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인도를 떠나며 인도 이야기
2007. 6. 9. 17:25ㆍ일반/역사·영어·컴퓨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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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인도를 떠나며
Quit India
“벵갈 지방에 그 지역 사람들 모두가 대단히 좋아하는 재판관이 있었어요. 그 사람은 그 지역 주민들의 대부로, 말썽이 생기면 모두들 그 재판관에게 왔지요. 그 사람은 인도를 아주 사랑했고 인도에 헌신적이었으며, 다른 사람들처럼 오랜 시간 인도를 위해서 일을 했는데, 드디어 사리를 입은 두 여인의 손에 최후를 맞게 됐지요. 두 여인은 판사의 방갈로까지 따라와서는 하인에게 진정할 게 있다고 하면서 판사님 좀 만나 뵙고 싶다고 했지요. 그래서 판사가 베란다로 나오게 되었고, 진정서를 받으려고 자기 손을 내밀면서 곧장 여자들에게 다가가자, 그 여인들 중 한 여자가 사리에서 총을 꺼내어 그 사람을 쏴 죽였지요.”
‘There was a judge in Bengal, who was greatly loved by all the people of his district. He was their ma-bap, and they all came to him with their troubles. He loved India, he was devoted to India and like so many other men he worked long hours for India, and yet he met his end at the hands of two girls in saris. They came along to his bungalow and told his servant that they wanted to see the judge-sahib, as they had a petition to present to him. The judge came out on to the verandah and directly he got close to the girls with his hand out to receive the petition one of the girls pulled a pistol from her sari and killed him.’
마르죠리 캐시모어 여사는 다른 영국인들처럼 그 사건이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아서 국회 모 당에 있던 인도 친구에게 설명을 구했다. “여기 당신이 당신 민족에 봉사코자 모든 걸 희생하면서 목숨을 바쳐가며 일하는 인도 관리들을 두고 있다고 합시다. 그런데 영국에서 온 인도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다른 사람들을 받게 되고, 그 사람들이 단지 몇 년간만 있다 가면서, 인도인을 혹사 시키지요. 저도 당신이 그런 종류의 사람은 인도에서 쫓아내고 싶을 거라고 이해는 해요. 하지만 그 인도인이 당신 민족을 위해서 다른 어떤 사람보다도 더 일을 하면서 당신을 섬기고 있는데도 계속해서 당신이 그 인도 관리를 깔아뭉개려 드는 격이지요.” 그리고는 웃으며, “이해 못하시겠어요? 그 판사나 그와 같은 사람들은 우리의 지방자치에 장애물이 되지요. 다른 영국인은 우리가 걱정할 필요가 없어요. 왜냐하면 그런 사람만이 영국을 인도에서 쫓아낼만한 구실이 돼주기 때문이지요.” 라고 말을 했지요.”
‘“Here you have devoted servants of India, giving their lives, sacrificing everything in order to serve your people. You have others who come out from England and don’t understand India. They’ve only come out for a few years and they abuse the Indian. I can understand you wanting that type of person out of the country, but this person is serving you, doing more than anybody else for your people and yet you kill him.” And he laughed and said, “Don’t you understand? The judge and those like him are hindrances to our getting Home Rule. The other man we needn’t bother about because he gives us a cause for kicking out the British.”’
인도 자치정부 문제는 폭동 전부터 큰 이슈였는데, 당시 인도에 있던 보통의 영국인들은 대전으로 그 문제가 표면화될 때까지 호의를 갖고 인도인의 민족주의를 다루지 않았으며, 자치정부에 대해서도 많은 생각을 하지 않았다. “저는 일반 장교들도 인도의 영국통치에 대해 많은 생각들을 했다고 보지는 않고, 사실 저는 영국의 인도통치가 당연히 영원히 갈 거라고 생각을 했지요. 북쪽에 있던 산악지방 출신의 한 인도인 장교가 저에게 “영국이 인도를 떠나면 어떻게 될까요?” 하고 묻던 기억이 나는데, 그 때 저는 그 사람을 쳐다보면서 “영국은 인도를 결코 떠나지 않을 텐데 뭘 그러나?” 하고 대답을 했지요.”
‘I don’t think the average subaltern thought much about British rule and, indeed, took it granted that it would go on forever. I do remember when one of our Indian officers from the hills in the north said to me, “What is going to happen when the British leave India?” I looked at him and said, “Well, of course, the British are never going to leave India.”’
심지어 크리스토퍼 마스터맨 씨 같이 총독부에 들어간 사람들도 그런 문제를 그다지 심각한 문제로 생각하지 않았다. “제가 처음 인도에 갔을 때, 언젠가 인도가 독립을 할 거라는 생각은 결코 들지않았지요. 그러나 몬테규 쳄스포드 개정법이 1921년에 소개되자, 그런 징조를 보았지요. 그래도 그 당시 저는 독립이야 오겠지만, 그렇다고 그렇게 빨리 올 거라고는 미쳐 깨닫지 못했어요. 1935년 법 이 후에야 모든 사람들이 독립이 오고있으며, 그 것도 아주 빨리 오고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지요. 그러나 그렇다고 그런 일에 분개하지는 않았던 거 같아요.”
‘When I first went to India it never entered my head that India would one day be independent, but I saw a sign when the Montague-chelmsford Reforms were introduced in 1921. I certainly felt then that Independence would come but I don’t think we realized that it would be coming so soon. After the 1935 Act everyone realized that Independence was coming and was coming quite soon, and I don’t think we resented it.’
대전 후 총독부에 입사한 젊은이들은 아주 다른 견해를 갖고 있었다. 이에 대해 필립 메이슨 씨는 다음과 같이 단언을 했다. “저는 자치정부로 가는 과도기에 인도를 이끌어주러 가고있다는 분명한 생각을 가지고 인도에 갔지요. 비록 사람들이 혼미를 거듭하고 있는 지역에서도 그런 점을 계속해서 잊고 있었지만, 그래도 불행 중 다행으로 사람들이 회교도와 힌두교도들이 서로 죽이지 못하게 하고, 선생님의 토지등기 권리를 보장해 주고, 일을 한 날까지 선생님의 저택을 소유하게 해주고, 아니면 탄압을 막겠다는 생각을 자나 깨나 했기 때문에, 그런 문제를 정말 모르는 일로 깡그리 잊고 있었다고 생각하지는 않지요.”
‘I went to India clearly thinking that we were going there to lead India on the way to self-government. Although one constantly lost sight of this in the rough and tumble of a district, because you’re always thinking all the time of stopping Mohammedans and Hindus from knocking each other on the head, or getting your land records right or getting your court up to date in it’s work, or stopping some oppression, none the less, I don’t think one really lost sight of it.’
당시에도 그런 문제는 정치를 초월해서 다뤄져야 한다는 경향이 있었다. “정치적 변혁과 발전은 우리가 상대하고 있던 보통사람의 행복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지요. 우리의 주된 관심사는 그런 사람의 행복이었지요.”
‘Political changes and political advancement had very little relevance to the happiness of the ordinary chap that we were dealing with, and it was his happiness that was our chief concern.’
현실 도피적인 생각은 역시 정부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비어 버드 우드 여사는 다음과 같은 말을 1941년 그녀가 보았던 파일에 첨부된 업무일지에서 인용해 주었다. “만약 우리가 간디에 대해 한 번 들어내놓고 생각해 보면, 그는 어쩜 골치 아픈 다소 애매모호한 존재였어요. 가장 하급 관리도 이렇게 썼지요. “이 계획을 시작하는 게 좋지않을 거 같다. 아마도 끝낼 시간이 없을지도 모른다.” 중간 관리도 업무일지에 다음과 같이 상세히 기록을 했지요. “말도 안 되는 소리다. 나는 1919년에 이 소리를 처음 들었다.” 최고위 관리인 총독도 업무일지에 다음과 같이 기록을 했다. “절대로 말도 안 된다. 나는 이 소리를 1909년에 들었다.” ’
‘If we thought about Gandhi at all it was really that he was just a bit of a nuisance and slightly absurd.’ The most junior officer had written, “I don’t think we’d better start this project, there may not be time to finish it.” His senior officer had minuted on the file, “what nonsense. I was told this in 1919.” And the most senior officer, the Governor, had minuted on that same file, “Absolute nonsense. I was told this in 1909.” ’
인도의 미래를 그저 간과하며 지나칠 수 밖에 없었던 경향은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에 그랬다. “인도인들은 결코 영국인들이 권력을 모두 이양할 의도를 갖고있다고 믿지 않았지요. 인도인들은 권력 이양을 회피하기 위해선 우리가 어떤 속임수든 쓸 거라고 끝까지 확신을 했는데, 비협력 운동의 기초가 바로 그런 것이었지요.”
‘Indians never really believed that Britain had any intention of handing over power at all. They were convinced right up to the end that we were going to find some trick to avoid handing over power – and that was the foundation of their Non-Cooperation Movement.’
시간이 지나면서 비협력과 시민 불복종 운동이 크게 세를 불려나갔다. 그러자 마침내 도시 지역에서도 그런 실정을 모른 척하고 무시만 하고 있는 게 불가능해지게 되었다. 이에 대해 에드윈 프랏 씨는 다음과 같이 기억을 하고 있었다. “제가 맨 처음 캘커타에 갔을 때, 영국인 동네인 쵸우링기 쪽으로 걸어가다 보면, 반대 편에서 걸어오던 인도인들이 길에서 비켜 지나갔지요. 그런데 이제는 그 길을 인도인들이 계속 걸어가고 선생님이 길을 양보해야 될 때가 온 거였어요.”
‘When I first went to Calcutta you could walk down Chowringee and the Indians walking in the opposite direction would just get out of your way. Time came when they just continued to walk where they were and you got out of the way.’
아주 소수의 사람들만이 가끔가다 한 번 정도 적대감을 가진 사람을 만났다. 2차 세계대전 동안 아이리스 포르탈 여사는 매일 그녀의 방갈로에서 간호사로 일하던 병원까지 자전거를 타고 다녔다. “하루는 간호원 복장을 하고 도로를 따라 자전거를 타고 가고 있었는데 “인도를 포기하라!” 하고 외치면서, 팔에 팔을 끼고 도로를 곧 바로 건너가던 인도 소년들을 보았지요. 인도에서 그 동안 제가 만난 첫 번째 공격이어서 저는 머리를 숙이고 그 애들을 향해 난폭하게 종을 울리면서 자전거를 타고 곧장 앞으로 내달렸지요.”
‘One day, bicycling along the the road in a nurse’s uniform I came on a row of young Indian boys who were right across the road arm in arm shouting “Quit India!” It was the first aggression that I had ever met in India, so I put my head down and rode straight at them on my bicycle, ringing the bell violently.’
대부분의 영국인들은 별다른 재해도 입지 않았고, 그로 인해 아무런 영향도 사실상 받지 않았다. 그러나 벵갈 지방에서는 관리나 경찰이 주기적으로 암살을 당했는데, 로버트 씨도 초창기 20 –30년 동안은 아무런 문제도 겪지 않았다. “우리는 베란다에서 자면서 우리 방식대로 살았지요. 다소간 집 대문도 열어놓고 살았지만, 전혀 불안하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았어요.”
‘We were on our own there, sleeping out on the verandah. The house was more or less open but I don’t think we felt uneasy at all.’
문제를 경험했던 사람들이 그런 문제를 다루려고 임명되었고, 그런 문제는 정치적 소요 형태가 아닌 회교도와 힌두교도 사이에 벌어진 종파가 다른 각 부족마다 서로 싸우는 형태로 고질적인 풍토병처럼 많이 생겼다. 이 것이 지방 관리들이 겪었던 무서운 점들이었다. “한 번 폭동이 일어나면 힌두교도와 회교도가 서로 맹렬히 부딪쳐서, 선생님이 할 수 있는 건 다만 경찰을 불러내 양 쪽을 분리시켜 한 명씩 흩어지게 하는 걸 보는 게 고작이었지요.”
‘Once it broke out and you got Hindus and Moslems going for each other hammer and tongs really all you could do turn out the police and try and separate the parties and drive them away from one another.’
그리고 종교적 갈등의 소지를 유발하던 데모행진 사태를 누그러뜨리려는 데 주로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평상시 수준을 유지하는 걸 중요한 임무 중 하나로 생각했던 경찰서에 가보면 많은 기록들이 보관되어 있었고, 거기에 보면 축제에 관계되는 모든 풍속들을 기록해 놓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신성시 될 수도 있는 특정 보리수 나무 근처나, 특정 사원 근처로 지나가든 않든 간에 회교축제 행렬이 지나는 도로는, 전에 하던 대로 정확히 그대로 따라가는지 유심히 살펴봐야 했지요.”
