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보들의 행진 / 혜월스님

2008. 7. 18. 23:13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제불조사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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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조 바보는 부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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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산책] '바보 김수환'에 가슴이 뻥
욕망 위한 세상적 지혜에 대한 통쾌한 반란
도둑 지게 밀어준 혜월선사 바보 중의 바보
좋은 벗이 건네준 달력이 제 방에 결려 있습니다. 김수환 추기경이 그린 그림으로 만든 달력입니다. 아주 간략한 드로잉들이지요. 그 그림 가운데 얼굴 모양의 동그라미를 그려놓고, 아래에 '바보 김수환'이라고 써 놓은 게 있습니다. 우리 시대 가장 존경받고, 지혜로운 분으로 꼽히는 김 추기경께서 자신의 모습을 그려 놓고 '바보'라고 한 것입니다. 바보가 되지 않기 위해 죽도록 공부하고, 죽도록 뛰고, 죽도록 일하는 사람들은, 그 무엇보다 귄위가 중시되는 가톨릭 지도가가 뭔가 범접할 수 없는 권위ㅣ로 서가 아니라 '바보'로 자신을 그린 것에서 뭔가 가슴이 뻥 뚫리는 듯한 청량감을 마 보았을지 모르겠습니다.
 
어리석을 '우'(愚)는 '지혜로도 도달하지 못하는 자리'란 뜻도
바보라는 말 속엔 우리의 상식적인 개념을 무너뜨리는 통쾌함이 있습니다. 한자에서 우리가 보통 어리석을 '우'(愚)로 알고 있는 이 글자엔 '지혜로도 도달하지 못하는 자리'란 뜻이 있습니다. 고우 스님을 비롯한 스님들의 법명에도 이런 '우'자가 들어있지요. 어쩌면 바보는 명예와 재물 등을 손에 쥐는 이기적 욕망을 달성하기 위한 세상적 지혜에 대한 통쾌한 반란인 듯도 합니다.
우물 속에 개구리는 우물 밖의 개구리를 비웃습니다. 우물 밖 개구리가 전하는 더 넓은 세상을 본 적도 없고, 믿을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물 밖 개구리를 바보라고 합니다. 우리가 현자와 바보를 구분하는 것도 거기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자신의 도덕, 자신의 가치, 자신의 계율, 자신의 교리, 자신의 이념을 기준으로 판단하니까요. 그래서 그 울타리 안에서 잘 처신하면 현자라고 하고, 그 울타리를 벗어나면 바보라고 하고, 이단이라고 합니다.
세상적인 지혜로 보면 어쩌면 원조 바보는 석가모니 부처님이나 예수님이었던지 모르겠습니다. 세상은 손에 쥐고 쌓고 이겨서 쟁취하고 누리는 자야말로 승리자라고 합니다. 그런데 부처님은 모든 재물과 여자는 물론 나라와 왕위까지 버리고 출가사문(비구 걸인)이 되었으니 말이지요. 세상은 발 뻗을 자리를 봐가면서 뻗으라고 했지만, 예수님은 철옹성 같은 기존의 종교체제와 제국의 아성에 맞섰다가 비참하게 목숨을 잃고 말았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런 부처님과 예수님을 존경은 하고, 부처와 신으로 숭배는 하지만 그런 삶을 살기는 원치 않습니다. 그런 '바보'같은 삶 말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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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로운 자 넘어서 '바라보는 힘' 이 있는 사람
바보라는 말이 어디에서 유래했을까요? 저는 바보를 '바라보다'의 줄임말로 해석하고 싶습니다. 지혜로운 자를 넘어선 진정한 바보는 '바라보는 힘'이 있는 이가 아닐까요? 상처에 신음하는 마음, 비난받아 괴로운 마음, 화가 나는 마음, 욕을 내뱉고 싶은 마음, 두려운 마음, 불안한 마음, 비굴한 마음‥‥‥. 이런 내 마음을 바라보고, 그뿐 아니라 나와 다름 없이 비난 받으며 괴로워 하고, 사랑 받으면 좋아하는 상대의 마음을 바라보는 이. 그리고 사랑하고 증오하고 비난받더라도 영원히 거기에 메몰되지 않고 늘 마음이 흐르게 하고, 그 마음을 여유롭게 허용할 수 있는 이. 그런 바보 말이지요. 나이가 진정한 바보는 지혜니 어리석음이니 소유니 비움이니 하는 모든 분별과 집착조차 놓아버린 혜월 선사(1862-1937) 같은 사람이 아닐까 싶습니다. 혜월은 경허 선사의 제자로 천진불로 불렸던 분이지요. 그 분은 이런 분입니다.
 
