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일과 인도 이야기

2007. 6. 9. 17:23일반/역사·영어·컴퓨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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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일과
Day’s work

“아무 때나 봉사, 봉사, 봉사였어요.”
‘It was service, service, service every time.’
이 말은 앵글로 인디언들의 간절한 기도에 대한 신의 응답 같이 널리 퍼져나간 말이었다. 심지어 군이나 정부기관이 아닌 곳에서 일하는 사람들도 근무기간을 언급할 때 근무한다는 뜻으로 봉사라는 말을 썼고, 그런 말을 사용하여 고용주와 고용계약을 했다. 이 말은 인도에서 출세한 사람들 모두가 무의식적으로 이어받고 계승한 태도였다. “우리는 우리를 아주 성공한 민족의 일원들로 알고 있었지요. 우리는 세계연맹에서도 조그만 섬나라 입장으로는 대단히 잘 해온 국가에 속해 있었으며, 또한 우리가 성공한 만큼 현저히 뒤떨어진 나라에서 일을 하고 있다고 알고 있었지요. 그래서 그런 생각 때문에 저는 – 노골적으로 그러지는 않았지만 – 우리가 좀 더 우월한 민족이라고 느끼던 기분이 생겨났지요. ”
‘We realized that we were members of a very successful race. We belonged to a country that, in the world league, had done exceedingly well for a small island. And we also realized that we were working in a country which was as pre-eminently unsuccessful as we were successful. And I suppose that that produced a frame of mind in which we tacitly – not explicitly – felt ourselves to be rather superior people.’
사무실, 차 농장, 법원 그 어디서든 어린 나이에 권한을 갖게 됨으로써 그 우월성은 더욱 돋보였고, 또 그 우월성에 대하여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들도 없었다. 19살에 경찰간부가 된 죠지 캐롤 씨는 자기 구역에 수백 명의 경찰들을 거느리는 권위를 갖고있었다. “제 권력을 시험해 본다는 마음이 저한테는 들지 않았어요. 왜냐하면 영국인으로써 모든 인도인 부하들을 지휘할 권한을 갖고있어야 한다는 건 아주 당연한 일 같았거든요.”
‘The question of exercising my power never arose in my mind because it seemed so natural that, as an Englishman, I should have power over all my Indian subordinates.’
라즈들의 명성 때문에 인도에 살던 영국인 모두의 위상은 한층 높아졌으며, 권력을 갖고있던 사람들은 물론이고 박스 왈라 <잡상인> 계층이나 사병들도 역시 마찬가지로 동일한 대우를 받았다. 존경심과 복종심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좋은 점들이 꽤 있었지만, 반면 윗사람으로써 밑에 있는 사람들을 다스려야 하는 일에는 지각 있는 책임의식이 필요하기도 했다. 비하르 지방의 현지인 제민다르 <지주>의 대리인으로 일했던 지오프리 알렌 씨는 그 지역 사람들 모두가 법에 관한 문제는 모두 자신에게 의지하려고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선생님은 가져온 사건들을 심리해 달라는 요청을 항상 받았지요. 소작인들은 멀리 떨어진 민사법정에 가기보다는 선생님께 와서 사건을 해결하는 게 훨씬 더 싸게 먹힌다는 생각들을 했지요.”
‘You were always being asked to try cases which were brought before you. It was much cheaper for tenants to come to you to decide cases than to go many miles away to the civil courts.’
인도인들 입장에서 보면 그런 권위는 마-밥 <대부 대모> 원칙에 근거를 둔 것으로, 차 농장에 있던 케네스 워런 씨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을 했다. “사건 해결을 부탁하는 노동자들이 당신에게 와서 맨 먼저 “하즈르 – <존경하는 나리님>.” 하고 말한 뒤, 저의 대부 대모이신 마-밥으로 시작하여, 제가 이러저러한 문제가 있는데 해결을 해주시기 바랍니다 하는 게 통례였으며, 다른 청도 그렇게 했지요.”
‘It was customary for a member of the labour force who had a request to make to come to you and first of all address you as Hazur – Your Honour, and then ma-bap – you are my father and my mother, I have this, that and the other request to make.’
이렇게 뒤를 돌봐주는 공개적인 대부사상 때문에 인도인이 주도하던 상황에서 권위를 수월하게 이끌어낼 수 있었고, 한편은 사립학교 교장이 자기 밑에 있는 사람들을 돌봐주던 사립학교 기풍으로 더 그런 면이 강조되고 보강되었다. “제가 매니저로 있던 농장에 눈병이 돌아서, 일하던 사람 중 몇 사람이 치료를 받으러 병원에 가야 했지요. 그들 중 한 남자는 3일 동안 병원에 있다 치료를 받고 완쾌가 됐지요. 그런데 다음 날 이른 아침의 두르바 <군중의 아침 접견>에서 이 남자의 한 여자 애가 눈이 짓 눌어붙어 가지고 병원에 실려 갔다는 소리를 들었지요. 나중에 보니 그 여자 애 눈병은 안염으로 밝혀졌지요. 그런데 자신도 병원에서 완쾌가 됐음에도 불구하고, 이 여자 애 아버지는 자기가 치료법을 더 잘 안다고 주접을 떨더니, 자기가 아는 대로 정 반대의 치료법인 어떤 열대식물의 줄기와 잎을 섞어서 짓이겨 가지고는 딸 애 눈에다 붙여서, 아주 더 눈을 못쓰게 만들어 버렸지요. 그 여자 애는 14 살쯤 된 아주 깜찍하게 생긴 애였는데, 제가 병원으로 들어가자, 제 목소리를 듣고는 무릎을 끓고서 제 다리를 붙들고 늘어지면서 “나리님, 나리님께서 제 눈을 고칠 수 있다는 거 잘 알아요. 마음만 먹으면 뭐든지 할 수 있잖아요.” 하면서 병을 고쳐달라고 저에게 애원을 했지요. 그 건 저에게 참으로 비통하고 안타까운 경험이었지요. 다음 날 두르바 <아침 회의>를 열고서, 그의 친족들 전부와 함께 그 아버지를 사무실로 데리고 오라고 했지요. 난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그들에게 얘기하고, 얼마나 그 게 한심한 짓인지 말을 하고는, 어떻게 할 건지 물어보았지요. 그러자 그 친족들은 서로 머리를 맞대고 한참 토론을 하더니, 제일 어른인 듯한 사람이 돌아서서 말하기를 “나리님, 나리님께서 그 작자를 때려주는 게 적절하고 옳은 방법이라고 봅니다.” 라고 말해서, 저는 “좋다. 그게 너희들 결정이라면, 너희들 소원대로 해주는 수 밖에 별 도리가 없구먼.” 이라고 대답을 하고는 베란다에서 내려와서, 이 남자에게 다가가 한 대 갈겨주었지요. 그런데 너무 세게 갈기는 바람에 제 오른손이 멍이 들 정도로 타박상을 입어서 그 뒤로 24시간 동안 멜빵 붕대를 감고 다녀야 했지요.”
