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최전선 인도 이야기

2007. 6. 9. 17:21일반/역사·영어·컴퓨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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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최전선
Frontier

인도에는 최전선이 두 군데 있었다. 한 군데는 로맨스와 위험, 용기 있는 행동들로 가득찬 북서지방과 또 한 군데는 2 차 세계대전 때까지도 전인미답의 상태로 사실상 사람들이 별로 안중에 두지않던 여러 지역에 산재한 북동전선이 있었다. 이 중에 북서지방은 오랫동안 끊임없이 정치적, 군사적 활동이 재개되던 곳으로 다소 위험한 기운이 감돌던 항상 유탄을 맞을 수도 있는 곳이었다. 그 결과 영국인들이 상상하는 이상으로 이 지역은 강력히 견제를 당하던 지역이었다.
산악 전투를 경험한 대표적인 인물인 클라우드 오친렉크 씨는 전선은 신임 장교들이 현역으로 군복무를 하면서 한 번쯤은 근무해 보기를 바라는 곳이었다고 다음과 같이 말을 했다. “어느 정도 야망을 갖고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그런 곳에서 근무해 보기를 바랬지요. 온 종일 아주 부지런하게 움직여야 했지요. 저는 결코 그보다 더한 재미를 누려보지 못했지요.”
‘Anybody who had a certain amount of ambition wanted to serve there. And you had to be on your toes the whole time. I never enjoyed anything more.’
최전선의 일개 병사로 마지막까지 전선을 지켰던 올라프 캐로 같은 사람에겐 훨씬 더 많은 일들이 있었다. “저는 로날드 샤이가 “전선의 병사들 삶은 아주 고되고, 매일 같이 죽음의 언덕을 걷는다.” 고 한 말을 기억하고 있지요.”
‘I remember Lord Ronaldshay saying that “the life of frontierman is hard and treads daily on the brink of eternity”.’
이런 말이 그런 곳의 모습에 대해 사람들이 갖고있던 일반적인 감정 같은 거였는데, 어떤 때는 아름답고, 푸르며, 사랑스럽고, 순진무구하게 보이다가도 어떤 때는 경직되고, 무시무시하고, 먼지와 폭풍으로 둘러싸인 것 같은 황량한 경치가 있던 곳이었다.
그러나 파탄인들이 자신들의 목숨을 걸고 끝까지 저항하고 유지하던 이 무대는 놀라울 정도로 멋지고 동시에 아주 거친 곳이었지만 그래도 파탄인들에게는 삶의 터전이었다. 그런 극단적인 대조 때문에 이따금 견디기 힘든 면이 있기도 했지만, 반대로 그런 점이 그 곳을 좋아할 수 있는 이유가 되기도 했다. “파탄인들 중에는 영국인이나 스코틀랜드인이라고 부를 수 있는 점이 있었는데, 한편으론 정면으로 당신 얼굴을 쏘아보던 모습이나, 애매한 말은 쓰지 않거나, 하고 싶다고 해서 함부로 그들을 위협할 수 없다거나 하는 것들이 아주 비슷했지요. 애톡에 있는 다리를 건너갈 때, 우리는 흡사 고향에 돌아온 것 같은 느낌을 받았지요.”
‘There was among the Pathans something that called to the Englishman or the Scotsman – partly that the people looked you straight in the eye, that there was no equivocation and that you couldn’t browbeat them even if you wished to. When we crossed the bridge at Attock we felt we’d come home.’
멋지게 걷던 파탄인들의 그림 같은 모습에 필적할 만한 사람들은 거의 없었다. 전선에서 군의관으로 4 년간을 복무하다 좋은 시절을 모두 전선에서 보낸 월터 크릭톤 씨는 파탄인들을 긴 단발머리에 목 주위로 흘러내려오는 고리로 느슨하게 묶어 맨 터번을 삐딱하게 쓰고 다니던 용모가 수려한 남자들로 보았다. “겨울엔 양 가죽으로 만든 푸쉬툰 조끼와 불룩한 자루바지와 쌘들을 신고 – 총알이 꽉 찬 위협적으로 보이는 탄띠를 어깨에 가로 매거나 허리둘레에 차고 다녔고, 총은 필수로 가지고 다녔지요.”
‘Then sheepskin pushtoons which they wore in winter, baggy trousers and sandals – and a fearsome looking bandolier full of cartridge, either slung across the shoulder or round their waists – and, inevitably, a rifle.’
자신만만해 하던 대부분의 산악 부대원들처럼, 월터 크릭톤 씨는 파탄인들을 전반적으로 멋진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는데, 이 사람들은 영국인들 규칙에 따라 게임을 하든 않든 간에, 대부분 총들을 잘 쏘고, 용감한 전사들이었기 때문에 영국인들이 좋아했던 사람들이었다.
북서전선 지방은 통치를 받는 지역이었지만, 그 나머지 지역은 다른 국가와 국경을 맞댄 지역으로 흔히 통치지역에서 볼 수 있는 일반적인 형태의 전선지역이 아니고 원래부터 통치를 받지않던 부족자치 지역이었다. 부족자치 지역에 대한 통치는 부족들이 인도나 아프가니스탄 어느 쪽에도 해를 끼치지 않는 것을 단지 확인하는 수준의 통치만을 했다. 그러나 여타 다른 형태로 성가신 일들을 많이 일으켰다. 어떤 경우는 페샤와르 지방에서 일 년에 약 300명이 살해된 것으로 집계된 혈통간의 불화 문제가 있었고, 또 어떤 경우는 가축이나 여자, 총이나 오랫동안 계속돼 온 침략적인 습성 문제 때문에 그랬고, 어떤 경우는 정치적인 동기 문제가 원인이 되기도 했다.
