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념구악(不念舊惡) (제 5편 공야장)

2007. 11. 11. 17:09사상·철학·종교(당신의 덕분입니다)/유교(儒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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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념구악(不念舊惡) (제 5편 공야장)
 
 

17)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장문중은 큰 거북을 감추고, 기둥머리의 모진 곳에다 산의 형상을 조각하고, 대들보 위의 짧은 기둥에는 마름을 그려서 길흉화복을 빌고자 하니 어찌 그를 지혜로운 사람이라 하리요!"

(子曰 臧文仲 居蔡 山節藻절 何如其知也)

 

18) (가)

자장이 묻기를, "자문은 세 번 벼슬을 하여 영윤이 되었으되 기쁜 빛을 들어내지 않았으며, 세 번 쫓겨났으되 성난 빛을 나타내지 않고 자기가 맡았던 영윤의 정사를 새로운 영윤에게 인계하였는데, 어떻게 보아야 합니까?"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충이로다."
묻기를, "인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까?"
말씀하시기를, "알지 못하노라. 어찌 인이라 할 수 있겠느냐?"
(子張 問曰 令尹子文 三仕爲令尹 無喜色 三已之 無溫色 舊令尹之政 必以告新令尹 何如 子曰 忠矣 曰仁矣乎 曰未知 焉得仁)

 

(나)

(자장이 또) 묻기를, (최자가 제나라의 임금을 살해하자 진문자는 가지고 있던 10승의 땅을 버리고 다른 나라로 가서 말하기를 '우리나라의 대부 최자와 같다'고 하고 또 그 나라를 떠났으며, 또 다른 나라로 가서 말하기를 '우리나라의 대부 최자와 같다'고 하고 떠나갔으니, 이 사람은 어떻습니까?"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청백하다."
"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알지 못하노라. 어찌 인이라 할 수 있겠느냐?"
(崔子弑齊君 陳文子有馬十乘 棄而違之 至於他邦 則曰 猶吾大夫崔子也 違之 之一邦 則又曰 猶吳大夫崔子也 違之 何如 子曰 淸矣 曰仁矣乎 曰未知 焉得仁)

 

19) 계문자는 세 번 생각해 본 후에야 비로소 행동에 옮겼다.
공자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말씀하시기를, "두 번이면 가하니라."
(季文子 三思以後行 子聞之 曰 再斯可矣)

 

20)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영무자는 나라에 도가 행하여 졌을 때에는 지혜로웠고, 나라에 도가 행하여지지 않았을 때에는 어리석었다. 그의 지혜로움은 가히 미칠 수 있으나 그의 어리석음은 가히 미칠 수 없느니라."
(子曰 영武子 邦有道則知 邦無道則愚 其知 可及也 其愚 不可及也)

 

(21)공자께서 진나라에 계실 때 말씀하시기를, "돌아가야겠노라. 돌아가야겠노라. 우리 고장에 있는 젊은이들은 뜻은 크나 그 하는 일이 면밀하지 못하여, 문채는 찬란하지만 재단하는 바를 모르느니라."
(子在陳 曰 歸與 歸與 吾黨之小子 狂簡 斐然成章 不知所以裁之)

 

(22)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백이와 숙제는 남의 지나간 악을 마음에 두지 않는지라 원망하는 일이 드물었느니라."
(子曰 佰夷叔齊 不念舊惡 怨是用希)

 

(23)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누가 미생고를 곧다고 하느냐? 어떤 사람이 식초를 빌리거늘 그 이웃에 가서 빌려 주었으니."
(子曰 熟謂微生高直 或 乞醯焉 乞諸其 而與之)

 

(24)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말을 꾸며하고 얼굴빛을 좋게하고 지나치게 공손한 태도를 보이는 것을 좌구명은 부끄럽게 여겼는데 나 역시 부끄럽게 여긴다. 원망을 가슴 속에 숨기고 그 사람과 친구로 지내는 것을 좌구명은 부끄럽게 여겼는데 나 또한 부끄럽게 여기노라."
(子曰 巧言令色足恭 左丘明恥之 丘亦恥之 匿怨而友其人 左丘明恥之 丘亦恥之)

 

