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인도인 인도 이야기

2007. 6. 9. 17:24일반/역사·영어·컴퓨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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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인도인
Indians

죤 모리스 씨는 다음과 같이 말을 했다. “한 번은 제가 20 살쯤 영국에서 휴가를 끝내고 돌아올 때라고 기억을 하는데, 봄베이에서 기차를 탔지요. 그런데 다른 쪽 침대를 한 인도인이 차지하고 있었어요.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그 당시 저는 인도 지배계급의 감정에 상당히 영향을 받고있어서, 역장에게 “저 인도 신사분을 밖으로 내보내 주시요.” 하고 말을 했지요. 그런데 그 인도인이 저에게 아주 유창한 영어로 말을 걸면서, 저에게 인도에 대해 많은 것들을 알려줄 수 있다면 좋겠다고 말을 했지요. 지금 다시 생각해보면 제 인생에서 그 일은 몹시도 창피하게 느껴지던 사건이었지요. 그러나 그 당시 일반적으로 군 장교들은 지시를 받을 뿐이던 하인계급 이 외의 어떤 다른 계급의 인도인들과도 어울리지 않았다는 걸 선생님께서 기억해 주시기 바래요. 저는 인도인들에 대해 영국인들이 보이던 그 이상한 태도의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 아주 무의식적으로 그랬을 테지만 – 인도인들 모두를 피지배 민족으로 간주했다는 사실 때문이었지요. ”
‘I remember one returning from leave in England in the twenties. I went on to the train in Bombay and discovered that the other berth was occupied by an Indian. I am sorry to say that by that time I had become affected by the mentality of the ruling class in India and I said to the stationmaster, “I went to have the gentleman ejected.” He spoke absolutely perfect English and he could have taught me a great deal about India. It is one of the incidents of my life of which I am most ashamed. But you have to remember that in those days army officers did not associate with Indians of any class other than the servant class, to whom they just gave orders. I think that one of the chief reasons for the curious attitude of the British towards Indians – it may have been quite unconscious – was the fact that they were regarded as a subject race.’
인도인들에 대한 영국인들의 태도는 관련 당사자들의 사회적 배경에 따라 큰 차이가 있었다. 인도인들에 대한 편견은 영국군 동네나 상인 동네에서 인도인들과 조금이라도 접촉하던 사람들 사이에 가장 심했고, 산간 오지 가까운 데서 일하던 사람들 사이엔 그렇게 심하지 않았다고 흔히들 단정을 했지만, 이런 일반적인 법칙에도 예외는 많이 있었다. 인도인들을 검둥이라고 부르는 게 습관이 된 앵글로 인디언들이 있던가 하면, 반대로 병영 사람들이라고 부르며 가장 낮은 하층계급의 인도 사람들과 친하게 지내던 일반 사병들도 있었다.
사실 영국 사병들의 태도는 이상하게도 한 쪽으로 안정돼 있지를 못했다. “만약 어떤 군인이 인도인과 농담을 하거나 얘기를 하는 게 목격되고, 특히 똑같은 인도인과 두세 번 거듭 목격되다 보면, 그 군인은 야유를 받고, 백인 검둥이라고 불리어야 했지요.”
‘If a soldier was seen joking or talking to an Indian, especially the same Indian two or three times, he had to be jeered at and called a “white nigger”.’
그 당시 영국군 부대와 어떤 인도군 부대 사이엔 동지애 같은 게 있었는데, 특히 영국 군인들처럼 유머와 재치로 가득찬 구르카 부대 군인들 사이에는 특별한 동지애 같은 게 있었다. 이 에스 험프리 씨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자세히 설명을 했다. “구르카 군인들이 영국 군인들을 반길 때 대단히 좋아했는데 새끼 손가락을 들어올려 쭉 펴서 재 보이고는 영국 군인들에게 “아하, 보라 구, 영국 친구 토미 는 아주 크구먼.” 하고는 바닥에서 1/4 인치쯤 떼고는 말하기를 “구르카 군인도 거의 영국 군인만큼 좋다구!” 라고 말을 하고는, 마지막으로 엄지 손가락을 새끼 손가락 위로 더 높이 손톱이 거의 달락말락 할 때까지 위로 높이 들고는 “이건 다른 인도 군인들 거야!” 라고 했지요.”
‘It was their great joy when they greeted a British soldier to hold up their little finger and, giving the full length of it as a measurement, say to the British soldier, “Aha, look, British Tommy so big!” Then, taking off a quarter of an inch from the bottom they would say, “There, Gurkha soldier nearly so good as British soldier!” Finally, putting their thumbs still higher up the little finger until it almost touched the nail they would say, “This is the other Indian soldiers!” ’
인도인을 대하는 태도는 시간이 흘러가면서 변하기 시작했다. 초창기 인도에 갔던 사람들은 인종간의 친밀감이 전혀 없었고, 고위 관리나 최후까지 저항하던 태도가 분명치 않던 자신들의 파트너들로부터 유래한 지독한 편견이 자리잡고 있었다.
이에 대해 클라우드 오친레크 씨는 백인 우월감이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들의 태도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을 했다. “만약 선생님이 휴가를 받아서 히말라야 산길을 따라 말을 타고 간다고 가정해 보세요. 만약 한 인도인이 자기 노새나 당나귀를 타고 반대 편 길을 따라온다면, 그 인도인은 말에서 내려서 걸어가게 돼 있었지요. 마찬가지로 우산을 펼치고 다니던 인도인도 우산을 접어야 됐지요. 그런 얘기들이 참으로 우습게 들릴지 모르겠으나, 제가 처음 인도에 갔을 때 인도관청에서 일하러 새로 온 사람들에겐 그런 태도가 그 때까지 물들어 있었지요.”
‘Supposing you were on leave in the Himalayas and riding along a mountain track. If an Indian came along the other way riding his mule or his pony, he was supposed to get off. Similarly, an Indian carrying an open umbrella was supposed to shut it. It sounds ridiculous but that attitude was still being imbued into the newcomer to the Indian services when I first went out.’
