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불교
2007. 6. 9. 22:41ㆍ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불교교리·용례
728x90
중국불교의 전래는 서력기원 전후 실크로드(silk road)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다. 150년대에는 안식국(安息國)에서 온 지루가참(支婁迦讒)이 반주삼매경(般舟三昧經)이라는 대승경전을 번역하였다. 당시의 역경승들은 인도, 대월지국, 안식국, 강거국에서 온 이방인들이었다. 중국에서는 구도(求道)와 구법(求法)을 위하여 서역으로 향하였다.
축법호(竺法護), 구마라습(鳩摩羅什), 현장은 역경의 선두이다. 특히 중국불교 2천년동안 전반부 1천년이 역경이요, 후반부 1천년이 연구이었다. 역경의 성인으로는 구역의 대표로 구마라습, 신역의 대표로 현장을 들고 있다. 특히 현장은 손수 인도를 여행하여 구법하였고 중국불교의 삼장법사로 지대한 역할을 하였다. 이외에도 강량야사(畺良耶舍), 구나발타라(求那跋陀羅)등의 외국승과 법현(法顯) 등의 중국승이 활약하였다. 중국의 수 · 당시대의 불교는 한국불교에 가장 큰 폭으로 영향을 끼쳤다. 남 · 북의 분열을 통일한 수나라와 그 뒤를 이은 당나라는 중국불교가 새로운 전개를 보이게 된 시대로 통일국가에 걸맞는 새로운 불교를 요청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특정의 경론에 입각한 새로운 조직화가 진행되었다. 그 대표적인 특색이 종파불교(宗派佛敎)이다. 수 · 당 이전에도 비담종(毘曇宗), 섭론종(攝論宗), 성실종(誠實宗),지론종(地論宗), 열반종(涅槃宗)등의 종(宗)이 있기는 하였으나, 이들은 엄밀한 의미에서 학파라고 불러야 할 것이고, 후대에 생겨난 종파와는 다른 것이었다. 학파로부터 종파로의 발전을 촉진한 계기가 된 것은 사원경제의 독립과 교판(敎判)의 확립이다.
수나라의 지의(智의)가 대성한 천태종이 법화경을 지상으로 하는 독자적인 교파을 확립하여 처음으로 종파를 만들었다. 당나라 때는 법장(法藏)이 화엄경을 중심으로 불교를 체계화하여 화엄교리를 완성하였다. 또한 도선(道宣)은 계율을 연구하여 율종을 창시하였고, 현장과 신라스님 원칙과 규기는 인도의 새로운 유가유식설(瑜伽唯識說)을 기초로 하여 법상종(法相宗)을 열었다. 아울러 선무외(善無畏), 금강지(金剛智), 불공(不空)등이 들여온 밀교의 융성도 간과할 수 없는 것이다. 천태종과 화엄종이 수당불교의 사상적 절정이라고 한다면 선종(禪宗)과 정토교(淨土敎)는 불교의 중국화와 민중화에 커다란 구실을 하였다. 선종은 5조 홍인(弘忍)의 무렵에 이르러 도속(道俗)의 귀의자가 급증하게 되었고 6조 혜능(慧能)은 그때까지 없었던 도시에 대한 포교를 중시하였다. 홍인으로부터 갈라지게 된 혜능의 계통은 남종선(南宗禪)이라 불리고, 신수(神秀)의 계통은 북종선(北宗禪)이라 불렀는데, 이 두 파는 처음 대등한 교세를 유지하였으나 얼마 뒤에 북종은 쇠퇴하고 말았다. 정토교(淨土敎)는 담란(曇鸞)이후 도작(道綽), 선도(善道)가 나와 구칭염불(口稱念佛)을 보급함으로써 무지한 민중들의 환영을 받아 많은 신자를 획득하였다. 845년의 폐불(廢佛)과 연속된 전란으로 말미암아 불교는 심각한 타격을 받게 되었으나, 불립문자(不立文字)를 표방한 선종과 민중의 마음속 깊이 파고든 정토교는 그 세력을 더하여갔다. 수 · 당의 불교는 중국불교 융성의 정점에 위치한다. 선은 북선을 점오(漸悟), 남선은 돈오(頓悟)로 표방된다. 한국은 6조 혜능의 남종선을 이어받아 신라말에 선문구산(禪門九山)이 성립되었으며, 고려와 조선시대에는 위앙(위仰), 임제(臨濟), 조동(曹洞), 운문(雲門), 법안종(法眼宗)의 5가(家) 중 임제종의 선을 이어 받아 현재의 조계종(曹溪宗)에까지 그 맥락이 이어지고 있다.
