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바라크 인도 이야기

2007. 6. 9. 17:20일반/역사·영어·컴퓨터

728x90

15
바라크
Barracks

“우리는 인도를 거주지들이 있는 장소로 생각했지, 사람들이 가정을 꾸리고 살만한 곳으로는 생각하지 않았어요.”
‘We used to think of India as a place of stations, never as a place where people had homes and where they lived.’
모든 영국 동네 중에서 영국 사병들의 환경은 키플링 시대 이후로 조금씩 변해서, 최소한의 면책특권만 남고, 있어도 대부분은 극히 제한돼 있었다. 2차 대전 바로 전에 인도를 방문했던 독일 상공인들은 초청자에게 캘커타에서 오는 동안 단 한 명의 영국군인도 본 적이 없다고 물어서 아주 큰 단위로 격리돼 떨어져있다고 대답을 했다고 한다. “당신네 부대는 모두 어디에 있소? 어떻게 여기를 다스리고 있지요?”
‘Where are all your troop? How do you rule here?’
스테픈 벤틀리 씨는 씨포쓰 하이랜더에 있던 자신과 동료들이 봄베이에 맨 처음 도착했을 때 시간이 지나면서 자꾸만 긴장의 수위가 높아만 가던 일을 의식하고 있었다. 군대는 결코 사람들 눈에 띄는 곳으로 가지 않는다는 게 인도에서의 영국식 룰의 특징이었는데, 사실 영국 군인들은 대륙 전체에 드문드문 넓게 퍼져있어서 숫자로 봐서는 얼마되지 않았다. 그래서 되도록 군 병영은 충분히 독립적인 자급자족의 기능을 갖추었고, 군에서 인정하는 시장과 그 지방 가까운 지역으로만 범위를 제한하였다. “선생님이 새로운 주둔지에 도착하면 으레 하는 첫번째 명령은 모든 인도인 마을, 가게, 시장 그리고 민간인 지역을 출입하지 말라는 것이었지요.”
‘The first order that appeared when you got to a new station usually stated that all Indian villages, Indian shops, Indian bazaars and the civil lines were out of bounds to all troops.’
그런가 하면 일반 사병들은 주위에 단조로움을 깨는 푸른색 징후는 하나도 없는 모두 다 널찍하고 똑같이 생긴 담갈색 막사에 갇혀 살아야 했다. 어딜 봐도 모두 다 모래 뿐이었다. 이런 격리된 곳에서 항상 하던 방식대로 군대 업무가 계속되었다. “먹으러 가려고, 의사를 보러 가려고, 비상식량을 타러 가려고, 보급품을 타러 가려고, 탄약을 타러 가려고, 열을 지어 행군 또 행군을 계속했지요. 일요일이면 교회행군이란 게 있어 또 반 강제적으로 행군을 해야 했지요. 하여튼 1년 365일 행군을 했습니다. 밤낮으로 아무때나 “행군이다, 행군.” 하고 불러대서는 행군을 했지요.”
‘You paraded for your meals. You paraded to see the doctor. You paraded to draw your rations. You paraded to draw your stores. You paraded to draw your ammunition. You paraded on Sundays because Church Parade was compulsory. It was parades 365 days a year. Any hour of the day or night the call would come up, “On Parade, on Parade.”’
그래도 행군이나 근무시간은 사병들 전체 시간 중 극히 일부분만을 차지했을 뿐이고, 대부분의 근무 외 시간은 방갈로에서 보냈다. “통상적인 의미에서 보면 이런 집들은 방갈로 형태가 아니라 길이가 250 피트에, 넓이가 100 피트, 높이가 30 - 40 피트나 나가는 비행기 격납고 같이 생긴 곳으로 아주 튼튼하게 지었지요. 또한 이런 건물들은 가볍게 지어져서 아주 시원하고 환기도 잘 됐어요. 주방이나 화장실 그리고 바라크는 모두 따로 떨어져있었고, 대부분의 경우 주방과 화장실은 방갈로에서 200 야드쯤 멀리 떨어져 있었지요.”
‘These were not bungalows in the usual sense ‘but more in the nature of aircraft hangars, very solidly built, about 250 feet long, about 100 feet wide and between 30 and 40 feet high. They were very light, very cool and well ventilated. The cook-house, latrines and other parts of the barracks were all separate. In many cases the cook-house and the latrines were as far as two hundred yards away from the bungalows.’
방갈로는 50명의 소대원들이 함께 살아야 해서 일반 사병들은 개인적인 독방을 갖지 못했다. “자기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자기 삶의 99%를 차지하던 100 입방 피트의 공간 뿐이었지요.”
‘All he could lay claim to was perhaps one hundred cubic feet for ninety per cent of his life.’
자신의 침대와 잡낭 사물함만이 유일한 재산이었다. “침대야 말로 개인들 삶의 핵심이었어요. 침대에서 모든 것들을 다 했지요. 글을 쓰는 책상으로, 청소 방으로, 일하는 벤치로, 카드 할 때 쓰는 탁자로 침대를 이용했지요. 그리고 아무 것도 안 할 때만 잠자는 침대로 썼지요. 그런데 인도에서는 할 게 별로 없어서 대부분의 시간을 주로 잠만 잤지요.”
‘This bed was the centre of his life. He used it for everything. He used it as a writing desk, as a cleaning room, as a work bench, as a card table, and when he wasn’t doing anything on the bed he was sleeping on it. A great part of the time in India he slept, principally because he had nothing else to do.’
사물함에는 군인들 세계에 필요한 물건만을 담아 놓았다. “사물함에 들어갈 수 없는 건 아무 것도 넣지 못하게 했지요. 항상 잠가 놓았고, 열쇠는 광이 나 있어야 했고 매일마다 검열이 있었기 때문에 아주 반짝반짝 닦아댔지요.”
‘You weren’t allowed to have anything that couldn’t go into that kit box. It had always to be locked and your lock had to be burnished and always shining brightly because it was inspected every day.’
에드 데이비스 씨는 도르셋 부대에서 사병생활을 했었는데 다음과 같이 말을 했다. “장비 중에서 제일 중요한 품목은 침대 각 귀퉁이에 대는 4개의 폴 대와 여왕의 침실마냥 꼭대기에서 걸어서 밑에까지 덮어 내리게 하는 그물로 모찌넷 이라고 하는 모기장 였지요. 우리는 해가 진 뒤 저녁에 모기가 들어오기 전에 모기장을 내려서 어느 쪽으로도 모기가 못 들어가게 이곳 저곳을 잘 싸맸지요.”