인도의 형법보다 더 엄격한 고대 무슬림들의 도덕에 따라서, 정치 장교들은 사법과 부족의 연대성격을 다 갖고있던 지르가 <부족 회의>를 이용할 수 있는 곳은 어디든 가능한 이용하려고 노력을 했다. “대략 2000명의 남자들이 선생님 주변을 에워싸고 앉아있으면, 선생님은 그 중앙에 앉아서 얘기를 해야 하지요. 논쟁을 주도할 만큼 이 사람들 말도 잘 구사하고, 어떤 때는 일장 연설도 할 수 있어야 하고, 심지어 이 사람들이 쓰는 고유의 속담도 잘 알고있어야 하지요.”
‘They sit round you in a circle of two thousand men and you sit in the middle and have to talk. You have to be able to speak the language well enough to take up a running argument, make speeches and even know the proverbs.’
이따금 외부 개입이 불가피한 경우가 생기기도 했다. “그들이 우리에게 해를 끼칠 땐 언제나 간섭을 했는데, 무력으로 개입을 해야만 했지요.”
‘We did interfere whenever they were a nuisance to us, and interference had to be force.’
무력은 토벌적 성격의 응징 형태로 사전경고 후 경 폭탄으로 기습을 하거나, 그래도 안되면 최후수단으로 수 개 여단을 동원해 군사적으로 했다. 전선에서의 삶은 재미있는 일에서 무료한 일까지 그러한 삶이 반복되는 전선 고유의 특이한 형태의 삶이었다. 부족지역에 들어가려면 사전에 허가를 받아야 했는데, 여자들에 대해서는 특별히 통제를 하였다. 부족지역에 들어가려고 정부 간선도로를 벗어나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목숨을 걸어야 했다. 이런 도로를 따라 내려가다 보면 보카라나 사마르칸드에서 온 카필라 라고 하는 아랍인들의 낙타 대상이 있는 곳에 이르렀다.
이에 대해 돌리 로우 여사는 다음과 같이 묘사를 했다. “이 사람들은 온통 다 끌고 내려왔는데, 어떤 낙타는 머리 둘레에 주렁주렁 자루 같은 걸 달고 거만하게 터벅터벅 큰소리로 울면서 걷고있었고, 그 다음은 들소, 원숭이, 양 떼들이 있었지요. 그리고 나서 여자들은 손가락에 금.은 장식들을 끼고, 또 어떻게 구했는지 묘하게 생긴 커다란 귀걸이를 하고서는 당신 옆을 딸랑 거리며 지나갔지요. 이따금 여자들이, 어떤 때는 남자들이, 또 어떤 때는 조그만 아이들이 앞장을 서서 남부여대해서 페샤와르 지방으로 내려갔지요.”
‘They come down head to tail, these camels, tramping along, plod, plod, plod, bellowing away, supercilious, some with bags round their faces, and forth… There are buffaloes, there are donkeys, there are sheep, and then the women; they tinkle, tinkle, tinkle as they walk past you, wearing huge earrings that wingle and wangle about and gold and silver on their fingers. Sometimes there’s a woman in front, sometimes there’s a man and sometimes there’s a tiny little child, and away they go down to Peshawar.’
이렌느 에드워드 여사는 가족과 친구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1929년에 무수한 악이 서린 도시라는 페샤와르 지방에 간호사로 갔던 적이 있었다. “성은 우리가 있던 쪽에 있었고, 도시는 그 반대 편에 있었지요. 그 성 위에는 영국 국기인 유니언 쟄 기가 펄럭이고 있었고, 성벽에 영국 군인들이 있는 것을 보고 적잖이 위안을 받았지요. 특히 말썽이 나거나 반영 감정이 일 때는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휘파람을 불곤 했는데, 그러면 아주 분위기가 밝아져서 편안한 마음들이 되었지요. 혁명 당원들이 “혁명을 위하여!” 하고 외쳐댈 때마다 그런 군인들과 성을 쳐다보곤 했지만 왠지 마음은 편안했지요.”
‘The fort was on one side of us and the city on the other. It was very comforting to see the Union Jack flying on that fort and to see the British soldiers on the parapet. We used to have the wolf whistles but it was all very cheering and comforting, especially when the trouble started and the anti-British feeling grew. When the Redshirts started shouting “Up the revolution!” we used to look at those soldiers and that fort and really feel safe.’
전선에서의 간호원 일이라는 게 보통 일이 아니었다. “가족간의 불화에 대한 소리를 들어보긴 했지만, 지금 생각하니 그 결말을 보게 될 운명이었지요. 선생님이라도 창자가 죄다 튀어나온 채 안으로 들어온 환자를 받았을 거예요. 그런데 실제로 이 사람들은 튀어나온 창자를 안고 들어오는 환자를 받곤 했지요. 이 사람들은 내장물을 신선하게 유지하려고 닭 껍질로 창자를 싸매곤 했지요. 그래서 우리는 창자의 여러 부분을 자르고 총상 부위에서 총알과 파편을 빼낸 뒤 다시 봉합을 해야 했지요. 또 자기 마누라의 코를 자르고, 유방을 도려내거나, 심지어 임신한 여자의 배를 찢어 너 벌려놓은 시기심이 많은 못된 남편들을 보기도 했지요.”