밀교는 진언다라니 등의 의식에 영향을 끼쳤으나 뚜렷한 종파의 자료없이 교학 일반과 같이 신라에 전승되었다.
선종과 교종이 교세를 확장해가면서 말과 글을 통하여 가르침을 펴는 화엄종 · 천태종 등의 교종과 말과 글에 의하지 않고 부처님의 마음을 전하고자 하는 선종이 서로 일치한다는 주장을 낳게 되었다. 교선일치(敎禪一致)의 주장은 당나라 중기의 화엄종 제4대조인 징관(澄觀)의 사상으로부터 싹이 터서 제5대조 종밀(宗密)에 의하여 명료한 형태로 나타났다.
고려에서는 의천(義天)과 지눌(知訥)이 교선일치의 사상을 깊이 포용하여 교관병수(敎觀竝修), 정혜쌍수(定慧雙修)등을 주장함으로써 한국불교의 한 정통으로 정착시켰다. 송나라의 불교는 염불선(念佛禪), 송학과 선의 교류, 거사불교의 성립, 백련교(白蓮敎) 등으로 집약된다. 명대(明代)에 와서도 역시 선정융합(禪淨融合)의 형태인 염불선이 성행하였으며, 청조(淸朝)의 옹정제는 스스로 원명거사(圓明居士)라 칭하고 염불선을 고취하였다. 민간에서는 명나라이후 이와같은 염불선을 중심으로 불교가 신봉되고 실천되었다. 인도의 불교가 원류로서 한국불교의 뿌리를 점한 것이라면 중국불교는 각 시대마다 한국불교가 새로운 옷을 입게 하는데 큰 영향을 미쳤고, 고려말까지 중국불교의 큰 특색은 우리나라에 수용, 변형되어 새로운 물결을 조성했던 것이다.
축법호(竺法護), 구마라습(鳩摩羅什), 현장은 역경의 선두이다. 특히 중국불교 2천년동안 전반부 1천년이 역경이요, 후반부 1천년이 연구이었다. 역경의 성인으로는 구역의 대표로 구마라습, 신역의 대표로 현장을 들고 있다. 특히 현장은 손수 인도를 여행하여 구법하였고 중국불교의 삼장법사로 지대한 역할을 하였다. 이외에도 강량야사(畺良耶舍), 구나발타라(求那跋陀羅)등의 외국승과 법현(法顯) 등의 중국승이 활약하였다. 중국의 수 · 당시대의 불교는 한국불교에 가장 큰 폭으로 영향을 끼쳤다. 남 · 북의 분열을 통일한 수나라와 그 뒤를 이은 당나라는 중국불교가 새로운 전개를 보이게 된 시대로 통일국가에 걸맞는 새로운 불교를 요청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특정의 경론에 입각한 새로운 조직화가 진행되었다. 그 대표적인 특색이 종파불교(宗派佛敎)이다. 수 · 당 이전에도 비담종(毘曇宗), 섭론종(攝論宗), 성실종(誠實宗),지론종(地論宗), 열반종(涅槃宗)등의 종(宗)이 있기는 하였으나, 이들은 엄밀한 의미에서 학파라고 불러야 할 것이고, 후대에 생겨난 종파와는 다른 것이었다. 학파로부터 종파로의 발전을 촉진한 계기가 된 것은 사원경제의 독립과 교판(敎判)의 확립이다.
