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신심분(修行信心分)(3)

2007. 6. 15. 08:58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대승기신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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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관(觀)에 대하여

(1) 법상관(法相觀)
(2) 대비관(大悲觀)
(3) 대원관(大願觀)
(4) 정진관(精進觀)

3. 지관구행(止觀俱行)
4. 염불왕생(念佛往生) : 불퇴방편(不退方便)


2. 관(觀)에 대하여

『復次, 若人唯修於止, 則心沈沒, 或起懈怠, 不樂衆善, 遠離大悲. 是故修觀.』
(부차, 약인유수어지, 즉심침몰, 혹기해태, 불락중선, 원리대비. 시고수관.)

『 다음, 만약 사람이 오직 지(止)만을 닦으면, 곧 마음이 침몰하여 혹은 게으름을 일으키며 모든 선(善)을 즐기지 아니하고, 대비(大悲)를 멀리하게 된다. 그러므로 관(觀)을 닦는 것이다. 』

『 Now, if anyone practices tranquilization only, his mind will stagnate shortly, and/or relaxe and be negligent and will not rejioce at any goodness, and will also be far from great compassion. Therefore it is necessary to practice the clear observation. 』

止만을 수행하면 無想無念 성사되나
마음이 침몰하여 해이해져 해태하니
적극적 利他行의 온갖선행 잊게되어
대비심 멀어지니 觀을수행 바로잡세

마음을 멈추어서 선정함이 止이지만
제법의 생멸이치 관찰함은 觀이라네
이에는 法相觀및 大悲觀과 더불어서
大願觀 精進觀등 네가지의 觀法있네


『해 설』
이상에서 지(止)에 관한 설명이 끝났으므로 그에 이어 관(觀)을 설할 차례가 되었다. 지(止)는 육바라밀에서 정(定)에 해당되고, 관(觀)은 혜(慧)에 해당되는 것이지만, 정(定)도 지관(止觀)에 통하고 혜(慧) 또한 지관에 통하는 것이므로, 이를 본론에서는 나누지 아니하고, 통합하여 지관(止觀)을 설한다는 것은 이미 밝힌 바 있다. 그러나 그러한 지관(止觀)을 설함에 있어, 위에서 본 바와 같이 먼저 지(止)에 관하여 설하여 왔으며, 다음에 그에 이어 관(觀)을 설하고, 최후로 이를 통합하여 함께 수행하는 것을 설하게 된다. 먼저 관(觀)의 필요성을 설한다. 지(止)만으로는 불충분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사람이 지(止)만을 닦게 되면, 지(止)가 바로 무상무념(無想無念)의 상태에 있는 것이므로, 이것이 실현되면 심적정(心寂靜)이 되어 마음이 침체, 진취력을 상실할 위험이 있다. 그리하여 마음 이 해이해지고 태만해진다. 그래서 적극적으로 선(善)을 행하겠다는 마음이 사라지고 또한 이타(利他)적 대비심마저 상실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지(止)와 함께 적극적인 관(觀)을 닦아야 한다는 것이다. 관(觀)에는 법상관(法相觀), 대비관(大悲觀), 대원관(大願觀), 정진관(精進觀)의 사관(四觀)이 있다.


(1) 법상관(法相觀)

『修習觀者, 當觀一切世間有爲之法, 無得久停, 須臾 變壞, 一切心行, 念念生滅, 以是故苦. 應觀過去所念諸法, 慌忽如夢. 應觀現在所念諸法, 猶如電光. 應觀未來所念諸法, 猶如於雲忽爾而起. 應觀世間一切有身, 悉皆不淨種種穢汚, 無一可樂.』
(수습관자, 당관일체세간유위지법, 무득구정, 수유 변괴, 일체심행, 염념생멸, 이시고고. 응관과거소념제법, 황홀여몽. 응관현재소념제법, 유여전광. 응관미래소념제법, 유여어운홀이이기. 응관세간일체유신, 실개불정종종예오, 무일가락.)

