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 10. 17. 10:36ㆍ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화엄경·보현행원품
일상 보현행원 수행법
1.초보불자, 또는 불교를 모르는 이-고잘미섬공(혹은 고잘미섬모)!
불교를 모르는 분, 또는 타 종교인, 초보불자들을 위한 보현행원 수행은 '고잘미섬공'의 다섯 자만 충실하면 충분합니다. '고잘미섬공'은 '고맙습니다, 잘했습니다, 미안합니다, 섬기고 공양하겠습니다(혹은 '섬기고 모시겠습니다')'의 약자로 이 네 가지 마음만으로도 우리는 저 무량한 부처님 공덕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게 됩니다. 그것은 '고잘미섬공'이 보현행원 중 기본행원을 실생활에 맞게 만든 것으로, 여기엔 공경, 찬탄, 참회뿐 아니라 서원(섬공)이 함께 있으므로 우리는 일상 속에서 바로 행원을 실천할 수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일반인들은 아침 저녁으로 적당한 시간에 두 손을 합장하고 '고잘미섬공'을 열 번 이상 큰 소리로 외치도록(염송) 합니다. 이 때 함께 하는 분이 있으면(가족, 자녀 등) 열 번 염송이 끝나면 서로 마주 보며 고맙습니다, 잘했습니다, 미안합니다를 외친 후 상대방에게 반배를 하도록 합니다. 이 때 반배를 받는 쪽은 역시 반배 한 채로 조용히 상대방의 '고잘미' 찬탄을 듣고 함께 반배를 함으로써 상대방의 절을 받습니다. 그렇게 반배가 끝나면 이번에는 반배를 받은 쪽이 상대방에게 똑같이 그렇게 하도록 합니다. 이렇게 각각 한 번씩 열 번을 하루에 한 번 이상씩 합니다.
이런 염송이 끝나면 일상 삶에서 늘 '고잘미섬공'을 마음 속으로 외치며 일을 합니다. 고맙다 소리가 잘 안 나오고 화를 내거나 다투는 경우에는 마음 속으로 '지금은 잘 못했지만 언젠가는 잘 하겠다', 또는 '지금은 잘 안 되지만 언젠가는 꼭 당신을 섬기고 공양하겠다!'는 마음을 내도록 합니다. 그리고 일어나는 생각 생각, 번뇌 하나 하나를 모두 진리의 님께 바칩니다. 그렇게 일상을 지어가고, 그렇게 일상을 끝내고, 그렇게 일상을 맞이하면 됩니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이 때 우리가 짓는 '고잘미'는 고맙고 잘한 일에만 짓는 것이 아닙니다. 고맙지 아니한 일에도 고맙고, 잘하지 못한 일에도 잘했다는 찬탄이 나오고, 미안하지 않은 일에도 미안한 마음이 나오며, 섬길 수 없는 일에조차 섬기겠다는 서원이 나와야 진정한 '고잘미섬공'을 한다고 할 것입니다.
***고맙다, 잘했다, 미안하다의 위대성***
一.우리가 숱한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힘들게 수행을 하는 이유는 다른 것이 없습니다.
고마운 일에 고맙다, 잘한 일에 잘 했다, 미안한 일에 미안하다는, 이 세 마디 말을 하기 위한 것입니다. 온 천지가 고마운 일뿐이고 온 중생이 잘한 일뿐이며 온 세상이 은혜 투성이(?)인 것을 알기 위해 수행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수행하는데 이 말이 나오지 않는다면 수행을 제대로 한 것이 아닙니다. 진정한 수행자라면 이 세 마디가 아니 나오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불교의 핵심인 연기(緣起)도 바로 이 내용입니다.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因此有彼 無此無彼), 이것이 생기므로 저것이 생긴다(此生彼生 此滅彼滅)는 것이 부처님이 깨달으신 연기의 실상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 홀로 존재하는 것 없이 모든 존재가 서로가 이 세상을 받치려 온갖 노력을 다하고 있으니 고마운 일이 아닐 수 없고, 또 그런 노력으로 이 법계가 장엄하게 되니 모두가 잘한 일일 수밖에 없으며, 그런 은혜 속에 내가 존재하니 미안한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연기법을 흔히 부처님이 깨달으신 내용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연기에 관한 설명은 숱하게 이루어지며 웬만한 불자라면 이러한 연기법을 모르시는 분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연기법은 알지만 '연기의 실천'까지 나아가시는 분은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다만 이론으로서 연기를 알고 있는 것뿐입니다. 연기를 알았다면 연기 너머의 세계까지 가야 합니다. 연기를 알기만 해서는 아니 되는 것입니다.
