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無比스님 육조단경 제 34 강 - 定慧品

2007. 6. 15. 22:46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화엄경·보현행원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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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善知識아 云何立無念爲宗고 只緣口說見性이니 迷人은 於境上에 有念하고 念上에 便起邪見하야 一切塵勞妄想이 從此而生하나니 自性이 本無一法可得이어늘 若有所得이라하야 妄說禍福하면 卽是塵勞邪見이라 故此法門은 立無念爲宗이니라


   善知識아 無者는 無何事며 念者는 念何物고 無者는 無二相이니 無諸塵勞之心이며 念者는 念眞如本性이니 眞如는 卽是念之體요 念은 卽是眞如之用이라 眞如自性이 起念이요 非眼耳鼻舌이 能念이니 眞如有性일새 所以起念이어니와 眞如若無하면 眼耳色聲이 當時卽壞니라


   善知識아 眞如自性이 起念하면 六根이 雖有見聞覺知나 不染萬境하고 而眞性이 常自在니 故로 云能善分別諸法相호대 於第一義에 而不動이라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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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善知識(선지식)아 云何立無念爲宗(운하입무념위종)고→ 선지식이여, 어떻게 해서 無念을 세워서 을 삼느냐? 이 종 자는 宗敎(종교) 할 때도 이 宗자. 宗旨(종지)할 때도 이 宗자. 여기서도 爲宗 하는데 이것은 마루 종, 용마루 종자지요. 한 건물의 가장 중심이 되는 정점을 용마루라고 그러는데, “으뜸이다”그 말입니다. 우리말로 하면 가장 으뜸이 되는 것. 宗敎(종교)하면 가장 으뜸이 되는 가르침이라는 뜻이지요. 無念을 세워서 宗을 삼느냐? 으뜸을 삼느냐?


   只緣口說見性(지연구설견성)이니→ 다만 사람들이 입을 인연해서 견성을 말하는 그런 迷人(미인)은→ 미혹한 사람은

於境上(어경상)에 有念(유념)하고→ 경계 위에서 有念하고, 생각이 있고, 그러니까 말로만 견성을 이야기하는 그런 미혹한 사람. 깨닫지 못한 사람을 “迷人”그래요. 미혹한 사람은 경계 위에서 생각을 두고,


   念上(염상)에 便起邪見(편기사견)하야→ 생각 위에서, 생각이 있으니까 다시 삿된 소견을 일으켜, 바른 소견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삿된 소견을 일으켜서,

一切塵勞妄想(일체진노망상)이→ 모든 塵勞. 번뇌지요. 妄想도 역시 번뇌이고... 번뇌=망상=진로. 같은 뜻입니다.


    從此而生(종차이생)하나니→ 여기서부터 생기나니,

自性(자성)이 本無一法可得(본무일법가득)이어늘→ 그런데 우리 마음을 두고 보자 이겁니다. 우리 마음은 자성자리이지요? 자성자리는 우리가 아무리 이렇게 활발하게 쓰고 있지마는, 그 쓰고 있는 마음의 근본을 가만히 추적해 들어가 보며는, 그 쓰고 있다는 것이 무슨 뜻인가 하면, 아침에 일어나서 이 순간까지, 이 몸이 필요하지 이 마음은 필요 없어요.


   망상. 생각을 많이 하면 그 망상. 망상은 필요하지 마음의 근본자리는 필요를 느끼지를 않습니다. 아침에서부터 지금까지 수많은 분별을 해왔지 않습니까? 예를 들어서 차를 타고 가면서, 간판 다 보고 지나가는 사람 다 보고 지나가는 차 다 보고, 얼마나 많은 분별을 합니까? 그거 생각 안 하는 것 같아도 카메라에 사물이 찍히는 것 하고 똑 같아요. 다 찍혀 있어요. 사실은...


