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끄러운 세상속에 인가 "法" 이란 뭣인가...?
사실 法을 전한다고 하나
전 할 수 있는 法은 法이 아닌 것이다.
바른 法을 알면 법은 없어지며 받을 법이 있다면 그 것은 法이 아닌 것이다.
만약에 법을 받는 이가 있다면 받는 자가 없어져 버린다.
날마다 나는 없어지고 이 살아 있는 삶속에서 날마다 새로운 法이 살아 나는 것이다.
그러나 요즈음은 法理를 법이라고 굳게 지키고 있는 이들이 많다.
그건 이미 죽은 법인 것이다.
그런 법은 경계를 만나면 흐트러지고 듣기 싫은 소리 들으면 삐치고
자기가 쌓은 아성을 염려한다.
법은 무너지는 것도 아니며 또한 어느 한사람에게 고여 있는 것도 아니다.
옛 사람들이 법을 인증하는 것은 그렇게 공부하면 된다는것을 증명했던 것이다.
그러나 요즈음 사람들은 법을 얻는 것이 있어서 그 얻은 법을 내세워 몇대 祖師라고 한다.
긍정적으로 보면 法을 믿는 마음의 표현은 되지만 남들에게 전달 되는 것은 어떤 法이 따로 있는 것처럼 인식된다.
이는 法이 法을 구속하는 것이 되며 좁은 法見을 떨쳐 버리지 못한 데서 오는 소산이다.
법은 법으로 있는 것이 아니며 사람을 살려내는 데 있다.
법이 법을 만나면 법은 없어진다.
번뇌 역시 만나면 사라진다.
경계 또한 만나는 경계는 사라져 좁은 도량을 건립하지 않는다.
四海에 널러져 있어 인연따라 흔적을 보이고는 다시 비어진다.
그 눈은 중생심과 같이 있으며 그 중생심속에서 물들지 않는다.
대개 요즈음 선사님들은 "이도리를 알겠는가?"
하고 묻기를 좋아 한다.
그 도리를 알 수 있게 길을 가르쳐 주지도 않했으면서 사람을 기다린다.
듣는 이는 어리둥절하다.
"뭣이 있어서 저럴까?" 한다.
그리고 할! 을 하든지 주장자를 치고 내려간다.
중생의 눈은 가야 할 곳을 모른다.
이게 禪家의 가풍일까 !
法은 사람 맘속에 있는 것이다.
부처 또한 사람 맘에가 있다.
마음을 알게 하고 법을 가르쳐야 한다.
法은 마음의 일이다.
그런데 우리는 마음 ! 마음! 하면서 마음이 마음에가 가있지를 못하다.
생각으로 접근하면 퇴굴심 뿐이요, 어렵다는 맘만 더 든다.
그러나 사람마다 밝은 눈이 있어 마음의 일을 알면 스스로 마음은 벗겨져 나간다.
法은 佛祖의 法, 衆生의 法이 둘이 아니다.
다만 사람은 중생쪽에 기울어져 있을 뿐 다른 法이 없다.
佛祖 또한 衆生 속에 있되 衆生心에 마음이 가 있지 않을 뿐이다.
그래서 이 衆生心이 곧 法이 되는 것이다.
결코 이 중생심을 떠나 다른 법이 없음을 알아야 한다.
- 소요산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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