‘We had an epidemic of ophthalmia in the garden where I was manager and a number of the labour had to come to hospital for treatment, among them a man who was three days in hospital under treatment and was cured. The next thing I heard at my early morning durbar was that this man’s child had been taken to the hospital with her eyes burnt out. She had developed ophthalmia and her father, although he himself had been cured in the hospital, said he knew better and that he knew of a jungle cure, a mixture of certain herbs and jungle plants, which he mashed up and plastered on his daughter’s eyes and burnt them out. She was a child of about fourteen, a charming little girl, and when I came into the hospital she heard my voice and fell on to her knees and held on to my legs and implored me to cure her saying, ‘Sahib, I know you can cure me. You can do anything if you wish to.’ It was a most distressing and terrible experience for me. I held the durbar the next morning. I had the father brought up to my office together with the whole of his clan. I told them what had happened and how disgraceful it was and what did they, the clan, suggest should be done. With one accord they said he should be beaten. They put their heads together and discussed it and then the head man turned to me and said, ‘Sahib, we think it is right and proper that you should beat him and not us.’ So I said, “Well, if that’s your decision all I can do is carry out your wish.’ I came down from the verandah and I went up to this fellow and I hit him. I hit him so hard that I bruised my right hand and I had to have it in a sling for twenty-four hours afterwards.’
책임감은 민간 행정부에서 제일 강했다. 그 힘에 대해 로사문드 로렌스 여사는 다음과 같이 촌평을 했다. “제 남편은 웰링턴 공작 같이 항상 의무에 대한 말만 했지요. 남편 주변 사람들 중 로렌스 씨 일가는 아주 종교적이었고, 자신들이 생각하는 일에 철저히 몰두하는 것이 인도에 대해 자신들이 해야 할 의무라고 생각들을 했지요.”
‘My husband was like the Duke of Wellington, always talking about duty. My husband’s people, the Lawrences, were very religious and they were absolutely immersed in what they felt was their duty to India.’
그러나 헨리 로렌스 씨 경우 그런 의무감에 대한 표현은 샤우크 <편집증적인 흥미나 취미>의 형태로 나타났다. “제 남편은 온 정신을 소위 스크루 댐 사업에만 완전히 팔려있던 사람이었지요. 남편은 의무감에만 사로잡혀서, 일단의 그런 사람들이 있다 보니 어떻게 하면 이들 모두가 의무감을 갖고 살아갈 것인지 등으로 머리가 복잡한 사람이었어요. 아무튼 제 남편은 그런 부류의 사람들 중 오래 전부터 샤우크를 시작했던 유일한 사람이었지요.”
‘My husband was absolutely heart and soul wrapped up in what he called the Sukkur Barrage. He was obsessed by it, by the amount of people there were and how they were all going to be fed by it, but he was only one of a chain of people, who had started it long before.’
총독부가 시행한 훈령에 관한 의무조항을 보면 어떤 관리든 관리는 자신의 집이 대저택이라고 결코 말해서는 안 된다고 규정을 해서, 휴가를 빼놓고는 완전히 자유로울 때가 결코 있을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토요일 오후나 일요일이면 어떤 사람이 선생님을 보려고 기다리고 있는 걸 알았지요, 왜냐하면 사람들은 그 시간을 선생님이 제일 한가한 때로 알고있었기 때문에 그랬지요.”
‘You would find somebody waiting to see you on a Saturday evening or a Sunday, because he knew that that was the time you were free.’
가장 비천한 탄원자의 말을 더 경청하는 자세는 무굴시대의 전통으로 영국인들이 계승하고 유지하고 받들던 태도였다. 가장 중요한 의사 표시는 지방관리나 주재관의 집 베란다에 아침마다 일찍부터 서서 기다리고 있던 물라꾸아티스 <탄원자들>의 줄에서 나왔다.
이에 대해 펜더럴 문 씨는 다음과 같이 설명을 했다. “물라꾸아티스 는 두 계급으로 나뉘었지요. 원래의 물라꾸아티는 상당한 교육과 지위를 갖고있던 사람들로 명예 치안판사, 시.국장, 관록 있는 변호사와 마을의 족장이나 지주들로 안으로 들어와서는 인도 말로 살람 와스티 하고 경의를 표하던 사람들이었지요. 일반적으로 이 사람들에겐 저의가 있었어요. 나는 그들의 건강이 어떠냐고 물어본 뒤 자리에 앉기를 권하고는 사람들이 할 수 있는 한 빨리 그리고 공손히 요점을 끌어내도록, 날씨나 작황 또는 최근의 뉴스를 화제 삼아 몇 마디 말을 걸었지요. 그리고 두 번째 그룹으로 페리아디스 라고 불리던 제가 데리고 있던 차프라시 <사무실 하인>들이 있었는데, 페리아디스 라는 의미는 비천한 탄원자들이라는 뜻으로 이들은 순전히 불만들만 갖고 들어왔지요.”
‘Mulaquatis were divided into two classes. The mulaquati proper was a person of some education and standing, an honourary magistrate, a municipal commissioner, a leading lawyer, the headman of a group of villages or a landowner, who’d come in to salaam-wasti, to say salaam to you. Generally they had some ulterior motive. I’d ask about their health, sit them down and have a general chat about the weather or the crops or the latest news, trying to bring them to the point as quickly and politely as one could. Then there was the second group, what my chaprassi called feriadis, which means “the humble petitioners”, who simply came with grievances.’
