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 6. 15. 20:48ㆍ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유식사상
유식삼십송[唯識三十頌]
해설: 혜거 스님
유식(唯識)의 개요
일(事)에는 본말(本末)이 있고 이치(理)에는 법칙(法則)이 있어서 천하의 사가 순환되고 만법이 동시에 존재한다. 일의 본말과 이치의 법칙을 깨달아 아는 것을 부처라 하고 부처님의 가르침 가운데 핵심사상이 유식(唯識)이다. 부처님의 가르침 가운데 제법종연생 제법종연멸(諸法從緣生 諸法從緣滅)은 일의 본말 곧 생멸의 이치를 밝힌 것이고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는 이치의 법칙 곧 만법의 주체를 밝힌 사상이라 하겠다. 따라서 유식을 이해하는 것은 불교를 바로 아는 일이 되고 부처님의 사상을 이해하고 부처님께 접근할 수 있는 요문(要門)이라 하겠다.
유식이란 마음을 떠나서는 어떤 것도 존재할 수 없다 하신 부처님 사상을 토대로 심체(心體)와 심작용(心作用)을 설명하고 정진과 물질의 불가분리한 관계를 규명해낸 학설이다. 마음을 다양하게 표현할 수 있겠지만 우선 심(心)·의(意)·식(識)으로 나누어 설명할 수 있다. 심(心)은 아뢰야식이라 하고, 의(意)는 말나식이라 하며, 식(識)은 의식 또는 육식(六識)이라 한다.
모든 법은 이 마음(唯識)에 의해 존재한다. 인간의 심성을 깨닫게 해준 유식은 불교의 핵심사상으로서 반야사상과 함께 불교사상의 지주가 되어 왔다. 반야(般若)사상은 공(空)으로써 만법의 실상을 밝히고 유식(唯識)은 진공묘유(眞空妙有)로써 만법의 주제(主帝)를 밝힌다. 얼핏보면 이 두 사상이 상반된 듯 보이지만 깊이 살펴보면 서로 저촉되지 않는 유무상생(有無相生)의 절대적인 진리임을 알게 된다. 이 유식학은 부처님의 사상을 바탕으로 하여 인도에서 정리되고 중국을 거쳐 우리 나라에 전해졌다.
1. 인도 유식학의 성립
유식은 부처님의 사상을 발췌하여 정리한 사상으로서 이를 유식학으로 성립시킨 학자는 무착보살이다. 무착 보살은 당시에 유통되었던 『해심밀경』,『십지경』,『아비달마경』,『능가경』 등의 대승경전을 접하고 이들 경전에서 일체는 유심조(一切唯心造)이며 만법은 유식(萬法唯識)이라는 이치를 깨닫고 『섭대승론』,『현양성교론』,『아비달마경』 등을 저술하여 유식학을 체계화하였다.
무착 보살의 친동생 세친 보살 역시 대승불교에 귀의하여 『대승백법명문론』,『십지경론』,『유식삼십론』,『섭대승론석』 등을 저술하여 형인 무착 보살과 함께 유식학을 집대성하였다. 세친의 저술 가운데 가장 주목받는 것은 『유식삼십론』이라 하겠다. 『유식삼십론』은 광범위한 유식사상을 30게송으로 축소하여 정리한 것으로서 유식학의 핵심이 된다 할 것이다.
이 명제를 널리 보급하여 일반인들도 쉽게 유식을 이해할 수 있도록 주석서를 저술한 주석가는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었고 그 중 뛰어난 10명의 학자를 십대 논사로 추앙하기에 이르렀다.
2. 중국의 유식학 전래
중국에는 유식학이 인도로부터 3차에 걸쳐 도입되었다. 그러나 전래된 유식학이 종파간의 심체설(心體說)이 달라 후대의 학자들에게 많은 혼동을 일으키게 되었다. 제일 뒤에 전래된 법상종의 유식사상이 널리 보급되어 중국 불교사에 영향을 끼쳤다.
법상종의 교학은 현장 법사(600년-664년)가 인도로부터 귀국할 때 『유가사지론』,『해심밀경』,『섭대승론』,『유식삼십론석』을 들여옴으로써 전파되었다. 특히 『유식삼십론석』을 중국어로 『성유식론』이라는 책으로 번역함으로써 법상종의 유식론이 신속하게 성장한 계기가 되었다.
3. 한국의 유식학 전래
신라의 원광 법사(圓光法師)가 중국에 가서 섭론종의 교학을 공부하고 온 것이 처음이다. 그후 원측 법사(圓測法師)가 중국에 유학하여 지론종과 섭론종과 법상종의 유식사상을 종합적으로 연구하여 발전시켰다. 원측 법사는 종파를 초월하여 대승교리와 소승교리를 함께 연구하였다. 중국의 법상종이 호법 논사(護法論師)의 유식학만을 최상의 진리라고 고집한 것과는 달리 원측 법사는 안혜 논사(安慧論師)의 유식학을 비롯하여 모든 학설을 종합적으로 수용하였으면 『해심밀경소(解深密經疏)』등 많은 저술을 남겼다.
신라의 유식학은 원효 대사(元曉大師)께서도 많이 연구한 흔적이 있다. 원효 대사와 의상 대사는 현장 법사의 학문을 흠모하였고 의상 대사는 당나라에 유학하여 유식을 바탕으로 한 불교의 교리체계를 세움으로써 신라불교에 큰 영향을 끼쳤다. 원효 대사의 각종 저술에서도 『유가사지론』,『성유식론』,『섭대승론』의 유식사상에 의거하여 해설한 것을 자주 볼 수 있으며 의상 대사 역시 화엄학자로서 저술할 때마다 유식사상을 인용하였다. 이 학풍은 고려시대까지 전해져 불교 발전에 많은 기여를 했다. 또한 신라의 유식학은 일본에 전해져 일본 유식학의 기틀을 마련하는데 큰 공헌을 하게 되었다.
4. 유식사상
유식이란 말은 마음이란 뜻으로 정신과 물질 등 안팎의 모든 것들이 마음(心識)에 의해서 창조되고 심식을 떠나서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밝힌 사상이다. 유식 사상은 자칫 이기주의에 빠지기 쉬운 소승불교의 부족한 교리를 보충하고 용수(龍樹)의 공(空)사상을 보완하여 공(空)사상이 후세에 공허한 사상으로 잘못 치우쳐 가는 것을 바로 잡아주는 불교의 핵심사상이다.
인간을 비롯한 모든 중생의 본성은 진실한 것(眞如性)이나 나에 대한 집착과 나 밖의 모든 것에 대해 집착함으로써 번뇌를 일으키게 된다. 인간은 항상 지혜 광명을 나타내고 있는 열반성(涅槃性)과 불성(佛性)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가상(假相)의 환(幻)을 좇아 집착하고 탐함으로써 불성(佛性)을 상실하고 만다. 유식사상은 이러한 인간의 본성을 회복하게 하고 무한한 공능(功能)과 절대의 진여성(眞如性)으로서 태양과 같이 모든 것을 다 비추어 관찰할 수 있는 지혜가 본래부터 보존되어 있음을 밝힌 것이다. 또한 유식은 중생계의 주체로서 유형·무형의 모든 것과 상통하고 윤회와 변화를 주재하면서도 선악의 상태를 떠난 절대 불변의 성품이 있음을 깨닫게 해준 사상이다.
5. 현대 심리학의 의식구조
현대 학문의 의식(마음) 구조는 프로이드(Freud)의 학설을 기본으로 한다. 프로이드는 의식의 구조를 삼 단계로 설명하여 인간의 심성을 파악하고 있다. 의식을 의식(意識)·전의식(前意識)·무의식(無意識)으로 분류하여 분석했다.
의식(Consciousness)은 현재를 지각하는 부분으로 단지 깨어 있을 때만 작용하고 이 의식은 사고, 감각 감정과 관계가 있으며 인간이 합리적이고 신중하게 행동하도록 해준다. 전의식(Pre-Consciousness)은 생각과 반응이 저장되었다가 부분적으로 망각되는 마음의 일부분이다. 전의식은 마음을 집중하면 쉽게 의식에 떠올릴 수 있으며 현실원칙을 지지하고 논리적이다. 무의식(Unconsciousness)은 마음의 가장 큰 부분으로 모든 지식, 정보, 경험을 저장하는 곳이다. 프로이드는 이 무의식에 저장되었던 사고나 감정은 인간의 행동에 강력한 영향을 미친다고 보았다.
이러한 정신분석 이론에서는 어떤 행동도 우연히 일어날 수 없으며 행위 하나하나에는 인간이 의식하지 못하고 있는 감정과 잠재의식과 무한한 능력이 있음을 나름대로 분석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이는 불교에서 일찍이 설파한 마음작용의 일부분이다.
6. 유식삼십송
『유식삼십송』은 심소(心所)와 작용(作用) 그리고 수행점차(修行漸次)를 간명 직절하게 설명한 송문(頌文)으로서 세친 보살의 역작심(心)·의(意)·식(識)의 삼식(三識)을 바탕으로 하여 심체(心體)와 심작용(心作用)을 설명하고, 전오식(前五識)의 역할을 구체적으로 밝혀 수행으로 마음을 닦아 성불에 이를 수 있는 길을 제시함으로써 중생계에 새로운 수행정로가 열리게 된 것이다.
뒤에서 설명한 심식(心識)들은 요별(了別)과 분별(分別)로써 모든 진리를 올바로 관찰하지 못하고 가상(假相)만을 탐함으로써 망식(妄識)을 자초한다. 그러나 그 방식은 일시적인 현상이며 영원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본성이 청정하고 영원하기 때문이다.
이 본성은 중생이 마음을 청정이 하면 곧 극락(極樂)이 되어 법열(法悅)로 나타나고 망식 자체가 모든 진리를 진실 그대로 관찰할 수 있는 지혜로 변함을 가르친다. 그러므로 유식사상의 핵심은 전식득지(轉識得智)에 있다.
전식득지란 번뇌로 인하여 오염된 망식을 수행의 힘으로 정화하고 전환하여 지혜를 증득하는 것을 뜻한다. 이렇듯 불교사상에 중추가 되는 『유식삼십송』은 『해심밀경』과 『대승아비달마경』에서 출발하여 무착에서 대강 완성되었으나 부족한 점을 세친이 보완함으로써 전체적으로 완성에 이르렀다.
『유식삼십송』은 유식의 대강을 5언4구의 30개 송으로 정리하여 식(識)의 변이(變異)와 심소(心所)의 작용을 구체화함으로써 유식상(唯識相)과 유식성(唯識性), 그리고 수행증과(修行證果)를 총 120구(句)의 단문으로 집약하여 학문으로서 체계화하여 유식학파를 형성하였다.
유식 30송은 이미 개요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무착 보살이 초안하고 그 아우인 세친 보살(世親 : 320∼400년 경)이 완성한 것으로서 무아(無我) 무법(無法)이요, 오직 유심(唯心)임을 밝혀 주신 부처님의 가르침을 체계화한 불교사상의 핵심이라 하겠다.
유식의 대강을 5언 4구의 30개 송(頌)으로 정리한 유식 30송은 마음의 변화와 마음자리(心所)를 압축하여 설명하고 마음의 상태(相)와 마음의 바탕(性) 그리고 수행으로써 성불에 이르게 하는 수행증과(果)를 밝힘으로써 인간은 후천적 노력에 의하여 운명을 개척할 수 있는 구체적인 수행방법을 제시한 수행정로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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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 송
由假說我法 有種種相轉 (유가설아법 유종종상전)
彼依識所變 此能變唯三 (피의식소변 차능변유삼)
(유식은) 아(我)와 법(法)을 가설함으로 말미암아 가지가지 현상계가 변화하는 이치를 설명한 것이다. 저 (가지가지 현상계)는 의식에 의해 변하고 이 변화의 주체(能變)는 오직 셋[심(心), 의(意), 식(識)]이 있을 뿐이다.
아(我)와 법(法)은 원래가 없는 것인데, 이것이 있는 것같이 생각되는 것은, 이것을 가정하여 설정해 놓았으니까 그러한 것인데 이것으로 말미암아, 여러가지의 모양(相)과 변화(轉)가 있게 된다.
그러한 것(彼)은 식(識 = 마음)에 의존하여 변하는 것[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인 바, 이 변화하는 주체(能變)는 마음인데, 이것에는 오로지 3가지가 있을 뿐이다.
이 유식은 부처님께서 오직 마음이 있을 뿐 무아(無我) 무법(無法)임을 설해 주신 이치를 요약해서 체계화한 것이다. 또 현상계의 모든 모습이 변화하는 이치를 아(我)와 법(法)을 가설하여 설명하고, 변하는 바 현상계의 모든 것은 의식(마음)의 작용에 의한 것이고 의식은 심·의·식 삼식(三識)뿐임을 밝혔다. 삼식은 아뢰야식(阿賴耶識), 말나식(末那識), 의식(意識)이다.
이 첫 송(一頌)에서는 아(我)와 법(法)?가설일 뿐 무아·무법임을 밝히고 당초에 무아·무법이나 아법(我法)을 가설함으로 현상계의 모든 법이 변화함을 알게 했다. 이는 실상(實相)은 변하지 않음을 깨우쳐준 송(頌)으로서 아(我)와 법(法)을 비롯한 일체만법(一切萬法)은 마음에 의해 변한다는 사실을 알게 하였다.
가설(假說) : 가설은 부처님께서 49년 동안 설하신 법문을 말한다. 진리(眞理)는 불언불설(不言不說)이기 때문에 현상계의 아(我)와 법(法)은 진설(眞說)할 수가 없으므로 가설이라 한 것이다.
아법(我法) : 일체만법(一切萬法)을 인식하고 분별하는 주체를 아(我)라 하고 나로부터 인식되어진 일체만법을 법(法)이라 한다. 아(我)에는 주재하는 아(我)와 상주하는 아(我)와 일체에 충만한 아(我)의 세 가지 뜻이 있으니, 주재하는 아(我)는 주도적으로 지배하고 소유하고 분별하는 주체 곧 나라고 하는 나를 뜻하고, 상주(常住)하는 아(我)는 끊임없는 윤회를 반복하면서도 멸하지 않고 영원히 존재하는 나를 뜻하고, 일체에 충만한 아(我)는 법계(法界)로 더불어 하나이며 항구불변(恒久不變)하는 아(我)를 뜻한다.
여기에서 말하는 아(我)는 천지(天地)에 있어 천지를 주재하고 나에게 있어 나를 주재하는 아(我), 영원하여 상주불변하는 아(我), 법계로 더불어 하나인 법계일신(法界一身)의 아(我)인 진아(眞我)를 말한다.
법은 일체사물의 존재는 일정한 법칙 또는 궤범(軌範)에 의해 존폐(存廢)하므로 이를 법이라 한다. 법에는 일체만물의 법과 세간법(世間法)과 출세간법(出世間法) 등의 법이 있고 법률과 사상 등도 모두 법이라 할 수 있다.
종종상(種種相) : 종종상은 과거, 현재, 미래의 가지가지 모습, 시작도 끝도 없이 거듭 존재하는 나의 실상(實相)과 일체만법이 상대적인 인과 법칙에 의해서 존재하는 갖가지 상태를 말한다.
피(彼) : 피(彼)는 대명사로서 위의 종종상전(種種相轉)을 의미한다.
식(識) : 식(識)은 8식(八識)을 말한다. 8식을 요약하여 3식(三識)이라 한다. 8식에 탐진치가 없으면 지인(智人)이 되고 탐진치가 있으면 범부(凡夫)라 한다. 사람은 누구나 8식이 있으나 지우(智愚)의 차별과 부귀빈천의 차별이 있는 것은 모두가 마음(意識)에 의해서이다. 마음에 의해 일체만물의 명(命)이 다르고 고하장단(高下長短)의 차별이 있는 것을 업연(業緣)의 소치라 하고 업연(業緣)이 곧 마음에 의해 지어지기 때문에 일체만법이 의식소변(依識所變)이라 한 것이다.
능변(能變) : 능변은 변화의 주체를 말한 것으로 일체만물이 변천하고 인간의 운명을 주도하는 실체이니 곧 주관적인 의식을 말한다.
유삼(唯三) : 삼(三)은 삼식(三識)을 말한 것으로 심(心: 阿賴耶識), 의(意: 末那識), 식(識: 六識)을 말한다. 나를 주재하는 것이 곧 이 삼식(三識)이요, 우주만법을 주재하는 것이 다른 무엇도 아닌 오직 이 마음뿐임을 말한 것이다.
제 2 송
謂異熟思量 及了別境識 (위이숙사량 급요별경식)
初阿賴耶識 異熟一切種 (초아뢰야식 이숙일체종)
일송(一頌)에서 유삼(唯三)이라 말한 3식(三識)은 이숙(異熟)과 사량(思量)과 요별경식(了別境識)이다. 처음은 아뢰야식이며 이숙(異熟)이며 일체종식(一切種識)이다.
이것을 일러, 이숙식(異熟識)과 사량식(思量識)과 요별경식(了別境識)이라 한다.
그 처음은 아뢰야식(阿賴耶識)인데, 다른 말로는 이숙식(異熟識) 혹은 일체종식(一切種識)이라고 한다. ( 아뢰야식은 제8식이고, 사량식은 제7식인 말나식을 말하며, 요별경식은 제6식인 의식을 말함)
요별경식(의식)은 사람의 오관(눈,귀,코,혀,몸-시각,청각,후각,미각,촉각)을 바탕으로 판단하는 식(識)이며, 사량식(말나식)은 예지능력과 잠재능력으로 느끼는 식(識)인데 탐진치의 속성을 가지고 있다. 한편 이숙식(아뢰야식)은 선악과 과보의 종자를 가진 식을 말한다.
사람이 깨어 있을 때는 6식이 작용하고, 깊은 꿈에 빠지면 6식은 꺼지고 7식이 작용하며,
육신이 죽어지면 8식만 남아서 그 8식이 종자가 되어 내생으로 연결된다.
사람의 8식인 그 종자(種子)의 결정판은, 사람이 죽는 순간, 그 순간에 갖게 되는 바로 그것이다.
이 송(頌)은 1송(頌)의 능변유삼(能變唯三)을 밝힌 것으로 제8 이숙식(第八異熟識), 제7 사량식(第七思量識), 제6 요별경식(第六了別境識) 등을 말한 것이다. 3식(三識) 가운데 첫째는 아뢰야식이니 이를 이숙식(異熟識) 또는 일체종자식(一切種子識)이라고도 한다. 이 송에서는 3식의 명칭을 세워서 3식의 공능(功能)을 설명하고 제8 아뢰야식의 별칭(別稱)을 세워서 능변(能變)의 주체가 곧 마음임을 밝혔다.
이숙(異熟) : 이숙(異熟)은 제8 아뢰야식의 다른 이름으로 선악(善惡)의 인(因)을 함장(含藏)하기 때문에 종자라 하고 선악의 인(因)에 의해서 받는 과보가 다르기 때문에 이숙(異熟)이라 한 것이다. 이숙(異熟)에는 세 가지 뜻이 있으니 변이이숙(變異而熟), 이류이숙(異類而熟), 이시이숙(異時而熟) 등이다.
변이이숙(變異而熟)은 인(因)이 변하여 과(果)가 되어 성숙됨으로 변이이숙이라 하고, 이류이숙(異類而熟)은 인과가 같지 않음을 말한 것으로 선악의 원인이 무지(無智) 또는 대지(大智)로 바뀌어 성숙되므로 이류이숙(異類而熟)이라 하고, 이시이숙(異時而熟)은 인과가 동시(同時)가 아님을 말한 것으로 금생의 인(因)이 일·이생(一·二生) 또는 몇 천 생을 지나 과를 받는 것을 말한다.
사량(思量) : 사량은 제7말나식을 말한 것으로 항상 쉬지 않고 살피고 사량하고 계교(計較)하며 아애(我愛)를 집착한다. 이 7식은 8식의 인(因)을 의지하며 육근의식(六根意識)의 분별을 주도하는 중간의식(中間意識)의 역할을 한다.
요별경식(了別境識) : 요별경(了別境)은 제6식(第六識)을 말한 것으로 안·이·비·설·신·의 등의 감각기관이 눈은 보고 귀는 듣는 것처럼 각기 각각의 경계를 요별(了別)하기 때문에 요별경식(了別境識)이라 한다.
1송에서는 아뢰야식, 말나식, 육식의 총칭만을 말하고 여기에서는 3식의 역할 한계를 설명했다.
유식에서 변이를 설명하는 것은 아뢰야식 중에 함장되어 있는 십선종자(十善種子)가 성숙하면 인간으로서 천상(天上)으로 변현(變現)되고 계율을 잘 지켜 깨끗한 종자가 성숙되면 인간세상에서도 귀족으로 변현되고, 탐·진·치(貪·瞋·痴)의 종자가 성숙되면 지옥(地獄), 아귀(餓鬼), 축생(畜生)으로 변현된다.
뿐만 아니라 아뢰야식은 종자식(種子識)이 되기 때문에 과거, 현재, 미래의 운명을 좌우하는 요체가 되고 제7 말나식과 제6 의식은 금생의 운명에서는 끊임없이 반복하여 역할을 하지만 내세로 연결되어지지는 않는다. 그러나 말나식(末那識)과 제6 의식은 아뢰야식의 종자를 훈습(熏習)하여 업인(業因)을 함장케 하므로 육근의 감각기관과 의식 7식의 사량분별의 식(識)이 선(善)을 행하여 훈습한다면 악업의 과보로 빈천의 보(報)를 받는 중생이라 할지라도 선업의 인(因)이 되므로 아뢰야식을 변이하는 식이라 한다.
아뢰야식(阿賴耶識) : 아뢰야식은 8식이니 이숙(異熟)이라 하고 종자식이라 한다. 이를 무몰식(無沒識)이라고도 하는 것은 아뢰야식이 함장하고 있는 종자는 생사윤회에 유전(流轉)하면서도 멸몰(滅沒)되지 않기 때문이며 축장된 인은 과로 변하여 나타나기 때문에 이숙식이라 하며, 오관(五觀)·육식(六識)·칠식(七識)·선악(善惡) 등 모든 심식(心識)의 주처(住處)가 되므로 함장식이라 한다.
제 3 송
유식(唯識)이란 마음이다. 마음을 유식이라 한 것은 마음은 마음을 통칭한 것이고 유식은 갖가지 마음의 작용을 말한 것이다. 따라서 삼계는 오직 마음의 작용에 의해 존재한다 한 것이다. 유식은 이러한 마음의 작용을 설명한 사상으로서 마음을 겸손하게 하고 마음을 분발하게 하는 요문이라 하겠다.
제 3 송 - Ⅰ
不可知執受 處了常與觸 (불가지집수 처요상여촉)
作意受想思 相應唯捨受 (작의수상사 상응유사수)
제8아뢰야식은 그 작용을 알 수 없고, 집수(執受)와 처(處)와 요(了)의 작용도 알 수 없다. 항상 촉(觸)과 작의(作意)와 수(受)와 상(想)과 사(思)로 더불어 상응하되, 오직 사수(捨受)로만 한다.
이 송(頌)은 마음의 주체가 되는 제8아뢰야식의 작용을 설명한 송(頌)이다.
제8 아뢰야식은 작용이 미세하고 광대하여 범부의 식견으로는 알 수 없기 때문에 가히 알 수 없다는 뜻으로 불가지(不可知)라 하였으며, 가히 알 수 없는 것은 집지(執持)하고 수용(受容)하는 자리와 그 종자인 집수(執受)의 공능(功能)이 불가지이며, 지니고 있는 마음자리와 수용할 수 있는 마음자리 처(處)도 또한 무한해서 불가지이며, 분별構?요지(了知)하는 요(了)도 또한 불가지함을 말한 것이다. 8식은 심소(心所: 마음자리)가 다섯인데 이를 5변행심소(五行心所)라 한다. 5변행심소는 촉(觸)·작의(作意)·수(受)·상(想)·사(思)이며 이는 5수(五受: 苦·樂·憂·喜·捨) 중에서 오직 불고불락(不苦不樂)하는 사수(捨受)와 상응할 뿐이다.
8식을 장식(藏識) 또는 함장식(含藏識)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능장(能藏), 소장(所藏), 아수집장(我受執藏)의 3장(三藏)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능장(能藏)이란 8식 자신이 지니고 있는 신비가 무한함을 의미하고, 7식(七識)이 선악의 업인을 지은 것을 8식이 훈습하여 깊이 저장했다가 반드시 보응을 받기 때문에 이를 훈습종자라고도 한다. 훈습종자는 안에서 인(因)으로 있다가 바깥 연(緣)을 기다려 과(果)를 받는다. 이러한 인의 싹이 아직 과보를 받지 않은 것들이 무량무수로 존재하며 모두가 8식에 보장(保藏)되어 있다가 결코 하나도 누락됨이 없이 과보를 받는다. 이렇듯 종자를 보존하는 힘을 능장이라 한다.
