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토피 헬멧을 배 밖으로 인도 이야기

2007. 6. 9. 17:25일반/역사·영어·컴퓨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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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토피 헬멧을 배 밖으로
Topees overboard

처음 대담에서 왜 인도에 가고싶어 했느냐고 질문을 받자, 필립 메이슨 씨는 다음과 같이 대답을 했다. “왜냐하면 정치적으로 아주 흥미로운 곳이라서요. 우리는 캐나다에서도 권력을 이양하는데 성공하긴 했지만, 인종과 문화와 종교가 다른 인도에서 권력을 이양하는 게 훨씬 더 무모하고 어려운 실험이었지요. 그런데 저에게는 이 것이 아주 흥미로운 일로 생각됐고 그 이유 때문에 인도에 있고 싶었지요.”
‘Because it’s such an exciting place politically. We have succeeded in devolving power to Canada, but to do this in India, where you have different religion and different culture and different race, is a very much more hazardous and difficult experiment, and it seems to me very exciting and I should like to be in on this.’
30년 뒤 이 무모하고 어려운 실험은 완성이 됐지만 많은 불안과 우려를 동반한 채 완성되었다. 올라프 캐로 씨는 많은 동료들의 감정을 대변하며 다음과 같이 자신의 입장을 얘기했다. “마지막 장은 이 전에 흘러가버린 150년의 가치가 전혀 아무 의미가 없었다는 느낌을 받았지요. 일을 너무 조급히 허둥대며 했지요.”
‘I felt that the last chapter hadn’t been worthy of the one hundred and fifty years that had gone before. The thing that had been much too hurried.’
사실 독립이 그런 속도로 소요의 와중에 찾아왔기 때문에, 준비하거나 대처할 기회가 전혀 없었다. “우리는 우리 주위를 지나가는 거대한 태풍의 중앙에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그 때는 그 걸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지요.”
‘We were at the centre of a vast typhoon which was going on all round us, but of which we were curiously unaware at the time.’
1939년 전쟁이 발발할 때부터 대자보가 벽에 붙고, 시간을 의식하지 않던 이상한 감정이 계속되었다. 창 끝에 휘날리는 길고 좁은 삼각기를 들고 머리를 젖힌 채 당당하게 말들을 타고 다녔던 멋진 기병 부대가 급속히 기계화 되던 때 찾아 온 변화를 비어 버드우드 여사는 다음과 같이 보았다. “마치 영원히 지속될 것처럼 보였지요. 사람들은 이 전에 흘러간 건 모두 일종의 덧없는 꿈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했지요. 저희가 보니 그 멋지던 군인들이 대형 자동차의 운전석에 쪼그리고 앉아 주변만 계속 운전하고 다니고, 기어 넣는 법이나 숙지하려고 했지요. 정말로 숙지해야 할 게 어떻게 승마를 하느냐 하는 것이었는데, 승마 같은 일은 마치 정말로 다시는 오지 않을 것처럼 보였지요.”
‘It seemed as if it would go on forever. one began to see that all that had gone before was a sort of dream. When we saw these splendid looking men crouched over the wheels of buses, driving round and round and trying to master gears when all that they had really mastered was how to ride a horse, it really did seem as if it had all been something that would never come again.’
유진 피어스 씨의 설명에 의하면 앵글로 인디언들은 독립에 대해 거의 아무런 준비도 하고 있지 않았다고 다음과 같이 말을 했다. “저희들 중 어느 누구도 영국통치가 끝날 것이며, 그렇게 갑자기 오리라고 본 사람들은 없었지요. 그러나 인도가 독립을 할 거라는 공표가 있자 우리는 그 소식에 아주 초조해 가지고, 앞으로 어떻게 할 건지 즉시 토론을 시작했어요.”
‘I don’t believe any of us ever visualized that British rule would come to an end and certainly not as abruptly as it did. When it was announced that India was to get her independence we were very jittery about it. We immediately started discussing what we were going to do.’
그래서 인도에 있던 앵글로 인디언들은 자신들의 충성심과 정체성을 과연 어디에 두어야 하는지 딱 부러지게 단호히 결정을 내려야 했다. 이에 대해 이렌느 에드워드 여사는 다음과 같이 자신의 입장을 얘기했다. “우리 세상이 끝난 거였어요. 한 번은 모우의 기차역 플랫폼에 앉아 있던 일이 생각 나네요. 유니온 쟄 기가 펄럭이던 성을 멀리서 볼 수 있었는데, 일단의 조그만 인도 소년들이 모여 앉아서 얘기를 하다가, 한 애가 다른 애에게 “너, 저 위에 있는 국기 보이지? 그런데 저 깃발은 결코 내려오지 않을 거야.” 라고 말을 해서, 어리석게 저 자신도 그런 식으로 생각을 했지요. 우리는 영국인이라는 사실을 자랑스럽게 생각했으며, 아버님은 멀리서도 “신이여 왕을 구하소서” 하고 국가가 나오면, 멀리서도 그 앞에 부동자세로 서서 올려다 보았고, 우리도 아버지처럼 따라서 그렇게 했지요. 그 게 바로 우리가 생각했던 인도 통치의 라즈들의 한결같은 모습이어서, 인도통치가 끝나게 되자 우리에겐 큰 충격으로 다가왔지요. 지금 도대체 우리는 어디에 있는지 우리가 영국인 인지 아니면 인도인 인지 아니면 도대체 어떤 나라 사람인지 알지 못했어요.”
