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 11. 11. 16:50ㆍ사상·철학·종교(당신의 덕분입니다)/유교(儒敎)
맹무백이 효에 관하여 묻다.(제 2편 위정)
효(孝)
⑥맹무백(孟武伯)이 효에 관하여 묻자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부모는 오직 자식의 병을 걱정하느니라.”
(孟武伯 問孝 子曰 父母 唯其疾之憂)
⑦자유(子游)가 효에 대해서 묻자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요즈음의 효라는 것은 부모를 잘 봉양하는 것을 말하고 있는데, 심지어 개와 말 같은 짐승까지도 다 먹여 기르고 있으니, 공경하지 않으면 무엇이 다르겠는가?”
(子游問孝 子曰 今之孝者 是謂能養 至於犬馬 皆能有養 不敬 何以別乎)
⑧자하(子夏)가 효에 대해서 묻자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즐거운 얼굴빛으로 섬기기가 어려우니, 무슨 일이 생기면 그 수고를 대신하고, 좋은 술과 맛잇는 음식이 생기면 먼저 드시게 하는 것 만으로 어찌 효도를 다 했다고 할 수 있겠는가?”
(子夏問孝 子曰 色難 有事 弟子服其勞 有酒食 先生饌 曾是以爲孝乎)
<강독>
唯其疾之憂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해석이 있는 것 같다. 부모는 무엇보다도 자식들이 병에 걸릴가 걱정하기 때문에 몸을 조심하여 건강에 유의하는 것이 효도라는 해석도 있고, 어버이의 병환을 몹시 근심하여 병에 걸리지 않게 늘 걱정하는 것이 효도라는 해석도 있고 또 다른 해석도 가능한 것 같다.
‘부모는 오직 자식의 병을 걱정하느니라’라고 읽을 때 ‘내리 사랑’이라는 자연의 이치가 생각난다.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것은 무조건적인 것, 자연의 흐름 같은 것이 아닐까. 어버이 親 字를 보면 설立 나무木 볼見의 합성어로 되어 있다. 나무 위에 서서 (자식을) 바라보는 것이 어버이인 것이다. 이것이 한자 문화권에서 어버이를 보는 관점인 것 같다.
어디까지나 자식이 잘 되도록 보살피는 것이다. 손을 잡아 이끌거나 부모 쪽으로 눈을 돌리게 하는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자식이 자립적인 인간이 되도록 보살피는 것이다.
이런 내리사랑에 대해서 어찌보면 효(孝)는 자연의 질서라기보다는 인간의 질서라는 생각이 든다. 동물의 경우에도 있다고는 하지만 인간의 질서와는 다를 것이다.
인위적인 질서이다보니 윤리․도덕 등과 결합되어 왔다. 그러다보면 ‘반드시 해야만 하는 것’이나 ‘은혜를 갚는 것’ 등 당위나 의무로 되어 마음에서 울어나는 사랑의 행위와는 거리가 있게 되기 쉽다.
‘내가 너희를 어떻게 길렀는데…’라는 생각이나 ‘부모를 봉양하는 것은 자식으로서의 의무’라는 생각 등이 바탕이 되어 있으면 뭔가 진정한 인간적 질서로서의 효와는 거리가 있게 되는 것 같다.
특히 모든 종류의 부자유를 싫어하는 현대인들에게는 도덕적 의무로서의 효는 오히려 효의 진정한 실현을 어렵게 만드는 요인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공자께서도 물질적으로 부모를 봉양하는 것, 의무감으로서의 행위를 효라고 아는 것을 경계하신 것 같다. ‘不敬이면 何以別乎리오’라고 말씀하신 것이나 ‘色難’을 이야기하신 것은 그런 뜻으로 보인다.
色難에 대해서는 ‘부모의 표정을 보고 알아서 행하기는 어렵다’로 해석하는 사람도 있지만 여기서는 ‘즐거운 얼굴빛으로 섬기기가 어렵다’고 해석하고 싶다.
경(敬)이나 즐거운 얼굴빛은 강요하거나 의무감 만으로는 되지 않는 것이다.
‘마음으로부터의 사랑’인 것이다.
이런 孝야말로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근본이 되는 것이다.
현대 사회는 점점 고령화 사회로 되고 있다. 이제 노인 문제는 큰 사회문제로 되고 있다.
흔히 빈곤, 질병, 고독을 노인의 三苦라고 한다.
물질이 풍부해지고, 사회보장제도가 발전하면서 이제 빈곤이나 질병은 사회와 국가가 연대해서 책임을 지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그러다보니 선진국이 되면 될수록 점점 외로움이나 소외감 없이 노후의 삶을 즐기는 것이 인간으로서의 행복을 완성하는 관건이 되고 있다. 그런데 이것만은 사회보장제도로 해결할 수 없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진정한 효는 현대에서 선진화되면 될수록 더욱 절실하게 다가온다.
사랑하는 자식들과 교감하면서 손자들의 재롱을 마음껏 즐길 수 있는 삶을 살 수 있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제 의무로서의 효가 아닌 자각(自覺)과 사랑의 효를 꽃피워야 한다고 생각한다.
여기에는 참다운 어버이로서의 자각과 참다운 자식의 길에 대한 자각이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고 본다.
이 둘이 서로 감응할 때 부모와 자식의 관계는 진실한 것이 될 것이다.
어느 것이 더 중요하다고 말할 수는 없으나 역시 어버이의 길이 먼저가 아닐까 생각한다.