소장(所藏)이란 7식이 선악인과를 지은 것이 8식에 잠장(潛藏)될 뿐 8식이 직접 업을 짓지 않기 때문에 소장이라 한다.
아수집장(我受執藏)은 집장(執藏)이라고도 하는 바 7식에 의해 훈습된 것을 8식이 지니고 있는 장식(藏識) 곧 지식·관념 등을 상주불변하는 나의 것으로 집착하여 아집(我執)·아견(我見)·아만(我慢) 등의 탐애(貪愛)를 일으킴을 말한 것으로 7식의 입장에서 집장 또는 아수집장이라 한다.
7식이 선악의 업인을 지어서 8식이 훈습하여 저장했다가 반드시 보응을 받게 하는 선악보응(善惡報應)의 인(因)에 대하여 성유식론(成唯識論)에서는 6가지 의미로 설명하고 있다.
① 찰나멸의(刹那滅義) : 멸이란 멸생(滅生)을 의미한다. 핵(核)이 멸하여 나무가 되듯이 전자(前者)가 멸하여 후자(後者)가 생한다. 따라서 사람이 전자의 인이 씨가 되어 태어나면서 씨인 전자의 8식은 멸하는 것이다.
② 과구유의(果俱有義) : 과구유(果俱有)는 전8식(前八識)의 핵이 이미 멸하고 새로 태어난 생명체에는 전8식의 원인이 하나도 소멸되지 않고 그대로 남아 있어서 과구유라 한 것이다.
이와 같이 8식이 함장(含藏)하고 있는 업인이라 하더라도 모두 소멸하여 후세로 연결되지 않는 식이 있고, 하나도 소멸되지 않고 그대로 남아 있는 식이 있음을 알 수 있는데 이것이 곧 악의 업인은 소멸하고 선의 업인은 남길 수 있는 길이며 이 길을 닦는 것을 수행이라 한다.
③ 항수전의(恒隨轉義) : 항수전(恒隨轉)은 전8식의 인이 현행(現行)의 과보를 다하면 다음의 다른 인을 세운다는 뜻이다.
④ 성결정의(性決定義) : 성결정(性決定)은 선인선과(善因善果)·악인악과(惡因惡果)가 결정적으로 변할 수 없음을 뜻한다.
⑤ 대중연의(待衆緣義) : 대중연(待衆緣)은 제8식의 종자가 인으로 있다 해도 이에 상응하는 연이 없으면 생할 수 없고 언제까지라도 연이 있을 때까지 기다린다는 것이다.
⑥ 인자과의(引自果義) : 인자과(引自果)는 8식 중 낱낱의 종자는 자신의 과보만을 인도(引導)하여 생하기 때문에 보시의 인은 부귀의 과를 받고 불살생의 인은 장수의 과를 받는다는 뜻이다.
이상의 8식의 작용은 다양함이 무궁하고 정밀함이 미묘해서 문물(文物)을 창조하고 세상을 주도하게 된다. 이렇듯 미세하고 광대한 8식 곧 마음자리를 맑고 깨끗하게 하기 위하여 유식을 설명하여 수행의 정문을 삼게 한 것이다.
8식의 무한한 작용은 7식에 의해 훈습되어 존재한다. 훈습에는 능훈(能熏)과 소훈(所熏)으로 나누어 설명할 수 있다.
능훈(能熏)에 네 가지의 성질이 있으니 다음과 같다.
① 생멸성(生滅性) : 찰나 생멸하는 본체가 상주하여 영원하지 않으므로 전변(轉變)하는 작용에 의해서 선도 되고 악으로도 될 수 있기 때문에 지금의 심성(心性)에 따라 얼마든지 변화시킬 수 있다.
② 승용성(勝用性) : 승용성(勝用性)은 능훈(能熏)의 작용이니 7식의 작용을 인식하여 분별하고 연려(緣慮)함을 말한다.
③ 증감성(增感性) : 증감성(增感性)은 증진(增進)하고 감쇄(減殺)함을 말한 것으로 선이 증진되면 악이 감쇄되고 악이 증진되면 선이 감쇄됨을 말한다.
④ 화소훈성(和所熏性) : 화소훈(和所熏)은 능훈(能熏)의 7식과 소훈(所熏)의 8식이 화합하여 훈습되기 때문에 일컬어진 말이다.
7식을 능훈(能熏)이라 하고 8식을 소훈(所熏)이라 하는 것은 7식이 업인을 직접 만들기 때문이며 8식은 7식이 만든 업인을 소장하기 때문이다. 직접 업인을 짓는 7식의 능훈과 7식이 지은 업인을 소장하는 8식의 소훈이 각각 네 가지의 성질을 갖추고 있으니 다음과 같다.
① 견주성(堅住性) : 8식은 7식이 지은 업인을 소훈하되 처음부터 불변하고 부동하여 영구히 견주(堅住)하므로 7식의 훈습을 받아들일 수 있으므로 견주성이라 한다.
② 무기성(無記性) : 8식은 그 성질이 비선비악(非善非惡)이어서 7식의 각종 훈습을 받아들이므로 무기라 한다.
③ 가훈성(可熏性) ; 8식은 그 성품이 유연하여 견고하지 않기 때문에 7식이 지은 모든 훈습을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에 가훈성이라 한다.
④ 화능훈성(和能熏性) : 7식의 능훈성(能熏性)과 화합하여 7식이 지은 선악시비 등의 모든 업인을 훈습하여 지니므로 화능훈이라 한다.
제8 아뢰야식은 마음의 주체이며 능연(能緣)이며 경계를 요별(了別)할 수 있는 식(識)의 주처(住處)이다. 사람마다 식이 달라서 이해하는 것이 다르고 생각하는 것이 다르면서 추위와 더위 등을 같이 느끼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천지가 한 세계이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이 천지로 더불어 공유하면서도 또한 개체가 분명하기 때문에 만물과 함께 공유공락(共有共樂)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각기의 세계를 이루는 불가사의한 묘력(妙力)을 지니는 것이다. 이렇게 미묘한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아뢰야식은 소연(所緣)에 의해서만이 능연심(能緣心)을 낼 수 있어서 경계가 없다면 마음의 작용은 일어날 수가 없다. 아뢰야가 경계를 받아들여 집수(執受)하는 데는 두 가지 종류가 있으니,
① 모든 중생의 신체는 아뢰야가 투입(投入)되어야 생(生)이라 하며, 이를 생명의 시작이라 하고, 아뢰야가 떠날 때를 사(死)라 하며, 이것이 생명의 끝이다. 오로지 생명의 주체는 아뢰야뿐이다.
② 아뢰야는 생명이 씨(種子)로서 본래부터 존재하는 종자와 새롭게 훈습해서 생기는 종자가 있고 그 종성(種性)의 변화 또한 무량해서 수를 헤아릴 수가 없다. 이와 같이 무량한 종자가 모두 아뢰야에 의해 훈습되고 아뢰야에 의해 보존되다가 때를 기다려 연(緣)이 구족되면 보응을 받게 된다.
모든 중생의 어리석음과 지혜, 선과 악의 종자가 아뢰야에 의해 구별지어지므로 아뢰야의 실성을 깨닫는 것이 인간의 최우선의 과제가 아닐 수 없다.
제 3 송 - Ⅱ
不可知執受 處了常與觸 (불가지집수 처요상여촉)
作意受想思 相應唯捨受 (작의수상사 상응유사수)
전편에서 제8식의 정상(情狀)을 요약해서 설명했기 때문에 여기서는 송문(頌文)의 뜻을 살펴보고자 한다. 먼저 불가지(不可知)라고 한 3자(三字)는 가히 알 수 없다는 뜻으로 8식이 지니고 있는 집수(執受)와 8식의 자리[處]와 요별[了]을 가히 알 수 없음을 의미한다.
집수(執受)라는 말은 지니고 수용한다는 뜻이다. 여기서 지니고 수용하는 것을 알 수 없다 한 것은 8식이 지니고 있는 무한한 능력과 8식이 받아들일 수 있는 그 한계를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처(處)는 소처(所處)로서 마음자리를 말한다. 이 자리는 오묘하고 불가사의해서 그 실처를 범인은 알 수 없음을 뜻한다. 요(了)는 요별(了別)이니 곧 분별해서 아는 힘이다. 이 또한 극미하고 미세하며 광대하고 무변하여 일체만물의 장단호오(長短好惡)를 가려내는 능력으로서 역시 범인의 소견으로는 알 수가 없다. 따라서 불가지집수(不可知執受) 불가지처(不可知處) 불가지요(不可知了)의 뜻을 요약해서 불가지집수처요(不可知執受處了)라 한 것이다.
이를 다시 세분해서 한 단씩 설명하면 다음과 같이 이해할 수 있다.
불가지(不可知) : 가히 알 수 없다고 한 이 말은 집수(執受)와 처(處)와 요(了)를 알 수가 없다는 것이고 집수(執受)와 처(處)와 요(了)는 모두 8식의 경계[所緣境]와 움직임[行相]으로서 상응하여 인식하는 작용이다. 이러한 작용을 요달해서 알 수가 없기 때문에 불가지(不可知)라 말한 것이다.
집수(執受) : 지니(執)고 수용(受)한다는 뜻이다. 집수(執受)의 한계가 무한해서 이를 알 수 없는 8식은 마음의 주체이며 스스로 경계를 요별할 수 있는 능연(能緣)이라 한다. 8식의 능연인 집수(執受)가 있으므로 소연(所緣)의 경계를 인해서 마음이 생길 수가 있는 것이다. 이렇듯 불가사의해서 가히 알 수 없는 8식의 집수(執受) 능력은 8식이 스스로 지니고 있는 마음과 밖에서 반연해 오는 경계가 일치해서 마음의 작용이 일어나기 때문에 이를 집수(執受)라 한다.
처(處) : 불가지처(不可知處)인 처(處)는 아뢰야식이 작용하는 처소(處所)로서 안으로는 그 공능을 알 수가 없고, 밖으로는 산하대지(山河大地) 우주만유(宇宙萬有)가 8식의 소연처(所緣處)가 아님이 없다. 8식이 바깥 대상을 반연함에 각각 업에 따라 감수(感受)하는 것이 동이(同異)함이 있으니 이를 공업(共業)과 별업(別業)이라 한다.
요(了) : 불가지요(不可知了)인 요(了)는 요별(了別), 변별(辨別), 분별(分別) 등의 뜻으로 객관적인 정황을 분별하는 견분(見分)의 인식작용을 의미한다. 낱낱의 식(識)에는 보는 것[見分]과 보이는 것[相分]이 있어서 아뢰야도 역시 식(識)이므로 견분(見分)이 있고 요별(了別)이 작용이 있다. 아뢰야식은 잠재의식 또는 무의식에 속하기 때문에 움직임(行相)이 미세하여 이를 감지하지 못하는 범부는 선·악을 일으키는 육식(六識)으로 작용을 하므로 생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윤회를 반복하게 된다. 6식과 7식의 작용이 쉬어서 생사가 끊어진 자리가 아뢰야이므로 6식과 7식으로 마음을 쓰는 중생은 8식의 실처(實處)와 분별의 한계를 알 수 없기 때문에 불가지처요(不可知處了)라 한 것이다.
8식은 선·악에 물들지 않으므로 무부무기(無覆無記)라 하고 무부무기이기 때문에 업혹을 일으키지 않고 오직 5변행심소(五遍行心所)만이 상응한다. 무소불능(無所不能)의 변행(遍行)에는 네 가지가 있으니 이를 4일체(四一切)라고 한다.
① 변일체성(遍一切性) : 선(善)·악(惡)·무기(無記) 삼성에 두루함을 말한다. 8식은 선·악에 물들지 않으므로 무부무기라 하고 다시 여기에서 선·악·무기에 두루한다 함은 8식이 모든 심소의 모체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8식은 선·악의 씨를 지니지 않으므로 선·악과 더불어 상응하지는 않는다.
② 변일체지(遍一切地) : 모든 경계에 두루한다는 뜻으로 변삼계구지(遍三界九地) 또는 변삼지(遍三地)라고도 한다. 이는 8식이 삼계에 두루 응생(應生)할 수 있다는 뜻이다.
③ 변일체시(遍一切時) : 마음 곧 아뢰야식이 존재할 때 모든 곳 모든 때에 두두함을 말한다.
④ 변일체구(遍一切俱) : 8식은 육도(六途)에 능입(能入)하므로 범부업을 지으면 범부가 되고 보살업을 지으면 보살도를 이루기 때문에 일체구(一切俱)라 한다.
위에서는 8식의 공능(功能)인 집수(執受), 처(處), 요(了)를 요약했고, 다음엔 8식의 심소(心所)인 촉(觸), 작의(作意), 수(受), 상(想), 사(思)의 5변행심소(五遍行心所)를 정리해 보고자 한다.
촉(觸) : 촉은 6근(六根), 6식(六識), 6경(六境), 3법(三法)이 화합하여 감각을 일으킴을 말한다.
『성유식론(成唯識論)』에서는 촉(觸)은 삼화(三和), 분별(分別), 변역(變易)이라 설명하고 있다. 삼화(三和)는 육근, 육경, 육식이 화합하여 의식의 감각이 일어남을 뜻하고, 분별(分別)은 감각이 일어난 후에 분별이 일어남을 뜻하고, 변역(變易)은 분별의 상황에 따라 변역이 있게 됨을 말한 것으로 이는 촉(觸)이 심소의 첫째가 되어 모든 심소의 의지처가 됨을 뜻한다.
작의(作意) : 작의는 반응을 뜻한다. 근(根), 경(境), 연(緣)이 삼화를 이루어 분별하고 변역하는 반응을 일으키고 경각심을 내어 주의하고 삼가는 등 경계에 대해서 한번 재고(再考)하는 심소이다.
수(受) : 수는 수용의 뜻이다. 순경(順境)과 역경(逆境) 비순비역(非順非逆)의 경계를 수용한다는 말이다.
상(想) : 상은 앞의 경계를 헤아려서 각종 이름[名言]을 붙여 개념을 존재하게 하는 심소이다.
사(思) : 사는 마음으로 하여금 움직이고 작위하게 하는 심소로서 행동 이전의 사상이며 사고력이며 선·악을 일으켜 모든 업을 짓게 하는 심소이다.
이상의 촉(觸), 작의(作意), 수(受), 상(想), 사(思)는 일체에 두루하지 않음이 없기 때문에 변행심소(遍行心所)라 하고 변행심소이기 때문에 제8식(第八識)과 7식(七識), 6식(六識) 등 모든 식(識)과 더불어 상응하여 마음을 일으킨다. 그 중에서도 제6식과 상응할 때 가장 적극적으로 작용하므로 스스로 생각하고 분별하며, 살피고 판단하며, 수용하고 배척하며, 동작을 일으키고 정지하며, 차고 더움을 분별하며, 견고하고 부드러운 것을 가려내는 작용을 약간의 오차 없이 충실하게 해낸다.
그러나 7식과 전5식(前五識)으로 더불어 상응할 때에는 상응만 하고 작용은 거의 미세하다. 가령 말하자면 눈으로 볼 때에는 눈이 볼 뿐이고, 귀로 들을 때에는 귀가 들을 뿐이고, 코로 냄새 맡을 때와 입으로 먹을 때, 몸으로 촉감을 느낄 때도 역시 상응해서 알 뿐 별도의 작용을 하지 않는다. 그것은 5변행심소(五遍行心所)가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현상계에서 가장 강하게 작용하는 자리가 6식이기 때문이다.
특히 제8식(第八識)과 상응할 때에는 상응만 할 뿐 작용은 거의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8식은 종자를 보장(保藏)하고 있을 뿐 능변(能變)하지 않기 때문이다.
위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아뢰야식은 생명의 근원이며 종자의 창고로서 불생불멸(不生不滅)하고 부증불감(不增不減)하여 5변행심소(五遍行心所)와 더불어 상응하되 작용하지 않고, 윤회해서 변역하되 부동하는 자리이다.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에 물들지 않기 때문에 종자가 되고 선(善)·악(惡)의 구별이 없으므로 탐진치(貪瞋痴)가 없다. 이는 아뢰야식이 5수 가운데 오직 사수(捨受)와만 상응하기 때문이다.
5수(五受)란 고·락·우·희·사(苦樂憂喜捨)를 말한다. 이는 모두 경계를 받아들이는 감각이다. 고·락(苦樂)은 신체적인 면에서 받아들이는 감각으로 신체적인 고통은 고(苦), 신체적인 즐거움은 락(樂)이라 하고, 우·희(憂喜)는 정신적인 면에서 받아들이는 감각으로서 정신적인 괴로움은 우(憂), 정신적인 기쁨은 희(喜)라 한다.
사(捨)는 순하지도 않고 거슬리지도 않는다는 뜻이다. 신체적으로는 고통(苦)과 즐거움(樂)을 여의고 정신적으로는 근심(憂)과 기쁨(喜)을 여의었으므로 버릴 사(捨)를 써서 사수(捨受)라 한다. 제8 아뢰야식은 경계를 인식하여 선·악을 구별하지 않으며, 고통과 즐거움, 근심과 기쁨을 느끼지 않는다. 따라서 만법의 근원이면서도 만법을 간섭하지 않고 생멸의 윤회를 거듭하면서도 불종자(佛種子)가 멸하지 않는다. 이러한 제8식의 심소는 언제라도 시절인연이 도래하여 부처님법을 만나면 성불을 이루게 된다.
제 4 송
是無覆無記 觸等亦如是 (시무복무기 촉등역여시)
恒轉如瀑流 阿羅漢位捨 (항전여폭류 아라한위사)
제8 아뢰야식은 무부무기(無覆無記)이니 촉(觸) 등 오변행심소(五 行心所)도 또한 이와 같다. 항상 움직임(恒轉)이 마치 폭류(瀑流)와 같으니 아라한(阿羅漢)의 자리에서 버려진다.
이 송문(頌文)은 이미 3송(三頌)에서 아뢰야식의 체성(體性)을 밝힌 데 이어 아뢰야의 성질(性質)을 밝힌 구(句)이다. 아뢰야의 성질이란 범부로부터 불보살(佛菩薩)에 이르기까지 본래부터 지니고 있는 품성을 말한다.
인간은 품성에 따라 불보살이 되기도 하고 고뇌중생이 되기도 한다. 만약에 중생이 고뇌에서 벗어나기를 진정으로 염원한다면 고뇌의 근원인 마음의 체(體)와 성(性)을 깨달아 고뇌에서 벗어나고자 할 때에만 비로소 가능한 것이다. 마음의 체성을 깨닫고 나면 고뇌 자체가 없기 때문이다.
또한 인간의 품성은 무한해서 뜻을 발하면 이루어지지 않음이 없으나 본래 생멸이 없는 큰 길은 버리고 작은 이익에서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에 부처님께서 여래장(如來藏)을 설하시어 아뢰야가 천하의 주인임을 밝히신 것이다.
무부무기(無覆無記) : 무부는 물들지 않는다는 뜻으로 번뇌가 일지 않고 경계에 부동함을 말하고 무기는 그 원인이 선악에 속하지 않고 결과 또한 고(苦)와 낙(樂)을 받지 않음을 말한다.
제8아뢰야의 성질은 물들지 않으므로 번뇌가 없고 선악이 없으므로 인과(因果)가 없고 인과가 없으므로 고락(苦樂)을 받지 않는다. 아뢰야의 성질이 무부무기(無覆無記)이기 때문에 스스로 업을 짓는 일이 없고 업을 받는 일도 없다. 다만 여래장 또는 진여법성이라고도 하는 제8식은 맑고 깨끗하여 자체의 성(性)을 고집하지 않기 때문에 7식이 선악을 지어 훈습한 습기(習氣)를 섭수하여 보존하여 지닐 수 있는 것이다.
촉등(觸等) : 송문 제2구에서 말한 촉등은 제8식과 상응하는 심소(心所)로서 촉·작의·수·상·사(觸·作意·受·想·思)를 말한 것이니 곧 오변행심소(五行心所)이다.
오변행심소는 제8식의 심소로서 말하자면 감각을 일으키는 자리가 촉(觸)이요, 분별하고 변화하는 자리가 작의(作意)요, 선악의 경계를 수용하는 자리가 수(受)요, 면전의 경계를 분별하여 생각하는 자리가 상(想)이요, 스스로 사량(思量)을 일으키는 자리가 사(思)이다. 이러한 오변행심소도 역시 작용은 하되 물들지 않고 장애도 받지 않으며 인과를 짓지 않으며 고락도 받지 않는다. 따라서 오변행심소의 작용도 무부무기(無覆無記)이다.
이렇듯 아뢰야식은 심체(心體)가 무부무기요, 작용도 무부무기여서 본래청정이라 하고 본래청정하므로 일체만법에 상응하고 일체만법에 상응하므로 심왕(心王)이라 하는 것이다. 심왕(心王)이 청정하므로 심소(心所)도 청정하여 체(體)와 성(性)이 상응하기 때문에 그 한계가 무한하여 중생의 식견으로는 가히 알 수 없어서 불가지(不可知)라 한다. 제8식의 한계를 가히 알 수 없는 것은 8식의 체성이 본래 없고 오직 만법으로 더불어 상응하여 작용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8식은 일체법과 모두 상응하면서도 일체법에 물들지 않고 일체법이 장애되지 않는 8식의 한계를 어찌 중생의 식견으로 알 수 있겠는가. 오직 물들지 않고 전변하지 않는 자리에서 8식의 체(體)와 성(性)을 요지(了知)할 수 있는 것이다.
항전(恒轉) : 항전이란 항상하면서 변화한다는 뜻이다. 8식의 마음은 불생불멸하여 항상하지만 상황에 따라 변한다. 이러한 변화는 부지불각에 이루어지기 때문에 변화의 자체를 인식할 수가 없다. 6식(六識)의 전념(前念)과 후념(後念)의 변화는 누구나 흔적을 느끼지만 8식의 변화는 미세하여 변화의 상황을 겉으로는 조금도 느낄 수 없는 것이다.
폭류(瀑流) : 폭류는 급류(急流)하는 물이라는 뜻이다. 물의 흐름은 표면상으로는 인식할 수 없으나 안으로는 흐름이 급속해서 멈춤이 없다. 8식도 이와 같아서 외관상으로는 생각의 실처를 알 수 없으나 안으로 끊임없이 분출되어 나오는 마음은 시작도 끝도 없어서 그 실체를 알 수가 없다. 따라서 일어나고 멸하는 8식의 마음을 폭류에 비유한 것이다. 8식은 6식의 업인(業因)과 7식의 번뇌가 어떠한 경우에 어떻게 8식에 함장되어 어떠한 결과를 초래할지 알 수 없어서 항전(恒轉)하기를 폭류와 같다는 것이다. 8식이 항전함에 다음과 같은 세 가지 뜻이 있다.
첫째, 제8아뢰야식의 실체는 상주불멸하여 본래 생사(生死)가 없어서 육신이 멸할 때 6식과 7식만이 따라서 멸하고 8식은 불멸(不滅)한다. 불멸할 뿐 아니라 불변하기 때문에 마치 금(金)으로 가락지나 목걸이를 만든다면 형상은 변했어도 금의 실체가 변하지 않듯이 육신이 윤회를 계속한다 해서 8식 자체가 변한 것은 아니다.
둘째, 7식은 때로 선악의 업을 지어서 선악의 습기가 종자가 되어 8식에 함장(含藏)시켜 다음 과(果)를 받게 하므로 항전의 뜻이 있고 이를 업인의 습기가 진행한다는 뜻으로 진(進)이라고도 한다.
셋째, 8식 안에 훈습되어 성숙된 종자의 수량은 가히 헤아릴 수 없으며 자류(自類)와 같은 외연(外緣)을 기다려 서로 합하여 외연이 충족되면 현행(現行)하다가 연(緣)이 다하면 점차 소멸되므로 이를 출(出)이라 하여 업인이 다함을 뜻한다. 이와 같이 8식은 업인에 일진(一進)하고 업인에서 일출(一出)함을 반복하기 때문에 항상 불멸하는 뜻으로 항(恒)을 쓰고 항상 변하기 때문에 전(轉)을 써서 항전(恒轉)이라 했다. 이러한 8식은 외형상으로는 보이지 않지만 안으로는 폭류처럼 변한다.
