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의 보현행, 몸짓의 보현행

2008. 7. 29. 12:53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화엄경·보현행원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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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배교수님의 두 가지 보현행원-몸의 보현행, 몸짓의 보현행]

 

 


우리나라에서 광덕큰스님을 제외하고 보현행원을 가장 사랑하셨던 분은 아마 뉴욕 스토니브룩 대학의 박 성배교수님이 아닐까 합니다. 교수님은 젊었을 때부터 보현행원을 처절할 정도로 사랑하신 분입니다. 그리고 그 때문에 좌절도 참 많이 하신 분이기도 합니다.

 

 

 

 

그것은주로 이상과 현실의 괘리에서였습니다. 하루에도 보현행원품을 몇 번이나 읽고 그 때마다 환희하고 보현의 원행을 실천하리라 다짐했건만, 실지 삶에선 괘리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원인을 찾지 못해 고통이 더욱 깊었던 것인데, 교수님은 성철큰스님을 만나 원인이 그동안 몸의 삶을 산 것이 아니라 몸짓의 삶을 사는 것에 있음을 알게 됩니다.

 

 

 

그 후 교수님은 몸짓의 삶을 버리고 평생을 몸의 삶을 사시는 데 회향하게 됩니다. 이 부분을 교수님의 말씀으로 직접 들어봅니다.

 

 

 

“...(전략)...이러한 ‘글 따로 나 따로’의 삶은 나에게 커다란 고통을 가져다 주었다. 지적(知的) 이중생활에 빨간 불이 켜진 셈이다. 1960년대 초반, 뚝섬 봉은사에서 시작한 대학생 수도원에서 나는 지도교수라는 중책을 맡았다. 나는 거기서 화엄경의 보현행원사상을 실현해 보려교 무척 애를 썼다. 그러나 그 결과는 한 마디로 참담한 실패였다.

 

 


그 때 성철스님을 처음으로 만났다. “너희들은 정신이 용(用)에 쏠려 있구나!” 이것이 성철스님의 진단이었다. 내가 타고 다니던 배는 항해 도중에 난파를 당했다. 스님은 보현보살의 ‘몸짓’을 흉내 내는 것으로 보현행을 삼아서는 안 된다고 나무라셨다. 그리고 보현보살의 ‘몸’을 보아야 한다고 일러주셨다. 이 때부터 나의 삶은 ‘몸’을 찾는 길로 방향 전환을 했다.(박성배 몸과 못짓의 논리, 서문에서)”

 

 


나중에 교수님 당신의 말씀으로도 나오지만, 제가 보기에 성철큰스님의 진단은 정확했습니다. 큰스님의 진단과 처방을 한 마디로 말씀드리면, 보현행원의 원리(體)는 모르고 흉내(用)만 내고 있었던 것. 즉 지혜 없이 자비만 붙잡고 앉았으니 공허하고 괘리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겉모습만 붙잡지 말고 그 원리를 꿰뚫어야 할 것이니, 이는 큰스님의 평소 일관된 주장, ‘출가하여 참선하여 오매일여가 되어 깨쳐라!’는 말씀과 배치되지 않습니다. 여기서 교수님은 응어리가 풀리고 그 자리에서 출가하여 삼년을 시봉한 후, 미국에 건너가 불교학자가 되어 평생을 ‘몸과 몸짓의 논리’에 몰두하시게 됩니다.

 

 


교수님 말씀을 들으니, 저도 가끔 몸과 몸짓의 문제에 부닥치는 것 같습니다. 이것은 저의 삶에 있어서의 문제가 아니고 주로 행원의 전법에서 일어나는 문제인데, 보현행원을 전하려 다니다보면 ‘행원의 실천이 중요하지 그까짓(?) 이론은 뭐하러 강조하느냐?’는 말씀을 하시는 분을 가끔 만납니다.

 

 

그런데 제가 볼 때 이런 말씀을 하시는 분은 틀림없이 보현행원을 그다지 깊게 하지는 않는 분이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교수님처럼 처절할 정도로 사무치게 행원을 하시는 분이라면 이런 말씀이 나올 수가 없기 때문이지요. 행원을 온 몸으로 하시는 분은 반드시 교수님이 부닥쳤던 문제와 만나게 됩니다. 그것은 행원의 가르침이 그렇게 만만한(?) 가르침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행원은 불교의 모든 가르침이 그러하듯, 생사를 끊고 일체 중생을 해탈로 이끌어 주는 가르침입니다. 이러한 가르침을 단지 몸짓으로 지어서야 참된 행원의 소식을 들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꼭 몸의 행원으로 가셔야 합니다.