‘I had heard about the family feuds, now I was to see the results. You would get a case coming in with all the intestines sticking out. They used to get a case coming in with all the intestines sticking out. They used to get the skin of a chicken and wrap the intestines in this skin to keep them fresh. We used to have to cut out parts of the intestine, pick out sharpnel and pellets from gunshot wounds and sew them up. We used to have jealous husbands cutting off their wives’ noses, breasts amputated, even pregnant women with their abdomens ripped open.’
심지어 정원사도 그런 부류의 사람들로 예외가 아니었다. “우리 정원사들은 포로들이었어요. 이런 사람들은 허리 둘레에서 시작해서 양 다리, 발목까지 쇠사슬을 채워놓았지요. 그래서 이들이 통로에 있던 화분에 물을 주면서 우리 집 베란다 안으로 들어오면 이렇게 철커덕대는 소리는 그대로 우리를 깨우는 자명종 소리가 되곤 했는데, 이들은 항시 한 명의 무장 경비원과 같이 있었지요.”
‘Our gardeners were prisoners. These men had heavy chains round their waists, down each leg and round each ankle. The clanking of these chains used to be our waking bell as they came into our verandah watering the pots in gangs, always with an armed guard.’
페샤와르는 대체로 색상이 화려한 도시로 경기를 하거나 보통의 병영생활을 하며 살 수 있는 평화스런 주택지가 있는 도시였다. 그러나 그 도시는 혁명당원 반란사건이나 1930년도의 페샤와르 폭동 당시에 그랬던 것처럼, 산악지대부터 말썽이 불거져 내려오다 보면 전선처럼 아주 위험한 곳이었다.
이에 대해 월터 크라이턴 씨는 다음과 같이 회상하고 있었다. “저는 티르람이라는 이름을 가진 아주 멋지고 야무진 제 개인 힌두인 보조의를 데리고 시장을 지나가고 있었지요. 사람들이 붐비는 아주 좁은 거리를 지나가는데, 목재를 싣고 다니던 노새가 끄는 마차들 때문에 잠시 갇혀있었지요. 그래서 저는 땅 위에 있는 고추 중량을 재고있던 조그만 소년에게 말을 걸려고 허리를 굽히자, 갑자기 등 뒤를 곧 바로 강타 당하는 멍한 느낌을 받아서, 처음에는 이 노새들 중 한 마리가 심하게 움직이다가, 나를 발굽으로 찬 게 아닌가 생각을 했지요. 그래서 저는 무슨 일인가 하고 고개를 돌려봤는데, 그 게 노새가 아니라는 걸 알았지요. 그러나 도끼 한 쪽 끝이 내 등을 찍고 있었고, 또 다른 쪽 끝을 보니 제 등에서 도끼를 빼려고 안간 힘을 쓰는 사납게 생긴 파탄인이 눈에 들어왔지요. 마침 티르람이 옆에서 보고 있어서 다행이었는데, 그렇지 않았으면 저는 그에게 큰소리로 비명을 질렀을 거예요. 아무튼 티르람은 재빨리 이 사람을 덮쳤고, 제 잔등에 박힌 도끼를 잡아 뺀 뒤, 자기의 조그만 다리로 그 파탄인을 걸어 넘어뜨리자, 두 사람 다 먼지 구름을 풀썩 일으키며 땅바닥에 같이 쓰러졌지요. 많은 피가 잔등 어리에서 흘러내려 장화 속으로 들어가 약간 술 취한듯한 모습으로 비틀거리며 서있었지요. 그 때 몇 명의 시민군들이 달려 올라와서는 그 사람을 붙잡아 가지고는 데려가 버렸지요. 사람들이 저를 민간인 병원으로 데려가려고 했지만, 저는 걸어서 가겠다고 말을 했지요. 간신히 병원에 도착한 뒤 저는 차르포이 <침대> 위에 털썩 맥없이 그대로 쓰러지고 말았지요. 그러자 사람들이 거울을 보면서 제 옷을 벗겼지요. 저는 제가 생각한대로 해줄 일을 사람들에게 말해주고 - 상처를 모두 봉합했지요.”
‘I was walking through the bazaar with my sun-assistant surgeon, a very nice little Hindu whose name was Tir’ Ram, and going through these narrow crowded streets we were held up for a moment by a train of mules carrying timber. I bent over to talk to a little boy who was pounding chillis on the ground and that instant I suddenly felt a blow, a terrific sock right in the back, and I thought that one of these mules had lashed out at me and caught me with its hoof. But when I turned round to see what had happened I realized it was not a mule at all, but that I was at the end of an axe which was stuck in my back and held at the other end by a rather fierce-looking Pathan who was doing his best to dislodge this axe from my back. Tir’ Ram looked around, or I may have cried to him, and promptly leapt at this man, jerked the axe out of my back and then twined his little legs round him and tripped him so that they both fell to the ground in a cloud of dust. I staggered about in a rather drunken fashion with a lot of blood streaming down my back and into my boots. Then members of militia came running up and seized the fellow and brought him away. They tried to carry me to the civil hospital but I said I’d walk. When I got there I more or less collapsed on to a charpoy. They got my clothes off and by the aid of a series of mirrors. I told them what I thought should be done – and I was then stitched up.’