‘A vital item of equipment was the ‘mozzie net’ with ‘four poles at each corner of the bed and reclining over the top and right the way down a net like a queen’s bedchamber. We used to lower it down before the mozzies came in the evening after the sun went down and keep it well tucked all the way round.’
일반 사병들은 일상생활에서 오는 지루한 단조로움을 왈라 라고 하는 캠프에 더부살이를 하던 써비스를 제공하는 사람들 때문에 다소 누그러졌는데, 그 첫번째 사람이 바로 기상나팔 전에 오는 이발사였다. “면도를 해 주었는데, 애들 궁둥이 같이 깨끗하게 면도를 해줘서 깨어날 때까지 몰랐고, 돈은 주말에 받으러 왔지요.”
‘He’d shave you and you never had an idea until you woke up all nice and cleanshaven and with a face like a baby’s bottom, and he’d charge you at the end of the week.’
태양이 뜨고 기상나팔을 불고 아침 예포소리가 나면 그 소리로 조용한 바라크 주변이 울려 퍼져 까마귀들이 화들짝 놀라 달아났다. 그리고 “붐 쿼크 아크 아크” 하는 소리를 들었다. “챠르 왈라 <차를 나르는 시중>가 커다란 은 주전자를 들고 한 바퀴 돌면서 각 침대 옆에 있는 큰 머그 잔에다 차를 따라 줬지요. 1/16 루피인 1애나 값 이었는데 맛만은 아주 일품이었지요. 그리고 나서는 바라크 광장에서 체력훈련을 하고 찬물로 샤워를 한 다음 쵸크라스 <현지인 소년들>가 전날 밤 다려놓은 군복을 입었지요.”
‘The char-wallah came round with a big silver urn and poured out tea into the mugs at the side of each bed. This was paid for by the annaworth and was reckoned to be ‘good stuff’. Then came physical training on the barrack square, cold showers and a change into uniforms ‘pressed the night before by one of the chokras.’
이런 사환들은 대개 나이든 남자들로 많은 군인들을 돌보았는데, 각 군인들로부터 일 주일에 1루피씩 받았다. 아침은 항상 카키 스테이크라고 부르던 아주 질긴 고기로 주방에서 받아다 식당으로 갖고 와야 했는데, 도처에 깔려있던 솔개들이 기다렸다가 본국에서 온 아무 의심도 없는 신병에게 와락 덤벼들었다. “신병은 아무 것도 개의치 않는 투로 손에 음식물을 담은 식판을 휘파람을 불며 들고나오다, 갑자기 솔개란 놈이 달려들면 아무 것도 남지를 않았지요.”
“He’d come out unconcerned, whistling, with his plate of grub in his hand, and all of a sudden the kite-hawk would swoop down and leave him with nothing.’
군대식사가 충분하다고 생각되지는 않았다. 왕실 스코트랜드 부대에 복무했던 이 에스 험프리 씨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을 했다. “수 년 동안 똑같은 계급으로 남아있어서, 영양실조를 예방하고 충분한 음식을 섭취하기 위해서 가지고 있던 돈을 모두 써버렸지요.”
‘All the years I remained in the ranks, I spent the whole of my money to provide myself with sufficient food to prevent malnutrition.’
장사꾼들은 그런 부족한 점을 보충해 주려고 항상 군인들 곁에 대기하고 있었다. “커다란 팬에다 계란 후라이를 해주던 계란 장사, 버터와 우유가 든 조그만 병을 들고 다니던 두드 왈라 <우유 장사>, 햄 덩어리를 자르는 도마를 들고 다니던 햄 왈라 <햄 장사>가 있었고, 이런 장사꾼들 중 가장 극적인 장사꾼은 “지미 켈리는 배에 좋아요. 사기 전에 일단 한 번 맛 좀 보세요. 사탕이요, 사탕!” 하고 크고 힘찬 목소리로 자기가 도착한 것을 구성진 노랫가락으로 알리던 뚱뚱하고 명랑한 스윗 왈라 <사탕 장수>가 있었지요. 그 사람은 베란다에다 철제상자를 꺼내놓고는 사람들 앞에다 굉장히 많은 하얀 사탕, 코코넛이 섞인 사탕 등을 늘어 놓았는데, 아무거나 1 페니 만 내면 4온스 <1온스: 28.3495 그램>씩 이나 살 수가 있었지요.”
‘The egg-wallah frying eggs in a large pan, the dudh-wallah with his little pats of butter and milk, and the ham-wallah, a fellow with a board with a roll of ham on it which he cut.’ The most exotic of the vendors was the sweet-wallah, ‘usually a fat and cheerful man who would announce his arrival by chanting in a loud, strong voice, “Jimmy Kelly good for belly, take and try before you buy. Sweetie!” He would put his tin box on the verandah and before one’s very eyes display vast amounts of white, sugary sweets mixed with coconut, all for the price of four ounces for one penny.’
하여튼 캠프를 따라다니는 사람들은 모두 부대 보급장교가 허가증을 내줘서 그 걸 소지하고 따라다녀야 했는데, 어떤 사람들은 그 방면에서 보기 드문 전문가 수준의 희귀한 사람들도 있었다. “방갈로 베란다 주변에서 “콘 큐팃트 왈라” 하고 소리를 질러대는 사람을 만날 수 있었는데, 이 사람은 선생님 발의 티눈이나 못 등에 아주 멋지게 생긴 뿔 모양의 조그만 관을 티눈 위에 올려놓고 잘라내서 티눈을 빼는 사람이었고, 부대가 이동 중이면 “잡낭에 이름 새겨요!” 하고 외쳐대는 사람도 따라다녔는데, 그러면 선생님 잡낭에 선생님 이름과 번호를 그려주었지요. 또 봄베이 굴을 팔던 사람이 있었는데, 생 달걀을 갖고 다니면서 쏘스와 식초를 집어넣은 유리잔에 탁하니 깨줘서 한 입에 삼키고는 했지요. 또 주일마다 청소를 해주던 도비라는 청소부처럼 속성으로 세탁을 해주던 플라잉 도비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선생님께서 만약 정찰임무 때문에 그날 밤 나가 있으면 아침에 빨래 감을 집어갔다가 그날 저녁 바로 입을 수 있게 풀을 먹여 멋있게 세탁한 뒤 도로 갖다 놓던 사람이 있었지요.”