고맙다 잘 했다 미안하다! 평범하게 보이는 이 세 마디는, 우리로 하여금 이론으로서의 연기를 넘어 현실 속에서 직접 연기를 실천하게 합니다.
우리 마음엔 본디 고마운 마음, 찬탄하는 마음, 참회하는 마음이 다 들어 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일상에서 그런 말을 좀처럼 하지 못하고 지냅니다. 그것은 교만심, 자만심이 본래 밝은 내 마음을 덮고 있기 때문입니다. 알량한 자존심, 내 잘 난 마음이 고마운 일을 보고도 고맙다 소리 한 마디 못 하게 하며, 잘한 일을 보고도 잘 했다 칭찬 한 마디 못하게 하고, 미안한 일에도 미안하다 소리 한 번 못 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런 일이 자꾸 쌓여 갈 때, 선량한 우리들 가슴에도 어느새 오해가 생기고 서로의 가슴에 피멍이 맺히게 됩니다
수행이란 특별한 일이 아니라 이런 어리석은 마음, 전도된 마음을 거두는 것입니다. 고마움을 모르는 나의 자존심을 수행의 불길로 녹이고, 잘난 마음으로 뒤덮힌 내 마음을 수행의 밝은 힘으로 제거하는 것입니다. 그러함에도 그런 말, 그런 행을 할 수 없다면
아무리 남이 넘볼 수 없는 깊은 수행을 하고 아무리 높은 선정에 든다 하더라도 도무지 보람이 없습니다. 모두가 헛된 일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고맙다 잘 했다 미안하다! 이 세 마디는 수행의 결과, 수행의 공덕일 뿐 아니라, 무량 겁 동안 나의 본성을 덮어온 무명의 구름을 걷어내는 작업도 됩니다. 고맙다 잘 했다 미안하다란 말을 끊임없이 외칠 때, 무량 겁 동안 숨어있던 내 마음의 고마움, 내 마음의 찬탄, 내 마음의 참회가 밖으로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고마운 마음에는 내 잘난 마음이 없습니다. 내 잘난 마음이 있을 때는 고맙다는 말이 나오지 않습니다. 오직 상대에 대한 공경이 꽉 차 있을 때 고맙다! 하는 말이 나도 모르게 나오는 것입니다.
잘했다는 말에도 나라는 아상은 어느 곳에도 없습니다. 미안한 마음도 마찬가지입니다.미안하다!라 할 때는 나도 모르게 나라는 아상은 어디로 가고 없는 것입니다.
또한 이 세 마디 말은 '중도의 실천'입니다. 내가 없는 곳에는 양 극단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극단이란, 나라는 것이 있을 때 나를 기준으로 생기기 때문입니다.
감사를 하면 감사할 일이, 찬탄하면 찬탄할 일이 생깁니다. 또 미안해 하면 미안한 일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축복'이 오게 됩니다. 고잘미!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보이는 이 말들은, 그 어떤 수행 못지 않은 훌륭한 수행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二.화엄에는 인과무이, 또는 인과상즉(因果相卽)이라는 가르침이 있습니다. 이것은 주로 화엄 조사이신 지엄스님과 제자인 법장스님의 견해로, 인(因)과 그로 인한 과(果)가 전혀 다르지 않다는 것입니다. 즉, 우리 눈에는 원인과 결과가 따로 있는 것 같지만 인과의 세계가 별도로 있는 것은 아니며, 원인으로 인해 결과가 오지만 그 결과는 다시 원인이 되어 '인과무이, 인과상즉의 중중무진의 법계'가 펼쳐진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인'은 수행을 말합니다. '과'는 그런 수행으로 인한 결과를 뜻합니다. 따라서 '인'은 범부 중생의 경계요, '과'는 부처의 경계(흔히 십불(十佛)경계라고 이야기합니다)입니다. 이러한 범부 중생의 경계는 말로 설해질 수 있지만(可說) 부처의 경계는 말로 설할 수 없는(不可說) 세계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범부 중생의 '인'의 세계와 깨달음 부처의 세계인 '과'가 사실은 전혀 별개의 것은 아니라는 것이 '인과무이의 화엄사상'입니다.