『 관을 수습하는 자는, 일체세간의 유위(有爲)의 법은 영구히 정지시킬 수 없는 것으로서, 순간 변괴되고, 일체 심행(心行)은 염념(念念)으로 생멸하며, 이러한 것이기 때문에 고(苦)라고 마땅히 관하는 것이다. 과거에 염한바 제법은 황홀한 꿈과 같다고 마땅히 관하는 것이다. 현재 염하는 바 제법은, 오직 번개(電光)와 같다고 마땅히 관하는 것이다. 미래에 염하는 바 제법은 오직 구름이 홀연히 일어나는 것과 같다고 마땅히 관하는 것이다. 세간의 일체 유신(有身)은 실로 모두 부정한 여러 가지 예오(穢汚)로서, 하나도 즐겨할 것이 없다고 마땅히 관하는 것이다. 』

『 one who practice clear observation should observe that everything in the phenomenal world never exists in the same condition for long. It is to be changed and destroyed in a moment and the thought or action of mind changes momentarily. Therefore, all of these induce suffering. one should observe that the past is as a dream, present as a lightning flash, and future as a cloud suddenly gathering in the sky. one should observe that the bodies of all living beings in the phenomenal world are unclean, full of various impurities. Therefore, they are not worthy of pleasure. 』

有爲法 생멸인연 그이치를 관찰하니
제행은 무상하여 세간의법 변해가고
心行도 찰나찰나 생멸하니 苦痛이며
우리몸 不淨하니 즐겨할것 없는걸세

과거에 염한법은 그모두가 꿈만같고
현재의 모든것은 번개처럼 사라지며
미래의 온갖것은 뜬구름과 같은거니
그모두 허망한것 집착할것 없는걸세


『해 설』
먼저 법상관(法相觀)에 대하여 설한다. 법상관은 법의 관찰이다. 유위법(有爲法)은 무상(無常)하다고 보는 무상관(無常觀), 무상한 것은 고(苦)라고 보는 고관(苦觀), 일체제법은 무아(無我)라고 보는 무아관(無我觀), 자기의 신체는 농혈이나 내장 등 모두가 부정하다고 보는 부정관(不淨觀). 이와 같이 제법의 성품을 관찰하는 것이 법상관이다.

본론은 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즉, 관(觀)을 수습하는 자는 일체세간의 유위법(有爲法)은 영구히 동일한 상태로 머무르지 않는다. 순간순간 변화한다고 제법의 무상(無常)을 관하는 것이다. 또한 일체의 마음의 활동도 찰나찰나 변하고 있어, 한 순간도 생멸함이 머무르지 않는다. 따라서 이것은 고(苦)라고 유위법(有爲法)의 고(苦)를 관한다. 또한 과거에 인식한 온갖 법은 지나가 버린 황홀한 꿈과 같은 것이라고 관하는 것이다. 현재 인식하고 있는 모든 법은 찰나에 과거가 되고, 그 속도가 번갯불과 같이 빠른 것이라고 관하는 것이다.

또한 미래에 인식되는 법은 오직 뜬구름이 홀연히 일어났다 사라지는, 의지할 것이 못된다고 관하는 것이다. 제법무아(諸法無我)이기 때문이다. 세간에 있는 일체생물의 육신(肉身)은 피나 농, 내장 등 모두가 깨끗하지 못한 부정(不淨)한 것이며 더러운 것이라고 관하고, 하나도 즐겨할 것이 없다고 관하는 것이다.
이것이 본론에서 말하는 법상관(法相觀)이다.

(2) 대비관(大悲觀)

『如是當念, 一切衆生, 從無始世來, 皆因無明所熏習故, 令心生滅, 已受一切身心大苦. 現在卽有無量逼迫. 未來所苦亦無分齊. 難捨難離. 而不覺知衆生如是,甚爲可愍.』
(여시당념. 일체중생. 종무시세래. 개인무명소훈습고. 영심생멸. 이수일체신심대고. 현재즉유무량핍박. 미래소고역무분제. 난사난리. 이불각지중생여시, 심위가민.)