‘It was the end of our world. I remember once sitting on a platform in Mhou. You could just see the fort in the distance with the Union Jack flying, and a group of little India chokras were sitting and talking near by and one said to the other, “Do you see that flag up there? Do you know, there are a lot of never come down.” And I, in my foolishness, agreed with them; I thought the flag would never come down. We were proud of being British. My father, when he heard “God Save the King” being sung, even away in the distance, stood up and we had to stand up with him. That is what we thought of the British Raj and it came as a shock to us when it ended. Now we did not know where we were, whether we were Indians or British or what.’
1947년 8월 15일은 아주 좋은 분위기 속에서 경축식을 거행하였다. 이에 대해 루퍼트 메인 씨는 다음과 같이 회상을 했다. “바로 그 날이 와서, 저녁에 총독관저 주위를 둘러보던 일을 기억할 수 있어요. 수 많은 사람들이 거리로 몰려나와 선생님의 등을 두드려 주며 격려해 주었고 악수를 나누었지요. 우리는 인도인에게 독립을 준 대영제국의 영웅들이었어요.”
‘The day came and I can remember going round to the Viceroy’s house in the evening. There were tens and tens of thousands, millions in the street, everybody patting you on the back and shaking you by the hand. We were the British heroes, the British who had given them Independence.’
그러나 마침내 독립과 함께 대량 탈출사태가 시작되었고, 보복경쟁으로 인하여 150만 명의 희생자를 내게 되었다. 실비아 코필드 여사는 심라 지방의 크라이스트 쳐치 외곽 시장건물 위에서 모든 상점들이 약탈당하는 걸 지켜보며 자기를 안전한 곳으로 데려다 주기로 한 군 호송부대를 기다리고 있었던 일을 다음과 같이 회상을 했다. “저는 여자들에게 문을 열어놓고 있었던 유나이티드 써비스 클럽의 베란다에 라호르 지방의 주교와 같이 서있으면서, 아래 쪽 시장에 있는 릭샤꾼들이 사는 동네에서 폭탄이 터지는 소리를 들었지요. 우리는 그 사람들의 울부짖던 소리와 쾅 하는 무딘 폭발음을 들으며 정말로 무력감을 느꼈지요. 정말로 우리가 할 일이 아무 것도 없었어요.”
‘I remember standing on the verandah of the United Service Club, which had opened its doors to women, standing there with the Bishop of Lahore and hearing the rickshaw coolies’ quarters in the lower bazaar being bombed. We felt quite helpless listening to their cries and the dull thud of the explosions. We couldn’t do anything.’
루퍼트 메인 씨도 새로 생긴 두 나라 사이의 국경 근처를 여행하면서 자신도 결국 아무 일도 할 수 없는 무력한 사람이란 걸 깨닫게 되었다. “암릿사르는 폭격을 맞은 뒤의 노르망디의 한 지방도시 같은 모습이었어요. 많은 사람들이 몰살 당했고, 암릿사르와 라호르 지방 사이엔 딸린 가족과 물건을 들고서 동 쪽으로 가는 사람과 서 쪽으로 가는 사람들의 행렬이 수없이 이어졌지요. 도로 한편으론 파키스탄에서 탈출하는 힌두교인들이 있었고, 다른 쪽 도로엔 회교도들이 파키스탄으로 가고 있었지요. 이따금 염소 같은 게 도로를 건너 뛰어갔는데, 그렇다고 그 걸 다시 찾아오겠다고 갔다가는 몰매 맞아 죽을 수도 있었지요. 심지어 사람 어깨 위에 올라서서 손이 닿을 수 있는 10 피트 높이까지 있던 나무 껍질도 죄다 먹어 치웠지요. 그 당시 제 마음 속에 비극으로 남아있던 사건은 우리가 멈춰 서서 사람들이 지나가는 걸 보고 있었는데, 거대한 피난민 행렬에서 한 사람이 튀어 나오더니 부동자세로 서서 저에게 도움을 요청한 사건이었지요. 자신은 사막에서 전투를 치른 제 4 인도 사단에 있던 사람으로 이태리에도 있었다고 자신의 신분을 밝혔지요. 그러나 제가 어떻게 그 사람을 도와줄 수 있겠어요? 제가 할 수 있었던 건 단지 그를 쳐다보면서 “당신네 정치가들이 자급자족 하자는 스와라지 운동을 하지 않았소? 이 게 바로 그 스와라지라는 거 아니요?” 라고 말을 했지요.”
‘Amritsar was like one of the towns in Normandy after the bombardment. It was more or less decimated, and between there and Lahore there was mile upon mile of people going East and going West carrying their belongings. The Hindus and the Sikhs from Pakistan moving on one side of the road, the Mohammedans on the other. Every now and again some goat or something would run across the road and then there would be a beat-up trying to get it back again. Even the bark of the trees had been eaten up to a height of ten feet, as high as a person could stand upon another person’s shoulders. The incident that, in my mind, epitomises the tragedy was when we stopped and were watching the people go by when a figure came out from the huge line of refugees, stood to attention and asked me to help him. He then said that he’d been with the 4th Indian Division through the desert and in Italy. What could I do to save him? All I could do was look at him and say, ‘Your politicians asked for Swaraj, and this is Swaraj.’
