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도를 수도하는 처소와 방법(佛道를 修道하는 處所와 方法)

2009. 2. 27. 09:53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발심수행장·수행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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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도를 수도하는 처소와 방법(佛道를 修道하는 處所와 方法)

   

불문(佛門)에 들어가 마음을 닦아서 불도(佛道)를 성취하려면

적어도 몇 십 년 공부를 하여도 성공하기가 어렵고다고 하는데

승려가 되어 산간에 들어가 수도(修道)만 한다면 모르거니와

이 세상에 처하여 가정생활을 하면서 도저히 공부할 수가 없을 것 같으며

설사 개인의 수양을 위하여 부모와 처자를 버리고 산간에 들어가 수도만 한다면

부모에는 불효가 될 것이며 가정에는 죄인이 될 것이요, 사회에는 낙오자가 될 것이며

국가에 대하여서는 불충한 국민이 될 것이니 이 점에 대하여 밝혀 보면.

 

수도하는 처소와 방법은 개인의 근기와 사정에 따라서 각각 다릅니다.

<혹은 산간(山間)에서도 할 수 있으며 가정(家庭)에서도 할 수 있으니

산간에서 한다고 반드시 성공하는 것이 아니요,

가정에서 한다고 성공이 못되는 것은 아니다.

산간을 원하는 것은 고요하고 한적한 까닭이요,

가정을 싫어함은 분요(紛擾)하고 복잡한 까닭이다.

그러나 분요한 가운데서 마음을 닦던 자가 고요한 경계를 당하면

풍랑이 가라앉은 맑은 바다와 같아서 능히 밝은 자성을 볼 수가 있지만,

고요한 가운데서 수도하던 자가 분요한 경계를 당하게 되면

응달에서 자라난 풀잎이 갑자기 햇빛에 쬐이는 것과 같아서 산란심이 생기게 된다.  

그러므로 예로부터 정중공부(靜中工夫) 십년 한 것이

 

요중공부(搖中工夫) 삼년 한 도력(道力)을 당하지 못한다 하여

실지수양에 득력(得力)한 자는 절대로 정중공부를 원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근기가 나약한 중생으로서 처음 수행에 착수한 자는 가정의 사정이 허락한다면

얼마 동안은 산간이나 또한 한적한 곳에서 수행의 기초를 닦는 것도 필요한 것이다.

 

그러므로 부처님 당시에도 비구(남승). 비구니(여승). 우바새(청신사).

우바이(청신녀)의 사부대중으로 나뉘어 있었고 따라서 부처님께서도 세간법과 출세간법이며 비구계와 보살계 등의 구별이 있음을 말씀하셨다.

 

그러나 산간에 들어가든지 세간에 처해 있든지 막론하고 수도하는 목적이

마음을 닦아서 스스로 깨친 후에는 세간에 처하여 중생을 제도하는 것이

불교의 사명이요 목적이니만큼 산간에만 처하여 자기수양만으로 일생을 허송하는 것은 불가한 것이다.

 

그러므로 어렸을 때에 가정의 사정에 따라서 부모에게 승낙을 받아

출가 승려가 되는 자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부모에게 불효가 되고 가정에 죄인이 되면서라도 출가 입산하라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부처님 당시는 물론이요,

그 후에도 재가 보살로서 포자농손(泡子弄孫)하면서 득도성공한 자가 부지기수로 말할 수 없다.

 

그런데 불문에 들어가 명심견성(明心見性)하여 최후성불까지 수행하려면 용이한 것은 아니다.

인과론에 인연법(因緣法)으로 본다면 불교에 인연을 맺은 후라도 일생 이생에 되는 것이 아니요, 다생겁을 드나들면서 육도만행을 거듭하지 않고는 성불하기는 어렵다고 하였다.

 

그렇다고 해서 갈 길을 아니 갈 수는 없는 것이다.

짐이 무겁고 길이 멀지라도 가기만 하면 어느 날이고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다.

