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 11. 11. 16:51ㆍ사상·철학·종교(당신의 덕분입니다)/유교(儒敎)
계손씨를 나무라다. (제 3편 팔일)
제3편 팔일(八佾)
①공자께서 계씨(季氏)를 일러 “팔일(八佾)을 뜰에서 춤추게하니 이런 일을 차마 할 수 있을진대 무슨 일을 못하겠는가?”
(孔子謂季氏 八佾 舞於庭 是可忍也 孰不可忍也)
⑥계씨가 태산에서 산제(山祭)를 지내려 하자 공자께서 염유(?有)에게 말씀하시기를,“너는 계손씨를 죄에서 구해 낼 수 없겠느냐?” 대답하기를 “구해 낼 수 없나이다.”
그러자 공자께서 탄식하시기를, “아! 슬프도다. 태산의 산신이 예의 근본을 물은 임방(林放)만도 못하다는 말인가!”
(季氏旅於泰山 子謂?有曰 女弗能救與 對曰不能 子曰 嗚呼 曾謂泰山 不如林放乎)
<강독>
제3편은 현대에 사는 사람으로서는 읽기가 쉽지 않다.
공자 당시의 봉건제도와 왕정, 당시 중국의 정치 현상을 그대로 이해하지 않고 지금의 제도, 문화, 사고방식으로 읽으면 공자는 대단히 고루하고 보수적인 인물로 보이기 쉽다.
그러나 그 시대로 돌아가서 잘 보면 자신의 이상을 현실정치에 그대로 실현하려고 한 용기 있는 인물을 만나게 된다.
현실 정치에 초연하지 않고 자신이 생각하는 이상을 현실정치에 실현하려고 한 성현의 고뇌를 읽을 수 있다.
공자는 당시의 세력가에 대해 비판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 비판의 준거가 뚜렷하고 일관되어 있다.
1장과 6장은 당시의 세력가 계손씨를 비평하고 있다.
팔일무(八佾舞)는 천자 만이 추게 하는 춤으로 당시의 세도가 계손씨가 대부의 신분으로 천자의 예와 무악을 쓰는 것을 비난한 것이다.
또한 계손씨가 태산에 제사지낸다는 것은 노나라 군주를 무시한 비례(非禮)로써 비난하고 임방 같은 사람도 예의 근본이치를 물었거늘 옛부터 비례는 흠향하지 않는다고 전해지는 태산의 신이 어찌 계씨의 예에 어긋난 제사를 흠향했겠느냐라고 개탄한 것이다.
지금의 관점에서 보면 불평등한 신분사회의 대표적인 도덕이나 예로서 공자의 한계를 보는 것 쯤으로 치부해버리기 쉽지만 당시의 이상 정치를 덕치를 바탕으로 하는 군주정치에서 찾았던 그 시대 그 사회를 배경으로 읽어야 할 것이다.
요즘 말로 한다면 어떤 세력가가 헌법이나 법률을 무시하거나 헌법을 자신의 권력을 위해 개정하려는 시도를 할 때 공자와 같은 지식인이라면 어떤 태도를 취할까 하는 관점으로 읽는 것이 좋지 않을까.
또는 시대나 공간을 넘어서 사람이 자신의 분수에 맞는 삶이란 어떤 것일까를 생각하며 읽었다.
<대화>
A; 어떤 사회도 그 나름의 위계질서가 있지 않으면 유지가 되지 않겠지요. 지금 보면 이해가 안되는 질서일 수 있지만 당시의 사람들의 의식이나 사회구조에서 보아야 할 것 같아요.
상당히 의식이 앞서는 사람일지라도 ‘악한 정부도 없는 것 보다는 낫다’라는 말이 의미하는 것을 생각해 보아야 할 것 같아요.
B; 그런 점에서 보면 ‘권한과 책임’이 따르는 진정한 권위는 어떤 사회에나 필요하겠지요. 물론 그 권위는 시대나 사회가 달라지면 변할 수 밖에 없겠지요. 달라졌는데 관념 속에서 변하지 않고 남아 있으면 그것이 문제인 것 같아요. 흔히 ‘권위주의’ 라고 말하는 것도 이런 데서 생기는 것이 아닐까요. 봉건적인 상하 관계나 위계 질서를 배경으로 한 권위는 이제는 사라졌고 사라져야 하는데 아직도 관념 속에 그런 권위를 유지하려는 의식이 남아 있다면 그것이 문제로 되는 것 같아요. ‘나이’를 들먹이게 된다든가 ‘상하 관계’를 들먹이게 되는 경우를 잘 보면 그것을 느끼게 되요.
C; 제후가 난무하던 시대에 군주 중심의 안정된 정치 질서가 사람들의 행복에 중요하다고 공자께서는 생각하셨을 것 같아요. 계손씨 같은 사람은 이 질서를 해치는 사람으로 보였을 것 같구요.