『 이와 같이 마땅히 염하여야 한다. 일체중생은 무시세 이래, 모두 무명의 훈습한바 인(因) 때문에 마음으로 하여금 생멸케하여, 이미 일체 신심(身心)에 큰 고통을 받고 있다. 현재에도 바로 무량한 핍박이 있다. 미래에 받을 고통〔所苦〕도 역시 한계(分齋)가 없다. 버리기 어렵고 벗어나기 어려운 것이다. 그러나, 중생은 이와 같은 것을 알지 못하니 심히 가엽게 여길 수밖에 없는 것이다. 』

『 one should perceive that the all living beings are being influenced by ignorance from infinite past without beginning. Therefore, their mind makes change as ceasing and arising at every moment and their body and mind suffer great sorrow and pains for it. They are immeasurably under sorrowful pressure at present and will also be painful in future limitlessly. It is very hard to get rid of, but they do not comprehend the facts of full sorrows. Therefore, they are greatly pitiable. 』

중생은 無常苦에 無我不淨 그것임은
나이제 觀해보니 우리중생 불쌍하오
그들은 무시이래 무명으로 훈습되어
마음이 생멸하여 몸과마음 고통받네

현재도 고통으로 무량핍박 받지만은
미래도 한량없는 모든고통 받을지나
중생은 그걸몰라 고통받아 헤메이니
나이제 그들위해 구제서원 세우겠네

『해 설』
다음은 무상(無常), 고(苦), 무아(無我), 부정(不淨)의 법상관(法相觀)을 바탕으로 하여, 중생의 존재를 불쌍히 여기는 대비관(大悲觀)이다. 일체중생은 무시이래(無始以來)의 무한한 과거로부터 지금까지 무명(無明)에 의하여 훈습되어 있어, 망념이 일어나고, 마음이 생멸하는, 미망(迷妄)의 세계에 살고 있다. 그래서 이미, 일체의 심신(心身)에 큰 고통을 받고 있다. 과거뿐만 아니라 현재도 무량한 고통으로 핍박당하고 있다. 더욱이 미래에 받을 고통도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막대하지만, 그것은 실로 버리기도 어렵고 벗어나기도 어려운 것이다. 그럼에도 중생은 그 사실을 바로 알지 못하고 있으니, 그것을 알지 못하는 중생은 심히 불쌍한 존재일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와 같이 중생의 어리석음을 가엽게 보는 것이 본론에서 말하는 대비관(大悲觀)이다.


(3) 대원관(大願觀)
 
『作此思惟, 卽應勇猛立大誓願. 願令我心離分別故, 편於十方, 修行一切諸善功德, 盡其未來, 以無量方便, 救拔一切苦惱衆生, 令得涅槃第一義樂.』
(작차사유, 즉응용맹립대서원. 원령아심리분별고, 편어시방, 수행일체제선공덕, 진기미래, 이무량방편, 구발일체고뇌중생, 영득열반제일의락.)

『 이러한 사유(思惟)를 하고, 바로 응하여 용맹스럽게 대서원을 세운다. "원컨대 내 마음으로 하여금 분별을 떠나게 하기 때문에 시방에 두루한 일체의 제선공덕을 수행하고, 그 미래를 다하여 무량한 방편으로, 일체 고뇌의 중생을 구발하여, 열반 제일의(第一義)의 락(樂)을 얻게 하소서" 라고. 』

『 Having thought of these pitiful things, one should make a great intrepid vow as follows. " May my soul be freed from finite limitations and distinctions, and practice all goodness in all the world. And may all the living beings be freed from all their sorrows forever in future, and have highest joys of Nirvana ! " 』

그같이 어리석은 우리중생 불쌍하여
크나큰 용맹심을 그들위해 일으켜서
그중생 구제코저 큰서원을 세우오니
그들을 고통에서 벗어나게 하옵소서

나이제 온갖분별 벗어나서 차별없이
중생을 구제코자 온갖선행 닦사오니
미래를 다하여서 한량없는 방편으로
그들을 구제하여 열반얻게 하옵소서

『해 설』
다음은 대비관(大悲觀)을 바탕으로 하여 중생구제의 대서원(大誓願)을 세우는 것이다. 즉, 보살은 중생의 어리석음을 가엽게 여기는 대비관의 사유를 한 뒤에는 큰 용맹심을 일으켜 다음과 같은 큰 서원을 세우는 것이다.
" 원컨대 나의 마음으로 하여금 분별을 떠나게 하여, 일체중생을 차별하지 아니하고, 시방세계에 두루한 모든 중생을 구제하고, 모든 선공덕을 수행하여, 미래를 다하여 영원히, 무량한 방편으로 일체중생의 고통을 제거 구제하며, 그들로 하여금 열반(涅槃)이라고 하는 최고의 즐거움을 얻게 하소서." 라고.
이같은 서원을 세우는 것을 대원관(大願觀)이라 한다.