   한번 본 것은 그냥 다 찍혀 있어요.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분별을... 하루만 하더라도, 하루 동안 우리가 마음이 작용해서 분별해온 것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렇게 수많은 작용을 하는 그런 입장이고, 그렇게 하더라도 도대체 그 작용이 어디서 나왔는가? 가만히 좌선을 하면서 그 근본을 찾아보면, 하나도 찾아지지가 않아요. 없다고요. 근본이 텅 비었어요. 그래서 하는 이야기입니다. 근본이 텅 비어 있다고요.


   그래서 경계 위에서 생각이 있고, 수많은 생각이 있는데 그 생각 위에서 또 사견을 일으켜서, 一切妄想塵勞가 거기서부터 나온다. 이겁니다. 그런데 근본을 찾아보면 없다. 本無一法可得이예요. 그 自性자리에는 한 법도 가히 얻을 것이 없어요. 아무리 찾아봐야 찾을 길이 없다. 이것은 우리가 중생이라서 못 찾는 것이 아니라, 석가 달마도 못 찾아내는 것입니다.


   왜냐? 근본이 텅 빈 것이니까요. 本無一法可得 이예요. 본래 한 법도, 어떤 한 가지도, 어떤 하나의 일도 거기서 손에 잡히는 것이 없습니다. 그러면서도 수많은 분별을, 수많은 작용을 일으킬 수 있는 것이 그것이 또 우리 마음입니다.


   그래서 心心心難可尋(심심심난가심) 이라. 마음. 마음. 마음이여, 가히 찾기 어렵구나. 하면서 달마스님이 하신 노래가 있지요. ‘좁을 때는 바늘도 용납 못하지만, 넓을 때는 마치 큰 바다와 같고, 큰 허공과 같다.’ 이런 이야기가 있듯이 우리 마음의 문제는 정말 불가사의 한 것이지요.


   若有所得(약유소득)이라하야→ 만약에 얻은바가 있다.

本無一法可得(본무일법가득)이거든요.→ 얻을 바가 없거든요. 찾아지지가 않는다, 이거요. 그런데 찾아질 것이 있다라고 해가지고,

若有所得(약유소득).→ 만약에 소득이 있다 해가지고서,

妄說禍福(망설화복)하면→ 망령되게 마음에서부터 재앙과 복이 있다. 라고 이런 이야기를 할 것 같으면 그것은,


   卽是塵勞邪見(즉시진노사견)이라塵勞. 망상이고 삿된 견해다. 이겁니다. 우리 마음의 근본자리에는 복이니 무슨 재앙이니 하는 것이 본래 없는 자리입니다. 그런데 복이니 재앙이니 하는 것이 그러면 아예 없는 거냐?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에요. 그것은 가지에 달린 것입니다. 가지에 달린 것이 복이고 재앙이고, 일체 인연으로 인해서 잘 살고 잘 못살고, 잘 나고 못나고 무슨 출세하고 못하고, 이런 것들은 그 근본 마음뿌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가지. 저 밖에 나와 가지고 우리 의식의 어떤 그 가지 역할이라고 할 수 있는, 그 자리에 달린 것이지요.


   그것은 인연에 의해서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고, 우리가 인연 짓는 대로 가는데 화복은 거기에 있는 것이지 마음의 근본자리에는 텅 비어 아무 것도 없어요. 아무 죄가 없습니다. 그래서 罪無自性從心起(죄무자성종심기)라. 죄는 자성이 없어요. 우리 마음작용에 의해서 생기는 거다. 그리고 아무리 큰 죄를 지은 사람이라 하더라도, 그 마음자리 깊은 곳에는 죄가 없다는 거예요. 가지에 달렸을 뿐 이예요.


   예를 들어서 감나무 가지에 감이 주렁주렁 아무리 많이 달렸어도, 가지에 달렸지, 뿌리에 그 감이 있는 건 아니거든요. 뿌리에는 뭐 잎도 없고 아무것도 없어요. 그와 마찬가지로 마음의 근본자리에. 자성자리에는 죄니, 복이니, 화이니 하는 그런 것이 없다. 하는 그런 이야기입니다.