(25)안연과 계로가 공자를 모시고 있을 때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각기 너희들의 뜻을 말해보지 않겠느냐?"
자로가 말하기를, "탈 만한 수레와 말, 그리고 가벼운 털 옷 등을 친구들과 함께 사용하다가 그것들을 낡아 못쓰게 된다 하더라도 유감이 없겠습니다."
안연이 말하기를, "선함을 자랑하지 않고, 남에게 수고로움을 끼치지 않는 것을 원하나이다."
자로가 말하기를, "선생님의 뜻을 듣고 싶습니다."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늙은이를 편안하게 해드리고, 벗들에게 미더우며, 젊은이에게는 따르게 하겠노라."
(顔淵季路侍 子曰  各言爾志 子路曰 願車馬 衣輕  與朋友共  之而無憾 顔淵曰 願無伐善 無施勞 子路曰 願聞子之志 子曰 老者安之 朋友信之 小者懷之)

 

(26)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너무 하도다! 나는 아직까지 자기의 허물을 보고 자신을 반성하는 사람을 보지 못하였느니라."
(子曰 已矣乎 吾未見能見其過 而內自訟者也)

 

(27)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열 집이 사는 고을일지라도 반드시 나와 같은 충(忠)과 신(信)이 있는 사람은 있겠으나 나만큼 배우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없느니라."
(子曰 十室之邑 必有忠信 如丘者焉 不如丘之好學也)  

 

 

<강독>

 

17장의 장문중을 평한 것을 그의 미신(迷信)을 한탄하신 것으로 볼 수도 있겠으나 그 시대를 생각하면 자기 분수를 넘어서는 참월 무례함을 비판하신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런 예는 다른 편에도 많이 나오고 있는데 이것을 당시의 위계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고루한 봉건 규범으로, 수직적 사회의 상하의식(上下意識)의 발로(發露)라고 보아 버리는 것은 너무 일면적이라고 생각된다.