‘You’d get the fellow who came round the verandah of the bungalow shouting ‘Corn-cuttit wallah!’ He’d cut your corns with a nice, horn-shaped little tube that was put on the corn and would draw it out. If the battalion was on the move you’d get a fellow coming round who’d call out, ‘Names-to-put-on-the-kitbag wallah’ and he would paint your name and number on your kit bag. There was the Bombay-oyster wallah. He’d bring round raw eggs which he’d break into a glass with vinegar or sauce and which used to be swallowed with a gulp. As well as the dhobi, who took the weekly washing, there was also the man known as the flying dhobi. If you were going on guard that night he would pick up your drill in the morning and bring it back that evening beautifully laundered and starched ready to put on.’
결론적으로 이런 보조적인 일거리들이 해결됨으로써 영국 군인들의 외관은 몰라보게 개선되었다. 그러다 보니 인도의 작열하는 태양아래 알더숏에서 행군할 때의 작은 얼룩 하나도 푸나의 연병장에서 행군할 때는 잉크 자죽처럼 번져서 더러워졌다. 그러나 아직도 무한한 주변의 잠재적인 노동력으로 인해서 군인들은 새로운 위상을 갖게 되었다. “제가 처음에 본 그 대대의 겉 모습은 제 눈을 휘둥그래지게 만들었어요. 그렇게 멋진 군인들은 결코 본 적이 없었지요. 왜냐하면 매일같이 세탁해서 다림질한 군복을 입던 군인들은 결코 본 적이 없었기 때문 였지요.”
‘The turn-out of the battalion when I first saw it dazzled me. I had never seen such smart soldiers, because I had never seen soldiers whose uniforms were washed and ironed every day.’
인도에서 계급이 높은 군인들은 상당한 지위를 누렸다. “그 분은 군인 나리였고, 그래서 비천한 인도인들은 그렇게 호칭했으며, 또 그렇게 호칭해 주기를 고집했지요.”
‘He was the soldier-sahib and was addressed as such by the humbler Indians and insisted on being addressed as such.’
그런 일들이 일반 사병들의 사기에 미친 영향은 아주 대단했다. 인도에서 한 일 년쯤 지나면 일반 사병들도 연병장 밖에서는 하인들과 같이 다녀서 네 발로 움직이는 사람들이 됐지요.”
‘After about a year in India they were four feet off the ground.’
캠프를 따라다니던 어떤 그룹은 영국 군인들의 아량 하에 특별한 장소를 배정 받았다. 이런 사람들이 누구냐 하면 바로 키플링이 격찬을 아끼지 않던 부대의 그 유명한 비스티스라는 물 긷는 사람과 아무런 인덕도 칭찬도 받지 못한 메흐타르스 라는 화장실 청소부들이었는데, 그 청소부들이 하는 일은 아주 중요했다. “그 당시 화장실을 보면 함석판 뒤 판자에 의심스러운 구멍이 하나 있었는데, 이따금 거기 앉아있다 보면 아래 쪽에서 시커먼 팔이 들어와 깡통을 갖고 가는 걸 보게 됐는데, 처음엔 좀 놀라다가 이내 그런 일에 익숙해졌지요.”
‘Latrines in those days used to mean a hole in a board behind corrugated iron sheeting. Occaionally whilst sitting there you’d find a black arm snaking out from under you and taking the tin away. This was a bit frightening at first but you got used to it.’
화장실에서 나온 오물은 청소부가 모아서 봄베이의 우유 마차라고 불렀던 암소가 끄는 들것에 실어서 어딘 가로 갖다 버렸다. 청소부는 여러 방갈로를 쳤기 때문에, 옥외 화장실은 행상인들에게는 안식처가, 다른 사람들이 있을 때는 신성한 장소로 아주 중요한 사회적 쎈터 역할을 하였다.
또한 영국 군인과 청소부 간에는 어떤 동료의식이 싹트게 되어, 인도인 중에 청소부는 영국 군인들과 가까이 친해질 수 있었던 유일한 인도인 신분이었다. 이렇게 영국 군인들과 캠프 종사자들 사이의 인간적인 교류로 인하여 영국군과 인도인이 섞여서 이상하게도 양 쪽이 잘못 발음하고 사용했던 은어들이 생기게 되었다. 하지만 그런 식의 의사소통으로 인해서 대개 활발하고도, 눈 여겨 볼만한 의미 있는 접근이 이루어지기도 했다. 이에 대해 에드 데이비스 씨는 다음과 같이 설명을 했다. “당신이 만약에 장사꾼 한 사람을 부르고 싶으면 인도 말로 “이더 오우 젤디 <이리 빨리 와!>” 라는 말을 하고는 했는데, 그 사람이 달려오지 않으면 똥 방뎅이를 한 대 걷어찼으므로 “젤디 <빨리>”가 되게 달려와야 했지요. 우리가 “키트나 피세? <얼마지?>” 하고 말하면, 10 펜스라는 말로 “다스 애나스. 싸히브” 라고 할 것이고, 그러면 “알았네, 해골 작대기 하나 주면 되나, 여기 돈 있네.” 하는 뜻으로 “다스 애나스? 흠 마르카로 젤디.” 라고 말을 했지요. 만약 헷갈리지 않고 계산을 정확히 하고 있는지 확인하고 싶으면, 눈을 똑 바로 쳐다보면서 “말룸? <알아 들었나?>” 하고 묻기만 하면 됐어요. 그러면 아 나리님 맞아요 하면서 “아차. 싸히브, 말룸” 이라고 대답을 했지요.”
‘If you wanted one of the vendors for something you used to say to him, “Idder ow jeldi” – come here quickly. It had to be “jeldi” because he got a kick up the backside if he didn’t run. We’d say to him, “Kitna pice?” – How much? He’d probably say “Das annas, sahib” which is ten pence, and we used to say “Das annas? Hummarcaro jeldi” – in other words, “I’ll give you one across the skull.” If you were determined to let them know you weren’t going to let them muck you about you used to look them straight in the eye and say “Malum?” and that was enough. They’d say, “Achah, sahib, malum”.’
