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정관념(아상)에 대하여

2008. 7. 8. 15:24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오매일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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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정관념(我相;내 생각)에 대하여...

 

 

종교공부를 하는 이유는 고정관념을 버리기 위함입니다.

고정관념은 내 생각(我相)을 가르키는 말입니다.

내 생각이 만들어 지는 것은, 내가 알수도 없는 과거 전생으로 부터 배우고 익혀온 것들과, 금생에 태어나서 지금까지 배우고 익혀온 모든 것들이 경험과 기억으로서 저장되어 나의 모든 생각을 만들어 내게 되며, 그 생각에 의해서 행동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나에게 이익을 주는 것은 좋아하고, 불이익을 주는 것은 싫어합니다.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은 그대로 저장되어 고정관념이 되고 그것은 종자(원인,因)의 역활을 하게되어 생각을 만들어 내게되고, 그 만들어진 생각이 좋아하는 것을 만나면(대상,緣) 기분이 좋아서 좋은 결과를 만들게 되고, 싫어하는 것을 만나면 나뿐 결과를 만들게 됩니다(果報).

사람마다 삶이 다른 것은 생각(고정관념;아상)이 다 다르기 때문이며, 생각에 의해서 행동을 하게되고 그 행동은 업(業)이라는 결과를 만들기 때문에 業에 의한 윤회를 하게되며, 業은 그 사람의 미래를 결정 짓게됩니다(자업자득). 

 

이것을 연구하여 체계화 해 놓은 것이 사주, 역술, 관상등이므로 業은 태어나는 시기와 생김새 등을 결정짓는 원인이 됩니다.

결국 생각(마음;고정관념)이 業을 만들어 내므로 우리들의 운명은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느냐?에 따라서 결정 되므로 "인생의 합계는 부와 명예의 합계가 아니라 생각의 합계다"라는 말입니다.

 

이러한 이치를 모르기 때문에 운명에 관한 것들을 아예 믿지 않거나, 믿게 되는 것입니다.

아는 사람은 믿기도 하지만 믿지 않기도 하여 운명을 스스로 개척해 나가므로 운명의 노예가 되지 않기 때문에 운명은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한 것입니다.

 

가족간에도 내가 싫어하는 사람과 좋아하는 사람이 반드시 있습니다.

이때에 싫고 좋음을 분별하지 않는것이 고정관념을 없애는 것인데, 이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래서 수행이 필요한 것입니다.

 

옛날 어느 고을에 두 아들과 살고 있는 아버지가 있었습니다.

큰 아들은 불효자라고 마을에 소문이 나 있었으며, 작은 아들은 효자라고 알려져 있었습니다.

어느날 아침 형은 자고있는 아버지의 곁에서 아버지의 옷을 입고 앉아있는 동생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 후로도 매일 아침 동생은 그렇게 하였습니다.

이상하게 생각한 형은 동생에게 그 까닭을 물었습니다.

동생이 대답하기를, "아버지가 일어 나셔서 옷을 입으실 때 차지 않게 하기 위해서 몸으로 옷을 녹히고 있는 중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을 들은 형은 감동하여 자기도 내일 부터 그렇게 하겠다는 결심을 하고, 그 다음날 일찍 일어나 아버지의 옷을 입고 앉아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잠에서 깨어나 보니 큰 아들이 자기의 옷을 입고 있는 것을 보고는, "이놈이 이제는 애비의 옷까지 빼앗아 입으려고 한다"고 고함을 치면서 나무라고 내 쫓아 버렸습니다.

 

이와같이 동생은 효자고 형은 불효자라는 고정관념을 가지고 있으면 사실을 진실되게 보지 못하게 되므로 대상의 옳고 그릇됨을 이미 자기마음대로 결정해 버리게 되어 어떠한 문제가 생겼을 때 일차적인 원인을 찾기가 어렵게 되어 문제 해결의 가장 큰 방해 요소가 되므로, 이것은 우리들의 모든 불행의 씨앗이 됩니다.

 

고정관념이 만들어 지는 이유는 현상적(用,쓰임새;色,모양)으로 차별되어 다르게 나타나 있는 것에 집착하여 그 뒤에 감추어져 있는 본질(體)을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살고있는 세상은 3차원의 세계입니다.

3차원에 오랜시간 동안 익숙해져서 우리들의 인식이 3차원의 세계에 고정되어 있으므로 누구나 눈에 보이는 것을 실상으로 인식하기 때문에 눈에 보이는 것이 다르면 다르다고 합니다.

이렇게 다르게 보는 것이 고정관념입니다.

사람의 눈이 반드시 두개 있어야 한다고 인식을 고정시켜 놓기 때문에 한개 있는 사람을 분별하여 차별하게 됩니다. 

그러나 3차원보다 차원이 높은 고차원의 눈으로 보면 3차원의 실상은 허상임을 알게 됩니다.

모두 분별되어 차별화 되게 보여지는 그 깊은 속에 모든 것의 본질은 같다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수행(종교공부)을 하여 깨달음을 얻는 것은 마치 이와 같아서 인식의 수준을 높이는 것이므로 지식공부처럼 아는 것으로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온 몸으로 익히고 확실하게 보아서 체득(증득)하여야 합니다.

 

3차원 이상의 세계는 눈으로는 볼 수 없습니다.

마음의 눈으로 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 불(火)속 이라고 하면 믿어 지시겠습니까? 

마음의 눈으로 보면 마치 불속에서 물을 구하고 있는 모습으로 보입니다.

불속에 있는 물 가운데에 내가 있다는 사실을 모릅니다.