끊임 없이 비교경쟁하며 외형으로 나타나는 사회적 신분을 상승시키려는데 집착하는 사람됨의 천박함을 비판하신 것으로 보인다.
차별을 많이 느끼는 사람일수록 스스로 차별의식의 포로인 경우가 많다고 생각한다.
진정으로 차별을 없애려면 자기 안에 있는 차별의식을 먼저 살펴 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18장의 자문의 충(忠)만 하더라도 대단한 것이다. 특히 '舊令尹之政을 必以告新令尹하니'하는 것은 쉽지 않은 것이다. 권력투쟁과 정쟁이 심한 사회에서 이런 이어짐은 대단히 뛰어난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공자께서는 그것마저도 인(仁)인지에 대해서는 미지(未知)라고 이야기하신다. 형태로 나타난 행위만 가지고 그 심층의 의식을 말하는 것에 대해서 유보하고 있는 심정을 느낄 수 있을 것 같다.
최자의 청(淸)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특히 청(淸)은 탁(濁)이라고 생각되는 것을 배척하는 날카로움을 수반하기 쉬운데 이것은 인(仁)과는 거리가 먼 것이 아닐까.   흔히 '맑은 물에는 고기가 놀지 않는다'는 말이 있는데 청(淸)이 나쁜 것이 아니라 청(淸)이 갖기 쉬운 불수용성(不受容性)을 지적한 것으로 보인다.
19장의 계문자에 대한 말씀은 재미 있다. 어떤 경우에나 보편적인 말씀이라고 하기보다는 구체적인 사람을 보고 하신 말씀이라고 생각된다.
만일 신중하지 못한 사람이었다면 다른 말씀을 하셨을 것이다. 예컨대 '세 번 생각하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든지.   
흔히 우유부단(優柔不斷)이라는 말을 부정적으로 사용하지만 '쉽게 단정하지 않는 마음'은 아주 필요한 덕성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망설임'이 생기는 그 의식의 심층을 살펴 보면 그것은 다른 것이다.
'단정하지 않는다'와 '망설이지 않는다'라는 것을 테마로 해서 실제로 구체적으로 해보면 여러 가지가 보여올 것이라고 생각한다.
'단정(斷定)하지도 망설이지도 않는' 그런 사고법(思考法)이 좋은 것이 아닐까.
20장에서 '其知는 可及也이어니와 其愚는 不可及也'라는 말씀이 크게 와 닿는다.
知가 밝은 이성(理性)이라면 우(愚)는 깊은 심덕(心德)을 가리키는 말로 느껴진다.
이 우(愚)를 읽으면 톨스토이의 바보 이반이 떠올라 온다.
지금 세상에는 '공정한 거래'를 이상으로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화기애애한 사회로 되는 것은 어려운 것 같다. '상대가 해 준 것 만큼 나도 해 주겠다' '나는 잘 하고 싶지만 상대가 응해주지 않는다' '하나를 양보하면 전체를 잃는다' 등등
그래서 오늘 날 더욱 요청되는 것이 '양보'의 이니시아티브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절대양보(絶對讓步)라고도 할 수 있는데 가장 진보적인 개인이나 집단이 먼저 터야할 물꼬가 아닐까.
21장에서는 공자가 고향에 돌아가 제자들을 교육하는데 전념하고 싶은 심경이 전해져 온다.
혹자에게는 이 구절이 공자가 현실에 실망한 나머지 낙향하는 것으로 읽혀질지 모른다.
그것은 공자의 정치 행각을 벼슬에 연연하는 소인배로 보는 것만큼이나 잘못이라고 생각한다. 정치현실에서 이상을 실현하려 한 것이나 고향에 돌아가 제자들을 교육하러 한 것이나 다만 현실의 조건에 순응하는 것으로 공자의 일관된 사상과 실천이라고 보는 것이 옳지는 않을까.
'뜻은 크나 그 하는 일이 면밀하지 못하며' '문채는 찬란하지만 재단하는 바를 모른다'는 말은 이상주의가 관념에 흐르기 쉽고, 이상과 방법이 서로 상응하지 못하는 폐단을 잘 지적한 것으로 시대를 초월하여 오늘도 깊이 새겨야할 말씀이다.
22장에서 공자가 백이 숙제에 대해 이야기한 것을 읽으면 공자가 이상으로 하는 인간상을 느낄 수 있다.
오직 선(善)을 행할 뿐 불념구악(不念舊惡)인 것이다. '마음에 두지 않는다'는 말이 다가 온다. 실제로는 어려운 일이다. 그것이 결코 자신의 행복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머리로 이해하는 경우에도 실제로는 미워하고 원망하는 마음에 사로잡히는 경우가 허다하지 않는가. 과거에 집착하고 미래에 집착하는 삶은 자유로운 삶이 될 수 없다. 또한 원망은 원망을 낳아 악순환(惡循環)한다.
이 악순환의 고리를 끊는 것은 불념구악(不念舊惡)하는 것이다!
23장의 미생고에 대한 말씀은 여러 가지로 생각할 수 있을 듯하다. 미생고의 허위의식이나 위선을 지적한 말로 읽는 사람도 있는 모양이지만 구체적인 정황을 모르기 때문에 뭐라 말하기는 어렵다.  다만 이 구절에서는 곧은 것(直)과 심층의 부자유(不自由)에 대한 생각이 떠오른다.
흔히 곧은 사람들 가운데 '하지 않으면 안된다' '해야만 한다'라는 생각에 묶이는 경우가 많은데 이런 심층의 부자유에 대해 생각하게하는 구절로 읽힌다.         
'곧으면서 자유로운' 마음의 상태는 어떤 것일까?
24장에서는 우리가 무엇에 대해 부끄러워하는가를 생각하게 한다.
어떤 의미에서는 우리가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가를 알고 싶으면 우리가 속마음으로 무엇을 부끄러워하는가를 생각해 보면 분명해지는 것이 있다.
공자는 진실되지 않는 것을 부끄러워 하셨는데 우리는 어떤지 물어진다.
25장에서는 무엇을 하고 싶은지,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에 대해 사제간에 진솔하게 이야기하는 정경이 떠오른다.
자로는 친구와의 사귐 속에서 '무소유의 삶'이랄까 하는 것을 그리고 있고, 안연은 무아집의 삶을 말하고 있는 것 같다.
공자의 '老者安之 朋友信之 小者懷之'는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인(仁)이 어떻게 체현되는지를  말씀하신 것으로 그것이 가능한 인격을 생각하게 한다.
역시 그와 같이 사람과 관계를 맺는 가운데 인(仁)이 체득되는 면도 있고, 또 다른 면에선 자신이 먼저 편안해 질 때 노인을 편안하게 하고 젊은 사람을 품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되었다. 두 방향이 함께 이루어지는 것이 아닐까.
이순(耳順)의 삶 다시 말해 무아집의 삶이 갖는 자유로움이랄까 하는 것이 느껴지는 구절이다.
26장에서는 '자신을 보는 것'의 어려움에 대해, 사람들의 실태에 대해 공자의 솔직한 소회랄까 하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새삼 우리 자신의 실태를 돌아보게 한다.
內自訟이란 어떤 것을 말할까. 흔히 우리는 자신의 허물을 알고 반성한다고 말하지만 정말로 그렇게 하고 있는가를 보면, 정말로 그 바닥까지 내려가 있는가를 보면 그렇지 않은 경우가 허다하지 않는가?   아니 한번이라도 그렇게 해본 적이 있는가하고 물어진다.
불가(佛家)에서 말하는 진참회(眞懺悔)와 통한다고 생각한다.
27장의 ''열 집의 작은 고을에도 나 정도의 충(忠)과 신(信)이 있겠으나 나처럼 호학(好學)하는 사람은 없느니라'하는 구절은 공자의 진면목을 그야말로 잘 보여주는 말씀이다.
호학(好學)을 '학문을 좋아하는'으로 읽는 것 보다 '배우기를 좋아한다'고 읽는 것이 공자가 말씀하시려는 것에 더 가깝지 않을까.
공자께서 기회 있을 때마다 몇 번이고 배우기를 좋아한다는 말씀을 하시는 것이 마음에 와 닿는다. 그 마음의 상태를 읽는 것이 강독의 핵심이 아닐까 생각되었다.