영국인 사병들은 다음과 같이 앵글로 인디언 은어를 사용했다. “어떤 사람이 만약 시끄럽게 굴면, “던 비 보베리” 라는 식으로 말을 했으며, 또 “총은 잘 닦아 놓았나?” 라는 말도 총이라는 단어만 힌디어로 바꾸어 “분득은 잘 닦아 놓았나?” 하고, “너 침대에서 여자랑 잤구나?” 하는 말도 “너 차르포이 배슁 했구나” 라는 식으로 말들을 했지요.”
‘If anybody got a bit obstreperous we used to say to him, “Don’t be bobbery – don’t be mad,” and we used to say, “What about cleaning your bundook, then?” That’s his rifle. And, “Oh, I see you’ve been charpoy-bashing again,” sleeping on your bed.’
일반적으로 군에서 하는 일들이 그렇게 힘이 들지는 않았다. 날이 무더울 때면 아침 일찍 열병식을 하고, 저녁나절엔 스포츠나 간단한 훈련을 하는 것으로 한정하였다. 목요일이면 특별 자유시간의 날 <버크시 데이>이라고 해서 모든 열병식을 취소하고, 낮에는 스포츠나 한가한 여가활동 시간을 가졌다. “우리에겐 지루함을 깨부수는 큰 무기가 있었지요. 그건 계속해서 스포츠를 하는 일이었지요. 그래서 무지하게 경기들을 했는데 그 게 지루함을 더는 데 큰 도움이 됐어요.”
‘We had one great weapon against boredom. The answer was sport, sport, sport. We were games mad and that was an enormous help.’
게임을 끝내고 나서 사람들은 샤워를 했다. “그리고는 긴 바지나 모기에 물리지 않게 손목까지 덮는 소매가 있는 카키 셔츠나 입기 편한 헐렁한 긴 바지나 모자를 쓰고는 밖으로 나가서 단골 주보나, 한 두 잔씩 하려고 클럽이나 바로 곧장 가버리곤 했지요.”
‘Then you’d don long slacks, khaki shirts with sleeves right down to your wrists so that the mozzies wouldn’t get at you, and a side hat, and away you used to go to a club or a bar for a couple of pints, or to your own canteen.’
맥주는 1 파인트 <0.57 리터>에 2 - 3 애나로 아주 싸고 독하고 맛도 좋았지만, 부대 주보에서는 남의 기분을 상하게 할 필요도 없고, 소란을 떨 필요도 없고, 그렇다고 무기력하게 보일 필요도 없이, 그저 비틀대며 걷는 정도만 해야 한다는 걸 군인들은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밖에서 근무하는 사람들에겐 주보에서 어쩌다 술이나 한 잔 하면서 근무를 서라고 위병소에 술을 넣어주기도 했다.
부대에서 허용을 해도 돈이 없었기 때문에 병영을 떠나서 할 수 있는 보다 더 모험적인 활동을 하는 데는 많은 제약이 따랐다. 에드 브라운 씨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억을 했다. “제가 맨 처음 사병으로 입대했을 때, 제 봉급은 하루에 8 데나리온 <8 페니>을 받되 지불정지는 없는 걸로 했지요. 그래서 일 주일이면 3실링 3 데나리온을 찾아 쓰고, 그 다음 주에는 2 실링을 찾아 쓰곤 했지요. 우스운 일은 봉급을 주는 주둔지에서 꽤 떨어져 나와 있었는데도, 당직 하사관이 멈춰 서서는 전쟁 공채를 사고 싶은지 물어보곤 했다는 겁니다. 그러고 나면 세탁을 하는데 할 수 없이 10펜스를 쓰러 군 매점으로 갔지요.”
‘When I first enlisted, the pay was 8d a day, less stoppages. one week I would draw 3s 3d, the next week 2s 0d and the funny part about this was that as you came away from the pay station the orderly sergeant would stop and ask you if you wanted to buy any war loans. You were then marched to the canteen where you were compelled to spend ten pence on cleaning materials.’
돈을 제 때 주지 못하는 지불정지는 영국 사병들 사이에서 계속 반복되던 불만의 근원이었다. “세탁비나 구두 수선비 같은 이해할 만한 합법적인 지불정지가 있기도 했지만, 이른바 바라크 파손 같은 부당하고 합리적이지 못한 지불정지도 있었지요. 지불정지는 매달 꼬리를 물고 되풀이해서 일어났는데, 우선 그런 형편없는 봉급을 타는 사병 자신들에게 근본적인 원인이 있었지요.”
‘There were some legitimate stoppages such as laundry and shoe repairs, but there was one which was neither fair nor reasonable called “barrack damages”. It recurred month after month and this was one of the causes of the soldier drawing such poor pay in India.’
해마다 일반 사병들도 여유가 있다면 2 주간의 휴가를 찾아 쓸 수 있는 권한이 있었다. “그러나 단 한 가지 이유 때문에 휴가를 못 가게 됐는데, 그 건 순전히 돈 때문이었지요.”
‘He was stopped by one element alone and this was money.’
그래서 결론적으로 대부분의 군인들은 부대에 그냥 남아있었고, 극소수의 사병들만이 어떻게 든 애들을 쓰고 노력들을 해서 휴가라는 걸 갔다. “우리는 2 - 3 명, 혹은 4명을 한 조로 만들어, 궐련을 살만한 충분한 돈과 원하는 호텔에 지불할 숙박비와 차비를 만들기 위해서 맹렬히 저축들을 했지요.”
‘We used to team up with two or three mates, making it a foursome, and save up like billy-o to get the fare and the amount that the hotel wanted and enough spending money for a few fags.’
군인들에게 YMCA 호텔이나 샌디스 홈 호텔 등은 값이 싼 대신 억지로라도 한두 절의 찬송가 가락을 따라 불러야 했는데, 모두들 건성으로 따라 불렀다. 이 에스 험프리 씨는 란다우르 지방에 있던 샌디스 홈에 머물던 일을 다음과 같이 회상을 했다. “처음으로 훌륭한 삶의 기품이나 친절한 교양과 훌륭한 예의범절이 무엇인지를 그 곳에서 배웠지요.”
‘There for the first time I learnt something of the graces of good living, of kindly culture and good manners.’
그러나 그런 집이나 환대를 해주는 곳은 아주 적었고, 그런 곳은 너무나 먼 곳에 있었다. 죠지 우드 씨는 다음과 같이 기억을 했다. “인도에 오기 전 우리는 수단에서 근무한 적이 있었지요. 그 당시 도르셋 부대에 있던 한 장교와 부하들은 인도에 있던 영국인들이 자신들의 존재를 무시하던 것과는 반대로, 수단에 있던 영국 민간인들로부터 받은 친절이란 주제에 아주 씁쓸해 했지요.”