아라한(阿羅漢) : 아라한은 성문사과(聲聞四果) 중 제4위에 해당되며 증과(證果)하는 최상의 위치가 된다. 아라한과가 수행자의 최상의 위(位)에 해당되지만 아직 소승(小乘)에 속하는 것은 비록 견혹(見惑)과 사혹(思惑)을 타파하여 밖으로 경계에 물들지 않고 안으로 번뇌가 일어나지 않으나 보리심을 발하여 중생구제의 대원(大願)이 성숙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라한은 범어로서 세 가지의 뜻이 있다.
① 살적의(殺賊義) : 수행자에게 가장 큰 적(賊)은 번뇌이기 때문에 번뇌라고 하는 적(賊)을 파해 없앤다는 뜻이다.
② 응공의(應供義) : 아라한은 이미 모든 루(漏)가 멸하여 덕(德)이 수승하여 세상에 존경의 대상이 되어 공양을 받을 만하기 때문에 응공이라 한다.
③ 불생의(不生義) : 불생불멸하는 열반을 증득하여 다시는 생사의 길에 들지 않으므로 불생(不生)이라 한다.
사(捨) : 사(捨)는 7식의 업인(業因)에 물들지 않으므로 버릴 사(捨)를 써서 사위(捨位)라 한다. 사(捨)는 집착을 버리고 외경(外境)에 부동함을 뜻한다. 여기에는 인식전환의 뜻이 있으니 탐진치(貪嗔痴)를 집착하던 마음이 탐진치를 버리고, 유루(有漏)를 집착하던 마음이 무루(無漏)를 증득하여 범부의 식견을 버리고 성현의 위에 진입하고자 하는 인식의 대전환을 뜻한다.
성문사과의 수행인이 인식의 대전환을 성취하여 아라한위에 이르고자 한다면 먼저 한결같이 아공관(我空觀)을 닦아야 한다. 아공관이란 아뢰야의 실체가 공함을 깨닫고 마음이 분상에서 마음이란 영원함이 없어서 무상하고 법의 분상에서 모든 법이 실체가 없어서 무아임을 인식하므로 본래 내가 없음을 관함을 말한다.
이렇듯 아공관(我空觀)을 닦아 아집(我執)과 법집(法執)의 이집(二執) 가운데 아집을 끊고 번뇌장(煩惱障)과 소지장(所知障)의 2장(二障) 가운데 번뇌장을 끊는다. 이를 버린다는 뜻으로 사(捨)라 하였다.
그러나 아직 법집을 끊지 못하고 소지장을 버리지 못했기 때문에 비록 나(我)는 버렸다 하더라도 진리를 집착하여 주창할 사상(思想)을 고집하고, 바깥 경계에 순역(順逆)함이 자유롭지 못하여 마음이 부동하지 못하고, 악(惡)은 끊었으나 선종자(善種子)가 남아 있어 다시 과(果)를 일으키게 되는 것이 이 위(位)이다.
수행자는 오직 아공(我空)의 이치를 깨달아 분별아집을 끊고 번뇌장을 끊은 후에 다시 구생아집(俱生我執)을 끊고 소지장을 끊어 선악을 모두 초월하여 일체법에 부동하고 허덕임이 없는 경지에 이르고자 발심해야 한다. 본래 청정한 8식이 상황에 따라 폭류처럼 변화하지만 아라한의 위에 이르러 번뇌와 집착이 모두 쉬어서 고락의 과(果)를 받지 않고 생사에 물들지 않음을 사(捨)라 한 것이다.
제 5 송
次第二能變 是識名末那 (차제이능변 시식명말나)
依彼轉緣彼 思量爲性相 (의피전연피 사량위성상)
다음 두 번째의 능변(能變)은 이 식(識)을 말나식(末那識)이라 한다. 말나식은 8식을 의지하여 움직이고 8식을 반연하여 사량(思量)하는 것으로 체성(體性)과 행상(行相)을 삼는다.
1송(一頌)에서부터 4송(四頌)까지에서 이미 제8아뢰야식의 체(體)와 성(性)을 설명했고 여기에서는 제7 말나식(第七末那識)의 체성(體性)과 행상(行相)을 밝히게 된다. 말나(末那)는 범어로서 번역하면 의(意)가 되는 바 제6 의식을 의식(意識)이라 번역하기 때문에 6식과 7식을 구별하기 위해서 말나(末那)라는 범어의 음을 그대로 쓰게 된 것이다.
제7 말나식의 특성은 항심사량(恒審思量)이다. 항심사량이란 항상 살피고 사량한다는 뜻으로 제8식의 견분(見分)을 항상 살피고 사량하여 나(我)의 본체(本體)로 여겨 깊이 집착한다. 7식이 항심사량(恒審思量)으로 성상(性相)을 삼는 데 반해 제8식은 항상하지만 사량하지 않으며 제6식은 사량하지만 항상하지 않고 전5식(前五識)은 항상하지도 않고 사량하지도 않는다. 오직 7식만이 항상하면서 사량하고 아애(我愛)를 집착한다. 따라서 사량하고 집착하는 것은 제7식의 유일한 공능(功能)이라 하겠다.
사량(思量)하고 아애(我愛)를 집착하는 제7 말나식을 능변(能變)이라 하는 것은 아집(我執) 아애(我愛)의 바탕이 되어 제6 의식과 전5식(前五識)을 소연경(所緣境)으로 삼아 사량분별하고, 제8의식의 심처(心處)를 소연경(所緣境)으로 삼아 8식의 공능(功能)을 집착하여 근신(根身)으로 여기고 아상(我相)을 지으며, 아(我) 이외는 모두 소연경으로 삼아 인상(人相)을 분별하여 안으로는 끝없는 중생심을 일으키고 밖으로는 일체만법을 분별하여 중생상(衆生相)을 일으켜서 식(識)을 임의로 주재하기 때문이다.
제7 말나식은 사량분별하고 집착하는 심소(心所)로서 예지력과 잠재의식을 발휘하지만 수행자는 반드시 이를 극복하여 분별의 주체인 집착을 끊고 무심을 이루어 법계에 자재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법계는 본시 상도(常道)가 없어서 영원함이 없고 아(我)도 또한 본래 없어서 집착할 아(我)가 없는 것이다. 진아(眞我)를 찾는다는 것이 본래 꿈이어서 분별을 쉬고 집착을 끊어서 끊을 집착이 없고 쉬어야 할 분별이 없으면 바람이 멎고 물결이 잔잔해서 천하가 고요하듯이 적정한 그 자리가 중생이 성취해야 할 경지인 것이다.
제2능변(第二能變) : 제1능변은 아뢰야이고 제2능변은 말나식이다. 본래청정하여 생멸이 없는 진여열반을 등지고 중생심을 일으키는 식(識)이 곧 말나식이다. 이를 능변이라 하는 것은 아견(我見)에 집착하여 주관적 사고(思考)를 고집하기 때문에 객관적 분별이 생겨서 능소(能所)·피차(彼此) 등을 자기 입장에서 하므로 능변이라 한다.
의피전(依彼轉) : 7식은 8식 중의 종자와 현행작용(現行作用)을 의지하여 집착하고 분별하는 마음을 일으킨다. 피(彼)는 아뢰야식을 말한 것이다. 7식의 의지처가 아뢰야식이기 때문에 의피(依彼)라 했다. 의(依)는 의지한다는 뜻이고 전(轉)은 움직인다는 뜻으로 작용하는 것을 말하고, 여기에는 두 가지의 뜻이 잇다.
첫째는 유전의(流轉依)니 제7식 자신이 스스로 끊임없이 계속해서 유전(流轉)하여 작용함을 말하고,
둘째는 수전의(隨轉依)니 제7식이 8식을 따라서 전현(轉現)함을 말한다.
이와 같이 7식은 8식을 따라 작용하기도 하고 7식 스스로 작용을 일으켜 유전하기도 하여 부단히 탐진치를 계탁(計度)하는 등 사량분별을 일삼고 아집(我執), 아애(我愛)를 성상(性相)으로 삼기 때문에 중생의 윤회가 쉬지 못하는 것이다. 이러한 제7 말나식은 능연(能緣)의 심식(心識)으로 제8식을 소연대상(所緣對像)으로 삼아 8식의 공능(功能)을 집착하므로 아상(我相) 등의 상(相)이 있게 된 것이다.
중생이 이러한 이치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8식을 연려(緣慮)하고 집착하여 아(我)로 여기지만 수행하여 평등성지(平等性智)를 이루면 사량분별이 끊어지고, 사량분별이 끊어지면 집착도 끊어져서 비로소 법계를 소요하여 대자연과 더불어 대자재를 성취하게 되는 것이다.
송문(頌文)의 3구(三句)에서 의피전(依彼轉)이라 한 것은 7식이 8식을 의지해서 작용하기 때문이다.
연피(緣彼) : 제7식이 8식을 소연대상(所緣對像)으로 삼는다는 뜻이다.
범부가 오관(五觀) 6식(六識)이 경계를 잘못 분별하여 착오를 일으키는 것은 제8식에 소집(所執)된 자신을 더 과신하기 때문이다. 중생이 무지(無知)할수록 아견이 강해서 오류가 많고 지혜가 향상되면 사량분별하여 집착하지 않으므로 착오가 적어진다.
사량위성상(思量位性相) : 제7식의 작용은 사량분별이다. 성상(性相)이란 성품과 성품의 모습이니 곧 체성(體性)과 행상(行相)을 말한다.
7식과 8식은 서로 의지하는 관계로서 극히 친밀하여 불가분(不可分)하다. 의장(依仗)의 입장에서 말하자면 말나는 능의(能依)가 되고 아뢰야는 소의(所依)가 된다. 8개식(八個識)의 심(心)과 심소법(心所法)은 모두 소의(所依)가 있으니 소의(所依)에는 3종(三種)이 있다.
① 종자의(種子依) : 인연의(因緣依)라고도 한다. 모든 법은 반드시 자류(自類)의 종자에 의지해야 생기(生起)할 수 있으니 이것을 인(因)이라 하고 그밖에 환경조건을 연(緣)이라 하는 바 이를 종자의(種子依)라 한다.
② 증상의(增上依) : 구유의(俱有依)라고도 한다. 증상이란 그 효과를 증가하게 하고 촉진시키는 뜻으로 수행으로 그 능력을 무한히 증장시킬 수 있음을 말한다. 구유(俱有)란 상호 인과가 되고 서로 의지한다는 뜻으로 말하자면 안식(眼識)이 안근(眼根)을 의지하고 안근이 안식을 의지함을 뜻한다. 만약에 그 하나가 결핍되면 쌍방 모두가 작용할 수 없게 된다.
③ 무등간연의(無等間緣依) : 개도의(開導依)라고도 한다. 전념(前念)과 후념(後念)이 서로 같아서 등이라 하고 상속(相續)하여 부단(不斷)하므로 무간이라 한다. 이는 전념이 후념의 소의(所依)가 됨을 말한 것으로 생각이란 전념을 의지하여 일어나는 것이니 곧 지난 과거의 관념에 의해 생기(生起)함을 뜻한다. 만약에 심(心)과 심소(心所)의 법이 서로 이어지지 않고 틈이 생긴다면 생각이 재생(再生)할 수 없고 전현(轉現)할 수도 없을 것이다. 개도(開導)란 전념이 후념을 개도한다는 뜻이니 과거의 잘못을 귀감삼아서 미래를 향상시킬 수 있음을 뜻한다.
제7식이 8식 중의 종자와 현행(現行)을 의지하여 작용이 일어나는데 종자를 의지하면 인연의(因緣依)라 하고 현행(現行)을 의지하면 구유의(俱有依)라 한다.
송문(頌文) 가운데 의피전(依彼轉)이라 한 전(轉)의 뜻은 7식이 8식의 종자와 현행 2법(二法)을 의지하여 전생전기(轉生轉起)한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7식은 8식에 의해서 마음작용을 일으키고 6근에 의해서 그 공능(功能)을 발휘한다. 7식은 8식을 의지하고 8식은 7식을 의지하여 상호 존재하므로 구유의(俱有依)라 한다.
이렇듯 7식의 성상(性相)이 사량이라면 무엇을 어떻게 사량(思量)하는가. 사량이란 연려(緣慮) 관찰(觀察) 분별(分別) 집취(執取)의 뜻이다. 그러나 상황에 따라 작용하는 한계는 논리적으로 불가능하고 오직 수행을 통해서 깨달아야만 가능하다.
사량의 의미를 인도의 옛 유식가(唯識家)들의 설명을 참조해 살펴보면 다음과 같이 분류해 볼 수 있다.
① 7식은 8식의 심왕(心王) 자체를 연려(緣慮)하고 집착하여 아(我)라고 여기고 8식의 심소(心所)를 집착하여 아소(我所)로 여긴다.
② 8식의 견분(見分)을 집착하여 아(我)로 여기고 8식의 상분(相分)을 집착하여 아소(我所)로 여긴다.
③ 8식의 현행(現行) 곧 과숙과보(果熟果報)를 연려(緣慮)하고 집착하여 아(我)로 여기고 8식 중의 종자를 연려집착하여 아소(我所)로 여긴다.
이상의 설(說)이 서로 다른 것 같지만 모두가 8식을 의지해서 작용한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8식이 심왕(心王) 또는 심체(心體)가 분명하고 6근(六根)이 마음작용의 선봉이 분명한 데 반해 7식의 작용이 그 중간의 역할로서 미묘한 듯하지만 아탐(我貪) 아애(我愛)하고 분별사량하는 주체로서 수행자가 반드시 타파해야 할 관문임에는 여지가 없다.
제 6 송
四煩惱常具 謂我痴我見 (사번뇌상구 위아치아견)
幷我慢我愛 及與觸等俱 (병아만아애 급여촉등구)
제7식은 4번뇌(四煩惱)를 항상 갖추고 있으니 말하자면 아치(我痴)·아견(我見)·아만(我慢)·아애(我愛)이며 그리고 이밖에 촉(觸) 등과 상응하여 함께 한다.
이 송(頌)은 말나식(末那識)과 상응하는 4번뇌(四煩惱)와 심소(心所)를 설명하고 있다.
4번뇌(四煩惱) : 4번뇌는 아치(我痴)·아견(我見)·아만(我慢)·아애(我愛) 등으로 자성(自性)을 장애하여 성불(成佛)을 막고 환(幻)을 집착하여 업(業)을 일으키고 생멸(生滅)의 고통을 탐닉하여 스스로 고뇌를 자초하는 요인이 곧 4번뇌이다.
아치(我痴) : 아치는 어리석음을 뜻하는 말로서 우치(憂痴)·무지(無知)·무명(無明) 등을 통칭한 뜻이다. 삼독(三毒)으로 지칭하는 탐·진·치(貪瞋痴)가 곧 4번뇌에서 표출되었으며 탐진치의 치(痴)와 4번뇌의 아치가 모든 중생이 끊어야할 무명이며 무명의 식(識)은 연기(緣起)의 주체가 된다.
무명이란 잘못 인식하곤 착각하는 것으로서 어리석음의 대명사라 할 수 있다. 치(痴)의 어리석음이란 나(我)를 집착함으로써 생기하는 소견을 말한 것으로 안으로 몽매무지(汕?無知)하고 밖으로 일체법을 판단하지 못하여 진심(瞋心)과 만심(慢心)을 일으켜 해탈(解脫)할 수 없게 하므로 아치는 모든 번뇌 가운데 근본이 된다.
이와 같이 아치는 무지·무명(無知無明)의 뜻이 있고 무명(無明)에는 공무명(共無明)과 불공무명(不共無明)의 두 가지 뜻이 있다.
공무명(共無明)은 탐·치·만·의(貪痴慢疑) 등 모든 번뇌가 공존(共存)한다는 뜻이 있고 또한 모든 번뇌가 상응하여 일어나기 때문에 상응무명(相應無明)이라고도 한다. 무명이란 본시 번뇌와 더불어 존재하므로 공(共) 또는 상응(相應)이란 전제를 붙인 것이다.
불공무명은 독행(獨行)과 항행(恒行)의 두 가지 뜻이 있다.
첫째 독행은 단독으로 일어나는 무명으로 여기에 또한 두 가지 형태가 있으니 (1)은 분(忿)·에(喪) 등 수번뇌(隨煩惱)와 상응하는 것과 (2)는 분·에 등 수번뇌와 상응하지 않는 것이다. 독행무명은 홀로 일어나되 상황에 따라 다르게 일어남을 말한다.
둘째 항행(恒行)은 제7식(第七識)이 항상 집아(執我)하는 무명으로서 이는 외경(外境)과는 무관하다.
아견(我見) : 아견은 아집(我執)이다. 이는 범부중생(凡夫衆生)이 몸[肉身]과 마음[精神]을 집착하여 아(我)라고 여기는 것이다.
사실상 일체만법(一切萬法)은 실제로 아가 존재하지 않는다. 인연소생법(因緣所生法)에 의하여 연(緣)이 구족되면 만물이 생(生)하고 연이 다하면 만법이 멸(滅)하여 찰나(刹那)에 생멸(生滅)하므로 존재(存在)가 허환(虛幻)하다. 그러나 중생은 인연소생의 참 이치를 알지 못하고 일체만법이 허환임을 인식하지 못하여 실아(實我)가 없는 데서 아(我)를 망집(妄執)하므로 이를 아견(我見)이라 한다.
아만(我慢) : 아만이란 오만하고 교만해서 남을 경시하고 스스로를 지고(至高)하다고 여기며 자신이 위대한 위인으로 생각되어 세상의 모든 허물이 나에게는 없고 모두 다른 사람들이 업을 짓고 죄를 지어 혼탁한 사회를 조장한다고 생각하므로 모두가 나와 같지 않고 나만이 분명하고 바르다는 생각을 한다.
이를 아만이라 하고 이러한 아만은 아집으로부터 나와서 오만해지므로 교만 또는 아만이라 한다. 만심(慢心)은 스스로 높고 위대하여 겸하(謙下)하지 못하기 때문에 남으로부터 존경받을 수가 없고 위대해질 수도 없다. 교만과 아만은 교만하고 오만하기 때문에 인심을 상실하고 스스로를 낮추어 정진(精進)하지 못하므로 자신을 상실하게 된다.
아애(我愛) : 아애는 아탐(我貪)이다. 중생이 탐애(貪愛)하기 때문에 경계를 분별하여 마음에 드는 바를 탐하고 싫어하는 바를 싫어하여 시비(是非)를 일으키고 탐애하기 때문에 좋아하는 바를 즐거워하고 싫어하는 바에서 진심을 일으키고 탐애하기 때문에 경계에 집착하여 미혹(迷惑)을 자초(自招)한다.
이렇듯 제7식은 영원히 사량(思量)하고 집아(執我)하므로 항상 4번뇌와 더불어 함께 상응한다.
이상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아치, 아견, 아만, 아애 등 4번뇌는 윤회의 근본이며 업의 종자라 할 수 있어서 수행자는 반드시 이를 극복하여야 하고 4번뇌를 극복하는 것이 곧 해탈임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촉(觸) : 촉등구(觸等俱)라 한 촉은 오변행심소(五 行心所)의 촉(觸)·작의(作意)·수(受)·상(想)·사(思) 중의 촉(觸)이다. 여기에서 촉등이라 한 것은 7식(七識)의 모든 식(識)을 총괄한 말이다. 7식의 심소는 4번뇌를 위시하여 5변행심소·8대수번뇌(八大隨煩惱)·5별경심소(吳別境心所) 중의 혜(慧) 등이다. 이 18심소(十八心所)가 모두 7식과 상응하여 작용하므로 촉등구라 하였다. 그러나 7식은 4번뇌가 바탕이 되어 있기 때문에 집착의 고통이 있는 것이다.
8식(八識)은 심(心)의 체(體)로서 함장식(含藏識)이 되고 종자식(種子識)이 되어 5변행의 심처(心處)일 뿐 작용을 하지 않는 반면 6식(六識)은 전5식(前五識)으로 더불어 살피고 사량하고 분별하는 작용을 하지만 7식은 8식과 6식의 중간의 식으로서 6식으로부터 받은 정보를 집착하고 8식의 공능(功能)을 집착한다.
이렇듯이 7식은 4번뇌로 성상(性相)을 삼으면서도 8식의 심소인 5변행과 8대수번뇌와 5별경심소 중의 혜(慧)를 상응하여 작용하므로 8식과 7식과 6식의 3식이 함께 공존하면서 심식의 작용을 생기한다.
따라서 7식은 스스로 심식의 주체가 아니고 경계를 식별하는 식도 아니면서도 심식의 작용을 주도한다. 특히 5별경심소 중 혜는 예지력, 잠재능력과 같은 특별한 능력의 혜로서 6식에서 현전(現前)의 경계를 이해하고 추구하며 선택하는 혜와는 다르다.
이상에서 7식의 근본심소(根本心所)인 4번뇌와 5별경심소 중 혜를 설명했고, 촉(觸) 등의 5변행심소는 이미 제3송에서 자세히 해설했으므로 이제 8대수번뇌를 살펴보고자 한다.
8대 수번뇌는 불신(不信)·해태(懈怠)·방일(放逸)·혼침( 沈)·도거(悼擧)·실념(失念)·부정지(不定知)·산란(散亂) 등이다.
① 불신(不信) : 불신은 마음이 맑고 깨끗하지 못하여 삼보(三寶)에 대한 신앙심이 없고 진리를 믿지 않으므로 허환을 집착하여 성현(聖賢)의 실덕(實德)을 장애하여 정신(淨信)을 상실함을 말한다.
② 해태(懈怠) : 해태는 게으름을 뜻하지만 여기에서는 악(惡)을 끊고 선(善)을 닦는 일에 진력(盡力)을 다하지 않아서 정진(精進)을 게을리 함을 뜻한다.
③ 방일(放逸) : 방일은 염(染)을 막지 않고 정(淨)을 수습(修習)하지 않아 제멋대로 방종하여 선근(善根)을 닦지 않음을 뜻한다.
④ 혼침( 沈) : 혼침은 마음이 경계를 감당할 수 없어서 사물을 변별하지 못하고 마음이 경안(輕安)하지 못하므로 정관(正觀)을 상실하여 바른 수행을 장애함을 뜻한다.
⑤ 도거(悼擧) : 도거는 마음이 경계에 대하여 고요하지 못하여 버려서 뛰어 넘지 못하고 멈춰 쉬지 못함을 뜻한다.
⑥ 실념(失念) : 실념은 과거에 경험했던 경계를 기억하지 못하여 정념(正念)을 장애함을 뜻한다.
⑦ 부정지(不正知) : 부정지는 면전에 나타난 경계에 대하여 잘못된 생각을 일으켜 바른 견해를 훼범하여 정지(正知)를 장애함을 뜻한다.
⑧ 산란(散亂) : 산란은 경계에 대하여 마음이 흔들려서 안정을 상실하므로 정정(正定)을 장애함을 뜻한다. 이렇듯 4번뇌를 바탕으로 하여 허환을 집착하고 8대수번뇌를 일으켜 정(正)을 상실한 7식은 번뇌와 집착을 종사(從事)하므로 5별경심소 중 혜가 비록 잠재력과 예지력을 발휘할 수 있고 삼성(三性)에 모두 통하지만 출세간(出世間)의 무루지(無漏知)는 아니다.
뿐만 아니라 5변행심소 역시 8식에서는 무위(無爲)로 작용하여 무한대의 공능이 있으나 7식에서는 번뇌와 집착이 근본이 되므로 변행은 하지만 통달하지 못함이 있다. 18심소로 더불어 상응하는 7식은 수행자가 극복해야 하는 가장 큰 관문 중의 관문이다.
제 7 송
有覆無記攝 隨所生所繫
阿羅漢滅定 出世道無有
제7 말나식(第七末那識)은 유부무기(有覆無記)에 속하며 생(生)하는 곳에 따라 얽매인다. 수행하여 아라한(阿羅漢)과 멸진정(滅盡定)에 든 자와 출세도(出世道)를 성취한 자에게서 없어진다.
제7 말나식(第七末那識)은 그 성(性)이 유부무기(有覆無記)에 속하며 삼계구지(三界九地) 어느 곳에든 생(生)하는 데에 따라 물들고 얽매이지만 아라한과(阿羅漢果)와 멸진정(滅盡定)에 든 자와 출세도(出世道)를 성취한 자에게서 비로소 물들고 얽매임이 없어진다. 유부무기는 별도로 설명하겠지만 물들지 않고 선악을 일으키지 않는다는 뜻이다. 마치 꿈 속에서 일어난 일들을 탐착하지 않고 보복하지 않는 일단의 뜻이다.
가령 꿈 속에서 피해를 입은 사람이 이를 생시에 추궁하지 않고 꿈 속에서 죽임을 당한 사람이 이를 생시에 보복하지 않는 등의 심소(心所)가 바로 제7 말나식의 유부무기의 성품이다.