   妄說禍福(망설화복)→ 망령되게 禍福을 말하면

卽是塵勞邪見(즉시진노사견)이라.→ 塵勞요 邪見이다. 저기 강물이 많이 흘러내려온 상태에서 하는 소리지요.

故此法門(고차법문)은→ 고로 이 법문은, 이러한 법문은

立無念爲宗(입무념위종)이니라無念을 세워서 을 삼는 것이다.

 

   육조스님의 법문은요. 상당히 고차원적인 법문이고, 법문으로 쳐도 아주 고급 법문이기 때문에, 이것이 보통 우리가 인과 이야기라든지, 선악 이야기라든지, 또 인연 이야기라든지, 연기. 이런 이야기 가지고 이해하려고 하는 상태에서는 납득이 잘 안 돼요. 말하자면 그 이전의 도리예요.


   그런 것은 많이 어떤 현실에 가까운 이야기라면, 無念의 法門이라고 하는 것은, 육조스님이 말씀하신 이런 것은, 그 뿌리. 아주 근원적인 그런 법문 이예요. 육조스님은 대개 그런 문제에 관심이 많고, 또 그것을 깨달았기 때문에 도인이라고 하는 것이고, 부처님 법맥을 이은 것이지, 무슨 자질구레한 연기의 도리나 인과의 도리나, 또는 업의 문제라든지 이런 현상에 대한 어떤 문제라든지, 또 5位 75法이라고 해서 우리의 어떤 마음상태 여러 가지 다양성의 문제라든지, 이런 것들은 깨닫지 못해도 설명할 수 있는 거예요.


   깨닫지 못해도 설명할 수 있는 것이고 그건 경전에 설명이 다 되어 있고요. 그건 또 어지간히 머리 쓰며는 이해가 가는 그런 가르침이거든요. 그런데 이런 無念의 法門이라고 하는 가르침은 육조스님이나 할 수 있는, 가르침이라고요. 우리 생각에 얼른 납득이 안 되지요. 뭐 마음속이 텅 비었다고 하는 것이 쉽게 납득이 안 됩니다.


   최소한 조금이라도 좌선을 해서 마음을 가만히 들여다봐야 돼요. 혼자 앉아서 가만히 들여다보는 그런 노력이 있어야 “아~! 마음의 근본 자리는 텅 비었구나! 그런데 텅 비었는데, 부지런히 여름날 푸른 하늘에 구름이 일어나듯이 끝없이. 끝없이 그냥 우리의 생각들이 텅 빈데 서부터 일어나는구나!” 그 참 묘한 것이지요. 텅 빈데 서부터 일어나는 것이...


   본래 우리 마음자리는 푸르고 붉고, 뭐 강이다 바다다 산이다 구름이다 하늘이다 이런 것이 없는데, 또 그것을 쫓아가면서 그것을 잘 분별해요. 혼동도 안 한다고요. 뭐 산을 바다라 하거나, 바다를 산이라 하거나, 이런 혼동도 안하고, 산은 산대로 분별하고 바다는 바다대로, 추우면 추운 거 분별하고, 더우면 더운 거 분별해요.


   그런데 우리의 근본 마음속에는, 그게 없어요. 아예 그런 것이 없다고요. 없는데도 그런 것을 다 일일이 분별해 내거든요. 거 없으니까 분별해 낸다고 하는 것입니다 또... 없으니까요. 만약에 그런 소지가 낱낱이 있으며는, 그것은 한계가 있다는 것이지요. 없으니까 전부 낱낱이 분별할 수 있다고 합니다.


   善知識(선지식)아 無者(무자)는→ 선지식아. 라고 하는 것은 뭐냐?

無何事(무하사)며→ 무슨 일이 없다는 것이냐?

念者(념자)는 念何物(념하물)고→ 생각이라고 하는 것은 무슨 사물을 생각 한다는 것이냐? 無者(무자)는 無二相(무이상)이니 라고 하는 것은 두 가지 모양이 없다는 것이다. 차별이 없다는 것이다. 하나라는 것이다. 평등이라는 것이다. 그 뜻 이예요.