공격을 당하고도 살아남은 경우로 말하자면, 크릿 크라이튼 씨의 경우는 그의 전임자였던 콜드 스트림 대위보다는 운이 아주 좋은 편이었다. 이에 대해 이렌느 에드워드 여사는 어떻게 두 사람이 같이 커피를 들고, 골프 얘기를 했는지 다음과 같이 말을 했다. “그 분은 제가 골프에 아주 관심이 많다는 걸 알고는 자기한테 배워보지 않겠느냐고 물었지요. 그래서 대단히 고맙다고 대답을 했으며, 약속한 그 날 오후 5시에 저를 데리러 오겠다고 했지요. 그리고 나서 그 사람은 아래층으로 내려갔지요. 뜰에 내려서자 손을 흔들더니 “그러면 5시에 데리러 올께요” 해서 “좋아요” 라고 말하고는, 고개를 돌려 집무실로 되돌아갔지요. 그런데 어디에선가 떠들썩한 이상한 소리가 들렸지요. 갑자기 “누님, 누님! 빨리 와 봐요!” 하고 외쳐대는 소리가 들려서, 급히 제일 윗방으로 올라가서 내려다 보니 콜드 스트림 대위를 이 층으로 데리고 올라오던 두 명의 바브스 <현지인 직원>들을 보았지요. 그 분의 목에서 흘러내리는 피를 보고는 “무슨 일이야?” 하고 묻자 현지인 직원이 “맞았어요.” 하고 말을 했지요. 그러자 힌두 출신의 다른 현지인 직원이 힌두어로 “아니에요, 칼에 찔렸어요.” 하고 말을 했지요. 내려다 보니 그 분이 죽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지요. 도와줄 사람이 오게 되서 저는 집무실로 다시 돌아가 우리가 방금 전에 마시던 커피 잔을 보았지요. 그래서 저는 콜드 스트림 대위의 커피 잔을 쳐다보고 제 커피 잔을 집어 들었는데, 그 커피 잔은 그 때까지 따스한 온기가 그대로 남아있었지요. 그래서 저는 다른 자매가 와서 저를 팔로 껴안아줄 때까지 그 자리에 앉아서 하염없이 울고 또 울었지요. 그리고 나서 우리는 베란다로 걸어나갔는데, 팔에서 몹시 피를 흘리면서도 의연하게 서있던 압둘 라시드를 보고, 그에게 다가가서 “오! 압둘 라시드. 다쳤어요?” 하자 사람들이 모두 어리둥절해 가지고 이상하게 저를 쳐다보았지요. 난 압둘 라시드가 콜드 스트림 대위의 조수로 생각했었는데, 사실은 그가 살인자였지요.”
‘He knew that I was very keen on golf and asked me if I’d like a lesson from him. I said yes, I’d be very grateful, and he arranged to pick me up at five that afternoon. Then he went downstairs. When he got to the bottom he waved to me and said, ‘I’ll pick you up then, at five.’ I said, ‘Right,’ and I turned round to walk back to the duty room. Then I heard a peculiar sort of scuffling noise. Suddenly I heard shouts of ‘Sister, Sister, come quickly!’ I rushed to the top of the stairs and looked down and there were two of the babus carrying Captain Coldstream upstairs. I could see blood streaming from his neck and I said, ‘What has happened?’ ‘He’s been beaten,’ one babu said. The other babu said in Hindustani, ‘No, he has been knifed.’ I looked down at Captain Coldstream and I knew that he was dying. When assistance came I went back into the duty room and I saw our coffee cups. I looked at Captain Coldstream’s coffee cup and I picked up mine, which was still warm. I sat there and cried and cried, till another sister came and put her arms around me. We then walked out on to the verandah and we saw Abdul Rashid, the orderly, standing there with blood pouring down his arm. I went up to him and said, ‘Oh, Abdul Rashid, have you been hurt?’ and they all looked at me queerly. I thought Abdul Rashid had gone to Captain Coldstream’s assistance. Actually, he was the murderer.’
전선에서 더 위로 올라가면 팔란트라나 같은 소규모 주택지가 있었는데, 그 곳에는 인도 주재원과 그 부인, 시민군 부대의 오.씨, 약 6명의 관리와 외과의가 사는 유럽인 동네가 있던 멋진 곳이었다. 그러나 이 곳에서의 전선생활도 위험하기는 마찬가지였다.
크릿 크라이톤 씨는 그 곳에 당시 크고 아주 멋진 정원으로 둘러 싸인 방갈로를 갖고있었다. “그런데 그 곳에 도착하니 제 전임자와 그의 부인이 실제는 국경을 넘어온 파탄인들에게 살해됐다는 소리를 제게 은밀히 전해주었지요. 한 번은 제 집 사람과 낚시를 하고 있었는데, 강 건너 편 두 지역에 살던 파탄인들 사이에 실제로 전투가 진행 중이던 때도 있었지요.”
‘But it was whispered to me as I got there that my predecessor and his wife had actually been murdered there by Pathans from across the border. on one occasion my wife was fishing, and on the other side of the river there was a battle going on between two sections of Pathans.’
부족 지역에는 가족은 함께 살 수 없는 주둔지만 있었는데, 철조망으로 둘러싼 큰 캠프나 성채만 있던 곳이지만 생활은 대체로 재미가 있었다. 그러나 종종 아주 절망적일 때도 있고, 가끔 씩 무섭기도 한 곳이었다.
그런데도 모든 군인들마다 그런 곳을 도약의 기회를 제공하는 장소로 생각하며 살았다. “그런 곳으로 가는 건 대단한 모험이었지만, 영국 군인들은 그런 곳으로 가는 걸 자랑스럽게 생각들을 했지요. 아주 훌륭한 부대들만이 전선으로 보내졌는데, 군인들은 직업 군인으로써의 당당한 자부심을 갖고 그런 곳으로 갔지요.”