* 참고사항 : 신구역(新구譯) 비교대조표



(4) 정진관(精進觀)

『以起如是願故, 於一切時一切處, 所有衆善, 隨己堪能, 不捨修學, 心無懈怠. 唯除坐時專念於止, 若餘一切, 悉當觀察應作不應作.』
(이기여시원고, 어일체시일체처, 소유중선, 수기감능, 불사수학, 심무해태. 유제좌시전념어지, 약여일체, 실당관찰응작불응작.)


『 이와 같은 원(願)을 일으키는 것이기 때문에 일체시와 일체처에 있어서, 있는바 온갖 선(善)을, 자기가 능히 감당하는 바에 따라, 버리지 않고 수학하며, 마음에 게을리함이 없게 하는 것이다. 오직 앉아있을 때만 지(止)에 전념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만약 나머지 일체에 있어서는 모두 마땅히 하여야 할일[應作]과 하지 않아야 할일[不應作]을 관찰하여야 한다. 』

『 Having made this great vow, one should do every goodness that is in one's power at all times and in all places, and should never cease to practice it or should never neglect it. one should practice the tranquilization zealously while he is sitting for concentration of the mind. At other times, one should practice the clear observation of everything whether it should be done or never to be done. 』

나이제 이서원을 여기에서 세웠으니
언제나 어디서나 온갖선행 정진하며
버리지 아니하고 태만없이 수학하여
내힘이 미치는한 모든선행 실행하세

앉아서 전념으로 止수행을 할때외는
언제나 어디서나 觀수행을 실천하여
할일과 안할일을 한결같이 분별하고
그같은 실천수행 끊임없이 닦아가세


『해 설』
이상에서 중생구제를 위한 대서원(大誓願)을 세웠으므로, 다음은 이 대원(大願)을 어디까지 실행할 것인가의 정진(精進)을 일으키는 것이다. 정진은 언제, 어디서나, 일체시(一切時), 일체처(一切處)에서 실행하는 것이며, 세상에 있는 온갖 선(善)이라고 하는 것은, 자기 힘이 미치는 한 모두 실행하여야 하며, 한 순간도 버리지 않고, 게을리 하는 마음을 일으킴이 없이 수행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정진간(精進觀)이다.
이와 같이 일체시, 일체처에서 정진하는 마음을 일으켜 정진해 나가는 것이지만, 그러나 앉아서 지(止)를 전념으로 수행하는 동안은 관(觀)을 수행할 수는 없는 것이며, 그 시간을 제외한 일체의 시간에는 하여야 할 도리(道理)와 하여서는 안될 일을 구별하여 관찰하는 것이다. 그래서 하여야 할일[應作]을 실행하는 것이다. 여기서 관(觀)에 대한 설명은 끝마친다.

지금까지 지(止)와 관(觀)의 수행방법을 따로따로 설명하였으므로 다음에는 이 지(止)와 관(觀)을 함께 하는 지관구행(止觀俱行)을 밝히는 부분이다.



3. 지관구행(止觀俱行)

『若行若住, 若臥若起, 皆應止觀俱行. 所謂雖念諸法自性不生, 而復卽念因緣和合善惡之業, 苦樂等報, 不失不壞. 雖念因緣善惡業報, 而亦卽念性不可得. 若修止者, 對治凡夫住著世間, 能捨二乘怯弱之見. 若修觀者, 對治二乘不起大悲狹劣心過, 遠離凡夫不修善根. 以此義故, 是止觀二門, 共相助成, 不相捨離. 若止觀不具, 則無能入菩提之道.』
(약행약주, 약와약기, 개응지관구행. 소위수념제법자성불생, 이부즉념인연화합선악지업, 고락등보, 불실불괴. 수념인연선악업보, 이역즉념성불가득. 약수지자, 대치범부주착세간, 능사이승겁약지견. 약수관자, 대치이승불기대비협렬심과, 원리범부불수선근. 이차의고, 시지관이문, 공상조성, 불상사리. 약지관불구, 칙무능입보리지도.)