그러나 말나식(末那識)은 비록 선악의 업을 직접 지을 수 없어서 무기(無記)에 해당되지만 염오(染汚)의 장애 때문에 아(我)를 집착하므로 탐진치의 근본이 되는 4근본번뇌(四根本煩惱)와 8대수번뇌(八大隨煩惱)를 동반하여 상응한다. 4근본번뇌와 상응하여 마음이 일어나기 때문에 탐진치가 있고 탐진치가 있기 때문에 아상(我相)을 비롯한 4상(四相)이 있어 망집(妄執)을 일으켜 6식(六識)에 영향을 끼쳐서 줄줄이 업을 짓게 하고 8식(八識)에 영향을 끼쳐 무명(無明)의 종자로 생사를 반복하게 한다.
따라서 말나식의 심소인 4번뇌와 8대수번뇌를 극복하여 제지(除止)하는 것이 수행자의 가장 큰 과제라 하겠다.
유부(有覆) : 유부는 업에 의해 물든다는 뜻으로서 유염(有染)이라 하고 물들어 집착하는 의미로 유장부(有障覆)라고도 한다. 제7말나 그 자체는 선·악의 업을 짓지 않으므로 악성(惡性)에 속하지 않으나 유염(有染) 유장부의 장애에 가려져서 아(我)를 집착하게 되고 아를 집착하기 때문에 4근본번뇌와 8대수번뇌를 일으킨다.
말나식의 본질은 항상 작용을 하되 상황에 따라 변화하면서 무명(無明)을 일으키고 무명의 작용은 제6 의식(第六意識)과 전5식(前五識) 곧 5관(五觀)에 영향을 끼친다. 5관과 제6 의식이 말나의 무명으로 인해 작용을 하기 때문에 오직 자신의 이익[我貪]만을 탐하고 자신의 이익만을 탐하기 때문에 악업을 짓게 되고 악업을 짓기 때문에 염오식(染汚識) 또는 염오의(染汚意)라고도 한다.
무기(無記) : 말나식이 비록 염오가 있어서 번뇌를 일으키는 자리이기는 하지만 그러한 성질이 있을 뿐 행동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이러한 말나식은 번뇌를 일으켜 악념(惡念)을 행하지 않으므로 선악의 마음이 기록되어 있지 않고 선악의 마음을 기억해서 작용하지 않으므로 무기(無記)라 한다.
소생소계(所生所繫) : 태어나는 곳에 따라 얽매인다고 한 이 송(頌)의 뜻은 말나식 스스로 태어날 수 없기 때문에 생(生)하는 곳에 따라 3계(三界) 내에서 8식(八識) 중의 이숙과(異熟果)를 의지하여 생하므로 소생(所生)이라 한다. 또한 유정중생(有情衆生)이 천도(天道)에서 태어나게 되면 천도에 계속(繫屬)되고 축생에 태어나면 축생도(畜生道)에 계속(繫屬)되므로 이를 소계(所繫)라 한다. 이 염오식(染汚識)은 인간세계 뿐만 아니라 천상·축생·아귀·수라·지옥 등 육도(六途)에서 모두 사량분별하고 집아(執我)하므로 말나식의 성능(性能)이 종자에 미치는 영향과 5관(五觀) 의식(意識)에 미치는 영향이 지대함을 알 수 있다.
아라한(阿羅漢) : 아라한은 3승(三乘)이 수행하여 네 단계의 과[四果]를 성취하는데 제일 마지막 단계의 과(果)를 말한다. 아라한은 아공관(我空觀)을 닦아 본래 내가 없음을 깨달아 진의(眞義)를 증득(證得)했기 때문에 아집의 작용이 일어나지 않는다. 또는 삼승무학(三乘無學)의 과위(果位)를 아라한이라 한다.
이 과위(果位)에서 아집이 일어나지 않는 것은 멸정(滅定)을 성취했기 때문이다. 멸정(滅定)은 멸진정(滅盡定) 또는 멸수상정(滅受想定)이라고도 하는바 이는 이 정(定)에 들게 되면 받아들이고 생각하는 수·상(受想)의 심소(心所)를 멸(滅)하여 몸과 마음이 고요하여 적정(寂靜)하므로 아집이 일어나지 않게 된다. 그러나 현행(現行)은 멸했으나 종자(種子)는 아직 멸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라한의 과위에서는 4번뇌 등의 아집을 복단(伏斷)했을 뿐이며 멸한 것이 아니므로 언제라도 처(處)와 관계없이 다시 탐애(貪愛) 등의 번뇌를 일으킨다.
이 송문(頌文)의 핵심요지(核心要旨)는 제7 말나식 가운데 4번뇌 등의 심소를 제지하고 복단하는 데 있다. 진여자성(眞如自性)의 청정한 본체(本體)는 추호도 염오의 식(識)이 없으나 말나(末那)에는 잠재력과 예지력이 있다. 이는 모두 염오(染汚) 혹(惑) 집(執) 등으로 심찰사량(審察思量)함으로써 발현되기 때문에 유위법(有爲法)에 해당된다.
유위법은 허망하여 실(實)이 아니므로 끊어야 하는데 마음은 끊어서 끊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억눌러서 제지한다는 뜻으로 복단해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복단 그 자체도 완전한 것이 아니므로 멸정에 이르는 수행을 겸하여 평등성지(平等性智)를 이루어야 비로소 번뇌에서 벗어날 수 있다.
평등성지란 제7말나식의 심소인 4번뇌 등 온갖 번뇌가 소멸하여 아가 공(空)해짐으로써 텅빈 마음으로 일체 만법을 수용하고 상응함을 말한다. 아(我)가 없어서 일체 만법과 더불어 하나가 되면 비로소 모든 고통의 속박에서 벗어나게 되어 진정한 해탈의 경지가 된다.
멸정(滅定) : 멸정은 아라한과(阿羅漢果)의 자리에서 증득한 경지이다. 3승(三乘) 수행자가 이미 번뇌를 복단했으나 멸하지 못한 것을 알면 반드시 이를 멸하고자 할 것이요, 번뇌를 멸하고자 할진대 반드시 멸진(滅盡)의 경지에 이르러야 한다. 멸진이란 번뇌가 멸하여 멸한 흔적까지 없음을 말한다. 이 정(定)에 들었을 때 수(受)·상(想) 2종(二種)의 심소를 멸하여 받아들여 수용(受容)하는 것과 분별하는 감각이 끊어지고 몸과 마음이 적정하게 되어 아집을 버릴 수 있다. 아라한과 멸정의 위(位)에서는 번뇌가 일어나는 것을 복단하는 것이지 번뇌의 종자까지 끊어진 것은 아니다. 수행자가 수행으로써 번뇌를 끊고 다시 번뇌가 일어나지 않게 하기 위해서 분발하여 정진하는 것을 가행정진(加行精進)이라 한다.
출세도(出世道) : 출세도는 세간의 명리(名利)를 초월하여 진제(眞諦)만을 추구하는 도(道)로서 불도(佛道)를 수행함을 말한다.
출세도를 닦아 불도를 수행함에 가장 근본적인 수행법은 육신을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다스리고 마음자리를 닦아 마음으로 하여금 일체만법에 물들지 않고 얽매이지 않게 하는 것이 그 요체라 하겠다. 마음을 닦는 데는 반드시 아견을 끊어 제해야 하고 마음을 끊어 제(除)하려 하면 아뢰야식을 연(緣)하여 일어나는 아견과 법아견(法我見)을 끊어 제해야 한다. 다시 말해 본래 내가 없는 아공관을 닦고, 일체법이 본래 없는 법공관(法空觀)을 닦아야 한다. 말나식을 수행하는 것은 이미 10지(十地)에 이르러야 가능하고 처음 환희지(歡喜地)에서부터 제8부동지(第八不動地)에 이르는 동안 아·법(我法)의 집착이 끊어지고 제10지(第十地)에 이르러 불과(佛果)를 증득하게 되면 이를 구경위(究竟位)라 한다. 초지(初地)에서는 6식의 분별2집(分別二執)을 끊어 묘관찰지(妙觀察智)를 이루고 제8지(第八地)에서 평등성지(平等性智)를 이루게 되지만 7식은 집착하게 할 뿐 직접 현행하지 않기 때문에 6식을 의지해서 아공(我空) 법공(法空)의 2공관(二空觀)을 닦아야 분별집착이 끊어져서 평등성지를 이루게 된다.
무유(無有) : 무유의 두 글자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사량(思量) 분별집착 등의 번뇌가 소멸하여 존재하지 않음을 말한 것으로 이는 아라한 멸진정 출세도를 성취한 경지를 설명한 송구(頌句)이다. 수행자가 마음을 닦음에 7식의 분별 집착을 끊음으로써 8식의 인(因)이 청정하고 6식의 현행하는 경계가 청정해진다. 제7말나식은 8식의 소연(所緣)이 되고 6식의 소의근(所依根)이 되어 아·법(我法)을 집착하므로 이를 극복하는 것이 수행상 가장 큰 관문이라 하겠다.
제 8 송
次第三能變 差別有六種
了境爲性相 善不善俱非
다음 제3능변(第三能變)은 차별(差別)해서 아는 것이 6종(六種)이 있으니 경계(境界)를 분별하여 아는 것으로 성상(性相)을 삼으며 선(善)과 불선(不善)과 비선비불선(非善非不善)인 무기성(無記性)을 갖추고 있다.
먼저 제1식(第一識)과 제2식(第二識), 제3식(第三識)을 여기에서는 제1능변(第一能變), 제2능변(第二能變), 제3능변(第三能變)이라 표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식(識)을 능변이라 하는 것은 변화의 주체가 곧 마음임을 뜻하고 마음이 능동적으로 변화를 주도할 수 있으므로 능변(能變)이라 한 것이다.
지금까지 아뢰야식[第一能變]과 말나식[第二能變]의 성상(性相)과 공능(功能)에 대해 설명하였고 여기 제8송에서는 제3능변(第三能變) 곧 6식(六識)의 성상을 밝힌다.
3능변(三能變) : 아뢰야식을 제1능변이라 하고 말나식을 제2능변이라 하고 육근(六根)을 제3능변이라 하므로 여기에서 제3능변은 육근의식(六根意識)을 말한다.
차별유6종(差別有六種) : 차별은 분별하는 뜻이기보다는 각각이라는 뜻으로 쓰여졌다. 각각 6종(六種)이 있다는 것은 6근(六根), 6진(六塵), 6식(六識)을 뜻한다.
6식(六識)은 6근(六根), 6진(六塵), 6식(六識)이 단독으로 작용하지 못하고 서로 의지하여 작용을 한다. 말하자면 6근은 6진을 의하여 6식의 작용을 일으킴을 말한다. 식(識)을 능변이라 하는 것은 주체적으로 변화를 주도하기 때문이며 따라서 제8식을 이숙능변(異熟能變)이라 하고 제7식을 사량[思量能變]이라 하며 제6식을 요별능변(了別能變)이라 하여 이를 3능변이라 한다.
요경위성상(了境爲性相) : 요경(了境)은 경계를 요별(了別)한다는 뜻이다. 6종의 특징은 한결같이 외경(外境)을 요별함에 있다. 따라서 경계를 요별하는 능변식(能變識)이라 한다.
6식은 경계를 요별하는 것이 그들의 성상(性相)이며 행상(行相)이다. 그러므로 위성상(爲性相)이라 하였다. 성(性)은 체성(體性) 또는 자성(自性)을 말하고 상(相)은 행상(行相) 또는 작용을 말한다.
범부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것 등 5관(五觀), 6식을 각기 별도로 쓰기 때문에 눈이 없으면 볼 수가 없고 귀가 없으면 들을 수가 없다. 그러나 성자(聖者)는 6근을 자유로이 호용(互用)할 수 있어서 눈이 없어도 보고 귀가 없어도 들을 수 있으며 6근 중 하나만으로도 6근을 모두 쓸 수 있는 것이다.
선불선구비(善不善俱非) : 6종식(六種識)은 어떤 성(性)에 속하여 통하는가 하면 선(善)에도 통하고 불선(不善)에도 통하며 비선비악(非善非惡)에도 통한다. 이미 3성(三性)을 설명했듯이 인간에게는 선과 불선과 비선비악의 구성이 있다. 이 6종식이 3성에 통한다는 것은 선을 일으킬 수도 있고 악을 일으킬 수도 있으며 비선비악 곧 무기(無記)를 일으켜 작용할 수도 있음을 뜻한다.
선을 일으키면 선과 상응(相應)하고 악을 일으키면 악과 상응하며 비선비악을 일으키면 비선비악의 무기(無記)와 상응하게 됨을 말한다. 비선비악은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니라는 뜻이니 담담하게 부동(不動)하고 물들지 아니하여 관념적 전제가 없이 상응함을 말한다.
이와 같이 6종식은 외경(外境)을 상응하여 분별하는 역할로써 성상을 삼는다.
제 9 송
此心所遍行 別境善煩惱
隨煩惱不足 皆三受相應
이 6종식(六種識)의 심소(心所)는 5변행(五遍行), 5별경(五別境), 11선(十一善), 6근본번뇌(六根本煩惱), 20수번뇌(二十隨煩惱), 4부정(四不定) 등이다.
이 6종식의 심소(心所)는 모두 고(苦), 낙(樂), 사(捨) 등 삼수(三受)와 상응한다.
이 송문(頌文)은 요경능변식(了境能變識) 곧 6종심식(六種心識)과 상응하는 심소(心所)를 설명한 송(頌)이다.
차심소(此心所) : 이 송문(頌文) 첫 구의 차(此)는 요별능변식을 가리킨 말로서 6종식을 의미한다. 능변하는 마음이 8개의 식(識)이기 때문에 이를 8식(八識)이라 하고 8식 모두를 심왕(心王)이라 칭한다. 식을 심왕이라 하는 것은 마음의 주작용(主作用)의 체(體)로서 경계를 주도적으로 요별하기 때문이다.
식이 경계를 섭(攝)한 후에는 탐(貪)·애(愛)·뇌(惱)·원(怨) 등의 정서를 일으키므로 이를 심소유법(心所有法)이라 하며 약칭하여 심소라고도 한다. 마음이 작용하는 심소는 모두 51개인데 이 51개 심소는 모두 6식과 상응하고 이 가운데 34심소(三十四心所)는 전5식(前五識)과 상응하며 18심소(十八心所)는 말나식과 상응하여 8식은 5변행심소와 상응할 뿐이다.
이와 같이 8식이 5변행심소와 상응하되 무부무기(無覆無記)로 하기 때문에 경계에 물들지 않고 고·락(苦樂)에 부동하지만 7식(七識)은 유부무기(有覆無記)로 상응하기 때문에 경계에 물들지만 고·락에는 부동하다.
그러나 6식은 고(苦)·낙(樂)·사(捨) 3수(三受)로 상응하기 때문에 경계에 따라 고와 락을 받기도 하고 담담히 부동하기도 한다. 따라서 6식이 경계에 가장 민감하므로 이를 억제하여 선·악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것이다.
가령 6식이 깨끗한 마음을 일으킬 때에는 11선심소(十一善心所)와 상응하여 깨끗한 마음이 일어나고 악념(惡念)을 일으킬 때에는 6근본번뇌와 20수번뇌와 상응하여 악념이 일어난다는 사실을 인식한다면 선악이 일어나지 않는 8식의 마음으로 경계를 수용하게 훈련하는 것이 수행이다.
이러한 수행을 통해서 선악(善惡)의 시비에서 벗어날 수 있음을 밝히고자 유식(唯識)이 성립된 것이다.
6식이 상응하는 심소인 51심소(五十一心所)는 변행심소(遍行心所) 5와 별경심소(別境心所) 5와 선심소(善心所) 11과 번뇌심소(煩惱心所) 6과 수번뇌심소(隨煩惱心所) 20과 부정심소(不定心所) 4 등이니 이 모든 심소가 6식으로 더불어 상응하여 고(苦)·낙(樂)·사(捨)의 감정을 일으킨다.
3수(三受) : 송문(頌文)의 끝에 개3수상응(皆三受相應)이라 한 것은 6식이 외경과 마주쳐 감각을 일으킬 때 고·낙·사 3수와 상응하여 작용함을 말한 것이다. 말하자면 순경계(順境界)와 마주칠 때에는 즐거운 마음을 생기(生起)하므로 이를 낙수(樂受)라 하고 역경계(逆境界)와 마주칠 때에는 괴로운 마음을 생기하므로 이를 고수(苦受)라 하고 비순비역(非順非逆)의 경계와 마주칠 때에는 즐거움과 고통이 없는 담담한 마음을 생기하므로 이를 불고불락(不苦不樂)인 사수(捨受)라 한다.
이와 같이 6종식은 고와 낙과 사의 3수로 상응한다. 그러나 7식과 8식은 오직 사수와 상응하므로 고와 낙이 없으며 고와 낙이 없으므로 잠재의식에 속한다.
제 10 송
初遍行觸等 次別境謂欲
勝解念定慧 所緣事不同
먼저 제6의식인 3능변(三能變)과 상응하는 것은 변행심소(遍行心所)인 촉(觸)·작의(作意)·수(受)·상(想)·사(思) 등이요. 다음은 별경오심소(別境五心所) 즉 욕(欲)·승해(勝解)·념(念)·정(定)·혜(慧)니 이 다섯 심소(心所)는 반연하는 일(事)이 부동(不同)하다.
앞에서의 제8송에서 3능변식인 6종식(六種識)의 성상(性相)을 이미 설명하였고 제9송에서 심소법(心所法)을 총괄하여 설명하였고 지금 이 송(頌)과 이하의 4송(四頌)에서는 상응하는 심소의 명칭을 설명하고 있다.
변행(遍行) : 5변행심소(五遍行心所)를 말한 것으로 촉(觸)·작의(作意)·수(受)·상(想)·사(思)이다. 촉(觸)은 6근(六根), 6경(六境), 6식(六識)의 3법(三法)이 화합하여 감각을 일으켜 분별함을 말하고, 작의(作意)는 반응(反應)의 뜻이니 곧 근·경·연(根·境·緣)이 3화(三和)를 이루어 분별하고 반응을 일으켜 변역(變易)함을 말하고, 수(受)는 수용(受容)의 뜻이니 순경(順境)과 역경(逆境) 비순비역(非順非逆)의 경계를 수용한다는 의미이다. 좋은 경계[順境界]에 대해서는 즐거움(受樂)을 일으키고 나쁜 경계[逆境界]에 대해서는 증오를 일으키며 비순비역, 곧 좋지도 않고 나쁘지도 않은 경계에 대해서는 담담함을 일으킨다. 상(想)은 면전(面前)의 경계를 헤아려서 각종 이름을 붙여 개념을 존재하게 함을 말하고 사(思)는 마음으로 하여금 동념(動念) 작위(作爲)를 조작(造作)하게 하는 성질로서 행동 이전의 사상이라 할 수 있다.
별경(別境) : 별경이란 5별경심소(五別境心所)를 말한 것으로 욕(欲)·승해(勝解)·념(念)·정(定)·혜(慧)를 말한다. 이 다섯 심소(五個心所)는 반연하는 사물(事物)이 부동(不同)하기 때문에 별경(別境)이라 한다. 5별경심소를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욕(欲) : 욕은 희망하고 원구(願求)하는 마음이니 선·악 2종이 있다. 선(善)은 선을 행(行)하고자 하는 마음이니 수도하여 성불하고자 하는 마음, 충신 효자가 되고자 하는 마음, 보시하여 남을 이롭게 하려는 마음 등이며, 악(惡)은 명리(名利)를 구하는 마음, 성색(聲色)에 빠지거나 음(淫)·도(盜) 등을 행하는 마음 등이다.
승해(勝解) : 승해는 인간관계에 의해 유혹되거나 환경에 의해 흔들리지 않음을 말한다. 다시 말해서 바른 인식과 바른 사고방식이니 곧 정지견(正知見)과 정신(正信)의 의미이다. 인간은 누구에게나 이러한 승해심(勝解心)이 있으나 욕(欲)의 악심소(惡心所)에 의해 묻히게 된다.
념(念) : 념은 과거의 경계에 대해서 분명하게 기억하여 잊어버리지 않음을 의미한 말이다. 생각하고 사고하는 것은 상(想)이나 사(思)를 쓰고 기억해서 잊어버리지 않을 때는 념을 쓴다. 념은 곧 염기(念記)의 뜻으로 이해하면 된다.
정(定) : 정은 일종의 지관(止觀)으로 하나의 일에 몰입함을 뜻한다. 또 정(定)은 능관(能觀)의 마음을 어떤 한 곳에 집중하는 것으로 선정삼매(禪定三昧) 염불삼매(念佛三昧) 등이 여기에 해당된다.
그러나 능관의 념이기 때문에 유주(有住)에 해당되고 무주(無住)는 아니다. 여기서 유주(有住)라 함은 머무름이 있다는 뜻이니 곧 초탈이 아니라는 말이다.
혜(慧) : 혜는 현전(現前)의 경계에 대하여 이해하고 추구하며 선택하는 것으로 남이 하는 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간택할 수 있는 것을 말한다.
소연사부동(所緣事不同) : 소연사(所緣事)는 5변행(五遍行) 5별경(五別境)의 심소가 반연하는 일이요, 부동(不同)은 이 심소가 각기 개별적인 경계를 반연 대상으로 삼기 때문에 부동이라 한다.
제 11 송
善謂信慙愧 無貪第三根
勤安不放逸 行捨及不害
6종심소(六種心所) 가운데 선(善)이란 이른바 신(信)·참(慙)·괴(愧)와 무탐(無貪)·무진(無瞋)·무치(無痴) 등 3선근(三善根)과 근(勤)·안(安)·불방일(不放逸)·행사(行捨) 그리고 불해(不害)이다.
이 송(頌)은 제3능변식(第三能變識) 곧 제6식(第六識)과 상응하는 선심소(善心所)의 열한 가지를 설명한 구(句)이다. 이 송문에서 선(善)이라고 하는 개념이 확실히 정립되었다 할 수 있다.
신(信) : 신앙심(信仰心) 또는 신념(信念)이다. 바른 신(信)에 3종(三種)이 있다.
① 신실유(信實有) : 실유(實有)란 환유(幻有)가 아닌 제법실성(諸法實性)을
말한다. 이러한 실성(實性)을 믿는 것을 신실유라 한다.
② 신유덕(信有德) : 불보살(佛菩薩) 등 세간에 덕있는 성현(聖賢)을 믿는
것이다.
③ 신유능(信有能) : 세간 출세간의 재능(才能)·기예(技藝) 및 각종 학문을
닦음으로써 자신을 성취하고 세상에 이익을 끼칠 수 있음을 믿는 것이다.
이상의 3종(三種)이 신(信)이 되어 정진한다면 마음이 안정되고 도업(道業)이 증진되므로 11선(十一善) 가운데 신(信)이 으뜸이 된다.
참(慙) : 선(善)을 숭상하고 악(惡)을 스스로 수치로 여겨서 죄악을 짓지 않음을 말한다.
괴(愧) : 죄악에 대한 수치심이니 감히 죄업을 짓지 않음을 말한다.
무탐(無貪) : 사물을 수용함에 스스로 지족(知足)할 줄 알아서 일체 탐착하는 마음이 없는 것이다.
무진(無瞋) : 성내지 않는 마음이니 설사 재해(災害)를 당해도 인내로써 수용하며 어떠한 역경계(逆境界)에 대하여 원망하는 마음이 없어서 성내고 한탄하는 마음이 일어나지 않음을 말한다.
무치(無痴) : 사리(事理)를 명백히 요달(了達)하여 어리석은 마음이 없음을 말한다. 어리석음이 곧 무명(無明)이니 무치는 무명이 끊어짐을 말한다.
이상의 탐·진·치(貪·瞋·痴)를 삼독(三毒)이라 하고 3독의 마음이 없으면 3선근(三善根)이라 하며 이는 일체 선법(善法)이 되기 때문이다.
근(勤) : 근(勤)은 정진(精進)의 뜻이니 선(善)을 닦고 악(惡)을 끊는 데 전념하여 물러섬이 없어 반드시 선법을 성취하고 악법을 단절함을 말한다.
안(安) : 안(安)은 경안(經安)의 줄임 말로서 어떤 일에 몰두하여 부지불각(不知不覺)에 몸과 마음이 경쾌하고 안락함을 말한다.
불방일(不放逸) : 방일하지 않는다는 것은 방탕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규범을 지키고 정진(精進)에 전념함을 말한다.
행사(行捨) : 행사는 집착을 끊는다는 뜻으로 괴로움이나 즐거움에 동요되지 않고 방하(放下)하는 것과 허둥대지 않고 적정(寂靜)에 주(住)하는 것이 있으니 이를 사(捨)라 한다. 단순히 사(捨)할 뿐 아니라 사로써 행(行)하기 때문에 행사라 한다.