‘It was an adventure to go there and the British soldier was proud to go there. only good British regiments were sent to the Frontier and they went there with a feeling of professional pride.’
영국의 일반 사병들에게 전선은 소외감을 느끼며 모진 고생을 하는 곳으로 알려져 있었지만, 어쨌든 피할 수 없는 곳이었다. 레지날드 쎄이보리 씨는 자신의 시크교 부대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회상을 했다. “우리가 떠나기 전, 여자들 모두는 이제 떠나야 겠다고 말을 하고, 믿을만한 시크교 연장자의 호송 하에, 지방 우편열차 중 한 편을 특별 호송 칸으로 만들어 다 집어넣어 보냈지요. 왜냐하면 시크교도들은 참으로 건장한 사내들이었기 때문에 그랬지요! ”
‘Before we could leave, all the women had to be told to go, and they were put into special carriages in one of the local mail trains and sent off under the escort of trusted elderly men, because the Sikh is a lusty chap!’
전선에서 복무하는 장교들은 일 년에 3 개월의 유급 휴가를 주었다. “그러나 대신 우리는 군 복무기간에서 그 기간만큼을 뺄 수가 있었지요. 남은 9개월을 철조망에 갇힌 채 마누라와 떨어져 올 편지만을 손꼽아 기다리면서 보냈지요. 저는 1차 대전과 2차 대전 사이 20년 중 10년을 그런 식으로 살았지요.”
‘But we earned it. The remaining nine months were spent surrounded by a barbed wire fence, away from your wife, longing for the post to arrive. I lived that kind of life for ten out of the twenty years which separated World War one from World War Two.’
에드 브라운 씨의 왕실 워-윅스 부대가 랜디코탈 지방으로 올라갔을 때도 그들은 평상시 훈련처럼 행군을 하고 있었다. “더위 속 가물거리는 전투함 종류를 지평선 위에서 볼 수 있었는데, 이 것은 한낮의 무더위 속에 회색 빛으로 가물거리는 꼭 무장선이나 전투함처럼 보이던 성채였지요. 우리는 그 성에 훨씬 더 가까이 다가서고 있는 거 같지가 않아서, 계속해서 행군을 해야만 했지요. 제 생각으로는 페르시아나 아프가니스탄에서 오는 카펫을 실은 낙타와 당나귀, 많은 동물들을 끌고 가는 카라반을 지나쳤지요. 한 번은 낙타 채찍으로 여자를 때리던 한 남자를 보았는데, 먼 거리에 떨어져 있어서 잔인하게 매질을 당하는 이 가련한 여자를 고통스럽게 지켜봐야 했어요.”
‘We could see on the horizon a kind of battleship shimmering in the heat. This was a fort, looking just like a gunboat or a warship, shimmering grey in the heat of the day. And we never seemed to get much nearer to it, we had to keep on marching and marching. We passed a caravan, a thousand head of animals I should think, camels and donkeys laden with carpets from Persia and Afghanistan, and a lot of followers. We saw one of the men beating a woman with his camel whip and we had to suffer the sight of this poor lady being whipped cruelly as we left her in the distance.’
성 안에서 하루 밤을 지샌 뒤, 이 사람들은 계속해서 행군을 했다. “어렴풋이 보이던 계곡들이 가까이 다가갈 수록 무시무시하게 생긴 모습을 드러내었고, 계곡 사이를 뚫고 꿈틀대며 올라가던 갈라진 틈 같은 걸 보았는데, 이 것이 이른바 카이버 고갯길로 선생님이 지나가는 양 옆으로 거대한 암반들이 하늘 높이 우뚝우뚝 솟아올라 있었지요.”
‘Horrible looking hills loomed nearer and nearer and then you saw some sort of crack going up through the hills – and this was the Khyber Pass; great slabs of rock towering up on either side of you.’
그리고 마침내 랜디코탈에 올랐다. “문을 통과하면서 보니 “여기 드는 자들은 모든 희망을 버려라!” 라고 쓴 게시판이 문 위에 걸려있었지요.”
‘As you went through the gate there was a notice which read, “Abandon hope all ye who enter here,” and that just about put the lid on it.’
가족이 함께 살지 못하는 주둔지에서의 생활에는 상당히 많은 제약이 따랐다. 여단 부관으로 카이버에서 2년간을 보냈던 죠지우드 씨는 그 곳에 있던 영국 군인들은 결코 행복하지 못했다고 기억하고 있었다.
그런가 하면 군인들은 고립감 때문에 다음과 같이 쓸데없는 일들을 일부러 만들어내기도 하였다. “우리 모두가 철조망 뒤에 갇혀 지냈지만, 근무 태만자에 대한 일반적인 처벌은 온당치 못했던 거 같았어요. 그러나 저는 엔지니어의 도움으로 군기 위반자들에게 곡괭이나 끌 등을 가지고 처녀 바위로 된 넓은 지역을 평평하게 고르라고 명령을 내린 다음 그 위에 양질의 시멘트 도료로 도포를 했지요. 그러자 그 당시 한 하청업자는 인도에 있는 모든 롤러 스케이트를 생산하겠다는 말도 했었지요. 아무튼 장식용 꼬마 전구를 이곳에 걸어놓아서, 추운 날씨 내내 영국 병사들은 롤러 스케이트만 탔지요.”
