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엄경:제10권 1/4 행음(行陰)에서 생겨나는 열 가지 장애

2008. 7. 18. 13:13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능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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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 엄 경

    능엄경:제10권 1/4 행음(行陰)에서 생겨나는 열 가지 장애 “아난아, 저 선남자가 삼마지를 닦아서 상음이 다 없어 지면그 사람은 평상시에 꿈과 생각이 사라져서 깨어 있거나 잠자거나 항상 한결같이 밝은 깨달음이 비고 고요하여 마치 맑게 개인 허공과 같아서 다시는 앞에 나타나는 거칠고 무거운 그림자 같은 일들이 자취를 감추며 세간의 큰 땅덩어리나 산과 강을 보되 마치 거울에 물건이 비치듯 하여 와도 달라붙지 않고 가도 종족이 없어서 걸림 없이 받아들여 비침에 따라서 묵은 습기는 분명하게 없어지고 오직 유일한 참된 정기만 있을 뿐이다. 나고 없어지는 근원이 이로부터 드러나서 시방에 흩어녀 있는 열두 종류의 중생을 모조리 보게 되리니비록 그들 각각의 생명에 대한 내역까지는 낱낱이 통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함께 생겨나는 근본이 마치 아지랑이[野馬]가 아른거리고 반짝이는 것과 같아서 허무한 감각기관이나 그 대상인 물질의 궁극적인 이치를 깨닫게 될 것이니 이것은 ‘행음의 구역’이라고 하느니라. 만일 이렇게 아른거리고 반짝이는 원래의 성품이 본래 맑은데[識陰]로 들어가서본래의 습기[行陰種子]가 한번 맑아지면 마치 파도가 가라앉아서 맑은 물로 변화되는 것과 같으니 이를 이름하여‘행음이 다 없어진 경지 ’라고 한다. 이 사람은 중생탁(衆生濁)*에서 벗어날 수 있으리니 그 원인을 관찰해 보면 깊이 숨어 있는 허망한 생각이 그 근본이 되느니라. 아난아, 마땅히 알아야 한다. 삼마지 가운데서 올바른 지혜를 증득한 모든 선남자가 옳은 마음이 굳게 엉켜서열 가지 천마가 틈을 노리지 못하리니 비로소 정밀하게 연구해서 생겨나는 종류 [行陰]의 근본을 다 알아내어 그 본래 종류 가운데 생겨나는 근본[行陰]이 환하게 드러나나니. 저 그윽이 맑고 원만하게 동요하는 근원을 관찰하고 그 원만한 근원 가운데 계산하여 헤아리는 마음을 일으키면 그 사람은 두 가지 원인이 없다는 논리에 떨어지느니라. 첫째는 이 사람이 ‘본래 원인이 없다’고 보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사람은 이미 생겨나는 기미[行陰]를 완전 하게 깨뜨리고 안근의 팔백 공덕을 의지해서 팔만 겁 동안에 살고 있던 중생들의 업보의 흐름에 굽이쳐 돌아 여기서 죽으면 저기서 태어나는 모습만을 보나니, 다만 중생이 그곳에서 윤회하는 것만 보고 팔만 겁 밖의 일은 캄캄하여 볼 수가 없기 때문에 문득 ‘세간의 시방중생들이 팔만 겁 이전에는 아무 원인도 없이 저절로 생겼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렇게 생각함으로써 올바르고 원만한 지혜를 잃고 외도에 떨어져서 보리의 성품을 현혹시키느니라. 