초창기 여자들의 태도도 마찬가지로 배타적인 데가 있었다. 1893년 성인이 되서 인도로 돌아가 대전 발발 전까지 쭉 인도에서 살았던 노리 여사는 다음과 같이 기억을 했다. “우리는 인도인들과 전혀 어울리지 않았지요. 선생님이라면 혹 어쩌면 아주 상류층들과는 어울렸겠지만, 그런 인도인들은 정말로 걱정할 필요가 없었지요.”
‘We didn’t mix with the Indians at all. You mixed with a very high-up family perhaps, but you didn’t really bother about the Indians.’
세계대전으로 인해 초래된 변화로 인하여 구세대와 신세대 사이의 태도에는 현격한 차이가 있었다. 이에 대해 루퍼트 메인 씨는 다음과 같이 말을 했다. “제가 아버지를 사랑하고 존경했던 것만큼, 저의 조상들이 취한 태도를 혐오했지요. 그런 태도란 제가 인도군에 들어가서 인도 현지인 장교 밑에서 군대 생활하는 건 결코 용인하지 않겠다고 하던 아버님 말로 함축될 수 있겠지요.”
‘Much as I loved and respected my father. I abhorred the attitude adopted by my forebears, which culminated in him saying that he would never permit me to go into the Indian Army and serve under what he always called a native officer.’
1925년 인도로 돌아왔던 프랜시스 스마이스 씨는 이런 태도 변화와 영국의 여성해방 운동 사이엔 상당히 유사한 점들이 많이 있다는 걸 알게 됐다. “제가 인도에 있을 때 약간은 그런 게 있었지요. 당시 우린 인도인을 동등하게 막 받아들이기 시작하고 있었어요.”
‘In my day in India it was rather like that. We were just beginning to accept Indians as equals – just.’
그러나 한 가지 측면에서 변화가 항상 좋은 것만은 아니었다. 인도와 유럽 사이에 통신이 개선되고, 상업 비행기 회사들이 설립되어 항로에 도움을 주면서, 지금까지는 고향을 떠나 오랜 기간 여기저기 떨어져 살던 영국인들과 인도인들 사이의 친밀했던 대화의 끈이 끊어져 버렸다.
두 인종간의 심리상태는 적수관계보다는 상호보완의 관계로 다음과 같이 많이 묘사가 되었다. “그 인도인은 고분고분해서, 자기가 할 건지 못할 건지 덮어놓고 모든 걸 다 “예쓰” 라고 말하던 반면, 영국인들은 자기 주장이 더 세고 완고한 사람들이 되서 자신들이 끝까지 해낼 수 없으면 그 일을 맡지 않았지요.”
‘The Indian was pliant and would say “yes” to everything whether he was going to do it or not, whereas the British were more obstinate, more obdurate people and they wouldn’t undertake a thing unless they could see it through.’
그러나 영국인이 다소 거드름을 피우던지 시골 지주 같은 행세를 해도, 영국인에 대한 인도인들의 태도는 다소 상호보완적으로 봐주던 면이 있었다. “인도인들은 우리가 그런 식으로 행동하게 고무하면서, 유럽인들이 약간은 더 우월한 사람들이기를 바랬지요.”
‘They expected the Europeans to be rather superior, encouraging us to behave in that way.’
그러나 영국인들이 아첨을 즐겼던 것은 아니었다. 이에 대해 이안 스테픈 씨는 다음과 같이 말을 했다. “확실히 영국인들에게 아첨하는 사람들이 아주 많았어요. 사람들은 모든 종류의 속임수에 조심해야 했지요. 그러나 반대로 조심 그 자체도 선생님께서 생각한 게 아닐 수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에 위험했지요. 또한 오해로 여겨졌던 일이 어쩌면 진정한 호의가 될 수도 있는 법인데, 아무튼 아첨은 정상적인 사람들의 인간적 교류를 위해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진정한 감정일 수도 있지요.”
‘There was certainly a lot of sucking-up to the British. All sorts of tricks which one had to be wary about. But the wariness itself was a danger because it mightn’t be what you thought. What was being misconstrued might really be genuine affection. A genuine desire for normal, human contact.’
도덕 기준이 서로 다르고, 영국인들 관점에서 보면 겉으로 자주 불거져 나오던 다스투르 같은 뇌물 문제에 대해 옳다거나 그르다거나 하면서 편파적인 시각을 보였기 때문에 인도인들에 대해 불평을 하거나 동정심이 부족하게 되었다. 또한 힌두나 무슬림 문화도 거의 고려하지 않았다. 19세기 신교의 복음주의 태도 때문에 인도문화와 예술에 대한 폭 넓은 연구를 효과적으로 할 수 없었고, 특히 힌두교와 밀접한 연관이 있는 힌두 예술은 냉대를 받았다.
로살리 로버트 여사는 한 번 남 인도에 있던 선교회 동료를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그 당시 지방풍물이 자신에게는 어떻게 비추어 보여졌는지를 다음과 같이 회상을 했다. “식사를 하고 난 뒤 그녀는 저를 사원으로 데리고 내려갔지요. 암반 턱마다 조그만 호롱불이 켜져 있었고, 수백 개의 부조가 있는 아주 오래된 크고 멋진 사원이었지요. 조그만 빛들이 명멸하고 4 층 건물은 될만한 거대한 출입구는 불이 켜져 아주 환했지요. 그 곳은 동화에 나오는 나라 같이 아주 아름다워 보였지요. 하지만 다음 날 아침 그녀는 사원 안으로 우리를 데리고 들어갔는데, 그 곳은 정말로 혐오스러운 곳이었어요. 조그만 벽감 마다 희생 제물을 바친 우상들이 있었고, 거기엔 피가 흘러내렸지요. 아주 악취가 심하게 났고, 우상 옆에는 깜박거리는 불빛만이 어둠을 비추고 있었는데, 이 게 바로 그 안의 모습이었지요.”
‘After we’d had a meal she took us down to a temple. It was a wonderful temple, very old, with hundreds of carvings and on every ledge was a tiny lamp. All these little lights were flickering and this huge gateway, like a four-storey building, was lit up. It looked like fairyland it was so beautiful. The next morning she took us inside the temple – and it was revolting. All the little niches had idols where there had been sacrifices and the blood was spilt there. There was the stench and the darkness, just the flickering light by the idols, and that was the picture inside.’