레지날드 쎄이보리 씨는 많은 사람들이 서로 공감을 하던 입장을 다음과 같이 얘기했다. “1947년 12월 제가 인도를 떠날 때, 저는 임무를 반만 끝내고 왔다고 생각했지요. 인도에서의 우리의 의도는 공연 중이던 연극을 넘겨주는 것이었지만, 저는 지금도 우리가 한 10년간 만 더 붙잡고 있었다면, 제대로 일이 잘 됐을 거라고 믿고 있어요.”
‘When I left India in December 1947 I felt we were leaving a task half finished. Our intention in India was to hand over a running show and I believe that if we could have held on for another ten years that would have been the case.’
한 10년 더 주었다면 인도의 현지화 진행이 완성되었겠지만, 그러고자 하는 의지들이 부족했다. 1947년까지 대부분의 관리와 군 장교들은 8년이라는 지나치게 혹독한 근무조건을 용하게도 잘 참아 내었다. 집으로 휴가를 갈 수 있는 사람들은 거의 없었고, 너무 억누른다는 얘기들이 불거져 나오기 시작하였다.
이에 대해 이안 스테픈 씨는 다음과 같이 보았다. “많은 사람들이 거의 다 죽을 둥 살 둥 모르고 일 만 하는 사람들이 되었고, 47년도의 대 전환기가 왔을 때도 대부분은 너무나 죽을 지경이어서 그 일을 모두 다 떠맡아서 하지를 못했지요.”
‘A lot of them became almost drudges and when the great change of ’47 came they were most of them too tired to take it all in.’
사실 사람들은 일에 환멸을 느끼고 있었다. 자신들이 그 동안 이룩해 놓은 많은 일들이 한 순간에 죄다 무너진 채, 만신창이 다 되어 철수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어떻게 해서든 자신들의 인생을 다시 일으켜 세우고 어딘가 다른 곳에서라도 다시 적응을 해야 한다는 사실을 모두들 깨닫고 있었다. 그러나 영국인 동네의 모든 사람들이 다 다시 일어서야 할 필요는 없었다. 박스 왈라 (장사꾼)와 경작자들은 큰 손실을 보지않고 전처럼 계속해서 일들을 해 나갔으며, 선교사들은 보건과 교육을 선도하는 역할을 계속하였고, 수 천명의 인도 태생의 앵글로 인디언들은 인도나 파키스탄 시민이 되려고 과감히 모험의 길을 택하였다. 또한 많은 수의 관리들도 역시 일을 맡아줄 인도인을 발견할 때까지 1년이고 2년이고 더 인도에 남아있었다.
독립은 각 인종 사이에 보다 더 위대한 우정을 위한 길을 열어 놓았다. “그 당시 유럽인들과 인도인들은 뜻 밖의 손쉬운 방법으로 서로에게 손을 내밀었지요.”
‘Both Europeans and Indians at that time held out their hands to each other in an extraordinarily easy way.’
새로운 개방이 지속되고, 거리와 시간의 시험 선상에서 더 이상 과거에 있었던 신비로운 장벽은 존재하지 않았다. 라즈들의 분열로 가장 직접적인 영향을 받은 사람들은 총독부와 인도군이었다. 어떤 사람들은 선택의 여지가 없어서 집으로 갔고, 또 어떤 사람들은 집으로 돌아가는 게 차라리 더 나을 거 같아서 집으로 갔다.
이에 대해 데이빗 싸이밍톤 씨는 다음과 같이 말을 했다. “만약 3 가지 것만 없었다면, 우리들 중 훨씬 더 많은 숫자의 사람들이 인도정부 하에 그대로 남아 복무를 했을 거예요. 무엇 보다도 모든 사람들이 정치적 실패로 환멸을 느끼고 있었으며 아주 지치고 지루하게 생각들을 했지요. 또 하나 다른 이유는 정부가 우리에게 쉽게 보상을 해주었다는 이유가 있었어요. 그러나 그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이유는 힌두정부나 회교정부를 위해서 일을 해야 한다는 사실로, 따라서 철저한 회교도나 힌두교인이 되어야 했으며, 그런 개념은 우리가 옳다거나 가능하다고 생각했던 모든 것들과 정 반대가 되는 개념이었지요.”
‘Much larger number of us would have stayed on and served under Indian governments if it hadn’t been for three things. First of all, everybody was very tired and pretty browned off, disillusioned by all the political failure. Another reason was that the Government made it easy for us to go by offering us compensation. But most important of all was the fact that you either had to serve a Hindu Government or a Mohammedan Government, and you had either to be pro-Mohammedan or pro-Hindu accordingly, and that was contrary to everything that we thought right or possible.’
그래서 인도를 떠나야 한다는 예상을 숙명으로 받아 들였다. “우리 모두는 죽음이란 피할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있듯이 어느 날인가는 인도를 떠나야 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지요. 우리 대부분은 이런 날을 고대하지는 않았지만, 올 거라는 건 알고 있었지요. 그래서 당연히 모든 일이 이상한 방법으로 이런 감정에 맞게 조정되었지요.”