둘째는 이 사람이 뒤[末]에도 원인이 없다고 보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이 생겨남에 대해서 이미 그 근본[本]을 보고 나면 사람은 사람을 낳고 새는 새를 낳으며 까마귀는 본래부터 검고 따오기는 본래 희기 때문이며, 사람과 하늘은 본래 서서 다니고 축생은 본래 기어 다니며 흰 것은 씻어서 희어진 것이 아니요 검은 것은 물들여서 검게 된 것이지 변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팔만 겁 동안에 한 번도 변한 것이 없음을 알고 있기 때문에 이제 이 형체가 다 없어지더라도 역시 그러하리라고 생각하여 내가 본래 보리를 본 적이 없으니 어찌 또 보리를 이루는 일이 있겠는가? 그러므로 오늘날 모든 물질의 형상이 모두 본래 원인이 없으니 뒤에도 분명 원인이 없음을 알 수 있다고 한다. 이로 말미암아 헤아리므로 올바르게 두루 아는 소견을 잃어버리고 외도에 떨어져 보리의 성품을 현혹하리니 이것을 이름하여 제일 외도가 주장하는‘원인이 없다’는 논리이니라. 아난아, 이 삼마지 가운데 모든 선남자가 올바른 마음을 굳게 하면 마구니가 틈을 탈 수 없게 되리니 태어남이 있는 무리들의 근본을 추구하여 저 그윽이 맑고 항상 흔들리는 근원을 관찰하다가 원만하고 항상한 가운데 헤아리는 마음을 일으키면 그 사람은'네 가지 두루하고 항상하다는 논리'에 빠지게 되느니라. 첫째는 이 사람이 마음과 그 대상의 성질이 두 곳에 모두 원인이 없음을 추구해서 이를 닦고 익혀서 이만 겁 동안에 시방 세계에 나고 죽음이 있는 것은 모두 순환하는 것이어서 일찍이 흩어지지 않는다고 생각하여 항상한 것이라고 여기느니라. 둘째는 이 사람이 사대의 근원을 추구하여 네 가지 성질이 항상 머문다고 생각해서 이를 닦아 익혀 능히 사만 겁 동안 시방중생들의 나고 죽는 본래 모습이 ‘모두 그 본체는 항상한 것으로서 일찍이 흩어져 사라짐이 없는 것이다’라고 하여 항상한 것이라고 생각하느니라. 셋째는 이 사람이 여섯 가지 감각기관과 말나식(末那識, 七識)*과 집수(執受)*를 추구하여 심의식(心意識) 가운데 근원이 말미암은 곳은 그 성품이 항상하다고 생각하므로 이를 닦아 익혀서 팔만 겁 가운데 모든 중생들이 업력을 따라 한없이 순환하므로 잃어버리는 것이 없으며 본래부터 항상 머무는 줄로 알고는 잃어버리지 않는 성품을 궁구하였 으므로 항상하다고 생각하느니라. 넷째는 이 사람이 이미 생각의 근원[想陰]이 다 없어졌으니 나는 이치로 다시 흐르거나 그치는 작용이 없다고 생각하여 ‘나고 죽는 부질없는 마음이 지금 이미 다 없어졌으니 그런 이치 가운데 저절로 나고 죽지 않음을 이루었다’고 생각하여 그 마음이 헤아리는 것을 따라 항상하다고 생각하느니라. 이러한 견해로 말미암아 항상하다고 생각하므로 올바르고 두루한 지혜를 잃어버리고 외도에 떨어져서 보리의 성품을 미혹하게 하나니 이것이 제이 외도가 주장하는‘원만하고 항상하다’는 논리이다. 또 삼마지 가운데 모든 선남자가 바른 마음을 굳게 하면 마구니가 틈을 얻을 수 없게 되리니 생겨나는 종류의 근본을 궁구하여 저 그윽이 맑고 항상 요동하는 근원을 관찰하다가 자기나 남 가운데 계산하여 헤아리는 마음을 일으키면 그 사람은 한 부분은 항상하지 않은 것이고 한 부분은 항상 하다고 주장하는 ‘네 가지 뒤바뀐 논리’에 떨어지게 되느니라. 