‘We’d served in Sudan before coming to India. Then an officer in the Dorset Regiment, ‘and the men were very bitter on the subject of the kindness they had met with in the Sudan from the civilian population, as opposed to the way the British population in India ignored their existence.’
외부에서의 지원이 전혀 없어서 부대는 부대 자체나 장교들만 보고 지냈다. 이에 대해 에드 데이비스 씨는 다음과 같이 말을 했다. “우리가 알고 있는 한 장교의 삶은 여지껏 본 것 중에서 가장 멋진 것이었지만, 우리는 결코 질투를 하지 않았지요. 인도에서 제가 복무하던 기간 동안 쭉 “올드 스미스를 봐라. 호사스럽게 살고 있지. 그러나 우리가 사는 걸 보라 구 어떤가?” 라고 한 사람도 그런 말을 하는 소리를 들어보지 못했어요.”
‘An officer’s life we knew was the finest thing that was ever invented, but we never felt jealous. During my whole service in India I never heard one person say, “Look at old Smith, he’s living a life of luxury, look at what we’ve got.”’
그런데 이러한 맹종하는 분위기의 이유는 사병들은 아무래도 장교가 더 나은 사람이라고 믿도록 가르쳐져서 그랬다. 장교들은 군인기질이 강한 특수계층 출신의 사람들이었다. “이런 사람들은 원래부터 지도자나 신사 태생이었지요. 이 사람들은 신사도에 어긋나는 일은 결코 하지 않았어요. 저는 전선에서 작전 중인 이런 장교들을 본 적이 있는데, 항상 매사에 앞장을 섰지요.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직무유기가 됐을 거예요. 그러나 그 사람들이 해내는 임무를 보면 항상 탁월했지요.”
‘These people were born leaders and born gentlemen. They never did a thing that transgressed the code of gentlemen. I’ve seen these officers in action on the Frontier. They were always in front. It would’ve been a dereliction of their duty not to have done it, and their duty was always paramount.’
군 막사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던 스파이크 밀리간 씨는 금방 장교들의 우수성을 알아차렸다. “정말로 저는 그 사람들을 신처럼 생각했으며, 장교들 근처에 가기만 하면 반드시 두려운 생각이 들었지요. 장교들은 아주 굵직한 목소리를 가졌지만 아주 분명한 목소리로 적당했고, 단정하게 차리고 모습을 나타났지요. 그러면 항상 말 위에서도 투구에 아주 긴 깃털을 하고 있어서 저보다도 키가 더 커 보였지요. 만약 구두 뒷굽에서 찰까닥 하는 소리를 들으면 근처 어딘가에 장교가 있거나 누군가 부동자세로 서 있다는 걸 알았지요. 그들은 탄약을 재는 쇠 꼬챙이처럼 부동자세로 서 있곤 했지요. 저는 제 아버님께서 경례를 붙이는 걸 지켜봤는데, 무섭게 팔을 내리며 경례를 할 거라고 생각을 했지요.”
‘I really thought they were the gods and never got very close to them without being terrified out of my life. They had very loud voices, very proper, were very well turned out and always on horses, always taller than me, doing things with tremendous panache. If you heard the click of heels you knew the officer was somewhere near and somebody was standing to attention. They used to stand to attention like ramrods. I watched my father salute and I thought his arm would drop off with the ferocity of his salute.’
장교들 보다는 약간 더 먼 거리에 장교 부인들이 있었다. “항상 새하얀 꽃 같이 예뻤으며 잘 차려 입고서 말을 타도 결코 경박하고 빠르게 움직이지를 않았지요.”
‘Very pale and very beautiful and well-gowned and never moving very fast if they were on horses.’
여자들과 멀리 떨어져있다는 게 인도에 있던 사병들 생활에서 보면 가장 절망스러운 모습이었다. 이에 대해 에드 브라운 씨는 다음과 같이 말을 했다. “영국 여자들뿐 아니라 어떤 종류의 여자들한테서도 완전히 격리돼 있었지요. 제가 기숙사에 도착하고 보니 기혼자 숙소에는 군악대장이나 하사관 부인들이었던 세 명의 여자가 좀 떨어져서 살고 있었는데, 저는 거의 9년 동안 그 중 한 여자한테도 말을 못 붙여봤지요.”
‘Complete segregation, not only from British women but from any sort of woman. When I got home – apart from perhaps three women in the married quarters who were the wives of the bandmasters or band-sergeant – I hadn’t spoken to a woman for nearly nine years.’
이 걸 완전 격리상태라고 까지는 할 수 없지만, 이에 대해 이 에스 험프리 씨는 다음과 같이 말을 했다. “제 경우에는 여자라고 생긴 동물하고는 한 마디 말도 건네보지 못한 채 5 - 6년간이나 인도에 있었던 거 같아요. 우리는 부인네들을 받들어 모셔야 하는 경향이 있었는데, 이는 우리를 음흉하게 생각해서 만들어진 일종의 장벽이었지요. 자신을 주체하지 못하는 우리들을 상대로 군의관이 나서서 성병에 대해 한바탕 강의를 해댔지요. 그 사람은 “여러분들이 시골 논밭 진창 속으로 크리켓 투구를 하러 가면 비참한 결과밖에는 돌아올 게 없습니다.” 라고 말하면서, 욕정을 참을 수 없으면 차라리 우리가 잘 가는 갈보 집에 갈 것을 부탁했지요.”
‘I supposed I was in India for five or six years without speaking to a woman of any sort. We were inclined to place women on pedestals and this provided a sort of barrier against our licentious thoughts. Those of us who could not restrain ourselves were lectured by our unit medical officer regarding the dangers of the venereal disease. He would beg us, if we were unable to withstand our desires, to go to our brothels, saying that “if you go trundling off into the village fields it will bring you calamitous results.”’
비록 은밀하게 군 위안부들이 있었지만, 부대는 위안부 문제로 업자들과 신중하게 협의를 하기도 하였는데, 그 때까지도 로버트 부인이나 여러 교파의 교회 사람들이 인도에 그대로 건재해 있어서 아주 은밀한 태도로 협상을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대도시에는 홍등가가 있었는데, 봄베이에서는 그런 곳을 새장이라고 불렀고, 푸나 지방에서는 낟지 라고 불렀으며 아주 엄격히 통제를 하던 지역이었다. “만약 그런 지역에서 백인군인이 눈에 띄면, 경찰이 호각을 불고 교통이 모두 일시에 정지되면서 결국 군인은 잡히게 되었지요.”