기독교인들에게 힌두 철학은 아무런 호소력도 주지 못했다. “저는 힌두교에서 아무런 동정심도 발견하지 못했어요. 거지가 문 앞에 오면 보시는 좀 하지만, 그 거지가 음식을 구하려고 혹은 아파서 문 계단에 쓰러져 있어도, 이 사람들은 아무 것도 안 했지요. 그런 사람들 몸을 스치려고도 하지 않았지요. 그 사람들 종교가 그렇게 하는 걸 강제하는 모양이었어요. 그렇게 되면 종국엔 그 사람들도 카스트를 잃어버리게 될 거예요.”
‘In Hinduism I saw no compassion. A beggar would come to the door and their religion would make them give alms. But if that beggar, through want of food or illness, collapsed on their doorstep, they would do nothing. They wouldn’t touch him. Their religion forbade them to. They would lose caste.’
인도인들 입장에서 보면, 영국인들 문화의 여러 면들을 이해하지 못했고, 어떤 때는 깜짝 놀라기도 했다. 아이리스 포르탈 여사는 이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예를 들려 주었다. “제 남편이 봄베이에서 주지사 경호대를 지휘할 때였는데, 저는 시크교나 회교도 군 인부인들과 자리를 함께 할 절호의 기회를 갖게 됐지요. 수다도 떨고, 아이들 복지나 구호 문제, 병원 일 등을 하면서 대단히 많은 시간을 아래 쪽에 있는 군 주택지에서 함께 보내곤 했지요. 그 여자들은 인생에 대한 자신들의 견해를 저에게 피력했고 저도 역시 그 여자들에게 제 견해를 말해주곤 했는데, 그 중 하급장교 부인이 “영국 여자들은 속 옷만 입고 뛰어 다닌다면서요? 그게 사실인가요?” 하고 물어서 “아니요. 그렇지 않아요.” 하고 대답을 하자, “바깥 양반이 그러는데 볼 일이 있어 웰링톤 클럽에 갔다 온 적이 있었는데, 속 옷만 입고 돌아다니는 걸 보았다는 거예요. 저는 그 게 아주 꼴불견이라고 생각하는데요.” 라고 말을 했지요. 어쨌든 그 여자들은 순진한 영국여자 애들이 짧은 바지만 입고 테니스 치는 걸 보고 그랬지요.”
‘When my husband commanded the Governor’s Bodyguard in Bombay I had a great time with all the wives of the troops, Sikhs and Mohammedans. I used to spend a great deal of time with them down in the lines, not only doing child welfare and first aid and hospital work, but just chatting. They used to give me their views about life and I used to give them mine, and I remember the wife of the jemadar saying, “The jemadar-sahib tells me that English ladies run about in their underpants. Is it true?” I said, “Oh, no, of course they don’t,” and she said, “Oh yes they do. The jemadar-sahib says that he’s been to the Wellington club on duty and he’s seen them running about in pants. I think it’s absolutely disgusting.” Of course, they were just innocent English girls playing tennis in shorts.’
인도인들이 점잖치 못하다고 여겼던 일 중에는 영국인들의 단정하지 못한 흐트러진 옷 차림이나 행동 뿐만이 아니었다. “여행객들이 식당 칸에서 소고기를 먹을지도 모른다고 해서, 봄베이에서 캘커타까지 가는 철로가 자기 시로 지나가지 못하게 했던 회교 군주도 있었지요. ”
‘There was the Maharajah who refused to allow the railway from Bombay to Calcutta to pass through his capital, because travellers might be eating beef in the restaurant car.’
챨스 롸이트 씨의 회상에 따르면, 영국군이 도로행군을 하는 동안 이따금 부대 주방장이 소를 도살해서 한 바탕 심각한 소동이 일어나곤 했었다. “현지인들이 이런 사실을 알아버려 가지고는 거의 캠프에 돌을 던질 번 해서, 이들을 해산 시키느라고 급히 출동을 해야 했지요.”
‘The natives got to know about this and nearly stoned the camp and we had to turn out in a hurry to disperse them.’
그 후로 영국 군인들은 인도에는 금기식품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했다. “정통 힌두교인은 고기를 먹지 않았지만, 선생님이 주는 술은 어떤 술도 아주 흡족하게 마셨지요. 반면 회교도 친구는 돼지고기만 빼놓고는 어떤 종류의 고기도 먹었지요. 그러나 엄격히 말하자면, 어떤 종류의 술도 사실은 별로 마시고 싶어하지 않았어요.”
‘The orthodox Hindu would not eat meat but was quite content to drink any liquor that you might offer him, while your Mohammedan friend would eat any kind of meat other than port but, strictly speaking, would not drink any kind of liquor.’
확실히 영국인과 인도인 사이에 넘을 수 없는 가장 큰 사회적 장벽은 푸르다 라고 하는 부녀자의 거처를 남의 눈에 띄지 않게 하는 제도였다. “만약 영내 파티에 참석할 수 없다면, 사람들을 사귀는 게 좀 어렵지요. 만약 선생님께서 남자들만 초청하면, 사람들과 동등한 입장을 만들진 못하지요.”
‘If you can’t have a partie a quatre, it’s rather difficult to get to know people. If you only invite the man you don’t make the same equation with people.’
당찬 마나님들은 남자들 시선에서 여자 손님들을 막아주려고 잔디밭에 스크린을 설치한 채 차 파티나 푸르다 파티를 열곤 했다. 그러자 다른 사람들이 와서 그 광경을 보고 크게 용기를 얻었다. 이에 대해 아이리스 포르탈 여사는 다음과 같이 설명을 했다. “저는 하이더라바드에서 정말로 좋은 친구를 한 명 두었는데 그 친구의 남편은 제 남편의 절친한 친구였지요. 제 남편 친구라는 사람은 아주 서구화된 세련된 모습을 가진 교양 있는 사람이었지만, 그 부인은 구식으로 완전히 푸르다에 갇혀 살던 영국인이라고는 전혀 알지 못하던 사람이었지요. 그 부인과 친해지는 데는 제가 우루두어를 잘 못했기 때문에 시간이 좀 필요했지만 결국 친해지게 되었고, 아주 서로들 자주 찾아보고 살았지요. 제가 그녀를 방문하면, 함께 야자를 먹고, 담배를 피웠지요. 그리고 나서 제 남편을 만나고 싶어해서 만나게 해 주었지요. 우린 모두 차 테이블에 둥그렇게 둘러 앉았는데, 양가집 규수는 자기 남편 앞에서는 말을 하면 안되게 돼 있었기 때문에 결코 말을 하지 않았어요. 저도 같은 이유 때문에 많은 말은 될수록 삼가 했지요. 남자들은 이에 아주 당황해 가지고, 활기찬 파티가 되지 못하고 말았어요. 그러나 파티가 끝나고 그 부인의 남편에게 “부인께서는 제 남편을 어떻게 생각하시던가요?” 하고 물어보자, 그 남편이 “아, 제 집사람이 그러던데 아주 덩치가 크고 빨갛게 생겼다고 하던데 이렇게 얘기해도 괜찮은지 모르겠네요.” 라고 대답을 했지요.”