   無諸塵勞之心(무제진노지심)이며→ 온갖 망상. 분별. 塵勞. 이런 것이 없다는 것이다. 망상분별 이 없다는 것이다.

念者(념자)는 念眞如本性(념진여본성)이니念者念眞如本性을 생각 하는 것이다.

眞如(진여)는眞如라고 하는 것은,

卽是念之體(즉시념지체)요→ 생각의 本體다. 이 말입니다. 그러니까 근본자리라는 것이지요.


   念(념)은 卽是眞如之用(즉시진여지용)이라→ 진여가 本體이고, 眞如의 어떤 작용이, 가지가 念인 것이지요.

眞如自性(진여자성)이 起念(기념)이요眞如自性이 생각을 일으킨다. 뿌리에서 가지가 난다. 이렇게 보면 되지요. 眞如自性이 생각을 일으키며... 우리가 體用 할 때도, 體가 眞如自性이라면, 念之體. 그랬지요? 用은 생각할 줄 아는, 이것저것 분별할 줄 아는 것이 用입니다. 體焉用焉(체언용언) 하는 표현하고 똑 같은 것이지요.


   非眼耳鼻舌(비안이비설)이 能念(능념)이니→ 눈 귀 코 혀, 이런 것이 能히 생각하는 것이 아니에요. 그것은 하나의 생각. 뭐 세상에는 분별할 것이 워낙 많으니까요. 분별할 수 있는 그 분야별로 기관이 따로 있어야 돼요. 그런데 그 기관만 있지, 정작 분별 할 줄 아는 것은 마음이 한다. 이겁니다. 眼耳鼻舌이 能히 생각하는 것이 아니고,

 眞如有性(진여유성)일새眞如의 성품이 있음 일새.


   所以起念(소이기념)이어니와所以로 생각을 일으켜, 그래서 냄새를 맡으면 코라는 기관이 있어서 그것을 분별해 내고, 어떤 꽃을 보면 눈이라는 기관이 그것을 분별해 내고, 우리의 마음자리, 성품자리가 있는데 그것이 그런 기관을 통해서 세상사를 분별해 낸다는 것입니다.


   眞如若無(진여약무)하면眞如가 만약에 없으며는,

眼耳色聲(안이색성)이 當時卽壞(당시즉괴)니라眼耳色聲이 바로 그 자리에서 곧 무너진다. 없다. 이겁니다. 우리 마음이 있으니까 눈이니 귀니 코니 하는 것이 인식이 되고, 또 소리니 사물이니 무슨 꽃이니 뭐 덥느니 춥느니 하는 것도 역시 인식이 되지, 우리 마음자리 없으면, 없는 겁니다. 그 자리에서 없는 거예요. 當時卽壞니라.


   善知識(선지식)아 眞如自性(진여자성)이 起念(기념)하면→ 진여자성이 생각을 일으키면,

六根(육근)이 雖有見聞覺知(수유견문각지)나六根= 眼耳鼻舌身意(안이비설신의)지요? 일반적으로 오관 그러는데, 그 오관에서 의식을 하나 더 합해 가지고,  “六根” 그래요. 불교의 분류가 아주 더 세밀 하지요. 그 여섯 가지 뿌리가 비록 見聞覺知(견문각지)함이 있으나,


   不染萬境(불염만경)하고→ 일만 경계에 물들지 않고, 바깥에 펼쳐져 있는 모든 사물과 사건들을 “萬境” 이라고 그래요. 거기에 우리가 물들지 아니하고,

而眞性(이진성)이 常自在(상자재)니→ 우리의 참 성품이 항상 自在함이니, 그러니까 眞如自性(진여자성)에서 생각을 일으킬 것 같으면 어떤 경계를 따르지 않고, 眞如自性에서 나올 것 같으면 거기에 걸리지 않는다. 이겁니다.