보현행원의 핵심인 예경제불, 칭찬여래, 광수공양, 참회업장을 줄인 세 마디, '고맙다, 잘했다, 미안하다'는 말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러한 세 마디는 닫혀진 마음의 문을 열고
무량한 부처님 햇살이 쏟아져 들어오게 하는 최초의 인(因)이 됩니다. 고맙다, 잘했다, 미안하다!고 외칠 때, 무량 겁을 닫아 온 내 마음의 문이 열리고, 우리는 더 큰 세계, 무량한 부처님 품속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그런데 부처님 품속에 들어가 보면 다시 다른 할 일이 없습니다. 역시 '고맙고 잘했고 미안한 일뿐인 것'입니다. 저 한없는 중생들의 공덕을 알고 나면 어찌 고맙지 아니할 수가 있으며, 온 중생이 목숨 바쳐 꾸미는 이 법계의 장엄함을 어찌 찬탄하지 않을 수 있으며, 그러한 법계를 꾸미기 위해 끝없는 생사의 바다를 오가는 저 중생들에게 어찌 미안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 삼세제불이 모두 보현의 원행에서 출현하며, 또한 이렇게 출현한 부처님들은 보현의 원행으로 일체 중생의 공덕을 찬탄하고 공양하여 중생을 무명의 어둠에서 저 광활한 광명의 부처님 세계로 이끌어 모신다고 화엄은 누누이 강조하고 설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맙다, 잘했다, 미안하다! 로 시작하는 보현행원은 단순하고 모자란 수행이 아닙니다. 복잡하고 어려운 그 어떤 수행보다 '완전한 수행법'입니다. 그 단순하고 모자란 듯 보이는, 누구나 배우지 않아도 쉽게 하고 어린이도 하는 별 볼일 없는 듯한 이 가르침이, 무량 겁을 덮어 온 무명을 벗고 부처님 품으로 우리를 인도하며, 그리고 마침내 장엄한 화엄 세계를 이룩하는, 인과무이 의 '중생 행' 이자 '부처 행' 입니다.
2.불자를 위한 보현행원 수행방법
2-1.열 가지 일상 수행법
1)입정
2)삼귀의
3-4)반야심경, 천수경
5)발원(총원)
6-7)금강경 & 보현행원품 독송
8)발원(별원).
9)염불(시간 있으면 좌선, 절 수행 포함)
10)회향 발원 및 나무아미타불 세 번 염송
행원은 수행의 특별한 틀이 없으나 가장 보편적 방법으로 보현행원을 지어봅니다. 그것은 위의 열 가지 방법으로 행원을 해 보는 것입니다.
먼저 입정을 하고 삼귀의를 한 다음 반야심경, 천수경을 독송합니다. 그리고 원을 발합니다. 이 때 원은 총원(總願)으로, 불자로서 가장 기본적인 서원(예:사홍서원)을 발합니다. 이것은 비록 총원이지만 개인마다 모두 다를 수 있는데, 그것은 우리가 세우는 총체적 서원이 삶의 관점에 따라 다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서원을 세우는데 익숙치 않은 분들을 위해서는 제 개인적으로는 광덕스님의 '반야보살행원기도문'을 권합니다).
그렇게 총원을 잠깐 발한 후 금강경과 보현행원품을 독송합니다. 이 때 시간이 넉넉치 않으면 전체를 읽을 필요는 없고 일부만 읽어도 됩니다. 그리고 다음 공부 때 이어가면 됩니다. 경전 독송이 끝나면 다시 원을 발하는데, 이 때는 현재 자신에게 가장 절실한 소망을 간절히 발합니다. 가령 집안의 평화, 자녀의 학업 성취 같은 것도 좋은 발원 소재가 됩니다.
