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자 ‘마음’을 잡아라…서비스경쟁 치열

2007. 7. 17. 19:07일반/노인·의료·건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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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자 ‘마음’을 잡아라…서비스경쟁 치열

미국 의료업계에 ‘소비자 중심주의’(Consumerism) 운동이 거세게 불고 있다. 의사, 간호사 등 의료진은 물론 일반 행정직원들도 환자들에게 최고의 의료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친절운동과 시설개선사업을 적극 펼치고 있다.

<월스트리트저널>은 ‘병원의 새 트렌드’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미국 병원들은 환자들이 집처럼 안락한 분위기에서 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인터넷과 대형 평면TV도 설치하고, 개인공간도 넓히는 등 변화를 시도하고 있다”며 “병원 직원들로부터 기존의 고압적인 태도나 불친절함은 더 이상 찾아볼 수 없다”고 보도했다.

이 같은 변화는 소비자인 환자들이 제목 소리를 내면서 시작됐다. 미국 환자들은 병원으로부터 의료서비스를 제공받는 ‘수동적인 소비자’에서 벗어나 가격과 전문성을 꼼꼼히 따지고 비판까지 하는 ‘적극적인 소비자’로 변모했다. 예를 들어 ‘헬스그레이드’(www.healthgrades.com)와 같은 인터넷 사이트에서는 환자들이 병원 서비스에 대해 등급을 매기고, 보이콧 운동까지 벌이기도 한다.환자들이 고급 서비스를 요청하는 만큼 의료비는 점차 높아지고 있으며, 서비스에 따라 차별화되는 과정을 겪고 있다. 미국에서는 돈만 있다면 호텔보다 더 훌륭한 시설에서 편안하게 요양할 수 있는 의료서비스를 받을 수 있게 된 것이다.

현재 미국 의료업계의 가장 두드러진 트렌드는 병원건물이 하루가 멀다 하고 계속 건설되고 있다는 점이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태어난 베이비붐 세대들이 대거 은퇴하는 시점이 점점 다가오면서 미국 내 의료서비스 수요는 급증할 것으로 예상되고 있기 때문이다. 병원 신설은 특히 샌프란시스코, 라스베이거스 등 휴양시설이 많은 곳에서 두드러진다. 인근에 오락시설이 많아 환자들이 선호하기 때문이다.

병원 내부공간도 개인의 프라이버시를 최대한 존중해 주는 방향으로 변하고 있다. 병실은 물론 엘리베이터, 복도까지 ‘환자용’과 ‘일반인용’을 구분하는 병원들이 늘어나고 있다. 네바다주의 세인트로즈병원의 경우 수술실로 들어가는 환자를 위한 별도의 통행로까지 만들어 환자와 가족들의 편리함을 도모하고 있다. 인테리어 디자이너까지 고용, 의사와 외래환자가 만나는 공간을 ‘예술적 감각’까지 살려 독특하게 꾸며놓는 병원도 있다.

미국 병원들의 소비자 중심주의는 ‘문병시간’ 규정을 없앤 것에서 잘 나타난다. 대다수 미국 병원들은 문병시간 규정을 삭제했으며, 입원환자들의 가족은 원하는 시간만큼 머물다 갈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입원실에는 가족들이 쉴 수 있는 소파와 침대가 항상 준비돼 있으며 부엌까지 마련해 놓은 병원도 있다. 일부 병원에서는 어린이환자 및 중환자 가족들에게는 병원에서 아예 거주할 수 있도록 편의를 돌봐주기도 한다.

산타모니카의 세인트존스병원의 브루스 램보럭스 병원장은 “병문안 손님이 많이 찾아오고 가족들이 곁에 있어주면 환자가 병을 극복하는 데도 도움이 되고 건강회복 시간도 빨라진다”고 설명했다.미국 병원의 또 다른 트렌드 중 하나는 ‘의료정보 전산화’다. 보다 정확한 진단과 치료를 위해 모든 진료기록은 병원 컴퓨터 서버에 저장되며, 병원간 정보교류도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다. 특히 의료정보 전산화는 조지 W 부시 행정부가 역점을 두고 있는 사업이어서 정부 지원도 충분히 제공된다.

시카고의 에반스톤 노스웨스턴 건강센터는 정부지원금과 기부금으로 의료정보 전산화를 위해 3,000만달러를 투자, 진료 및 정보처리 시간을 크게 줄였다. 캘리포니아의 카이저 의료센터는 9개주에 걸쳐 있는 수십개의 병원들을 전산 네트워크화하는 사업에 상상을 초월하는 18억달러를 투입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이처럼 미국 병원들은 확장위주의 경영을 전개하고 있지만 어려움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가장 큰 골칫거리는 역시 부족한 재원이다. 현재 미국 내 5,000여개의 대형병원들 중 3분의 2 가량은 적자에 허덕이고 있는 실정이다. 병원 적자의 가장 큰 원인은 의료보험에 가입하지 않은 환자들이 치료를 받은 뒤 비용을 지불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부지원금은 턱없이 모자라는 실정이라고 미국 병원협회(AHA)는 밝혔다.