‘I had a great friend in Hyderabad whose husband was a close friend of my husband’s. He was a very Westernized, sophisticated man and she was old-fashioned and completely in purdah and didn’t know any English at all. It took me a little time to make friends with her, chiefly because my Urdu was not good enough for her, but we did make friends eventually and we saw a good deal of each other. I used to go and visit her and have a palm with her and smoke a cigarette. Then she wanted to meet my husband, so I arranged a meeting. We all sat round the tea table and she never spoke because, of course, a well brought-up Indian lady won’t speak in front of her husband. I didn’t speak much for the same reason. The men were very, very embarassed and it wasn’t a very lively party. But after it was over I asked her husband, ‘What does Begum-Sahiba think of my husband?’ ‘Oh,’ He said, ‘I’m afraid all she will say is, “Very large and red!”’
라즈들의 인도통치가 끝나 가던 말 년쯤이 되서야 비로소 인도 여자들이 사회에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 것은 혁명적인 변혁이었고, 만약 그러한 변화가 50 년 전에 일어났더라면 인도역사는 아마도 전부 다 달라졌을 겁니다.”
‘It was a revolutionary change and if it had occurred fifty years before the whole history of India would have been different.’
천천히 권력 분배를 향한 피할 수 없는 독립운동이 그 성향을 드러내었다. 1919년의 암릿싸르 <인도 북서부 펀잡 지방의 상업도시로 시크교의 중심지> 대학살과 이를 응벌하겠다는 다이어 장군의 결정에 대한 앵글로 인디언들의 지지 때문에 결코 치유될 수 없는 감정이 양 측에 생기게 되었다. 총독부와 인도군의 현지화는 대전이 끝나자마자 바로 시행에 옮겼지만, 인도군에는 이를 진지하게 적용시키지 않았다. 인도인 밑에서 영국인 장교가 복무하게 되는 일을 피하기 위해 특수 별동대 같은 부대가 생겼다.
이에 대해 클라우드 오친레크 씨는 이 부대가 인도인의 감정에 나쁜 영향을 주었다고 다음과 같이 말을 했다. “인도장교 자신들도 이 부대에 들어가는 걸 영국군 장교들이 있던 이 전 부대보다 더 열등한 부대에 배속하는 일로 생각들을 했지요. 결과적으로 이런 인도부대는 경멸과 기피의 대상이 되었지요.”
‘The Indian officers themselves realized that they were being put into units which might be reckoned as inferior to the British officers’ units. The only result was that these Indian regiments became objects of contempt.’
그러나 인도에 샌드허스트 사관학교가 설립되면서 그런 문제를 개선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당시 첫 교관으로 있었던 레지날드 쎄이보리 씨는 다음과 같이 말을 했다. “저는 인도 사관학교에 있던 때를 군대 경력뿐만 아니라 정치적 사고에서도 마찬가지로 제 인생의 분수령으로 생각을 하지요. 맨 처음 제가 만난 친구들은 수준 면에서 보면 젊고, 중간 계급인 인도인들이었는데, 모두 다 참신하다는 생각을 했지요. 이들은 아주 솔직하고 상당히 똑똑하고 영민한 사람들이었지요. 그래서 솔직하게 제 자신에게 “하긴 인도군에 있는 당신네 영국인 장교들이 인도에 대해서 뭘 알겠어. 기껏해야 당신네가 아는 거라곤 하인들과 원래 영국군에 있던 인도병들 뿐이지” 라고 말을 했지요.”’
‘I regard my time at the Indian Military Academy as a watershed not only in my military career but in my political thinking. For the first time I met young, middle-class Indians on level terms and I found all these young men fascinating. They were very outspoken, highly intelligent, and one of the first remarks I had levelled at me was this, “You British officers of the Indian Army don’t know India. All you know are your servants and your sepoys.”’
상업엔 공무원과 같은 정도의 적합한 자질을 가진 인도인도 부족했고, 또한 상업을 하려면 자신의 신분을 낮춰야 한다는 두려움 때문에 인도화가 지지 부진하게 이뤄지는 중요한 이유로 많이 거론되었다. 또한 인도인들은 여전히 최고의 관리자 감을 만들어내지 못한다는 얘기도 있었다. 이 말은 결론적으로 인도인에게 보다 높은 관리자 역할을 맡기는 일도, 책임감을 갖고 벗어부치고 일에 매달리는 근성을 보였던 젊은 영국인들이 있다는 이유 때문에 30년대 상황으로 다시 돌아가게 되었다. 그런 감정이 지속되어 젊은 인도인들은 누군가 천한 사람이 더러운 일을 해주기를 방관하는 경향이 훨씬 더 심해서, 영국인들이 하던 방식대로 일을 진척시키지 않았다.
