with.’
새파랗게 젊은 남자와 그 남자보다 더 앳된 여자들과 또 이들이 낳은 어린 자식들의 무덤으로 가득찬 캘커타나 U.P 주의 옛 공동묘지에는 적당히 사전에 주의를 하지 못하고 살다간 사람들의 운명적인 기념비들이 많이 서 있었다. 한편 숭고하고 헌신적인 목적을 갖고 살았던 예외적인 경우도 많이 있었는데, 적의나 심지어 위험한 반대에 직면해서도 건강과 복지를 개선하면서 투쟁을 했던 개척자들이 있었는데, 이 사람들은 심라 지방에서는 릭샤를 개선하고, 델리에서는 집에다 소들을 기르지 못하게 사회운동을 벌인다든가 했는데, 군의관들 중에는 그런 사람들이 많지 않았다.
아이리스 포르탈 여사가 시골에서 심하게 병을 앓게 됐을 때, 가장 가까운 의사한테 가려고 해도 50마일이나 떨어진 곳으로 차를 보내야 했다. “마침내 차가 돌아와서 보니, 남편은 무지하게 큰 빨간 코와 마마 자국에 얽은 얼굴을 한 의사가 차에서 나오는 걸 보고는 그만 사색이 돼 버렸지요. 그리고 나서 술에 떡이 된 의사가 잘 들리지 않는 쉰 목소리로 말하기를 “틀림없이 말라리아나 장티푸스 아니면 콜레라일 거요. 한데 콜레라나 장티푸스는 아닌 게 분명하구만. 그렇다면 말라리아가 틀림없을 거요. 아무튼 당신 부인에게 하루에 30 그레인 <0.0648 그램/ 1 그레인>의 키니네를 주도록 하시오.” 하고서는 테이블에다 키니네 몇 알을 꺼내놓고는 다시 차를 타고 가버렸지요. 제가 본부로 돌아가서 여러 종류의 검진을 받아봤더니, 그게 아니고 저는 발진티푸스에 걸린 적이 있다고 하더군요.”
‘When it returned my husband was absolutely horrified to see emerging from the car first an enormous red nose, then a very pock-marked face, and then a very drunken doctor who said in muffled tones, “It must be malaria, or typoid, or cholera. It obviously isn’t cholera or typhoid, so it must be malaria. Give your wife thirty grains of quinine a day.” Then he tossed pills on the table and was driven away again. When I got back to headquarters I had various tests and was told that I had had typus.’
훌륭한 의료상의 배려가 있든 없든, 기피 투미스 라는 열대지방 여행자가 자주 걸리는 설사병, 뼈와 근육이 아픈 뎅기 열병, 말라리아 같은 병들은 계속해서 삶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이에 대해 케네스 워런 씨는 다음과 같이 기억을 했다. “매일 우리는 2정의 키니네를 먹고는 했지요. 그걸 먹지않은 사람은 누구나 말라리아에 걸리게 돼 있었지요.”
‘We always used to take two grains of quinine every day and anybody who didn’t take it was bound to go down with malaria.’
예방을 한다고 해도, 어떤 형태로든 찾아온 말라리아는 사실상 어떤 지역에서는 풍토병이나 마찬가지였다. 케네스 워런 씨는 다음과 같이 간헐적으로 여러 증상을 보였다. “저는 한 이틀간은 잘 지냈는데, 셋째 날 그 병이 대략 12시 15분 전쯤에 찾아왔지요. 저는 문 밖에 나돌아 다니다가 그 학질에 걸리지를 않기를 바래서, 방갈로로 바로 돌아갔지요. 그런데 돌아오자마자 채 10분도 안 되서 온몸이 떨리고, 이빨이 딱딱 부딪치더니 땀이 비오듯 나오더군요. 그런데 다음 날 아침이 되니까 또 병이 어디로 가버렸는지 싹 없어졌지요.”
‘I had two good days and then on the third it used to come on at about a quarter to twelve. I didn’t want to be caught wandering about out of doors with this ague, so I used to go back to the bungalow just in time and then in about ten minutes I shook all over, my teeth chattered and I sweated. By next morning it had gone.’
마나님들은 쉽게 말라리아에 걸렸다. “저녁 먹으러 가서 보면 열이 화씨 100도까지 올라 갔지만, 그다지 개의치 않았지요.”
‘You go to dinner and you know your temperature’s up at about a hundred and something, but you just don’t bother.’