"쉿! 들킬라. 넘어지지 않게 조심조심, 먹을 것 떨어지면 또 오게나"
충남 예산 덕숭산 정상 부근, 세상천지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덕숭산 정혜사에 한밤중에 도둑이 들었다. 도둑은 공양간에 몰래 들어가 조심스레 쌀가마를 들어냈다. 들어낸 쌀가마를 지게에 지고 일어서려 했지만 쌀가마가 너무 무거웠던지 도둑은 일어서지 못해 쩔쩔맸다. 그런데 끙끙대고 용을 써도 꼼짝도 하지 않던 지게가 어느 순간 번쩍 들렸다. 누군가 지게를 살짝 밀어주지 않고선 이럴 수가 없었다. 도둑이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니 한 스님이 손을 입가에 가져갔다.
"쉿! 들킬라. 넘어지지 않게 조심조심 내려가게. 그리고 먹을 것이 떨어지면 또 오게나."
천진불 혜월 선사였다. 혜월이 마지막으로 머문 것은 부산시 부산진구 부암동 백양산 선암사였다. 혜월은 절 대중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가는 곳마다 산비탈을 개간해 논을 만들었기 때문에 '개간 선사'로 불렸다. 그가 밤낮으로 몇 년을 일해 산비탈에 논 열 마지기를 개간했다. 산이 가팔라서 논이 거의 없던 아랫마을의 한 사람이 이 논을 탐냈다. "많은 식구들을 먹여 살려야 하니 그 논을 팔아라."고 사정하는 소리를 들은 혜월은 논을 팔았다. 그런데 혜월이 원주(절 살림을 맡은 승려)에게 내놓은 돈은 논 여섯 마지기 값에 불과했다. 마을 사람이 순진무구한 혜월을 속인 것이었다. 절 대중들은 논 열 마지기를 만들기 위해 고생한 일을 생각하며 분을 이기지 못해 혜월을 탓했다. 그러자 혜월은 대중공사(전체 회의)에서 "논 열 마지기는 저기 그대로 있고, 여기에 여섯 마지기 값인 돈까지 생겼으니, 더 번 것이 아니냐"고 하는 것이었다. 혜월의 계산법은 그러했다.
 
솔방울 딴 자루 메고 솔가지 잡은 채 벼랑에 기대 열반
어느 날 혜월이 방에서 삼매에 들어 있다가 산에 올라갔다. 혜월이 돌아오지 않자 대중들이 산에 올라가 그를 찾았다. 그는 평소 하던 대로 솔방울을 딴 자루를 메고 솔가지를 잡고 벼랑에 살짝 기대어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보니 이미 숨을 거둔 뒤였다. 동서고금에 찾아보기 어려운 열반이었다.
어찌 보면 '바보'로 불릴 법하게 평생 속고만 살아온 혜월이었다. 누구에게나 속고 산 그였지만 눈 밝은 선사들은 입을 모았다.
"귀신도 혜월을 속일 수는 없다."
<은둔>의 '혜월-무소유의 도인은 천하를 활보하는데, 영약한 여우는 제 그림자에 묶여 절절 매는구나'편에서
재물과 명예와 지위 등 어떤 것에 대해서도 '소유'하려는 욕망이 없고 마침내 욕망할 '나'가 없을 때, 속이고 속을 자가 어디에 있을까. 지혜로운 이도 찾을 수 없고, 귀신도 찾을 수 없는 것을 부처인들 찾을 수 있고, 속일 수 있을까.
조현 한겨레 종교전문기자 cho@hani.co.kr.
출처 : 인터넷 한겨레
 
명태 - 오현명
한국의 가곡 제 1 집 (1985 지구레코드)
양명문 작사, 변훈 작곡 1952년
Track. 10 명태 (오현명 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