어버이로서 인간으로서 끝까지 잘 늙어 가는 것, 젊은 사람들이 다가오고 싶어지는 노인으로 되는 것, 부모의 사랑과 은혜가 자식의 마음 속에 사랑과 공경의 념으로 더욱 살아나는 그런 자식으로 되는 것, 그리고 그런 부모와 자식의 사랑이 자기 가족의 범위를 넘어서 이웃으로 사회로 흘러넘쳐 가는 것 이것이 우리가 그리는 아름다운 인간 세상의 모습이 아닐까.
<대화>
A; 효(孝)라고 하면 뭔가 좀 얼른 다가오지 않는 것이 있는 것 같아요. 가족의 형태도 달라졌고 세대 간에 의식이나 가치관이 너무 많이 차이가 나서 옛날 방식의 효는 잘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 같아요.
B; 제 주위를 봐도 아버지와 아들이 원만한 관계를 갖는 경우가 드문 것 같아요. 경제문제도 있겠지만 그 보다는 가치관이 상충되는 것이 큰 것 같아요. 아버지가 일방적으로 말하고 자식은 듣기만 하는 경우 부자유친(父子有親)이 잘 안된다고 생각됩니다.
C; 자식의 길을 말하기 전에 부모의 길이 먼저 있지 않을까요. 저는 제가 여러 가지 가족 안의 갈등을 경험하면서 살아 와서 그런지 먼저 ‘부모 되기’가 더 중요한 것 같이 생각되요.
자식에게 효를 강요하거나 하지 않고 늙어서도 자립적인 부모의 모습이 있지 않을까요.
D; 그러나 부모가 그런 의식을 갖지 못하였거나 물질적으로 자립할 수 없을 때 그런 부모를 변화시키려 하는 것은 될 수 없는 일 아닐까요.
부모가 어떠하냐에 관계없이 자식의 길은 있는 것이 아닐까요.
또 끝까지 자식에게 의탁하지 않고 자립적인 생활을 하는 모습은 좋다고 생각하지만(사실 연금제도라던가 사회보장의 도움을 받아 과거보다는 훨씬 쉬어지고 있지만) 지나치게 독립적인 삶을 이야기하는 것은 너무 각박하지 않나요. 그래가지고는 늙는 맛(?)이 있을까요.
E; 부모가 병들 때나 부모가 어려울 때 잘하라고 가르치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그것은 효를 강요하는 것과는 다를 것 같아요.
F; 그 말을 들으니까 요즘 부모들의 ‘아이 기르기’가 정말 부모의 길을 잘 가고 있는 것인지 의문이 가요. 어떻게든 아이들을 위한다는 일념에서 지나치게 아이들에게 쩔쩔 매는 부모들이 많은 것 같아요.
아이들 기를 살려준다고(과거에 자신들이 어려서 겪은 여러 종류의 부족감을 아이들에게는 겪지 않게 하겠다는 듯) 하고 있지만 그렇게 해서 아이가 보다 자유로운 사람으로 성장할까요? 오히려 자기만 아는 사람이 되어 자신과 다른 생각이나 느낌을 갖는 사람을 만나면 심하게 부자유를 느끼는 그런 사람으로 되기가 쉽지 않을까요.
옛말에 ‘엄한 부모 밑에 효자 난다’는 말은 새겨들을 만 하다고 생각됩니다.
G; 가족형태나 가치관이 바뀌고 있으니까 효의 구체적인 모습도 바뀌는 것 같아요. 요즘에는 ‘물질적으로 봉양하면 되지 꼭 같이 살아야하느냐’는 생각은 꽤 많아진 것 같아요. 특히 시부모와 며느리의 갈등이 피할 수 없을 때 같이 살면서 효를 실행한다는 것은 너무 가혹한 것 같아요.
H; 물질적인 것이 역시 바탕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부모와 자식이 다 경제적으로 어려울 때가 제일 힘이 들 수 밖에 없지요.
I; 지금 제 나이가 과도기의 한 복판에 있는 것 같아요.
아마도 부모에게 효도를 해야 하고 자식에게는 효도를 받을 생각을 하지 못하는 마지막 세대가 아닐까요.
J; 시대나 사회가 바뀌면 여러 가지로 변하지만 역시 변하지 않는 무언가가 있지 않을까요. 저는 효(孝)라는 것도 인간이 갖는 본질적인 선한 마음의 나타남이라고 생각합니다.
자기를 낳아준 부모가 생활능력이 없어질 때 자신이 봉양하겠다는 마음이 나고, 부모가 아플 때 자신이 간병하고 싶은 마음이 나는 것은 인간으로서 자연스런 심성의 발로가 아닐까요. 그런 마음이 안 생긴다면 오히려 그 원인을 찾아서 해결하는 것이 정상적이라고 생각됩니다.
K; ‘밖에서는 좋은 사람인데 집에 와서는 그렇지 않다’는 말을 듣는 경우가 있잖아요. 저도 가끔 그런 말을 듣는데 새삼스럽게 자신을 되돌아보게 되네요.
L; 그런데 공자께서는 왜 효에 대해서 주로 이야기하시고 부모의 길에 대해서는 별로 언급이 없으실까요.
M; 가장 성숙한 인간이 가장 성숙한 부모가 되는 것이 아닐까요. 아마 군자(君子)의 길이 참된 부모의 길이라고 생각하지 않으셨을까요.
N; 그러고 보니 바른 인간의 길을 가는 것이 부모의 길, 자식의 길이 아닌가 생각이 드네요. 특히 자식의 길을 강조한 것은 그 만큼 동물과 다른 인간의 길이기에 어려운 점이 있는 것 같아요. 왜 위정 편에 효가 있는지 알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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