D; 그것과 통할 수도 있겠지만 계손씨 같은 사람의 인간됨이 공자가 생각하는 인간상과는 너무 거리가 멀었겠지요. 그 교만이나 권력욕 같은 것은 구체적인 사회시스템은 다를지라도 어떤 경우에나 그 시스템을 제대로 작동시키지 못하게 한다는 점에서는 고금(古今)동서(東西) 공통적이지 않을까요.
E; 공자를 비판할 필요가 있을 경우가 있다고 생각해요. 왜냐하면 공자가 이상을 펴려고 한 사회의 테마가 지금과는 다르기 때문에 공자의 생각과 붙어 있는 사회상이 지금은 받아들이기 힘든 때로는 그 사회구조나 사회의식을 불식하는 것이 테마로 되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지요. 이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을 공자에 대한 전면적인 부정으로 이어 가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되네요.
F; 어떤 시대 어떤 사회에나 ‘분수에 맞는 삶’이 자유롭고 행복한 삶을 가져다 준다고 생각해요. 저도 ‘분수에 맞게 살라’는 말이 거부감으로 다가 왔던 적이 많았었는데 생각해 보면 그 말이 부당한 질서에 적응하라는 ‘강요’로 생각되었던 것 같아요.
말이 될지 모르겠지만 ‘분수에 맞는 삶’이란 강요 되는 것이 아니라 ‘분수를 자각하는 삶’이라고 생각해요.
소크라테스가 ‘너 자신을 알라’고 한 것도 같은 맥락이 아닐까요.
G; 사람마다 제각기 소질 취향 개성이 달라서 그 지닌 맛이 다 다르지요 그 지닌 맛을 최대로 살리는 것이 그 자신의 행복과 사회의 행복 모두를 위해 좋은 일이지요. 그런데 왜 그렇게 안될까요. 정말 자기가 살려지는 그런 일을 발견하고 그 일에 전념하는 사람은 지금도 그다지 많지 않은 것 같거든요.
H; 여러 가지 사회적 부조리와 관계가 있겠지만 사회가 바뀌어도 변치 않는 사람들의 의식 에 더 많은 원인이 있지 않나 하는 것이 요즘 우리의 현실인 것 같아요. 성적 순으로 한 줄로 세우는 사회문화가 그 단적인 예 같아요. 공부를 잘하는 것이나 물건을 잘 만드는 것이 똑 같이 하나의 재능이잖아요. 그런데 여기에 우열(愚劣)이 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사회제도가 있다면 그것이 문제이겠지요. 그런데 사회제도가 바뀌었는데도 의식 속에 구시대의 우열감이 그대로 있다면 어떨까요. 저에게는 요즘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가장 큰 테마라는 생각이 들어요.
독일의 예를 들은 적이 있는데 중학교 과정에서 아이의 적성이나 재능을 검토해서 거기에 맞게 진학이나 취업등을 선택하는 것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는 것이 부럽게 생각되었는데 이것은 시스템의 문제가 아니라 의식의 문제라고 생각되요.
I; 전에 간디를 읽다가 카스트 제도를 옹호하는 것에 대해 충격을 받은 적이 있었는데, 인도 문화의 특성이라고 생각하기도 했지만 우열감이나 사회적 대우에 차별이 없다면 사람마다 자신의 지닌 맛을 최대로 살릴 수 있는 그런 사회를 시스템으로 그린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어요.
J; 지나치게 좋게만 생각하시는 것 같네요. 간디는 카스트제도의 수혜자이기 때문에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었지 않을까요.
어떤 관점에서도 현재 인간의 의식이나 사회의 실태를 보면 카스트 제도를 인정하고 옹호하는 것은 옳지 않은 것 같아요. 간디를 옳게 해석하기 위해서도 이런 점을 분리해서 보는 것이 좋다는 생각이 드네요. 간디가 좋은 사람이니까 그가 말하는 것은 다 좋다라던가 간디가 카스트제도를 옹호하는 것을 보아서 그는 좋은 사람이 아니다라는 식의 평가는 옳지 않다고 생각해요.
'사상·철학·종교(당신의 덕분입니다) > 유교(儒敎)'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낙이불음 樂而不淫 (제 3편 팔일) (0) | 2007.11.11 |
---|---|
사람이 어질지 않으면 禮와 樂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 (제 3편 팔일) (0) | 2007.11.11 |
맹무백이 효에 관하여 묻다.(제 2편 위정) (0) | 2007.11.11 |
효도하고 우애함이 정치다. (제 2편 위정) (0) | 2007.11.11 |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하는 것 (제 2편 위정) (0) | 2007.11.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