그렇게 마음 속 고뇌, 걱정을 모두 부처님께 서원의 형태로 바친 후, 염불을 합니다. 염불은 보통 천념 단위가 좋으나, 시간이 부족한 분은 백팔념이나 삼백념 정도로도 무방합니다. 그렇게 염불을 하며 내 마음의 모든 걱정, 고뇌를 부처님께 바칩니다. 또는 염불을 하며 내 안에 깃든 무한한 부처님 은혜를 생각하고 감사하는 마음을 내도 됩니다.
이렇게 보현행원을 지어가는 이유는, 이 속에 행원의 핵심요소가 모두 들어있고 또 핵심을 잘 공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입정과 삼귀의로 부처님 공경의 마음을 내고, 총원, 별원을 발하며 서원을 세우는 법을 배웁니다. 금강경, 보현행원품 독송으로 눈부신 부처님 공덕을 온 몸으로 받으며, 우리는 그렇게 공경, 찬탄, 공양, 참회, 회향의 행원을 지어갑니다
독송이나 염불을 할 때는 가급적 큰소리로 지으며 그 소리를 내가 듣도록 합니다. 그리고 판소리가 울리듯 나름대로 리듬을 지어가며 기쁘고 즐거운 마음으로 염송하도록 합니다.
경을 읽을 때나 염불, 좌선, 절 등을 할 때는 공경, 찬탄, 공양 올리는 마음으로 합니다.
내가 경전을 이해하거나 절의 공덕을 얻으려는 뜻에서가 아니라 부처님을 위해 그러는 것이니, 사무치는 내 마음과 지극한 정성을 경이나 절을 통해 공양 올리는 것입니다.
이렇듯 열 가지 공부를 매일 하다 보면 거칠었던 마음은 어느새 정화되며 삶은 점점 넉넉해지고 밝아져 가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기본 공부를 토대로 매사에 만나는 분들마다 고맙다, 잘했다, 미안하다, 의 세 마디가 떠나지 않고, 언제 어디서나 부처님 감사합니다! 라는 소리를 외쳐 봅니다. 그러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드넓은 보현행이 원만구족하게 펼쳐지는 날이 옵니다. 하나의 행원에서 열 가지 행원이 동시에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고마운 것도 미안한 것도, 모두 부처님! 하는 한 마디로 부처님 품속으로 들어가 버리게 됩니다.
2-2.보현행원품(혹은 '보현행자의 서원') 독송
이것은 2-1 에서처럼 비교적 충분한 시간(1-2 시간)을 여유롭게 공부할 수 없거나 초보불자님들을 위한 방법입니다. 무조건 행원품(한글, 한자 모두 무방)을 큰 소리로 하루 한 번 이상 읽는 것입니다.
아침마다 정해진 시간에 보현행원품 혹은 광덕큰스님의 '반야보살행원기도문'과 '보현행자의 서원'을 읽습니다. 시간이 넉넉지 않을 경우 후반부의 게송은 빼고 읽습니다(보현행자의 서원은 모두 11 분(分)으로 구성되었으니, 매일 한 분씩 읽으시면 됩니다). 때로는 후반부 게송만 따로 읽습니다. 이렇게 행원품을 독송하는 자체만으로도 충분한 행원의 공덕을 이룩할 수 있습니다. 일독으로 부족하면 삼독, 칠독씩 해도 됩니다. 이 때 염불을 함께 하셔도 좋습니다. 즉 일독하시는 분이면 일독이 끝난 후 염불을 하시는 것입니다.
