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법]행불'그릇이론.

2008. 7. 22. 20:19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발심수행장·수행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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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릇이론]이라는 것은 일단 사람마다 저마다의 그릇이 있다고 가정하는 데서 출발합니다. 그것은 일종의 자기 한계로서, 스스로에 대한 스스로의 규정입니다. 따라서 무엇보다도 그 그릇 자체를 변화시켜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를 위해서, [그릇이론]은 다섯 단계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하나, 그릇 비우기: 참회를 통한 자기정화
수행을 향한 첫걸음은 참회입니다. 예를 들어 그릇에 어떠한 물건이 이미 가득 채워져 있다면, 더 이상 아무 것도 담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렇듯이 내 마음의 공간도 이미 번뇌 덩어리로 가득 차 있다면, 그 어떤 것도 담을 수 없습니다. 때문에, 참회를 통하여 마음 가운데 잠복해 있는 번뇌 덩어리들을 끄집어내어 밖으로 보내야 합니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무엇을 어떻게 참회할 것인가?
참된 참회는 자기 성품 속에서 죄의 반연을 없애는 것입니다. 죄의 반연이란 삼독의 나쁜 인연을 말하는데, 만약 당장에 본래의 몸을 찾고자 한다면 바로 이 삼독의 악연을 마음 속에서 씻어버려야 합니다.
그러면, 삼독은 어떻게 씻어낼 것인가? 일단 삼독을 충분히 인정해 주는 것입니다. 내가 스스로 만들었음을 인정하고 느껴서 소거해 나가는 것입니다. 참(懺)이란 종신토록 잘못을 짓지 않는 것이요, 회(悔)란 과거의 잘못을 아는 것입니다. 삼독의 잘못을 알고(인정하고) 다시는 그러한 잘못을 짓지 않겠다고 다짐함으로써 마음으로부터 삼독을 소거해 나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참회는 부처님께 참회를 하는 것이지만, 결국은 자기 불성에 참회하는 것이기 때문에 진정한 참회를 통하여 자기 정화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아울러 지금 이 모습도 나의 작품이며, 따라서 다름 아닌 내가 바꾸어나갈 수 있음을 인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둘, 그릇 채우기: 발원에 의한 자기 전환
참회를 통하여 마음이 어느 정도 비워진 후에는 발원을 해야 합니다. 집중적인 참회를 통하여 일시적으로 마음이 비워지기는 하였지만, 그 비워진 그릇을 그대로 놔두었다가는 무시 이래의 습기로 인하여 금방 예전과 같은 삼독으로 그득해지는 까닭입니다.
발원은 자기전환의 시작입니다. 업생(業生)이 아니라 원생(願生)으로 나아가는 첫 단추인 것입니다. 업생이란, 어디서 왔는지도 모르고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 채 그저 과거의 지은 바 업에 따라 이끌려 살다 가는 것입니다. 원생이란, 스스로의 삶을 갈무리해 나가는 것입니다. 의도적으로 방향을 설정해서 과거의 업을 벗어나 새로운 창조적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원생을 살아나가기 위해서는 우선적으로 발원을 해야 합니다. 발원을 통하여 삶의 패턴, 사고의 방향을 바꾸어 나가야 합니다. 예컨대 발원은 '부처님, 이렇게 해주십시오'가 아니라, '부처님, 이렇게 하겠습니다.' 하는 식으로 해 나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발원을 통하여 자기 변화의 가능성을 신뢰하게 되고, 막연한 인생의 목표에 대한 재정립과 함께, 정합이 되는 목표를 설정함으로써, 좀더 구체적으로 목표에 다가서게 됩니다.