‘As we were all behind barbed wire, the ordinary punishment for defaulters seemed rather inappropriate. However, with the assistance of our engineer I set the defaulters to work with pick-axes and cold chisels to level a large area of virgin rock to a perfect level over which was spread a coating of fine cement. The contractor was then told to produce all the roller skates in India, fairy lights were slung over this area and all through the cold weather the British troops roller-skated and roller-skated.’
전선에서의 종군은 반 세기 이상 시도해 보고 시험을 했던 제도로 종군만큼은 엄격하고 지속적으로 유지하고 준수하려고 했다. 클라우드 오친레크 씨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을 했다. “적대적인 국가로 진군해 들어가는 것은 절대로 판에 박은 상투적인 임무 수행이었지요. 전초선은 항상 강이 있는 계곡 위에 있었지요. 분대가 따라가면서, 전초병은 적이 주력 분대에 화력을 집중할 수 있는 곳에서 계곡의 양안에 있는 사람들이 산 정상이나 산 머루로 안전하게 올라오도록 하는 것이 임무였고, 이런 정찰임무가 잘 되면, 계속 앞으로 나갔지요. 그리고 캠프장에 도착하면 캠프가 총격을 받지않도록 캠프 주위를 모두 석판으로 조그만 성을 만들어 경계를 세웠지요. 캠프장 주위를 로마인들이 했던 것처럼 돌을 갖고 벽을 만들고, 필요하다면 참호도 팠지요. 만약 선생님이 어떻게 통로의 경계를 정하고, 어느 장소에 부하들을 매복 시켜야 하는지 알지 못 한다면, 선생님은 항상 안 보이게 숨어 내려온 50 - 100 명 정도의 적병들에게 자칫하면 짐을 운반하는 병력이나 수송용 노새를 공격 당하는 걸 면하기 어려웠지요. 그 건 순전히 매복 진지 문제에 달려 있었어요. 그래서 선생님은 항상 높은 곳에 진지가 있어야 했고, 정확히 부하들을 어디에 매복 시켜야 할지 알고 있어야 했지요.”
‘The advance into hostile country was an absolutely stereotyped performance. Your line of advance was always up a river valley. As the column went along, the advance guard would put people up on either side of the valley on peaks or ridges from which the enemy might fire on the main column, and if it was properly done you got through. When you got to your camping ground pickets built themselves little forts with stone walls all round the camp to prevent the camp being fired into. Then you proceeded to make camp like the Romans did, with a wall all round it of stone and, if necessary, dug in a bit. If you failed to know how to picket the route – what places to put your men – then you were always liable to an attack on the baggage column or the transport mules by perhaps fifty or one hundred men who came down unseen. It was purely a matter of ground. You always had to have high ground and you had to know exactly where to put your men.’
심지어 최고로 잘 통제된 작전에도 위험은 항상 도사리고 있었으며, 위험은 눈에 보이지 않는 예측할 수 없는 위험이었다. 그래서 가장 공격 받기 쉬울 때만 적들이 모습을 나타냈으며, 경계 진지에서 철수할 때 제일 많이 공격들을 해왔다. 레지날드 세이보리 씨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을 했다. “파탄인들은 선생님이 볼 수 없는 막다른 곳에서 흔히 기다렸고, 선생님이 진지에서 딱 10 야드나 조금 더 떨어져 있을 때 꼭대기로 뛰어올라와 가까운 지근 거리에서 총을 쏘았지요. 그리고 맨 마지막 사내가 달아나면 그 때서야 은닉해 놓은 무기로 사격을 가했지요. 마지막 적병은 일반적으로 가장 건강하고 단단해 보이는 사람으로 노랗거나 빨간 국기를 갖고, 국기를 흔들면서 산 아래로 가능한 잽싸게 경사면 아래를 따라 내달렸지요. 그러면 그 적병이 약 20 야드 정도 떨어져있을 때쯤, 맨 첫번째 적병은 정상에 내려와 있었지요. 능선을 따라 진지를 철수하여 다음 산 봉우리로 달려 올라가면서 적들이 등 뒤에서 사격을 해대던 일은 제가 여지껏 알고있던 일 중 가장 기분이 오싹한 경험들이었어요. 사람들은 견갑골 사이의 움푹 진 곳을 의식할 만큼 아주 사색들이 되곤 했지요.”
‘The Pathan would very often be waiting in dead ground where you couldn’t see him and when you were just ten yards or so off from the picket the Pathan would jump on top and have a shot at you at short range. So the moment the last man was off you brought down covering fire. The last man was generally your fittest man and carried a yellow or a red flag and as he got down below the crest he waved his flag and ran down the slope as quick as he could. When he was about twenty yards away the first came down on the top. Withdrawing pickets along a ridge and running uphill to the next peak, with the enemy shooting at you from behind, was one of the most unpleasant experiences I’ve ever known. one used to get most frightfully conscious of the little dip between one’s shoulder-blades.’
산악전의 전투법칙을 유심히 관찰하지 못한 사람들은 항상 댓가를 단단히 치뤄야 했는데, 죤 드링 씨는 남 와지리스탄 지방의 주재관으로 갔을 때 이런 일을 목격했다. 한 번은 적진에 들어가는 토벌군을 따라갔었다. “많은 숫자의 적들이 밖에 있었지요. 그런데 문제는 이 사람들이 군사 경계선 위에 있어서 참사가 잇달았지요. 하나 씩 떨어져 있는 것들은 뭐든 다 잘못됐어요. 한 부대는 말 그대로 계곡에서 캠프 진지 안으로 달려 들어왔지요. 우리는 라즈막으로부터 7마일 막다른 길에서 궁지에 빠졌는데, 모든 보급선이 끊겨서 저는 참호 구멍 속에서 완전히 외부와 단절된 채 적어도 4주 반 이상을 보내야 했지요. 하여튼 그 잠깐 동안의 종군에서 그 부대는 영국군 연대장 한 명을 포함해서 적어도 80명이 사살되는 고통을 겪었지요.”