면담의 성공 여부는 현지어와 관습을 얼마나 유창하게 잘 하느냐에 많이 달려있었다. 이에 대해 올라프 카로 씨는 다음과 같이 설명을 했다. “신사분에게 말을 거는 데는 어떻게 하면 제대로 된 존칭을 사용하느냐에 신경을 써야만 했어요. 그런 사람을 부를 땐 “유어 어너” 라는 말을 붙여 “친히 이런 곳에 어인 일이신지요?” 하고 경칭을 써야만 했고, 언제 앉고 언제 일어나야 하는지에 대한 모든 것을 다 알고 있어야 했으며, 올바른 방법으로 아주 정성스레 악수를 나누면서, 동양적 행동양식을 예의 지켜야 했지요. 만약 당신이 그 용무에 적절한 진부한 시구를 인용할 수 있다면 당신이 원하는 걸 아마 쉽게 얻게 될 수도 있었어요. 그 언어가 우루두어나 펀잡어든 아니면 파쉬투어 이든 본 바닥의 간결한 속담들이 있었지요. 한 번은 누군가 “참을성이 아주 많으시군요.” 하길래 파쉬투어 속담에 “인내는 쓰다 그러나 그 열매는 달다.” 라는 말이 생각나 얼른 그 말을 대답해 주었지요.”
‘You had to be very careful in using the right honourifics in speaking to a gentleman. You had to call him Your Honour, ‘Your Honour has brought himself to this place,’ and you had to know all about ‘ijazat o barkhast’, when to sit down and when to get up, and observe the oriental formalities of behaviour, shaking him by the hand and in the right way and with the right amount of cordiality. If you could quote a hackneyed verse which was appropriate to the occasion you’d probably get what you wanted. Whether it was Urdu or Punjabi or Pashtu, particularly, they had some very racy, meaty proverbs. I remember once someone said, ‘You’re very patient,’ and I said in answer, ‘Well, I remember a Pashtu proverb, Patience is Bitter, but the fruit of it is sweet.’
동시에 면담은 위험성도 내포하고 있었다. 이에 대해 레이몬드 버네드 씨는 다음과 같이 자신의 의견을 말해주었다. “사람들은 항상 아주 조심들을 했지요. 이따금 사람들은 그저 와서는 남을 헐뜯기나 하고, 자신들의 반대파들에 대한 흠을 은근히 내 비추기만 했지요. 또한 많은 사람들은 자기들이 여기 왔던 걸 남이 알아주기를 바래서 오기도 했는데, 돌아가서는 지방 치안판사를 자기도 보았노라고 말을 했지요. 아첨들이 대단해서 상당히 곤혹스러웠지만 이내 익숙해졌어요. 하지만 그렇게 하는 게 그 나라의 전통이라는 걸 인식해야 했어요. 그래 선생님은 태양이고 신이고 뭐 그랬지요. “가난한 이들의 보호자, 옹호자” 라는 말은 판에 박은 상투적인 표현이었지만, 여기서는 그저 나리 라고 말하는 것과 같은 의미였어요. 저는 그런 말투를 싫어했지만 그렇다고 그런 말에 그다지 신경을 쓰지는 않았어요.”
‘One was always very wary. Sometimes people came merely to indulge in backbiting and to insinuate against their enemies. Many people came because others would notice that they had been, and they could go back and say that they had seen the District magistrate. I suffered a great deal of flattery, which I had to get accustomed to. You had to recognize that it was the tradition of the country. You were the God, the sun and so forth. “Defender, preserver of the poor,” was a stock expression, but it was like saying “sir”. I disliked that sort of thing but never paid very much attention to it.’
라즈들의 통치 제도는 무굴제국 시대의 통치에 그 기원을 두고 있었는데, 원래는 지방 토지세 징수에 근거를 둔 제도였다. 그러나 이 것은 단지 세수관이나 지방장관이 하는 일 중 일부분이었고, 이 사람들은 역시 공개된 장소에서 임시방편의 형태로 또는 기회의 전당이라고 부르던 법원에서 정의를 책임지는 일을 했다.
많은 계약 관리들은 법원에서의 일이 명백한 위증으로 점철된 한심하고 지루한 일이며, 대부분의 피의자들은 법원을 거짓과 진실성이 전혀 없는 백해무익한 고소 사건들이 있는 곳으로 생각들을 하였다. 심지어 어떤 이들은 영국의 법 체계는 전적으로 인도에는 맞지 않으며 완전히 잘못 왜곡돼 있다고 생각들을 하였다.
법의 신성함도 대부분의 인도인들에게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퍼시발 그리피스 씨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단언을 했다. “꼭 게임 같았지요. 게임에 이기려면 증인이 있어야 했어요. 그 나라 사람들은 아주 가난해서, 선생님이 원하는 대로 와서 기꺼이 위증해 줄 사람들을 구하는 데 아주 많은 돈을 쓸 필요가 없었지요. 사실 벵갈어로 “테틀 가찌 샥크시” 라는 말이 있었는데, 이 말은 태머린드 라는 상록수 나무를 가리키는 소리였지요. 왜냐하면 법정 밖에는 항상 태머린드 나무가 있었고, 위증자들은 법정에 들어가기 전 항상 그 나무 아래에서 어떻게 어떻게 하라는 코치들을 받았기 때문이었지요.”
‘It was really rather a game and in order to win the game you had to get witnesses. As the people of the country were pretty poor, you didn’t have to pay a very great deal to get a man to come and give evidence the way that you wanted. In fact, there used to be a Bengali saying, the tetul gacch shakshi, which means the tamarind-tree witness, because there was always a tamarind tree outside the court and the witnesses would be gathered and coached there under the tamarind tree before they came into court.’
지방관리들 앞에 올라온 대부분의 송사건은 재산문제 때문에 서로 다투다 일어난 폭행사건들이 대부분이었다. “가장 흔한 얘기는 누구네 사탕 밭에 소가 어슬렁거리며 짓밟고 다녀서 말다툼이 일어나게 되자, 언쟁이 일어났고, 누군가가 몽둥이를 갖고 와서, 누군가의 머리를 내리쳤다는 얘기들이었어요.”
‘The usual kind of story was that a buffalo had wandered into somebody’s sugar-cane and a quarrel had arisen and someone had taken a stick and hit somebody over the head.’
그래서 신드 지방에서는 모든 사건은 지나<여자>, 자르<금>, 자민<토지> 3지 때문에 일어난다는 소리가 있었고, 다소는 국기처럼 살인이나 소 도둑질 같은 형태로 나타나 지대한 관심을 끌기도 했다.