『 만약 행하거나(行), 만약 머물거나(住), 만약 눕거나(臥), 만약 일어나거나(起)할때에도 모두 마땅히 지관(止觀)을 함께 행하여야 한다. 이른바, 제법의 자성(自性)이 불생(不生)이라고 염할지라도, 그러나 다시 바로 인연화합의 선악의 업과 고락 등의 보(報)는 상실되지 않고 부서지지 않는다고 염하는 것이다. 인연과 선악의 업보를 염할지라고, 그러나 역시 바로 본성(性)은 불가득(不可得)이라고 염한다.
만약 지(止)를 닦게되면 범부의 세간에 대한 주착(住著)을 대치(對治)하게되며, 능히 이승(二乘)의 겁약지견(怯弱之見)이 버려지게 된다.
만약 관(觀)을 닦게되면 이승(二乘)이 대비(大悲)를 일으키지 않는 협열(狹劣)한 마음의 허물(過)이 대치(對治)되며, 범부가 선근을 닦지 않는 것에서 멀리 벗어나게 된다. 이러한 뜻이 있는 것이기 때문에, 지와 관의 두 문은 함께 서로 조성(助成)하여 서로 떨어지지 못하는 것이다. 만약 지(止)와 관(觀)을 갖추지 못하면, 바로 보리의 길에 능히 들어가지 못하는 것이다. 』

『Whether walking or resting, lying down or rising up, both tranquilization and clear observation should be practiced together. Even if some people perceive in tranquilization that the substance(essence) of all things is not to be produced by itself, they should also perceive in clear observation at the same time that goodness or evil caused by them and joy and sorrow resulted by it are never eliminated and destroyed. In case of observing the cause and effect of goodness or evil, they also perceive that the substance is unable to be obtained. If some people practice the tranquilization, they can rectify the attachments of ordinary people and cast away the fears and weaknesses of two lower schools.
If some people practice the clear observation, they can rectify the narrow falts of two lower schools that do not have the vow of great pity for others, and make ordinary people practice who do not practice goodness. In this way the two methods of tranquilization and clear observation are mutually helpful to one another and inseparable. If some people should not practice both tranquilization and clear observation at the same time, they could not enter the path of enlightenment of Buddhism. 』

