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 11. 11. 17:08ㆍ사상·철학·종교(당신의 덕분입니다)/유교(儒敎)
구이경지(久而敬之) (제 5편 공야장)
⑨ 재여(宰予)가 낮잠을 자니,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썩은 나무는 조각할 수 없고, 썩은 흙으로 쌓은 담장은 흙손질을 할 수 없으니, 재여같은 사람에게 무슨 말로 꾸짖으리오."
또 말씀하시기를, "전에는 내가 남을 대할 때 그 말을 듣고 그 행실을 믿었으나, 이제 나는 사람을 대할 때 그 말을 듣고 그 행실까지 살피게 되었으니, 재여 때문에 고치게 되었노라."
(宰予 晝寢 子曰 朽木 不可雕也 糞土之牆 不可 也 於予與 何誅 子曰 始吾於人也 聽其言而信其行 今吾於人也 聽其言而觀其行 於予與改是)
⑩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나는 아직 강한 사람을 보지 못했노라."
그러자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신정(申 )이 있습니다."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정은 욕심이 많은 사람이거는, 어찌 그를 강한 사람이라 하리요?"
(子曰 吾未見剛者 或 對曰 申 子曰 也慾 焉得剛)
⑪ 자공이 말하기를, "남이 나에게 좋지 못한 일을 하는 것을 바라지 않으므로 나 또한 다른 사람에게 불의를 행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공자께서 그 말을 들으시고 말씀하시기를, "너는 아직 그런 경지에 미치지 못하였느니라."
(子貢 曰 我不欲人之加諸我也 吾亦欲無加諸人 子曰 賜也 非爾所及也)
⑫ 자공이 말하기를, "선생님의 문화(文華)는 가히 얻어 들을 수 있으나, 선생님의 성품과 천도에 대한 말씀은 가히 얻어들을 수 없었다."
(子貢 曰 夫子之文章 可得而聞也 夫子之言性與天道 不可得而聞也)
⑬ 자로(子路)는 교훈을 듣고 그것을 실행하지 못하였으면 오직 새로운 말을 들을까 두려워하였다.
(子路 有聞 未之能行 唯恐有聞)
⑭ 자공이 묻기를, "공문자를 어찌 문(文)이라고 부르게 되었습니까?"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그는 매우 영민하고 학문을 좋아하며, 아랫 사람에게 묻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는 자이므로 문이라고 부르게 되었느니라."
(子貢 問曰 孔文子 何以謂之文也 子曰 敏而好學 不恥下問 是以謂之文也)
⑮ 공자께서 자산을 평하시기를, "군자의 네 가지 도를 지니고 있었으니 그 행실에 있어서는 공손하고, 그 윗사람을 섬기는 데 있어서는 공경하고, 그 백성을 기르는 데 있어서는 은혜로우며, 그 백성을 다스리는데 있어서는 의로우니라."
(子謂子産 有君子之道四焉 其行己也恭 其事上也敬 其養民也惠 其使民也義)
16)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안평중은 사람과 잘 사귀었느니라. 오래도록 변함없이 존경하였느니라."
(子曰 晏平仲 善與人交 久而敬之)
<강독>
말과 행동의 일치는 쉽지 않다.
말은 과장하려는 경향이 있다. 특별히 악의를 가지고 거짓말을 하는 것에 대해서는 오히려 누구나 알기 쉽지만 무의식적으로 과장하려는 경향에 대해서는 그냥 넘어가기 쉽다.
그러나 행위 특히 무의식적으로 행하는 일상적인 행동을 보면 그 사람의 심층의 의식이 잘 나타난다.
그래서 자기 자신이나 다른 사람을 볼 때 그 일상적 행위나 습관을 잘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
13장에서 자로가 '오직 새로운 말을 듣는 것을 두려워 하였다( 唯恐有聞)'라는 말에서도 이런 것이 전해져 온다.
10장의 '욕심이 많은데 어찌 강한 사람이라 하리오(慾焉得剛)'하는 대목은 깊이 음미할 만하다.
'剛'은 꿋꿋함이나 일관됨 같은 느낌으로 다가온다.
사람들이 '의지가 굳세다'라고 말하는 경우는 흔히 고집이 세고 자기를 관철하려는 욕구가 강한 사람을 가리킬 때가 있지만 공자에게는 그것은 강(剛)한 모습과는 거리가 멀다.
욕(慾)은 아집(我執)이다. 판단 기준이 '자신'이다. 그래서 '이익'에 흔들릴 수 밖에 없다. 그냥 밀고 가는 것은 완고함이다. 그 것을 꿋꿋함이나 일관됨과 혼동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아집을 만족시킬지는 모르나 그것은 진정한 강(剛)이 아니다.
진리를 바탕으로 할 때만 진정으로 일관될 수 있다. '무엇이 진리인가'를 고정하지 않고 찾아가기 때문에 부드러운(柔) 것이다.
꼭 그렇게 구분하는 것은 어떨지 모르지만 흔히 '비타협(非妥協)'이 자신의 아집을 관철하려는 태도라면 끝까지 진리를 추구하는 태도는 '무타협(無妥協)'이라고 생각한다.