‘We all knew, like knowing that death is inevitable, that one day we would leave India. Most of us did not look forward to this day, but we knew it would come and, of course, everything was geared to this feeling in a queer sort of way.’
아주 극소수의 사람들 만이 아무런 생각도 고통도 역겨움도 없이 편안한 기분으로 인도를 떠나갔으며, 영원히 인도를 잊어버렸다. 또 이보다 상당히 많은 사람들도 단순히 쉬게 되서 좋으며, 자기 집과 가족을 다시 보기를 학수고대하고 인도를 떠나가 버렸다. 그러나 나머지 대부분의 사람들은 해가 지나면서 더 민감하게 불어나는 보고, 듣고, 냄새 맡은 아주 멋진 지난 일들에 대한 향수를 갖고 애석하게 생각하였다.
이에 대해 프란시스 스마이스 씨는 다음과 같이 말을 했다. “눈을 감기만 하면 이 세상에서 가장 화사한 냄새로 기억되는 나무연기 냄새가 나던 인도 시골길의 저녁 광경이 떠 오르지요. 인도에서는 항상 갑자기 석양이 찾아왔고, 석양이 내리면 금방 어둑어둑해 졌지요. 그러면 안개가 논 밭에서 올라온 푸르스름한 연무 속으로 피어 올라갔는데 – 바로 논 밭을 가로질러 떠돌던 기막힌 냄새가 있었지요.”
‘I’ve only got to shut my eyes and picture an evening in a village in India, with the smell of wood smoke, which is the most gorgeous smell in the world. There was a very sudden twilight in India always and when the twilight came it was dark and the mist would rise up in a sort of blue haze from the fields – and there would be this gorgeous smell drifting across the fields.’
또 어떤 사람들은 시장의 가게에서 나는 향신료와 후추 냄새, 긴 한발 뒤의 첫 비가 떨어 질 때의 흙 먼지 냄새, 시장에서 무더위로 땀은 나고 피곤하고 갈증은 나지만 사람들과 덕담을 하거나 웃음을 나누던 일들을 모두 그런대로 아주 괜찮은 최고의 기분이라고 회상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비어 버드 우드 여사는 모든 기분 중에서 가장 근사한 기분은 별 밤 아래 다리를 쭉 뻗고 잠을 자는 거라고 말을 했다. “인도에서는 별빛 만으로도 책을 읽을 수 있었지요.”
‘You could read by starlight in India.’
그래서 그런 사람들 모두에게 인도는 피속에 깊숙이 용해되어 있었다. 낸시 버네드 여사는 많은 사람들을 대신하여 다음과 같이 말을 하였다. “저는 결단코 제 몸 속에서 그런 기억을 지워버리진 않았지요.”
‘I never really got it out of my system.’
또 하나 감정을 밖으로 전부 다 드러낼 수 없는 향수도 있었다. 그 당시 항상 좋게 평가 받지 못하던 양질의 인도인들이 있었다. 다른 나라 땅에 가서는 영국인들이 그렇게 환영을 받기는 거의 어려운 인도인들 만이 보여준 특유의 온순함, 공손함과 예의와 귀중한 환대감들을 영국인들은 느꼈다.
필립 메이슨 씨는 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을 했다. “우리가 캠프 쪽으로 걸어서 돌아가고 있었는데, 그 마을에 있던 사람들 몇이 우리가 지나가는 걸 보고는 밖으로 달려 나오면서 “이렇게 저희 마을을 걸어 지나가시면 안돼요. 저희가 마차로 모셔 다 드려야 해요. 그러니 그렇게 가시는 게 좋겠네요.” 라고 말들을 해서 “아니, 괜찮아요. 그냥 좀 걷고 싶군요.” 하고 대답을 하면 “좋아요. 그렇다면 잠시 앉으셔서 오렌지나 우유라도 좀 대접을 받고 가셔야 되요.” 하고는 손을 잡고 파티에서 애들이 하듯이 우리 주위를 둥글게 에워싼 뒤, “앉지 않으시면 선생님을 보내드리지 않겠어요.” 라고 말을 했지요.”
‘We were walking back to our camp and some people in the village we were passing saw us and came running out and said, “You can’t go through our village like this, we must get you a bullock cart and you can go on that.” “No, no, we want to walk.” “Well, you must sit down and have some oranges or milk.” And they joined hands and made a circle round us like children at a party and said, “We won’t let you go until you have sat down.” ’
기술을 잃어버린 데 대한 지독한 향수는 그래도 그다지 실체적인 내용은 아니었다. 엄청난 자신감과 아주 많은 사람들이 습득한 보기 드문 기술이 있었다. “저는 좀 수줍고, 소심한 성격의 젊은이로 인도에 갔다가, 어떤 일이고 착수를 해볼 수 있겠다고 느끼면서 영국으로 돌아갔지요.”
‘I went out rather a shy, diffident young man and I came away feeling I could turn my hand to anything
그러나 그 어떤 일도 시간이 지나고 나중에 보면 좋은 면도 있지만 그 만큼 많은 의구심을 갖고 생각하게 되기도 하였다. 또한 영국 자체도 인도의 중요성이 사라지고 갑작스런 의외의 사건을 겪고 난 후 보니 김이 빠진 아무 특징도 없는 나라같이 보였다.