처음엔 止와觀을 따로따로 수행하나
수행을 거듭하여 禪定지혜 성취되면
止觀을 함께닦는 수행방법 들게되니
이두門 서로도와 떨어지지 못한다네

본성은 不生이라 염을함과 그동시에
인연의 선악과보 상실되지 아니함을
止에서 염하면서 觀의입장 살펴보며
逆으로 觀에서도 止의입장 살펴보세

범부의 세간집착 止로서 치유하며
二乘의 생사겁약 觀으로서 치유하여
대비심 일으키는 이타행을 닦게하고
범부가 닦지않는 선근수행 일으키세

이렇듯 止와觀은 서로도와 이루어져
그둘이 함께하여 떨어지지 못하는것
만약에 止와觀을 함께하지 아니하면
누구도 보리의길 들어가지 못한다네

『해 설』
이상에서 지(止)와 관(觀)을 개별적으로 설명하여 왔으나, 여기에서는 이 둘을 동시에 닦는 방법을 설한다. 지(止)와 관(觀)을 따로따로 수행하는 것은 수행이 미숙한 사람들이 행하는 것으로서 오랫동안 수행하여 선정(禪定)과 지혜(智慧)가 성취되면, 지와 관을 함께 수행하는 지관구행(止觀俱行)을 하게 되는 것이다. 지(止)와 관(觀)을 함께 수행하는 것은, 행주좌와(行住坐臥)의 일상생활에 있어서 다음과 같은 방법으로 수행하는 것을 말한다.
즉, 지(止)를 수행하는 것은 본체적 입장에서 제법의 자성(自性)은 불생(不生)이라는 것을 염하는 것이지만, 동시에 현상적 입장에서 인연화합(因緣和合)으로 생기는 선악업(善惡業)이나 고락(苦樂)의 과보는 절대로 없어지거나 부서져 상실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염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전자(前者)는 지(止)의 입장이고 진여문(眞如門)의 입장에서 '영원'의 불생을 보는 것이며, 후자(後者)는 생멸문(生滅門)의 입장에서 인과응보(因果應報)가 실재로 있다[實有]고 보는 관(觀)의 입장이다. 지(止)는 비유(非有)이고 관(觀)은 비무(非無)로서「비유즉비무(非有卽非無)」는 지(止)를 버리지 아니하고, 더불어 관(觀)을 수행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지(止)에 즉(卽)하는 관(觀)」즉 지관(止觀)을 함께 닦는 것이다.

다음은 역으로, 관(觀)의 입장에 서서 인연선악의 업보(業報)를 염한다 하더라도, 그러나 동시에 지(止)의 입장에 서서 제법의 본성은 공(空)이므로 불가득(不可得)이라고 염하는 것이다. 이것은「관(觀)에 즉하여 지(止)를 행하는 것」으로서, 유(有)를 인정하면서 그러나 그 깊은 곳에서 동시에 공(空)을 보는 것이다.

이상은 법(法)에 대한 지관구행(止觀俱行)을 밝힌 것이며, 다음은 장(障)에 대한 지관구행, 즉 지와 관을 동시에 실천하는 방법을 밝히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지(止)를 수행하게 되면 법의 무자성(無自性)을 보는 유심삼매(唯心三昧)의 정(定)에 들어가는 것이므로, 범부가 세간의 명리(名利)에 집착하는 것을 없앨 수 있음과 동시에, 이승(二乘)의 염세, 즉 생사를 싫어하여 세상을 버리는 겁약한 견해를 버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즉 지(止)는 범부의 세간에 대한 집착을 버리게 치유하는 것이며, 동시에 관(觀)은 보살로서 세간을 버리지 않는 대비심(大悲心)을 갖게 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지관구행(止觀俱行)의 실천을 보게 된다.
다음, 관(觀)을 수행하게 되면 대비관(大悲觀)과 대원관(大願觀)을 갖게 되는 것은 물론, 동시에 세간에 집착하지 아니하므로, 대비심을 일으키지 않는 이승(二乘)의 편협하고 옹렬한 마음의 과실을 치유할 수 있음과 동시에, 범부가 세간에 집착하여, 해탈을 위한 선근(善根)을 닦지 않는 과실을 없앨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여기에서도 세간을 버리지 아니하면서 세간에 집착하지 않는「관(觀)에 즉하는 지(止)의 입장」을 볼 수 있게 된다.

이상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지(止)는 진여문, 관(觀)은 생멸문의 입장이며, 지(止)는 근본무분별지(根本無分別智), 관(觀)은 후득지(後得智), 지(止)는 평등관, 관(觀)은 차별관, 지(止)는 공관(空觀), 관(觀)은 유관(有觀) 등 상이한 성격의 것이지만, 그러나 진여문(眞如門)과 생멸문(生滅門)은 일심(一心)의 두 면이므로, 양자는 둘이면서 둘이 아닌 불일불이(不一不二)의 관계 속에 있는 것이다. 또한 공(空)이라고 하더라도 유(有)를 떠난 공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유(有)의 본성이 공(空)이기 때문이다. 유(有)는 공(空) 때문에 성립되는 것이므로 유와 공은 상호 동시에 성립되는 것이다. 평등과 차별 또한 같은 이치이다.
이와 같이 지(止)와 관(觀)은 다른 성격을 나타내는 것이지만, 그러나 서로 도와 성립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본론에서는「이 지와 관의 두 문은 함께 서로 조성(助成)하여 서로 떨어지지 못하는 것」이라고 설하고 있다. 지(止)와 관(觀)은 동시에 함께 행할 때만이, 비로소 근본지(根本智)와 후득지(後得智)로서의 진실한 지혜를 얻을 수 있는 것이며, 그 어느 하나를 결하게 되면 불교의 깨달음은 성립되지 못하는 것이므로, 결론적으로「만약 지와 관을 갖추지 못하면 바로 보리(菩提)의 길에 능히 들어가지 못하는 것」이라고 설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시(施), 계(戒), 인(忍), 진(進), 지관(止觀)의 오문(五門) 중 지관이 정행(正行)이고 기타 사문(四門)은 조행(助行)임을 알 수 있게 된다.