무타협은 '내가 옳다'라는 데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이 진리인가'를 끝까지 추구하는 것이기 때문에 자신의 생각을 고수하려는 것과는 전혀 다른 세계이다.
공자가 말씀하시는 강(剛)은 혹시 이 무타협의 세계와 통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되었다.
11장의 '너는 아직 그런 경지에 미치지 못하였느니라(非爾所及也)'에서 그런 경지란 무엇일까. 당위로서 하려고 하는 것과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것 즉 체득(體得)하는 것의 다름을 지적하신 말씀으로 읽힌다.
몸에 붙어서 그렇게 힘주어 의식하지 않아도 이루어질 때라야 그러한 삶을 즐길 수 있는 것이다!!
12장의 자공의 이야기는 공자 이후 그 제자임을 자인하는 사람을 포함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답습된 것이 아닐까 생각되었다. 지금의 우리도 夫子之言性與天道를 얼마나 이해하고 있을까. 그것은 마음에서 마음으로 통하는 세계가 아닐까. 스스로 그런 마음이 되었을 때 비로소 보여져 오는 세계!
14장의 '敏而好學'과 '不恥下問'는 공자의 '배우기를 좋아함'이 어떤 말인가를 다시 일깨워준다. 아집으로부터 자유로운 인격으로 되는 것이야말로 好學할 수 있는 것이다. 不恥下問은 이런 인격을 잘 나타내는 말로 들린다.
공문자라는 사람이 그 당시에 좋은 평판을 받던 사람이 아니었는데도 공자가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여러 가지를 생각케 한다.
그 시대의 일반적 도덕적 기준에 의한 평판이 시대가 바뀌면 얼마든지 바뀌는 경우도 있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할까하는 생각도 들고, 사람을 평가할 때 어느 한가지가 잘못되었다고 전체를 왜곡해서 보기 쉬운 그런 함정에 빠지지 않고 분리(分離)해서 볼 수 있는 마음의 상태 같은 것이 생각되었다.
15장의 군자의 네 가지 道는 현대에서도 여전히 중요한 덕목이라고 생각될 뿐 아니라 개인주의가 만연한 오늘 오히려 더 강조해야할 덕목이 아닐까.
공(恭), 경(敬), 혜(惠), 의(義)의 조화는 절묘하다는 생각마저 든다. 사랑(恭, 敬, 惠)과 정의(義)의 조화는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의 모든 영역에서 가장 중요한 바탕이다.
기양민야혜(其養民也惠)와 기사민야의(其使民也義)를 오늘의 민주주의에서 생각한다면 양민(養民)은 복지나 교육 분야, 사민(使民)은 치안이나 행정 분야로 생각하면 될 것 같다.
16장의 구이경지(久而敬之)는 인간관계의 정수(精髓)를 잘 지적하는 말씀으로 다가온다.
실제로 부모 자식 간이나 부부 간의 관계를 생각해 보면 이 말씀이 절실하게 느껴지지 않는가.
가까운 사이나 늘 보는 관계에서는 오랫 동안 자신의 아집(我執)을 감출 수 없다.
연인 사이일 때는 모르던 것이 오랫 동안 결혼 생활을 하다보면 알게 된다. 흔히 '콩깍지가 끼었었다"라고 말하지만 그것은 상대가 자신의 아집을 감추게 되는 면도 있지만 그 보다는 자신이 상대를 그대로 보지 않고 자신이 만든 상(像)으로 상대를 보았기 때문이 더 클 것이다.
그 상(像)은 깨어지게 되어 있다. 그러면 존경심이 살아진다. 상대 때문에 사라지는 것으로 착각하기 쉽지만 그것은 상대 때문이 아니다.
사랑이나 공경은 자기가 만든 상(像)에 대해서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상대에 대한 것일 때 진실한 것이다.
이것이 구이경지(久而敬之)의 세계가 아닐까.
가까운 사이, 오래 된 사이에서 존경하고 존경 받는 것이야말로 인생을 잘 사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대화>
A; 말이 앞서는 것은 보통의 사람에게는 어쩔 수 없는 면도 있는 것 같아요. 다만 말에 행동이 따라오지 못할 때 공허감을 느끼게 되고, 그런 자신을 되돌아 보게 되는 것 같아요.
이것도 반복하다 보면 태연해 지고 나중에는 습관성이 되버리는 것 같은데 그것이 경계해야할 일 같아요.
B; 자기를 합리화하려는 마음이 늘 작용하잖아요. 변명하고 감추려하는 그런 마음이 생길 때마다 자기를 그대로 바라보는 연습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또 한 가지 생각할 것은 實務力을 높이는 것이 필요하다는 거에요.
관념이 앞서고 실무력이 약하다는 것은 뭔가 진실한 태도에서 멀어지게 하는 요소라고 생각해요.
C; '慾焉得剛'은 요즘 제가 그 동안 몸 담아 왔던 조직을 생각할 때 절실히 다가오는 구절 같네요.