 

<대화>

A; 길흉화복(吉凶禍福)을 점치는 행위가 자기 자신만의 이익을 위한 것일 때 그것은 올바른 태도가 아니지요. 뭔가 형태적인 것에서 행복을 추구한다면 결코 안정된 행복은 오지 않을 것 같아요.

 

B; 대체로 기복(祈福)이 추구하는 것은 권력이라던가 부 같은 것인데 그것은 경쟁적인 경우가 많기 때문에 늘 부족감을 느끼는 것 같아요. 자족할 줄 모르는 거죠.

 

C; 무언가를 부러워하거나 차별을 느낄 때 자신을 먼저 돌아다보는 것이 필요한 것 같아요.
부자나 고관대작의 사는 모습을 비난하거나 비판할 때 자신의 속마음이랄까 하는 것을 한번 되돌아 보는 것도 좋을 것 같네요.

 

D; 저는 자신이 맑다(淸)고 생각하는 편인데 다른 사람이 많이 걸려요. 내가 걸리니까 상대도 걸리는 것 같아요. 요즘에는 어떤 것이 착한 것인지 다시 생각하게 되는 경우가 많아요.
다른 사람과 잘 지낼 수 있는 것이 정말 착한 것 아닐까요.

 

E; 신중한 것과 우유부단한 것은 다른 것 아닐까요. 저는 망설임이 많은 편인데요. 자신감이 부족한 것도 같고 왜 그런지 잘 모르겠어요. 다른 사람을 지나치게 의식하는 것도 같고요. 성격이라지만 심층의 마음을 잘 보고 싶어요.

 

F; 구체적으로 작업을 해 보면 잘 보여 와요.  된장을 소분할 때나 고추를 골라 딸 때 등 실제로 해보면 마음의 상태랄까가 잘 보이는 것 같아요.
각 자 자신의 테마가 있는 것 같아요. 어떤 사람은 망설이는 것이 테마지만 또 어떤 사람은 너무 용감(?)한 것이 테마로 되는 경우도 있지 않나요.

 

G; 모르는 사람이 용감한 것 아닌가요. (웃음)
언제 같이 작업할 때 '망설이지 않는다'라는 테마로 해보면 어떨까요.