불해(不害) : 모든 유정(有情)에게 고통과 피해를 주지 않고 오로지 발고여락(拔苦與樂) 즉 고통을 덜어주고 즐거움을 주고자 하는 마음을 일으키므로 불해(不害)라 한다.
제 12 송
煩惱謂貪瞋 痴慢疑惡見
隨煩惱謂念 恨覆惱嫉?
6종심소(六種心所) 중 근본번뇌(根本煩惱)에는 탐(貪)·진(瞋)·치(痴)·만(慢)·의(疑)·악견(惡見)이 있으며 수번뇌(隨煩惱)에는 분(忿)·한(恨)·부(覆)·뇌(惱) ·질(嫉)·간(?)이 있으며.
제3능변식(第三能變識)은 제8아뢰야식(第八阿賴耶識)과 제7말나식(第七末那識)에 이어 세 번째의 능변식(能變識)으로 전6식을 말한다. 6식(六識)은 모두 경계를 요별(了別)하므로 요별능변식(了別能變識) 또는 요경능변식(了境能變識)이라 한다. 그 성질이 일정하지가 않아서 때로는 선(善)이 되고 때로는 악(惡)이 된다. 탐(貪)·진(瞋)·치(痴) 등 51심소(五十一心所)는 모두 제6식(第六識)과 상응하고 그 중에 34심소(三十四心所)만 전5식(前五識)과 상응한다.
번뇌(煩惱) : 번뇌는 근본번뇌를 말한다. 모든 번뇌가 이로 말미암아 일어나므로 근본번뇌라 한다. 이는 인간의 심성을 가장 악하게 하는 심소(心所)이다.
탐(貪) : 탐(貪)은 탐욕이다. 세상에 처신(處身)함에 스스로 만족할 줄 모르고 적은 것은 싫어하고 많은 것을 좋아하며 괴로움을 싫어하고 즐거움을 추구하는 등 끝없는 욕구(欲求)를 말한다.
진(瞋) : 진(瞋)은 진노(瞋怒)를 말하는 것으로 자기의 감정?맞으면 즐거워 하지만 감정을 거슬리면 진노가 생기(生起)하여 성내는 마음을 진(瞋)이라 한다. 한생각 진심(瞋心)을 일으키면 만 가지의 업(業)을 지어 장애를 스스로 만들게 되므로 인욕(忍辱)을 닦아 성내는 마음을 없애야 한다.
치(痴) : 어리석은 마음이니 곧 무명(無明)을 일컫는 말이? 지혜롭지 못하며 사리(事理)가 분명하지 않을 뿐 아니라 깨끗하지 못한 것에 물들어 필경에는 악도(惡道)에 떨어지므로 이를 치(痴)라 한다.
만(慢) : 만(慢)은 다른 사람을 경시(輕視)하고 자신을 과시하는 것을 말한다. 만심(慢心)·자만심(自慢心)·교만심(嬌慢心) 등으로 타인에게 모욕적인 언행을 삼가지 않는 만심은 무아(無我)의 이치를 깨달아 아집(我執)을 끊어야 스스로 만심이 일어나지 않게 된다.
의(疑) : 의(疑)는 남을 믿지 않는 병이지만 이보다 더 큰 병은 출세간도(出世間道)의 진리(眞理)를 믿지 않는 것이다. 11선(十一善) 중 신(信)이 도(道)의 근원이라면 의(疑)는 장도(障道)의 으뜸이 된다. 진리를 믿지 않으므로 수행할 수가 없고 남을 믿지 않으므로 남으로부터 신뢰가 없고 인과응보마저 믿지 않으므로 악을 더욱 가중시켜 마침내 자신을 파멸하게 된다. 그러므로 수행자는 반드시 불신(不信)을 깨트리고 신(信)으로써 출발해야 한다.
이상 탐·진·치·만·의를 5둔사(五鈍使)라 하는 바 이는 미사지혹(迷事之惑)에 관계되므로 사혹(思惑)이라 하고 미사지혹이란 잘못된 생각으로 일(事)을 미혹(迷惑)케 한다는 뜻으로 그 악심소(惡心所) 곧 모든 번뇌가 마음으로부터 일어나기 때문에 사혹(思惑)이라 한다. 5둔사(五鈍使)의 사(使)는 치달린다는 뜻으로 탐·진·치·만·의의 번뇌가 정(精)·추(序)를 가리지 못하고 치달려 6도(六道)를 윤회하여 모든 고통을 받게 함을 말하고 둔(鈍)이란 그 성(性)이 우둔하여 끊기가 쉽지 않음을 말한다.
악견(惡見) : 6번뇌(六煩惱) 중 탐·진·치·만·의의 5종(五種)을 5둔사 또는 사혹이라 하고 여섯 번째의 악견은 5리사(五利使)라 하는데 이치를 어둡게 하는 혹(惑)이라는 뜻으로 미리지혹(迷理之惑)이라 하고 이를 견혹(見惑)이라 한다. 또 악견에 5종(五種)의 견(見)을 함유하고 있으므로 이를 5견이라 한다. 이 5견은 진리성(眞理性)을 미혹하여 일어나며 그 혹성(惑性)이 예리한 까닭에 리사(利使)라 한다. 5견은 다음과 같다.
① 신견(身見) : 아견(我見)과 아소견(我所見)이다. 모든 중생은 오온화합생(五蘊和合生)이어서 마침내 환멸(幻滅)로 돌아간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내 몸[我身]이 실제 존재한다고 여겨 탐진치 등 번뇌를 일으킴을 아견(我見)이라 하고 의식주(衣食住) 등을 소유함에 본래 정해진 주인이 없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자기의 소유로 집착하는 것을 아소견이라 한다. 아견과 아소견을 통칭하여 신견이라 한다.
② 변견(邊見) : 어떤 수행자가 아견으로 사후의 세계를 추측하여 죽음 자체로 모든 것은 끝나고 일체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여기는 것을 단견(斷見)이라 하고 또 어떤 수행자가 사후에도 영원불멸하여 다시 사람으로 태어난다고 여기는 것은 상견(常見)이라 하는데 이러한 생각을 공견(空見)·유견(有見) 또는 단견(斷見) 상견(常見)이라 하고 이는 모두 양변(兩邊)이 되어 중도(中道)가 아니기 때문에 변견이라 한다.
③ 사견(邪見) : 잘못된 생각, 삿된 생각이다. 사견 중에 가장 극심한 사견은 인과(因果)를 믿지 않는 것이다. 인과를 믿지 않으므로 악행(惡行)을 자행하고 선근(善根)을 저해하여 자신을 해치고 남에게까지 피해를 주기 때문에 사견의 피해는 언설로 다하기 어렵다.
④ 견취견(見取見) : 자기의 견해는 옳고 다른 사람의 견해는 잘못된 것이라고 고집하는 것을 견취견(見取見)이라 한다.
⑤ 계금취견(戒禁取見) : 계율에 집착하는 견해로서 예를 들면 인도 사람들이 소[牛]를 본받으면 생천(生天)할 수 있다고 믿고 중국 사람들이 채소를 먹으면 득도(得道)할 수 있다고 믿는 것으로 계율만을 고집하는 것을 말한다.
이상의 탐·진·치·만·의·악견을 6종의 근본번뇌라 한다. 근본번뇌 가운데 악견으로 말미암아 발하는 신견(身見)·변견(邊見)·사견(邪見)·견취견(見取見)·계금취견(戒禁取見)의 5견(五見)을 사혹(思惑) 또는 수혹(修惑)이라 하고 이는 생활하는 가운데 일어나는 심리적 병태이다. 5견을 반복하면 10종이 되어 끊임없는 번뇌를 벗어버릴 수 없게 된다. 5견을 반복해서 뒤에 일어나는 5견을 견혹(見惑) 또는 이혹(理惑)이라 하고 이는 견해(見解) 가운데서 발생하는 심리적 상태이다.
이상 10종의 번뇌는 제8식에는 전혀 없고 제7식에는 탐·치·만·악견은 있고 의(疑)는 없으며 제6식에는 전부 존재하고 전5식에는 탐·진·치 3종이 작용을 한다.
수번뇌(隨煩惱) : 번뇌에는 근본번뇌와 지말번뇌로 나누어지는데 근본번뇌는 이미 설명하였고 지말번뇌는 모두 근본번뇌를 따라서 생하고 모두 20종이 된다.
20종의 수번뇌는 다시 10종의 소수번뇌(小隨煩惱)·2종의 중수번뇌(中隨煩惱)·8종의 대수번뇌(大隨煩惱)로 분류된다. 본송(本頌)에서는 10종의 소수번뇌 중 6종만이 있으니 다음과 같다.
① 분(忿) : 역경계에 대하여 분개하고 분노심을 발하여 업을 짓는다.
② 한(恨) : 분한 마음이 계속되어 원한의 독(毒)을 내는 것이다.
③ 부(覆) : 은폐의 뜻으로 자기의 업을 은폐시키는 것이다.
④ 뇌(惱) : 분한(忿恨)을 계속하여 포악해지는 것이다.
⑤ 질(嫉) : 질투심으로 남을 음해하고 중상 모략함을 말한다.
⑥ 간(?) : 인색한 마음이니 남에게 도움 주는 일을 않는 것이다.
제 13 송
?諂與害 無慙無愧
悼擧與昏沈 不信幷懈怠
8송(八頌)에서부터 계속 이어지는 제6의식의 심소로서 속이는 마음(?), 아첨하는 마음(諂), 피해를 끼치는 마음(害), 교만한 마음( ), 부끄러움이 없는 마음(無慙), 염치없는 마음(無愧), 산란한 마음(悼擧), 멍한 마음(昏沈), 믿음이 없는 마음(不信), 게으른 마음(懈怠) 등과.
본 송문에서도 역시 제8송에서부터 설명하고자 하는 제3능변식(第三能變識) 곧 제6의식이 작용하는 마음자리를 설명하고 있다. 제6의식은 5관(五觀) 곧 안이비설신(眼耳鼻舌身)으로 더불어 한 조(一組)를 이루어 나 이외의 경계(境界)를 분별하는 것으로 성상(性相)을 삼고 선(善), 악(惡), 무기(無記)의 심성(心性)으로 작용을 표출한다는 사실은 이미 이해되었으리라 보고 여기에서는 지말번뇌(支末煩惱)에 해당하는 20수번뇌(二十隨煩惱)의 작용을 살펴보고자 하는 것이다.
지말번뇌란 근본번뇌(根本煩惱)가 아닌 지엽적인 번뇌라는 뜻으로 미미한 번뇌인 듯 싶지만 끊어 버리기에는 그리 쉽지 않은 번뇌이다.
광(?)의 뜻은 속이는 마음, 미혹한 마음, 가식적인 마음, 이율배반적인 마음이며 이러한 망녕된 마음으로서 남을 이간하고 위선으로써 남에게 군림하고자 하며 폭력으로써 남의 것을 갈취하고자 하는 심소(心所)이다.
첨(諂)의 뜻은 첨곡(諂曲)이니 힘 있는 사람에게 아첨하고 받드는 것을 첨(諂)이라 하고 마음이 왜곡되어 정직하지 못함을 곡(曲)이라 한다. 아첨과 왜곡은 자신뿐 아니라 남까지 망치게 하는 소인배의 심소(心所)이다.
해(害)의 뜻은 남에게 이익을 주지 못할 뿐 아니라 손해(損害)를 입히고 피해를 주는 악(惡)의 심소로서 세상에 있어서는 안 될 마음자리이다.
교( )의 뜻은 교만한 마음이니 자신을 과시하고 남을 업신여기는 것을 말한다. 교만은 신분이 상승할수록 생기는 마음으로 사람이 교만한 마음이 생기는 순간 더 이상 상승할 수 없게 되어 인간의 한계를 짐작할 수 있게 되는 마음자리이다.
무참(無慙)의 뜻은 수치심이 없고 현선(賢善)을 숭상하지 않으며 거리낌없이 죄업(罪業)을 짓는 것을 말한다.
무괴(無愧)의 뜻은 염치없는 마음이니 남의 충고를 받아들이지 않고 참회할 줄 모르는 마음이다.
도거(悼擧)의 뜻은 산란한 마음이니 안으로 마음을 쉬지 못하고 들떠 있어서 불안정하고, 바깥 경계에 쉽게 자극을 받아 허덕이는 마음이다.
혼침(昏沈)의 뜻은 마음이 미혹하고 양명하지 못해 마치 잠결에 행동하는 것처럼 의욕이 없이 진로의 향방이 불분명한 마음이다.
불신(不信)의 뜻은 실상(實相)을 믿지 않고 덕(德)을 믿지 않고 능(能)을 믿지 않는 마음으로 이는 정법(正法)을 믿지 않으므로 타인(他人)은 물론 자신마저도 믿지 못하는 마음이다.
해태(懈怠)의 뜻은 향상(向上)에 뜻이 없어서 악(惡)을 끊고 선(善)을 행하는 일에 진력(盡力)을 다하지 않음을 말한다.
이상의 심소들은 지말번뇌로서 제6의식 속에 끊임없이 일어나서 도업(道業)을 장애하고 인격을 장애하므로 누구라도 반드시 극복해야 할 심소이다.
제 14 송
放逸及失念 散亂不正知
不定謂悔眠 尋伺二各二
이 송문(頌文)에는 20수번뇌 중 끝으로 4가지 심소(心所)와 4부정심소(四不定心所)를 밝힌 송구(頌句)이다.
20수번뇌 중 16가지 심소는 이미 전송(前頌)에서 밝혔고 나머지 4종심소는 상2구(上二句)의 방일(放逸)과 실념(失念)·산란(散亂)과 부정지(不正知) 등이다.
하2구(下二句)는 4부정지(四不定知)를 밝힌 송(頌)으로 4부정지는 회(悔)·면(眠)과 심(尋), 사(伺) 등이니 이 이류(二類)는 각자 선·악 2성(二性)에 통한다.
이 송문(頌文)에서는 20수번뇌 중 4종번뇌를 밝히고 4부정심을 밝혔다. 이 4종(四種)의 수번뇌(隨煩惱) 역시 선업을 장애하고 정진을 게을리 하여 마음을 미혹하게 하는 심소이다.
수행이란 선의 마음을 일으키고 악의 마음 곧 번뇌를 극복하는 것이다. 대(大)·소(小)의 번뇌가 비록 6식(六識)의 심소라 하지만 6식의 심소를 극복하지 않고 달리 수행하는 방법이 없다는 사실을 안다면 번뇌를 극복하고자 하는 발심이 우선해야 하고 번뇌를 극복하고자 한다면 먼저 심소를 규명해야만 한다.
방일(放逸)의 뜻은 밖으로 경계를 탐착하여 염(染)을 막지 않고, 정(淨)을 소홀히 하여 방종한 마음이니 사람을 방탕하게 하여 아무 것도 성취할 수 없게 하는 심소이다.
실념(失念)의 뜻은 과거에 익힌 경계를 기억하지 못하여 연결력이 상실된 마음으로 건망증에 해당된다. 이 심소는 도업(道業)을 성취하고자 발심은 하지만 바로 망각하는 습성 때문에 정념(正念)을 장애하여 성취할 수 없게 하는 마음자리이다.
산란(散亂)의 뜻은 바깥 경계에 끌려 정념(正念)을 상실하고 유탕(流蕩)한 마음을 일으키는 심소로서 안정감이 없어서 일에 몰두하지 못하게 하므로 도업을 성취할 수 없게 하는 마음자리이다.
부정지(不正知)의 뜻은 바깥 경계에 대해서 그릇된 견해를 일으켜 곡해(曲解)함으로써 정지(正知)를 장애하고 도업을 이루지 못할 뿐 아니라 의식이 치우쳐 바른 길을 상실하게 하는 심소이다.
이상에서 밝힌 것은 12송(十二頌)에서부터 말한 20수번뇌(二十隨煩惱)의 심소이다. 이미 설명했듯이 수번뇌는 지말적인 번뇌에 해당되지만 끊어 버리기 쉽지 않으며 극복하기가 간단치 않아서 수행자의 수행 관문이라 하겠다. 끝으로 4부정심소(四不定心所)를 밝혀 번뇌의 미세함까지 끊어 본래 청정한 마음자리를 회복하고자 한 것이 본송(本頌)의 의미이다.
부정(不定)의 심소는 4종(四種)이 있으니 회(悔)·면(眠)·심(尋)·사(伺) 등이다. 본송(本頌) 끝구에 2각2(二各二)라 한 것은 회면(悔眠)을 1류(一類)로 생각하고 심사(尋伺)를 1류(一類)로 보아 2류(二類)가 되고 류(類)마다 각각 선악(善惡)이 있다는 뜻이다. 회면(悔眠)의 뜻은 뉘우치고(悔) 수면(眠)을 취하는 선(善)의 측면과 후회(悔)하고 침체(眠)되는 악(惡)의 측면이 있어 각각 선악에 통하고, 심사(尋伺)는 심(尋)은 심구(尋求)의 뜻으로 찾아내는 것을 말하고 사(伺)는 사찰(伺察)의 뜻으로 살펴보는 것을 말한다.
심사(尋伺)도 역시 선·악(善惡)에 통하므로 회면(悔眠)과 심사(尋伺) 두 가지 류(類)는 혹은 선(善)이 되고 혹은 악(惡)이 되기도 함을 원문(原文) 끝에 2각2(二各二)로 밝힌 것이다.
수행은 모름지기 적은 것을 돌이켜 큰 데로 돌아가고 중생을 돌이켜 성불의 길로 돌아가게 하는 것이다. 따라서 본 송문(本頌文)에서 밝힌 것은 작은 번뇌를 돌이켜 청정법해(淸淨法海)에 들게 하기 위한 것이니 수행자는 번뇌의 심소를 규명하여 극복하고 열반적정(涅槃寂靜)의 묘도(妙道)에 드는 길을 스스로 돌파해야 할 것이다.
제 15 송
依止根本識 五識隨緣現
惑俱惑不俱 如濤波依水
사량분별(思量分別)하는 마음인 전5식(前五識)은 모두 제8근본식(阿賴耶識)을 의지하여 반연을 따라 작용이 일어난다. 전5식(前五識)이 작용할 때는 눈과 귀 등 여러 식(識)이 함께 작용하기도 하고 일식(一識)씩 단독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전5식이 근본식(根本識)을 의지하여 마음을 일으키는 정형(情形)은 마치 파도가 물을 의지하여 일어나는 것과 같다.
지난 14송(十四頌)까지는 유식의 심소(心所)를 밝혔고 본 15송(十五頌)에서는 유식의 작용이 일어나는 상태를 설명한다. 마음에는 안·이·비·설·신(眼耳鼻舌身)이 작용하는 5관(五觀) 곧 전5식(前五識)과, 사량분별하고 기억하고 선별할 수 있는 제6 의식과 예지력과 잠재력 그리고 사량하여 탐착하는 제7 말나식과 근본의식인 제8 아뢰야식 등의 심소가 있다.
이러한 심소가 작용하는 정황을 설명하고 마음 다스릴 수 있는 방법을 찾게 하는 것이 이 송문(頌文)의 핵심이다. 따라서 본 송문에서는 전5식은 무엇을 의지하며 어떻게 작용하는가를 밝히고 있다. 전5식이 무엇을 의지하는가에 대해서 본문 제1구에 의지근본식(依止根本識)이라 하여 근본식을 의지한다고 한 것은 전5식이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근본식을 의지해서 존재함을 말한 것이다.
근본식이란 제8 아뢰야식으로 모든 식(識)의 바탕이 되기 때문에 근본식이라 하는 것이다. 어떻게 작용하는가에 대해서는 본문에서 5식수연현(五識隨緣現)이라 하여 5식이 근본식을 의지하되 연(緣)을 따라 현기(現起)하여 작용한다고 한 것이 그 설명이다. 연(緣)의 설명은 다음과 같다.
① 공연(空緣) : 공간 또는 거리이다.
② 명연(明緣) : 빛이니 밝음을 말한 것이다.
③ 근연(根緣) : 정색근(淨色根)이니 6근(六根)을 말함.
④ 경연(境緣) : 면전의 경계로 6진(六塵)을 말함.
⑤ 작의연(作意緣) : 5변행심소(五遍行心所) 중의 작의(作意)로서 모든 심(心)에 상응하여 일어난다.
⑥ 분별의연(分別依緣) : 제6식을 말한다.
⑦ 염정의연(染淨依緣) : 제7식이다. 아집(我執)이 강하게 일어날 때를 염(染)이라 하고 가볍게 일어날 때를 정(淨)이라 한다.
⑧ 근본의연(根本依緣) : 제8식이다. 모든 식(識)은 8식을 의지해서 일어난다.
⑨ 종자의연(種子依緣) : 각각의 식(識)이 스스로 의지하는 창고이며 모든 식(識)이 나오는 자리이니 종자를 의미한다.
이상의 아홉 가지 연(緣)을 9연(九緣)이라 한다. 안식(眼識)을 일으킬 때는 위의 9연이 모두 있어야 하고 이식(耳識)은 안식(眼識)과 비슷하나 어둠 속에서도 들을 수 있으므로 명연(明緣)을 제외한 8연(八緣)으로 듣는 작용을 할 수 있다. 비(鼻)·설(舌)·신(身) 3식(三識)은 명연(明緣)은 물론 거리도 필요 없으므로 공(空)·명(明) 2연(二緣)이 없는 7연(七緣)으로도 식(識)을 발할 수 있다. 이와 같이 5식은 근본식을 의지하고 외부연에 의해서 심식(心識)을 일으킨다.
혹구혹불구(惑俱惑不俱) : 구(俱)는 함께의 뜻으로 전5식(前五識) 중에 양식(兩識) 또는 3∼4개의 식(識)이 동시에 작용하는 것을 구(俱)라 하고 오직 하나하나의 식이 단독으로 작용하는 것을 불구(不俱)라 한다.
가령 보는 것과 듣는 것을 동시에 하면 2구(二俱)가 되고 보고 듣고 냄새 맡는 것을 동시에 하면 3구(三俱)가 되고 맛보는 것까지 동시에 하면 4구(四俱)가 되고 5식(五識)이 동시에 작용을 해서 식(識)을 발하면 5구(五俱)가 된다. 여기에 의식(意識)과 잠재력(潛在力)과 무의식적 감각 등이 동시에 작용을 하면 9식 모두가 동시에 작용을 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수행자는 모름지기 동시에 여러 식(識)이 작용하는 것을 꺼려야 한다. 오직 9식이 한 경계에 몰입해야 삼매(三昧)에 들 수 있고 삼매에서만이 모든 부처님의 경계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전5식의 작용은 근본식을 의지하여 작용하므로 근본식이 존재하지 않으면 전5식 또한 작용하지 못한다.
여도파의수(如濤波依水) : 파도가 물을 의지하여 일어난다고 한 것은 5식의 마음이 근본식을 의지하여 작용한다는 뜻을 비유한 말이다. 파도는 파랑(波浪)이니 전5식이요, 물은 제8식이다. 물에서 파도가 일어나려면 반드시 바람이라는 연(緣)이 있어야만 가능하듯이 근본식에서 파도와 같은 전5식이 작용하려고 한다면 9연이라고 하는 바람의 연을 만나서 작용한다는 뜻이다.
이와 같이 한 마음의 작용도 단독으로 일어날 수 없듯이 세상의 만법이 모두 인연의 소생(所生)임을 깨달아야 한다.
제 16 송
意識常現起 除生無想天
及無心二定 睡眠與悶絶
제6의식은 항상 현기(現起)하지만 무상천(無想天)에 태어날 때와 무상(無想)과 무심(無心) 2정(二定)에 들 때 그리고 잠잘 때와 민절(悶絶)했을 때는 현기하지 않는다.
이 송(頌)은 제6의식이 현기하여 작용하는 상황을 설명한 송(頌)이다. 전5식은 근본식을 의지하고 경계가 있어야만 작용하지만 제6의식은 외경(外境)과 상관없이 행주좌와(行住坐臥)와 일거일동(一擧一動)에 쉬지 않고 작용을 한다. 단 무상천에 태어날 때와 무상(無想)·무심(無心) 두 정(定)에 들었을 때와 잠잘 때와 기절했을 때는 작용을 하지 않는다.
무상천에 태어날 때와 무상·무심(無想·無心) 두 정(定)에 들었을 때는 모두 공덕과 수행에 의해서 작용하지 않으므로 무심(無心)의 경계라 할 것이요, 잠잘 때와 기절했을 때는 무기(無記)의 경계라 할 수 있다.