해충들도 하도 많아서 이 게 또 사람들을 불편하게 하는데 크게 한 몫을 거들었는데, 눌러 죽이면 물거나 쏘거나 했을 뿐 아니라, 어떤 놈들은 책들을 구멍 내거나 가구를 야금야금 먹어치워 가구들을 못쓰게 망쳐놓는 놈들이 있었다. 그래서 이따금 가죽 가방을 들고 보면, 가방 밑 바닥이 푹 꺼져있었고, 밤에 마루 바닥에 장화를 벗어놓고 잠을 잔 뒤 아침에 일어나 보면 장화 밑창이 통째로 없어졌다.
또한 십중팔구 사람을 보면 뱀이 먼저 피해서 도망을 갔지만, 잠잘 때 혹 모르고 재수 없이 밟을 수가 있었는데, 그러면 최악의 결과로 고통을 받게 되는 뱀의 잠재적인 위협이 도사리고 있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인도에서 전 생애를 다 보내 보고도, 뱀을 한 번도 보지 못했다는 경우도 있었다. 레이몬드 버네드 씨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을 했다. “제 경우는 그렇게 여러 달이 지나고 지나도 뱀을 한 번도 보지 못한 기억이 나네요.”
‘I can remember months and months of not seeing a snake at all
그러나 한 번은 욕실에서 코브라 한 마리를 죽여야 했고, 그 다음은 코브라와 동종인 벵갈산 독사인 우산뱀 크라이트를 응접실에 있던 쿠션 방석 아래서 발견했다. 그래서 이 뱀을 더 나은 장소에 둘 필요가 있어서 우편 사서함 박스에 똬리를 틀어 단단히 집어넣고 나서는 잊어먹고 있었다. 다음날 호기심이 많은 청소부가 경칩을 열자 이 놈이 갑자기 튀어나와 덮치는 바람에 모두들 놀래 가지고 자지러지는 비명을 질렀다.
마나님들은 남편들보다 겁이 더 많았다. 이에 대해 싸이밍톤 부인은 다음과 같이 회상을 했다. “전 뱀이라면 딱 질색이었지요. 하루는 애들 장난감 상자에 뱀이 한 마리 들어가 있었는데, 제가 상자를 열자 홱 하고 불쑥 튀어나왔지요. 또 한 번은 헐렁한 카바가 씌워진 의자에 앉아 있었는데, 제가 일어나자 유모가 대신 그 의자에 앉았지요. 제 생각에 유모는 제가 앉아있을 때보다 좀 더 거북살스럽게 보였는데, 왜 그런가 하고 보니까 뱀 한 마리가 슬그머니 기어 나오더니 마침 의자에 앉아있던 제 어린 딸애 쪽으로 곧장 방을 건너가더군요.”
‘I hated snakes. The children’s toy box had a snake in it one day and when I opened it out it popped. on another occasion I’d been sitting on a chair that had a loose cover, and when I got up the nanny went and sat on it and I suppose she was rather heavier than I was because a snake slithered out and went straight across the room to my little girl who was sitting in her chair.’
어떤 사람들은 뱀을 갖고 노는데 싫증이 난듯한 태도를 보이기도 했다. 예를 들면 라즈 푸트나 사막에 주둔해 있던 에드 브라운 부대의 군인들은 쥐구멍에 숨어있는 여러 마리의 뱀을 발견했다. “우린 하키 채로 골프 공을 치곤 했는데, 이 걸로 뱀이 구멍 위로 삐죽이 올라오면 골프 공을 내치듯이 후려쳤지요. 어떤 뱀은 코브라여서 동료 중 한 명은 넝마 조각으로 약을 올려 그 놈이 자기 이빨로 꽉 물게 해 가지고 잡던 일이 기억에 남아요. 그 친구는 세면장 욕조에 그 놈을 집어넣었는데, 사람들은 그게 뭔지, 그 놈이 죽었는지 살았는지 구경을 하려고 주변에 몰려들었지요. 그런데 이 놈이 죽지않고 자기 머리를 욕조 가장자리 위로 꼿꼿이 쳐들었는데, 저는 사람들이 그렇게 놀라 우르르 도망치던 모습을 결코 본 적이 없었어요.”
‘We used to tee off with hockey sticks and golf balls and try and hit these snakes when they put their heads up out of the holes. Some of the snakes were cobras and I remember one of our fellows catching one with a piece of rag by letting him strike and catch his teeth in it. He put it in a bath of water in the wash-house and everyone crowded round to see what it was and whether it was dead – which it wasn’t. It put its head over the rim of the bath and I’ve never seen such a stampede!’