‘If any white soldier was seen in the area whistles were blown by the police, all traffic came to a standstill and the soldier would, of course, be caught,’
쇼트 암<가운데 다리> 검사로 알려진 정기 의료검진 때, 트리 랫이라는 현지 매춘부와의 성 관계나 그래스 비디스라는 시골로 막 굴러다니던 여자와의 성 관계로 인한 성병을 검사해 주었는데 이런 검진 기회를 이용하려는 사람은 누구라도 치료를 받게 해 주었다. “그 사람은 심하게 꾸지람을 듣고, 급여도 정지됐으며, 정말로 겁나는 치료 쎈터인 13 병동으로 보내졌지요.”
‘He was given a severe ticking-off, had his pay stopped and was sent to Number 13 Block, which was the dreaded treatment centre.’
많은 군인들은 최후로 다섯 손가락 과부에 의지를 했다. 일반 사병들은 상황이 되면 결혼을 허가 받아야 했다. “부대 기록 보관소에서 가장 질투의 대상으로 본 서류는 결혼 거주증서로, 그것은 일반 군인들이 마누라를 갖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마누라가 거주할 거주지도 보증해 준다는 명부록 이었지요. 당연히 지위가 높은 준위들이 먼저 결혼거주 허가명부에 모두들 등재를 했지요. 그리고 나서 아래로 심사를 해 하사관 중에 50%, 상병은 25%, 일병은 10% 비율로 허가를 해줬지요.”
‘The most jealously watched list in the regimental archives was the married quarters roll, which permitted a soldier not only to have his wife with him but guaranteed a quarter for her. Naturally the warrant officers, being great men, were all on the married quarters roll and then it filtered down, fifty per cent of sergeants, twenty-five per cent of corporals, ten per cent of the privates.’
이렇게 결혼한 하사관들이 사는 동네를 헌팅클랜 이라고 했다. 하지만 어떤 사병들은 군 규정이나 항상 영국 군인들의 외로움을 덜어주려고 많이 다녔던 철도회관 댄스에서 만난 유라시안 여자들과의 결혼에 대한 일반인들의 좋지않은 시각과 편견에 맞서 싸웠다. “당신이 앵글로 인디언 여자와 춤출 때마다 제일 먼저 당신을 공격한 것은 훅하고 풍기는 마늘 냄새와 값싼 향수 냄새였지만, 그래도 예쁘게 보였고 어떤 경우엔 그 여자밖에 없는 것 같아서 죽어라고 들러 붙었지요.”
‘Whenever you were dancing with an Anglo-Indian girl the first thing she did was to assail you with a great puff of garlic and cheap perfume, but you stuck to her, because she was beautiful and in any case probably the only girl available.’
강제적으로 격리를 시키면 피치 못할 부작용이 생겼다. 강제적으로 하는 게 널리 퍼진 건 아니었지만 있기는 있었다. 그러나 이런 일에 습관이 되서 해로운 면보다 좋은 면이 더 많았고, 부대에서 금슬이 좋은 노부부에 대한 다른 군인들의 태도도 일반적으로 온후하고 동정적인 태도를 보였다.
스파이크 밀리간 씨는 절실하게도 성에 굶주린 젊은 사병 하나가 절간에 있던 인도인들이 신성시하던 암소 한 마리를 능욕했다는 사실을 다음과 같이 기록을 했다. “힌두인들은 이 짓에 크게 분개하여 이 사병을 기소했는데, 왕권을 대리하는 관리가 이 사건을 “피해를 당했다고 추정되는 날 원고께서는 들판에서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었지요.” 라고 서두를 떼면서 공판을 시작했다는데, 우습게도 이 사건은 그 암소가 이 전에 이런 일로 이미 한 번 소환된 적이 있던 소라는 점이 지적이 되서 그만 유야무야 사건이 기각되고 말았지요.”
‘The Hindus took great offence at this and he was prosecuted – and the officer who was representing the Crown opened the case by saying, “On the day of the allegedly offence my client was grazing contentedly in the field. ”’The case was apparently dismissed when it was pointed out that ‘the cow had been cited in a previous case.’
사실 대단히 많은 군인들이 말 못하는 짐승들을 상대로 애정놀이를 했다. “강아지나 고양이, 원숭이, 앵무새들을 부대에서 아주 많이 길렀는데, 약 20 마리의 개와 15 마리의 앵무새와 14 마리의 원숭이를 싣고 캠프로 가는 G.S 마차를 보는 건 정말 대단했어요.”
‘Puppies, kittens, monkeys, parrots grew in profusion in these regiments and to see a G.S. wagon going to camp with about 20 dogs, 15 parrots and 14 monkeys was really something.’
하사관 부인이었든 리 여사는 군인들마다 어쩔 수 없이 개들을 한 마리씩 갖고있었다고 다음과 같이 기억을 했다. “이따금 개들도 사열을 받아야 된다는 명령이 떨어져서, 사람들은 자기 개들을 모두 데리고 나와 사열을 받았는데, 그러자 그런 일이 있고 난 뒤에 한 사람 앞에 한 마리씩만 키우도록 허용을 했지요. 그래서 나머지 개들은 다 없애버려야 해서, 특등사수가 나머지 개들은 다 쏴 죽이기로 했지요. 그런데 한 사병이 어딘 가로 잠시 산보를 나갔다 돌아와 보니까 자기 애완견이 총에 맞아 죽게 될 거라는 사실을 알게 됐지요. 그러자 그 사람은 당직 사관에게 쫓아 올라가서 “저 개를 쏘는 놈이 누구든 그 놈을 제가 쏴 죽여 버리겠습니다. 당직 사관님!” 하고 말했지요. 그러자 당직 사관이 “도대체 개는 몇 마리나 가지고 있나?” 하고 묻자 “저거 뿐인데요” 하자 “아! 그래, 그렇다면 그 놈만은 열외를 시키게.” 라고 말 하더군요.”