첫째는 이 사람이 오묘하고 밝은 마음이 시방세계에 두루한 것을 보고는 맑고 고요한 것을 가지고 ‘마지막 경지의 신비한 자기’라고 생각하여 그로부터 헤아리기를 ‘나는 시방세계에 두루하여 밝음이 뭉쳐서 흔들리지 않으면 모든 중생이 나의 마음 속에서 저절로 생겨났다가는 죽고 하나니 곧 내 심성(心性)은 항상한 것이요, 이 마음 속에 나고 죽는 성품은 항상함이 없는 것’이라고 하느니라. 둘째는 이 사람이 그 마음은 살피지 못하고 시방세계에 항하의 모래같이 많은 국토만을 두루 살펴보고서 오랜 세월 동안에 무너지는 곳을 보고는 ‘궁극적으로는 항상함이 없는 성품이다’라고 하고 오랜 세월 동안에 무너지지 않는 곳을 보고는 ‘궁극적으로는 항상하다’고 하느니라. 셋째는 이 사람이 각별히 관찰하되 ‘나의 마음은 정밀하고 미묘하며, 세밀하기가 마치 작은 먼지 같아서 시방세계에 흘러다녀도 그 성품은 변함이 없으나 이 몸은 나고 죽게 한다’고 생각하나니 저 무너지지 않는 성품은 나의 항상한 성품이요, 나로부터 흘러나온 나고 죽는 모든 것은 항상 하지 못한 성품이라고 하느니라. 넷째는 이 사람이 상음이 다 없어진 것을 알고 나서 행음이 유전함을 보고는 행음이 항상 유전하는 것을 항상한 성품이라고 생각하고 색음과 수음과 상음 등은 이미 다 없어졌으므로 항상하지 못한 것이라고 하느니라. 이로 말미암아 일부분은 항상함이 없고 일부분은 항상 하다고 분별하기 때문에 외도에 떨어져서 보리의 성품을 현혹하리니 이것이 제삼 외도가 주장하는‘한 부분만 항상하다’는 놀리이니라. 또 삼마지 가운데 모든 선남자들이 바른 마음을 굳게 응집시키면 마구니가 틈을 탈 수 없게 되리니 생겨나는 종류의 근본을 궁구하여 그윽이 맑고 항상 요동하는 근원을 관찰하다가 나누어진 위치 속에서 헤아리는 마음을 일으키면 그 사람은 ‘네 가지 유변론(有邊論)’에 빠지느니라. 첫째는 이 사람의 마음에 생겨나는 근원이 끊임없이 흘러서 쉬지 않는다고 생각하여 ‘과거와 미래는 한계가 있다’고 생각하느니라. 둘째는 이 사람이 팔만 겁까지는 중생을 관찰할 수 있으나 팔만 겁 이전은 고요하여 듣고 볼 수가 없으므로 듣고 볼 수가 없는 것은‘한계가 없다’고 하고 중생이 있는 것이 보이는 것은 ‘한계가 있다’고 하느니라 셋째는 이 사람이‘나는 두루 앎으로 한계가 없는 성품을 얻었다’고 생각하고,다른 모든 사람들은 ‘내가 알 만한 곳에 나타나되 나는 그가 아는 성품을 알 수 없으므로 저들은 오직 한계가 없는 마음을 얻지 못하였고 다만 한계가 있는 성품만 지녔다’고 생각하느니라. 넷째는 그 사람이 행음은 본래 빈 것이라는 것을 궁구하다가 그가 본 마음으로 헤아려 생각하기를, ‘모든 중생의 몸 가운데 본래 반은 나는 것이고 반은 죽는 것’이라고 생각하여 그 세계의 모든 것들도 ‘반은 한계가 있는 것이고 반은 한계가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느니라. 이렇게 한계가 있는 것과 한계가 없는 것이라고 헤아려 생각하기 때문에 그로 인하여 외도에 떨어져서 보리의 성품을 현혹하나니 이것이 제사 외도가 주장하는 ‘한계가 있다’는 논리이니라. 