 

 

몸짓의 보현행원은 선인선과의 유위법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냥 ‘좋은 일’ 수준에 머무르는 것일 뿐입니다. 몸의 보현행원이 있어야 인과가 끊어지는 무위의 세계에 들어가는데, 의외로 몸짓의 행원에 머무는 분들이 많으며 이런 몸짓의 행원을 참된 행원으로 아시는 것입니다.

 

 

이런 분들에게는 위에 인용한 젊은 날 교수님이 방황하셨던 ‘몸의 보현행원, 몸짓의 보현행원’ 이야기를 들려드리고 싶습니다. 제 이야기라면 아니 듣겠지만, 교수님 이야기는 들으실 것 아니겠습니까.

 


끝으로, 행원과 수행 그리고 삶이 따로 있는 줄 아시는 분들에게도 다음과 같은 교수님의 이야기를 꼭 들려 드리고 싶습니다. 참선 따로 행원 따로, 주력 따로 행원 따로, 삶 따로 행원 따로 생각하시는 분들 역시 의외로 참 많습니다.

 

 

 

그래서 행원을 참선 한 뒤에, 주력, 절, 염불 등을 한 뒤에 ‘새로 다시’ 하려고 하십니다. 수행이 따로 있고 삶이 따로 있고 행원이 '따로 있는 줄' 아시는 것입니다. 이런 일은 모두 행원의 소식을 참되게 알지 못해 일어나는 일인데, 저는 이런 모습이 참 안타깝습니다. 이런 분들은 50 여년 동안 행원을 사모하셨던 노교수님의 다음과 같은 회한의 말씀을 꼭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나는 이 기회를 빌려 그때 함께 고생했던 법우들에게 사죄의 말씀을 드리고 싶다. 한마디로 말해 미안하다.

 

 

 

그때 나는 보현행원품을 줄줄 외웠다. 그래서 나는 보현행이 무엇인지 안다고 자부했었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 보면, 그 때 나는 보현행이 무엇인지 몰랐었다. 왜냐하면 그때 나의 보현행원은 대학생활과 수도원 생활의 갈등 구조를 하나도 해결하지 못하는 보현행이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대학생활과 보현행을 별개의 둘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 두 가지를 다 잘하려도 무척 애썼다. 대학생활이든, 수도원 생활이든, 그 무엇이든, ‘바로 그 속에 보현행이 있다.’는 것을 자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래서 보현행자의 몸짓 흉내 내는 것으로 보현행을 삼고 있었다.

 

 

 

 

내 몸이 바로 보현의 몸임을 깨달았더라면 몸짓이야 학자의 못짓이든 스님의 못짓이든 아무 상관도 없는 것을 괜히 두 가지의 몸짓을 다 함께 잘해 보려고 애썼으니 될 리가 없다. 성철스님이 정확하게 지적해 주신 것처럼 우리의 관심이 용(用)에 쏠려 있었던 것이다.

 

 

 

 

 

왜 그 때 나는 법우들에게 학교 공부 속에 보현행이 있다고 일러 주지 못했을까? 그렇게 말하면 수도원에서 나가 버릴까 두려웠던 것일까? 생각하면 미안하기 짝이 없다.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용서를 빈다.

 

 

 

 

 

그리고 지금은 화가가 된 박명순 선생도 당신의 학생들에게 그림 공부 따로 있고 보현행 따로 있는 것처럼 가르치지 말고 그림 공부 속에 보현행이 있다고 가르쳐 주기 바라며, 학생들이 나중에 결혼하여 가정생활을 할 때도 가정생활을 잘하는 것이 바로 불교 공부라고 가르쳐 주기를 당부하고 싶다.

 

 

그러나 문제는 남든다. 어떻게 하는 것이 가정생활을 제대로 하는 것일까? 몸과 못짓이 어린아이처럼 자연스럽게 조화를 이루는 것은 우리의 문제 해결에 열쇠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

 

 


-박성배, '몸과 몸짓의 논리'에서

 

 

 

 

 

*덧글


생명을 향한 끝없는 광대행이 모두 보현행입니다.
그러므로 끝없는 사랑, 끝없는 미움, 끝없는 기쁨, 끝없는 슬픔이 모두 ‘보현’인 것입니다.

우리의 삶 전부가 ‘보현’인 것입니다.
박성배교수님의 글 마지막 부분은, 이런 보현의 뜻을 전하고 있습니다.

 

 

普賢合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