팩스 브리태니카 <영국 지배하의 평화주의>로 인해서 영국인이나 인도인들은 확실히 안심들을 하고 일상생활을 해 나갔다. 그래서 무더운 날씨가 계속되면 거의 대부분의 유럽인들은 완전히 안심을 하고 아무런 방해도 받지않은 채 문밖에서 잠들을 잤다. 그렇다고 해서 북서전선에서의 폭력을 특별히 잘 통제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개인을 향한 폭행은 드물었지만, 일어나기는 일어났다. 벵갈 지방의 한 특정 지역에 치안판사로 퍼시발 그리피스 씨가 부임했을 때, 그는 3명의 전임자들이 모두 폭도들에게 총을 맞은 사실이 있다는 걸 알게 됐다. “그 세 사람들 때문에 좀 슬펐지요. 왜냐하면 그 중 두 사람은 특별히 벵갈 지방을 좋아했고, 벵갈 사람들을 위해서 엄청나게 많은 공적인 일들을 했지요. 알고 보면 총질은 개인적인 어느 한 사람에 대해서 한 것이 아니라, 라즈들을 대리한 영국을 향해서 총질을 한 거였어요.”
‘It was rather sad because of those three, two were specially known for their fondness for the Bengali and for the tremendous amount of public work that they were doing for the Bengali. The shooting was not directed at them as persons, it was directed at them as representatives of the British Raj.’
비협조 운동과 스와라지라는 물품 불구매 운동과 데모가 세력을 얻어 극성을 부릴 때도 유럽인들은 실제로 신체적 위험을 거의 느끼지 않았다. 이에 대해 싸이밍톤 여사는 다음과 같이 말을 했다. “우리만 남아있었는데도 결코 무례하게 굴거나 적대감이나 그 어떤 위협도 느끼지 않았어요. 제 남편이 무질서와 폭동을 진정시키려고 밖에 나다녔어도, 물론 약간은 신경이 쓰였지만 어떤 위험한 일들이 남편에게 닥칠지 모른다는 느낌을 받지는 않았지요. 아무튼 우리는 공격 당할 거라는 생각을 추호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항상 모든 집의 대문을 전부 열어놓고 다녔지요.”
‘We were left alone. I never had any rudeness or hostility or was ever frightened about anything. When my husband went away to quell a disorder or a riot I used to feel a bit nervous but I never felt that any harm would come to him. The whole house was always open, because we never felt that we were going to be attacked.’
이 게 그 당시의 모습이었다. 클라우드 오친레크 씨가 인도에 왔던 50년 전의 마나님들 태도는 아주 많이 달랐다. 그 당시는 폭동이 사람들 머리 속에서 잊혀지지 않았을 때였다. 클라우드 오친레크 씨의 부친은 장교로 출정해 폭동에서 싸웠던 사람이었다. “그 폭동은 영국인 사회에 상처를 남겨놓았지요. 그러나 군인들이 보기에 폭동은 그렇게 중요한 사건은 아니었지요. 하지만 폭동 때 있었던 영국여자들은 폭동을 기억하고, 어느 정도는 자기 남편들의 감정과 행동에 영향을 끼쳤지요.”
‘It had left scars on the communal memory. So far as the men were concerned, the Mutiny meant nothing to them. But the Englishwomen out there remembered the Mutiny and they influenced to a certain extent the behaviour and the feelings of their menfolk.’
그래서 영국인 마나님들은 상당한 비난을 들어야 했다. 이에 대해 죤 모리스 씨는 다음과 같이 말을 했다. “여편네들 중 대부분은 아주 합리적이고 예의 바른 영국소녀 적부터 시작을 했지요.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많은 여자들이 아주 무서운 마귀 할멈들처럼 돼 버렸지요. 저는 영국인과 인도인 사이의 관계를 망쳐버린 아주 큰 책임이 여편네들한테 있다고 생각을 해요. 영국 여인들이 전혀 인도에 오지않던 초창기 때, 영국 관리들은 인도인들과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면서 인도인들을 더 잘 알게 되었고, 인도인들의 언어나 기타 다른 것들도 잘 알게 되었지요. 반면 영국여자가 인도에 도착하기 시작하면서, 그 여자는 남편이 자기하고만 시간 보내기를 고대해서, 영어 단어 몇 마디만 알고있던 주방장만 빼놓고는 어느 누구와도 말을 하지 않았지요. 그래서 오락도 친구도 거의 전적으로 남편만을 의지하지 않을 수가 없었지요. 저는 그게 얼마나 심각하고 위험한 일인지 여자들이 깨닫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지 않아요.”
‘Most of them started out as perfectly reasonable, decent English girls and many of them in the course of time developed into what I can only describe as the most awful old harridans. And I think they were very largely responsible for the break-up of relations between the British and the Indians. In the early days, before the Englishwoman went out to India at all, British officers spent much of their time with Indians, got to know them better, got to know the language well and so on; whereas once the Englishwoman started to arrive in India she expected her husband to spend his time with her. She couldn’t communicate with anybody except her cook who knew a few words of English, so she was forced to rely almost solely upon her husband for amusement and company. I don’t think that she realized what a menace she was.’