무상천(無想天) : 색계(色界)의 4선9천(四禪九天) 중 제4천(第四天)에 해당되며 삼계28천 중 제19천이다. 이 천상에 태어나는 것은 무상정(無想定)을 닦은 자가 사후(死後)에 태어나는 곳이지만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다시 심상(心想)을 일으켜 윤회하게 되므로 구경지(究竟地)가 아니다.
무상정(無想定) : 무상천에 태어나기를 희망하여 일체의 심상(心想)이 멸한 정(定)이다. 무상천에 태어나거나 무상정(無想定)에 든 두 경지는 모두 몸을 안화(安和)하게 할 수 있으므로 정(定)이라 하며, 여기에 이른 자는 이것이 열반(涅槃)이라고 믿어 진멸(盡滅)할 분이 없으므로 외도 또는 범부가 닦는 정(定)이라 한다.
무심(無心) : 이는 멸진정(滅盡定) 또는 멸수상정(滅受想定)이라 한다. 탐욕(貪慾)과 분별이 모든 업(業)의 근본임을 알아 그것을 멸(滅)하고자 하여 제6식을 압재한 정(定)으로서 성자(聖者)가 닦는 수행법이다. 이 정에는 6식이 존재하지 않으므로 무심이라 한다.
수면(睡眠) : 깊이 잠이 들었을 때는 6식이 완전히 정지(停止)한다.
민절(悶絶) : 혼미한 상태로 인사불성(人事不省)을 의미한다.
수면과 민절로 인해서 6식이 정지되는 것은 잠시여서 잠이 깨거나 혼절에서 깨어나면 다시 6식이 작용을 하게 된다.
6식의 분별은 무한하고 맑고 깨끗한 청정심(淸淨心)을 장애하므로 이를 극복해야 하는 것이다.
제 17 송
是諸識轉變 分別所分別
由此彼皆無 故一切唯識
이 모든 식(識)이 전변(轉變)하기 때문에 분별(分別)과 분별할 것[所分別]이 있다. 차(此)인 주관과 피(彼)인 객관이 모두 존재하지 않으므로 일체가 유식(唯識)인 것이다.
모든 식(識)은 8개의 식이며 8개의 식이 전변해서 나타나는 것은 아(我)·법(法)·종종상(種種相)이다. 종종상(種種相)은 일체만법이니 일체만법은 실(實)이 있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요, 오직 식(識)에 의해서 존재한다. 만법이 비록 얽혀서 무한하지만 모두 식(識)이 전변해서 존재하고, 식(識)이 전변해서 만법을 존재하게 하지만 모두 연생(緣生)에 불과한 것이다. 법계(法界)는 실로 식(識)의 전변(轉變)으로 연생(緣生), 연멸(緣滅)하므로 무자성(無自性)이라 하고 환유(幻有)라 하는 것이다.
시제식전변(是諸識轉變) : 전변(轉變)이란 선전후변(先轉後變)의 뜻으로 주관의 식을 전(轉)하여 객관의 경(境)을 이루어 일체만법을 존재하게 하는 것이니 이렇게 하는 주체가 유식이요, 유식을 떠나서는 아무 것도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전변에는 3종의 뜻이 있다.
① 변현의(變現義) : 식의 전(轉)을 인하여 현상세계가 변(變)하고 현상세계가 변(變)함을 인하여 만법이 드러남(現)을 말한다. 즉 유식의 체(體)로부터 견분(見分)과 상분(相分)의 2분(二分)이 변출(變出)되는 것이니 견분(見分)은 견문각지(見聞覺知)하는 주체로서 능분(能分)이라 할 수 있어서 이는 유정(有情)에 속하고, 상분(相分)은 객관으로서 산하대지(山河大地) 등이니 소분(所分)이라 할 수 있어서 이는 무정(無情)에 속한다.
② 변이의(變異義) : 변(變)은 만법이 생기(生起)하는 뜻이요, 이(異)는 만법이 하나도 같은 것이 없다(不同)는 뜻이니 모두가 오직 식에 의해서 견(見)·상(相) 2분(二分)이 다르게 나타남을 말한다. 즉 식체(識體)는 본래 부동하지만 견(見)·상(相) 2분(二分)은 식에 의해서 변이(變異)하므로 변이라 하며 견분(見分)은 능(能)이 되고 상분(相分)은 소(所)가 되어 능소(能所)가 모두 식에 의해 변현(變現)하지만 작용이 각각 다르므로 변이라 한 것이다.
③ 개변의(改變義) : 식체(識體) 자체가 변하여 아(我)·법(法) 2상(二相)이 되고 견(見)·상(相) 2분(二分)이 되는 것을 말한다. 즉 어린아이와 어른의 식이 다르고 중생과 보살의 식이 다름을 말한 것으로 중생이 수행을 통하여 대보살의 식으로 변할 수 있는 것을 의미한다.
분별소분별(分別所分別) : 분별은 식(識)이며 능(能)이며 주관이며 능전변(能轉變)으로서 능동적이고, 소분별(所分別)은 경(境)이며 소(所)이며 객관이며 전변된 견(見)·상(相) 2분으로서 피동적이다.
차피(此彼) : 차(此)는 능전변(能轉變)인 모든 식(識)을 말하고 또 식(識)의 체(體)를 말한다. 피(彼)는 소전변(所轉變)인 아(我)·법(法)을 말한 것으로 일체 만법이다.
모든 식(識)이 실체가 없으므로 일체 아(我)·법(法)이 없고, 따라서 피차(彼此)가 모두 없으므로 차피개무(此彼皆無)라 하였다. 또 세간의 모든 법(法)은 유위(有爲)·무위(無爲)에서 벗어나지 않으며 유위(有爲)·무위(無爲) 역시 본래 존재하지 않으므로 차피(此彼)라고 하는 능(能)·소(所)와 주관과 객관이 모두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일체유식(一切唯識) : 피차(彼此)의 모든 법(法)이 존재하지 않으므로 세·출세법(出世法)도 존재하지 않으며 삼라만상도 존재하지 않는다. 일체만법은 모두 식(識)이 변현(變現)한 것이며 식(識)이 반연하는 대상이므로 식(識)을 떠나서는 어떠한 것도 존재할 수 없기 때문에 일체유식(一切唯識)이라 했다.
제 18 송
由一切種識 如是如是變
以展轉力故 彼彼分別生
일체종식(一切種識)이 여러 형태로 변함으로 말미암아 전전(展轉)하는 힘[力]이 작용되기 때문에 갖가지 분별이 생기(生起)하는 것이다.
선(善)과 악(惡)은 어디에서 나오며 목전(目前)에 전개(展開)되는 일체 만법은 어디로부터 나오는가. 제8아뢰야식에 잠장(潛藏)되어 있는 종자식(種子識)이 변하여 힘을 발휘하므로 만법을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기게 된다. 종자식(種子識)이 전변(轉變)하는 것은 모두가 업(業)에 의해서 가능하므로 수행자는 모름지기 업(業)을 맑히고 원력(願力)을 키우고자 발심(發心)하는 것이다.
일체종식(一切種識) : 일체종식(一切種識)은 아뢰야식의 다른 이름이며 그 안에 선·악 및 세간·출세간의 무량한 종자를 함장(含藏)하고 있기 때문에 일체종식(一切種識)이라 한 것이다.
종자(種子)는 습기(習氣)를 말한 것으로 일체 중생이 선·악의 업을 지을 때 그 습기(習氣)가 8식에 훈습되어 선·악의 종자가 그 안에 심어져 일단의 훈습시간을 경과한 후에 성숙된 것을 말한다. 습기(習氣)가 성숙된 후에는 그 안에서 외연(外緣)이 모여들 때를 기다렸다가 비로소 발아(發芽)하여 역량(力量)을 발휘하여 현행(現行)한다.
종자(種子)는 이숙(異熟)이라 하기도 하는데 종자는 선·악의 인(因)에 함장(含藏)되고 선·악의 인(因)에 의해서 과보가 다르기 때문에 이숙(異熟)이라 한 것이다. 이숙(異熟)에는 인(因)이 변이(變異)하여 과(果)가 되어 성숙되는 변이숙(變異熟)과 인(因)이 무기(無記) 또는 대지(大智)로 바뀌어 성숙되는 이류숙(異類熟)과 인(因)이 1·2생(一·二生) 또는 몇천 생을 지나 과(果)를 받는 이시숙(異時熟) 등 세 가지가 있다. 그러므로 제8식을 이숙능변(異熟能變)이라 하는 것이다.
여시여시변(如是如是變) : 제8아뢰야식은 일체종식(一切種識) 안에 함장되어 있는 무량무수한 경계를 변출(變出)할 수 있으므로 송문(頌文)에 '유일체종식(由一切種識) 여시여시변(如是如是變)'이라 한 것이다.
여시(如是)를 반복하여 여시여시변(如是如是變)이라 한 것은 제법종자(諸法種子)가 많고 그 변화의 순서가 무한하여 시시각각으로 변화함을 표현한 뜻이다.
전전력(展轉力) : 종자(種子)의 능력이 8식의 심(心)과 심소법(心所法)을 생기(生起)한 다음에 현행(現行)하고 다시 현행(現行)이 8식의 과(果)를 일으켜 아뢰야식에 훈습하여 각종의 새로운 종자를 이루는 힘을 전전력(展轉力)이라 한다.
이처럼 종자는 현행을 생(生)하고 현행은 다시 훈습하여 각각의 유(類)를 이루어 전전부단(展轉不斷)하므로 분별도 또한 이에 따라 부단(不斷)한다. 전전(展轉)은 전전(轉轉)의 뜻으로 전후(前後)를 변화시킨다는 뜻이다.
피피분별(彼彼分別) : 피피(彼彼)는 중다(衆多)의 뜻으로 가지가지의 의미로 쓰인다. 아뢰야식은 수없이 많은 능변(能變)의 힘이 있어 변화를 주도하고 변화된 상황에 대처할 수 있는 무한한 전전력(展轉力)으로써 힘이 무궁하여 법계의 아(我)·법(法)을 가려낼 수 있다. 따라서 이 송(頌)은 고저장단(高低長短)과 시비선악(是非善惡)을 가려서 중생성불(衆生成佛)의 길을 제시하고 아뢰야식의 종자에 전전력(展轉力)으로써 천지(天地)의 주제(主帝)가 됨을 밝힌 송문(頌文)이다.
제 19 송
由諸業習氣 二取習氣俱
前異熟旣盡 復生餘異熟
모든 업(業)의 습기(習氣)와 능(能)과 소(所) 2취(二取)의 습기가 함께 함으로 말미암아서 '생사윤회가 존재하고' 전이숙(前異熟)이 이미 다하면 다시 다른 이숙(異熟)이 생기(生起)하는 것이다.
제업습기(諸業習氣)란 업(業)을 지을 수 있는 습기로서 모르는 사이에 업을 짓는 습관적 기운이다. 이러한 습기에는 스스로 짓는 능(能)과 상대적으로 따라서 짓는 소(所)의 기운이 항상 구비되어 있다. 이로 인하여 생사(生死)가 있고 전후(前後)의 업식(業識)이 반복해서 생멸(生滅)하므로 윤회가 있게 된다.
제업(諸業)은 선·악·무기(善·惡·無記) 등의 업과 신·구·의(身·口·意)의 업과 유루업(有漏業)과 무루업(無漏業)을 총칭하여 제업(諸業)이라 하고 습기(習氣)는 업의 기(氣)가 아뢰야의 장식(藏識)을 훈습하여 같은 업의 공능(功能)을 남기는데 이러한 공능(功能)을 습기(習氣)라 한다. 습기가 장식(藏識) 중에 머무르면 종자라 하고, 그 종자가 성숙하면 이숙과(異熟果)를 초래하게 되어 이를 인과응보(因果應報)라 한다.
제업습기(諸業習氣)를 크게 유루업(有漏業)과 무루업(無漏業)으로 분류할 수 있으며 그 중에 유루업의 습기는 선·악·무기 어느 것을 막론하고 모두 생사의 인(因)이 된다.
2취(二取)는 능취(能取)와 소취(所取)이다. 취(取)는 취착(取着)의 뜻으로 탐착(貪着)으로 이해하면 된다. 능취(能取)는 일체의 심(心)과 심소(心所)의 체(體)이며 소취(所取)는 취(取)할 대상이니 이를 견분(見分)과 상분(相分)이라 한다. 여기에서 견분(見分)을 취하는 것은 아집(我執)이라 하고 상분(相分)을 취하는 것은 법집(法執)이라 한다.
2취(二取)는 모두 견분(見分)을 집착하여 실아(實我)로 여기고 상분(相分)을 집착하여 실법(實法)으로 여기는 것이 확고하여 집착하는 마음이 흩어지지 않아 시간이 오래되면 일종의 습기가 된다. 생사윤회는 모든 습기에 의해서 이루어지며 모든 습기에는 3종이 있다.
첫째는 명언습기(名言習氣)니 이에 명칭(名稱)과 언설(言說)로 어떤 의미를 표시하는 언(言)·어(語)·장구(章句)·부호(符號) 등을 표의명언(表意名言)이라 하고 경계를 요별하기 위해 묘술형언(描述形言)한 것은 현경명언(顯境名言)이라 하는 두 가지 뜻이 있다.
둘째는 아집습기(我執習氣)니 아(我)란 본래 존재함이 없으나 집착하므로 존재하는 것이다. 아집(我執)에는 구생아집(俱生我執)과 분별아집(分別我執)이 있다. 구생아집(俱生我執)은 본능적이고 선천적인 것을 말하고 분별아집(分別我執)은 분별에 의해 일어나거나 학습함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으로 습염적(習染的)이고 후천적이다. 이 두 가지의 아집은 6·7식에 모두 존재하고 그 근원은 7식 중 4번뇌로부터 온 것이다. 따라서 말나식은 아집의 근본이며 아집은 생사의 근본이다.
셋째는 유지습기(有支習氣)니 유지(有支)는 12유지며 12인연이다. 3계(三界)를 3유(三有)라 하는 것은 인(因)이 있고 과(果)가 있고 생사가 있기 때문이다. 유지습기는 업습기(業習氣)와 이숙습기(異熟習氣)로서 3계(三界)에서 과(果)를 받게 하는 업종자(業種子)를 불러 일으켜 감득(感得)한다. 여기에 2종이 있으니 즐거움을 불러일으키는 선업(善業)과 괴로움을 불러일으키는 악업(惡業)이 그것이다.
본 송문(頌文)의 제업식(諸業識)은 곧 생사윤회의 근원이며 생사윤회의 주체이며 만법의 주처(主處)이다. 마음의 주처(主處)와 소처(所處), 그리고 그 작용을 아는 것이 윤회에서 해탈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제 20 송
由彼彼遍計 遍計種種物
此遍計所執 自性無所有
갖가지 계산하는 마음으로 갖가지 사물을 계산하나니 이 계산하는 마음과 계산해서 집착하는 사물의 자성(自性)은 본시 있는 곳이 없다.
제20송부터 24송까지는 3성(三性)·3무성(三無性)의 도리를 설명하고 있다.
3성(三性)은 변계소집성(遍計所執性)·의타기성(依他起性)·원성실성(圓成實性)이며 일체법이 3성을 떠나지 않지만 이 3성은 본래 무성(無性)이다. 본 송은 변계소집성(遍計所執性)을 해설한 송이다.
변계소집성(遍計所執性)은 두루 계교하여 집착한다는 뜻으로 변계(遍計)는 마음으로 우주만물(宇宙萬物)에 대하여 갖가지로 주변계탁(周遍計度)한다는 뜻으로 주변계탁(周遍計度)은 두루 계산하여 헤아린다는 말이다.
소집(所執)은 두루 계산하고 계탁하여 변계(遍計)한 후에 가상해서 인연화합(因緣和合)에 의해 생기(生起)된 사물(事物)을 사량분별(思量分別)한 후에 그 명(名)을 집착하거나 그 상(相)을 집착하여 그것들이 유(有)이다, 무(無)이다, 또는 색(色)이다, 심(心)이다, 내지는 실아(實我)이다, 실법(實法)이다라고 집착하는 것을 말한다.
계량(計量)하여 집착하는 견해(見解)는 실법(實法)이 아니고 오직 환상(幻像)일 뿐이기 때문에 이를 변계소집자성(遍計所執自性)이라 이름한 것이다.
피피(彼彼) 두 자의 뜻은 변계(遍計)하는 심념(心念)이 매우 많아 일체만법(一切萬法)에 대하여 두루 계량(計量)함을 형용한 것이다.
변계종종물(遍計種種物)이라고 한 제2구의 뜻은 갖가지 사물을 변계(遍計)한다는 뜻으로 마치 바닷물을 잔으로 계량한다면 끝내 계산할 수 없듯이 사물을 계산만 할 뿐 바로 볼 수 없음을 변계종종물(遍計種種物)이라 한다.
따라서 목전(目前)의 경물(景物)을 잘못 판단하여 인(因)이 아닌데 인(因)이라 하고, 과(果)가 아닌데 과(果)라 하고, 시(是)를 비(非)라 하고 비(非)를 시(是)라 하거나, 화(禍)를 복(福)으로 여기고 복(福)을 화(禍)로 여기거나, 충신(忠臣)과 간신(奸臣)을 잘못 가리는 등 본래의 사물을 바로 보지 못함을 변계소집(遍計所執)이라 한다.
변계소집(遍計所執)이라고 한 3구의 뜻은 변계(遍計)에는 능변계(能遍計)와 소변계(所遍計)가 있으니 능변계(能遍計)는 마음으로 바깥 사물을 대하는 것으로 주관(主觀)에 속하고, 소변계(所遍計)는 모든 사물을 말한 것으로 객관(客觀)에 속한다. 이 양방의 능·소(能·所)가 대대(對待)함은 당연한 이치이지만 이에 소집(所執)이 더해지면 변계소집(遍計所執)이 되어 순수하게 대대(對待)하지 못한다.
계탁(計度)한 것이 사실과 부합되지 않을 때 이를 집(執)이라 하는데 계집(計執)이란 노끈을 뱀으로 잘못 집착하여 고집하는 것을 말한다. 실상(實相)의 눈으로 사물을 본다면 노끈이 본래 노끈이 아니고 뱀이 본래 뱀이 아니다. 따라서 노끈을 노끈으로 보고 뱀을 뱀으로 본다 해도 이는 실상법(實相法)이 아니므로 변계소집(遍計所執)이 되거늘 하물며 노끈을 뱀으로 잘못 집착하는 우(愚)를 범하랴.
본 송 말구(末句)에 자성무소유(自性無所有)라 한 것은 제8식과 전5식은 능·소(能·所)의 변계(遍計)가 없어서 자성무소유(自性無所有)라 한 것이다. 자성(自性)이 무소유(無所有)이기 때문에 능·소(能·所)가 없고 능·소(能·所)가 없기 때문에 변계(遍計)가 없고 변계(遍計)가 없기 때문에 집착할 것이 없다 하겠다.
제 21 송
依他起自性 分別緣所生
圓成實於彼 常遠離前性
의타(依他)해서 생기는 자성(自性)은 허망 분별하는 반연에 의해 생기는 것이고 원성실성(圓成實性)은 저 의타기(依他起)해서 생긴 성품(性品)이 계산해서 집착[遍計所執]하는 마음[性]을 여의면 자연히 드러난다.
본 송(頌)으로부터 24송까지는 3성(三性)과 3무성(三無性)을 설명한 것이다. 3성(三性)은 계산해서 집착하는 마음[遍計所執性], 경계(境界)에 의해 일어나는 마음[依他起性], 원만하고 실다운 마음[圓成實性]이다.
모든 중생은 3성(三性)으로 마음이 일어나지만 3성은 본래 무성(無性)이다. 왜냐하면 마음이 일어나려면 경계가 있어야 하고 경계가 있어도 6근(六根)이 부합되어야 한다. 6근(六根)과 경계가 부합되어서 일어나기 때문에 마음을 의타기성(依他起性)이라 한다. 타(他: 경계)를 의해서 일어난 마음이 계산해서 집착하면 변계소집성(遍計所執性)이 되고 집착해서 계산하지 않으면 원성실성(圓成實性)이 된다.
의타기(依他起)하지 않으면 본래 마음이 없고 본래 마음이 없으면 변계소집(遍計所執)의 마음도 원성실(圓成實)의 마음도 없는 것이다. 이를 3무성(三無性)이라 한다. 중생은 3성(三性)으로 마음을 쓰기 때문에 계산해서 집착[遍計所執]하고 보살은 3성이 있으나 계산해서 집착하지 않으므로 원성실(圓成實)의 마음을 쓰고 불지(佛地)에 이르면 3무성(三無性)이 되어 비로소 마음에 자재해탈을 얻게 된다.
의타기성(依他起性)의 의(依)는 의지, 의탁의 뜻이며 제법(諸法)은 타(他)를 의지하여 생(生)하므로 의타기(依他起)라 한다. 불이 스스로 타오를 수 없고 산천초목이 자생(自生)할 수 없고 인간 또는 일체 만법이 자생할 수 없어서 의인탁연(依因托緣)하여 인연(因緣)이 구족(俱足)되면 생기(生起)하는 까닭에 의타기(依他起)라 한다.
분별연소생(分別緣所生)이라 한 제2구의 뜻은 먼저 분별은 차별하는 분별이 아니고 구별, 선별의 뜻이다. 연(緣)은 기성(起性)의 연(緣)이니 타(他)에 해당된다. 일체 제법(一切諸法)은 색(色)·심(心)의 2류(二類)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색법(色法)은 드러나 있는 일체 만법이기 때문에 이를 상분(相分)이라 하며 분별할 바[所分別]인 모든 사물을 지칭하여 이를 색법(色法)이라 한다. 이러한 색법은 모두 인연법에 의해 생기(生起)하며 자생(自生)하지 못하고 연생(緣生)이기 때문에 의타기(依他起)인 것이다.
심법(心法)은 분별이 주체이기 때문에 견분(見分)이라 한다. 능분별(能分別)인 인식(認識)이 연생법(緣生法)에 의해 생기므로 안으로는 견분종자(見分種子)를 의탁하고 밖으로는 5근(五根)·5경(五境) 등의 연(緣)을 따라 식(識)이 작용된다. 이렇듯 연생(緣生)이기 때문에 심법(心法)도 또한 의타기(依他起)이며 무자성(無自性)이다.
제3구의 원성실성(圓成實性)은 원만(圓滿), 성취(成就), 진실(眞實)의 의미로서 불성(佛性), 법성(法性), 진여(眞如), 법신(法身) 등이 구족히 모두 원성실성(圓成實性)을 갖추고 있다. 따라서 법성, 진여, 법신 등이 곧 원성실성이며 원성실성이 곧 법성, 진여, 법신 등이다. 원성실성(圓成實性)은 의타기성(依他起性)에서 분별을 일으키지 않으면 원성실성(圓成實性)이고 분별을 일으키면 변계소집(遍計所執)이 된다. 법상(法相)은 유한(有限)하나 법성(法性)은 무한(無限)하며 법상(法相) 허가(虛假)이나 법성(法性)은 진실(眞實)하다. 따라서 제법의 법성(法性)은 부동불변(不動不變)하고 불생불멸(不生不滅)하며 담연(湛然) 상주(常住)하고 원만시방(圓滿十方)하므로 원성실자성(圓成實自性)이라 이름한다.
3구의 원성실어피(圓成實於彼)의 피(彼)는 의타기성(依他起性)을 말한 것으로 원성실성은 의타기 중에서 발로되는 바 의타기에서 변계소집성을 여의어야 하므로 상원리전성(常遠離前性)이라 했다.
제 22 송
故此與依他 非異非不異
如無常等性 非不見此彼
그러므로 이 원성실성(圓成實性)은 의타기성(依他起性)으로 더불어 다르지도 않고 다르지 않은 것도 아닌 것이 마치 저 무상(無常)·고(苦)·공(空)·무아(無我) 등의 성질(性質)과 같아서 이러한 원성실성(圓成實性)에 의타기성(依他起性)을 보지 않음이 없지 않다.
전 송(頌)에서는 의타기성(依他起性)에서 변계소집(遍計所執)을 멀리 여의면 원성실(圓成實)이 된다 하였고 본 송(頌)에서는 원성실이 의타기와 다르지도 않고 다르지 않지도 않음을 가르쳐 주고 있다.
의식(意識)은 5근(五根)과 5진(五塵)이 부합(符合)하여 생기(生起)하는 데 왜 의타기(依他起)라 하는가 의문할 수 있으나 심식(心識)에서는 외경(外境)인 5진과 내경(內境)인 5근 모두가 진아(眞我)가 아니고 타물(他物)에 속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외경과 내경이 부합하여 생긴 마음은 당초부터 진아(眞我)의 심(心)이 아니거늘 사량(思量)하고 분별하고 집착하는 것이 중생의 마음이기 때문에 이러한 변계소집을 깨달아 멀리 여의면 본래 청정한 원성실(圓成實)의 마음을 성취하게 되는 것이다.