캘리포니아주 병원들의 경우 지난해 이른바 ‘무료(Uncompensated) 환자’들로 인해 수억달러의 손해를 입었다. 지난 11월 초 캘리포니아의 8개 병원은 수지가 맞지 않는 응급실과 정신과 치료실의 운영을 중단한다고 발표했다. 캘리포니아의 또 다른 9개 병원은 재정난 때문에 연내에 인력 구조조정을 단행키로 했으며, 일부 병동의 운영을 포기하기로 했다.

캘리포니아 병원협회는 최근 아널드 슈워제네거 주지사 앞으로 보낸 서한에서 “캘리포니아주 병원 중 51%가 적자에 시달리고 있다”며 “주정부가 나서서 특단의 지원대책을 마련해주지 않는다면 병원폐쇄 등 최악의 상황이 연출될 수도 있다”고 경고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미국 병원들은 환자를 치료하기 전에 치료비를 선불로 받는 제도를 속속 도입하고 있다. 퇴원 이후에는 치료비를 받아내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다음 단계의 치료를 받기 위해서는 환자가 반드시 비용을 지불해야 하는 ‘페이 에즈 유 고’(pay-as-you-go) 시스템을 운영하는 병원이 증가하고 있는 것이다. 미국 내 최대 병원으로 일컬어지는 테네시주 내슈빌의 HCA병원은 지난 여름부터 응급실을 제외한 모든 치료에서 환자들에게 선불제를 요구한다.

종합검진서비스로 돈을 챙겨 재정난을 해결하는 병원도 많다. 최근 미국에서는 건강한 사람도 정기적으로 암이나 심장병 검사를 받아야 한다는 인식이 확산되면서 종합검진서비스가 큰 인기를 끌고 있다. 종합검진서비스는 단순한 혈액검사뿐만 아니라 컴퓨터를 이용한 3차원 영상검진 등 다양한 건강진단으로 ‘갑부 환자’들을 유치하는 데 성공했다.

환자가 일정금액 이상을 예치하면 ‘주치의’를 정해주는 병원도 증가 추세다. 주치의 제도는 병원 입장에서 안정된 수익원을 제공하는 프로그램으로 자리잡아가고 있다. 특히 갑부 환자들은 자신의 건강을 챙겨주는 의료진을 별도로 둘 수 있어 주치의 제도를 적극 활용하고 있다.

아울러 전문병원의 등장은 수익창출을 노린 ‘고급화’ 트렌드를 잘 보여준다. 심장병이나 암 치료만을 전문으로 하는 병원은 더 이상 뉴스거리가 아니며, 응급환자 전문수술병원 등 한 분야만을 서비스하는 병원이 확산되고 있다.

그러나 전문병원의 등장은 의료산업에서 또 다른 갈등을 불러일으키는 원인으로 지목되고 있다. 이른바 ‘수익을 거둘 수 있는’ 환자들을 전문병원에 대거 빼앗긴 일반병원들은 ‘의료산업의 질서를 문란하게 만든다”며 볼멘소리를 하고 있다. 일반병원들은 “전문병원만 늘어나면 소비자들이 종합적인 의료서비스를 받지 못하는 부작용이 생길 수 있다”며 미 행정부에 전문병원 인가 제한을 적극 로비하고 있는 중이다.

미국 병원들이 안고 있는 또 다른 문제점은 ‘간호사 부족’이다. 야근이 잦고 업무가 고되다는 이유로 간호사를 직업으로 선택하는 젊은이들이 점점 줄어들고 있기 때문이다. 병원들은 간호사를 채용하기 위해 고액의 연봉과 보너스, 헬스클럽회원권 등 다양한 복지 혜택을 제공한다며 유인책을 펴고 있지만 간호사 부족 문제는 좀처럼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고 있다.

버몬트의 플레처앨런 종합병원은 지난해 여름부터 아예 대학 캠퍼스를 돌아다니며 ‘간호사 유치 작전’에 돌입한 상태다. 이 병원은 신문이나 TV에 ‘간호사 모집’이라는 광고를 수시로 내보내고 있으며, 병원 홈페이지에는 “간호사에게는 다양한 금융지원을 실시하고 있다”는 선전도 꾸준히 하고 있다. 특히 대학 4학년생이 병원입사를 결정하면 5,000~6,000달러의 장학금도 제공한다.

펜실베이니아대학 병원 연구보고서에 따르면 미국에서는 해마다 2만여명이 ‘피로에 지친’ 간호사들의 부주의 때문에 사망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간호사들은 과로에 시달려 응급실 환자들에게도 최선의 의료서비스를 제공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미국 의료업계의 변화는 한국에도 많은 시사점을 준다. 한국의 의료업계도 새로운 변혁을 준비해야 할 시점이다.

유영석ㆍ한국경제 국제부 기자 yooy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