이상에서 오행(五行)으로 사신(四信)을 수행하여, 신심을 성취하는 것을 설한 바 있다. 그러나 중생 가운데는 이와 같은 방법으로는 수행하지 못하는 근기 낮은 중생 또한 있는 것이므로, 불퇴의 방편으로서 다음과 같이 염불왕생(念佛往生)을 설하게 된다.

* 참고사항 : 신구역(新구譯) 비교대조표



4. 염불왕생(念佛往生) : 불퇴방편(不退方便)

『復次, 衆生初學是法, 欲求正信, 其心怯弱, 以住於此娑婆世界, 自畏不能常値諸佛, 親承供養, 懼謂信心難可成就, 意欲退者, 當知, 如來有勝方便, 攝護信心. 謂以專意念佛因緣, 隨願得生他方佛土, 常見於佛永離惡道. 如修多羅說, 若人專念西方極樂世界阿彌陀佛, 所修善根廻向, 願求生彼世界, 卽得往生. 常見佛故, 終無有退. 若觀彼佛眞如法身, 常勤修習, 畢竟得生住正定故.』
(부차, 중생초학시법, 욕구정신, 기심겁약, 이주어차사파세계, 자외불능상치제불, 친승공양, 구위신심난가성취, 의욕퇴자, 당지, 여래유승방편, 섭호신심. 위이전의념불인연, 수원득생타방불토, 상견어불영리악도. 여수다라설, 약인전념서방극낙세계아미타불, 소수선근회향, 원구생피세계, 즉득왕생. 상견불고, 종무유퇴. 약관피불진여법신, 상근수습, 필경득생주정정고.)

『 다음은, 중생이 이 법을 처음으로 배워 바른 믿음을 구하고자하나, 그 마음이 겁약하여, 이 사바세계에 살고있으면서, 스스로 항상 제불을 만나, 친승 공양하는 것이 불가능함을 두려워하며, 신심을 성취하기 어렵다고 두렵게 생각하여, 뜻을 물러스려 하는 자는, 마땅히 알지어다, 여래는 훌륭한 방편이 있어, 신심을 섭호(攝護)한다. 오로지 한 뜻으로 염불하는 인연으로써, 원에 따라 타방불토(他方佛土)에 낳을 수 있게 하여, 늘 불(佛)을 보고 영구히 악도(惡道)를 벗어나게 하는 것을 말한다.
수다라에 설한바와 같이, 만약 사람이 오로지 서방극락세계의 아미타불을 염하고, 닦은 바 선근(善根)을 회향하여, 그의 세계에 생(生)한다고 원하고 구하면, 바로 왕생을 얻게 된다. 항상 불(佛)을 보기 때문에, 마침내 물러섬이 있지 않는 것이다. 만약 그 불(佛)의 진여법신을 관하여, 항상 부지런히 수습하면, 필경 생을 얻을 수 있어 정정(正定)에 주(住)하기 때문이다. 』

『 Next, those who begin to learn these doctrines, desire to get right faith, but their minds are timid and weak. As they live in this world of suffering, they fear that they might not have the possibility to meet the Buddha and contribute to Him personally. They also fear that they might not attain this perfect faith. Therefore they desire to retreat from the practice of faith. In this case, they should know that the Buddha has the most excellent means to strengthen and protect their faith. It is by praying to the Buddha with concentration of mind. By such fate, they can be born in another world of Buddha and be with Him forever and they will be free from all evil. The S tra says that if a man pray to Amitabha Buddha in pure west land with his whole mind and return to Him the goodness he attained by practice and desire to be born in His pure world, then he will be born there. He is always to see the Buddha, therefore he will never be back. If we observe the Buddha's Body of True Suchness and practice this way diligently, we can arrive there and attain the True Wisdom of Buddhahood at last. 』