다른 사람들도 여편네들을 똑같이 비난했지만, 거기엔 다른 이유도 있었다. 이에 대해 죠지 캐롤 씨는 다음과 같이 회상을 했다. “인도에서 제가 살던 한 시기에, 저는 백인 여자들에게 아주 반감이 많았어요. 왜냐하면 그 여자들은 무더운 계절마다 남자들은 평지에 내버려둔 채 산으로 올라가 우리의 체면을 크게 깎아 놓기 쉬운 사람들이라고 생각을 해서 그랬지요. 여자들이 고산지대로 올라간 것은 부도덕한 생활을 하기 위한 것이라는 게 보통 사람들의 생각이었고, 대부분의 경우 그런 게 사실이었지요.”
‘At one stage of my life in India I was very much against the white women because I considered that they were apt to let us down in prestige by going off to the Hills every Hot weather and leaving one down below. The general understanding was that they went up there to lead a life of immorality, and in many cases it was true.’
그러나 비평가들 조차 여자들의 태도가 바뀌고 있었다는 데는 의견을 같이 했다. “1차 대전 전의 여자들은 확실히 더 보수적이었으며, 떨어져 사는 별거 문제에 관심을 더 많이 뒀는데, 전쟁 후에 보니까 그런 게 모두 없어지기 시작했지요.”
‘Womenfolk before the First World War were definitely more reserved and more concerned with preserving their separation. After the war that began to disappear.’
무더운 날씨에 대처하는 조건들이 많이 개선되면서, 점점 더 많은 부인네들이 남편들과 함께 평지에 머무르게 되었다. 그런데도 키플링에 의해 시작되었던 영국 마나님들의 신화적인 이미지는 그 이후로도 쭉 연보에 실려 사람들의 뇌리에 고정돼 있었다.
프란시스 스마이스 씨는 이런 현상을 어느 정도는 그 안에 진실성이 들어있는 일반화된 현상들이었다고 다음과 같이 주장을 했다. “인도에 있던 영국 여자들은 다른 데 있던 영국 여자들과 마찬가지였어요. 그들은 대부분 개인주의적이었지요. 그러나 이 면엔 어쩌면 다른 데 살던 영국 사람들과는 다른 어떤 생활태도를 선생님께서는 보셨을 거예요. 그 건 인도인들과 자주 어울리지 않는다든가, 이를테면 당신이 영국인이라는 걸 내세워 그런 식으로 하인들을 대한다든가 하는 것들이었지요. 그래서 좀 나이든 여자들은 선생님과 함께 모여서 불만스러운 태도로 “이 보세요, 가서 그렇게 해 가지고는 남편들에게 도움이 될 게 없어요.” 라고 말을 했지요. 그러나 선생님이 훌륭한 주부라면, 아마도 “좋아, 그렇다면 나는 그렇게 하지않으면 되지 않아.” 라고 생각을 했겠지요.”
‘British women in India were like British women anywhere else, they were a lot of individuals. But there were certain attitudes which you took up, perhaps, from all the others. Such as, you don’t mingle with Indians too much; you remember that you’re British; and in the way you treat your servants. The older women would get together with you and say, “You know, you won’t do your husband any good, my dear, by going and doing those sort of things,” in a disapproving way. And so, if you were a good little wife, you probably thought, “Well, I’d better not.”’
그러나 그런 식으로 압력을 가하는 일이 반드시 어디나 똑같지는 않았다. “민간인 부인들과 군인 부인들 사이에는 커다란 차이점이 있었어요. 십중팔구 민간인 부인네들은 소규모 주둔지에서 자기 남편들 일에 훨씬 더 밀접하게 참여함으로써 눈에 두드러진 활동들을 했지만, 반면 군인 부인네들은 남편들 직업과는 정말 아무런 상관도 없이 지냈지요.”
‘There was a great difference between the civilian wives and the military wives. The civilians were for the most part stuck out in small stations where the wives took a much closer part in their husbands’ work, whereas the military wives really had nothing to do with their husbands’ jobs.’
큰 도시에서는 영국보다 훨씬 더 영국적으로 살았던 사람들이 아주 많이 있었는데, 아주 번번히 인도는 그런 사람들을 제대로 모르고 지나쳤다. 그런가 하면 다른 요인들도 영국 여자들이 인도라는 나라에서 많은 역할을 해보려던 일에 낙담을 주었다.