사실 영국은 거의 모든 사람들의 기대에 부응하며 살지를 못했다. 에프 제이 딜론 씨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게 되었다. “제가 인도에 있을 때 영국은 제가 어렸을 때부터 알던 대로 대단한 나라로 생각을 했지요. 그런데 제가 항상 그렇게 생각해 왔던 영국이라는 나라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어요.”
‘While I was in India England was always that wonderful country that I had known as a child. The England I had always thought of didn’t exist any more.’
그래서 영국은 더 이상 돌아가야 할 은혜로운 조국이 아니었다. 이에 대해 클라우드 오친레크 씨는 다음과 같이 진술을 했다. “영국은 특히 정치가들을 신경 쓰지 않았어요. 제 생각에 정치인들이 인도에 아무런 흥미도 갖고있지 않았어요. 정치인들은 다만 그런 점을 이용했던 거 같아요.”
‘The England never cared, the politicians especially. I don’t think they ever took any interest in India at all. I think they used it.’
흥미 상실이 비단 정치가들에게만 국한된 문제는 아니었다. 이에 대해 비어 버드우드 여사는 다음과 같이 기억을 했다. “영국에 있던 사람들 전부가 인도 일엔 도통 관심들이 없었어요. 제 생각에 우리들 중 어느 누구도 6개월 정도는 인도에 대해 전혀 말을 하지않은 채 영국에서 살았지요. 우리는 이따금 만찬에서 “음, 그렇다면 대체 늙은 간디 라는 사람은 어떻게 되는 거지요?” 같은 종류의 질문을 받을 수 있었지요. 사실 정식 야회복을 입고 사이 사이에 인도정치의 긴 연구보고를 본격적으로 다루고 차분한 마음으로 공부해 본다는 건 정말로 불가능해서 우리는 단지 어깨를 으쓱해 보이곤 했는데, 그러면 연회의 바깥 주인이든 안 주인이든 아니면 그 누가 됐던지 간에 이 질문을 고맙게도 런던에 있는 가장 최근의 극장 뉴스로 억지로라도 넘겨지게 해 주었어야만 했을 텐데 그러지 않았지요.”
‘The total disinterest of the people in England to Indian affairs. I don’t think any of us ever spoke about India for the six months or so we spent in England. We might occasionally be asked at a dinner, “Well now, what’s all this about old Gandhi?” or something of that sort. Well, to try and settle down to a long dissertation on Indian politics between the soup and the fish was not really possible, so we just used to shrug our shoulders and our host or hostess or whoever might have felt obliged to put this question thankfully passed on to news of the latest theatre in London.’
그러나 영국으로 돌아와서 자신이 이방인 같다는 생각이 들어도 아직은 그 곳이 자신들의 고향 집이었다. 그러나 너무나 인도와 유대관계가 강해서 그런 것들을 무시할 수도 없었다.
이에 대해 캐슬린 그리피스 여사는 다음과 같이 말을 했다. “저는 인도를 아주 좋아했어요. 해가 갈수록 인도에 대한 생각이 자꾸만 커져 간다는 걸 알게 됐지요. 인도는 거의 선생님 존재의 일부가 되었지요. 그러나 제 마음 뒤 한 구석에는 항상 그래도 종막엔 결국 내 조국인 영국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그런 생각이 있었지요.”
‘I was very fond of India and I found as the years went on that it grows on you. It becomes a part of your being, almost. But always at the back of my mind there was that thought that at the end of it all I want to return finally to England, back to my own country.’
라즈들 자신도 자신들에 대하여 비판을 가했다. 죤 모리스 씨는 다음과 같이 자신의 입장을 얘기했다. “라즈들의 심리는 정말 어떤 거짓에 근거를 두고 있었어요. 인도에 있던 대다수의 영국인들은 극히 부분적인 역할만을 수행했어요. 그 사람들은 반드시 있어야 될 사람들이 아니었지요. 거기엔 아주 생색을 낼 만한 좋은 이유가 있었어요; 다시 말하면 먹고 살면서 돈도 번다는 – 이 걸 비열하고 천하게 생각할 건 없지만 – 뭐 그런 이유가 있었지요. 그러나 저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투철한 직업관이라는 걸 갖고, 인도에 근무하고 있었다고는 정말로 생각하지 않아요.”
‘The psychology of the Raj was really based on a lie. The majority of the British in India were acting a part. They weren’t really the people they were supposed to be. They were their for a very good reason; earning a living and making money – nothing ignoble about that – but I don’t really feel that most people had a sense of vocation, that they were serving India.’
다른 사람들도 역시 라즈들에 대해 비판을 하였다. “인도에서의 영국통치는 저희들이 만든 모든 법이라는 게 모두 고율의 이자로 무식한 사람들에게 돈을 빌려주게 한 거라서 반야 키 라즈 (영국인 고리 대금 업자) 통치라는 풍자적인 말로 불리어졌지요. 그 건 고리대금 업자를 위한 진수성찬을 차리는데 들어가는 돈이었고, 법은 항상 그 사람 편이었지요.”