그러므로 나옹국사의 증도가에도「속효심(速效心)을 내지 말며 나태상도 쓰지 말고

슬금슬금 가다듬어 밤새도록 가고 보면 해 돋을 때 아니볼까」하셨으니

당장에 대각(大覺)을 이루지 못한다 할지라도 마음을 닦으면 한 달의 효력이 있고,

일생을 닦으면 일생 동안에 효력을 보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삼일수심은 천재보요(三日修心은 千載寶), 백년탐물은 일조진(百年貪物은一朝塵 )이라는 말과 같이 사흘 동안 닦은 마음은 천년의 보배가 되지만, 백 년 동안 탐욕으로 모아놓은 재물(財物)은 결국 하루아침 티끌이 되고 마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다 한 가지 사람이지만 마음을 닦고 못 닦는 데 따라서 대인과 소인의 구별이 있고 성현(聖賢)과 범부(凡夫)의 차이가 생기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에게 제일 귀중하고 소중한 것은 생명과 재산이다.

그러나 대의를 위하여는 생명을 초개(草芥)와 같이 보는 위인성자와 충신열사가 얼마나 많은가. 

 

그와 반대로 구구한 (자기)생명을 살리기 위하여 절개를 변하고

국가와 민족을 팔아먹는 간신역적과 소인천배도 한량이 없이 많다.

돈도 역시 그러하다. 황금(黃金)은 흑사심이라는 말과 같이 돈을 모으기 위하여는

모든 염치(廉恥)와 의리 도덕이며 법률과 양심(良心)을 속여서라도 절개와 정조를 팔아서라도 또는 나라를 팔고 민족(民族)을 팔아서라도 심지어 목숨을 내놓고 살인강도질을 하더라도 돈을 모으겠다는 것이 돈에 대한 사람의 극단행동이요 애착이다.

돈만 있으면 천 년 만 년 살 것 같으며 돈만 가지면 세상에 못할 것이 없으리라는 생각이 돈에 대한 사람의 최대 욕망이다.

 

 

 

그러나 이와 반대로 굶어죽는 한이 있더라도 돈을 위하여 불의한 행동을 하지 않는 사람도 적지 않다.

한 걸음 나아가서 돈은 죄악(罪惡)의 근본이다. 방법의 정당 부정당을 막론하고

돈을 모은다는 것은 죄악(罪惡)을 모아 쌓는 것과 같이 생각하여 일생(一生)을 곤궁한 가운데서 깨끗하게 마치는 사람도 없지 않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자신의 생명과 가정의 행복을 희생(犧牲)하고서라도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세계 인류의 평화를 위하여 고해(苦海)에 빠진 중생을 제도하기 위하여 일생(一生)을 바치는 위인과 성자들도 간혹 볼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모두 마음의 수양에서 나온 것이다.

수양(修養)의 힘은 한량이 없이 큰 것이다.

 

사람은 사람다운 사람이 되기 위하여 사는 것이요 먹는 것이다.

먹기 위하여 산다든지 살기 위하여 먹는다면 인생의 가치와 의미는 전혀 몰각하고 마는 것이다.

중생을 위하여 인류를 위하여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의리와 도덕을 지키는 데서

사람의 참된 가치를 발휘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살기 위하여 먹기 위하여

의리와 도덕을 지키는 데서 사람의 참된 가치를 발휘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살기 위하여 먹기 위하여 의리와 도덕을 저버린다면 이러한 자는 참으로 국가에 불충이요,

인류 사회에 큰 죄인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마음의 수양이 없는 자로서 국가에 공권을 잡게 되고 사회 각 방면에 활동하게 된다면 그 사회는 결국 부패하여질 것이요, 그 민족과 국가는 멸망하고 말 것이다.

 

그런즉 재물에 탐욕이 있는 자가 어찌 대의를 지킬 수 있으며,

생명에 애착이 있는 자가 어찌 대사업을 성취할 수가 있으랴.

물욕(物慾)을 해탈하고 생사(生死)를 초월한 마음의 큰 수양을 하지 않고는

대사업과 대성공은 기대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불교의 신앙을 실생활을 떠난 이론적 수양으로 본다는 것은

큰 오해라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현공 윤주일대법사 설법자료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