마드라스의 지방 재판소에서 특별 판사로 재임하던 크리스토퍼 마스터맨 씨는 그 당시 20 대 중반에 있던 한 사내에게 사형선고를 내리고 있었다. “피고는 계속해서 자기 유죄를 인정하는 말을 하더군요. 그래서 “당신이 그 사람을 죽였나요?” 그러자 “네, 제가 죽였어요.” “그러면 죽일 의도가 있었어요?” 하고 묻자 “그럼. 물론이지요. 그 작자가 제 야자나무를 훔치고 있었는데요?” “그럼 그 사람도 무기를 지니고 있었나요?” “아니요. 무기는 없었어요.” “그러면 왜 죽였지요?” “제 나무에서 물건을 훔치니까 죽였지요.” 라고 말을 했으니, 선생님도 그런 대답에는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었지요.”
‘The accused would invariably plead guilty. You asked him, “Did you kill this man?” He said, “Yes.” “Did you mean to kill him?” “Yes, of course. He was stealing from my palmyra tree.” Then you said, “Well, was he armed?” “Oh, no, he wasn’t armed.” “Then why did you kill him?” “I killed him because he was stealing from my palmyra tree,” and you couldn’t get away from it.’
나중에 그 사람에 대한 사형판결은 항상 종전에 하던 대로 감형이 되었고, 그 사람은 감옥으로 보내진 뒤 최종적으로 대양 한 가운데 있는 안다만 섬 <갠지스 강 하구 벵갈 만에 있음>으로 이송되었다.
인도 법원 숫자는 재판관 의석보다 더 많았다. 이에 대해 레이몬드 버네드 씨는 다음과 같이 말을 했다. “인도인에게 법정은 우리네에겐 영화관과 똑같은 곳이었어요. 인도인들은 모든 사건에 정신이 팔려와 가지고는, 대부분의 사건에 조용히 귀를 기울였지요. 저는 무더운 날씨에는 카키 셔츠와 짧은 바지를 입고 법정으로 갔지요. 어떤 수사 경찰관들은 제복에다 옷을 너무 껴입어 불쾌하게 땀을 몹시 흘렸지요. 변호사들은 가운을 입고 있었지만 모두들 격식을 차리지 않은 평상복 차림이었지요. 제가 있을 때는 천장에 선풍기가 있어서 아주 무지하게 더운 날만 빼고는 그런대로 견딜 만 했지요. 그러나 복잡한 사건에 몇 시간이고 앉아있다 보면 좀 짜증이 났지요.”
‘The courts were to the Indians the equivalent of the cinema to us. They were fascinated by it all, and they listened quietly in most cases. In the hot weather I’d go to the court in khaki shirt and shorts. Some of the police prosecuting officers would be rather overdressed in their uniforms and perspiring very unpleasantly; the lawyers would have their gowns but it was all pretty informal. In my day we had overhead fans which made it possible – except on bad days – to survive. But tempers could be rather short after sitting several hours on a difficult case.’
모든 증거를 듣고 난 후 지법 판사는 진실을 뒷받침하는 판결문을 갖고 대답하게 돼있었다. 이 판결문 이 전에 법정에 제출한 쿠츠 챠할이라는 원래의 상황이 적힌 고소장이 먼저 제시돼 있어야 했고, 필요하면 법의 판례를 넘어서 중재방법에 호소하기도 하였다. 이에 대해 펜더럴 문 씨는 다음과 같이 시인을 했다. “저는 의심스러우면 망설이지 않고 곧 바로 경찰 수사관이나 그 지역의 책임자에게 그 사건의 진실에 대하여 이들은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에 대하여 추가로 적법한 심리를 요구했지요. 저는 판결을 내리는 데 있어서 매 번 그런 것은 아니었지만 이러한 추가 심문들을 고려하고는 했지요.”
‘When I was in doubt I did not hesitate to make extra-judicial enquiries from the police investigating officer or from other responsible people in the locality as to what they thought the truth of the case was – and I used to take into consideration these extra-judicial opinions in forming my judgement, which was quite irregular.’
너무 지나치게 남용되던 법률제도를 시정해 보려는 노력을 그 사람 혼자만 한 것은 아니었다. 이에 대해 필립 메이슨 씨도 다음과 같이 자신의 입장을 얘기했다. “저도 역시 가장 중재적인 성격의 룰을 만들었지요. 저는 다른 편이 불렀던 것보다 더 많은 증인들을 부르는 짓은 허용하지 않겠다고 말했으며, 또한 어느 누구도 중요한 결정적 증거보다 더 길고 오래 반대심문을 할 수 없다고 못 박았지요. 그런 말은 고압적이며 독단적인 말이었지만, 사람들은 대개 확실해서 의심이 가지않는 옳은 일들을 하고 있었지요.”
‘I also made rules of the most arbitrary nature. I said that I wouldn’t allow anyone to call more witnesses than the other side had called. I also said that nobody could cross-examine for longer than the main evidence. It was high-handed and arbitrary but one was so certain that one was doing the right thing that one didn’t have any doubts.’
법정에서 피할 수 없는 문제 중에는 편견 문제가 있었는데, 소작료를 징수해 간 좀 떨어진 곳에 살던 어떤 사람에 대한 것으로 실제로 쟁기질을 한 남자인 경작자 편을 들어주던 경우를 보면 확실히 편견이란 게 있긴 있었다. 그래서 총독부에 보면 전통적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보호하는 파와 부자를 보호하는 파로 갈라져 있었다.
필립 메이슨 씨는 너무 지나치게 해먹어서 사람들의 미움을 사 자기 마을로 감히 들어가지 못하던 한 고리대금업자 사건을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이 사람이 저한테 와서는 마을 사람들이 들어오지 못하게 하니 마을 사람들을 상대로 통행 금지령을 내려 달라고 요청을 했지요. 그래서 제가 “당신이 그 사람들에게 뭔가 화가 날만한 일을 한 게 틀림없으니, 당신을 상대로 통행 금지령을 내리겠다.” 라고 말했지요. 저도 그게 좀 공정치 못한 일이었다고 인정은 하지만, 그런 걸 보면 그 당시 그 사건 처리는 아마도 저의 사회적인 편견을 보여준 일면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드네요.”
‘He came and asked me to pass orders against all the villagers because they wouldn’t let him into his village and I said, “I’m going to pass orders against you, because you must have done something to provoke them.” It was rather unjust, I must admit, but it showed my social bias at the time.’