   故(고)로 云(운)→ 고로 경에 이르대 云자는 경에 이르대 입니다. 이것은 유마경 불국 품에 있는 게송이지요.

能善分別諸法相(능선분별제법상)호대→ 일곱 자 詩인데, 모든 현상들을 諸法相= 모든 현상들을 능히 잘 분별한다 이거예요. 꽃은 꽃. 잎은 잎. 하늘은 하늘. 구름은 구름. 김씨는 김씨. 이씨는 이씨. 잘 분별하되


   於第一義(어제일의)에 而不動(이부동)이라하시니라→ 第一義에 動하지 않는다. 第一義 라고 하는 것은 우리의 깨달음의 마음세계를, 열반의 세계. 覺(각)의 세계를 第一義 라 그래요. 第一義에는 아무런 동요가 없다. 이렇게 된 상태가 가장 바람직한 상태입니다. 우리는 무엇을 보면 통째로 마음뿌리까지 뒤흔들려요. 그런데 깨달음의 경계에 오른 사람. 다시 말해서 마음의 근본자리를 봐버린 사람은 어떤 사물은 사물대로 잘 분별해 내요.


   能善分別諸法相이라. 모든 현상을 능히 잘 분별하긴 하되 내 근본 마음자리, 그것은 전혀 동요가 없다. 깨달은 사람과 깨닫지 못한 사람의 차이가 거기 있는 거라고 하는 것입니다. 깨닫지 못한 사람은 마음뿌리까지 뒤흔들리고, 인생이 다 뒤흔들릴 판인데, 깨달은 사람은 아무리 어떤 현상을 보더라도 절대 동요가 없다.

 

   於第一義에 而不動이라 우리 다 같이 가지고 있는 마음인데, 그 마음이 깨달아 졌으면 第一義가 되고, 깨닫지 못했으면 아무것도 아닌 것이지요. 第一義. 깨달은 사람의 그 마음자리에는 아무런 동요가 없다. 이것은 아주 좋은 게송이지요. 이 14자로서 표현 다 해버렸습니다.


   부연해서 설명하기로 하면 아주 온갖 내용이 다 담겨 있지요. 깨닫지 못하면 온갖 현상에 그냥 뒤흔들리고, 너무 흔들리지요. 흔들려서 괴롭고 엉망이 되지요. 엉망이 되는데 제대로 마음을 본 사람은 그 마음자리 떡 지키고 있는 겁니다. 일부러 지키고 싶어서 지키는 것이 아니고 저절로 지켜져요. 그래서 바깥 현상에 전혀 동요가 없어요. 내가 그동안 사회적으로 쌓아놓았던 모든 것이 통째로 하루아침에 날아간다 하더라도, 태연자약 이예요. 그냥 태연자약...


   이런 것이 우리가 하루아침에 되진 않더라도, 자꾸 들어서 귀로 자꾸 스치고 지나가는 것을 “耳根因緣(이근인연)”이라고 그래요. 또 “人緣耳力(인연이력)”이런 말도 있어요. 강원에서 공부를 다 마치는 것을 이력을 다 마쳤다고 그래요. 그 “인연이력”이라는 것은 제대로 깊이 깨닫지 못하고 인연만 맺었다는 것입니다. 요즘 사람들 강원에서 공부하는 것이, 공부가 깊이가 없다 하는 뜻에서 인연만 맺는 공부라고 합니다. 인연 육조단경이라도 해 놔야죠. ㅎㅎㅎㅎㅎㅎ 인연 맺어 놓는 게 어딘데... ㅎㅎㅎ하하하하하하


   그래도 인연이력이라도 본 사람이 훨씬 달라요. 하하하하하하 4~5년 동안 귀동냥 이라는 것이 대단한 겁니다. 애들이 하나도 이해 못하더라도 옆에 앉히는 것이 좋아요. 머리 둔하고 도대체 못 알아듣는다고 내칠 것이 아닙니다. 그대로 옆에 앉혀놓고 듣도록 해야 돼요. 그러다가 어느 날 한마디의 말이 귀에 찡 울릴 때 가 있어요. 도통한 사람들이 그렇듯이...