불속임을 알고 그곳을 아예 멀리 벗어나 버리면 더이상 물을 구해야 할 필요는 없어 집니다.

        

본질을 성품(性品)으로 보면, 만물은 시시각각으로 변하고 있으므로 무상(無常)하여 고정불변의 실체가 없으므로 공(空)한 것이며, 물질(物質)로 보면, 地, 水, 火, 風의 4대(四大)가 마치 한조각 구름이 인연따라 생겼다 흩어지는 것(연기,緣起)과 같은 현상이 연속적으로 반복(윤회) 되고 있을 뿐이며, 이것은 서로 상관관계로서 서로 주고 받음으로서 각자의 존재를 유지해 나갈 수 있다는 하나의 공동 생명체를 말합니다.

 

하나의 공동생명체이므로 불생불멸(不生不滅:나고 죽음도 없고)이며, 부증불감(不增不減:늘어남도 줄어듬도 없고)이고, 불구부정(不垢不淨:더러움도 깨끗함도 없다)입니다.

 

만물의 체(본질)는 똑 같습니다.

따라서 우리들 개개인의 참나도 사람마다 다른 것이 아니라 모두가 똑 같기 때문에(不二,不異) 空이며, 불생불멸인 것입니다.

 

이 사실을 확실하게 알면 깨달은 사람이고, 모르면 중생이라 합니다.

이것을 아는 사람은 고정관념이 없기 때문이고, 모르는 사람은 고정관념이 있기 때문입니다.

까닭으로 고정관념이 바로 무명(無明;我相)인 것입니다.

 

고정관념은 내 생각만 바꾸면 된다는 사실을 아셨으니, 그 원인(무명)만 제거해 버리면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으니, 쉽기로 말하면 이것 보다도 더 쉬운 일은 없을 것이나 막상 해보려 하면 이것보다 더 어려운 일이 없습니다.

 

태국과 같은 남방에 가면 원숭이를 잡을 때, 야자열매의 속을 비우고 거기에 원숭이의 손이 겨우 들어 갈 정도의 구멍을 뚫고 그 속에 원숭이가 좋아하는 먹이를 넣고 열매에 끈을 메고 나무에 묶어 두면 배고푼 원숭이들이 와서 손을 넣고 먹이를 움켜쥐면 주먹이 빠지지 않아 사람에게 붙잡히고 맙니다.

물론 원숭이는 이러한 사실을 몰라서 붙들리는 것이기는 하나, 설사 안다고 하드라도 어떻게 하든 먹이를 놓치지 않고 달아나려는 어리석음 때문에 결코 먹이를 잡고 있는 손을 놓치는 못합니다.

 

우리들의 어리석음이 바로 고정관념이며, 우리들의 고정관념은 많은 것을 가지려하는 마음과 높은 지위에 올라가려고 하는 것 등입니다.

 

불교공부에서 "버려라", "내려 놓아라", "멈추어라"하는 것은 내 생각(고정관념;아상;무명;지식;알음알이등)을 버리고, 내려놓고, 멈추라는 뜻입니다.

기독교에서 "하나님(진리)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라"는 가르침도 내 생각을 버리고, 내려놓고, 멈추지 않으면 실현 불가능한 것입니다.

따라서 불교에서 수행하여 깨달음을 얻는 것이나, 기독교의 가르침이나 조금도 다를 것이 없습니다.

"불교는 자력(自力)의 종교고, 기독교는 타력(他力)의 종교다"라는 말은 이러한 의미로 볼 때는 맞지 않는 말이며, 자력, 타력의 문제가 아니라 자업자득의 문제입니다.

 

그러면 내 생각을 버리고 무엇으로서 그 자리를 대신 하여야 할까요?

절대 불변의 진리로서 그 자리를 대신하여야 합니다.

이일은 그냥 이루어 지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종교 공부(수행)를 통해서 깨달음을 체득(증득)하여야 가능 합니다.

 

지혜를 얻는 종교 공부나, 지식을 얻는 공부를 하여 많이 알면 알수록 자기도 모르게 아상은 더욱더 강해지기 쉽습니다.

"맞아!, 맞아!" 하면서 감동을 하게되고 거기에서 얻어진 것으로서 자신도 모르게 그것을 고정관념화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진리도 다 깨치고 나면 그것도 버려라"고 하는데 이것은 매우 중요한 가르침입니다.

아무리 진리라 할지라도 그것을 자기것으로 고정관념화 하면 불변의 진리인 "모두가 하나되는 것"을 방해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버리고, 비우라는 것입니다.

 

고정관념을 비웠는지를 자기자신이 알 수 있는 방법으로는, 대화를 할 때 내 생각과 틀리는 말을 상대가 하면 "너의 말은 틀렸어"라는 마음이 일어 납니다.

이때에 내 생각과 상대방의 생각이 부딪쳐서 말 씨름이 생기면 고정관념이 있음이고, 틀렸다는 것을 알고서도 부딪치지 않고 끝까지 상대방의 말을 들어주고 왜 다른 말을 하는지? 그 까닭을 이해하여 찾아 내면 고정관념이 없는 것입니다.

 

이와같이 고정관념(아상)이 있으면 항상 다른 것들과 부딪치게 되어 고통스러운 삶을 살아가게 되고, 고정관념이 없으면 어디에도 부딪힐 일이 없으므로 무애자재한 중도의 삶(완성된 지혜의 삶)을 살아 갈 수 있는 것입니다.

 

고정관념을 버리는 것은 모든 것을 해결 할 수 있는 열쇠가 되는 것입니다.

 

[모셔온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