인도에서 법과 사회 발전에 다 같이 중요한 장애가 되는 것은 부정부패였다. 이 나라의 관습인 다스투르 라는 제도는 무굴제국 시대부터 세속 된 것으로, 죤 컴패니 <동인도 회사의 별칭> 시절에 영국인들이 완전히 받아들여 정착된 제도였지만, 그 뒤 이런 일에 지독하게 굴던 빅토리아 인들의 극성에 또 한 번 더 시련을 겪어야 했다. 명예, 예절, 진실과 귀감이라는 말들은 빅토리아 시절의 윤리관으로 인도에서는 상당한 정도까지 지속적으로 실천이 된 말들이었다.
라즈들의 도덕관에 대해 가장 심한 비평을 하던 사람들 중 한 사람이었던 죤 모리스 씨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단언을 했다. “저는 제가 인도에 있던 동안 영국인들은 뇌물이나 부정부패라는 말들은 전혀 알지 못하던 말들이었다고 주저 없이 말할 수 있지요.”
‘I would have no hesitation in saying that during the years I was in India, bribery and corruption were unknown among the British.’
뇌물을 받거나 부정한 일에 개입한 영국인들이 거의 없었다는 말은 틀림없는 말이었다. 몇 가지 정도만 제외하고 그 어떤 영국인들도 그런 일에 대해 결코 추호도 의심을 하지 않았으며, 대다수의 사람들이 그런 일을 사실로 확인해 주었다. 이에 대해 죠지 캐롤 씨는 다음과 같이 말을 했다. “영국인 관리들이 봉급이 낮거나 현금에 쪼들려서 뇌물 착복에 영향을 받았으리라는 생각은 결단코 제 마음에 들지 않았어요. 그런 마음이 결코 들지는 않고, 저는 항상 대영제국의 관리라면 그 누구라도 어떤 종류의 뇌물도 챙기지 않았을 거란 점을 분명히 확신하고 있었지요. 한 번은 제가 경찰서장으로 있을 때인데 어떤 사건인가로 피소된 사람이 제 방갈로로 찾아와서는 제 앞에다 현금이 든 돈가방을 내놓았지요. 그가 뇌물을 주려고 한다는 걸 직감하고는 영지 밖으로 그 사람을 내쫓아버렸지요. 그 사람은 토끼처럼 저의 집 대문을 달려나가더니 기다리고 있던 조그만 이륜 마차를 타고는 그대로 멀리 내빼버렸지요. 만약 그 사람을 잡았더라면 흠씬 두들겨 맞았을 거예요.”
‘It never entered my mind that lowness of pay or lack of cash could ever influence any British officer to take a bribe. It never entered my mind, and I was always quite convinced that no British officer would ever take a bribe of any sort. once when I was a superintendent of police a man who was accused in a certain case approached my bungalow and placed in front of me a large bag of cash. When I realized that he was offering me a bribe I chased him out of the compound. He ran like a hare to my gate and got into a tonga which was waiting and he got away. Had I caught him he would have had a jolly good thrashing.’
이런 청렴 결백한 생각은 사립학교 때의 생활태도로 이미 머리에 박혀있었다. 영국인들은 다음과 같은 신념이 있었다. “우리는 지켜나가야 할 전통 있는 높은 가치 기준을 이어받았지요. 여러 사람들이 지켜보는 데 살면서, 비록 유혹을 받았다고 하더라도, 정말로 무모한 일을 벌이고 위험을 감수하고 살 마음의 여유가 없다고 생각했으며, 그래 봐야 사람들 눈치를 따돌리지도 못하고, 도덕적 가치 기준만 떨어뜨렸을 거예요.”
‘We had inherited high standards which we had to maintain. Living in the public eye you felt you couldn’t really afford to take risks – even if you had been tempted – which would not escape notice and would lower that standard.’
그러한 태도는 여지 것 알려진 것 중 아마 가장 부패하지 않은 행정부를 만들었다. 또한 이런 신뢰감을 불러일으킨 사람들은 차치하고라도 많은 인도인들에게 그런 청빈한 모습은 대단히 경이로운 존경의 대상으로 비추어졌다. 그래서 이런 부패하지 않은 정직성과 특징이 인도통치를 유지한 배경이 되었다. 이에 대해 죤 코튼 씨는 다음과 같이 말을 했다. “저는 항상 현존하는 유혹에 직면해서도 절제를 지키던 사람들에 대해 경이롭게 생각을 했지요.”
‘I was always amazed at one’s moderation in the face of temptation – which was always present.’
그러나 어떤 이들은 놀랍게도 부정부패가 행정부의 하급 관리들 사이에 만연해 있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이에 대해 펜더럴 문 씨는 다음과 같이 회상을 했다. “저는 그런 것들을 찾는 데 아주 열심이었지요. 저는 거의 모든 계급의 대단히 많은 사람들이 최고위층에서 최하위층까지 부정에 가담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았지요. 저는 팁까지 반대하지는 않았어요. 팁이야 손바닥에 기름칠을 안 해주면 일을 하지 않겠다는 좀 성가신 고민거리 였지요.”
‘I was perhaps much too hot in trying to check it. I ran in a large number of people of almost every rank for corruption, from the highest to the lowest. Tips I didn’t object to. It was harassment, refusing to do a thing unless the palm was greased.’
자신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모든 정부 관리들은 과일이나 꽃 이외의 다른 선물을 금하는 팔-풀 <과일이나 꽃 같이 가벼운 선물>이라고 하는 규정을 따라야 했다. 이에 대해 퍼시발 그리피스 씨는 다음과 같이 말을 했다. “여기엔 다소 코믹한 면이 있었어요. 만약 주둔지에 4 – 5 명의 유럽인 관리가 있는데, 그들 모두 선물 같은 건 받지않는 완전한 위엄과 기개가 있는 사람들로 알려져 있으면, 한 놈이 비싼 선물을 갖고 와서 분명히 안 받을 거라는 걸 알면서 첫 번째 사람한테 줘 보고, 그 다음 사람, 세 번째, 네 번째 사람에게 줄 수가 있었지요. 그러니 결국은 돈 한 푼 들이지 않고, 그 사람들 모두에게 선물을 돌린 결과가 되는 호의를 갖고있는 사람이 됐지요.”
‘There was a comic aspect to this. If there were four or five European officers on a station and it was known they were all men of complete integrity who wouldn’t accept presents, a chap would bring an expensive present along and offer it to the first man, knowing that he would say no, and they take it to the second and then to the third and then to the fourth. So he would get the goodwill resulting from offering presents to all of them, knowing that it wouldn’t cost him anything in the end!’