제1구의 고(故)는 21송을 이어 본 송을 시작하기 때문에 소이(所以)의 뜻이다. 또 차여의타(此與依他)라고 한 차(此)는 원성실성(圓成實性)을 지칭한 것이다.
제2구에서 제1구의 원성실(圓成實)과 의타기(依他起)로 더불어라고 한 송을 계승하여 다르지도 않고 다르지 않은 것도 아니라고 한 것은 원성실(圓成實)과 의타기(依他起)는 같기도 하고 다르기도 하다는 말로서, 원성실(圓成實)과 의타기(依他起)가 같은 것은 원성실(圓成實)은 성(性)이 되고 의타기(依他起)는 상(相)이 되므로 상(相)은 성(性)으로부터 나오기 때문에 성(性)이 없으면 상(相)이 성립될 수 없다. 이러한 맥락에서 만법은 원성실(圓成實)을 떠나서 따로 의타기(依他起)가 존재할 수 없다.
따라서 의타기(依他起)의 법은 모두 원성실(圓成實)을 바탕으로 하여 나오기 때문에 같다고 한 것이다. 다르다고 한 것은 원성실성(圓成實性)은 의타기성(依他起性)이 아니며 의타기성(依他起性)도 또한 원성실성(圓成實性)이 아니다. 원성실성은 영원하고 불변하고 불멸하여 항상하지만 의타기성(依他起性)은 연생(緣生)이므로 무상(無常)하고 변멸(變滅)하여 원성실성과는 같을 수가 없다.
그러나 원성실성과 의타기성은 같기도 하고 다르기도 하다고 한 것은 의타기법(依他起法) 중에 원성(圓性)의 진실성(眞實性)이 확실히 존재하고 원성실의 진공(眞空) 중에 역시 묘유(妙有)를 함유(含有)하여 만법을 생(生)할 수 있으므로 같다 하였고, 한편 원성실은 연기법(緣起法)이 아니고 생멸무상(生滅無常)이 아니므로 연기법에 의해서 존재하고 연기법이기 때문에 생멸하여 무상한 의타기와는 같지가 않아서 다르다고 한 것이다.
제3구에서 무상등성(無常等性)이라 한 것은 제법무아(諸法無我)·제행무상(諸行無常)·유루개고(有漏皆苦)·연기성공(緣起性空) 등 소승(小乘) 4법인(四法印)을 말한 것이다. 이러한 4법인을 수행하여 의타기에 의해 생기(生起)한 모든 법이 무아(無我)임을 깨닫고 무상(無常)임을 깨닫게 된다. 따라서 수행자는 4법인(四法印) 등을 수행하여 원성실성(圓成實性)을 성취하고 원성실의 청정무구(淸淨無垢)한 자리에서 저 의타기성의 무상(無常)을 깨닫지 않은 자가 없으므로 말구(末句)에서 원성실에서 의타기를 보지 않는 이가 없지 않다고 하였다.
비불견(非不見)의 견(見)은 증견(證見)의 뜻으로 깨달음을 의미하고 원성실에서 의타기를 깨닫는다는 것은 곧 의타기를 멀리 여윈다는 뜻이다.
제 23 송
卽依此三性 立彼三無性
故佛密意說 一切法無性
곧 이 3성(三性 : 遍計所執性, 依他起性, 圓成實性)에 의지하여 상(相), 생(生), 승의(勝義)라고 하는 3무성(三無性)이 성립된 것이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밀의(密意)로 설(說) 하시기를 일체법이 무성(無性)이라 하신 것이다.
이 송(頌)은 본래 자성(自性)이 없음을 확고히 드러낸 송(頌)이다. 중생이 나[我]라고 여기는 심식(心識)이 변계소집성(遍計所執性), 의타기성(依他起性), 원성실성(圓成實性)인데 이 3성(三性)의 시작이 경계를 의지하여 생기(生起)하는 의타기성(依他起性)이기 때문에 마음이란 경계가 없으면 일어나지 않으므로 본송(本頌)에 3무성(三無性)이라 하여 본무자성(本無自性)임을 밝힌 것이다.
이는 마치 부싯돌이 부딪쳐야 불이 일어나듯 마음도 경계에 의해 일어나므로 3성(三性)의 마음이 본래 없다 한 것이다. 경계에 의해 마음이 일어난다는 사실을 깨달아 경계에 부동(不動)하고 계탁분별(計度分別)하지 않으면 원성실성(圓成實性)이 되어 청정무구(淸淨無垢)한 진여법성(眞如法性)을 이루거니와 본래 없는 마음이 경계에 의해 일어난 것을 집착하여 내 마음이라 하고 사량(思量)하고 헤아리면 이것이 곧 변계소집성(遍計所執性)이 되어 윤회(輪廻)의 씨가 되는 것이다.
이상과 같이 3무성(三無性)이라면 마음은 왜 존재하는가. 그 근원을 규명해 보면 부싯돌이 부딪치지 않으면 불이 존재하지 않지만 부싯돌이 부딪치므로 불이 일어나듯 마음은 본래 나고 멸함이 없으나 인연에 의해 생(生)하고 인연에 의해 멸(滅)하므로 연생연멸(緣生緣滅)인 것이다. 자성(自性)에 생멸(生滅)이 없는 것을 본무자성(本無自性)이라 하고 연생연멸(緣生緣滅)하는 마음을 집착하고 계산하는 마음을 변계소집성으로 이해하면 된다.
이와 같이 3성(三性)의 소이연(所以然)이 연(緣)이요, 연(緣)은 실(實)이 아니므로 3무성임을 깨달음으로써 마음의 집착을 끊을 수 있고 경계에 부동할 수 있는 것이다.
3구(三句)의 밀의(密意)에는 두 가지의 뜻이 있으니 하나는 부처님의 설법이 의미가 깊어 참된 뜻이 드러나 있지 않기 때문에 밀의(密意)라 하고 둘째는 부처님의 뜻이 심히 깊어서 입지(入地)하지 못한 수행자가 헤아려 알 수 없기 때문에 밀의(密意)라 한 것이다.
부처님께서 밀의로 설하셨다고 한 것은 경계에 의해 마음이 생기(生起)하고, 생기한 마음을 계산하여 집착하고, 생기한 마음을 계산하여 집착하지 않는 3성이 마음의 작용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고 마음의 실(實)인 줄로 착각하여 집착하는 범부중생(凡夫衆生)을 위하여 3성이 모두 무자성(無自性)임을 설(說)하시어 일체만법의 성상(性相)이 모두 공(空)임을 드러내 주셨기 때문이다.
이는 3성을 세워 마음의 생처(生處)를 설(說)하시고 3무성을 세워 3성에 대한 집착을 파(破)해 주신 것이니 이것이 곧 밀의(密意)에 해당된다 하겠다. 다시 말해 부처님께서 마음의 주처(住處)를 3성으로써 밝히시고 범부가 곡해(曲解)하여 제법의 자성이 실제로 있다고 집착할까 염려하셔서 3성의 자리가 본래 무성(無性)임을 설하시어 제법의 성상(性相)이 모두 공(空)임을 드러내 주신 것이다. 무성의 자리는 집착할래야 집착할 것이 없고 집착을 파(破)할래야 파할 것이 없는 자리이다. 그러므로 영원불멸(永遠不滅)의 자리인 것이다.
제 24 송
初卽相無性 次無自然性
後由遠離前 所執我法性
처음은 일체 모든 상(相)이 무성(無性)인 상무성(相無性)이요, 다음은 자연성(自然性)이 무성(無性)인 무자연성(無自然性)이요, 최후는 이전에 집착한 아(我)와 법(法)을 멀리 여읜 실성(實性) 곧 승의무성(勝義無性)이다.
3성(三性)에 의해 3무성(三無性)임을 이미 전송(前頌)에서 설명했고 본송(本頌)에서는 3무성의 구체적인 까닭을 설명하고 있다.
의식이란 밖에서 주입되어 존재하게 되는 바 이를 계탁(計度)하면 변계소집(遍計所執)이 되고 계탁하지 않으면 원성실(圓成實)이 되는 것은 3성이 본래 무성이기 때문이다.
1구(一句)의 상무성(相無性)의 뜻은 변계소집성(遍計所執性)에 대하여 변계소집성 자체가 상무성(相無性)임을 드러낸 구(句)이다. 변계소집성이 왜 상무성인가?
변계소집이란 존재하지 않은 것을 존재한다고 집착하는 것을 말하기 때문이다. 가령 어두운 밤에 노끈을 보고 뱀이라고 잘못 여기는 것과 같이 생사(生死)가 본래 없는데 실제로 존재하지 않은 것을 존재한다고 집착하고 보리열반(菩提涅槃)이 법계(法界)에 충만하지만 그 실(實)을 보지 못하고 보리열반을 따로 찾는 것 등이 모두 변계소집이다. 그러므로 변계소집성을 상무성이라 한 것이다.
제2구(第二句)의 무자연성(無自然性)은 생무성(生無性)의 뜻으로 의타기(依他起)의 마음이란 무자연성(無自然性)이며 생무성임을 밝힌 구(句)이다. 의타기성(依他起性)의 뜻은 만법은 자생(自生)하지 못하고 다른 갖가지 반연을 의지해서 생기(生起)하므로 비로소 마음이 일어나기 때문에 의타기(依他起)라 한다. 따라서 의타기의 성(性)은 인연에 의한 것이므로 인연생(因緣生)이 되는 것이다.
무자연성(無自然性)의 자연은 천연(天然)의 뜻으로 모든 법은 천연생(天然生)이 아니라 인연생(因緣生)이므로 연(緣)이 갖추어지지 않으면 아무 것도 생(生)할 수 없는 것이다. 모든 법이 연생(緣生)이기 때문에 의타기(依他起)가 되고 의타기에 자성이 없으므로 무자연성 또는 생무성이라 하는 것이다.
끝으로 3·4구(三·四句)에 이전에 집착한 바 아법(我法)을 멀리 여읜 성(性)이란 승의무성(勝義無性)을 말한 것으로 승의무성이란 원성실(圓成實)이 무성임을 밝힌 송(頌)이다. 원성실은 의타기로 생기한 마음을 계탁(計度)하지 않고 집착하지 않으므로 찰나생멸(刹那生滅)의 이치에서 불변부동(不變不動)하고 무생무멸(無生無滅)의 성(性)이기 때문에 제1의제(第一義諦)에 속하며 이를 승의제(勝義諦)라 한다. 승의제란 본래 공(空)하여 무소유이므로 유와 무를 초월하고 그러면서도 세속제(世俗諦)를 수순(隋順)하므로 승의(勝義)라 하는 것이고 굳이 말하자면 무자성(無自性)의 성(性)이라 말할 수 있는 것이다.
3구(三句)의 후유원리전(後由遠離前)이라 한 이 구(句)에서 후(後)라고 한 자(字)는 원성실성을 말한다. 그것은 변계소집성과 의타기성의 다음이라는 뜻이 되고 전(前) 자(字)는 다음 구(句)의 소집아법성(所執我法性)의 전(前)이라는 뜻이 된다.
이 구(句)의 뜻은 변계소집하여 아상(我相)과 법상(法相)에 집착하던 마음을 멀리 여읜 것이 원성실이며 원성실이 곧 제1의제(第一義諦)이며 승의(勝義)인 것을 이해해야 되는 구(句)이다.
따라서 수행자는 모름지기 연생무성(緣生無性)임을 깨달아 의타(依他)하여 생기(生起)한 제법(諸法)이 가(假)인 줄 알아서 망령되이 변계소집한 아(我)·법상(法相)을 멀리 여의고 진공묘유(眞空妙有)인 승의무성(勝義無性)의 실지(實地)를 인식하여 원성실의 진성(眞性)을 구명(究明)하는 것으로 본분(本分)을 삼아야 한다.
제 25 송
此諸法勝義 亦卽是眞如
常如其性故 卽唯誠實性
이것을 모든 법의 승의(勝義)라 하며 또한 진여(眞如)라고도 한다. 항상 모든 법의 실성(圓性實性) 그대로이기 때문에 이것이 곧 유식(有識)의 실성(實性)인 것이다.
이 송(頌)은 전 송에서 말한 상무성(相無性)·무자연성(無自然性)·아(我)·법(法)을 멀리 여읜 승의무성(勝義無性)을 이어서 유식의 실성(實性)을 밝힌 것이다. 유식의 실성(實性)을 승의(勝義)라 하는 것은 만법이 생주이멸(生住異滅)을 면할 수 없지만 오직 유식실성(唯識實性) 곧 진여법성(眞如法性)만이 영원하기 때문에 승의(勝義)라 하는 것이다. 승의란 세간세속(世間世俗)의 어떠한 이치보다 깊고 오묘한 이치를 말한다. 이러한 승의(勝義)는 네 가지의 뜻이 있다.
세간승의(世間勝義) : 5온(五蘊)의 이치·6근(六根) 6경(六境)의 이치를 가르친 12처(十二處)·6근(六根) 6경(六境)과 6식(六識)의 이치를 가르친 18계(十八界) 등의 법(法)을 말한 것으로 초발심(初發心) 수행자가 반드시 닦아야 하는 요체(要諦)이지만 모두 세간법(世間法)에 속하므로 이를 세간승의(世間勝義)라 한다.
도리승의(道理勝義) : 고·집·멸·도(苦集滅道) 4성제(四聖諦)의 이치를 말한 것으로 도리(道理)를 수도(修道)하는 승의(勝義)이므로 이를 도리승의(道理勝義)라 한다.
증득승의(證得勝義) : 이는 이공진여(二空眞如)를 말한 것으로 수행자가 아·법(我·法) 이공관(二空觀)을 닦아 아·법(我·法)에서 벗어나는 진여(眞如)를 증득(證得)하게 되는데 그 의(義)가 수승하므로 증득승의(證得勝義)라 한다.
승의승의(勝義勝義) : 이는 일진법계(一眞法界)의 이치를 말한 것으로 승의(勝義) 중의 승의라는 뜻이다. 말을 여의고 상(相)을 끊었으므로 성자(聖者)가 안으로 증득(證得)하는 경계이다.
이 수행의 경지는 앞에서의 3종승의(三種勝義)보다 수승하므로 승의를 반복하여 승의승의(勝義勝義)라 한 것이다. 세 번째의 증득승의(證得勝義)는 아·법(我·法) 2공관(二空觀)을 닦아 진여(眞如)의 경지(境地)를 증득(證得)하므로 수승하기는 하지만 아직 닦고 증득해야 할 바가 남아 있기 때문에 승의승의와는 같지 않다. 승의승의의 참뜻은 더 이상 닦고 증득해야 할 바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수행경지(修行境地) 가운데 최상이라 하겠다. 송(頌)에서 제법승의(諸法勝義)라 한 것은 바로 이 승의승의를 말한다.
제2구에 즉시진여(卽是眞如)라고 한 진여(眞如)에 진(眞)은 진실하여 허망하지 않음을 뜻하고 여(如)는 여상(如常)의 뜻으로 바꿀 수 없는 불변(不變)을 말한다. 이러한 뜻을 합하면 진실여상(眞實如常)이 되고 진실여상이란 항상 모든 법의 본성(本性)과 같으므로 부증불감(不增不減)의 묘처(妙處)이다.
제3구에 상여기성(常如其性)이라 한 기성(其性)은 제법의 본성 또는 법성(法性)이다. 이는 곧 제법의 승의는 담연항적(湛然恒寂)하여 법성(法性)과 상응(相應)한다는 것을 뜻한다.
제4구의 유식의 실성(實性)이란 변계(遍計)와 의타(依他) 두 성(性)은 모두 실성(實性)이 아니며 오직 원성(圓性)만이 제법의 실성임을 말한 것이다. 본송(本頌)에서 승의(勝義)·진여(眞如)·유식실성(唯識實性)으로 표기한 것은 모두 한가지 같은 뜻이다.
이전의 24송까지는 유식의 상(相)을 밝혔고 본송(本頌)에서는 유식의 성(性)을 밝힌 것이다. 성(性)은 상(相)이 의지하는 내적 본체(內的本體)요 상(相)은 성(性)에 의해 현출(顯出)되는 외적 작용(外的作用)이다.
송문(頌文)의 제1송으로부터 24송까지는 유식의 상(相)을 밝혔고 본 25송에서는 유식의 성(性)을 밝히고 다음 26송으로부터 제30송까지는 유식의 위(位)를 밝혀 수증(修證)의 경계를 설명하여 수행자로 하여금 먼저 이치를 깨닫고 이치에 부합한 실천의 방법을 제시한 것이 이 유식30송이다.
제 26 송
乃至未起識 求住唯識性
於二取隨眠 猶未能伏滅
또한 순결택식(順決擇識)을 일으키지 않고 유식의 실성(實性)에 주(住)하고자 한다면 능취(能取)와 소취(所取)인 2취(二取)의 수면(隨眠)에서 아직 능히 복멸(伏滅)되지 않는다.
전 송(頌)에서 이미 유식(唯識)의 실성(實性)을 알고 유식(唯識)을 닦아 유식의 진의성(眞義性)에 주(住)하려고 한다면 반드시 먼저 능취(能取)와 소취(所取)의 2취수면(二取隨眠)을 극복해야 한다. 만약 2취수면(二取隨眠)을 극복하지 못하고 유식(唯識)의 실성(實性)에 주(住)하고자 한다면 마치 잠자면서 꿈을 마음대로 할 수 없듯이 유식(唯識)의 실성(實性)에 주(住)하는 것이 불가(不可)하다.
이 송(頌)의 요지는 유식의 실성(實性)에 주(住)하고자 하는 발심 수행자가 극복해야할 바를 가리킨 송구(頌句)로서 5위(五位)의 수행계차(修行階次) 중 자량위(資量位)에 해당된다.
제1구의 미기식(未起識)은 분별2집(分別二執)을 끊어 분별심이 일어나지 않음을 뜻한 말로서 이미 유식(唯識)의 실성(實性)을 알고 분별망식(分別妄識)을 복단(伏斷)하는 계위(階位)가 되므로 수행할 수 있는 자량(資量)을 갖추었음을 뜻한다.
제2구의 구주유식성(求住唯識性)의 뜻은 유식(唯識)의 실성(實性)에 주(住)하기를 희구(希求)한다는 뜻으로 유식(唯識)의 실성(實性)에 안주(安住)하기를 원한다는 뜻이다.
여기서 유식(唯識)의 실성(實性)이란 원성실성(圓成實性)으로 경계에 집착하여 변계(遍計)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경계에 집착하여 변계(遍計)하지 않는 원성실성(圓成實性)에 안주(安住)하고자 하여 분별2집(分別二執)의 식(識)을 일으키지 않는다는 것 자체가 곧 수행이다. 그러나 이렇게 발심한 수행자가 반드시 2취수면(二取隨眠)을 극복해야 하지만 아직 여기에서는 능히 복멸(伏滅)되지 않았음을 밝힘으로써 2취수면을 극복해야 함을 계시(啓示)한 것이다.
제3구의 2취수면은 아(我)와 법(法) 곧 능취(能取)와 소취(所取)인 2취수면이라는 뜻이다. 수면(隨眠)이란 번뇌의 다른 이름이니 번뇌가 늘 중생을 따라다니므로 수(隨)라 하고 그 작용이 아득하여 마치 잠자는 상태와 비슷하므로 면(眠)이라 한다. 또 이를 번뇌종자라고도 하는 바 온갖 번뇌의 종자는 항상 중생을 따라다니며 제8식 중에 면복(眠伏)해 있으므로 수면(隨眠)이라 한다.
제4구의 미능복멸(未能伏滅)에서 복(伏)은 복단(伏斷)이 뜻이고 멸(滅)은 단멸(斷滅)의 뜻이다. 수행자가 분별2집(分別二執)은 이미 복단(伏斷)하였으나 아직 번뇌종자를 단멸(斷滅)하지 못한 상태를 말한다. 이 수행위(修行位)를 수행 5위(五位) 중 첫 번째인 자량위(資量位)라 한 것은 자량이란 준비한다는 뜻으로 먼 길을 떠나려면 반드시 풍족한 자재(資財)와 양식(糧食)을 준비해야 하듯이 불도(佛道)를 닦아 구경열반지(究竟涅槃地)에 이르고자 한다면 무량한 복덕과 지혜를 갖추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 송(頌)은 불과(佛果)를 이루고자 하는 자량(資糧)이 곧 분별심과 번뇌종자를 끊음에 있다는 것을 일러준 송(頌)이다.
제 27 송
現前立少物 謂是唯識性
以有所得故 非實住唯識
현전(現前)의 경계에 어떤 소견[少物]을 세워 이것을 유식성(唯識性)이라고 여기면 이는 이미 소득의 마음이 있기 때문에 실제로 유식에 정주(定住)함이 아니다.
전 송(頌)에서 이미 수행자가 발심하여 결택식(決擇識)을 일으켜 유식성(唯識性)에 주(住)하고자 희구함을 자량위(資糧位)라 했으며 이 송(頌)에서는 발심을 더욱 분발하여 증진수행(增進修行)할 것을 설명하여 이를 가행위(加行位)라 한다.
보살이 무엇을 어떻게 수행하여 가행정진(加行精進)할 것인가를 안다면 이미 수행의 바른 길에 도달했음을 알 수 있다. 보살은 수행의 도상(途上)에서 4심사관(四尋思觀)이라는 관법(灌法)을 닦아 소취(所取)인 경계(境界)가 공(空)함을 깨닫고 거듭 4여실지(四如實智)를 닦아 능취(能取 : 마음경계)와 소취(所取)가 모두 공(空)함을 깨닫는다.
이렇듯 4심사관(四尋思觀)을 닦아 4여실지(四如實智)를 증득(證得)하는 과정에서 반드시 4선근(四善根)의 위(位)를 체험하게 되는데 4선근(四善根)이란 난위(暖位)·정위(頂位)·인위(忍位)·세제일위(世第一位) 등이다.
이와 같이 수행자가 4심사관(四尋思觀)과 4여실지(四如實智)를 닦아 향상된 도[見道]로 취향(趣向)해 감으로써 4선근(四善根)을 체험하면서 점차 무루지(無漏智)를 증득(證得)하는 것이다.
먼저 4심사관(四尋思觀)을 말하자면 제법의 명(名)·사(事)·자성(自性)·차별(差別)에 대하여 심사관찰(尋思觀察)함을 말한 것으로 세분하면 다음과 같다.
명심사관(名尋思觀) : 세간(世間)과 출세간(出世間)의 모든 중생(衆生)·축생(畜生)·사물(事物)은 모두 명칭이 있으나 명칭은 본래 가립(假立)된 것일 뿐 사물의 본체와는 무관하다는 사실은 이미 지실(知悉)하는 바이다.
가령 책을 책이라 하지 않고 다른 이름을 붙였으면 다른 이름이 되듯이 모든 명칭은 가립(假立)했을 뿐 실(實)이 아니다.
그러나 중생은 항상 명(名)으로 인하여 집착을 일으켜 희로애락(喜怒哀樂)의 감정이 생기고 서로 다투고 모함하게 된다. 그러므로 수행자는 오직 가명(假名)일 뿐 실(實)이 아닌 명(名)에 대해서 응당 심사관찰(尋思觀察)하여 필경 공(空)임을 깨달아 명상(名相)에 동하지 않고 실(實)에 주하는 것이 명(名)을 심사관찰(尋思觀察)하는 명심사관(名尋思觀)이다.
사심사관(事尋思觀) : 사(事)는 작사(作事)의 뜻으로 일체 사물을 가리킨다. 예를 들어 말하자면 5온(五蘊)·12처(十二處)·산(山)·하천(河川)·사람·짐승·집 ·가구·결혼·상례(喪禮)·농업(農業)·공업(工業) 등이 모두가 사(事)에 해당된다.
그러나 이러한 사물이나 형식 등은 모두 인연에 의해 생(生)하고 유식에 의해서 발현(發現)되므로 인연과 식(識)을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다. 자성(自性)이 존재하지 않을 뿐 아니라 찰나에 변멸(變滅)하므로 당체가 곧 공(空)이며, 존재하는 것 같으나 실로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보살이 허망하게 변현(變現)된 사(事)에 대하여 심사관찰(尋思觀察)하여 그 외형적 가상(假相)에 미혹되지 않음을 사심사관(事尋思觀)이라 한다.