‘English rule in India was very often called sarcastically banya ki raj, the rule of the moneylender, because all our laws enabled him to lend money to the illiterate people at vast interest. It was money for jam for the money-lender and the law was on his side.’
어떤 사람들은 보다 더 근본적인 이유 때문에 라즈들을 싫어했다. 이에 대해 에드 브라운 씨는 다음과 같은 주장을 폈다. “값 싼 노동력은 라즈들의 왕관에 박힌 또 하나의 보석이었지요. 그 보석의 이 면에는 비열함, 기아, 불결함, 질병과 거지들이 있었어요. 군에서 나오고 나서야 비로소, 저는 한 나라를 이 지경이 되도록 내버려 두었다는 걸 보면서 그 게 얼마나 지독히 나쁜 일인지 알 수 있었지요. 인간들의 이런 속물근성 때문에, 부자들도 많았지만 반면에 굶어죽는 사람들도 무지하게 많았지요.”
‘Cheap labour was another jewel in the crown of the Raj. At the back of the jewel was the squalor, hunger, filth, disease and beggary. only when I came out of the army could I see what a terrible thing it was that a country had been allowed to exist like this. Such snobbery, so many riches, so much starvation.’
만약 인도가 영국을 자랑스러운 국가로 만들었다면, 그 건 아마도 자신들의 자존심을 깍아내리고, 장래에 대해 비판을 하고, 자신들의 처지에 실망을 하던 인도인 자신들이 스스로 치룬 댓가 때문에 이뤄진 거라는 말들을 많이 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그러한 비판은 때 늦은 지혜처럼 이제서야 조금씩 회자되기 시작했지만, 아무래도 그런 일에 대한 평가는 후세 역사가들의 심판에 맡기는 것이 가장 좋을 듯 하다.
그 당시 앵글로 인디언들은 당연히 라즈 자신들의 속성과 과오를 제대로 보지 못했다. 이에 대해 노만 와트니 씨는 다음과 같이 단언을 했다. “저는 라즈들에 대해서 전혀 생각을 못해 봤어요. 저는 그저 직업이 있고, 그 게 좀 힘든 일이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걸로 생각을 했지요.”
‘I thought nothing about the Raj. It seemed to me that I had a job, it was a tough one and that was all there was to it.’
인도에 조상 대대로의 뿌리가 있던 사람들의 태도는 아주 훨씬 더 복잡한 것이었다. “저는 우리가 라즈들에 대해서 그처럼 자의식을 갖고 제대로 생각한 적이 없었던 거 같아요. 우리는 단순히 우리가 있던 곳을 운명으로 받아들였지요. 대부분의 경우 우리 조상들의 운명이 그랬듯이, 인도에 어느 정도 희생을 감수하고 인도에 근무를 하는 것이 우리들의 운명이라고 느꼈지요. 사실 어린 아이 때부터 그렇게 오래 헤어져있는 것은 대단한 희생이었으며, 외로움도 대단한 희생이었지요. 그러나 사리사욕을 위한 이기적인 감정이나, 사악한 제국 주의자가 되어야 겠다는 감정은 절대로 없었지요. 사실 그 당시 저희는 반드시 제국 주의자들이 나쁘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어요.”
‘I don’t think we ever consciously thought about the British Raj as such. We simply accepted that this was where fate had placed us. We felt that this was our destiny – in many cases the destiny of our forebears – that we were there at some sacrifice to serve India. Those long partings from children were a great sacrifice, the loneliness was a sacrifice. There was absolutely no feeling of exploitation, no feeling of being wicked imperialists. In fact, in those days we didn’t think imperialists were necessarily wicked.’
확실히 개인적인 면에서 볼 때 자애로운 대부주의는 아주 많은 격찬을 받았다. “돈을 모은 소수의 사람들이 인도를 통치하고, 정말로 인도에 봉사한 사람들의 헌신적인 공로는 잊어버리는 풍조로 변해 갔지요. 산림을 돌본 사람, 병원을 지은 사람, 도로를 만든 사람, 관개를 한 사람들은 당연히 그런 일이 직업이 됐지만, 그 사람들은 인도를 사랑하고 사람들을 좋아해서 그런 일들을 했지요. 그러나 그 사람들이 한 일과 기여한 일들이 지금은 많이 잊혀졌지요. 그 사람들은 평범하고 신분이 낮은 보통 사람들로 결코 신분이 존귀한 사람들이 아닌 중간계급의 사람들이었지만, 정말로 인도를 경영한 사람들이었지요.”
‘The fashion is to judge India by the few who made money out of it, and forget the devotion of the people who served it. The men who looked after the forests, the people who built hospitals, the people who made roads, who did the irrigation. It was their occupation, granted, but they did it with a love of India, a love of the people, and what they did and what they contributed is now forgotten to a large extent. They were the ordinary, plain little people, the ones in the middle who were never exalted, but who ran India really.’