D; '剛'을 '柔'의 대칭어로 보통 생각하지만 여기서 공자가 말하는 '剛'은 '柔'와 통하는 것 같아요. 흔히 '柔'는 노자가 즐겨 하는 것이고 공자는 다르게 생각하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은 것 같네요. 柔와 剛의 통일이라고나 할까요.
그런 점에서 無妥協의 세계가 와 닿네요.
E; 慾은 아집인데 아집이 있는 '剛함'이 갖는 한계랄까 하는 것을 지적한 말로도 들리구요. 실제로 욕심이 있으면 그 욕심 때문에 진리를 향한 꿋꿋함보다는 이해 관계에 따라 변할 수 밖에 없는 것 아닌가요. 보통 剛이라고 느끼는 경우에 완고함을 그렇게 말하는 경우가 있는 것 같은데 전혀 다른 세계라고 생각해요.
F; 공자가 자공에게 '너는 아직 그런 경지에 이르지 못하였다'라고 말씀하신 정경이 그려지는 같아요. 그렇게 말하고 들을 수 있는 관계가 부럽기도 하구요.
공자가 말씀하신 경지란 '자연스럽게 그렇게 되는 상태'를 말하지 않을까요.
뭔가 힘을 넣어서 하려는 것과는 다른 경지라고 생각해요.
G; 그런 점에서 다음 장도 읽혀지는 것 같네요. 그 문장은 얻어 들을 수 있지만 그 성품과 천도는 얻어 들을 수 없다라는 뜻이 잡히는 것 같아요. 말이나 문장 너머의 곳, 말이나 문장으로는 표현할 수 없는 곳에 진리가 있지 않을까요.
H; 불가(佛家)에서는 이언진리(離言眞理)라는 말도 있는데요. 공자께서는 실제로 추상적이고 관념에 흐르기 쉬운 명제 들에 대해서는 언급이 별로 없는 것 같아요.
仁을 강조하시지만 인(仁)이란 이런 것이다라고 정의(定義)하는 말씀은 별로 하지 않으시고 구체적인 경우에 '이것을 인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인(仁)한지에 대해서는 모르겠다' 는 등으로 말씀하시는 것 같아요.
언듯 생각하면 애매한 것 같이도 느껴지지만 뭔가 말로 정의할 수 없는 또는 말로 표현하면 굳어져버리기 쉬운 그런 점 때문이라고 생각되네요.
I; 그 말을 듣고 보니까 뭔가를 정의(定義)하지 않으면 개운치 않아하는 제 자신의 모습이 보이는 것 같아요.
J; 자로의 유공유문(唯恐有聞)이라는 말에서도 언행일치(言行一致)를 얼마나 중시하였나 하는 학풍(學風)을 느낄 수 있어요.
K; 저는 불치하문(不恥下問)이라는 말에서 남에게 잘 묻지 못하는 자신의 실태가 새삼스럽게 보여 옵니다. 정말로 잘 모르겠다하는 심정이 되지 않거나 '내노라'하는 마음이 있는 한 참으로 묻는다는 것이 잘 안된다고 생각되네요.
묻는 것 같지만 자기 생각을 확인하거나 심지어는 강요하려는 마음으로 하는 경우가 많지 않나요.
L; 평판이 안 좋았던 공문자에 대해서 공자가 칭찬한 것이 가슴에 와 닿아요, 보통 어떤 사람의 한 가지 행동이 마음에 걸리면 그 사람을 제대로 못 보는 경우가 많지 않나요. 저도 생각은 그래서는 안된다고 하면서도 실제로는 분리가 잘 안되더라구요.
M; 군자의 네 가지 도(道) 가운데서 특히 혜(惠)와 의(義)의 조화는 비단 정치의 요체일 뿐만 아니라 바람직한 사람의 품성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의(義)는 날카로움이 느껴지는데 혜(惠)는 부드럽거든요. 두 가지가 한 사람의 성품 가운데 조화되는 것이 이상이 아닐까요.
N; 그러면 참 좋겠지만 사람의 타고난 성품을 바꾸는 것은 참 힘이 드는 것 같아요. 자기가 부족한 점은 다른 사람이 채워 주도록 사람과의 좋은 결합이 더 쉬울 것 같아요. 부부나 형제 또는 동료가 서로 상대의 장점을 살리도록 서로 인정하는 것이 삶의 지혜 아닐까요.
O; 구이경지(久而敬之)는 사람의 사귐에 대해 정말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해요.
가까이 오래 사귀면서 공경하는 마음이 변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 상대의 인품 여하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쪽에 달려 있지요. 흔히 상대가 그러니까 어쩔 수 없다라고 하지만 그 것은 잘못 생각하는 거지요. 자신의 아집이 강하면 불가능한 세계 같구요.
P; 부부 사이야 말로 구이경지(久而敬之)가 가장 필요한 것 같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부부 관계야말로 성인(聖人)이 되는 연습을 하는 가장 좋은 파트너라고 생각되네요.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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