셋, 그릇 키우기: 기도에 의한 자기 확장
참회를 통해 비운 그릇에 발원을 채움으로써 자기전환은 시작되었습니다. 이제 보다 강력한 자기확장을 경험할 순서입니다. 즉, 그릇 자체를 키우는 것입니다. 작은 그릇에 안주해있던 스스로를 과감히 바꾸어 커다란 그릇으로 대치해나가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선지식과의 만남이 절대적입니다. 자기 혼자 궁리하고 분별해봐야 자기 한계를 벗어나기는 거의 불가능합니다. 선지식과의 만남을 통해서 기존의 나에 대한 편견을 불식하고 좀더 확장된 자아와의 만남이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여기서 선지식과의 만남을 포괄적 개념으로 정리할 필요가 있습니다. 본래 선지식이란, 앞선 체험과 지혜를 가지고 남들을 인도하는 이를 말하지만, 넓은 의미로는 내 마음을 열어주는데 기여하는 것은 모두가 선지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뿐만 아니라 풀·나무와 같은 자연 역시 선지식이 될 수 있으며, 무엇보다도 독경이나 염불·주력 등의 수행을 통해서 자기 마음 속의 선지식을 만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궁리분별을 떠남으로써 가능해집니다.
선지식은 이미 우리의 마음 가운데에 있습니다. 마음의 저장 창고에는 본디부터 모든것을 구족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개념으로 알고 있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합니다. 체험이 필요한 것입니다. 충분히 경험되어져야 해탈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선지식이란 우리가 모르는 것을 가르쳐 준 다기보다는 이미 알고 있는 것을 확인시켜준다고 볼 수 있습니다.
선지식과의 만남이 바로 기도입니다. 일체의 망념과 시비분별을 부처님께, 다라니에, 경전에 맡겨버리는 것입니다. 이론으로 설명하기 힘든 정신적 변화를 몸소 체험함으로서, 기존의 소아(小我)에 대한 그릇된 집착과 고정관념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강력한 우주의 에너지를 체험하고, 진리와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넷, 그릇 부수기: 참선에 의한 자기확인
그릇을 아무리 키운다해도, 결국 그릇이 존재하는 한, 안과 밖이 있습니다. 나와 남이 있고, 선과 악이 일어납니다.
궁극적으로 진리를 체득코자 한다면 시비분별이 사라져야 하고, 일단 그릇이 완전히 부서져 버리는 체험이 필수적입니다. 참선은 바로 그릇 부수기입니다.
참선을 통하여 달성하고자 한 무념이란, 망념이 사라진 상태입니다. 망념에 집착치 않고 자기의 성품을 온전히 유지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보지 않고 듣지 않고 말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보고 듣고 말하되, 집착하지 않는 것입니다. 궁리 분별함이 없이 있는 그대로 보고 듣고 말하는 것입니다.
특히 유념해야 할 것은 만사를 생각지 않음으로써 생각이 끊어지도록 애쓰지 말라는 것입니다. 무념은 '사유의 정지', 혹은 '의식의 끊김'이 아닙니다. 오히려 '무의식적 자각'의 상태입니다' 이것은 분별심을 떠나 보고 듣고 사유함을 의미합니다. 나다, 남이다, 잘 낫다, 못 낫다는 생각 없이 있는 그대로 보는 것입니다.
이러한 시각으로 바깥 경계를 대하되, 안으로 마음에 머무름이 없어야 합니다. 밖으로 모든 형상들이 허망한 것임을 직시하고, 안으로 머무름이 없으면 무념은 달성됩니다. 따라서 화두가 필요합니다. 화두를 제대로 들면 망념은 저절로 사라지는 것입니다. 아니, 비록 일어날지언정 더 이상 집착하거나 걸리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참선을 통해서 아상이 희석되어, 나와 남에 대한 분별의식이 적어지고 점차 사물을 자신의 주관적 판단이 아닌, 있는 그대로 보는 안목이 열립니다. 모든 현상을 성품 자리에 입각하여 바라보게 됩니다.

다섯, 그릇 만들기: 행불에 의한 자기 창조
행불(行佛)은 부처의 행을 수행한다는 말입니다. 부처의 행이야말로 부처입니다. 부처가 따로 있어 부처의 행을 하는 것이 아니라 부처의 행을 하는 자가 부처인 것입니다.
부처의 행이란 자신이 본래 부처라는 자각에서 시작합니다. 스스로가 불성을 지닌 신성한 존재임을 믿고 들어가야 합니다. 이것은 바로 자신이 자신의 창조자임을 믿는 것이며, 자신이 자신의 주인공이라는 말입니다. 자신이 인생이란 무대의 배우일 뿐만 아니라, 연출자이기도 한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내가 누구인가를 참구하는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자신이 만들고 싶은 내가 무엇인지를 아는 것입니다. 자신을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창조자의 삶입니다. 창조자의 삶은 ' ∼때문에' 가 아니라, ' ∼에도 불구하고'의 삶입니다. '재산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건강에 다소 문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기타 어떠한 사유에도 불구하고 항상 감사할 줄 아는 삶입니다.
나아가 창조자는 언제나 바로 지금 여기에서 머무르지 않는 삶. 즉 더불어 생동하는 삶을 살아갑니다. 이것은 일체가 '나'이며 '부처'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근원에 대한 물음은 항상 깨어 있는 삶을 살 수 있게 합니다. 판사가 아니라 관찰자로서 일체 중생을 자비의 눈길로 지켜보는 것입니다.

이러한 다섯 단계의 [그릇이론]을 통하여 항상 바로 여기에서 깨어있는 삶을 구현하게 될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스스로와 이웃 나아가 우주를 밝혀 나갈 것이며, 아울러 평생 도반으로서의 행불인(行佛人)으로 맺어질 것입니다.


行佛하십시오.


손이 잘 절제되어 있는 사람,
발이 잘 절제되어 있는 사람,
말이 잘 절제되어 있는 사람,
그리하여
자기 자신이 잘 절제되어 있는 사람,
그는 내적인 평온에 이르렀나니
외로이 혼자가 되어
바람같이 물같이 살아가고 있는 그를
진정한 수행자라 부른다.

-『법구경』,「比丘品」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