만약 인도에서 라즈들을 만들어내지 않았다고 해도, 분명히 누군가 다른 사람들이 대신 그 역할을 했겠지만, 그래도 그만큼 훌륭하게 잘 해내지는 못 했으리라는 견해에는 의견들이 분분했다. 라즈들에 대한 평가와 가치는 현재의 공식적이 아닌 모습을 놓고 정선해야 하는 과정으로 보자면 진짜 제대로 된 평가를 내리기 어렵다. 그러나 영국인들이 무굴제국 시대에 발견한 건 진공상태로써 그저 혼돈과 무정부 상태, 도덕과 가치의 타락 뿐이던 것을 자신들의 공용어와 법률제도와 보기 드문 양질의 민간 행정기구와 인도군의 위대한 문민화 효과를 가지고 인도의 한 시대 속에 자리잡게 했다는 소리를 듣기도 하였다. 영국지배 하의 평화 제도인 팩스 브리태니카는 인도의 국경지방이나 힘이 미치지 못하던 곳에서는 번창하지 못하였으나, 사실 그로 인하여 부단한 평화가 유지되었다.
파미르 오지를 탐사하던 중 케네스 메이슨 씨는 돈이 떨어져서 야크 소유주 한테서 돈을 조금 빌렸다. “저는 카라치에 있던 콕스 가게를 지급인으로 하여 공책 반 쪽에다 “이 종이를 소지한 사람에게 영국 화폐 50 파운드를 지불해 주십시오.” 라고 그대로 정서를 하여 써 주었지요. 그런데 틀림없이 8 - 9 개월 뒤 카라치에 있던 지급처인 콕스 가게로부터 50 파운드 값이 나가는 꼬기꼬기 기름 때가 흐르는 종이 조각 한 장이 도착해 페샤와르 시장에 나타나 대금지불을 청구한다는 소리가 들렸지요. 그 종이 조각은 손에 손을 거쳐 전 중앙 아시아를 돌아다니다 나타난 거 였지요. 그 종이는 서명을 할 줄 모르던 사람들의 표시가 나 있었는데, 다름아닌 잉크에 손을 댔다 페이지에 찍은 엄지손가락 자국이 있었지요. 그 놈은 사마르칸드와 키바까지 갔다 왔는데, 정확한 것은 아무도 모르지만, 분명한 사실은 그 게 카이버 고개길을 넘어와서 페샤와르 시장에 나타나, 그 때까지도 여전히 50 파운드 값이 나갔다는 거지요.”
‘I wrote out on half a sheet of notepaper to Cox’s, Karachi: “Please pay bearer on receipt of this the sum of fifty pounds sterling.” It must’ve been eight or nine months later that I heard from my bankers, Cox’s at Karachi, that a greasy piece of paper had arrived and had been presented in the Peshawar bazaar and was said to be worth fifty pounds sterling. That piece of paper had gone from hand to hand all over Central Asia. It had marks of people that couldn’t sign. It had thumb marks which had been dipped in ink. It had been to Samarkand and Kiva and God knows where, and it’d come over the Khyber Pass and was presented in Peshawar bazaar and was still said to be worth fifty pounds sterling.’
인도의 라즈들 역시 인도에 간접적인 혜택을 주었다고 말할 수 있었다. 발전에 필요한 자유와 신념에 대한 깜짝 놀랄만한 충격과 새로운 신사상을 인도인에게 알려 주었고,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인도인들이 인도를 한 국가로 생각하고 마더 인디아를 얘기할 수 있게 국가에 대한 애국의 개념을 창조했다는 것이었다.
마지막 결론은 인도는 서양이나 아시아와는 다른 서구문명과 동양문명이 합성되었다는 것인데, 이에 대해 펜더럴 문씨는 꼭 필요한 동반관계로 그 두 문명의 합성을 보았다. “인도인과 영국인이 가까운 동반자 관계로 함께 일하던 정부와 – 그 정부의 성공은 한 편으로는 제가 인도인들의 지성이라고 부르고 싶던 것으로, 외국인들에 의해 지배를 당했던 자신들의 국가에 무슨 일이 닥쳤는지를 겸허히 수용하고,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일에 최선을 발휘하려는 센스에서 생긴 거였지요.”
‘A government by Indians and British working together in close partnership – and its success arose partly from what I would call the intelligence of the Indians, their sense to accept what had happened to their country, that it had been conquered by foreigners, and to get the best out of it they could.’
펜더럴 문 씨는 라즈들에 대해서는 항상 비판적인 고백을 하였다. “저는 우리가 인도에 가져간 많은 제도들이 인도 실정엔 맞지 않았는데도, 인도인의 전통과 인도인의 사상 위에 충분치 못하게 건설했다고 생각을 했어요. 그러나 저도 역시 라즈들은 경제적인 인도의 중요한 문제와는 씨름을 할 수가 없었다고 느꼈지요. 저는 외국인의 힘만으로는 인도인의 소작농 생활을 바꾸는데 필요한 혁신적인 조치를 성취할 수가 없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저는 제 자신에게 “사람들이 정말로 바꾸려고 하나?” 하는 질문에 저는 대답을 제대로 못했습니다만, 분명히 인도 지식인들은 그 제도를 바꾸고자 했지요. 저는 어떤 변화가 효과가 있게 되면, 영국인 라즈들이 인도인 라즈들에게 자리를 양보해야 한다고 생각했지요.”