‘The hostiles were out in very large numbers; they got above the military pickets and disaster followed. Every single thing went wrong. one regiment came literally running from the hills into camp. We got bogged down seven miles from Razmak, all wires were cut and I spent no less than four and a half weeks in a hole in the ground utterly cut off. on that short march the column suffered at least eighty killed, including the British colonel of one of the regiments.’
야간에 간헐적으로 울려대는 총소리와 뻥-뻥하고 때려대던 저격탄 소리는 전선 종군 중 끊임없이 울려대던 견디기 힘든 지겨운 소리였다. 전선에 새로 배치된 신참 부대는 쓸데없이 자주 응사를 하였다. “우리는 몽창 몰려나가 루이스 식 경기관총과 베레이 식 소총을 걸어놓고 철조망 밖 여기저기 아무 데나 대고 갈겨댔지요. 물론 기관총을 갈기면, 그 놈들은 능선 너머로 어느새 도망쳐버렸지요.”
‘We used to rush and mount the Lewis guns, fire Verey Lights and spray the outside of the wire with fire and, of course, when the machine guns opened up they just slid back behind the ridge.’
조금 경험이 있는 부대는 일단 사태를 관망하였다. “인도군에서는 함부로 응사하지 말라고 가르쳤어요. 막무가내로 응사하지 않고 저격수를 찾아보고, 위치를 정확히 관측하는 것이 침착함의 표시였어요. 만약 부대원이 저격수를 향해 되받아 쏘면, 그들에게는 그 게 그대로 표적이 됐지요. – “어, 이 놈들은 저격수한테 막 응사를 하는 놈들이네.”
‘It was accepted practice in the Indian Army never to return fire. It was a sign of steadiness not to shoot back, to look for and spot the man but never fire back. If a regiment shot back against a sniper it was a mark against them – “Oh, they’re the chaps who shoot back at snipers.”’
구르카 부대만큼 산악전투에 이골이 난 부대는 없었다. 당시 루이 르 마르찬드 씨가 있던 제 5전선 구르카 부대보다 산악전투에 더 경험이 많은 부대도 없었다. 사상자는 없었으나 꽤 성가신 저격 세례를 받고 난 뒤 자루바지 같은 것을 입힌 임시로 조직한 30명의 건장한 구르카인을 평상시 작업처럼 위장을 해 내보낸 후 복수를 해주기도 했다. “그 사람들은 나가서 산 주위 경계선을 깨끗이 치우고 약 1시간 정도 작업을 하고 돌아왔지요. 그 대신 30명 중 25명만 돌아왔지요. 그리고 우리는 저격병들이 올 것이라고 생각한 곳에 긴 바지에 감추고 간 총과 함께 5명의 부하를 매복 시켜놓고 왔지요. 그날 밤 아주 정확히 10시쯤 되자 저격병이 두세 번 총을 갈기기 시작했지요. 그리고 나서 일제히 사격들을 해댔고, 죽은 양들 같이 축 처진 마후스드의 시체를 갖고 5인의 구르카 병들이 들어왔지요. 다음날 아침 주재관이 와서 그들을 보며 “아이구 하느님 맙소사, 저 친구 어제 밤 나랑 같이 식사한 친구 아냐!” 라고 말을 했는데, 이 사람이 바로 그 지방 영주들 중 한 사람이었지요. 그 사람은 주재관에게 먼저 저녁만찬을 대접하고 나서, 내려가 주재관을 저격하기로 결심했었다고 하지요.”
‘They went out and cleared a little bit of the countryside and then came back after about an hour’s work, but instead of thirty of them coming back, only twenty-five did. We left five men with rifles concealed in their long trousers hidden up where we thought the sniping was coming from. And sure enough, that night at about ten o’clock or so a couple of rounds of sniping started, and then there was a volley of shots and our five Gurkhas came in bearing the corpses of two Mahsuds, dead as mutton. The political agent came to see them the next morning and said, “Good God, I dined with that fellow last night!” it was one of the local Khans. He’d given the political agent dinner first and then decided to go down and have a few shots at him.’
총은 결코 잃어버려서는 안 된다는 게 전선의 법칙이었다. 총기분실은 가장 죄질이 무거운 중죄로 간주하였고, 일반적으로 감찰 회의 감으로 이따금 군법에 회부되기도 했다. 따라서 총기분실은 결코 묵과될 사건이 아니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말들을 했다. “아! 저 부대. 아! 그래 1894년 티라에서 총을 잃어버린 사람이 전혀 없던 부대가 맞지?”
“Oh, that regiment – oh yes, weren’t they the ones who lost those rifles in Tirah in 1894?”