그러나 독립 후 젊은 영국인들에게 기대하던 모든 일을 인도의 젊은이들이 하겠다고 했을 때 놀랍게도 일대 전환이 일어났다. 인도는 마침내 인도 본연의 모습으로 되돌아가게 되었고, 인도인들은 인도에 필요한 것이 무엇이든 할 준비가 돼 있었다. 대부분의 경우 초기의 지지 부진하던 인도화가 있고 난 뒤에야 비로소 직장에서 업무 파트너로 일반 인도인들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이에 대해 래드 클리프 싸이드 보텀 씨는 다음과 같이 회상을 했다. “벵갈 항공사에 대단한 반대가 있을 거라는 예상을 무릅쓰고 입사를 한 인도인이 있었지요. 그러나 하는 일도 아주 낮 설고 전통의식도 아주 뿌리가 깊어서 걱정을 했지만, 그 사람이 입사를 하자 절대 다수의 조종사들은 그 사람이 인도인이라는 사실을 그리 염두에 두지 않았지요. 그런 뒤 아주 빠른 속도로 인도의 현지화가 이뤄졌지요.”
‘In the Bengal pilot Service we had one Indian who joined in the teeth of what was anticipated to be great opposition. But so strange is the service and so deep is tradition that the moment he joined the vast majority of the pilots took no notice of the fact that he was Indian at all. After that there was fairly rapid Indianization.’
이런 일 같이 사소한 변화와 예외는 덮어두려고 했던 게 당시 사람들의 일반적인 태도였다. 영국인들의 관점에서 보면, 마하라자스 <회교 군주들>나 왕들은 대부분 대영제국 인도 통치권 밖에 있던 사람들로, 구태의연한 인습 위에 서있던 사람들이었다.
그런가 하면 영국식 규범에 관심을 갖고있던 아주 교양 있고 세련된 “브린디언” 들이 많았는데, 이 사람들은 스포츠도 많이 하고 만찬의 주인 노릇도 하면서 거의 영국인과 대등한 수준 이상으로 지냈다. 심지어 그렇지 않은 사람들조차도 자신들만의 기이한 행동에 빠져들게 내버려두지는 않았다. 정치 관료들의 지침서 첫 장에 보면 훌륭한 관료는 혼자서도 잘 해나간다는 말이 있었다.
대량의 실정이나 무도한 공공 행위들의 예에서 보면, 총독 대리 사무관은 공식적으로 군주나 군주가 속한 지방을 다스리는 일에만 간섭을 했을 뿐, 회교 군주인 마하라자가 부를 쌓고 호화롭게 그 부를 쓰는 일에는 일체 간섭을 하지 않았다. 회교 군주들 중 가장 부유한 사람은 자신의 천박한 행동 때문에 유명하게 된 하이더라바드의 니잠이란 군주가 있었다. 그 사람은 경매에 참여해서 골동품 전축들을 사들였는데, 아무튼 돈 쓰는 걸 자랑으로 알고 살던 사람이었다. 한 번은 여가 시간에 자기 원대로 아무 신발이나 골라 신을 수 있게 마드라스에 있는 스펜서 가게로 가서 그 매장에 있던 신발 전부를 사들이는 모습이 목격되기도 하였다.
다르방가 지방의 회교 군주도 낭비벽에선 똑같이 변덕스러운 인물이었다. “이 사람은 그루프트 가게에 별종견이 있는 걸 보고, 즉시 이 개를 사가지고 인도로 수입을 해왔지요. 그 사람은 자기 개를 무척이나 보여주고 싶어했는데, 아무튼 한 남자가 개가 오물을 남겨놓는 즉시 그 장소를 닦게 변성 알코올 병과 걸레를 들고 뒤를 졸졸 따라다녔지요. 그래서 이런 몇몇 가구들 중엔 – 그 것도 가장 아름답고 현대적인 가구들이었는데 – 지독한 냄새들이 났어요. 그런데 아주 서글프게도 좋아하던 대여섯 마리 되던 개들은 궁전에 살면서 몹시 야단법석을 떨던 반면, 작년에 좋아하던 애견들은 개장으로 보내 가둬놓고 다시는 못나오게 했지요. 이렇게 개장에 가둬놓고 도통 아무 관심도 갖지않던 아름다운 순종 혈통의 개가 자그마치 30 - 40 마리씩이나 볼 수 있었지요.”
‘He would see that a particular dog had won at Gruft’s and he would immediately buy this dog and import it into India. He was very keen to show you his dogs and a man would follow regularly behind with a bottle of methyllated spirits and a rag to wipe over the place as soon as the dog had left his calling card. Some of these bits of furniture – the most beautiful modern furniture – smelt terribly. It was really very sad because five or six dogs in favour at the time lived in the palace and were made a great fuss of, whereas the dogs that had been favourites last year were relegated to the kennels and never came out again. You’d see thirty or forty beautiful pedigree dogs in these kennels which were never bothered about.’
또한 잔디밭에 감춘 스프링 쿨러로 손님에게 물을 뿜어대거나, 의자에 페인트를 칠해놓고 짓 굳은 장난을 하던 회교 군주도 있었다. 어떤 군주는 저녁 만찬용 테이블 위에 술이며 시가를 가득 실은 장난감 기차를 손님 주위로 돌아다니게 해 놓고는, 목마른 손님이 손을 뻗어 물건을 잡으려고 하면 기차 속도를 높이던 군주도 있었다.
카시미르의 회교 군주 같은 이는 자신만의 독특한 크리켓 법칙을 만들어냈다. 이에 대해 에치 티 위컴 씨는 다음과 같이 말을 했다. “오후 3 시쯤에 마하라자가 몸소 경기장으로 내려오자, 악대는 캐시미르 지방의 노래를 연주해 주고, 오른 손을 이마에 대고하는 정중한 인사로 경의를 표했지요. 그리고 나서 특별 텐트로 가서 긴 물 파이프 담배에 불을 붙이고는 조금 앉아있다가, 4 시 반쯤 해서 타석에서 배트를 치기로 했지요. 그 사람 쪽 팀이 하던 우리 쪽 팀이 배팅을 하던 그 건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지요. 두 명의 수행원이 안장 받침을 입혀주고, 두 명의 수행원이 더 가세해서 마하라자의 장갑을 끼워주었지요. 그런 다음에 누군가가 마하라자의 방망이를 가져와서, 마하라자는 머리에 커다란 터번을 하고 아주 근엄한 표정을 지으며 삼주문으로 걸어나갔지요. 그 경기에서 저는 우연치 않게 투구를 하게 됐는데, 제 첫번째 공이 그 사람 크리켓 기둥을 맞추었지만, 삼주문 키퍼는 번개 같이 재빨리 “노 볼!”하고 소리를 질러서 시합을 계속했지요. 그 경기에서 마하라자가 쳐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발로 공을 받는 반칙 뿐이었어요. 15 - 20 분간 배팅을 한 뒤 피곤하다고 말하고 나서, 타자가 공을 발로 받는 바람에 정식으로 아웃이 선언되었지요. 그 사람 차례에 심판이 매긴 점수는 맹세코 50 점도 채 안 됐지요.”