‘I thought that many of the institutions we had brought to India were unsuited to India, that we had insufficiently built on Indian tradition and Indian ideas. But I also felt that the British Raj couldn’t tackle the main problems of India, which were economic. I felt that a foreign power could not achieve the revolutionary steps that would be necessary to change the Indian peasant life. Then I asked myself, “Should one really try to change it?” I can’t answer that question, but obviously Indian intelligentsia wanted to change it. And I felt that the British Raj must give place to Indian Raj if any change is to be effected.’
그런가 하면 이런 말을 하면서도 펜더럴 문 씨는 앞으로 몇 년 이내 영국인 라즈들은 세상에서 기적 같은 일을 한 사람들로 비춰질 거라는 결론을 내리기도 하였다.
또한 이와 마찬가지로 비판적인 얘기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다정다감한 판단은 이안 스테픈 씨로 부터 다음과 같이 나왔다. “저는 인도를 아주 좋아했어요. 크고 다루기 힘들고 꼴사납고 끔찍한 점들이 있었지만, 그런 결점들에도 불구하고 인도인과 영국인 사이에 같이 근접하여 융해하고 일하던 것 중에는 좋은 점들이 많이 있었지요.”
‘I’m so fond of it. It was a great, lumbering, clumsy, brutal thing but, despite its flaws, this fusion, this contiguity between Britain and Indian worked, and there was much good in it.’
정부의 질시와 이들이 의도하던 덕행에도 불구하고 결국 영국인들은 항구적인 거점을 확보하지 못했다. 이에 대해 아이리스 포르탈 여사는 다음과 같이 말을 했다. “사람들한테서 결코 땅은 가져갈 수 없는 거지요. 민중들의 땅에는 신비한 힘이 숨어 있어요. 선생님은 그저 가서 잠시 동안 그 사람들에게 좀 지시하고, 새로운 사상을 소개하고, 그 것도 외국인종이 그 사람들에겐 아주 낮선 생활태도로 억지로 끌고 들어가게는 할 수 있지요. 그러나 어쨌든 그러고 나면 영국으로 되돌아가서 첼턴햄에서 죽는 게 당연한 순서였지요.”
‘You must never take land away from people. People’s land has a mystique. You can go and possibly order them about for a bit and introduce some new ideas and possibly dragoon an alien race into attitudes that are not quite familiar to them, but you must then go away and die in Cheltenham.’
영국인들은 착실히 절차를 이행해 나갔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들이 가장 믿었던 시종들로부터 눈물 어린 이별로 한층 격앙된 슬프디 슬픈 감정을 안고 인도를 떠났는데, 인도를 마지막으로 종단하던 여행에 그 시종들도 함께 따라 나서주었다. 또한 자신들의 어린 아이들을 양육하던 아야 (보모), 거의 25년 이상을 함께 동고동락했던 하인들이 있었다. 그러나 연금과 선물도 그 사람들의 장래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느끼던 두려운 감정을 깨끗이 근절시킬 수는 없었다. 어떤 사람들은 화환이나 송별식도 없이 슬그머니 도망을 갔고, 어떤 사람들은 보다 정중한 이임식을 갖고 인도를 떠나기도 했다.
이에 대해 루퍼트 메인 씨는 다음과 같이 말을 했다. “저는 군인들이 짝을 지어 출입구를 올라가던 일이 생각나는군요. 드디어 영국인 부대장 블레어 대령이 우리를 보고는 아주 멋진 거수경례를 붙이고는, 돌아서서 출입구로 올라갔지요. 그렇게 마지막 영국부대는 떠나갔고, 그 게 파키스탄을 영원히 떠나던 블랙 워치 연대의 모습이었지요.”
‘I can remember seeing the troops going up the gangway in pairs and finally their colonel, Colonel Blaire, standing and facing us, giving us a tremendously smart salute, about turn and up the gangway. Thus went the last British regiment. That was the Black Watch leaving Pakistan forever.’
최후의 작별의식은 항상 예전에 하던 대로 동양이 끝나고 서양이 시작되던 곳에서 시작을 하였다. “우리가 포트 싸이드를 떠나서 대양 속으로 항해를 하자 모든 사람들이 갑판에서 토피 헬멧을 쓰고 사열 행진을 했지요. 그러다 주어진 신호에 따라 우리 모두는 토피 모자를 바다 속에 일제히 집어 던졌지요. 아무튼 그 게 인도의 마지막 장면이었지요.”
‘As we left Port Said and sailed into the open waters everyone was paraded with their topees on deck and at a given signal we all flung our topees into the sea and that was the last of India.’
제일 마지막으로 영국과 고향이 이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영국의 해안은 푸르고 하얗게 보였으며, 제 생전에 지금까지 보았던 것 중 가장 아름다운 광경이었어요. 언덕 자락에 옹기종기 깃들인 조그만 시골 마을과 절벽의 하얀 색조와 그렇게 오랫동안 색감이라고는 전혀 없던 곳에 있다가, 잔디의 푸릇푸릇한 색감으로 모두 덮여있던 영국 땅을 보았지요. 우리가 싸우쓰 햄프턴 항구에 도착했을 때는 눈이 모든 것을 덮어버릴 듯이 하염없이 내리고 있었지요.”
‘The coast of England was green and white and the most beautiful sight I’ve ever seen in my life; little villages nestling in the folds of the hills, the white of the cliffs and, after being without colour for so long, the green of the grass – and to cap it all, when we got to Southampton it was snow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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