‘The route which the Mohurram procession would follow, whether it went near a particular temple or not, whether it went near some particular peepul tree which might become holy in the course of time. You had to see that they followed the exact precedent.’
아주 조금이라도 탈선행위, 범법행위 등은 없는지 조사했으며, 특히 대규모 폭동을 조장하는 예상된 도발행위는 철저히 감시를 하는 게 필요했다. “사소한 사건이 일어나서 보면 그 건 파탄인들이 힌두 소녀를 유괴했다느니 누군가가 회교도를 죽였다느니 하는 소문들이었지만, 대개는 사실이 아니었지요. 그러나 그런 일이 있고 난 뒤에는 항상 어떤 도시들에서 불만이 쌓이다 사건이 터지기 시작했지요. 밤이면 칼로 살해당하는 사건이 났었는데, 그러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런 얘기들을 부풀리려고 했지요; 다시 말하면 만약 5명의 회교도인이 밤 사이에 칼에 살해당했다고 하면, 그 다음 날 6명의 힌두인들이 살해당하는 식이었지요.”
‘Some stupid little thing would happen, a rumour that Pathans were abducting Hindu girls, or that somebody had killed a Mohammedan. Usually it was quite untrue, but then the trouble, which was always smouldering in certain cities, started. You’d get some stabbing incidents at night, and then everybody was out trying to keep the score up; if five Mohammedans were stabbed one night, six Hindus would be murdered the next.’
힌두와 무슬림 사이의 갈등은 뿌리깊은 아주 오래된 갈등이었다. 이에 대해 펜더럴 문 씨는 다음과 같이 단언을 했다. “대책이 없었어요. 어떻게 예방할 수도 없었구요. 그러나 만약 선생님이 그 시간에 현장에 있다가 기민하게 즉각 대응을 한다면 아주 심각한 상황으로 가는 걸 막을 수 있었을지는 모르지요. 저는 폭동발생 초기에 무력 시위를 극대화시켜 사람들에게 공포감을 심어주는 게 절대로 좋다고 믿었으며, 또한 무력을 사용해야 한다면 아주 효과적으로 사용해야 한다고 믿는 사람이었지요. 총을 1-2 방 쏘는 건 효과가 없었어요. 그래서 저는 지방 행정장관에게 지시하기를 “총을 발포하려거든 최소한 5 방 이상은 갈기시오. 발포하고 나면 쓰러지는 사람들은 있는지 군중들이 겁에 질려있는지 반드시 이 방법이 효과적인지 어떤지 확인해 보시오.” 라고 지시를 했지요. 그러나 다행히 저한테는 그런 잔인한 사건은 일어나지 않고, 그저 평범하고 상식적인 일만 일어났지요.”
‘There was no answer to it. You couldn’t prevent it, but you might if you were sufficiently prompt and on the spot at the time, prevent it assuming a very serious form. I was a great believer in the maximum display of force at the very beginning to try and overawe people. I was also a great believer in using force effectively if you had to use it at all. I didn’t believe in firing one or two rounds; I used to say to my magistrates, “If you ever have to open fire, fire at least five rounds. If you open fire make sure that it is effective, so that people are seen to fall and the mob takes fright.” It didn’t occur to me as ruthless. It occurred to me as plain commonsense.’
레이몬드 버네드 씨는 회교 축제인 모후람 기간 동안 전국적으로 소요가 발생한 1939년 당시 베나레스 지방의 지방 치안판사 였다. “저는 최근 들어온 신임 소대장 지휘 하에 한 소대와 같이 출동을 했지요. 사건이 그 도시에서 가장 위험한 지역에서 발생했다는 사실을 알고서 약간은 겁이 났지요. 그 곳은 대부분 회교도 직공들이 사는 지역 한 가운데 소수의 힌두 방직공들이 살고있던 곳이었지요. 코너를 돌아가자 우리 앞에는 모든 집들이 불에 타고 있었고, 그 놈의 불길 소리 때문에 아무 소리도 들을 수 없었지만, 불꽃을 배경으로 말 그대로 수백 명의 사람들이 양 쪽 집에서 약탈을 하고는 물건들을 아래 있는 사람들에게 던졌지요. 그러나 몰려다니는 사람들에게 매일 하는 식으로 상투적인 경고를 할 상황도 아니었고 – 또 아무도 듣는 사람들이 없을 거 같아서 – 대기하고 있던 장교에게 총을 쏘아 군중을 해산 시키라고 명령을 내렸지요. 그러자 그 장교는 상병에게 세 발 전진에 한 발씩 쏘라고 했지요. 총을 쏘자 수백 명의 사람들이 떼를 지어 돌아다녔는데도 총알은 아무도 맞추지 못하고 건너 편 공터로 날아갔지요. 그러나 효과는 전기에 감전된 듯 커서, 모였던 사람들이 삽시간에 달아나 1분 이내에 전 거리가 텅 비어버렸지요. 코너를 돌아가자, 한 10 야드쯤 거기서도 똑같은 일이 재연되어 보니 불길 속에 수백 명의 사람들이 조용히 약탈을 하고 있었지요. 그래서 “이 짖을 못하게 해야 된다 구. 한 방 또 갈겨!” 라고 말을 해야 했지요. 지붕 처마 위에는 불길에 아주 또렷이 윤곽이 보이던 사수였던 상등병을 가리키고는 “저 놈을 쏴라!” 하고 말을 했지요. 그러자 그 장교는 제가 명령을 내릴 입장이 아니라는 걸 알고는, 상병에게 명령을 내리자 상병이 그 남자를 총으로 쏴 죽였지요. 아무튼 그 자가 길바닥에 폭삭 고꾸라져 떨어져 죽자 사람들은 그 걸 보고 모두들 놀래 가지고는 우르르 도망들을 갔지요. 15 분 이내에 발포소문이 시내 전체에 돌자, 놀라운 효과가 나타났지요.”
‘I set out with a platoon under a very junior, recently joined subaltern and we found, as I’d rather feared, that the trouble had broken out in the most dangerous area in the city. Here there was a minority of Hindu spinners living right in the middle of a large number of Moslem weavers. We turned a corner and there in front of us all the houses were on fire. You couldn’t hear anything for the roar of the flames, but outlined against the flames were literally hundreds of men looting the houses on both sides and throwing the stuff down to their friends below. It was impossible to issue the stock warnings to the crowd – nobody could have heard – so as pre-arranged with the subaltern I said I wanted him to fire to disperse this crowd. So he told a corporal to take three steps forward and fire one shot. He fired and although there were literally hundreds of men milling around, the shot went right through the whole lot without hitting anyone. But the effect was electric. The crowd was gone and the whole street was empty within a minute. We just went round the corner, about ten yards, and there the whole thing was repeated – flames and hundreds of men silently looting. So I said, ‘You’ve got to stop this now, another round.’ I pointed out to the corporal, who was their marksman, a man outlined very clearly against the flames on the cornice of a roof and I said, ‘You shoot him.’ The officer ordered him to shoot, because I couldn’t order him to shoot, and he shot and killed the man. He fell off into the street and there was an absolute stampede. Within fifteen minutes the news of the firing was all round the city and had an astonishing effect.’
정치적인 데모와 대다수의 사람들이 벌인 시민 불복종 운동은 아주 성격이 다른 운동으로, 간디의 정치 구호인 사트야그라하 라는 개념을 근거로 한 수동적인 저항 운동이었다. 예를 들면 그런 운동은 단순히 나리님의 출현만으로도 충분했다.
죤 리벳 카르낙 씨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단언을 했다. “저는 결코 누군가가 마하트마 간디 라고 외쳐대면 무조건 궁둥이를 6대씩 방망이로 후려갈겼지요. 제가 정복을 위엄 있게 차려 입고 헬멧과 양 쪽에 권총을 차고 말 장화를 신고 내려가면 모여있는 사람들이 무서워한다는 걸 알았지요. 저는 흥분되는 감정을 바라며 다소는 지겨움을 갖고 한 일인데, 어떤 면에서는 재미도 있었지요. 2 - 3 천 명 되는 군중들이 시장에 몰려들어서, 모두들 깃발과 표지판을 들고, 마더 인디아를 외쳐대면서 제가 서있는 곳까지 앞으로 전진해 왔지요. 그러면 저는 제자리에 멈춰서라고 명령한 뒤, 경관에게 국기와 표지판들을 모두 빼앗으라고 말을 했지요. 그런 다음 그 소요를 이끄는 비 협조자 5 – 6 명의 이름을 크게 읽고 나면, 깃발과 표지를 모두 경관에게 뺏기고는 수사관과 같이 있던 제 앞에 끌려왔지요. 그러면 맨 앞에 있는 사람에게 “이제 집으로 돌아들 가시요.” 하고 말을 붙이면 싫다고 거절을 했고, 그 자리에서 턱을 중간 크기의 주먹으로 한 방 먹였지요. 한 두서너 방 더 먹이면 비틀대다가 쓰러지게 돼 있었지요. 그러면 그 다음 사람에게도 똑같이 그렇게 했고, 세 번째 사람이 돌아서서 물러서기 시작하면 그렇게 하도록 내버려 두었지요. 그러고 나면 전 군중들이 시장터에서 슬금슬금 달아나버렸지요. 이 게 바로 일반적인 힌두 군중들의 모습이었어요. 회교도들이 훨씬 더 위험하다는 건 알았지만, 이런 상황 하에서 혹 살해당할지도 모른다는 마음이 당시엔 결코 들지를 않았어요.”
‘I never allowed anyone to shout “Mahatma Gandhi” without giving him six on the bottom with a stick. I found that if I went down myself, making quite an imposing figure in full uniform with a helmet and a revolver on each side and riding boots, I could overawe the crowd. I did this really through boredom and the desire for excitement, and considered it rather fun in a way. These mobs of about one or two or three thousand would converge on the market place. They would all have numerous flags and banners and would be shouting about Mother India, and they’d advance up to where I was standing. I would order a halt and tell the constable to take away all the flags and banners. I would then read out the name of five or six of the leading noncooperators and they would be taken off with all the flags and banners by the constable, leaving myself with the sub-inspector. I would then speak to the foremost man and say to him, ‘It’s time for you to go home,’ and he would refuse, whereupon I would give him a medium-sized blow on the chin. After about the second or third butt he would stagger off. I then did the same with the next man and the third man would turn and start retreating and I might help him along. Then the whole crowd would bolt out of the market place. This, as a rule, was a Hindu crowd; the Mohammedans I found very much more dangerous, but it never crossed my mind that I could be killed under these circumstances.’
경찰 특수부서에서 근무했던 에프.씨.하트 씨는 비하르 지방의 의회 지도자들의 극성은 체포해서 감옥에 보내 체면을 살려주기 보다는 길 옆에 발가벗겨 내다버림으로써 막을 수 있었다고 다음과 같이 회상을 했다. “그 당시엔 누구나 다 감옥 행 표를 받고싶어 했지요. 순전히 그들의 정치적인 입지는 감옥 가는 일에 달려있었어요.”
‘In those days everybody wanted to get a gaol ticket. Their whole political future depended on it.’
여자들의 데모를 다룰 때는 여자들은 정숙해야 한다는 인도적인 정서 때문에 경찰들이 덕을 본 일이 있었다. “한 번은 파트나 시에서 수 많은 여자들이 거리를 점거하고 땅 위에 누워서 교통이 완전 마비됐었지요. 경찰서장이 그 곳에 도착해서 보니 처음부터 어떻게 해야 할지 아주 난감해 했지요. 만약 남자들이었다면, 경찰을 시켜 몸을 들어 끌어내라고 했겠지만, 여자들이니 감히 그렇게 할 수가 없었지요. 그래서 조금 생각하다가 소방 마차를 요청한 뒤에, 호수로 땅 위에 누워있던 여자들에게 뿌려댔지요. 여자들은 아주 얇은 사리만 입어서 물에 젖자 몸매들이 다 드러나 보였어요. 그리고 경관들이 실실 웃어대며 상스러운 농담을 해대자 여자들은 창피해 가지고 그 즉시 일어나서 달아났지요.”
‘On one occasion in Patna City a number of women laid themselves down on the ground right across the street and held up all the traffic. When the Superintendent of Police arrived on the scene he was at first nonplussed. If they had been men he could have sent in policemen to lift them out bodily, but he daren’t do it with women. So he thought for a bit and then he called for fire horses and with the hoses they sprayed these women who were lying on the ground. They only wore very thin saris and, of course, when the water got on them all their figures could be seen. The constables started cracking dirty jokes and immediately the women got up and ran.’