또 주장하는 가운데 모든 선남자들이 바른 마음을 굳게 응집시키면 마구니가 틈을 얻을 수 없게 되리니 생겨나는 종류의 근본을 궁구하고 저 그윽이 맑고 항상 요동하는 근원을 관찰하다가 느끼고 본 가운데 헤아리는 마음을 일으키면 그 사람은 ‘네 가지 뒤바뀐 생각으로 죽지 않는다’고 생각하여 혼란을 일으키는 허황된 논리에 빠지느니라. 첫째는 이 사람이 변화하는 근원을 관찰하다가 변천하여 흐르는 곳을 보고는 ‘변화하는 것’이라 하고 서로 연속되는 것을 보고는 ‘항상한 것’이라고 하며, 보이는 곳을 보고는 ‘나는 것’이라고 하고 보아야 할 곳이 보이지 않으면 ‘없는 것’이라고 하며, 서로 계속되는 원인의 성품이 끊기지 않는 것을 ‘늘어나는 것’이라고 하고 서로 계속되는 가운데 중간이 떨어진 곳을 ‘줄어드는 것’이라고 하며, 각각 생기는 곳을 ‘있는 것’이라고 하고 서로서로 없어지는 곳을 ‘없는 것’이라고 하여 이치로는 한꺼번에 보면서도 마음으로는 별개의 것으로 보아서 법을 구하는 사람이 와서 그 이치를 물으면 대답하기를 ‘나는 지금 나기도 하고 죽기도 하며,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며, 늘어나기조 하고 덜어지기도 한다’고 하면서 언제나 그 말을 어지럽게 횡설수설 늘어놓아서 저 앞사람으로 하여금 이치를 잃어버리게 하느니라. 둘째는 이 사람이 그 마음의 각각 있는 곳을 자세히 관찰하고서 있는 것을 인하여 증득하였다고 생각하므로 어떤 사람이 와서 물으면 오직 한 마디로 다만 ‘시(是, 그렇다)’라고만 말하고 ‘시’밖에 다른 것은 말할 것이 없다고 하느니라. 넷째는 이 사람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을 한꺼번에 보고서 그 대상이 두 갈래이기 때문에 그 마음이 어지러워져서 어떤 사람이 와서 물으면 대답하기를 ‘있는 것이 곧 없는 것이지만, 또한 없는 가운데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여 모두가 혼란해져서 끝까지 따질 수 없게 하느니라. 이렇게 교란함을 허무하게 헤아리다가 허무해져서 외도에 떨어져 보리의 성품을 미혹하나니 이것이 제오 외도가 주장하는 ‘네 가지 뒤바뀐 생각으로 죽지 않는다’고 생각하며 혼란을 일으키는 허황된 논리이니라. 또 삼마지 가운데 모든 선남자들이 바른 마음을 굳게 응집시키면 마구니가 틈을 얻지 못하리니 생겨나는 종류의 근본을 궁구하여 저 그윽이 맑고 항상 요동하는 근원을 관찰하다가 끝없는 흐름에서 헤아리는 마음을 일으키면 그 사람은 ‘죽은 뒤에도 일정한 모습이 있다’는 뒤바뀐 마음에 떨어질 것이다. 혹 스스로 색신을 고집하여 ‘색신이 곧 나다’라고 하기도 하고 혹은 ‘나는 원만해서 국토를 두루 함유하고 있다’고 생각하여 ‘나는 색을 지닌 존재’라 하기도 하며, 혹은 저 앞에서 일어나는 인연들이 나를 따라 회복하기 때문에‘색신이 내게 속하였다’고 하며, 혹은 내가 행동하는 것에 의지하여 끊임없이 흐르고 있으니 ‘내가 색신 속에 있는 존재’라고 하여 모두를 자신이 헤아리는 생각에 따라 말하되 ‘죽은 뒤에도 일정한 모습이 있다’고 생각하나니 그렇게 돌고 돌아서 열여섯 가지 현상이 있게 되느니라. 이로부터 혹 생각하기를‘번뇌는 어디까지나 번뇌이고 보리는 어디까지나 보리이므로 이 두 성품이 서로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하느니라. 