다른 사람들은 다른 방법으로 팔-풀 규정을 지켜보려고 했다. 돌리라고 알려진 과일이나 넛트류의 쟁반을 내놓는 것은 받을 수 있었는데, 그 것은 크리스마스 때만의 특이한 모습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따금 돌리나 부케 꽃 속에는 뭔가가 숨겨져 있었다. 이에 대해 죤 모리스 씨는 다음과 같이 회상을 했다. “크리스마스 날 아침으로 기억하는데, 군인들에게 음식을 납품하던 한 남자가 나타나서는 저에게 존경을 표하고는 크리스마스 선물로 양배추 콜리 꽃을 저에게 선물로 주었지요. 제가 콜리 꽃을 받아 들자, 거기서 1 파운드 금화가 떨어지던 걸 보게 됐지요. 이 건 이해가 갈만한 관습이었지만, 콜리 꽃이 됐든 아니면 무슨 꽃이 됐든 일단 받고 1 파운드 금화는 되돌려주는 것도 역시 오해를 살만한 일은 아니었어요.”
‘I remember on the Christmas morning the man who supplied the troops with food appeared to pay his respects to me and presented me with a cauliflower as a Christmas present, and I noticed when I took the cauliflower that out of it fell a gold sovereign. This was an understood practice, but it was also understood that one accepted the cauliflower or whatever it was and returned the sovereign.’
그런 걸 되돌려 주는 노력은 역시 마나님이나 아이들을 통해서 했다. 로사문드 로렌스 여사는 다음과 같이 말을 했다. “한 노파가 나를 보러 왔는데, 기껏해야 몇 애나나 나갈까 하는 니스 칠한 장난감을 우리집 조그만 애를 주려고 갖고 왔지요. 우리 꼬마 아이가 그 걸 보고 아주 좋아했지요. 그래서 저는 헨리에게 그 걸 받지 않으면 그녀가 몹시 기분이 상할 텐데, 그러니 어쩐다니? 하는 귀 띰을 하자, 헨리는 “그러면 받지 않는 게 좋겠네요.” 라고 말했지요. 다음날 강 뚝에서 가장 값이 나가는 땅 한 뙈기를 그녀의 조카에게 줘야 된다고 요청하는 편지 한 통이 날아왔지요.”
‘An old lady came to see me and she brought some little varnished toys for my little boy which must have cost a few annas at the most. My boy was delighted with them so I sent a note in to Henry saying I was sure she would be terribly offended if I didn’t take them, so what was I to do? “Better not,” he said. The very next day there came a letter from her asking that a most valuable piece of land on the banks of the river should be accorded to her nephew.’
이따금 공국에서 근무하던 영국인들 중에는 군주로부터 뇌물을 받았다는 소문이 은연중 나돌았다. 크리스마스 돌리 <선물 쟁반>를 갖고 온 새 주인에 대한 콘래드 코필드 씨의 설명은 어떻게 그런 근거 없는 주장이 일어나게 됐는지 다음과 같은 일례를 통해 보여주었다. “아주 엄청나게 큰 돌리를 아주 보기 좋게 꾸며서 갖고 왔지요. 그래 그 걸 조금씩 먹기 시작했는데, 쟁반 밑에서 101개의 금 모후르를 발견했지요. 그래서 잠시 망설이다가, 사무실로 들어와서 군주에게 격렬한 항의 편지를 썼는데, 나중에 그 군주가 답장을 써 보내와 보니 “아주 죄송하게 됐습니다. 그 101개의 금 모후르는 매년 크리스마스 때면 총독대리 관저로 보내지던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만약 양이 충분치 못하여 그러신다면 얼마나 해야 되는지를 알려주시겠습니까?” 라고 물어왔지요. 그래서 그들이 심문을 시작하고 보니 5개의 금 모후르<1889년까지 유통된 인도의 금화 1.5 루피>는 항상 총독관저의 하인들이 가졌고, 나머지는 주 사무실로 다시 보내져서 거기서 분배가 됐다는 걸 알게 됐지요. 리스트에는 “101 금 모후르를 총독 대리 관저에 크리스마스 선물로 보내며.” 라고 적혀있었지요.”
‘An enormous dolly was brought in looking quite beautiful. He started picking at it and at the bottom of the tray he found one hundred and one gold mohurs. He was staggered and went into his office and wrote a furious letter to the Ruler. The Ruler wrote back and said, “I’m dreadfully sorry, but one hundred and one gold mohurs is what has been presented to the residency every year at Christmas and if the amount is not enough will you tell me what is?” Then they started to make enquiries and found that five of the gold mohurs were always kept by the servants of the residency and the rest went back to the state office, where it was distributed – while in the lists was put “Towards Christmas present for the Resident, 101 gold mohurs.” ’
상업 지역에서의 뇌물과 부정부패 문제는 사실 비명문 사립학교 출신 애들로 들어찬 신설 회사들이었지만, 양상은 사뭇 달랐다. 이에 대해 루퍼트 메인 씨는 다음과 같이 말을 했다. “사람들은 그렇고 그런 사람이 그 편에 서서 많은 돈을 벌고 있다는 소문을 들었지요. 저는 그 사람이 돈에 너무 집착한다는 간단한 이유 때문에 타래 송곳이라고 알려진 한 사람이 기억에 남는군요. 그리고 또 한 사람은 전쟁 전 한 달에 60루피 정도 번다는 사람이었는데, 전쟁 동안 10만 파운드를 벌어 가지고 은퇴했다는 사람도 있었지요.”
‘One would hear rumours that so-and-so was making a lot of money on the side. I can remember one man always known as “corkscrew” for the simple reason that he was in on it; and another person who earned some sixty rupees a month before the war and retired with a hundred thousand pounds which he made during the war.’
다른 상업지역에서의 상도의는 피트 재상 시대 영국에서 하던 식과 같은 종류의 상도의 수준이었다. 모든 계약에서 약간씩 콩고물을 챙기는 것을 비도덕적인 일로 생각하지는 않았다. 이에 대해 유진 피어스 씨는 철로사업에 관해 말하면서 다음과 같이 회상을 했다. “제 아버님은 어떤 기준에서 보면 아주 정직한 사람이었지만, 제대로 된 하청업자와 계약을 해도, 벽돌이 쌓이기도 전에 수천 루피씩의 돈을 받았지요. 레일과 침목, 시멘트를 공급하기 위하여, 하청 업자들은 아버지에게 돈과 금 팔찌를 주었고, 제 어머니에게는 보석을 주었지요. 그래도 역들은 사실상 잘 팔려나가곤 했으며, 역장들도 특별히 좋은 역에 배치되려고 뇌물을 주고는 했지요. 아버님의 봉급은 무시해도 좋았고, 역들은 예약한 상인들에게 주려고 그런 역장의 선물이 들어찬 화차가 배정되어 있던 곳으로, 그의 수입은 어마어마했지요. 그리고 한 달에 한 번 자기들 지역으로 내려가 보던 그 지역 교통국장과 회사 감리관계자에게 돈을 주고는 했는데 그 때면 팁이 든 누런 봉투를 그 사람들 손에 슬쩍 찔러넣어 주었지요.”