경찰들만으로 그런 상황을 전부 통제하기가 분명히 어려워지면 군대가 출동을 했다. 챨스 롸이트 씨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을 했다. “우리는 어느 누구도 쏠 필요가 없었어요. 모인 군중들이 점점 더 격해져서 다루기가 어려워지고, 우리에게로 압박하면서 밀고 들어오면 발등에 총 개머리판을 쿵쿵 찌어서 순순히 뒤로 물러서게 했고, 결국은 돌아가게 만들었지요.”
‘We didn’t have to shoot anyone. When the crowd were getting very angry and very unruly and pressing up against us we would ease them back by gently dropping the butts of our rifles on their toes, which did eventually move them back.’
여기에는 항상 깃발을 보여주는 걸로 알려진 사건들이 따라다녔다. “마을의 교장이 아이들을 데리고 행진을 시키면서 우리가 지나갈 때마다 “검둥이 정찰 부대를 위해서 만세 삼창!” 하고 외치면서 마을을 다 지나갈 때까지 계속해서 되풀이했지요. 아무튼 그 사람들은 우리가 있는 걸 확실히 좋아하지 않았어요.”
‘The schoolmasters of the villages would parade all the children outside to shout as we passed by, “Three cheers for the Black Watch Regiment!” and keep on repeating this till we got through the village. However, I’m sure they didn’t like us there.’
1930년 페샤와르 지방의 시민 소요 사태가 있는 동안 레지날드 쎄이보리 씨가 쓴 편지에 보면 군대는 민간인 권력자들을 도와주러 가는 걸 별로 달가워하지 않았다는 내용이 들어있었다. “저는 6월 10일 제 집 사람에게 “이 민간인 소요 사태는 양 쪽 모두에게 아주 불쾌한 일이어서, 나는 갈리폴리로 좀 있다 돌아갈 거요.” 라고 편지를 썼지요. 그리고 6월 14일날 “미래가 틀림없이 인도군에 있다는 게 의심스럽고, 당신과 내가 이 나라에 4년간 있게 될지 어떨지도 잘 모르겠오.” 라고 편지를 썼지요. 한 10 일쯤 지난 뒤에 다음과 같은 글귀를 집 사람에게 또 썼지요. “이따금 다 때려 치우고 첫 연금이나 받고 싶소. 사람들을 증오하는 땅에서 사는 것도 별 매력도 없고, 현재 우리가 갖고있는 시시껄렁한 이 지위도 향후에는 별볼일 없을 거요.” 라고 말을 했지요.”
‘I wrote to my wife on May 10 and said, “These civil disturbances are most unpleasant for both sides, and for me, I’d far rather be back in Gallipoli.” on June 14 I wrote saying, “I’m wondering what the future has in store for the Indian Army; whether you and I will be in this country in four years’ time,” and ten days later I wrote to my wife in the following terms, “At times I feel like chucking it and taking my first pension. Living in a country in which, through no fault of one’s own, one is hated, has few attractions and the future will probably deny us what little status we have at present.”’
라즈들의 인도통치 제 2장에 들어서서는 영국인과 인도인 사이에 개별적이며 사적인 우정은 살아남을 뿐만 아니라 더욱 번영할 것이라는 얘기가 양 쪽에 다 같이 있었다.
이에 대해 데이빗 싸이밍톤 씨는 의회 지도자와 직장 사람들의 관계는 아주 놀라운 관계였다며 다음과 같이 말을 했다. “인도 포기 운동이 일던 1942 년도에, 우리는 어느 정도의 불쾌감을 경험했지만 그 건 그리 오래가지를 않았지요. 남은 시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의회 지도자들은 영국인 라즈들에게 공공연히 적대감을 표시했지만, 보통 때는 친구로 만나서는 다음 할 일에 대해서 우스개 소리를 교환했지요. 저는 시민 불복종 운동인 사트야그라하 운동을 개인적으로 하던 숄라프르 지방에 있던 한 의회 지도자가 제게 와서는 “아! 작별 인사를 하려고 왔습니다.” 하고 말해서 “왜요? 무슨 일이라도 있나요? 어디 멀리 떠나세요?” 하고 묻자 “아니요. 오늘 투옥되기로 결심했어요.” 라고 하던 일이 기억에 남아요. 그런 뒤 그 사람은 공손히 제게 작별인사를 하고 나가서는 바로 도로에서 체포되어 감옥에 갔지요. 그들은 “전쟁을 지원하지 말자! 사람도! 단돈 1 루피도!” 라고 외쳐대며 다니다가, 마음에 둔 말을 털어놓으면 어김없이 경찰이 데려와 쳐넣고는 법정에 세운 뒤 구류를 언도했지요.”
‘There was a time in 1942 in the Quit India Movement when we did experience a certain amount of unpleasantness, but that didn’t last long. For all the rest of the time, although the Congress leaders were supposed to be in open hostility to the Raj, they would meet us on ordinary occasions as friends and we would exchange jokes about what they were going to do next. I remember the Congress leader in Sholapur who was going to offer individual satyagraha came along to me and said, “Oh, sir, I’ve come to say goodbye.” I said, “Why, what’s happening? Are you going away?” “No, I have got to offer myself for imprisonment today.” So he said goodbye to me very politely and went out and got himself arrested on the road. They would go along shouting, “No help for the wars. Not a man, not a the police would take them in and they’d be hauled up before a court and sentenced to a short term of imprisonment.’
앤 싸이밍톤 여사는 사로지니 나이두 라고 하는 정치 지도자가 포함된 친구들과 심지어 인도 포기 운동이 최고조에 이르러 말썽이 불거지던 시기에도 같이 자주 모여서 차를 마셨다. “저는 정치계에서 누구누구 하는 사람은 다 만나봤는데, 그 사람들은 “앤 앞에서 얘기해도 괜찮겠어요?” 하고 말하면, 그 여자는 “아 그럼 요. 절대 괜찮아요.” 라고 말을 하곤 했지요.”
‘I met everybody that was anybody in the political world there and they used to say, “Is it all right to speak in front of Anne?” and she’d say, “Oh yes, perfectly all right.”’
의회 지도자 중 또 한 명이 바로 인도 학자인 네루 씨 였는데, 레이몬드 버네드 씨는 간단하지만 퍽 계몽적인 만남을 다음과 같이 네루 씨와 가졌다. “저는 데라던 감옥에 있던 네루 씨를 석방해서, 역시 감옥에서 몹시 앓고있던 그의 부인이 있던 나이니 탈로 네루 씨를 내려보내라는 암호 전문을 정부로부터 접수했지요. 그 부인은 병세가 갈수록 악화되어서 사람들은 네루 씨가 그녀를 볼 수 있게 석방시켜줘야 한다는 생각들을 했지요 – 그러나 정부 쪽은 그가 다시 밖에 나가 정치적인 연설을 하거나 정치활동에 참여치 않겠다고 약속하지 않는 한 그를 풀어줄 준비가 아직 돼 있지 않았어요. 전보에 보니 가석방으로 돼 있었지요. 그래서 이 전문을 어떻게 전달해야 되는지에 대해서 제 재량 것 처리해야 했어요. 알라하바드 외곽에 있는 협궤 역에 한 밤 중 네루 씨가 도착해서 가보니 무척 피곤해 보였고 긴장돼 있었지요. 그래 제가 올라가서 그분을 만나고는 네루 씨를 만나러 정부가 대리 파견한 사람이라고 소개하고는, 정부 입장은 네루 씨가 부인을 볼 수 있게 가석방을 해주고 싶어한다고 말을 했지요. 네루 씨는 자기 부인이 몹시 아프다는 얘기를 공식적으로 들은 건 그 게 처음이었지요. 그 당시 저는 그가 보증만 한다면 가석방을 하겠다고 얘기하면서 약간은 미묘한 임무에 빠져들었지요. 그러자 갑자기 표정이 굳어지면서 말하기를 “그렇지만 그 말엔 결코 동의를 할 수가 없군요. 그런 약속은 제 신념에 위배되는 일이거든요. 저는 거의 3 년을 감옥에 있었고, 물론 저도 제 집 사람과 같이 있고 싶지만 제가 마지막 하고 싶은 일은 정치에 몸담고 연설을 하는 일이랍니다. 따라서 저는 지금 정부에 약속을 할 준비가 돼 있지 않습니다.” 라고 했지요. 플랫폼을 따라서 걷다 보니 흰 옷을 입고 누워 자는 인도인들의 모습이 보였고, 우리는 반 시간 이상 플랫폼을 주의깊이 사람들 몸을 건너 다니며 왔다 갔다 했는데, 일단의 경찰들은 사태가 어찌 될까 하고 걱정들을 하면서 뒤 쪽에 서있었지요. 저는 그를 가석방을 시켜주는 게 기사도 정신이라는 점을 지적하려고 했으며, 그 것이 선생님의 적에게 표할 수 있는 가장 영예로운 일이라고 생각을 했지요. 그러자 그는 “중세 때라면 그럴 수도 있지만 인도에서는 그렇지 않아요. 더 이상 통용이 안 됩니다. 냄새 나는 말이군요.” 라고 말했지요. 그런데 갑자기 제게 한가지 영감이 떠올랐지요. 그래서 “좋아요, 그렇다면 이렇게 하는 건 어떻겠어요, 당신이 굳이 정부에 약속을 못하시겠다면, 저와 신사 협정을 하시는 건 어떻겠습니까?” 그러자 그는 멈춰 서더니 저를 쳐다보고는 얼굴에 환한 웃음을 띠더니 “아, 당신에게 하는 신사적인 동의라? 그렇다면 그 건 별개의 문제지요.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라고 말을 했지요.
‘I received a coded telegram from the Government to say that they had released Pandit Nehru from gaol in Dehra Dun and they were sending him down to Naini Tal where his wife was also in prison and seriously ill. She had had a bad turn for the worse and they were very anxious that he should be released to see her – but they were not prepared to release him unless he would undertake not to take part in any political activities or make any political speeches while he was out. In the telegram they used the expression ‘Release on Parole’ and I was to use my discretion as to how to put this message across. Nehru arrived at about midnight at the narrow gauge station outside Allahabad and and he was obviously very tired and very tense. I came up and met him and said I’d been deputed by the Government to meet him and that the Government wanted to release him on parole so that he could see his wife. It was the first he’d heard officially that his wife was seriously ill. I then plunged into my delicate task, saying that they would release him on parole provided he gave an undertaking. Immediately he stiffened and said, ‘Oh, but I could never agree to that. It would be against all my principles to give such an undertaking. I have been in gaol for nearly three years. I want to be with my wife and the last thing I want to do is join in politics and make speeches – but I am not prepared to give an undertaking to the government.’ All along the platform there were the shapes of Indians lying asleep in their white clothes and we walked up and down this platform for over half an hour, carefully stepping over these bodies, with a little group of bewildered policemen standing at the back wondering what it was all about. I tried to point out that releasing him on parole was an act of chivalry, that it was the highest honour you could pay your enemy. ‘That may have been all right in the Middle Ages, but it doesn’t work in India,’ he said. ‘It doesn’t apply any longer. It stinks.’ Then I suddenly had a brainwave. I said, ‘Well, look, if you won’t give an undertaking to the Government, what about coming to a gentleman’s agreement with me?’ He stopped in his tracks and he looked at me and a delighted smile came over his face and he said, ‘Ah, a gentleman’s agreement with you? That would be different. I think I could accept that.’
독립이 다가오면서 정치적 환경이 변하여, 이전에 정치적이었든 사람들이 자신들을 잡아넣었던 사람들 윗자리로 많이 부임을 하게 되었다. 1930년대 초에 올라프 캐로 씨는 칸 형제를 잡아넣은 적이 있었는데, 한 사람은 닥터 칸 사히브였고 또 한 사람은 간디의 지지자였든 동생 압둘 가파르 칸이었다.
몇 년이 안되어 그 두 사람은 아주 친한 친구들이 되었다. “제가 주지사였을 때 닥터 칸 사히브는 제 직속 장관이었지요. 한 번은 심각한 언쟁을 하다가 그가 다소 저에게 성질을 내서, 제가 “닥터! 당신 그 말 취소하지 않으면 내가 당신을 다시 감옥에 쳐 넣겠어!” 라고 하자 그 순간 화가 난 얼굴로 한참 쳐다보더니 이윽고 크게 폭소를 터뜨리고는 날 껴안았지요.”