四信과 五行으로 그信心을 성취하여
불도를 이루도록 중생위해 설했지만
根機와 의지약해 바른믿음 물러서는
그런분 위해서는 큰방편을 설한다네

여래는 그들위해 대비심을 일으키어
큰방편 염불왕생 설하면서 가호하니
그중생 신심깊어 전념으로 念佛하면
원따라 西方淨土 불국토에 왕생하네

그래서 부처보고 악도에서 벗어나니
경전에 이르기를 전념으로 염불하고
닦은바 선한근기 그공덕을 회향하면
서방의 극락세계 원한대로 생한다네

이것은 방편으로 自力으론 힘들지만
他力의 힘을빌어 착한중생 구제코자
여래가 가호하여 쉬운방편 이른거니
신심을 굳게하여 부지런히 염불하세

『해 설』
본문은 물러서지 않는 불퇴의 방편으로 염불왕생(念佛往生)을 밝히는 부분이다.
지금까지 오행(五行)으로 사신(四信)을 수행하여 신심을 성취하는 방법을 설한바 있다. 그러나 처음 이 법을 배워, 진여를 믿고 수행하여 바른 믿음을 얻고자 하는 중생 가운데에는, 의지가 박약하여, 모처럼 한 발심을 단념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것은 자기가 이 사바세계(娑婆世界)에 태어나 살고 있으나, 현재 이 땅은 무불(無佛)의 세상으로서 석가불(釋迦佛)은 이미 열반에 드시었고, 뒤를 잇는 미륵불(彌勒佛)은 아주 후대에 출현하는 것이므로 이 사바세계에서는 부처를 만나 친승공양(親承供養)할 수 없어, 신심을 성취하기란 어렵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근기가 낮고 의지가 약한 사람을 위하여 불타는 대비심(大悲心)을 가지고 훌륭한 방편을 가르쳐 수행을 단념치 않도록 하고 있다. 이 방편으로 중생의 신심이 성취되도록 지켜주고 보호해 주는 것이다. 그 사실을 마땅히 알지 않으면 안된다. 그 훌륭한 방편이란 마음을 하나로 하여 염불(念佛)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중생들이 정신을 집중하여 불타를 염상(念想)하고 불(佛)의 이름을 부르면 그 인연에 의하여, 그 중생이 염원한 바에 따라 타방(他方)의 불국토에 왕생하게 된다. 이것은 그 불타의 본원(本願) 즉 원력에 의하는 것이다. 그렇게되면 그 불국정토에 태어나 항상 불타를 친견하게 되어 영구히 삼악도(三惡道)에 떨어지지 않게 된다. 이에 대하여 경전에는 다음과 같이 설해지고 있다. 만약 사람이 전념으로 서방극락세계에 계시는 아미타불을 염(念)하고, 그렇게 얻어진 공덕을 회향(廻向)하여, 그의 극락정토에 태어나기를 원하여 구하면 반드시 왕생할 수 있다고, 그렇게 하여 아미타불의 정토에 태어나면, 항상 불타를 친견할 수 있게 되어, 신심이 후퇴하는 일이 없게 된다. 그보다 근기가 나은 사람이 바로 아미타불의 진여법신을 관하여, 항상 부지런히 그 진여를 염하게 되면, 마침내 극락정토에 왕생할 수 있게 되어 정정취(正定聚)에 들게 되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본론의 저자는 저술의 이유를 밝히는 인연분(因緣分) 제7항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즉,「아둔한 열근기의 사람 가운데에서도 상품(上品)의 사람들은 자력으로 깨달을 이근(利根)은 없으나, 악(惡)의 업장이 없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러한 사람들에게는, 애당초 아미타불을 염하여, 극락에 왕생할 수 있다는 방편을 가르쳐, 서방정토의 아미타불 앞에 태어나, 반드시 구원받는 몸이 된다는 것을 확신시켜, 불퇴의 신심을 성취시키기 위한 것」이라고.

이상으로 사신오행(四信五行)의 수행신심분(修行信心分)을 끝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