‘My father was a very honest man by any standard but he got so many thousands of rupees before a brick was even laid, when he gave the contract to the right parties. For orders to supply rails or sleepers or cement, contractors presented him with money and gold bangles and my mother was given jewellery. Stations used to be virtually sold. Your stationmaster used to give you a bribe to be placed at that particular station. His salary was negligible but the stations were alotted wagons which were the gift of the stationmaster to give to the merchants who booked them, so his income was enormous. He paid the district traffic superintendent and the company inspectors who’d go down their district once a month – when a brown envelope was slipped into their hands containing this tip.’
또한 대체로 높은 상도의 수준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앵글로 인디아는 종교적인 원칙이나 관습을 수행하기엔 적당한 곳이 아니었다. 특수한 기능은 선교사들에게 일임 되었는데, 이들은 앵글로 인디언들의 주변에서 매우 한정된 역할만을 수행하였고, 대체로 아무런 지원이나 조언 없이 자기들 마음대로 하게 내버려 두었다. 인도에서 더 이상 이타적인 동기 때문에 근무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었고, 그렇다고 큰 곤경에 직면한 사람들도 없었다.
이에 대해 크리스토퍼 마스터맨 씨는 다음과 같이 회상을 했다. “트래반 코어는 선교의 중심지였지요. CMS, SPG, 카나디언 침례교, 미국 선교회, 의료 선교회, 로만 카톨릭, 벨지언 성직자들이 있었고, 다른 종파 사이엔 서로 대단한 경쟁 의식들이 있었지요. 만약 CMS가 어떤 종류의 연회를 갖고있으면, SPG 사람들 반이 가서 CMS 와 합치고 반대로 SPG 가 그러면 CMS 가 그랬지요. 저는 그 사람들이 힌두 카스트 계급을 개종 시킨 사람들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그들도 운명에 정해진 계급들과 억압 받고 사는 계급들과 천민들을 신자로 갖고있었지요.”
‘Travancore was a great centre for missionaries. CMS, SPG, Canadian Baptists, Belgian Priests – and there was a great rivalry between the different sects. If the CMS had a beanfeast of some sort, half the SPG lot would go and join the CMS, and vice versa. I don’t think they ever converted a caste Hindu but they got the scheduled classes, the depressed classes and the untouchables.’
그러나 인도의 여타 다른 지역에서는 경쟁의식이 그렇게까지 심하진 않았다. 이에 대해 캐쉬모어 주교는 다음과 같이 말을 했다. “우리는 그 사람들 허가 없이 침례교나 감리교나 CMS 가 있는 지역에는 들어가지 않았지요. 그래서 어린 양을 훔쳐오는 일은 없었습니다.”
‘We would not go into an area that the Baptists had or the Methodists or the CMS had without their permission, and they wouldn’t come into ours without permission. So there was no sheep stealing.’
진실한 대화를 한다는 면에서 볼 때, 선교사들은 힌두나 이슬람을 잠식해 들어가지 않았고, 널리 퍼진 무관심과 냉대 심지어 적개심에 직면하면서도 교육이나 의료활동을 개척해 나갔던 것은 인도에 있던 영국인들이 이룬 위대한 업적들 가운데 하나였다.
벵갈 지방에서 산파 역할을 했던 로살리 로버트 여사는 그 분야의 개척자들이 직면한 어려움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한 일례를 들려주었다. “그 사람들은 모든 게 잘 되겠지 하고 바라며, 일하는 여자들과 같이 5 – 6 일을 기다리고는 했지요. 그 사람들은 병원으로 여자들을 데려오고 싶어하지 않았어요. 그래서 제가 직접 자전거를 타고 나가서, 밀림 안으로 들어갔지요. 저는 흰 제복을 입고 자전거를 타고 갔는데, 밀림에 있던 물소며 집소들이 저를 쫓아오는 바람에 이내 멈춰선 뒤에, 카키색 옷을 그 위에 갈아 입었지요. 실제로 보니 산파가 다루던 환자들은 모두 맨 땅바닥에 누워있었지요. 저는 그녀들이 가까이 있는 것만으로도 해나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가능한 아무 것도 안 갖고 어떻게든 해 나가려고 노력을 했지요. 그래서 어떤 경우에는 아주 어려웠는데 – 제가 열심히 여자 환자 시중을 드는 동안 현지 산파들은 환자 머리에다 부적을 달고 있었지요.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마을의 산파들을 알게 됐고 아주 친하게 됐지요. 그 사람들이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았기 때문에, 5년의 임기가 끝날 때쯤에는 이틀 혹은 심지어 하루 지체하는 것에도 낙담을 했지요.”
‘They would wait five or six days with the woman in labour, hoping it would come all right. They didn’t want to bring them into hospital. So I used to go out on my cycle, off into the jungle. I started to go out in my white uniform but I soon stopped because all the cows and buffaloes in the jungle chased me and I changed over into khaki. Practically all the midwifery cases were on the mud floor. I tried to manage with as little as possible so as to show the village midwife that she could do it with what she had at hand. In some cases it was very difficult – while I was attending to the woman they’d be tying charms on her hair – but as time went on. I got to know the village midwives and we got quite friendly and by the end of the five year period the delay had got down to two days or even one day, because they weren’t afraid any more.’
선교사들만이 궁핍한 생활과 온갖 험한 일들을 독차지하고 산 것은 아니었다. 많은 젊은이들도 휴가를 받아서 고향에 돌아가 원기를 회복하기 전까지 4년 이상 계속되는 장기간의 외로운 군복무로 고생들을 했다. 몇 개월이고 계속해서 숲이나 산에서 시간을 보내야 했던 얼마되지 않는 산림청이나 인도 조사국 직원들이 있었는데, 외로움과 불편함은 이 사람들의 일과 였다.