 

H; 영무자의 어리석음(愚)을 찬탄한 공자의 심경이 느껴져요. 우리도 여기서 절대 양보의 삶을 살려고 하고는 있지만 정말 속마음에서부터 그렇게 하기는 힘들더라구요.
때로는 서로 따지고 다투는 것이 솔직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지만 뒤로 후퇴하기 보다는 약간 무리가 될지 몰라도 한번 해보자하는 심정인 것 같네요.

 

I; 선물 정치(膳物政治)라는 말을 하는 사람이 있어요. 저도 좋아하는 말인데요. 주는 것으로 성립하는 사회야말로 우리가 바라는 사회가 아닐까요.
공정거래(公正去來)를 넘어서는 관계가 생각이 되요. 공자가 찬탄한 우(愚)를 현대에서 생각해 보면 어떨까 많이 생각되네요.

 

J; 공자가 귀여(歸與)라고 한 것은 패배자로서 돌아가자고 말씀하신 것은 아니라고 봐요. 그가 현실 정치에 관심을 가졌을 때나 돌아가 교육에 전념하려고 마음 먹었을 때나 일관된 추구가 있다고 생각해요.
요즘 歸農이 연상되네요.

 

K; '뜻은 크나 면밀하지 못하며, 문채는 찬란하지만 재단할 줄 모른다'는 말씀을 보고 많이 찔리네요. 한 사람 안에서 제대로 갖추면 좋겠지만 실제로는 어려운 것 같아요. 오히려 서로 뜻이 맞는 사람들이 모여서 조화를 이루는 것이 어떨까 생각됩니다.

 

L; 불념구악(不念舊惡)이야말로 원망과 미움의 고리를 끊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우선 자기에게 이익이 되고요. 요즘 젊은 사람들이 쿨(Cool)하다고 말하는 것이 일맥상통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되기도 하네요.

 

M; 미생고의 직(直)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 해석이 있는 것 같아요. 공명심이나 위선등을 지적한 것이라는 사람도 있는 것 같은데  공자의 말씀과 통하는 이야기인지는 모르겠지만 저에게는 당위에 사로잡혀 있는 경직성 같은 것으로 다가와요.

 

N; 요즘 사업을 잘하는 사람들, 특히 정치를 잘(?)하는 사람들을 보면 서로 싸우다가도 자리를 바꾸면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함께 밥 먹고 웃고 그러는 것을 보면 우리 같은 사람들은 잘 이해가 안 갈 때가 많아요. 한 때는 공자가 말씀하신 것처럼 '원망을 가슴 속에 숨기고 교제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라고 은근히 비난했던 적이 있었어요. 그러다가 어느 땐가 다른 면이 보이더라구요. '오히려 이런 사람이 훨씬 아집이 적은 사람이 아닐까' 하구요. 그 다음부터는 정치하는 사람들이 달리 보이더라구요.

 

O; 25장처럼 우리도 한번 이야기해보면 어떨까요.
저는 일주일에 된장 천 병 포장하고, 밤에는 좋아하는 책을 마음껏 보고, 1 년에 두어 차례 일주일 정도 여행했으면 좋겠어요.

 

P; 저는 공자처럼 누구에게나 편한 사람이 되었으면 참 좋겠어요.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이 혼자 있을 때도 편한 사람이 먼저 되고 싶어요.

 

Q; 저는 사람들에게 그냥 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그럴려면 줄 수 있는 것이 많아야 되겠지요. 우리 사업이 번창해야 되겠네요(웃음)

 

R; 진짜로 허물을 보고 진짜로 반성한다는 것이 어떤 것일까요. 많이 반성도 해보고 자기 허물을 안다고 생각했지만 잘 생각해보면 진짜는 아니었구나하고 인정하게 됩니다. 늘 한자락 뭔가가 깔려 있는 자신을 보게 되는 것 같아요.

 

S; 저도 '배우기를 좋아한다'고 생각해 왔었는데 공자의 말씀을 보고 생각해 보니 부끄러운 생각이 들어요. 자신의 생각이나 감각과 다른 이야기나 책은 잘 봐지지 않거든요.
다르다고 생각하면 쉽게 단정해 버리구요.
역시 이런 생각이나 감정으로부터 자유로워져야 '배우기를 좋아하는' 사람으로 되는 것이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