‘When I was Governor and Dr Khan Sahib was my Chief Minister I remember we had a terrific quarrel once and he more or less lost his temper with me. So I said to him, “Doctor, if you don’t retract that I shall put you in gaol again!” He looked at me in fury for a moment and then burst into laughter and embraced me.’
라즈들의 인도통치가 끝나던 해에 드디어 파키스탄에서 불길이 번지기 시작했다. “1939년부터 드디어 이 위험이 우리 앞에 닥쳤고, 우리는 그 것을 다른 데로 돌릴만한 확실한 방법을 알 수가 없었지요.”
‘From 1939 this danger appeared before us and we could see no clear way of averting it.’
인도에 있던 거의 모든 영국인들에게 인도가 분할된다는 생각은 경악할만한 대 사건이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사건을 영국통치 중에서 가장 큰 재난으로 보았으며, 영국통치 동안 영국인들이 이룬 가장 위대한 일인 인도의 대 통일을 원래 상태로 되돌려놓는 놀라운 사건으로 생각들을 했다. 누가 책임을 지느냐 하는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에 대해 퍼시발 그리피스 씨는 다음과 같이 설명을 했다. “저는 지나 씨와 식사를 하면서 그가 갖고 있는 2개 국가에 대한 이론을 상세히 설명하는 소리를 들었을 때, 우선 나라가 분할된다는 게 단순한 화제거리 이상의 무언가가 있다는 걸 깨달았지요. 그가 “당신네 영국인들은 훌륭한 행정가들 이기는 하지만 질이 나쁜 심리학자들 같기도 해요. 당신이 인도인들의 국민성에 대해 말하지만, 인도인들에게 그런 건 없어요. 저는 힌두인들을 제 국민들이라고 간주하고 싶지 않고, 힌두인들도 나를 자기들 국민이라고 생각하지를 않아요. 당신이 민주주의에 대해 얘기하지만, 당신네가 인도에 오기 전 인도에는 그런 게 없었다는 걸 잘 아실 겁니다. 당신네가 지나가는 말로 민주주의라는 제도를 소개했지만, 그런 제도도 당신네와 같이 그냥 지나쳐버리고 말 겁니다.”
‘I first realized that partition was something more than a talking-point when I dined with Mr Jinnah and he expounded his two-nation theory. He said, “You British people, you’re good administrators, but you are very bad psychologists. You talk about Indian nationality but there is no such thing. I don’t regard the Hindus as my fellow nationals at all, and they don’t regard me as their fellow national. You talk about democracy, but you know there was never any such thing as democracy in India before you came. You have introduced a kind of democracy as a passing phase. It will pass with you.”’
지나 씨와 네루 씨 사이의 태도는 분명히 달랐다. 양 쪽을 다 같이 잘 알고 있었던 올라프 캐로 씨는 양 쪽이 다 같이 오만했다고 말을 했다. “그러나 네루 씨의 오만은 지나가 그렇지 않았던 반면, 사람을 끄는 면이 스며있었지요. 그는 아주 거만하고 고집불통으로 분명히 말해서 제가 그리던 영웅적인 사람은 아니었어요.”
‘But Nehru’s arrogance was shot through with charm, which Jinnah’s certainly wasn’t. He was very arrogant and very immovable and he is certainly not one of my heroes.’
부 총독 별장에 마하트마 간디가 5 분 일찍 오는데 반해서 지나는 항상 5 분 늦게 온다는 말이 있었다. 분할 문제에 대해서 인도 군대보다 더 심하게 이를 분개했던 곳은 없었다. “저희들에게 그 것은 청천벽력 같은 대사건이었지요.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어요. 우리는 수십 개의 사회계급과 교조, 피부색, 신앙 등을 하나의 국기 아래 통일시켰고, 한 부대의 색으로 일치시켰어요. 그 걸 이루는데 자그마치 200 년이나 걸렸고, 말 그대로 펜 한 번 움직여서 그렇게 된 것도 아니었지요 – 말하자면 앞으로 다시는 사람들이 절대로 이뤄낼 만한 일들이 아니었어요.”
‘To us it was the heartbreak of heartbreaks. We felt it beyond credence. We had united these dozens of different castes, creeds, colours, beliefs under one flag. We had united them under one regimental colour. It took us two hundred years to build that up, and for that to go literally at the stroke of a pen – it was something that one will never get over.’
당시 인도군을 직접 둘로 나누는 임무를 맡았던 클라우드 오친레크 씨보다 더 큰 허탈감을 맛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모든 인도군 장교들은 그러한 생각들을 증오했지만 우리는 지시를 받은 대로 했지요. 하여튼 사람도 물건도 다 둘씩 나눠야만 했지요. 그 얘기는 바로 내 몸 같은 부대를 반은 힌두, 반은 회교도로 딱 쪼개야 한다는 말이었지요. 그 일이 일어나자 회교 군인들과 힌두 군인들은 서로의 어깨를 잡고 눈물을 흘렸지요. 그 광경은 저의 감정을 대단히 뒤흔들었으며, 그들도 그런 기분을 느꼈을 거예요. 그러니 저 같이 더 나이든 장교들은 물어볼 필요도 없이 대단히 큰 허탈감을 느꼈을 겁니다. 선생님이라도 아마 생전 내내 같이 일을 해오다 딱하니 두 군데로 어쩔 수 없이 찢어질 때는 생전에 한 일들이 모두 다 부질없다고 생각했을 거예요.”
‘All Indian Army officers hated the idea but we did as we were told. They had to be split and then all the equipment had to be split with everything else. What it meant was that regiments like my own, half Hindu and half Moslem, were just torn in half – and they wept on each other’s shoulders when it happened. It was moving for me and I think it was moving for them. The older officers like myself undoubtedly felt a sense of loss. You felt your life’s work would be finished when what you had been working at all along was just torn in two pieces.’
한 종파로 이루어진 대대를 제외하고, 둘로 양분된 군대는 독립을 수행하면서 더욱 더 철저히 두려움을 느끼게 되었다. 캘커타 대학살로 알려진 1946년에 캘커타에서 시작된 학살극은 훨씬 더 큰 규모의 사건으로 발전하면서 힌두와 회교도가 대립 되는 동네에서 수 년간 지속이 되었다.
이에 대해 레드클리프 싸이드 보텀 씨는 다음과 같이 말을 했다. “특이한 침묵이 흐르는 걸로 봐서 뭔 일인가 터질 거라는 것을 감지할 수 있었어요. 긴장이 높아 가고 목청이 커지면서, 결코 잊을 수 없는 성난 군중들의 찢어지는 비명소리를 들었지요. 그 아우성치는 소리가 선생님을 향해 다가오는 걸 들을 수 있었고, 그 사람들은 끔찍한 일을 벌리고, 이내 소리없이 사라지곤 했지요. 그 건 단순한 비명 소리가 아니고, 공포의 냄새였어요. 반드시 살해당하던 사람들한테서만 나는 게 아니었고 살인을 저지르던 폭도들에게서도 역시 죽음과 공포의 냄새를 맡을 수 있었지요. 군중들이 반대 종교인 한 명이 살해당했다는 게 결정되는 순간, 한 가지 형태의 옷을 입은 사람들이 상대편에 모두 대들어 48 시간 내내 싸우다 보면, 하루 밤 사이에 300 - 400 명이 죽어나갔지요. 만약 당신이 고통에 몸을 비트는 사람을 보았다고 해도, 그냥 차를 세우고 도와주다 끝낼 수 밖에 별다른 방법이 없었어요.”
‘You could almost know that it was going to happen by a peculiar silence. But as tension grew the voice pitch went up and the high-pitched screaming of the rioting crowd was something that you could never forget. You’d hear the screaming coming towards you, they would commit some horrible act and then patter away without a sound. But it wasn’t so much the sounds, it was the smell of fear – and you’d get the smell of fear not necessarily from those who were being killed, but from the rioting mobs that are doing the killing. The moment the crowd decided that one of the opposite religion had been killed, then everybody in one form of dress would turn on the others and in a matter of forty-eight hours there were three hundred, four hundred deaths a night. If you saw a man literally writhing in agony and you stopped your car and got out to help him – then you were finished.’
후글리 강의 보트 위에 지은 안전 가옥에서 래드 클리프 싸이드 보텀 씨는 다음과 같은 또 다른 살해 장면을 목격했다. “붙잡혀서 손발을 꽁꽁 묶인 한 무리의 광신자 집단을 볼 수 있었는데, 이들을 강 아래 쪽으로 뻗은 제방으로 데려가서는 뚝 아래 물 속으로 밀어넣었지요. 거기서 긴 장대를 가진 소형 배를 타고 가서 못 올라오게 밑으로 밀어넣고 있었지요. 그러면 호우라 다리 위로 쑥 떠오른 목만 있는 사람 얼굴을 볼 수 있었는데, 이는 먼저 사람 머리를 잘라 강에 밀어넣은 다음, 그 위에 목 잘린 시체 몸둥아리 만을 집어 던져넣어서 그랬지요. 폭동 후에 보니까 말 그대로 죽은 시체들로 빈틈 하나 없이 차 넘쳐 물 위에 떠있다가는 가라앉았는데, 배에 까스가 차면 3 일 뒤 다시 물 위로 떠올랐지요. 조수간만에 따라 떠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면서 여자는 누운 채로 남자는 엎어진 채로 물 위에 둥둥 떠다니면, 독수리가 배나 등을 깔고 앉아 시체 살점을 뜯어먹거나, 해변가로 밀려온 시체 조각은 떠돌이 개나 재칼 아니면 독수리들이 먹어치웠지요.”
‘You could see a crop of one religion or another who had been captured and tied, brought down to the bund which went down to the river, being pushed down the bank into the water where dinghies with poles were pushing them under. You could see them being laid on their faces with their heads poking out over Howrah Bridge and being beheaded into the river, their bodies thrown in afterwards. After the riot the river was literally choked with dead bodies which floated for a while, sank for a while and then, when the internal gasses blew them up, floated again after three days. They were carried up and down the river by the tide, with vultures sitting on their bellies or their backs according to whether they were male or female – one floated one way, one floated the other – taking the gibbly bits and leaving the rest to float ashore to be eaten by the pi-dogs, the jackals and the ordinary vultures.’
저널리스트로 썩어가는 시체가 시체 안치소의 천장까지 쌓여있는 걸 보고 거의 감각이 마비되었던 이안 스테픈 씨는 비록 사소한 사건이었지만, 결코 뇌리에서 지울 수 없었던 사건을 다음과 같이 목격했다. “제 방갈로로 커다란 수염을 기른 우습게 생긴 신문배달을 하던 힌두 사환 아이가 하나 있었는데, 저에게 싱긋 웃고는 채 5 분도 안돼 길 밖에서 칼에 찔려 죽어버린 일이 생각나네요.”
‘A Hindu chaprassi who came to deliver papers to my bungalow, a funny little thing with a huge moustache. I remember his smile and, within five minutes, he’d been knifed to death in the street outside.’
메리 우드 여사도 비슷한 개인적인 경험을 했지만 이보다는 퍽 다행스러운 일을 다음과 같이 회상을 했다. “제 침실 문 밖에서 모든 잡 귀신들이 쏟아져 나왔을 때, 마침 저는 머리를 말리고 있었지요. 그래서 머리를 하던 채로 발코니로 뛰어나가 보니까, 긴 장대 한 끝엔 제 가엾은 청소부가 매달려 있었고, 다른 쪽 장대 한 끝엔 청소부를 때려죽일 일에 골몰하고 있던 나머지 4 – 5 세대의 사람들이 있었지요. 그들은 머리를 풀어헤친 채 화가 난 얼굴로 뭐라고 고함을 치던 마님 때문에 화들짝 놀라 달아났는데, 그렇지 않았더라면 틀림없이 무슨 일인가 일어났을 거예요. 그러자 청소부가 제 발에 엎어져서는 저 때문에 목숨을 구하게 됐다고 극구 고마워하더군요. 제가 구한 거라고 생각은 하지 않지만, 사람들은 영국인이 모두 떠나가고 나면 저런 사람들은 어떻게 될지 참 걱정이 됐지요.”