2-3.타 수행과 보현행원
행원은 원만행이라, 다른 어떤 수행도 배격하지 않습니다. 근기와 인연 따라 다양하게 펼쳐진 것이 오늘 날의 여러 수행입니다. 모두가 성불하는 수행법입니다. 그러니 지금까지 해 오시던 수행을 그만 두고 따로 시작할 필요가 없습니다. 다만 지금의 수행에 '보현의 원'만 덧붙이면 되는 것입니다. 비유하면, 집을 짓되 부수고 재건축을 하는 게 아니라, 집은 있는 그대로 두고 '리모델링(?)' 하는 것입니다. 공경하고 섬기고 공양하는 보현의 원행 자리를 떠나지 않고 나의 삶 나의 수행을 지어가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화두를 드실 때 깨치려 드시지 말고, "내가 공부를 잘 하여 반드시 보리를 이루어 모든 중생들을 이익되고 행복하게 만들기 발원..."하는 서원을 세우고 드는 것입니다. 위빠사나, 절, 사경 등등, 모든 수행도 마찬가지입니다. 수행에 들어가기 앞서 구하는 마음, 깨치려는 마음, '나'라는 마음을 버리고 오로지 '일체 중생의 이익이 되고 복밭이 되겠다!', 하는 원을 세우고 절을 하시고 관을 하시고 사경을 하시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수행 이전에 서원을 세우라(先立淸淨願 修習菩薩行)'는 화엄 수행, 보현행원의 가르침입니다.
또한 모든 수행을 보현행원으로 합니다. 예컨대 좌선을 해도 깨닫기 위해 하는 게 아니라 부처님 공경하는 마음으로 앉습니다. 단, 부처님이 내가 깨달음을 얻는 것을 기뻐하실 것 같으면 부처님(?)을 위해 깨달아 주는 것입니다. 깨달아서 나의 밝은 소식, 밝은 마음을 공양 올리는 것입니다. 의심도 깨치기 위해 하는 것이 아니라, 의심이 없는 그 자리를 공양하기 위해 의심하는 것이니, 의심이 본래 없는 줄 알면서 이뭣꼬? 하는 불같은 정열로 참구하는 것입니다.
경을 읽어도 마찬가지입니다. 무슨 공덕을 얻으려 읽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것은 이미 갖춰져 있으니, 내가 닦든 안 닦든 나는 이미 공덕 덩어리인 것입니다. 내 마음이 바로 밝은 소식 그 자체며, 내 마음이 이미 경에서 말하는 소식들이 꽉 차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무얼 구하거나 얻는 마음이 아니라 그저 내 마음 내 환희를 찬탄하고 부처님께 공양 올리는 것입니다.
절을 할 때도 하심이나 업장 참회를 구하지 않습니다. 내 마음이 이미 광명 덩어리라, 그 광명을 절을 통해, 사경을 통해, 다라니를 통해 꺼내 쓰는 것입니다. 죄라는 것이 앉을 자리가 없는 그 본래 밝음, 본래 꽉 찬 공덕 덩어리를 업장이나 죄에 상관없이 그냥 꺼내 쓰며 일체 중생, 일체 부처님께 공양 올리는 것입니다.
용수보살은 '최상의 염불을 하려면 공경심으로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즉, 염불을 정토왕생이나 다른 목적에서가 아니라 오로지 '공경심'으로 부처님을 염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바로 '보현행원으로 염불하는 것'입니다. 지극한 공경심이 보현의 마음인데, 그런 보현의 마음으로 염불을 하면 똑같은 염불도 최상의 염불이 되는 것입니다.
수행에 어떤 목적을 두지 말고, 오로지 부처님을 갖다 놓고 부처님 공경하고 찬탄하는 마음으로 수행을 지으면 모든 수행이 보현행원으로 변합니다. 보현행원을 하되 독경으로 하고 주력으로 하고 절로 하고 사경으로 하는 것입니다. 보현행원은 어떤 수행, 어떤 가르침, 어떤 삶과도 대립이 없습니다. 마치 서로 더할수록 밝아지는 빛처럼, 행원이 가는 곳은 모두가 있는 그 자리에서 더 밝아지고 더 눈부셔집니다. 평범한 물건들이 모두 명품으로, 보배로 변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들어간 공부 자리에는 깨쳐도 깨친 바가 없고 지어도 지은 바가 없습니다. 그야말로 망망대해라, 보현의 품속에 나라는 생각, 지었다는 생각, 이루었다는 생각 일체가 사라지며, 오직 찬란한 부처님 무량 공덕만이 우리 앞에 눈부시게 됩니다.
[보현행원]보현행자의 하루-언제나 ‘고.잘.미.섬.공’을 잊지 않습니다!
보현행자의 하루는 ‘고.잘.미.섬.공.’으로 시작됩니다.