‘At three o’clock in the afternoon that Maharajah himself would come down to the ground, the band would play the Kashimir anthem, salaams were made and he then went off to a special tent where he sat for a time, smoking his long water-pipe. At four thirty or thereabouts he decided he would bat. It didn’t matter which side was batting, his own team or ours. He was padded by two attendants and gloved by two more, somebody carried his bat and he walked out to the wicket looking very dignified, very small and with an enormous turban on his head. In one of the matches I happened to be bowling and my first ball hit his stumps, but the wicket keeper, quick as lightning, shouted ‘No Ball!’ and the match went on. The only way that the Maharajah could get out was by lbw. And after fifteen or twenty minutes batting he said he felt tired and he was duly given out lbw. What the scorers did about his innings, which was never less than half a century, goodness only knows.’
인도 사회의 다른 분야에 대한 영국인들의 태도는 좀 관대한 편이 못 되었다. 또한 온정주의에 대한 영국인들의 관념 때문에 많이 배운 사람과 반밖에 못 배운 사람들 사이에 구분을 두게 되었다. 영국인들은 하층 계급들로부터 이익을 갈취하고, 시골 사람들을 이용하는 자들이라고 해서 가게 주인, 고리대금 업자, 인도인 변호사들을 별로 좋지않게 생각들을 했다. 또 좋지않게 생각하던 사람들은 엄격한 브라만들로 훌륭한 행정부 관리들과 사사건건 충돌하던 남인도 같은 지역에서 살던 힌두 계급들로, 힌두 교도들은 교인이 아닌 사람들이 힌두 교인들이 먹는 샘물에서 물을 길어다 먹지 못하게 엄격히 금지를 했다.
그런 게 유행을 해서 바브 <현지인 직원> 타입 사람들의 인격이 심하게 훼손되었다. “우린 부당하게도 그 사람들을 놀려대곤 했지요. 왜냐하면 그 사람들은 우리가 만들어 놓은 룰들을 잘 이해하고 있기 때문에 그랬지요.”
‘We used to make fun of them, very unfairly, because they were interpreting rules which we had made.’
영어를 잘못하거나 과장되게 영어를 표현하던 현지인 사원들의 농담은 앵글로 인디언 모두에게 끊임없이 즐거움을 주던 재미의 원천이었다. 바브 <현지인 직원>들에게 자주 말썽꾼으로 비치던 송사나 논쟁을 좋아하던 벵갈인들에 대해 전통적으로 신임을 하지 않았던 원인은 바브 <현지인 직원>들의 인격 훼손과 깊은 연관이 있었다. “그 사람은 인도 북쪽 지방으로부터 온 아주 훨씬 더 남자답고 직선적인 타입과 똑같은 방법으로 많은 영국인들에게 호소를 하지 않지요.”
‘He doesn’t appeal to many British people in the same way as the very much more manly, direct type from upper India.’
이런 말썽꾼에 대한 일반적인 혐오감이 있었고, 그 다음엔 정치인이나 국회의원에 대한 반감이 널리 퍼져있었는데, 그 반감은 인도독립에 대한 열망에 영향을 주는 사람들이라는 이유 때문에 생긴 게 아니라, 정치인들이 사실은 아주 빈약한 정신적 역량을 가진 사람들이라는 이유 때문에 생겼다. “그런 반감은 정부기관에 들어가서 자신들이 무뢰한이며 실패자들로 생각했던 사람들 밑에 다시 들어간 걸 알게 된 젊은 인도인들에게는 참으로 견디기 어려운 감정들이었지요.”
‘It was very hard on the young Indians who had got into government service to find themselves put underneath people whom they regarded as layabouts and scallywags and failure.’
사실 그 당시 더 좋아하던 쪽이 있었다. 이에 대해 필립 메이슨 씨는 다음과 같이 시인을 했다. “사람들은 자신이 평지 사람들보다 고지 사람들을 더 좋아한다는 걸 깨달았지요. 식민지 상황에서 영국인 관리들은 순수하고 순박한 사람들처럼 항상 일만 했지요. 평지에 있던 아이들이 조용히 학교에 갔다 집에 돌아오는 착한 동물들 모양 학교를 나온 반면, 가르왈에서는 강아지 새끼 같이 소쿠리에서 뛰쳐나와 학교를 나왔지요. 그 사람들은 영국에 있는 애들이 하는 대로 서로 밀고 싸우고 달리고 소리를 치면서 왔지요.”
‘One did find oneself liking the hillman more than the plainsman. British officers in colonial situations always do like the simple, unspoilt people. In the plains children would come out of school quiet, sober little creatures walking home, while in Garwhal they used to come out like puppies tumbling out of a basket. They would come roaring out, racing and fighting and pushing each other about just as children might do in England.’
그러한 많은 생활태도는 인도군을 특징 짖던 영국장교와 인도군 사이의 독특하고 헌신적인 우정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클라우드 오친렉크 씨는 다음과 같이 그런 말에 동감을 표시하였다. “그런 태도가 온정주의에는 성가신 일이었지만, 임무를 떠나서 부하들과 관계를 하는 데는 확실히 차이가 있었어요. 아침 구보 뒤에 부하들은 즉시 자기들의 현지 옷으로 갈아 입었어요. 저녁 때면 장교들도 머프티 라고 하는 평상복 차림으로 내려가곤 했지요. 군기라든가 경례를 하는 일들은 똑같았지만, 분위기만은 사뭇 달랐어요. 그래도 이 사람들에게 명령을 내리는 데는 별 문제가 없었지요. 그들은 진정으로 자유민들이었고, 그런 점에서 전적으로 차이가 있었지요.”