‘Every now and then it would come in Army Orders that all dogs had got to be on parade. They’d parade all their dogs and then they were only allowed to keep one each. All the others had got to be got rid of and the chief marksman would shoot them. one soldier had been out for a walk somewhere and he came back to find his dog had been put up to be shot. So he went up to the officer in charge and said, “Anyone shoots that dog, I shoot them, sir.” The officer asked him how many dogs he had. “Only that one.” “Oh well, take him off.”’
부대가 새로운 주둔지로 이동을 할 때도 똑같은 규칙이 적용되었다. “부대 개들만 허용을 한다는 아주 엄격한 명령이 하달되어서, 군인들은 부대 개들하고만 아침행군을 떠났지요. 그런데 캠프에 도착하고 보니, 느닷없이 행렬 뒤로 하인들이 데리고 올라온 개, 고양이, 몽구스, 원숭이 등의 동물들로 전 연병장 부지가 꽉 들어차 있었지요.”
‘It was a strict order that only the regimental dogs would be allowed and they’d march off in the morning with only regimental dogs. But once you got to the other camp then you’d suddenly find dogs, cats, mongoose, monkeys – the whole lot was there, brought up by the bearers in the rear of the column.’
인도에 있던 영국 군인들에게 시간은 한없이 더디게 흘러갔다. “그 당시엔 사는 게 너무 고됐어요. 그래서 아주 사소한 일도 큰 기쁨이 되고는 했지요. 그런 기쁨이란 게 뭐 행군에서 열외가 될 수 있다거나, 몸이 안 좋아서 3일간 병가를 내 근무 면제가 될 수 있다거나, 몇 년 동안 보지 못했던 사람들을 만나거나 하는 것들이었지요.”
‘It was too hard a life in those days and the slightest thing used to stand out as a delight. A delight was being able to get off parade, being able to go sick and say that you’d got three days excused duties, or meeting up with someone you hadn’t seen for years.’
그러나 공통의 관심사는 사병들을 단결시켜 붙어 다니게 만들었다. 주기적으로 카드 놀이도 했고, 수도 없이 시장에서 1000 개피에 3 애나를 쳐서 바꿔주는 담배 쿠폰을 걸고 주사위 놀이나 카드 놀이를 하면서 촛불을 켜 놓고 새벽 2 - 3시까지 앉아 있었다. 이따금 손목이나 발목에 종을 달고 여자 무용단이나 중국인 곡예사, 마술쟁이, 점쟁이, 뱀 부리는 사람들이 캠프로 찾아왔다. “한가지 특이하게 보이던 사람은 연필보다 가는 뱀을 코로 넣었다 입으로 빼내던 사람이 있었지요.”
‘One in particular had a pencil-thin snake which he put through his nose and drew out through his mouth.’
일요일도 군인들 시점에서 보면 교회 열병식 때문에 모든 일을 다 망쳐버린 재수없는 날이었다. “전적으로 불필요한 의식으로 단지 현지인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목적 뿐이었어요.”
‘Totally unnecessary, really a matter of showing-off to the native population.’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일들을 아주 중요한 행사로 생각하였는데, 이에 대해 이렌느 에드워드 여사는 페샤와르 지방에 있을 때 보았던 광경을 다음과 같이 말해 주었다. “군악대가 선두에 서서 숲이 있는 산책 길을 행군해 갈 때를 보던 광경이었지요. 태양은 언제나 빛나고 있었고, 양 옆엔 꽃들이 만개한 가운데 나무들이 서 있었지요. 현지인 애들은 한데 모여서 흥겹게 웃고 떠들었는데, 우리 앵글로 인디언들은 대영제국의 일부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긍지로 가슴이 뿌듯했지요.”
‘It was a sight to be seen when the Army marched down the Mall, the band leading; the sun always shining, the trees on either side all in flower. The chokra boys flocked and cheered and we Anglo-Indians swelled with pride because we were part of the British.’
일요 의식에는 무기를 들고 교회로 가는 일도 들어가 있었다. 이에 대해 에드 데이비스 씨는 다음과 같이 설명을 했다. “심지어 제가 있을 때도 총과 단도, 20발의 탄약과 펄럭이는 국기를 들고 교회로 가야 했는데, 이런 구경거리를 현지인들은 다들 나와서 지켜보았어요. 군인들은 총과 허리에 차는 무기를 갖고 일렬 종대로 교회에 들어가서는 특별히 총을 둘 목적으로 만들어진 홈에 총을 놓아야 했지요. 설교가 길어지면 듣기가 지겨워, 처음엔 총을 부드럽게 달그락 대다가 나중엔 심하게 덜컥대는 소리를 고의적으로 냈지요. 전 장교들과 그 부인들이 와서 한 번씩 둘러보고는 했는데, 만약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사람을 죽일 수 있다면, 그 여자들 때문에 우린 모두 다 그 자리에서 죽었을지도 모를 정도로 죽여줬지요.”
‘We still had to go to church with rifle and bayonet and twenty rounds of ammunition, with flags flying and all the natives looking on. The troops used to file into church with their sidearms and rifle and we had to place them into slots specially made for the purpose. When a long address was given and the troops got bored we used to rattle our rifles, very soft at first. And the more the parson carried on the more we rattled them. All the officers and the officers’ wives used to look around, and if looks could kill we’d have died on the spot.’
이따금 일요일에 무기와 탄약을 준비해 갖고 다니다 잘못하면 전혀 예상치 못한 결과를 초래하기도 했다. “교회행군 도중에 일어난 두 가지 비극적인 사건이 기억이 나네요. 제가 생각하기로는 풀이 죽어 보이던 친구들이 있었지요. 몸이 좋지 않다고 말해서 “저 친구들 좀 봐주실 수 있다면 좋겠네요.” 하고 간청을 하게 되었지요. 그래서 이 친구들이 모두 바라크 방으로 돌아가게 됐는데, 거기서 자기들 머리를 총으로 쏴 버렸지요.”
‘I remember two tragedies that occurred during church parades. The chaps were very low in spirit, I suppose. They’d say they were not very well and “please, could they be excused,” and they’d go back to the barrack room and blow their heads off.’
인도에 있던 병사들에게 자살이란 결코 멀리 동떨어진 다른 나라 사람들 얘기가 아니었다. “위와 같은 총으로 인한 두 건의 자살을 빼놓고도, 이 주 전에 밖에 나갔다 온 한 젊은 친구가 목을 매 죽었고, 또 한 놈은 겨우 17살이었는데 하사관들이 자신을 괴롭힌다고 생각해서는, 미쳐 가지고, 자기 머리다 대고 총을 쏴 죽었지요.”