보현행자는 고맙고 잘하고 미안하고 섬기고 공양하는 마음으로 아침을 맞습니다. 부처님께 감사하고 배우자에 감사하며, 아이들에 감사하며 이 밝은 하루를 맞은 것에 감사합니다.
보현행자의 마음에는 온통 고맙고 대견스럽고 미안한 마음뿐입니다.
변변챦은 자신을 만나 평생을 함께 하는 배우자에게 고맙고 대견스럽고 미안하며, 좋은 여건을 만들어주지도 못하는 부모 아래 꿋꿋이 성장하는 아이들이 고맙고 대견스러우며 미안합니다. 그리고 끝없이 밀려오는 눈부신 부처님 은혜에 감격하며, 오늘도 만나는 모든 부처님을 반드시 섬기고 공양하겠다는 다짐으로 하루를 맞습니다.
길을 가는 자리에서도 ‘고잘미섬공’이며, 일터에서도 ‘고잘미섬공’입니다. 하루종일 감사와 찬탄과 참회의 마음으로 일을 맞고 사람들을 맞습니다. 퇴근 길에 끼어드는 차량에도, 만원의 전철 간에서도 고잘미섬공의 마음을 잊지 않습니다. 언제 어디서나 모든 분을 섬기고 공양하겠다는 다짐을 잊지 않으며, 거친 환경, 거친 사람들 속에서도 늘 감사와 찬탄을 멈추지 않습니다. 엄청나고 거창한 일에만 그러는 것이 아니라, 그리고 어느 특정한 때 가령 내가 필요할 때나 내게 이익이 될 때에만 그러는 것이 아니라, 작고 보잘 것 없는 일, 내 이익과 아무 관계없는 매 순간순간 찰나마다 끊이지 않고 이어집니다. 먼 훗날이 아니라 '바로 지금 이 작은 자리'에 그러한 고잘미섬공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주부 역시 집에 남아 고잘미섬공의 마음을 잊지 않습니다. 집안 청소를 하고 세탁을 하며 온갖 궂은 일을 할 때도, 자신을 위해 힘든 일터에서 오늘도 갖은 일을 마다하지 않고 있을 배우자를 생각하며 감사하고, 만만치 않은 교육 현실을 믿음직스럽게 헤쳐나가는 아이들에 대해 감사합니다.
저녁밥을 지을 때도 감사한 마음으로 쌀을 씻고 찬탄의 마음으로 밥을 앉히며, 일터에서 돌아올 남편과 아이들을 공양하는 마음으로 반갑게 맞습니다. 행여나 여력이 있으면, 아니면 평소에 절, 독경, 참선, 기도 등의 불교식 일과 수행으로 부처님을 찬탄하고 공양하는 분이라면, 새벽이나 밤에 시간을 내어 부처님 앞에 앉아 봅니다. 그리고 모든 정성 다 바쳐 부처님께 나의 공부를 공양 올립니다.
그러한 공부 공양은 언제나 한결같고(連續性) 간단(間斷)이 없으며, 언제나 늘, 정한 때(定時)에 시계처럼 정확하게 올려집니다.
보현행자의 마음에는 언제나 ‘고잘미섬공’뿐입니다. 거기에는 아무런 '조건'이 없습니다. 깨닫지 못해도 수행을 하지 못해도 엄청난 공덕을 얻지 못해도, 우리는 언제나 그 마음을 잊지 않습니다. 또한 업이 깊고 번뇌가 깊고 죄가 태산같아도 보현행원의 길에는 아무런 장애가 되지 못합니다. 그것은 내 본래생명이 감사요 공경이며, 찬탄이고 공양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마음자리, 내 일심(一心) 자리가 감사와 찬탄, 참회와 공양으로 꽉 차 있기에 우리는 그런 내 마음을 노래하는 것뿐입니다. 그리고 그런 마음 자리는 우리가 죄업중생이든 밝은 이든 아무런 상관, 차별이 없습니다. 본래가 밝고 본래가 힘찬, 그 어떠한 조건에도 영향받지 않는, 영원한 우리 모두의 본래 모습입니다.