‘I was drying my hair when all hell was let loose outside my bedroom door. I shot out on to the balcony in my curlers and there was my poor little sweeper hanging on to one end of a long pole, while at the other end of the pole were four or five of the rest of the household who were intent on beating him up – and would certainly have done so except they were so startled by Memsahib gibbering with fury in hair curlers, that they fled. And I was left with my poor little sweeper who had flung himself at my feet and assured me I’d saved his life. I’m sure I hadn’t, but one wonders what happened to people like that after the British all … w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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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를 떠나며
Quit India
“벵갈 지방에 그 지역 사람들 모두가 대단히 좋아하는 재판관이 있었어요. 그 사람은 그 지역 주민들의 대부로, 말썽이 생기면 모두들 그 재판관에게 왔지요. 그 사람은 인도를 아주 사랑했고 인도에 헌신적이었으며, 다른 사람들처럼 오랜 시간 인도를 위해서 일을 했는데, 드디어 사리를 입은 두 여인의 손에 최후를 맞게 됐지요. 두 여인은 판사의 방갈로까지 따라와서는 하인에게 진정할 게 있다고 하면서 판사님 좀 만나 뵙고 싶다고 했지요. 그래서 판사가 베란다로 나오게 되었고, 진정서를 받으려고 자기 손을 내밀면서 곧장 여자들에게 다가가자, 그 여인들 중 한 여자가 사리에서 총을 꺼내어 그 사람을 쏴 죽였지요.”
‘There was a judge in Bengal, who was greatly loved by all the people of his district. He was their ma-bap, and they all came to him with their troubles. He loved India, he was devoted to India and like so many other men he worked long hours for India, and yet he met his end at the hands of two girls in saris. They came along to his bungalow and told his servant that they wanted to see the judge-sahib, as they had a petition to present to him. The judge came out on to the verandah and directly he got close to the girls with his hand out to receive the petition one of the girls pulled a pistol from her sari and killed him.’
마르죠리 캐시모어 여사는 다른 영국인들처럼 그 사건이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아서 국회 모 당에 있던 인도 친구에게 설명을 구했다. “여기 당신이 당신 민족에 봉사코자 모든 걸 희생하면서 목숨을 바쳐가며 일하는 인도 관리들을 두고 있다고 합시다. 그런데 영국에서 온 인도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다른 사람들을 받게 되고, 그 사람들이 단지 몇 년간만 있다 가면서, 인도인을 혹사 시키지요. 저도 당신이 그런 종류의 사람은 인도에서 쫓아내고 싶을 거라고 이해는 해요. 하지만 그 인도인이 당신 민족을 위해서 다른 어떤 사람보다도 더 일을 하면서 당신을 섬기고 있는데도 계속해서 당신이 그 인도 관리를 깔아뭉개려 드는 격이지요.” 그리고는 웃으며, “이해 못하시겠어요? 그 판사나 그와 같은 사람들은 우리의 지방자치에 장애물이 되지요. 다른 영국인은 우리가 걱정할 필요가 없어요. 왜냐하면 그런 사람만이 영국을 인도에서 쫓아낼만한 구실이 돼주기 때문이지요.” 라고 말을 했지요.”
‘“Here you have devoted servants of India, giving their lives, sacrificing everything in order to serve your people. You have others who come out from England and don’t understand India. They’ve only come out for a few years and they abuse the Indian. I can understand you wanting that type of person out of the country, but this person is serving you, doing more than anybody else for your people and yet you kill him.” And he laughed and said, “Don’t you understand? The judge and those like him are hindrances to our getting Home Rule. The other man we needn’t bother about because he gives us a cause for kicking out the British.”’
인도 자치정부 문제는 폭동 전부터 큰 이슈였는데, 당시 인도에 있던 보통의 영국인들은 대전으로 그 문제가 표면화될 때까지 호의를 갖고 인도인의 민족주의를 다루지 않았으며, 자치정부에 대해서도 많은 생각을 하지 않았다. “저는 일반 장교들도 인도의 영국통치에 대해 많은 생각들을 했다고 보지는 않고, 사실 저는 영국의 인도통치가 당연히 영원히 갈 거라고 생각을 했지요. 북쪽에 있던 산악지방 출신의 한 인도인 장교가 저에게 “영국이 인도를 떠나면 어떻게 될까요?” 하고 묻던 기억이 나는데, 그 때 저는 그 사람을 쳐다보면서 “영국은 인도를 결코 떠나지 않을 텐데 뭘 그러나?” 하고 대답을 했지요.”
‘I don’t think the average subaltern thought much about British rule and, indeed, took it granted that it would go on forever. I do remember when one of our Indian officers from the hills in the north said to me, “What is going to happen when the British leave India?” I looked at him and said, “Well, of course, the British are never going to leave India.”’
심지어 크리스토퍼 마스터맨 씨 같이 총독부에 들어간 사람들도 그런 문제를 그다지 심각한 문제로 생각하지 않았다. “제가 처음 인도에 갔을 때, 언젠가 인도가 독립을 할 거라는 생각은 결코 들지않았지요. 그러나 몬테규 쳄스포드 개정법이 1921년에 소개되자, 그런 징조를 보았지요. 그래도 그 당시 저는 독립이야 오겠지만, 그렇다고 그렇게 빨리 올 거라고는 미쳐 깨닫지 못했어요. 1935년 법 이 후에야 모든 사람들이 독립이 오고있으며, 그 것도 아주 빨리 오고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지요. 그러나 그렇다고 그런 일에 분개하지는 않았던 거 같아요.”
‘When I first went to India it never entered my head that India would one day be independent, but I saw a sign when the Montague-chelmsford Reforms were introduced in 1921. I certainly felt then that Independence would come but I don’t think we realized that it would be coming so soon. After the 1935 Act everyone realized that Independence was coming and was coming quite soon, and I don’t think we resented it.’
대전 후 총독부에 입사한 젊은이들은 아주 다른 견해를 갖고 있었다. 이에 대해 필립 메이슨 씨는 다음과 같이 단언을 했다. “저는 자치정부로 가는 과도기에 인도를 이끌어주러 가고있다는 분명한 생각을 가지고 인도에 갔지요. 비록 사람들이 혼미를 거듭하고 있는 지역에서도 그런 점을 계속해서 잊고 있었지만, 그래도 불행 중 다행으로 사람들이 회교도와 힌두교도들이 서로 죽이지 못하게 하고, 선생님의 토지등기 권리를 보장해 주고, 일을 한 날까지 선생님의 저택을 소유하게 해주고, 아니면 탄압을 막겠다는 생각을 자나 깨나 했기 때문에, 그런 문제를 정말 모르는 일로 깡그리 잊고 있었다고 생각하지는 않지요.”
‘I went to India clearly thinking that we were going there to lead India on the way to self-government. Although one constantly lost sight of this in the rough and tumble of a district, because you’re always thinking all the time of stopping Mohammedans and Hindus from knocking each other on the head, or getting your land records right or getting your court up to date in it’s work, or stopping some oppression, none the less, I don’t think one really lost sight of it.’
당시에도 그런 문제는 정치를 초월해서 다뤄져야 한다는 경향이 있었다. “정치적 변혁과 발전은 우리가 상대하고 있던 보통사람의 행복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지요. 우리의 주된 관심사는 그런 사람의 행복이었지요.”
‘Political changes and political advancement had very little relevance to the happiness of the ordinary chap that we were dealing with, and it was his happiness that was our chief concern.’
현실 도피적인 생각은 역시 정부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비어 버드 우드 여사는 다음과 같은 말을 1941년 그녀가 보았던 파일에 첨부된 업무일지에서 인용해 주었다. “만약 우리가 간디에 대해 한 번 들어내놓고 생각해 보면, 그는 어쩜 골치 아픈 다소 애매모호한 존재였어요. 가장 하급 관리도 이렇게 썼지요. “이 계획을 시작하는 게 좋지않을 거 같다. 아마도 끝낼 시간이 없을지도 모른다.” 중간 관리도 업무일지에 다음과 같이 상세히 기록을 했지요. “말도 안 되는 소리다. 나는 1919년에 이 소리를 처음 들었다.” 최고위 관리인 총독도 업무일지에 다음과 같이 기록을 했다. “절대로 말도 안 된다. 나는 이 소리를 1909년에 들었다.” ’
‘If we thought about Gandhi at all it was really that he was just a bit of a nuisance and slightly absurd.’ The most junior officer had written, “I don’t think we’d better start this project, there may not be time to finish it.” His senior officer had minuted on the file, “what nonsense. I was told this in 1919.” And the most senior officer, the Governor, had minuted on that same file, “Absolute nonsense. I was told this in 1909.” ’
인도의 미래를 그저 간과하며 지나칠 수 밖에 없었던 경향은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에 그랬다. “인도인들은 결코 영국인들이 권력을 모두 이양할 의도를 갖고있다고 믿지 않았지요. 인도인들은 권력 이양을 회피하기 위해선 우리가 어떤 속임수든 쓸 거라고 끝까지 확신을 했는데, 비협력 운동의 기초가 바로 그런 것이었지요.”
‘Indians never really believed that Britain had any intention of handing over power at all. They were convinced right up to the end that we were going to find some trick to avoid handing over power – and that was the foundation of their Non-Cooperation Movement.’
시간이 지나면서 비협력과 시민 불복종 운동이 크게 세를 불려나갔다. 그러자 마침내 도시 지역에서도 그런 실정을 모른 척하고 무시만 하고 있는 게 불가능해지게 되었다. 이에 대해 에드윈 프랏 씨는 다음과 같이 기억을 하고 있었다. “제가 맨 처음 캘커타에 갔을 때, 영국인 동네인 쵸우링기 쪽으로 걸어가다 보면, 반대 편에서 걸어오던 인도인들이 길에서 비켜 지나갔지요. 그런데 이제는 그 길을 인도인들이 계속 걸어가고 선생님이 길을 양보해야 될 때가 온 거였어요.”
‘When I first went to Calcutta you could walk down Chowringee and the Indians walking in the opposite direction would just get out of your way. Time came when they just continued to walk where they were and you got out of the way.’
아주 소수의 사람들만이 가끔가다 한 번 정도 적대감을 가진 사람을 만났다. 2차 세계대전 동안 아이리스 포르탈 여사는 매일 그녀의 방갈로에서 간호사로 일하던 병원까지 자전거를 타고 다녔다. “하루는 간호원 복장을 하고 도로를 따라 자전거를 타고 가고 있었는데 “인도를 포기하라!” 하고 외치면서, 팔에 팔을 끼고 도로를 곧 바로 건너가던 인도 소년들을 보았지요. 인도에서 그 동안 제가 만난 첫 번째 공격이어서 저는 머리를 숙이고 그 애들을 향해 난폭하게 종을 울리면서 자전거를 타고 곧장 앞으로 내달렸지요.”
‘One day, bicycling along the the road in a nurse’s uniform I came on a row of young Indian boys who were right across the road arm in arm shouting “Quit India!” It was the first aggression that I had ever met in India, so I put my head down and rode straight at them on my bicycle, ringing the bell violently.’
대부분의 영국인들은 별다른 재해도 입지 않았고, 그로 인해 아무런 영향도 사실상 받지 않았다. 그러나 벵갈 지방에서는 관리나 경찰이 주기적으로 암살을 당했는데, 로버트 씨도 초창기 20 –30년 동안은 아무런 문제도 겪지 않았다. “우리는 베란다에서 자면서 우리 방식대로 살았지요. 다소간 집 대문도 열어놓고 살았지만, 전혀 불안하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았어요.”
‘We were on our own there, sleeping out on the verandah. The house was more or less open but I don’t think we felt uneasy at all.’
문제를 경험했던 사람들이 그런 문제를 다루려고 임명되었고, 그런 문제는 정치적 소요 형태가 아닌 회교도와 힌두교도 사이에 벌어진 종파가 다른 각 부족마다 서로 싸우는 형태로 고질적인 풍토병처럼 많이 생겼다. 이 것이 지방 관리들이 겪었던 무서운 점들이었다. “한 번 폭동이 일어나면 힌두교도와 회교도가 서로 맹렬히 부딪쳐서, 선생님이 할 수 있는 건 다만 경찰을 불러내 양 쪽을 분리시켜 한 명씩 흩어지게 하는 걸 보는 게 고작이었지요.”
‘Once it broke out and you got Hindus and Moslems going for each other hammer and tongs really all you could do turn out the police and try and separate the parties and drive them away from one another.’
그리고 종교적 갈등의 소지를 유발하던 데모행진 사태를 누그러뜨리려는 데 주로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평상시 수준을 유지하는 걸 중요한 임무 중 하나로 생각했던 경찰서에 가보면 많은 기록들이 보관되어 있었고, 거기에 보면 축제에 관계되는 모든 풍속들을 기록해 놓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신성시 될 수도 있는 특정 보리수 나무 근처나, 특정 사원 근처로 지나가든 않든 간에 회교축제 행렬이 지나는 도로는, 전에 하던 대로 정확히 그대로 따라가는지 유심히 살펴봐야 했지요.”