‘Besides these two shootings we had a young boy who’d only been out two weeks before he hanged himself, and another lad, only seventeen, who considered himself tormented by the NCOs and drove himself insane and blew his brains out.’
이따금 탈영도 있었으나 거의 성공한 적은 없었고, 사병들이 미쳐 날뛰면서 물건을 닥치는 대로 부숴버리는 정신이상 증세만큼 그다지 심하지는 않은 둘랠리 탭 <봄베이 근처 데올라리 보충대에서 파생된 말로 머리가 돈, 미친의 뜻임> 이라고 하는 새로운 종류의 정신병이 생겼다. 이들은 이따금 일등 하사관에게 “너 이 자식 밖으로 나오면 바로 총으로 쏴 죽인다.” 라고 밖에 서서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대곤 했다.
‘I want to bloody well shoot you the moment you come out.’
그런데도 영국은 인도로 오라는 유혹의 손짓을 결코 멈추지 않았다. 에드 데이비스 씨는 다음과 같이 말을 했다. “우리는 가엾게도 영국이 지구상에서 제일 좋은 곳으로 생각했어요. 항상 고향 얘기에 젖어있다가 편지가 왔다는 신호가 들리면 그 때가 최고로 좋은 순간이었지요. 우리는 그 것을 별 볼일 없는 루와 리즈한테서 온 편지라고 했지만, 사실 우리에겐 아주 소중한 것이었지요. 방갈로를 책임지고 있던 상등병이 “야! 제군들 여기 편지다. 다들 나와라!” 하고 외치면 쏜살같이 몰려들어갔는데, 그러면 “데이비스, 스미스, 죤스, 브라운, 그리인…...” 하면서 호명을 했지요. 물론 어떤 놈들은 한 통도 못 받는 경우가 있었는데, 그러면 우리는 “야! 힘내. 다음 번엔 더 좋은 소식이 있을 거야.” 하고 달랬지요.”
‘We thought England was the greatest place on earth. We were always talking about home and it was a glorious moment when the mail call was sounded. We used to call it “Letters from Lousy Lou, Letters from Lousy Liz,” but it meant everything to everybody. The corporal in charge of the bungalow used to shout out, “Come on! Mail up, boys!” and we used to rush in and he would shout out, “Davies, Smith, Jones, Brown, Green.” Some chaps would never have any, of course, and we’d say, “Cheer up. Better luck next time.”’
부대에 있던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다 편지 오기를 고대하고 있었지만, 아마도 군인 부인들보다 편지를 더 고대한 사람들은 없었다. 이에 대해 우드 여사는 다음과 같이 말을 했다. “교회행군이 끝나고 난 일요일 오전에 우리는 잔디밭 나무 아래서 만났지요. 군악대 연주도 있어서, 기분이 퍽 상쾌했지요. 그러다 12시쯤 되서 집에서 편지가 도착하면 모두들 사라졌어요. 방갈로 뒤로 달려가보면 혹 영국의 해변가에서 네 살 때 찍은 사진과 함께 그토록 고대하던 집에서 부친 편지가 와있었지요. 아무튼 편지 오는 날 때문에 살았을 정도였지요.”
‘On Sunday morning after church parade we met under the trees on the lawn, the band played and it was very pleasant. Then at twelve o’clock the mail from home arrived and everybody would vanish. You would race back to your bungalow and there would be those longed-for letters from home, possibly photographs of a four-year-old on an English beach. You lived for that letter day.’
군 복무가 끝날 때가 가까워져 오면 병사들은 완전히 불쌍한 몰골을 하였다. 장교들은 2년마다 6 개월씩 영국에 갈 수 있었지만, 사병들은 그런 선택권이 전혀 없었다. “사병들은 이 한 가지 사실 말고도 그 어떤 것도 해볼 시간을 통 갖지 못해서, 하루에도 수십 번 시도 때도 없이 마음 속에 여러 가지 생각이 일어나곤 했지요. 사소한 문제가 일어날 때마다, 사병들은 제대 말년에 빗대어 “롤 온 더 보트!, 롤 온 더 보트!” 라는 말을 계속하면서 문제에 대처하곤 했지요. 선생님이라도 이 소리는 아침부터 밤까지 들었을 거예요. 인도에서 그 구절 만큼은 다른 어느 구절보다 더 힘차고 격렬하게 아주 빈번하게 사용됐던 말은 없었어요.”
‘They’d got no time for anything but this one fact, and it used to recur every minute of the day. No matter what little problem arose, they would meet it with, “Roll on the boat, roll on the boat.” You would hear this from morning till night. That one phrase was used in India more frequently, with more force and vehemence than any other.’
또 하나 너무 과도하게 많이 사용한 말은 “롤 온 마이 쎄븐 앤드 파이브” 라는 말이었는데, 왜냐하면 사병들의 군복무 기간은 인종이 섞이기 전에는 7년이었는데, 항상 5년을 인도에서 복무를 해야 할 처지가 됐기 때문이었다. 마침내 영국으로 돌아갈 제대자 명단을 호명할 시간이 찾아왔다. “제대 군인들은 광장에 모여서 사열식을 하고 전 부대가 밖으로 나와서 맥주와 위스키와 무엇이든 갖고 와서 호위하며 배웅하는 환송식을 해 주었지요.”
‘The draft paraded on the square and the whole regiment turned out and escorted us off, with beer and whisky and what have you.’
군악대는 제대 군인 귀향가를 연주해 주었고, 제대 군인들은 철도 역까지 고별행진을 했다. “만약 선생님이 인도 처녀와 같이 가게 되면, 모두 모여서 떠나가는 선생님에게 “또라이 주인님” 이라는 뜻의 “오 둘랠리 싸히브” 라는 민요를 다음과 같이 불러주었지요.”
‘If you used to go with Indian girls they’d all congregate as you were marching away and sing a little ditty called “Oh doolally sahib”, which means a mad gentleman. They’d sing.’

오 또라이 주인님
당신이 내 딸을 데리고 논지 벌써 십오 년
이제는 영국에 있는 고향으로 돌아가나요. 주인님.
당신을 데려다 줄 보트가 뒤집혀
물 바닥으로 갈아 앉게 해주소,
오 또라이 주인님!

다 같이 이렇게 노래를 부르고 나서는 활짝 웃음을 지으며 제대 군인들은 기차에 올랐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