이로 말미암아‘죽은 뒤에도 일정한 모습이 있다’고 생각하므로 외도에 떨어져서 보리의 성품을 미혹하리니 이것이 제육 외도가 주장하는‘오음 가운데 죽은 뒤에도 일정한 모습이 있다’고 생각하는 마음이 뒤바뀐 논리이니라. 또 삼마지 가운데 모든 선남자들이 바른 마음을 굳게 응집시키면 마구니가 틈을 얻지 못하리니 생겨나는 종류의 근본을 궁구하여 저 그윽이 맑고 항상 요동하는 근원을 관찰하다가 앞에서 제거해 없앤 색음과 수음과 상음 가운데 헤아리는 마음을 일으키면 그 사람은 죽은 뒤에는 아무런 모습도 없다고 하는 뒤바뀐 마음에 떨어질 것이다. 저 색음이 없어진 것을 보고나서‘형체는 본래 원인이 없는 것’이라고 하고 상음이 없어진 것을 보고 나서 ‘마음은 본래 얽매인 데가 없는 것’이라고 하며, 수음이 없어진 것을 알고 나서 또 ‘몸과 마음은 서로 관련될 수 없다’고 생각하며, 따라서‘음의 성품[陰性]이 사라졌 으므로 비록 다시 태어나는 이치가 있다고 하더라도 수음과 상음이 없어졌기에 마치 풀이나 나무와 같아서 그 형체가 앞에 나타나도 오히려 얻을 수가 없는 것이거늘 죽은 뒤에 어떻게 다시 실상이 있겠느냐?’ 고 하면서 그로인하여 헤아려 생각하기를 ‘죽은 뒤에는 실상이 없어서 그렇게 돌고 돌아 여덟 가지 아무런 실체 모습이 없다’는 데 빠지게 되느니라. 이를 좇아 혹 생각하기를 ‘열반의 원인과 결과도 모두 빈[空] 것이므로 부질없는 이름만 있을 뿐이지 마침내는 없어지는 것’이라고 단정하느니라. 이로 말미암아‘죽은 뒤에는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하므로 외도에 떨어져서 보리의 성품을 미혹하리니 이를 제칠 외도가 주장하는‘오음 가운데 죽은 뒤에는 실상이 없다’ 고하는 마음이 뒤바뀐 논리이니라. 또 삼마지 가운데 모든 선남자들이 바른 마음을 굳게 응집시키면 마구니가 틈을 얻지 못하게 되리니 생겨나는 종류의 근본을 궁구하여 저 그윽이 맑고 요동하는 근원을 관찰하다가 행음이 남아 있는 가운데 수음과 상음이 모두 없어졌으므로 남아 있는 것과 사라져 없어진 것을 번갈아 생각하여 자체를 서로 무너뜨린다고 하나니 이 사람은 ‘죽은 뒤에는 모두가 생겨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뒤바뀐 논리에 떨어지느니라. 색음과 수음과 상음 가운데 있는 것을 보더라도 있는 것이 아니며 행음이 변천하여 흐르는 속에 없는 것을 보더라도 없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여 그렇게 돌고 돌아 음계의 여덟 가지가 모두 아니라는 현상을 궁구하여 ‘한 가지 인연을 얻음에 따라 모두 죽은 뒤에도 실상이 있는 것이며 또한 실상이 없는 것’이라고 주장하느니라. 또 생각하기를 ‘모든 작용은 성품이 변천하는 것이기 때문에 마음 속에 깨달아 통했다는 생각을 일으켜서 있는 것도 없는 것도 모두 아니다’라고 생각하여 허(虛)와 실(實)을 분간하지 못하느니라. 이로 말미암아‘죽은 뒤에는 모두가 아니다’라고 생각하여 뒷세상이 어둡고 아득해서 말할 수가 없게 되므로 외도에 떨어져서 보리의 성품을 미혹하게 하리니 이는 제팔 외도가 주장하는‘오음 가운데 죽은 뒤에는 모두가 아니다’라고 하는 마음의 뒤바뀐 논리이니라. 