‘The route which the Mohurram procession would follow, whether it went near a particular temple or not, whether it went near some particular peepul tree which might become holy in the course of time. You had to see that they followed the exact precedent.’
아주 조금이라도 탈선행위, 범법행위 등은 없는지 조사했으며, 특히 대규모 폭동을 조장하는 예상된 도발행위는 철저히 감시를 하는 게 필요했다. “사소한 사건이 일어나서 보면 그 건 파탄인들이 힌두 소녀를 유괴했다느니 누군가가 회교도를 죽였다느니 하는 소문들이었지만, 대개는 사실이 아니었지요. 그러나 그런 일이 있고 난 뒤에는 항상 어떤 도시들에서 불만이 쌓이다 사건이 터지기 시작했지요. 밤이면 칼로 살해당하는 사건이 났었는데, 그러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런 얘기들을 부풀리려고 했지요; 다시 말하면 만약 5명의 회교도인이 밤 사이에 칼에 살해당했다고 하면, 그 다음 날 6명의 힌두인들이 살해당하는 식이었지요.”
‘Some stupid little thing would happen, a rumour that Pathans were abducting Hindu girls, or that somebody had killed a Mohammedan. Usually it was quite untrue, but then the trouble, which was always smouldering in certain cities, started. You’d get some stabbing incidents at night, and then everybody was out trying to keep the score up; if five Mohammedans were stabbed one night, six Hindus would be murdered the next.’
힌두와 무슬림 사이의 갈등은 뿌리깊은 아주 오래된 갈등이었다. 이에 대해 펜더럴 문 씨는 다음과 같이 단언을 했다. “대책이 없었어요. 어떻게 예방할 수도 없었구요. 그러나 만약 선생님이 그 시간에 현장에 있다가 기민하게 즉각 대응을 한다면 아주 심각한 상황으로 가는 걸 막을 수 있었을지는 모르지요. 저는 폭동발생 초기에 무력 시위를 극대화시켜 사람들에게 공포감을 심어주는 게 절대로 좋다고 믿었으며, 또한 무력을 사용해야 한다면 아주 효과적으로 사용해야 한다고 믿는 사람이었지요. 총을 1-2 방 쏘는 건 효과가 없었어요. 그래서 저는 지방 행정장관에게 지시하기를 “총을 발포하려거든 최소한 5 방 이상은 갈기시오. 발포하고 나면 쓰러지는 사람들은 있는지 군중들이 겁에 질려있는지 반드시 이 방법이 효과적인지 어떤지 확인해 보시오.” 라고 지시를 했지요. 그러나 다행히 저한테는 그런 잔인한 사건은 일어나지 않고, 그저 평범하고 상식적인 일만 일어났지요.”
‘There was no answer to it. You couldn’t prevent it, but you might if you were sufficiently prompt and on the spot at the time, prevent it assuming a very serious form. I was a great believer in the maximum display of force at the very beginning to try and overawe people. I was also a great believer in using force effectively if you had to use it at all. I didn’t believe in firing one or two rounds; I used to say to my magistrates, “If you ever have to open fire, fire at least five rounds. If you open fire make sure that it is effective, so that people are seen to fall and the mob takes fright.” It didn’t occur to me as ruthless. It occurred to me as plain commonsense.’
레이몬드 버네드 씨는 회교 축제인 모후람 기간 동안 전국적으로 소요가 발생한 1939년 당시 베나레스 지방의 지방 치안판사 였다. “저는 최근 들어온 신임 소대장 지휘 하에 한 소대와 같이 출동을 했지요. 사건이 그 도시에서 가장 위험한 지역에서 발생했다는 사실을 알고서 약간은 겁이 났지요. 그 곳은 대부분 회교도 직공들이 사는 지역 한 가운데 소수의 힌두 방직공들이 살고있던 곳이었지요. 코너를 돌아가자 우리 앞에는 모든 집들이 불에 타고 있었고, 그 놈의 불길 소리 때문에 아무 소리도 들을 수 없었지만, 불꽃을 배경으로 말 그대로 수백 명의 사람들이 양 쪽 집에서 약탈을 하고는 물건들을 아래 있는 사람들에게 던졌지요. 그러나 몰려다니는 사람들에게 매일 하는 식으로 상투적인 경고를 할 상황도 아니었고 – 또 아무도 듣는 사람들이 없을 거 같아서 – 대기하고 있던 장교에게 총을 쏘아 군중을 해산 시키라고 명령을 내렸지요. 그러자 그 장교는 상병에게 세 발 전진에 한 발씩 쏘라고 했지요. 총을 쏘자 수백 명의 사람들이 떼를 지어 돌아다녔는데도 총알은 아무도 맞추지 못하고 건너 편 공터로 날아갔지요. 그러나 효과는 전기에 감전된 듯 커서, 모였던 사람들이 삽시간에 달아나 1분 이내에 전 거리가 텅 비어버렸지요. 코너를 돌아가자, 한 10 야드쯤 거기서도 똑같은 일이 재연되어 보니 불길 속에 수백 명의 사람들이 조용히 약탈을 하고 있었지요. 그래서 “이 짖을 못하게 해야 된다 구. 한 방 또 갈겨!” 라고 말을 해야 했지요. 지붕 처마 위에는 불길에 아주 또렷이 윤곽이 보이던 사수였던 상등병을 가리키고는 “저 놈을 쏴라!” 하고 말을 했지요. 그러자 그 장교는 제가 명령을 내릴 입장이 아니라는 걸 알고는, 상병에게 명령을 내리자 상병이 그 남자를 총으로 쏴 죽였지요. 아무튼 그 자가 길바닥에 폭삭 고꾸라져 떨어져 죽자 사람들은 그 걸 보고 모두들 놀래 가지고는 우르르 도망들을 갔지요. 15 분 이내에 발포소문이 시내 전체에 돌자, 놀라운 효과가 나타났지요.”
‘I set out with a platoon under a very junior, recently joined subaltern and we found, as I’d rather feared, that the trouble had broken out in the most dangerous area in the city. Here there was a minority of Hindu spinners living right in the middle of a large number of Moslem weavers. We turned a corner and there in front of us all the houses were on fire. You couldn’t hear anything for the roar of the flames, but outlined against the flames were literally hundreds of men looting the houses on both sides and throwing the stuff down to their friends below. It was impossible to issue the stock warnings to the crowd – nobody could have heard – so as pre-arranged with the subaltern I said I wanted him to fire to disperse this crowd. So he told a corporal to take three steps forward and fire one shot. He fired and although there were literally hundreds of men milling around, the shot went right through the whole lot without hitting anyone. But the effect was electric. The crowd was gone and the whole street was empty within a minute. We just went round the corner, about ten yards, and there the whole thing was repeated – flames and hundreds of men silently looting. So I said, ‘You’ve got to stop this now, another round.’ I pointed out to the corporal, who was their marksman, a man outlined very clearly against the flames on the cornice of a roof and I said, ‘You shoot him.’ The officer ordered him to shoot, because I couldn’t order him to shoot, and he shot and killed the man. He fell off into the street and there was an absolute stampede. Within fifteen minutes the news of the firing was all round the city and had an astonishing effect.’
정치적인 데모와 대다수의 사람들이 벌인 시민 불복종 운동은 아주 성격이 다른 운동으로, 간디의 정치 구호인 사트야그라하 라는 개념을 근거로 한 수동적인 저항 운동이었다. 예를 들면 그런 운동은 단순히 나리님의 출현만으로도 충분했다.
죤 리벳 카르낙 씨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단언을 했다. “저는 결코 누군가가 마하트마 간디 라고 외쳐대면 무조건 궁둥이를 6대씩 방망이로 후려갈겼지요. 제가 정복을 위엄 있게 차려 입고 헬멧과 양 쪽에 권총을 차고 말 장화를 신고 내려가면 모여있는 사람들이 무서워한다는 걸 알았지요. 저는 흥분되는 감정을 바라며 다소는 지겨움을 갖고 한 일인데, 어떤 면에서는 재미도 있었지요. 2 - 3 천 명 되는 군중들이 시장에 몰려들어서, 모두들 깃발과 표지판을 들고, 마더 인디아를 외쳐대면서 제가 서있는 곳까지 앞으로 전진해 왔지요. 그러면 저는 제자리에 멈춰서라고 명령한 뒤, 경관에게 국기와 표지판들을 모두 빼앗으라고 말을 했지요. 그런 다음 그 소요를 이끄는 비 협조자 5 – 6 명의 이름을 크게 읽고 나면, 깃발과 표지를 모두 경관에게 뺏기고는 수사관과 같이 있던 제 앞에 끌려왔지요. 그러면 맨 앞에 있는 사람에게 “이제 집으로 돌아들 가시요.” 하고 말을 붙이면 싫다고 거절을 했고, 그 자리에서 턱을 중간 크기의 주먹으로 한 방 먹였지요. 한 두서너 방 더 먹이면 비틀대다가 쓰러지게 돼 있었지요. 그러면 그 다음 사람에게도 똑같이 그렇게 했고, 세 번째 사람이 돌아서서 물러서기 시작하면 그렇게 하도록 내버려 두었지요. 그러고 나면 전 군중들이 시장터에서 슬금슬금 달아나버렸지요. 이 게 바로 일반적인 힌두 군중들의 모습이었어요. 회교도들이 훨씬 더 위험하다는 건 알았지만, 이런 상황 하에서 혹 살해당할지도 모른다는 마음이 당시엔 결코 들지를 않았어요.”
‘I never allowed anyone to shout “Mahatma Gandhi” without giving him six on the bottom with a stick. I found that if I went down myself, making quite an imposing figure in full uniform with a helmet and a revolver on each side and riding boots, I could overawe the crowd. I did this really through boredom and the desire for excitement, and considered it rather fun in a way. These mobs of about one or two or three thousand would converge on the market place. They would all have numerous flags and banners and would be shouting about Mother India, and they’d advance up to where I was standing. I would order a halt and tell the constable to take away all the flags and banners. I would then read out the name of five or six of the leading noncooperators and they would be taken off with all the flags and banners by the constable, leaving myself with the sub-inspector. I would then speak to the foremost man and say to him, ‘It’s time for you to go home,’ and he would refuse, whereupon I would give him a medium-sized blow on the chin. After about the second or third butt he would stagger off. I then did the same with the next man and the third man would turn and start retreating and I might help him along. Then the whole crowd would bolt out of the market place. This, as a rule, was a Hindu crowd; the Mohammedans I found very much more dangerous, but it never crossed my mind that I could be killed under these circumstances.’
경찰 특수부서에서 근무했던 에프.씨.하트 씨는 비하르 지방의 의회 지도자들의 극성은 체포해서 감옥에 보내 체면을 살려주기 보다는 길 옆에 발가벗겨 내다버림으로써 막을 수 있었다고 다음과 같이 회상을 했다. “그 당시엔 누구나 다 감옥 행 표를 받고싶어 했지요. 순전히 그들의 정치적인 입지는 감옥 가는 일에 달려있었어요.”
‘In those days everybody wanted to get a gaol ticket. Their whole political future depended on it.’
여자들의 데모를 다룰 때는 여자들은 정숙해야 한다는 인도적인 정서 때문에 경찰들이 덕을 본 일이 있었다. “한 번은 파트나 시에서 수 많은 여자들이 거리를 점거하고 땅 위에 누워서 교통이 완전 마비됐었지요. 경찰서장이 그 곳에 도착해서 보니 처음부터 어떻게 해야 할지 아주 난감해 했지요. 만약 남자들이었다면, 경찰을 시켜 몸을 들어 끌어내라고 했겠지만, 여자들이니 감히 그렇게 할 수가 없었지요. 그래서 조금 생각하다가 소방 마차를 요청한 뒤에, 호수로 땅 위에 누워있던 여자들에게 뿌려댔지요. 여자들은 아주 얇은 사리만 입어서 물에 젖자 몸매들이 다 드러나 보였어요. 그리고 경관들이 실실 웃어대며 상스러운 농담을 해대자 여자들은 창피해 가지고 그 즉시 일어나서 달아났지요.”
‘On one occasion in Patna City a number of women laid themselves down on the ground right across the street and held up all the traffic. When the Superintendent of Police arrived on the scene he was at first nonplussed. If they had been men he could have sent in policemen to lift them out bodily, but he daren’t do it with women. So he thought for a bit and then he called for fire horses and with the hoses they sprayed these women who were lying on the ground. They only wore very thin saris and, of course, when the water got on them all their figures could be seen. The constables started cracking dirty jokes and immediately the women got up and ran.’