이런 외부 지향적인 사회에서는 예상대로, 여자들은 그냥 남자들의 기대감에 따라 순응하며 살았다. “그 당시엔 여자들이 더 똑똑해서는 안 된다는 강박관념 같은 게 있었어요. 여자들은 치장을 하거나, 지적으로 보이거나, 공손히 남의 말을 경청하는 사람으로 보이는 건 좋았지만, 똑똑한 체하며 앞으로 나서면 안되었지요. 만약 우연치 않게 누군가 그런 사람이 있으면, 그런 사람은 그냥 집 구석에 숨겨두었지요.”
‘There was a very strong feeling that women were not supposed to be clever. They were supposed to be decorative and intelligent and good listeners, but they weren’t supposed to be clever and, if by any conceivable chance anyone was, they kept it pretty dark.’
그런가 하면 영국 여자들도 인도인들과 어울리면 불이익을 당했다. 왜냐하면 인도 여자들은 사회생활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인도 여자들은 거의 다 프르다 제도에 갇혀서, 만날 기회가 아주 드물었다. 이런 불균형은 독립 때까지 실제로 하나도 변치 않고 그대로 남아있었는데, 인도 여자들과 우정을 쌓거나 프르다 파티를 함으로써 남성 우월주의적인 벽을 허물었던 많은 일부 마나님들의 역할엔 상당한 인물의 힘을 필요로 했다. 그런가 하면 일반적으로 에드워드 시대의 중류계급의 여자들은 교육에 전혀 무관심한 것에도 문제가 있었다. 가정에서는 자기 자매들 같이 단순히 독서를 하거나 살림을 잘 하는 그 이상의 교육을 시키지 않았는데, 인도에서 여자들은 주로 살림만 돌보며 살았다.
이런 많은 장애 요인에도 불구하고 20년대 초에는 앵글로 인디언들의 풍습을 타파하기 시작했던 예외적인 사람들이 30년대 말쯤엔 급속히 하나의 관례처럼 퍼져나가고 있었다. 부인네들은 자신들을 위해서 남편 일을 돕거나, 영국 동네 밖에서 간호나 안내역 그리고 많은 자발적인 형태의 일거리를 취함으로써 개인적으로나 사회 봉사자로써 유용하고 가치 있는 역할을 찾고 있었다.
남자 자신들도 모든 사람들을 대등하게 대해 주려고 노력들을 했고, “필요하면 서로 밀어주고 도와줘야 한다는 공동체적인 항상 같이 한다는 감정”을 갖고 있었다.
“and to the feeling of sticking together, that you must always back each other up, if necessary.”
어떤 사람들은 이런 사조를 불행한 남편들 주위에서 작은 영국을 만들어 보려는 경향을 가진 혁신적인 마나님들의 또 다른 표현 성향으로 보았다. 그러나 이유야 어쨌든 간에 예술적으로나 문화적인 면을 추구하려고 노력했던 분위기는 아니었다. 이에 대해 아이리스 포르탈 여사는 다음과 같이 단언을 했다. “선생님도 사람들이 고향 집에서 살던 방식대로 사회적 패턴의 삶을 되풀이하면서 살고있다는 걸 아셨을 거예요. 그 당시 영국인들은 생각만큼 그다지 아주 교양 있는 인종은 아니었지요. 물론 총독부에는 좀 더 문화적인 생활 때문에 향수병에 걸려있던 아주 교양 있고 지적인 사람들이 있었지만, 단지 교양을 쌓기 위해서 인도로 근무를 하러 갔던 타입의 사람들이 상류계급 중에는 많지가 않았지요. 저는 겨울이면 저의 아버님과 집을 나눠 쓰던 총독부의 아주 유능한 한 직원이 기억에 남는데, 그 사람은 자기 욕실에 바하의 전축 판을 계속해서 돌리면서 자신에 대해 걱정하곤 했지요.”
‘You found repeated the social patterns of the way people lived at home and the British were not in those days a very cultured race. It was not fashionable among upper-class people of the type who went into the services to be very cultural, although you did find in the ICS very highly cultured, intellectual people who did get homesick for a more cultured life. I remember a very able member of the Indian Civil Service who shared a house with my father one winter and used to worry him by constantly playing gramophone records of Bach in his bathroom.’
적어도 한 가지 정도의 어려움은 남자나 여자 양 쪽 모두에게 공통적으로 있었다. 이에 대해 루위 르 마르찬드 씨는 다음과 같이 말을 했다. “애틋한 이별의 슬픔은 인도에선 항상 대두되었던 문제였지요.”
‘The heartaches of separation are ever present in India.’