보현행자는 일상 삶을 살 때도 수행을 할 때도, 늘 '고잘미섬공'의 자리를 떠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 어떤 환경, 어떤 가르침과도 대립하지 않습니다. 모두와 화합하고, 모두가 아름다운 꽃을 피울 뿐입니다. 겨울의 세찬 바람은 봄날의 따스한 미풍으로 변하고, 우리를 힘들게 하는 역경도 모두가 순경, 축복으로 변합니다.
아무리 삶이 힘들어도, 아무리 미래가 암담해도, 보현행자는 찬탄과 감사를 잊지 않습니다. 밀려오는 고난 앞에도 감사하며, 그 어떤 아픔에도 감사하며, 심지어 절망 앞에도 감사하며, 끝없는 긍정의 물결, 희망의 물결을 아픔 속에서 어둠 속에서 스스로 일으킵니다.
눈물 속에서도 감사하며, 아픔 속에서도 찬탄을 그치지 않는 한결같고 지극한 내 삶에 대한 끝없는 감사와 긍정! 이러한 밝은 마음, 밝은 행, 밝은 삶이, 마침내 저 거대한 어둠의 물결을 밀려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자리는 한없이 밝은 자리, 한없는 번성과 성장이 밀려오는 자리입니다. 보현행자의 삶이 늘 밝고 힘차며 건강한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실로 보현행자의 삶, 보현행원의 길에는 그 어떤 대립도, 어둠도 없습니다. 오직 밝고 힘찬 미래, 끝없는 내 진실 생명의 노래, 끝없는 대긍정의 숨결이 환희로 뜨겁게 박동치는 삶이 보현행자가 가는 길이요 보현행원의 삶입니다.
普賢合掌
*[알림]‘고잘미’의 버전(?)이 바뀌었습니다.
최신 버전은 두 글자가 더 붙은, ‘고잘미섬공’이고요,
그 내용은 고맙다, 잘했다, 미안하다, 외에,
‘섬기고 공양하겠습니다!’하는 말씀이 더 붙었습니다...*^*^*_()_
감사는 더 큰 축복의 열쇠
우린 언제부터인가 내게 은혜를 배푼이에게 감사의 마음을 표현하는 것을
잊고살고있다.
이 나라가 내게 주었던
내 가정이 내게 주었던
내 동료가 내게 주었던
내 상사가 내게 주었던
내 부하직원이 내게 주었던 은혜에 대한
감사가 더 큰 기쁨과 축복을 안겨줌을 뒤로한채 말이다.
감사해보자
내 스스로에게
그리고 그 감사가 더 큰 축복을 가져다 줌을 확신하면서...
감사는 더 큰 축복의 열쇠
어느 대학 도서관에 고서를 기증한 노인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기증한 책은
보관 상태도 나쁘고 글자도 초서가 많아 어떤 것은
알아 볼 수조차 없어서 사서는 자못 화가 났습니다.
“책을 기증하려면 좀 좋은 것을 기증하지. 꼭 걸레쪽
같이 아무 쓸모 없는 것을 도서 기증이랍시고 할게 뭐야?”
하면서 불평하였습니다.
마침 이 말을 들은 도서관장은
그 사서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이 그 노인에게 가서
사과를 하든가 못하겠거든 사표를 쓰시오.
당신 하나 때문에 우리 대학의 인상이 나빠지고
도서관의 장서를 확보하는 데에 지장이 있을 것이니
그런 해를 끼치는 사람을 어찌 학교 직원으로 둘 수 있겠소?”
이 말을 들은 사서는 크게 잘못을 빌고
영감님을 찾아가서 사과하였습니다.
그러자 그 영감님은 대단히
감동을 받으면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아,,,,
당신이나 당신네 도서관 관장은 참으로 훌륭합니다.
사실 진짜 좋은 책은 집에 두었는데 그것마저 기증하겠소.
감사하는지,
불평하는지 나는 당신네 대학의 태도를 주시하고 있었소.
당신들의 태도는 참으로 나의 마음을 흐믓하게 합니다.
며칠 후에 내가 학교로 직접 찾아가겠습니다.”
감사는 항상 우리를 더 좋은 곳으로 인도하는 지름길입니다.
【 옮 겨 온 글 중 에 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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