또 삼마지 가운데 선남자들이 바른 마음을 굳게 응집하면 마구니가 틈을 얻지 못하리니 태어나는 종류의 근본을 궁구하여 저 그윽이 맑고 항상 요동하는 근원을 관찰하다가 죽고 난 뒤 그 다음 세상에 대하여 아무것도 없다고 억측하여 생각하면 그 사람은 일곱 가지 끊겨 없어진다는 논리에 떨어지느니라. 혹 생각하기를 몸[欲界人天]은 없어지는 것이며, 혹 탐욕이 다 끊어진 곳[初禪]도 없어지는 것이며, 혹 괴로움을 다한 곳[二禪]도 없어지는 것이며, 혹 지극히 즐거운 곳[三禪]도 없어지는 것이며, 혹 다 버린 곳[四禪. 無色界]도 없어지는 것이라고 여겨서 이와 같이 돌고 돌아 일곱 군데를 다 궁구해서 ‘현재 눈앞에서 없어진 다음에는 다시는 회복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느니라. 이로 말미암아 ‘죽은 뒤에는 끊겨 없어진다’고 생각하므로 외도에 떨어져서 보리의 성품을 미혹하리니 이를 제구 외도가 주장하는‘오음 가운데 죽은 뒤에는 끊겨 없어진다’고 하는 마음이 뒤바뀐 논리이니라. 또 삼마지 가운데 선남자들이 바른 마음을 굳게 응집하면 마구니가 틈을 얻지 못하게 되리니 태어나는 종류의 근본을 궁구하여 저 그윽이 맑고 항상 요동하는 근원을 관찰하다가 죽은 뒤 다음 세상에 대해 있다는 견해를 일으키면 그 사람은 다섯 가지 열반 논리에 빠지느니라. 혹은 욕계천으로 죽고 난 뒤에 의지할 곳이라고 생각하기도 하니 이는 원만하게 밝음을 보고 애모하기 때문이며, 혹은 초선이라고 하기도 하나니 이는 성품에 근심이 없기 때문이며, 혹은 이선천(二禪天)이라고 하니 이는 마음에 괴로움이 없기 때문이며, 혹은 삼선천이라고 하니 이는 지나친 기쁨이 따르기 때문이며, 혹은 사선천이라고 하니 이는 괴로움과 즐거움이 다 없어져서 나고 죽음에 윤회하는 성품을 받지 않기 때문이다. 번뇌가 있는 하늘임을 모르고‘작용이 없는 경지’라고 생각을 내어 ‘다섯 곳의 현안한 곳을 수승하고 깨끗한 의지처’라고 생각하면서 이와 같이 돌고 돌아 다섯 곳을 최상의 경지라고 주장하느니라. 이로 말미암아 ‘다섯 곳이 바로 현재의 열반’이라고 생각하므로 외도에 떨어져 보리의 성품을 미혹하리니 이를 제십 외도가 주장하는 ‘오음 가운데 다섯 곳이 바로 현재의 열반이다’라고 하는 마음이 뒤바뀐 논리이니라. 아난아, 이와 같이 열 가지 선나에 대해 잘못 이해하는 것은 모두가 행음에서 작용하는 마음이 서로 얽히고 설켰기 때문에 이러한 생각이 나타나는 것이거늘 중생들이 미련하고 혼미해서 스스로 헤아려 알지 못하고 이렇게 앞에 나타난 형상을 만날 적마다 혼미한 것을 잘못 이해해서 스스로 성인의 경지에 올랐다고 생각하여 큰 거진말을 하게 되면 무간지옥에 떨어지느니라. 너희들은 반드시 부처님의 말씀을 가지고 내가 열반에 든 뒤에 말법세상에 전해 보여서 널리 중생들로 하여금 이 이치를 깨닫도록 하고, 마음의 마구니로 하여금 스스로 깊은 재앙을 일으킴이 없도록 하여 보호해 지켜서 삿된 소견을 소멸시키고 그 몸과 마음으로 하여금 참다운 이치를 깨달아서 최상의 도에 대해 갈림길로 나아가지 않게 하며 마음이 바라는 것으로 하여금 적게 얻은 것을 만족하게 여기지 말게 하고 대각왕(大覺王)의 깨끗한 지표가 되게 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