특히 군에서는 아주 현실적인 문제였다. “네가 저 떠돌이 고수와 결혼하면, 어디를 가던 따라다녀야 한다.”는 말이 있었지만, 순전히 한 곳에 머물러 살지를 못하고 멀리 파견을 나가 떨어져있어야 될 경우가 너무나 많았어요. 부인네들에게 그 말은 “잘 있어요, 애기 아빠, 산으로 내가 아이들을 데려가겠어요. 그러니 휴가 때 당신 보기를 정말로 고대하겠어요.” 라는 말로 비쳐졌지요.”
‘Although the saying is “If you marry the drum you’ve got to follow it,” there are many times when you simply cannot stay with it and you’ve got to be sent away. For the wife it is, “Goodbye, husband, I’ll take the kids up to a hill station and we’ll expect you on leave when we see you.”’
남편들이 번번히 군 임무로 전선으로 떠나가야만 했기 때문에 많은 군인 부인들은 그런 경험들을 공유하고 있었다. 이에 대해 데보라 드링 여사는 다음과 같이 말을 했다. “제 남편과 저는 항상 떨어져 살았지요. 한 때는 외지 근무로 13년간 살면서 햇수로만 3년 같이 살아 봤을 뿐이에요.”
‘My husband and I were always being separated. I once worked out that in thirteen years we’d only spent three whole years together.’
이런 끝날 거 같지 않은 최악의 별거 상황과 두려운 이별을 해야 하는 사람들 중에는 어린이들이 있었다. 관습상 교육 때문에 또는 인도의 무더운 날씨에서 풀어주기 위해서 영국으로 보내야 할 때가 왔는데, 어머니들마다 어린이와 남편 사이에서 양자택일을 해야 했고, 어느 한 쪽은 희생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마르조리 캐시모어 여사가 묘사하듯이 남편 곁에 남기로 한 사람들은 자식들을 희생시켜야만 했다. “우리는 주교한테서 맏 애는 5살이 넘어서는 떼어놓지 말라고 해서, 애가 3살 때 할머니한테 보내야 했지요. 결론적으로 말해서 5년간 그 애를 한 번도 보질 못했는데, 그 당시 편지 받는데 만 6주씩이나 걸려서 5년이 끝날 즈음 다시 데리고 와 보니 아이는 완전히 우리에겐 남남이나 마찬가지였지요.”
‘We were told by our bishop that we mustn’t keep our eldest child out over the age of five, so when she was only three we had to send her to her granny. That meant that for five years we didn’t see her. In those days it took six weeks to get a letter and by the end of the five years when we got her back again she really was a stranger to us.’
근무를 하던 초창기 시절엔 박봉이나 아니면 빈번하게 왕래가 자주 없는 노선 때문에 별거나 외로움을 더 겪어야 했다. 영국을 왕래하는 보조 항로도 비교적 늦게 개선이 되었다. 죤 코튼 씨는 자기 부친에 대해 말을 하면서 다음과 같이 회상을 했다. “1916년과 1926년 사이에 아버님은 전혀 영국에 돌아오지 못해서, 저희는 그 십 년 동안 아버님을 전혀 보지 못했지요.”
‘Between 1916 and 1926 he never came back to England at all, nor did we see him during any of those ten years.’
고급 관리들 특히 후한 연금을 받는 총독부 직원들의 봉급과 극단적으로 대조를 이루던 하급 관리들이 받는 낮은 급여는 인도의 모든 관청에서는 아주 보편적인 일이었다. 이로 인해 지독한 불안감이 생겼고, 라즈들 생활의 가장 공통적인 특징 중 하나가 바로 이런 불안감으로, 일종의 가족에 대한 노후보장을 확실히 해둘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저축하고 또 저축하는 일 뿐이었다. 이런 방법이 인도에 있던 대다수 관리들이 행했던 어쩔 수 없는 방법이었지만, 아버지들이 근무하던 초창기 시절에는 이런 이유로 인하여 가족들이 궁핍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그러나 한가지 점에서 이 스파르타식 수칙만은 예외로 적용하지 않았다. “애들 교육시키는 문제만큼은 돈을 아끼지 않았는데, 왜냐하면 이것이야 말로 모든 방법 중 가장 확실한 노후 보장책이라고 생각들을 했기 때문이었지요.”
‘The one thing that was never saved on was the children’s education, because this was considered the greatest security of all.’