수나라의 지의(智의)가 대성한 천태종이 법화경을 지상으로 하는 독자적인 교파을 확립하여 처음으로 종파를 만들었다. 당나라 때는 법장(法藏)이 화엄경을 중심으로 불교를 체계화하여 화엄교리를 완성하였다. 또한 도선(道宣)은 계율을 연구하여 율종을 창시하였고, 현장과 신라스님 원칙과 규기는 인도의 새로운 유가유식설(瑜伽唯識說)을 기초로 하여 법상종(法相宗)을 열었다. 아울러 선무외(善無畏), 금강지(金剛智), 불공(不空)등이 들여온 밀교의 융성도 간과할 수 없는 것이다. 천태종과 화엄종이 수당불교의 사상적 절정이라고 한다면 선종(禪宗)과 정토교(淨土敎)는 불교의 중국화와 민중화에 커다란 구실을 하였다. 선종은 5조 홍인(弘忍)의 무렵에 이르러 도속(道俗)의 귀의자가 급증하게 되었고 6조 혜능(慧能)은 그때까지 없었던 도시에 대한 포교를 중시하였다. 홍인으로부터 갈라지게 된 혜능의 계통은 남종선(南宗禪)이라 불리고, 신수(神秀)의 계통은 북종선(北宗禪)이라 불렀는데, 이 두 파는 처음 대등한 교세를 유지하였으나 얼마 뒤에 북종은 쇠퇴하고 말았다. 정토교(淨土敎)는 담란(曇鸞)이후 도작(道綽), 선도(善道)가 나와 구칭염불(口稱念佛)을 보급함으로써 무지한 민중들의 환영을 받아 많은 신자를 획득하였다. 845년의 폐불(廢佛)과 연속된 전란으로 말미암아 불교는 심각한 타격을 받게 되었으나, 불립문자(不立文字)를 표방한 선종과 민중의 마음속 깊이 파고든 정토교는 그 세력을 더하여갔다. 수 · 당의 불교는 중국불교 융성의 정점에 위치한다. 선은 북선을 점오(漸悟), 남선은 돈오(頓悟)로 표방된다. 한국은 6조 혜능의 남종선을 이어받아 신라말에 선문구산(禪門九山)이 성립되었으며, 고려와 조선시대에는 위앙(위仰), 임제(臨濟), 조동(曹洞), 운문(雲門), 법안종(法眼宗)의 5가(家) 중 임제종의 선을 이어 받아 현재의 조계종(曹溪宗)에까지 그 맥락이 이어지고 있다.
밀교는 진언다라니 등의 의식에 영향을 끼쳤으나 뚜렷한 종파의 자료없이 교학 일반과 같이 신라에 전승되었다.
선종과 교종이 교세를 확장해가면서 말과 글을 통하여 가르침을 펴는 화엄종 · 천태종 등의 교종과 말과 글에 의하지 않고 부처님의 마음을 전하고자 하는 선종이 서로 일치한다는 주장을 낳게 되었다. 교선일치(敎禪一致)의 주장은 당나라 중기의 화엄종 제4대조인 징관(澄觀)의 사상으로부터 싹이 터서 제5대조 종밀(宗密)에 의하여 명료한 형태로 나타났다.
고려에서는 의천(義天)과 지눌(知訥)이 교선일치의 사상을 깊이 포용하여 교관병수(敎觀竝修), 정혜쌍수(定慧雙修)등을 주장함으로써 한국불교의 한 정통으로 정착시켰다. 송나라의 불교는 염불선(念佛禪), 송학과 선의 교류, 거사불교의 성립, 백련교(白蓮敎) 등으로 집약된다. 명대(明代)에 와서도 역시 선정융합(禪淨融合)의 형태인 염불선이 성행하였으며, 청조(淸朝)의 옹정제는 스스로 원명거사(圓明居士)라 칭하고 염불선을 고취하였다. 민간에서는 명나라이후 이와같은 염불선을 중심으로 불교가 신봉되고 실천되었다. 인도의 불교가 원류로서 한국불교의 뿌리를 점한 것이라면 중국불교는 각 시대마다 한국불교가 새로운 옷을 입게 하는데 큰 영향을 미쳤고, 고려말까지 중국불교의 큰 특색은 우리나라에 수용, 변형되어 새로운 물결을 조성했던 것이다.
'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 > 불교교리·용례' 카테고리의 다른 글
불자예절-절에가는 자세 (0) | 2007.06.09 |
---|---|
마음(마음두기) (0) | 2007.06.09 |
인도불교 (0) | 2007.06.09 |
한국불교의 역사 (0) | 2007.06.09 |
법화경 서사모탑 세부 (0) | 2007.06.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