경찰들만으로 그런 상황을 전부 통제하기가 분명히 어려워지면 군대가 출동을 했다. 챨스 롸이트 씨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을 했다. “우리는 어느 누구도 쏠 필요가 없었어요. 모인 군중들이 점점 더 격해져서 다루기가 어려워지고, 우리에게로 압박하면서 밀고 들어오면 발등에 총 개머리판을 쿵쿵 찌어서 순순히 뒤로 물러서게 했고, 결국은 돌아가게 만들었지요.”
‘We didn’t have to shoot anyone. When the crowd were getting very angry and very unruly and pressing up against us we would ease them back by gently dropping the butts of our rifles on their toes, which did eventually move them back.’
여기에는 항상 깃발을 보여주는 걸로 알려진 사건들이 따라다녔다. “마을의 교장이 아이들을 데리고 행진을 시키면서 우리가 지나갈 때마다 “검둥이 정찰 부대를 위해서 만세 삼창!” 하고 외치면서 마을을 다 지나갈 때까지 계속해서 되풀이했지요. 아무튼 그 사람들은 우리가 있는 걸 확실히 좋아하지 않았어요.”
‘The schoolmasters of the villages would parade all the children outside to shout as we passed by, “Three cheers for the Black Watch Regiment!” and keep on repeating this till we got through the village. However, I’m sure they didn’t like us there.’
1930년 페샤와르 지방의 시민 소요 사태가 있는 동안 레지날드 쎄이보리 씨가 쓴 편지에 보면 군대는 민간인 권력자들을 도와주러 가는 걸 별로 달가워하지 않았다는 내용이 들어있었다. “저는 6월 10일 제 집 사람에게 “이 민간인 소요 사태는 양 쪽 모두에게 아주 불쾌한 일이어서, 나는 갈리폴리로 좀 있다 돌아갈 거요.” 라고 편지를 썼지요. 그리고 6월 14일날 “미래가 틀림없이 인도군에 있다는 게 의심스럽고, 당신과 내가 이 나라에 4년간 있게 될지 어떨지도 잘 모르겠오.” 라고 편지를 썼지요. 한 10 일쯤 지난 뒤에 다음과 같은 글귀를 집 사람에게 또 썼지요. “이따금 다 때려 치우고 첫 연금이나 받고 싶소. 사람들을 증오하는 땅에서 사는 것도 별 매력도 없고, 현재 우리가 갖고있는 시시껄렁한 이 지위도 향후에는 별볼일 없을 거요.” 라고 말을 했지요.”
‘I wrote to my wife on May 10 and said, “These civil disturbances are most unpleasant for both sides, and for me, I’d far rather be back in Gallipoli.” on June 14 I wrote saying, “I’m wondering what the future has in store for the Indian Army; whether you and I will be in this country in four years’ time,” and ten days later I wrote to my wife in the following terms, “At times I feel like chucking it and taking my first pension. Living in a country in which, through no fault of one’s own, one is hated, has few attractions and the future will probably deny us what little status we have at present.”’
라즈들의 인도통치 제 2장에 들어서서는 영국인과 인도인 사이에 개별적이며 사적인 우정은 살아남을 뿐만 아니라 더욱 번영할 것이라는 얘기가 양 쪽에 다 같이 있었다.
이에 대해 데이빗 싸이밍톤 씨는 의회 지도자와 직장 사람들의 관계는 아주 놀라운 관계였다며 다음과 같이 말을 했다. “인도 포기 운동이 일던 1942 년도에, 우리는 어느 정도의 불쾌감을 경험했지만 그 건 그리 오래가지를 않았지요. 남은 시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의회 지도자들은 영국인 라즈들에게 공공연히 적대감을 표시했지만, 보통 때는 친구로 만나서는 다음 할 일에 대해서 우스개 소리를 교환했지요. 저는 시민 불복종 운동인 사트야그라하 운동을 개인적으로 하던 숄라프르 지방에 있던 한 의회 지도자가 제게 와서는 “아! 작별 인사를 하려고 왔습니다.” 하고 말해서 “왜요? 무슨 일이라도 있나요? 어디 멀리 떠나세요?” 하고 묻자 “아니요. 오늘 투옥되기로 결심했어요.” 라고 하던 일이 기억에 남아요. 그런 뒤 그 사람은 공손히 제게 작별인사를 하고 나가서는 바로 도로에서 체포되어 감옥에 갔지요. 그들은 “전쟁을 지원하지 말자! 사람도! 단돈 1 루피도!” 라고 외쳐대며 다니다가, 마음에 둔 말을 털어놓으면 어김없이 경찰이 데려와 쳐넣고는 법정에 세운 뒤 구류를 언도했지요.”
‘There was a time in 1942 in the Quit India Movement when we did experience a certain amount of unpleasantness, but that didn’t last long. For all the rest of the time, although the Congress leaders were supposed to be in open hostility to the Raj, they would meet us on ordinary occasions as friends and we would exchange jokes about what they were going to do next. I remember the Congress leader in Sholapur who was going to offer individual satyagraha came along to me and said, “Oh, sir, I’ve come to say goodbye.” I said, “Why, what’s happening? Are you going away?” “No, I have got to offer myself for imprisonment today.” So he said goodbye to me very politely and went out and got himself arrested on the road. They would go along shouting, “No help for the wars. Not a man, not a the police would take them in and they’d be hauled up before a court and sentenced to a short term of imprisonment.’
앤 싸이밍톤 여사는 사로지니 나이두 라고 하는 정치 지도자가 포함된 친구들과 심지어 인도 포기 운동이 최고조에 이르러 말썽이 불거지던 시기에도 같이 자주 모여서 차를 마셨다. “저는 정치계에서 누구누구 하는 사람은 다 만나봤는데, 그 사람들은 “앤 앞에서 얘기해도 괜찮겠어요?” 하고 말하면, 그 여자는 “아 그럼 요. 절대 괜찮아요.” 라고 말을 하곤 했지요.”
‘I met everybody that was anybody in the political world there and they used to say, “Is it all right to speak in front of Anne?” and she’d say, “Oh yes, perfectly all right.”’
의회 지도자 중 또 한 명이 바로 인도 학자인 네루 씨 였는데, 레이몬드 버네드 씨는 간단하지만 퍽 계몽적인 만남을 다음과 같이 네루 씨와 가졌다. “저는 데라던 감옥에 있던 네루 씨를 석방해서, 역시 감옥에서 몹시 앓고있던 그의 부인이 있던 나이니 탈로 네루 씨를 내려보내라는 암호 전문을 정부로부터 접수했지요. 그 부인은 병세가 갈수록 악화되어서 사람들은 네루 씨가 그녀를 볼 수 있게 석방시켜줘야 한다는 생각들을 했지요 – 그러나 정부 쪽은 그가 다시 밖에 나가 정치적인 연설을 하거나 정치활동에 참여치 않겠다고 약속하지 않는 한 그를 풀어줄 준비가 아직 돼 있지 않았어요. 전보에 보니 가석방으로 돼 있었지요. 그래서 이 전문을 어떻게 전달해야 되는지에 대해서 제 재량 것 처리해야 했어요. 알라하바드 외곽에 있는 협궤 역에 한 밤 중 네루 씨가 도착해서 가보니 무척 피곤해 보였고 긴장돼 있었지요. 그래 제가 올라가서 그분을 만나고는 네루 씨를 만나러 정부가 대리 파견한 사람이라고 소개하고는, 정부 입장은 네루 씨가 부인을 볼 수 있게 가석방을 해주고 싶어한다고 말을 했지요. 네루 씨는 자기 부인이 몹시 아프다는 얘기를 공식적으로 들은 건 그 게 처음이었지요. 그 당시 저는 그가 보증만 한다면 가석방을 하겠다고 얘기하면서 약간은 미묘한 임무에 빠져들었지요. 그러자 갑자기 표정이 굳어지면서 말하기를 “그렇지만 그 말엔 결코 동의를 할 수가 없군요. 그런 약속은 제 신념에 위배되는 일이거든요. 저는 거의 3 년을 감옥에 있었고, 물론 저도 제 집 사람과 같이 있고 싶지만 제가 마지막 하고 싶은 일은 정치에 몸담고 연설을 하는 일이랍니다. 따라서 저는 지금 정부에 약속을 할 준비가 돼 있지 않습니다.” 라고 했지요. 플랫폼을 따라서 걷다 보니 흰 옷을 입고 누워 자는 인도인들의 모습이 보였고, 우리는 반 시간 이상 플랫폼을 주의깊이 사람들 몸을 건너 다니며 왔다 갔다 했는데, 일단의 경찰들은 사태가 어찌 될까 하고 걱정들을 하면서 뒤 쪽에 서있었지요. 저는 그를 가석방을 시켜주는 게 기사도 정신이라는 점을 지적하려고 했으며, 그 것이 선생님의 적에게 표할 수 있는 가장 영예로운 일이라고 생각을 했지요. 그러자 그는 “중세 때라면 그럴 수도 있지만 인도에서는 그렇지 않아요. 더 이상 통용이 안 됩니다. 냄새 나는 말이군요.” 라고 말했지요. 그런데 갑자기 제게 한가지 영감이 떠올랐지요. 그래서 “좋아요, 그렇다면 이렇게 하는 건 어떻겠어요, 당신이 굳이 정부에 약속을 못하시겠다면, 저와 신사 협정을 하시는 건 어떻겠습니까?” 그러자 그는 멈춰 서더니 저를 쳐다보고는 얼굴에 환한 웃음을 띠더니 “아, 당신에게 하는 신사적인 동의라? 그렇다면 그 건 별개의 문제지요.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라고 말을 했지요.
‘I received a coded telegram from the Government to say that they had released Pandit Nehru from gaol in Dehra Dun and they were sending him down to Naini Tal where his wife was also in prison and seriously ill. She had had a bad turn for the worse and they were very anxious that he should be released to see her – but they were not prepared to release him unless he would undertake not to take part in any political activities or make any political speeches while he was out. In the telegram they used the expression ‘Release on Parole’ and I was to use my discretion as to how to put this message across. Nehru arrived at about midnight at the narrow gauge station outside Allahabad and and he was obviously very tired and very tense. I came up and met him and said I’d been deputed by the Government to meet him and that the Government wanted to release him on parole so that he could see his wife. It was the first he’d heard officially that his wife was seriously ill. I then plunged into my delicate task, saying that they would release him on parole provided he gave an undertaking. Immediately he stiffened and said, ‘Oh, but I could never agree to that. It would be against all my principles to give such an undertaking. I have been in gaol for nearly three years. I want to be with my wife and the last thing I want to do is join in politics and make speeches – but I am not prepared to give an undertaking to the government.’ All along the platform there were the shapes of Indians lying asleep in their white clothes and we walked up and down this platform for over half an hour, carefully stepping over these bodies, with a little group of bewildered policemen standing at the back wondering what it was all about. I tried to point out that releasing him on parole was an act of chivalry, that it was the highest honour you could pay your enemy. ‘That may have been all right in the Middle Ages, but it doesn’t work in India,’ he said. ‘It doesn’t apply any longer. It stinks.’ Then I suddenly had a brainwave. I said, ‘Well, look, if you won’t give an undertaking to the Government, what about coming to a gentleman’s agreement with me?’ He stopped in his tracks and he looked at me and a delighted smile came over his face and he said, ‘Ah, a gentleman’s agreement with you? That would be different. I think I could accept that.’
독립이 다가오면서 정치적 환경이 변하여, 이전에 정치적이었든 사람들이 자신들을 잡아넣었던 사람들 윗자리로 많이 부임을 하게 되었다. 1930년대 초에 올라프 캐로 씨는 칸 형제를 잡아넣은 적이 있었는데, 한 사람은 닥터 칸 사히브였고 또 한 사람은 간디의 지지자였든 동생 압둘 가파르 칸이었다.
몇 년이 안되어 그 두 사람은 아주 친한 친구들이 되었다. “제가 주지사였을 때 닥터 칸 사히브는 제 직속 장관이었지요. 한 번은 심각한 언쟁을 하다가 그가 다소 저에게 성질을 내서, 제가 “닥터! 당신 그 말 취소하지 않으면 내가 당신을 다시 감옥에 쳐 넣겠어!” 라고 하자 그 순간 화가 난 얼굴로 한참 쳐다보더니 이윽고 크게 폭소를 터뜨리고는 날 껴안았지요.”