인도는 영국인들에게 견디기 어려운 곳이었지만, 마찬가지로 영국인 자신들도 영국과 인도 사이에서 힘들게 살아가고 있는 계층의 사람들보다 더 심하지는 않았지만 영국인 자신들에게나 인도인에게 참고 견디기 어려운 상황을 만들었다. 이에 대해 이렌느 에드워드 여사는 어린 아이 때의 일을 다음과 같이 기억을 했다. “벤치가 있었는데, 하나는 유럽인 전용이라고 표시돼 있고 다른 하나는 인도인 전용이라고 표시를 해 놓았던 기억이 납니다. 역시 유럽인 전용 혹은 인도인 전용이라고 표시된 대기실도 있어서, 인도 태생의 앵글로 인디언 아이로써 저는 어느 쪽에 앉아야 될지 잘 알지를 못했지요.”
‘There were benches, one marked “European only”, one marked “Indians only”. There were also the waiting rooms marked “European only” and “Indians only.” As an Anglo-Indian child I never knew which one to occupy.’
앵글로 인디언들에 대한 태도는 아주 다양했다. “하층계급이나 기타 계급들은 자기들 클럽이나 메쓰에 앵글로 인디언이 들어오는 걸 환영하고, 심지어 결혼까지도 했지요. 그러나 상류계급으로 올라가면 갈 수록 앵글로 인디언들에 대한 편견이 더욱 더 심했지요.”
‘The lower classes and the Other Ranks welcomed the Anglo-Indians into their clubs and messes. They even married them. But the higher up you went the greater was the prejudice against the Anglo-Indians.’
돌이켜 보면 이런 편견은 비난 받을만한 일이었다. 이에 대해 아이리스 포르탈 여사는 다음과 같이 말을 했다. “우리는 그렇게 심하게 비난을 받고 있을 수는 없었어요. 그러나 제가 어렸을 때, 다들 – 심지어 저의 부모님 같이 깬 사람들도 – “블랙키 화이트” 나 “1루피에 12 애나” 하는 식의 농담을 하던 사람들처럼 저도 판에 박은 보수적인 태도를 취했지요.”
‘We can never be sufficiently blamed. When I was very young I took the conventional attitude which everybody took – even enlightened people like my parents – of making jokes about “blackie-whites” and “twelve annas in the rupee”.’
인종적 편견은 양 쪽에서 다 같이 심했다. 이에 대해 이렌느 에드워드 여사는 다음과 같이 말을 했다. “인도인들도 인도 태생의 앵글로 인디언들을 깔봤지요. 왜냐하면 그 사람들도 선생님이 이 쪽도 저 쪽도 아니라고 생각해서 그랬지요. 그 사람들은 우리를 쿠챠 부챠라고 불렀는데, 그 얘기는 반 쪽만 구워진 빵이라는 소리였지요. 피부 색깔이 검은 정도에 따라서 3/4 정도는 틴 파오, 1/2 정도나 거의 하얀색 피부면 아드하 시어 같은 말로 구분해서 부르곤 했어요.”
‘The Indians looked down on the Anglo-Indians because to them you were neither one nor the other. They used to call us Kutcha butcha, that is to say, half-baked bread, and depending on the shade of your colour they used to talk about the Anglo-Indian as being teen pao, three-quarters, or adha seer, half a pound, if you were nearly white.’
인도 태생의 앵글로 인디언들은 영국인 동네 옆 철길 동네라는 곳에서 같이 살았는데, 그 사이에는 깊은 만이 있는 곳이었다. “사람들이 그렇게 불친절하게 대하던 곳은 아니었지만, 일종의 사회 금지구역 같이 터부시한 곳이었지요.”
‘It wasn’t that one was unfriendly; it was a sort of social taboo.’
직장 이외에 사회적으로 사람을 만날 수 있는 곳은 철로협회 댄스 파티에서 였다. 존 알렌 씨는 다음과 같은 일들을 인정하였다. “우리는 약간은 겸손한 태도를 가지고 이런 댄스 장에 가고는 했지요. 우리는 그 사람들에게 공손하게 대했는데, 훨씬 더 구식으로 보이는 다른 세상 속으로 들어간 것 같았어요. 왜냐하면 여자 애들은 댄스 상대와 앉아있었던 게 아니라, 항상 자기 부모들 뒤 쪽에 가 서있었지요. 저는 그 여자 애들이 촌티 나는 구닥다리 복장을 하고 와서, 그 여자 애들을 쳐다보고 비웃곤 했는데 지금 생각하니 좀 미안한 생각이 드는군요. 아무튼 그 여자 애들은 몇 년 전 유행하던 옷들을 입었고, 현대적인 유행은 따라올 생각들을 아예 하지 않았던 사람들 같았어요.”