‘It bothered on paternalism but the difference was in your relationship with the men off duty. After a parade in the morning the men immediately got into their own native clothing. In the evening the officers would go down in plain clothes, in mufti. The discipline, the saluting and all that sort of thing was just the same but the atmosphere was quite different. There was no question of ordering them about. They were yeomen really, and that made all the difference.’
에프 제이 딜런 씨는 가장이 된다는 건 어떤 책임을 수반하는 일이었다고 다음과 같이 말을 했다. “부대에 배속하는 날부터 당신 휘하에 들어와서는 영국군에서 보다 훨씬 더 개인적인 방법으로 당신 부하가 됐지요. 그가 어디 출신이고, 가족은 어떻고 하는 모든 걸 알았지요. 어쩌면 그 사람이 살았던 시골에도 가 보고, 실제로 그의 부모가 어떤 사람인지도 속속들이 알았지요. 문제가 생기면 당신에게 전적으로 의지를 했어요. 두르바 <군주의 아침 접견>가 있던 인도군에는 아주 일반적인 관습이 하나 있었는데, 그 건 부대장이 총독임관 장교나 하사관 또는 참석하고 싶어하는 일반 사병들 중 어느 누구라도 만났다는 거지요. 어떤 사병도 부대장 앞에서 거리낌없이 질문을 할 수 있어서 사병들은 그런 데를 좋아했지요.”
‘From the day a man joined his unit and came under your command he became yours in a much more personal way than in the British Army. You knew all about him, where he came from, what his family was. You probably visited his village and actually knew his parents. And he certainly relied on you if ever he was in trouble. There was a pretty general custom in the Indian Army of durbar, when the Commanding Officer would meet the whole of his Viceroy’s Commissioned Officers and NCOs and any of the men who wanted to attend. Any man could raise any question he liked there.’
총독 임관 장교는 중간 입장의 사람으로, 경험이 미진한 영국군 장교들 바로 옆에 서있었는데, 그야말로 신이 보낸 신사들이었다. 그들은 수바다르 <총독 임관 고급장교>, 리살다르 <수바다르와 동격인 인도 기병장교>, 제마다르 <총독 임관 하급장교>들 이었다. “그 장교들은 절대로 당신을 위해 주고, 군 복무 내내 도와주지만, 아무 도움 없이도 당신이 그 일을 잘 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정말로 당신이 직접 하게 해줄 거예요.”
‘They feel absolutely for you and help you all along the line, but if they think you can do it without help they’ll jolly well make you do it.’
자신들의 특기를 갖고 무술 경주를 열던 것에서 유래한 세포이 <원래 영국군에 있던 인도병>들은 인도의 여러 다양성을 대표하였다. “일반적으로 구르카 용병들은 아주 훌륭한 산악 군인들이었고, 시크 출신 군인들도 아주 인내심이 강하고 용감해서 한 번 내린 명령은 말 그대로 임무를 완수했지요. 또한 인도군의 50%에 해당하는 펀잡 지방의 힌두 군인들도 아주 성격이 유순해서 통솔이 잘 됐고 훈련도 쉽게 되었지만, 시크나 구르카 용병들 수준에는 한참 미치지 못했지요. 그리고 인도병들은 더 남쪽에서 왔는데, 쟈트족은 <펀잡 신드지방의 인도 북.서부에 사는 인도 아리안계의 민족> 방어에 아주 야무지고 훌륭한 사람들로 외모나 말투가 영국의 노포크 사람과 아주 흡사했지요. 그 다음 도그라스나 가르 왈리스 같은 고산지대 군인들이 왔고, 그들 뒤로 푸나 근방에 위치한 훨씬 더 남쪽에서 온 군인들이 있었지요. 또한 마하라타스인들도 아주 용감하고 그렇게 평가를 받는 사람들이었지만, 보다 북쪽 지방에서 온 군인들처럼 산악지대엔 그다지 정통하지는 않았지요. 그리고 펀잡 지방에서 기술병이나 공병, 지뢰 공병을 받았는데 일부는 U.P주나 마드라스에서 왔는데, 구 마드라스 군의 후손들인 마드라스 공병이나 지뢰 공병 같이 모두 다 아주 훌륭한 군인들이었지요.”
‘Generally speaking the Gurkhas were very, very fine mountain soldiers. The Sikhs were very tenacious, very brave, and would carry out orders to the letter. The Punjabi Mohammedan troops, who formed something like fifty per cent of the Indian Army, were very biddable, very leadable and easily trained but never quite up to the standard of the Sikh or the Gurkha. Then came the Indian troops from further south; the Jat, very heavy, solid and wonderful in defence, very similar in outlook, speech and everything else to the Norfolk man. Then came the soldiers from the foothills, the Dogras, the Garhwalis and after them a big belt of soldiers from much further south based on and around Poona; the Maharattas, very brave and to be reckoned with but not quite as at home in the hills as the troops from further north. Then you got the Sappers and Miners, the Engineers, some from the Punjab, some from the UP and some from Madras, like the Madras Sappers and Miners who were descendants of our old Madras Army – all of them excellent troops.’
원주민 폭동이 있고 난 뒤, 이런 인종들이 다른 그룹으로 쪼개지면서 혼성부대가 만들어졌는데, 그 이유는 만약 종교가 서로 다른 4 개의 중대가 같이 근무를 한다면, 폭동이 훨씬 덜할 거라는 생각에서 비롯되었다. 클라우드 오친레크 씨가 있던 제 62 펀자비 부대는 그런 전형적인 혼성부대로 라즈푸트나 지방의 유명한 전사부족의 후손들로 이루어진 라즈푸트 중대, 펀잡 지방에서 온 시크 중대, 라왈핀디 북쪽 산악지대에서 온 펀자비 회교 중대, 나머지 중대는 전선에서 이동해 온 중대로 편성되었다.
아무튼 4개 중대는 완전히 서로 다른 중대였다. 시크 교도들은 결코 머리를 자르지 않았다. “그 사람들은 술은 먹었지만 담배는 피우지 않았고, 반대로 회교 무슬림들은 머리와 몸의 털을 깎고 담배는 피웠지만 술은 먹지 않았지요. 반면 라즈푸트들은 담배도 피고 술도 먹었지요. 이들은 함께 식사는 하지않고 각 중대 고유의 방식대로 격리되어 떨어져 살았지만, 모이면 함께 즐겁게 어울렸지요.”