오랜 계절 동안 조사국 일을 했던 아더 해밀톤 씨는 다음과 같이 회상을 했다. “저는 말 좀 실컷 해 보려고 유럽인을 무척이나 만나고 싶어 했지요. 사실 산사의 적막함이 나를 덮쳐 벼랑에서 뛰어내려 죽어야겠다는 격한 감정을 갖기도 했었지요.”
‘I was just longing to meet a European to talk to him. The vastness of the mountains overcame me and I had an awful feeling that I must throw myself over a cliff.’
그러나 대다수 사람들에게 온갖 험한 일과 궁핍한 생활은 근무기간 동안에만 그랬고, 실제로는 상당한 휴가 기간과 레저 시간이 점재돼 있어서 그렇게까지 심하지는 않았다. 인도군에서 현역 장교로 근무하지 않을 때는, 불편한 일상사와는 아주 거리가 멀었다. 아침 구보를 하고는 바로 아침을 먹었고, 개인적인 직무나 고충이 있을 때는 부대 사무실 앞에서 평상복으로 갈아입었다. 그리고 점심을 먹고는 항상 오랜 시간 동안 낮잠을 잤다. “그리고 나서 오후 늦게 클럽에 나가 게임을 하거나, 마음이 내키면 부하들을 데리고 게임을 했지요. 목요일은 전체가 쉬었고, 토요일도 물론 반은 공일이었으며 일요일은 완전히 공일이었지요. 매달 그런 식으로 10일을 빼고도, 년간 2달의 공식휴가를 받을 자격이 있었지요. 3 – 4 년마다 집으로 8 개월간은 휴가를 갔지요. 그래서 실제로 보면 우리 중 누군가 어떤 사람이 아주 혹사만 당하고 살았다고는 말할 수가 없지요.”
‘Then in the late afternoon you either played games at the club or, if you were so inclined, you played games with your own men. Thursday was a whole day holiday. Saturday, of course, was a half-holiday and Sunday was a holiday. You had as a right ten days absence every month and you were also entitled to an annual holiday of two months. Every three or four years you got eight months furlough at home. So it really cannot be said that any of us were greatly overworked.’
일이란 소수 민족들의 몫이었다. 총독부 자체도 결코 1300명 이상은 되지 않았고, 또 그 숫자 중 대부분은 인도인들이었다. 비록 인도군이 역사적으로 보면 전시에 분연히 일어서서 자발적으로 전쟁에 참여함으로써 가장 대규모의 직업군인이 되었지만, 영국 장교들은 한 부대 당 12 명 이상이 안 되는 적은 숫자였고, 매년 인도의 현지화 정책으로 조금씩 영향을 받아서 숫자가 더욱 더 줄어들게 되었다.
인도의 영국인들 중 아주 급속히 불어난 사람들은 사실 상인들이었다. 어떤 사람들은 옛날 무역회사나 아니면 보다 새로운 공업에 관심을 갖는 사람들과 하청계약을 하거나, 또 어떤 사람들은 대도시 상업지구에서 장사를 하거나, 아니면 차나 커피, 황마 농장에서 메니져나 엔지니어로 일을 하러 온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들이 한 일은 진짜 인도에서 한 일이 아니라는 말이 있었지만, 숫자로 볼 때 이들이야 말로 사실상 인도의 영국인들을 가장 많이 대표한 사람들이었다. “젊은 사람들은 캘커타나 봄베이의 상공 회의소나 에이컨이 잘 돌아가는 회사 사무실로 영전되기 전에 하급 사원으로 들어와서 모푸실에서 어렵고 불편한 일을 하면서 보냈지요. 또한 인도에 있던 대부분의 나리님들은 서류 더미와 바브스 <현지인 직원들>나 차프라시 <사무실 하인들>로 둘러싸인 책상에 앉아, 과도한 양의 서류 일거리와 씨름하며 어둠침침한 방갈로 속에서 대부분의 근무시간을 보냈으며, 특히 쿠르죤 경이 생각해낸 아주 잘못된 “분 제도” 라는 것이 있었는데, 이것은 가장 낮은 인도 사환부터 최종 책임자까지 모든 사람들은 무슨 일이 진행됐는지를 상술하는 업무일지를 썼다는 것도 기억이 되어야 할 일이지요.”
‘Young men who came out as junior assistants and probably spent one hard and uncomfortable tour in the mofussil before promotion to the company’s air-conditioned offices or the chambers of commerce in Calcutta or Bombay. Again, it has to be remembered that most sahibs in India spent most of their working hours in darkened bungalows, sitting at desks surrounded by files, babus and chaprassis, contending with inordinate amounts of paper work and, in particular, with a system of minuting said – quite wrongly – to be derived from Lord Curzon, by which ‘everybody from the lowest Indian clerk right up to the final authority wrote a minute enlarging on what had gone before.’
에어컨으로 인해 사무실이 무더위로부터 피난처 구실을 할 때까지, 사무실은 덧문이 닫힌 조용하고 침묵이 흐르는 졸음이 밀려오는 장소였는데, 대신 획하고 삐걱거리는 부채 부치는 소리와 많은 양의 종이 무게 아래서 퍼덕대는 종이 소리와 바브스 <현지인 직원>들의 사각사각 긁어대는 펜 소리와 차프라시 <사무실 하인>가 설탕 물이나 우유 차를 돌릴 때 맨발로 부드럽게 싹싹 걷는 소리만 있던 곳이었다. 또한 늘어난 점심식사 시간과 낮잠 시간으로 한 낮이 더욱 짧아졌고, 일 자체도 세계에서 가장 효율적인 훌륭한 사원들이 있어서 일도 하기가 훨씬 더 수월해졌다. “아주 힘들게 처리해야 될 서류가 있어도 모든 일은 사환들이 대신해 주었고, 모든 건 서류에 깔끔히 정리가 돼 있었지요. 그리고 서류가 적당히 되면 마지막에 “됐네” 아니면 “안 되겠군” 아니면 “대단히 수고가 많았네” 중에서 한 말을 해주고 의사결정을 해주기만 하면 됐지요.”
‘If there was any grinding work to be done at a file, all this work could be done for you by your clerks and everything would be neatly set out on paper, and if it was done properly you had merely to reach a decision at the end and say either “Yes” or “No” or “Thanks very much”.’
사실 업무는 아주 지루하고 재미도 없는 것이었지만, 분명히 사무실 일도 인도통치 시절 라즈들이 가장 보편적으로 경험한 삶의 한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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