   팔만대장경 다 외워 가지고 도통한 것이 아닙니다. 그 수많은 말이, 지나가다가 어느 날 한마디의 말이 귀에 찡 울릴 때 가 있다고요. 아무 것도 아닌 하찮은 이야기가 정말 가슴을 흔들어 놓을 때가 있어요.


   경허스님은, 일꾼들이 절의 논을 부치고 추곡을 갖다 주는 것이 마음이 떫었던지 갖다 주면서, “중들은 앉아서 먹으니까 죽어서 소 된단다.” 저희들끼리 이런 소리를 하는 거예요. 그 중에 한 사람이 절에 많이 다니고 공부도 많이 한 사람이 “아, 소가 되어도 콧구멍 없는 소만 되면 좋지.” 이런 이야길 했대요. 노장이 도량을 지나가다가 그 소리를 떡 듣고는, 거 아무것도 아닌 소리를 듣고는, 見性(견성). 깨달았잖아요.

  

   경허스님 오도송: 홀연히 콧구멍 없다는 말을 듣고, 삼천대천세계가 비로소 내 집이라고 하는 것을 깨달았다.   

無鼻孔(무비공): 콧구멍 없는 소. ←하찮은 소리입니다. 일꾼들끼리 농담하는 소리가 천하의 팔만대장경 어떤 이야기  보다도 경허스님에게는 값진 이야기가 돼버렸지요. 그렇다고요.

 

   또 어떤 데는, 복숭아꽃이 거기만 피나요? 봄이 되면 온 산천 다 피는데... 그런데 복숭아꽃 하나 핀걸 보고, 문득 도를 깨닫게 되었다고요. 복숭아꽃은 흔히 있고 하찮은 것인데, 그 순간 그 스님에게는 천하의 어떤 부처님의 법문보다도 값진 것이지요.


   그러니까 우리가 공부한다고 다 이해된다고 생각해서는 안 돼요. 이해할 필요도 없고... 그러다 보면 어느 날 한 마디 말이 내 인생을 흔들어 놓는 그런 말이 가슴에 와 닿을 때가 있다고요. 콧구멍 없는 소가 되면 좋다고 하는 그 말이, 무슨 말인지도 모르고 한 그 말이 경허스님에게는, 오늘 날 경허스님을 만들어 놓은 것이지요.


   참 이 불교의 세계라고 하는 것은 공부해보고 여러 가지 속을 들여다보면 신기하고 기기묘묘한 것이 많아요. 그래 불교세계에 발을 들여 놓은 여러 불자님들은 참 어마어마한 보물창고에 발을 들여 놓은거 하고 똑 같아요.

 

   善能分別諸法相(선능분별제법상)호대 於第一義(어제일의)에 而不動(이부동)이라. 우리는 못 깨달았지만 그래도 좀 흉내라도 내봐야지요.

 

   이런 거 못 쓰는 붓글씨로 라도 한 구절 떡 써서 벽에다 걸어놓고, 척 감상하면 기분 좋잖아요? 목석이 아니란 말 이예요. 善能分別이라. 잘 분별한다 이 말입니다. 모든 현상을 잘 분별해. 누구보다도 더 잘 분별해. 또록또록하게 총명하게 분별해요. 그러면서도 내가 거기에 끄달리지 아니해요.


   於第一義에 而不動이라. 第一義에 있어서 동하지 않는다. 내 마음자리에 있어서는 하나도 끄달리거나 움직이지 않는, 동요하지 않는다. 하는... 어느 날쯤 이렇게 될는지... ㅎㅎㅎㅎㅎㅎ 언제쯤 이렇게 될는지... ㅎㅎㅎㅎㅎ하하하하하하하하하. 

 

출처 : 염화실  글쓴이 : 대원성

출처 : 작은풀잎하나맘
글쓴이 : 아침햇살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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