‘He’s allowed to drink but he’s not allowed to smoke. The Moslem shaves his head and shaves his body and he smokes but doesn’t drink. The Rajput smokes and drinks. They wouldn’t eat together and each company lived its own separate life, but they got on very happily together.’
폭동 때 시크나 구르카인들 같이 영국을 지원했던 부대들은 원칙적으로 자신들 종족으로만 된 부대 단위를 유지했고, 아주 우수한 부대로 알려져 있었다. 이런 부대를 지휘하고 총괄하는 게 더 수월했는데, 장교와 사병들 사이엔 끔찍이도 서로 헌신적이었고, 자부심도 대단해서 영국 장교들은 자신 있게 자기 휘하의 병사들이 세계 최강의 군인들이라고 선언할 수 있을 정도였다.
루이 르 마르찬드 씨는 구르카 병을 다음과 같이 단언했다. “그 사람들은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산악 부대로 잘 알려져 있었지요. 자부심도 대단하고, 아주 쾌활했으며, 단순한 사람들이었지요. 그 사람들은 사자만큼 용감해서, 선생님이 내리고 싶은 명령은 어떤 명령이든 복종을 했지요.”
‘They were well known as being the finest mountain troops in the world. Very proud, very gay, very simple. He’s as brave as a lion and he’ll obey any order you like to give.’
레지날드 쎄이보리 씨가 데리고 있던 시크 교도들도 구르카 용병들과 마찬가지였다. “시크들은 신체적으로 그 세계가 만들어 낼 수 있을만한 최상의 인종이었어요. 세상에서 가장 흥미로운 사내 종족들 중 한 종족이었지만, 반면 지휘하기가 가장 까다로운 종족이기도 했지요. 시크들이 소리칠 때가 항상 느껴지는데, 선생님께서도 그 사람들이 달려 다니는 소리를 들을 수 있을 거예요. 그러면 마음이 흐뭇해지고 그런 것들이 그들 자신들과 어떤 연관이 있는 듯 생각이 들지요. 그러나 대오에서 침묵이 흐르면 뭔가 또 말 못할 음모가 숨어있구나 간파하고서는 인도군 장교를 보내서 “자네가 내려가 좀 살펴보게. 내 직감인데 너무 조용해 기분이 이상하군. 무슨 음모를 꾸미는 거 같아.” 나중에 보면 그게 사실대로 들어맞았지요. 또한 길게 말아올린 수염과 터번을 두른 시크 개개인의 모습은 사람들에게 무서운 인상을 주었지요. 아마 선생님께서도 이들이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거나, 이빨을 쑤시거나, 아니면 수염을 말아올리면서 일반적으로 자신의 외모를 될 수 있는 대로 최대한 이용하는 걸 보게 될 거예요. 시크 교도들은 자신을 과대평가하는 자만심 같은 버릇들이 있어서 경쟁 상대에게 폼을 잡게 돼 있었지요. 예를 들면, 선생님이 철도역 플랫폼을 걸어 내려가면서 그 남자를 보고는 “흠, 어흠” 하면서 콧수염을 비비 꼬아 올리면 그런 게 바로 도전적인 일이 되었지요. 가끔 하키 채로 싸움을 벌이다 하키 채를 부러뜨리고는 나 몰라라 하던 놈들이 부대에 많이 있었지요. 그래서 선생님이 “또 무슨 사고야! 왜 그 사람을 쳤나?” 하고 물으면, “아, 글쎄 제가 플랫폼을 걸어 내려가고 있는데, 그 놈이 몇 개 안 난 콧수염을 비비 꼬면서 “흠, 흠!” 하며 장난을 치며 지나가잖아요” 라고 대답을 했지요. 이 사람들은 당신을 잘 알 때까지는 완고한 성격들이라서 차렷자세로 서 가지고는 “예, 대장님.” “아니요, 대장님.” 같은 말만 했지만, 이 사람들을 속속들이 잘 알게 될 때나, 농담을 하고 웃을 수 있는 단계에 도달할 때쯤 되면, 완전히 이 사람들을 당신 수중에 넣게 됐지요. 아무튼 선생님께서 지휘하는 부하들이 갖고있는 놀랠만한 점이라는 게 바로 이런 정신으로 그 사람들은 그런 정신을 마음 속에 갖고 있었어요. 그러니 우리가 그 사람들을 자랑스럽게 생각했던 것도 알고 보면 하나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지요.”
‘They are physically as fine a race of men as the world can produce; one of the most interesting races of men in the world and one of the most difficult to command. I always felt that when they were shouting and you could hear them running about the place, then they were happy, they had something to do with themselves. When there was a silence in the line then I always had an idea that something was brewing and I used to send for an Indian officer and say, ‘You go down to the lines, it’s too quiet for my liking, something is hatching.’ ‘They are physically as fine a race of men as the world can produce; one of the most interesting races of men in the world and one of the most difficult to command. I always felt that when they were shouting and you could hear them running about the place, then they were happy, they had something to do with themselves. When there was a silence in the line then I always had an idea that something was brewing and I used to send for an Indian officer and say, ‘You go down to the lines, it’s too quiet for my liking, something is hatching.’ And very often it proved to be true.
The Sikh with his turban and his long roll of beard is a man to whom personal looks mean a tremendous amount. You would see him looking at himself in the glass, picking his teeth or rolling his moustache and generally making the most of his looks. For instance, it’s a challenge to any other man if, as you walk down the platform of a railway station you twirl your moustache and say, ‘Hmm, hmm,’ to the man as you pass. We had many cases in the regiment of chaps who came to blows, very often with hockey sticks, broken heads and heaven knows what. You’d say, ‘What’s the trouble! Why did you hit him?’ ‘Oh,’ he says, ‘I was walking down the platform and he twirled his little moustache and went, “Hmm, hmm!”’
Until he knew you he was a little bit stiff. He stood to attention and he’d say, ‘Yes, sir, no, sir.’ But when you did get to know him and when you could reach the stage of being able to pull his leg and get a smile out of him, then you had him absolutely in the hollow of your hand. They had that spirit in them which was a wonderful thing amongst men you command. No wonder we were so proud of th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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