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도 복도 다 멀리 버러야...해탈을 얻을 수 있음

2008. 8. 24. 12:09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법구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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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도 복도 다 멀리 버러야...해탈을 얻을 수 있음


제29장:

 

원사죄복 무성범행 종신자섭 시명선학

遠捨罪福 務成梵行 終身自攝 是名善學

   

죄도 복도 다 멀리 버리고 부지런히 힘써 범행(梵行) 이루어

몸에 맞도록 스스로 단속하면 그것을 일러 좋은 공부라 한다.

   -교학품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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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은 지금까지 덕행으로 복을 많이 지어라 그리하면 천상이나

  좋은 곳에 태어 날것이라 했다.

  

그런데 여기서는 죄 뿐만이 아니라 복 짓는 일도 하지말고 멀리 여이라고

  하신다. 그럼 복짓는 선업이 도에 장애가 된단 말인가? 그럼 모순된

  가르침이 아닌가하고 의심 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것은 불교를 포괄 적으로 이해하지 못한 단편적인 이해에 불과 하다.

  그래서 불교는 대기설법이요 가지가지 근기에 맏는 방편 설법이라고 한다.

  소승과 대승이 그래서 있는 것이나, 그렇다고 해서 소승은 나쁘고 대승은

  좋은 것이라고 상대적인 이분법으로 단정을 짓는 것은 오해라고 봐야 할

  것이다. 복을 지어야 할 소승적인 근기의 사람에게는 복을 짓게 가르치고

   

도를 수행할 대승적인 근기의 사람에게는 도를 수행하게 가르쳤다.

  덕행과 복을 짓지 못한 사람은 정법에 인연 맺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것은 깡패나 사기꾼들이 선한 사람만 보면 사기칠 생각부터 생기지

  애당초 친구가 될 생각은 못하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소승은 소승대로 수행할 환경이 있고 대승은 대승대로

  수행할 환경이 있는 것이다.

 

악행을 일삼는 자도 때때로 복을 짓게하여 선근 인연 맺게 하는 것이

소승이라면, 대승은 대자대비로 보살도를 성취하는 것이라 하겠다.

   

또 소승과 대승에 대한 다른 비유로 유치원 아이에게 어머니와 떨어져

  친구들과 함께 춤추며 놀게 하고 기본적인 숫자나 가르치는 것을 중,

  고등학생들의 가르침에 비교해서 수준은 낮지만 그렇다고 잘못된

  가르침이라고 하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라 할 수 있겠다. 왜냐하면

  저렇게 배운 아이들이 커서 나중에 중, 고등학생이 되고 대학생이

  되었고 또 앞으로 사회의 일원으로 더욱 성장 하게 될 것이니까.

   

마치 시냇물이 흘러 큰 강물이 되고

  큰 강물이 흘러 큰 바다에 모이면 모두 한 바다 한 맛이 되듯이 법부와

  성인이 본래 둘이 없그만, 탐진치 애욕에 집착되면 법부요 집착이 없으면

  성인이라. 그러므로 대승한답시고 소승을 우습게 보는 것은 올바른 대승의

  경지에 오른 자세가 아니며, 겉으로 무늬만 대승에 오른 것처럼 행동하는

  증산만일 것이다, 그리고 소승은 소승에만 머물러 만족 해서는 않된다.

  대승으로 나아가기 위해 항상 정진하고 방일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결론적으로 불교(소승과 대승)의 올바른 이해와 수행을 위해

  위 교학품 마지막단에서 가르침과 같이

  범행(계.정.혜.해탈)으로 몸에 맞게 근기에 맞게 수행하여

  궁극의 목표인 성불을 성취 하는 것이 불자의 자세라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