자성심사관(自性尋思觀) : 자성(自性)이란 매1법(每一法)과 1신상(一身上)의 자체성(自體性)이며 독립성(獨立性)이다. 각각의 법(法)과 개체(個體)마다 그 독립성이 존재한다면 이 독립성은 다른 법[他法]의 자성과는 공통되지 않는다. 반면에 각각의 법에 모두 보편성이 존재한다면 이 보편성은 서로 같아서 타법(他法)의 자성(自性)과 공통적이 될 것이다.
그러나 자성은 본래로 무소유이며 필경공(畢竟空)이므로 오로지 허망한 분별만이 있을뿐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수행자는 제법의 자성이 허공과 같음을 심사관찰(尋思觀察)하여 허환의 집착을 여의는 것을 자성심사관(自性尋思觀)이라 한다.
차별심사관(差別尋思觀) : 차별이란 명(名)과 사(事) 갖가지 차별상(差別相)을 말한다. 명(名)의 차별(差別)에는 음(音)과 의(義)가 있고, 사(事)의 차별(差別)에는 대소(大小)·방원(方圓)·고저(高低)·선악(善惡)·유루(有漏)·무루(無漏) 등이 있으며, 또한 생주이멸(生住異滅)의 부동(不同)함과 무량(無量)한 차별(差別)을 함유하고 있다.
그러므로 보살이 수행할 때 제법(諸法)의 차별상(差別相)에 대하여 심사관찰(尋思觀察)하여 차별상(差別相)의 실상을 깨닫는 것을 차별심사관(差別尋思觀)이라 한다.
이상에서 4심사관(四尋思觀)을 닦아서 얻어지는 지혜를 4여실지(四如實智)라 하는 바 여실(如實)이란 실성(實性)과 같다는 뜻으로 제법(諸法)의 실성(實性), 곧 진여(眞如)를 말한다.
모든 법(法)을 심사관찰(尋思觀察)하여 지혜를 얻고 지혜가 생기면 모든 법의 명(名)·사(事)·자성(自性)·차별(差別)이 실로 진여실성(眞如實性)과 같아 공(空)이며 무소유임을 깨닫고 모든 분별을 여의므로 근(根)·진(塵)·의 경계가 아니요, 오직 유식실성(唯識實性)일 뿐이다.
4심사관(四尋思觀)을 닦음으로써 4여실지(四如實智)를 얻고 4여실지(四如實智)를 얻음으로써 유식실성(唯識實性)을 깨달을 수 있다. 따라서 4관(四觀)·4지(四智)는 유식(唯識)을 수행하는 기본방편이다.
수행자가 열심히 심사(尋思)하지만 아직 결택(決擇)되지 않았을 때를 관(觀)이라 하며 이러한 과정을 인위(因位)라 하고 관(觀)에 의해 지(智)가 생(生)하고 일체법을 결정적으로 요해(了解)하여 성공의 단계에 도달하게 되면 이것을 과위(果位)라 한다.
4심사관(四尋思觀)을 닦아 명(名)·사(事)·자성(自性)·차별(差別)이 모두 유식(唯識)에 의해 생긴 것이며 방편으로 이름 붙여졌기 때문에 식(識)을 떠나서는 일체법이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러한 지혜를 무상지(無上智)라 하며 무상지는 모든 법의 실성(實性)과 조금도 차이가 없기 때문에 여실지(如實智)라 한다. 수행자는 모름지기 4심사관(四尋思觀)을 닦아 4여실지(四如實智)를 얻어서 일체 허망분별심을 여의는 것으로 불도(佛道)의 본분(本分)을 삼는다.
4심사관(四尋思觀)과 4여실지(四如實智)를 수행함에 반드시 위차(位次)가 있으니 이를 4선근(四善根)이라 한다. 4선근은 난위(暖位)·정위(頂位)·인위(忍位)·세제일위(世第一位)이다. 이 4위(四位) 중에서 난위(暖位)와 정위(頂位)는 4심사관을 닦아 일체만법의 경계인 소취(所取)가 공(空)임을 관(觀)하고 인위(忍位)와 세제일위(世第一位)는 4여실지를 닦아 능취(能取)와 소취(所取)가 모두 공(空)임을 관(觀)하는 것이다. 4선근을 약설(略說)하면 다음과 같다.
난위(暖位) : 이 위(位)는 '성유식'에서 명득정(明得定)에 의해 하품(下品) 심사관을 닦아 소취(所取)가 없음을 난위(暖位)라 한다고 했다. 여기에서 명(名)·사(事)·자성(自性)·차별(差別) 네 가지가 모두 분별식에 의해 잠시 있다가 없어지고 마는 것임을 깨닫는 것이다. 이 위(位)는 광명난법(光明暖法)에 의해 이루어지므로 난위(暖位)라 한다.
정위(頂位) : 이 위(位)는 '성유식'에서 명득정(明得定)에 의해 상품(上品) 심사관을 닦아 소취(所取)가 없음을 정위(頂位)라 한다고 했다. 관(觀)이 더욱 깊어져서 광명이 증장되고 지혜가 향상됨을 말한다. 이 위(位)는 명상(明相)의 광염(光炎)이 더욱 치성하기 때문에 정위(頂位)라 한다.
인위(忍位) : 이 위(位)는 '성유식'에서 인순정(印順定)에 의해 하품여실지(下品如實智)를 닦아 소취(所取)가 없는 곳에 정념(定念)을 이루고 능취(能取)가 없는 가운데 또한 정념(定念)을 즐기므로 인위(印位)라 한다 하였다. 이 위는 정념(定念)을 이루고 즐기므로 아직 인력(忍力)이 더 필요하므로 인위(忍位)라 한다.
세제일위(世第一位) : 이 위(位)는 '성유식'에서 무간정(無間定)에 의해 상품여실지(上品如實智)를 닦아 능취(能取)와 소취(所取)가 공(空)임을 깨달아 세제일위(世第一位)라 한다 하였다.
이 위는 견도위(見道位)에 이르러 중간에 끊어짐이 없으므로 무간정(無間定)을 이루었고 이를 세제일위(世第一位)라 한다. 이미 상품여실지를 발하여 능취와 소취가 모두 공(空)임을 인지(印持)했으나 세간법을 벗어나지 못했으므로 세제일(世第一)위라 한다.
송(頌)에 입소물(立少物)이라 한 것은 소견(所見)을 말한다. 마음은 원래 언설·심연(心然)·형상(形相)을 여의었기 때문에 소물(少物)을 세워 유식성이라 여긴다면 유식실성(唯識實性)일 수 없음을 밝힌 것이다.
제 28 송
若時於所緣 智都無所得
爾時住唯識 離二取相故
만약에 소연경(所緣境)을 대할 때 무분별지(無分別智)로 (인식하여) 도무지 얻을 바가 없으면 그 때 비로소 진여(眞如)를 증득(證得)하여 유식의 진승의성(眞勝義性)에 주(住)하게 되리니 능취(能取)와 소취(所取)의 두 분별상(分別相)을 여의었기 때문이다.
이 송(頌)은 수행자가 발심하여 자량위(資量位)를 거쳐서 가행위(加行位)에서 더욱 증진되고 이 위(位)에서 통달(通達)의 경지에 이르게 됨을 밝혔기 때문에 이 위(位)를 통달위(通達位) 또는 견도위(見道位)라고 한다.
통달위(通達位)는 자량위(資量位)를 거쳐 가행위(加行位)에 이르러서도 일체이치(一切理致)에 대한 소지장(所知障)이 있어서 유식성(唯識性)을 요달하지 못하고 진여경계(眞如境界)를 증득하지 못하지만 가행위(加行位)의 마지막 경지인 세제일위(世第一位)에 이르러 망념의 구름이 걷혀 본래 존재하는 달을 볼 수 있으므로 통달위(通達位)라 한다.
통달(通達)이란 소지장(所知障)이 없어지고 2공(二空)에 의해 현현(顯現)된 진여(眞如) 즉 보리실성(菩提實性)을 요해(了解)한다는 뜻이다. 이 위(位)를 견도위(見道位)라고도 하는 것은 요해(了解)가 곧 견(見)이며 실성(實性)이 곧 도(道)이기 때문이다.
제2구의 지도무소득(智都無所得)은 지(智)는 무분별지(無分別智)를 말한 것이니 능(能)·소(所)·2취(二取)가 공(空)임을 관해서 2공진여(二空眞如)를 실증(實證)하여 심(心)과 경(境)을 모두 여의면 한 법도 얻을 것이 없으니 이것이 곧 무분별지(無分別智)요, 또는 근본지(根本智)라고도 한다. 근본지를 성취하면 모든 경계(所緣境)에 무소득(無所得)일뿐 아니라 능관(能觀)의 지(智)도 무소득이므로 지도무소득(智都無所得)이라 한다.
제4구의 이2취상고(離二取相故)는 마음[心]과 경계[境]가 모두 공하면 지(智)는 오직 직관적 작용일 뿐이다. 이러한 무분별지(無分別智)는 만류(萬類) 중에 차별(差別)을 여의므로 이를 진리(眞理)라 하고 이 경지에서 유식성(唯識性)에 주(住)하게 된다. 능(能)·소(所) 2취(二取)의 상(相)을 여의면 만법은 모두 진여(眞如)이고 평등(平等)이며 이 평등진여가 곧 유식의 실성(實性)이다.
수행자가 도(道)를 닦는 과정에서 자량위(資量位)·가행위(加行位)·통달위(通達位)를 경과하게 되는데 이 위(位)가 곧 3현위(三賢位)이다. 이 위(位)는 유식의 실성(實性) 곧 진여법성(眞如法性)이기 때문에 능과 소의 2취 분별상(分別相)을 여읜 그 자리이다.
제 29 송
無得不思議 是出世間智
捨二粗重故 便證得轉依
무분별지(無分別智)는 무득(無得)이며 부사의(不思議)이며 출세간(出世間)의 지(智)이다. 번뇌장(煩惱障)과 소지장(所知障)이라는 두 가지의 조중(粗重)한 종자를 버릴 수 있기 때문에 보리(菩提)·열반(涅槃)이라는 두 가지 전의과(轉依果)를 증득할 수 있다.
이미 28송에서 언급한 자량(資量)·가행(加行)·통달(通達)의 각 위(位)는 아직 수도(修道)의 준비과정이라 할 수 있으며 이 송(頌)에 이르러 비로소 진정한 수도과정에 입문(入門)하게 되므로 이 위(位)를 수습위(修習位)라 한다.
수행자가 유식성(唯識性)을 깨달으면 이미 전도지견(顚倒知見)에 속한 번뇌를 깨끗이 소제할 수 있다. 전도지견(顚倒知見)은 10사(十使) 번뇌를 말한 것으로 앞에서 말한 3현위(三賢位)를 거쳐 이미 10사(十使) 번뇌 가운데 5리사(五利使)는 여의었으나 아직 5둔사(五鈍使)가 남아 있는 것을 본송(本頌)의 수습위(修習位)에서 이를 멸진(滅盡)하게 된다.
10사(十使) 번뇌의 5리사(五利使)와 5둔사(五鈍使)는 이미 12송(十二頌)에서 밝혔으므로 여기서는 대략 정리하고자 한다.
5리사(五利使)는 6번뇌(六煩惱) 곧 탐(貪)·진(瞋)·치(痴)·만(慢)·의(疑)·악견(惡見) 중 맨 끝의 악견(惡見)에 속하는 번뇌로서 이치를 미혹하므로 견혹(見惑)이라고도 하는 번뇌이다. 이렇듯 잘못된 견해에 5종(五種)이 있어서 5리사라 한다.
① 신견(身見) : 아견(我見)이다. 일체만법(一切萬法)이 환(幻)인 줄 알지 못하고 아(我)가 실유(實有)한다고 여기는 견(見)이다.
② 변견(邊見) : 인간이 한번 죽으면 모두 멸하여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여기는 것을 말한 것으로 이를 단견(斷見)이라 한다.
③ 사견(邪見) : 인과를 믿지 않고 모두를 운명에 맡겨서 방종, 방만한 생각을 하는 것을 말한다.
④ 견취견(見取見) : 자신의 견해만을 고집하는 것을 말한다.
⑤ 계금취견(戒禁取見) : 잘못된 계율이나 법을 집착하는 견해이다.
이상과 같은 다섯 가지 견해가 너무 강해서 이를 악견(惡見)이라 하는데 수행자가 먼저 악견(惡見)을 여의고 견도통달(見道通達)의 위(位)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본송(本頌) 수습위(修習位)에서는 앞에서 이미 악견(惡見)을 여의었으므로 탐(貪)·진(瞋)·치(痴)·만(慢)·의(疑)의 5둔사(五鈍使)는 사상(事上)의 구염(垢染)에 속하므로 끊기가 매우 어려워서 크게 닦아 수습해야 하는 수습위(修習位)에서 멸진(滅盡)할 수 있고 이를 멸진해야 비로소 성불의 문(門)에 들어설 수 있는 것이다.
1구(一句)에서 무득부사의(無得不思議)라 한 것은 번뇌장(煩惱障)을 끊어서 대열반을 증득하고 소지장(所知障)을 끊어서 대보리를 증득하기 위해서는 무분별지(無分別智)를 수습해야 한다. 이 지(智)는 능취(能取)와 소취(所取)를 멀리 여의었으므로 무득(無得)이라 하며 그 묘용(妙用)을 헤아리기 어려우므로 부사의(不思議)라 한다.
2구(二句)의 시출세간지(是出世間智)는 무분별지(無分別智)는 18계에 주(住)함이 없고 견문각지(見聞覺知)를 떠났기 때문에 세간지(世間智)가 아니다. 또 능취(能取)와 소취(所取) 수면(隨眠)이 세간의 근본인데 이를 끊을 수 있기 때문에 출세간지(出世間智)라 한다. 이 근본지(根本智)는 지(智)의 체(體)가 무루(無漏)이기 때문에 진여(眞如)를 증득한다. 이 송구(頌句)에 세 가지 뜻이 있으니 첫째는 체무득(體無得)이요, 둘째는 용부사의(用不思議)이며, 셋째는 성출세간(性出世間)이다.
3구(三句)에서 조중(粗重)이라 한 뜻은 번뇌장(煩惱障)과 소지장(所知障)의 종자 즉 2취습기(二取習氣)를 말한 것이다. 이것은 분단생사(分段生死)와 변이생사(變異生死)의 근본으로 세(細)도 아니고 경(輕)도 아니므로 거칠고 무겁다는 뜻으로 조중(粗重)이라 한 것이다.
4구(四句) 맨 끝에 전의(轉依)라는 뜻은 전(轉)은 굴린다는 글자인데 여기에 굴려서 버린다는 뜻과 굴려서 얻는다는 두 가지 뜻이 있어 이를 전사(轉捨)·전득(轉得)이라 하고 의(依)는 소의(所依)의 뜻으로 곧 제8식의 소의처(所依處)를 말한다. 종자의 입장에서 말하면 제8식은 그 안에 번뇌와 소지 2종의 종자를 저장하고 있으며 또한 보리와 열반의 종자도 저장하고 있다.
여기서는 제8식을 의지하여 번뇌와 소지 2장(二障)의 종자를 버리고[轉捨] 열반과 보리의 종자를 얻으므로[轉得] 두 가지 조중(粗重)을 버리고 보리 열반의 두 가지 전의과(轉依果)를 증득함을 말한다. 이상 2조중(二粗重)을 버리고 2전의(二轉依)를 증득하여 불과(佛果)를 이루기 위하여는 10바라밀을 닦아 10지(十地)에 이르러야 한다.
제 30 송
此卽無漏界 不思議善常
安樂解脫身 大牟尼名法
이것이 곧 번뇌가 없는 무루(無漏)의 경계이며 부사의(不思議)이며 선(善)이며 영원(常)함이며 안락(安樂)이며 해탈신(解脫身)이며 대모니(大牟尼)이며 법신(法身)이라 한다.
이 송(頌)은 유식 30송의 마지막 송(頌)으로서 구경위(究竟位)에 해당되는 송(頌)이다. 구경(究竟)은 최종의 자리를 말한 것으로 지극(至極)이라는 뜻이며 수행자가 지극(至極)에 이르면 이것을 성불이라 한다. 그러므로 구경위(究竟位)는 수행자의 최고경지 곧 불위(佛位)를 의미한다.
첫 구의 차(此)의 뜻은 29송에서 언급한 2전의과(二轉依果)로서 번뇌(煩惱)와 소지(所知) 2장(二障)의 종자를 끊어 버리고 보리(菩提)와 열반(涅槃)의 종자를 전득(轉得)한다는 뜻을 이어서 차자(此字)를 써서 이것이 곧 무루계 등등이라 하였다.
무루계(無漏界)는 누(漏)의 뜻이 번뇌(煩惱)이므로 무루(無漏)는 무번뇌(無煩惱)이다. 또 누(漏)는 누수(漏水) 누락(漏落)의 뜻이며 무루(無漏)는 누수(漏水) 없는 마음이 삼계육진(三界六塵)에 누락(漏落)되지 않음을 뜻한다. 어떠한 마음이 그러냐 하면 번뇌(煩惱)와 소지(所知)의 두 장애(障碍)를 멀리 여의고 보리(菩提)와 열반(涅槃)을 증득(證得)한 이 사람이 그러하다는 뜻이다.
이와 같이 보리·열반을 성취한 이 사람의 세계는 누(漏) 없는 무루(無漏)의 세계이며, 헤아릴 수 없어서 부사의(不思議)하며, 지고지선(至高至善)한 선(善)이며, 영원불멸(永遠不滅)하는 상(常)이며, 오로지 고통이 없어서 안락(安樂)이라 하며 탐진치(貪嗔痴)에 얽매임이 없어서 해탈신(解脫身)이라 하며 어떠한 경지에서도 부동(不動)하므로 대모니(大牟尼)라 하며, 심지어는 항구불멸(恒久不滅)의 뜻으로 법(法)이라 한다 하였으니 이것이 곧 수행자가 이르러야 할 목적지이며 모든 불보살의 한결같은 경지이다.
무루계(無漏界)라고 한 계(界)는 장(藏)의 뜻으로 그 안에 무변하고 희유한 대공덕이 존재(存在)하기 때문이며 또한 인(因)의 뜻이 있어서 세간법과 출세간의 모든 법(法)이 이로부터 나오고 잘못된 것을 버리고 선(善)을 행할 수 있는 묘(妙)가 이 속에 있으므로 계(界)를 법계(法界)라고도 하는 것이다.
2구(二句)의 부사의선상(不思議善常)은 역시 보리·열반을 전득(轉得)한 사람의 세계를 무루계(無漏界)라 하므로 무루계(無漏界)를 성취한 사람의 궁량이 무궁하여 부사의(不思議)하고 선(善)하고 영원(常)함을 말한 것이다.
부사의(不思議)란 심연상(心緣相)을 여읜 것을 불가의(不可議)라 하므로 심연(心緣)의 상(相)과 언설(言說)의 상(相)을 모두 여읜 것을 뜻한다. 선(善)이란 순수하여 때묻지 않은 법성(法性)이 모든 과오(過惡)를 여읜 것을 말하고 상(相)이란 영원한 법성(法性)이 변하지 않고 멸하지 않음을 말한다. 따라서 이 구(句)의 뜻은 보리·열반을 성취하고 무루계(無漏界)를 성취한 사람의 마음이 부사의(不思議)하고 선(善)하고 영원(常)함을 말한 것이다.
3구(三句)에서 말한 안락해탈신(安樂解脫身)이란 청정법계(淸淨法界)는 고통을 초래하는 번뇌가 없으므로 안락(安樂)이라 하고 모든 장애(障碍)와 속박을 멀리 여의었으므로 해탈신(解脫身)이라 한 것이다.
4구(四句)의 대모니명법(大牟尼名法)이란 모니(牟尼)는 적묵(寂默)의 뜻으로 언설동작(言說動作)과 심연분별(心緣分別)을 여읜 것을 말하고 법(法)이란 법신(法身) 또는 법성신(法性身)을 말한 것으로 이를 안락해탈신(安樂解脫身) 또는 대모니신(大牟尼身)이라 한다.
법신(法身)은 무상(無相)이지만 무상(無相)이라 말할 수도 없어서 거두어들이면 물러나서 은밀히 숨고 풀어놓으면 묘용(妙用)이 무궁하여 헤아릴 수도 없다. 이러한 것을 체용불이(體用不二)라 하는데 법신의 체(體)는 무상(無相)이요, 그 용(用)은 무불상(無不相)이기 때문이다.
법신(法身)은 3종류로 나눌 수 있다.
①은 자성신(自性身)이니 모든 부처님의 진정(眞淨)한 법계(法界)를 말한 것으로 모든 상(相)을 떠난 적멸(寂滅)의 자리이며 일체법(一切法)이 평등(平等)한 실성(實性)의 자리이며 체(體)가 무량(無量)한 공덕(功德)을 갖춘 자리이다.
②는 수용신(受用身)이니 수용신에는 두 가지 뜻이 있다. 만약에 3아승지겁 동안 수행하여 복(福)을 짓고 혜(慧)를 닦아서 즐거움이 충만한 법락(法樂)을 향수(享受)하면 이를 자수용신(自受用身)이라 하고, 만약에 순수한 극락세계인 정토(淨土)에 안주(安住)하면서 10지(十地)에 들어 수행하는 보살을 위하여 대신통력을 발현(發現)하고 정법(正法)을 설하여 보살의 의심을 풀어주면 이를 타수용신(他受用身)이라 한다.
③은 응화신(應化身)이니 응화신(應化身)은 모든 부처님께서 중생계(衆生界)에 응(應)하여 중생을 교화하시는 것을 뜻한 것으로서 모든 부처님께서 자비와 지혜의 마음으로 천상세계와 인간세계 내지는 귀신의 세계와 축생의 세계까지도 유(類)에 따라 화신(化身)하지 않는 곳이 없음을 말한다. 또한 처하는 곳이 정토(淨土)이든 예토(穢土)이든 간에 아직 10지(十地)에 들지 못한 이승범부(二乘凡夫)를 위하여 때와 곳에 따라 설법하여 이익과 즐거움을 주고 해탈(解脫)을 얻게 하는 모두가 응화(應化)에 속한다.
이와 같이 3종(三種)을 갖춘 법신(法身)을 성취하고자 발심한 이는 이전의과(二轉依果)를 명심하여 능장(能障)·소장(所障)의 번뇌 곧 안에서 일어나는 번뇌와 밖으로부터 오는 번뇌를 전사(轉捨)하여 보리(菩提)와 열반(涅槃)을 전득(轉得)하는 수행을 끝없이 반복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하겠다.
전사(轉捨)·전득(轉得)의 뜻을 쉽게 이해하자면 마음속에 있는 모든 악을 버리고 참마음을 가꾸는 것이 곧 전사(轉捨)·전득(轉得)이니 이를 수행하는 것은 10바라밀(十波羅蜜)을 닦아 10지(十地)에 드는 것을 말한다.
유식 30송의 대강을 요약하면 상(相)·성(性)·위(位)를 밝히고 체계화한 것이 1송에서부터 24송까지는 유식의 상(相)을 밝혔고 25송에서는 유식의 성(性)을 밝혔고 26송에서 30송까지는 유식의 위(位)를 밝혔다.
유식의 상(相)이란 우주 만유의 현상과 식(識)의 심소(心所)를 말한 것으로 5변행심소(五偏行心所) 등 55심소(五十五心所)와 심소대상인 만법(萬法)을 뜻한다.
그리고 유식의 성(性)이란 모든 법의 으뜸인 진여(眞如)의 실성(實性)·계탁(界度)하고 집착하지 않는 모든 법의 법성(法性)·담담하고 항상 고요한 유식의 실성(實性)인 원성실성(圓成實性)을 말한다.
유식의 위(位)란 수행자의 수행 계위(階位)를 말한 것으로서 수행자가 자량(資糧)으로 지녀야 할 10주(十住) 10행(十行) 10회향(十廻向)의 30위를 닦아 준비하는 자량위(資糧位)와 4선근(四善根)을 닦는 가행위(加行位)와 2공무아(二空無我)의 도리를 닦는 통달위(通達位)와 10지(十地)를 닦아 10성(十聖)의 지(地)에 이르는 수습위(修習位)와 3혹(三惑)이 모두 끊어지고 대각(大覺)이 원만하여 자각각타(自覺覺他)의 공이 이루어진 구경위(究竟位) 등을 뜻한다.
이 모두가 전사(轉捨)·전득(轉得)의 과정을 설명한 것이니 오직 마음이란 상(相)이 없고 실(實)도 없지만 닦아 깨달음으로써 진여법성(眞如法性)을 이루어 고통의 속박에서 벗어나 변하고 멸함이 없는 대열반(大涅槃)에 들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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