‘We used to go to these dances in rather a condescending manner. We’d go to be polite to them and it was like moving into a different world, a much more old fashioned one, because the girls would never sit with their dancing partners but were always taken back to their parents. I’m afraid we used to rather laugh at them because they seemed to be such frumps. They always seemed to be dressed about several years back and never seemed to quite catch up with modern fashions.’
영국인들 입장에서 보면, 영국인과 앵글로 인디언 사회 사이에 결혼은 심히 얼굴을 찌프릴만한 사건이었지만, 앵글로 인디언들의 입장에서 보면 그렇지 않았다. “여자 애들은 영국 군인들과 어떻게 든 결혼을 해야 한다는 말이 있었지요. 종족 번식 때문이 아니라 혈통을 개선시키기 위해서 그랬지요. 그래서 우리 목표는 인도 태생의 앵글로 인디언 남자들이 아니라 영국 군인들과 결혼하는 것이었지요.”
‘An unwritten rule was for the girls to try and marry the British soldier. Not to propagate the species but to improve the strain, so our aim was to marry British soldier, not to marry Anglo-Indian men.’
영국 군인들은 유럽에 있는 처녀들로부터 고립되어 떨어져 있는 상황이어서, 이런 소망은 많이 실현되었다. 이에 대해 스테픈 벤틀리 씨는 다음과 같이 단언을 했다. “저는 인도 태생의 앵글로 인디언 여자들을 아주 많이 만났는데, 정말로 사람을 끌지않는 여자가 없었어요. 그 여자들은 두 나라의 좋은 점만을 다 갖추고 있었지요. 모두들 멋지게 춤을 춰서, 그 여자 애들이 댄스에 나오려고 꾸미고 있을 때는 항상 그 애들만 보았지요. 그러나 여자 애들이 출연을 하지 않으면 못 봤지요.”
‘I met hundreds of Anglo-Indian girls and I can’t think of one that was really unattractive. They had the virtues of the two nations. They were all wonderful dancers and you always saw them when they were made up for a dance. You never saw them when they were “off-parade”.’
이 점에 대해서 이 에스 험프리 씨는 다음과 같이 되 받았다. “유라시안 여자 애들은 화장을 하는데 모두들 전문가 수준이어서, 몸에다 기가 막힌 쟈스민 향수를 띠게 만들어서 실제 모습보다도 훨씬 더 매력적으로 보였지요. 어떤 경우는 영국 군인들을 어떻게 든 재촉을 해서 약혼도 하고, 결국엔 정말로 결혼도 했지요. 그러나 그런 일들은 영국군 지휘부의 눈쌀을 찌프리게 해서, 결혼을 막으려고 백방으로 노력들을 했지요.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주 많은 수의 여자들이 어떻게 든 결혼들을 했지요. 제가 데리고 있던 사병 중 한 명은 거의 당신이 쓴 모자 색깔만큼이나 까맣게 생긴 예쁘장한 유라시안 여자와 약혼을 하게 됐지요. 그래서 제가 그런 일에 대해 엄중히 경고 조처를 취했는데도, 그 친구가 계속해서 고집을 피워대서, 다른 주둔지로 전출 시켜 버렸지요.”
‘The Eurasian girls were experts at making themselves up and the aroma from their bodies was tinged with the wonderful scent of jasmine which made them probably far more attractive than they really were. In some cases they managed to persuade a British soldier to become engaged and ultimately to marry. It was frowned upon by the British Command, but despite all the efforts to quash it a vast number did manage to get married. one of my own soldiers elected to become engaged to a lovely Eurasian who was almost as black as your hat. I took steps to warn him against it, and when he persisted I made arrangements for him to be transferred to another station.’
2차 대전 때문에 앵글로 인디언들에 대한 것들을 포함해서 많은 태도들이 달라졌다. 이런 변혁에 대한 동기는 자신들의 충성심이나 가치 양면을 다 입증해 보려고 기회를 노리던 인도 태생의 앵글로 인디언들로부터 나왔다.
이에 대해 아이리스 포르탈 여사는 다음과 같은 경험을 하였다. “2차 대전 때 델리에 있던 인도병원에 간호사로 갔을 때 저는 제 태도를 완전히 바꾸게 됐지요. 거기서 저를 도우러 와서 함께 일했던 여자들은 역시 저의 절친한 친구들 중 한 명이었던 유라시안 의사의 부인 뿐이어서, 그 때 저는 그런 생각들이 모두 다 터무니 없는 생각들이라는 걸 깨닫게 되었지요.”
‘I changed my attitude completely in the Second World War when I went to nurse in the Indian hospitals in Delhi, where the only woman who could help me and came in and worked with me, was the Eurasian wife of a Eurasian doctor who became one of my best friends. And I realized then what nonsense it all wa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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