따라서 총기분실은 자기 목숨을 잃거나 허벅지에 총알을 맞는 것보다 훨씬 더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일종의 치욕으로 불명예스러운 일이었다. 파탄인들은 총을 몹시도 탐을 내서 총을 손에 넣기 위해서는 목숨도 기꺼이 내던질 준비가 돼 있던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레지날드 쎄이보리 씨가 다음 사건에서 묘사하듯이, 대부분 총을 훔치는 시도는 성공하지 못했다. “일단의 젊은 애들이 칼을 들고 공격을 해와서, 저는 몇 명의 부하를 한 고지의 진지로 올려보냈지요. 그런데 제 부하들이 대검을 갖고 이들을 공격해서 꽤 많은 사람들을 죽였지요. 우리는 그들을 일렬로 쭉 눕혀놓았는데, 보니까 모두들 아주 잘 생긴 젊은이들이었어요 – 그런데 흰 수염이 난 마을노인이 한 사람 따라왔지요. 그래서 그 양반에게 길 옆에 누워있는 4 - 5명의 소년들을 보여주었는데, 제 생전에 그렇게 비통해 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을 정도로 그 노인은 애석해 했지요.”
‘I was sending some men up to picket one of the heights when they were charged by a group of young chaps with knives. They went for them with the bayonet and killed the lot. We laid them out in a row – such a good-looking lot of young chaps they were – and one of the village elders came along, an old grey-bearded man. I showed him these four or five boys lying by the roadside and I don’t think I’ve ever seen anybody quite so broken-hearted in my life.’
영국 사병들에게 루즈-왈라 라고 알려진 아주 흔한 총 도둑은 옷을 홀딱 벗고 온몸에 기름을 칠한 채 한 밤 중에 총을 훔쳐가려고 했다. 이런 일을 방지하기 위해서 급기야는 사람들마다 쇠사슬로 총을 몸에 묶고서 잠을 자야 했다. 사슬을 총구에 넣어서 자기 허리에 감았고, 쇠사슬이 없으면 총 길이만큼 넓고 길게 구덩이를 파서 그 속에 넣고 잠은 그 위에서 잤다.
그러나 이따금 그렇게 세심히 주의를 기울였지만 총기도난 방지는 그런 정도의 노력만으로는 충분치가 않았다. 이에 대해 에드 브라운 씨는 다음과 같이 말을 했다. “우리는 담요 끝 속에 넣고 꿰맨 덮개를 갖고있어야 했지요. 우리는 덮개 속에 총을 넣고 꿰맨 다음 팔 둘레에 감고 잤지요. 그래도 그들은 갑자기 캠프에 침입해서 총을 내놓게 하려고 수도 없이 여러 번 칼로 찌른 다음 풀어 가지고 도망을 쳤어요. 그러나 비록 칼에 찔리고 심하게 부상을 당했어도 결국 군법에 회부됐는데, 그 사람은 어떠한 경우라도 총기는 절대 분실하지 말았어야 한다는 말을 들어야 했지요. 그러나 정상을 참작해서 처벌은 총 값을 배상하는 걸로 대신했지요. 그래서 81루피 8애나가 부과됐는데, 그 총기 분실자는 이의 없이 그런 처벌을 받아들였지요. 아무튼 매사가 다 그런 식이었어요.”
‘We had to have folds stitched into the end of our blankets. We used to thread the rifle into the fold and the sling outside it round your arm. But still they broke into the camp and stabbed a man numerous times to make him release his rifle. Eventually he did – and although that man was stabbed and hurt so badly he had a court martial. He was told that he should never have lost the rifle but in view of the circumstances his only punishment would be that he’d have to pay for the rifle. Eighty-one rupees, eight annas they charged him for it. He accepted it. It was all part of the way things were.’
전선에는 결코 자비라는 말이 없었다. “파탄인들은 매력적인 사람들이었지만, 아주 잔인한 경향이 있었어요. 만약 선생님이 부상당한 사람들을 뒤에 놔두고 가면, 살해될 뿐만 아니라 아주 처참한 방법으로 사지를 잘렸어요. 그래서 부상자들을 결코 뒤에 놔두고 떠나지 않는다는 게 우리에겐 명예를 지키는 일이 됐지요. 만약 우리 쪽 사람이 한 사람만 부상을 당해도 부상자를 데려오려고 역습을 했지요.”
‘The Pathan is an attractive man but he had a very, very cruel streak in him, and if you left a wounded man behind he was not only killed but frequently mutilated in the most obscene manner. It became, therefore, a point of honour with us never to leave a wounded man behind. So if one of our men was wounded we counter-attacked in order to get that wounded man back.’
그러나 전선은 무엇보다도 병사들을 시험했다. “전투에서 겁을 집어먹고 달아났다 돌아와서 저녁에 당신 형제들과 같이 밥을 먹거나 술을 마신다는 것은 죽음을 감수하는 일보다 훨씬 더 심한 벌이었지요.”
‘To run away or to show cowardice on a Frontier campaign and come back and wine or dine with your brother officers in the evening was a far worse punishment than risking death.’
이따금 실패할 때도 많았다. 이에 대해 클라우드 오친레크 씨는 다음과 같이 말을 했다. “참호 구멍 속에 영국군 장교가 누워있는 걸 보고 거기서 그 장교를 꺼낸 적은 있었지만, 아주 흔한 일은 아니었지요. 사람들은 공격에 들어가기 전에는 대체로 물어볼 필요도 없이 모두들 새파랗게 질려있었지요. 그러나 어느 곳에든 일단 두려움은 접어두고서 앞으로 진군을 해야만 했지요.”
‘I’ve seen a British officer lying in a hole and pulled him out of it – but not very often. Before one went into attack one was frightened, there’s no doubt about it. You just had to put it away somewhere and go ahea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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