‘When I was Governor and Dr Khan Sahib was my Chief Minister I remember we had a terrific quarrel once and he more or less lost his temper with me. So I said to him, “Doctor, if you don’t retract that I shall put you in gaol again!” He looked at me in fury for a moment and then burst into laughter and embraced me.’
라즈들의 인도통치가 끝나던 해에 드디어 파키스탄에서 불길이 번지기 시작했다. “1939년부터 드디어 이 위험이 우리 앞에 닥쳤고, 우리는 그 것을 다른 데로 돌릴만한 확실한 방법을 알 수가 없었지요.”
‘From 1939 this danger appeared before us and we could see no clear way of averting it.’
인도에 있던 거의 모든 영국인들에게 인도가 분할된다는 생각은 경악할만한 대 사건이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사건을 영국통치 중에서 가장 큰 재난으로 보았으며, 영국통치 동안 영국인들이 이룬 가장 위대한 일인 인도의 대 통일을 원래 상태로 되돌려놓는 놀라운 사건으로 생각들을 했다. 누가 책임을 지느냐 하는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에 대해 퍼시발 그리피스 씨는 다음과 같이 설명을 했다. “저는 지나 씨와 식사를 하면서 그가 갖고 있는 2개 국가에 대한 이론을 상세히 설명하는 소리를 들었을 때, 우선 나라가 분할된다는 게 단순한 화제거리 이상의 무언가가 있다는 걸 깨달았지요. 그가 “당신네 영국인들은 훌륭한 행정가들 이기는 하지만 질이 나쁜 심리학자들 같기도 해요. 당신이 인도인들의 국민성에 대해 말하지만, 인도인들에게 그런 건 없어요. 저는 힌두인들을 제 국민들이라고 간주하고 싶지 않고, 힌두인들도 나를 자기들 국민이라고 생각하지를 않아요. 당신이 민주주의에 대해 얘기하지만, 당신네가 인도에 오기 전 인도에는 그런 게 없었다는 걸 잘 아실 겁니다. 당신네가 지나가는 말로 민주주의라는 제도를 소개했지만, 그런 제도도 당신네와 같이 그냥 지나쳐버리고 말 겁니다.”
‘I first realized that partition was something more than a talking-point when I dined with Mr Jinnah and he expounded his two-nation theory. He said, “You British people, you’re good administrators, but you are very bad psychologists. You talk about Indian nationality but there is no such thing. I don’t regard the Hindus as my fellow nationals at all, and they don’t regard me as their fellow national. You talk about democracy, but you know there was never any such thing as democracy in India before you came. You have introduced a kind of democracy as a passing phase. It will pass with you.”’
지나 씨와 네루 씨 사이의 태도는 분명히 달랐다. 양 쪽을 다 같이 잘 알고 있었던 올라프 캐로 씨는 양 쪽이 다 같이 오만했다고 말을 했다. “그러나 네루 씨의 오만은 지나가 그렇지 않았던 반면, 사람을 끄는 면이 스며있었지요. 그는 아주 거만하고 고집불통으로 분명히 말해서 제가 그리던 영웅적인 사람은 아니었어요.”
‘But Nehru’s arrogance was shot through with charm, which Jinnah’s certainly wasn’t. He was very arrogant and very immovable and he is certainly not one of my heroes.’
부 총독 별장에 마하트마 간디가 5 분 일찍 오는데 반해서 지나는 항상 5 분 늦게 온다는 말이 있었다. 분할 문제에 대해서 인도 군대보다 더 심하게 이를 분개했던 곳은 없었다. “저희들에게 그 것은 청천벽력 같은 대사건이었지요.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어요. 우리는 수십 개의 사회계급과 교조, 피부색, 신앙 등을 하나의 국기 아래 통일시켰고, 한 부대의 색으로 일치시켰어요. 그 걸 이루는데 자그마치 200 년이나 걸렸고, 말 그대로 펜 한 번 움직여서 그렇게 된 것도 아니었지요 – 말하자면 앞으로 다시는 사람들이 절대로 이뤄낼 만한 일들이 아니었어요.”
‘To us it was the heartbreak of heartbreaks. We felt it beyond credence. We had united these dozens of different castes, creeds, colours, beliefs under one flag. We had united them under one regimental colour. It took us two hundred years to build that up, and for that to go literally at the stroke of a pen – it was something that one will never get over.’
당시 인도군을 직접 둘로 나누는 임무를 맡았던 클라우드 오친레크 씨보다 더 큰 허탈감을 맛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모든 인도군 장교들은 그러한 생각들을 증오했지만 우리는 지시를 받은 대로 했지요. 하여튼 사람도 물건도 다 둘씩 나눠야만 했지요. 그 얘기는 바로 내 몸 같은 부대를 반은 힌두, 반은 회교도로 딱 쪼개야 한다는 말이었지요. 그 일이 일어나자 회교 군인들과 힌두 군인들은 서로의 어깨를 잡고 눈물을 흘렸지요. 그 광경은 저의 감정을 대단히 뒤흔들었으며, 그들도 그런 기분을 느꼈을 거예요. 그러니 저 같이 더 나이든 장교들은 물어볼 필요도 없이 대단히 큰 허탈감을 느꼈을 겁니다. 선생님이라도 아마 생전 내내 같이 일을 해오다 딱하니 두 군데로 어쩔 수 없이 찢어질 때는 생전에 한 일들이 모두 다 부질없다고 생각했을 거예요.”
‘All Indian Army officers hated the idea but we did as we were told. They had to be split and then all the equipment had to be split with everything else. What it meant was that regiments like my own, half Hindu and half Moslem, were just torn in half – and they wept on each other’s shoulders when it happened. It was moving for me and I think it was moving for them. The older officers like myself undoubtedly felt a sense of loss. You felt your life’s work would be finished when what you had been working at all along was just torn in two pieces.’
한 종파로 이루어진 대대를 제외하고, 둘로 양분된 군대는 독립을 수행하면서 더욱 더 철저히 두려움을 느끼게 되었다. 캘커타 대학살로 알려진 1946년에 캘커타에서 시작된 학살극은 훨씬 더 큰 규모의 사건으로 발전하면서 힌두와 회교도가 대립 되는 동네에서 수 년간 지속이 되었다.
이에 대해 레드클리프 싸이드 보텀 씨는 다음과 같이 말을 했다. “특이한 침묵이 흐르는 걸로 봐서 뭔 일인가 터질 거라는 것을 감지할 수 있었어요. 긴장이 높아 가고 목청이 커지면서, 결코 잊을 수 없는 성난 군중들의 찢어지는 비명소리를 들었지요. 그 아우성치는 소리가 선생님을 향해 다가오는 걸 들을 수 있었고, 그 사람들은 끔찍한 일을 벌리고, 이내 소리없이 사라지곤 했지요. 그 건 단순한 비명 소리가 아니고, 공포의 냄새였어요. 반드시 살해당하던 사람들한테서만 나는 게 아니었고 살인을 저지르던 폭도들에게서도 역시 죽음과 공포의 냄새를 맡을 수 있었지요. 군중들이 반대 종교인 한 명이 살해당했다는 게 결정되는 순간, 한 가지 형태의 옷을 입은 사람들이 상대편에 모두 대들어 48 시간 내내 싸우다 보면, 하루 밤 사이에 300 - 400 명이 죽어나갔지요. 만약 당신이 고통에 몸을 비트는 사람을 보았다고 해도, 그냥 차를 세우고 도와주다 끝낼 수 밖에 별다른 방법이 없었어요.”
‘You could almost know that it was going to happen by a peculiar silence. But as tension grew the voice pitch went up and the high-pitched screaming of the rioting crowd was something that you could never forget. You’d hear the screaming coming towards you, they would commit some horrible act and then patter away without a sound. But it wasn’t so much the sounds, it was the smell of fear – and you’d get the smell of fear not necessarily from those who were being killed, but from the rioting mobs that are doing the killing. The moment the crowd decided that one of the opposite religion had been killed, then everybody in one form of dress would turn on the others and in a matter of forty-eight hours there were three hundred, four hundred deaths a night. If you saw a man literally writhing in agony and you stopped your car and got out to help him – then you were finished.’
후글리 강의 보트 위에 지은 안전 가옥에서 래드 클리프 싸이드 보텀 씨는 다음과 같은 또 다른 살해 장면을 목격했다. “붙잡혀서 손발을 꽁꽁 묶인 한 무리의 광신자 집단을 볼 수 있었는데, 이들을 강 아래 쪽으로 뻗은 제방으로 데려가서는 뚝 아래 물 속으로 밀어넣었지요. 거기서 긴 장대를 가진 소형 배를 타고 가서 못 올라오게 밑으로 밀어넣고 있었지요. 그러면 호우라 다리 위로 쑥 떠오른 목만 있는 사람 얼굴을 볼 수 있었는데, 이는 먼저 사람 머리를 잘라 강에 밀어넣은 다음, 그 위에 목 잘린 시체 몸둥아리 만을 집어 던져넣어서 그랬지요. 폭동 후에 보니까 말 그대로 죽은 시체들로 빈틈 하나 없이 차 넘쳐 물 위에 떠있다가는 가라앉았는데, 배에 까스가 차면 3 일 뒤 다시 물 위로 떠올랐지요. 조수간만에 따라 떠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면서 여자는 누운 채로 남자는 엎어진 채로 물 위에 둥둥 떠다니면, 독수리가 배나 등을 깔고 앉아 시체 살점을 뜯어먹거나, 해변가로 밀려온 시체 조각은 떠돌이 개나 재칼 아니면 독수리들이 먹어치웠지요.”
‘You could see a crop of one religion or another who had been captured and tied, brought down to the bund which went down to the river, being pushed down the bank into the water where dinghies with poles were pushing them under. You could see them being laid on their faces with their heads poking out over Howrah Bridge and being beheaded into the river, their bodies thrown in afterwards. After the riot the river was literally choked with dead bodies which floated for a while, sank for a while and then, when the internal gasses blew them up, floated again after three days. They were carried up and down the river by the tide, with vultures sitting on their bellies or their backs according to whether they were male or female – one floated one way, one floated the other – taking the gibbly bits and leaving the rest to float ashore to be eaten by the pi-dogs, the jackals and the ordinary vultures.’
저널리스트로 썩어가는 시체가 시체 안치소의 천장까지 쌓여있는 걸 보고 거의 감각이 마비되었던 이안 스테픈 씨는 비록 사소한 사건이었지만, 결코 뇌리에서 지울 수 없었던 사건을 다음과 같이 목격했다. “제 방갈로로 커다란 수염을 기른 우습게 생긴 신문배달을 하던 힌두 사환 아이가 하나 있었는데, 저에게 싱긋 웃고는 채 5 분도 안돼 길 밖에서 칼에 찔려 죽어버린 일이 생각나네요.”
‘A Hindu chaprassi who came to deliver papers to my bungalow, a funny little thing with a huge moustache. I remember his smile and, within five minutes, he’d been knifed to death in the street outside.’
메리 우드 여사도 비슷한 개인적인 경험을 했지만 이보다는 퍽 다행스러운 일을 다음과 같이 회상을 했다. “제 침실 문 밖에서 모든 잡 귀신들이 쏟아져 나왔을 때, 마침 저는 머리를 말리고 있었지요. 그래서 머리를 하던 채로 발코니로 뛰어나가 보니까, 긴 장대 한 끝엔 제 가엾은 청소부가 매달려 있었고, 다른 쪽 장대 한 끝엔 청소부를 때려죽일 일에 골몰하고 있던 나머지 4 – 5 세대의 사람들이 있었지요. 그들은 머리를 풀어헤친 채 화가 난 얼굴로 뭐라고 고함을 치던 마님 때문에 화들짝 놀라 달아났는데, 그렇지 않았더라면 틀림없이 무슨 일인가 일어났을 거예요. 그러자 청소부가 제 발에 엎어져서는 저 때문에 목숨을 구하게 됐다고 극구 고마워하더군요. 제가 구한 거라고 생각은 하지 않지만, 사람들은 영국인이 모두 떠나가고 나면 저런 사람들은 어떻게 될지 참 걱정이 됐지요.”
‘I was drying my hair when all hell was let loose outside my bedroom door. I shot out on to the balcony in my curlers and there was my poor little sweeper hanging on to one end of a long pole, while at the other end of the pole were four or five of the rest of the household who were intent on beating him up – and would certainly have done so except they were so startled by Memsahib gibbering with fury in hair curlers, that they fled. And I was left with my poor little sweeper who had flung himself at my feet and assured me I’d saved his life. I’m sure I hadn’t, but one wonders what happened to people like that after the British all … w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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