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이 깨달음이고 무엇이 닦음인가 ?

2009. 4. 2. 08:26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발심수행장·수행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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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깨달음이고 무엇이 닦음인가 ?

 

불교 수행자에게는 깨달음과 닦음의 문제는 너무나 중요 하고 절실한 문제 입니다

어떤 분은 깨달음만을 절대적으로 중시 하고 어떤 분들은 닦음을 중시 합니다

다 나름데로 타당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 때문에 불교가 원리적으로는 출세간적인것처럼 받아 드려 지기도 하고,

현실적으로 볼때는 세간적인 행으로 나타나야 한다고 요구 되기도 합니다

이 양자의 균형적인 발전 없이는 한국 불교의 발전은 기대 할수 없을 것 입니다

 

깨달음이건 닦음이건 팔정도 안에서 언급되지 않는다면 그건 진리가 아닐것 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팔정도의 정견이 깨달음이고 그이하 다른 항목이 모두 닦음이된다고 볼수있습니다

 

소위 앎과 행의 일치를 실천 하는것이 팔정도라는 뜻 입니다

사실 부처님께서는 깨달음이 더 중요 하냐, 닦음이 더 중요 하냐에 관심이 있으신것이 아니었습니다

 

부처님이 말슴하신 목표는 깨달음으로 가든,닦음으로 가든,팔정도를 행해서 모든 집착을 여윈 해탈과 탐진치 삼독을 벗어나 자유롭고 행복한 열반만 실현되면 그만 이었기 때문 이었습니다 이 사실이 중요 합니다

 

그러면 팔정도 안의 깨달음을 정견으로 보는 까닭을 말씀드립니다

첫째  팔정도는 부처님이 깨달으신 제일가는 진리의 길이 아닙니까? 연기법의 실천이 바로 팔정도이므로,정견은 중도 연기법에 대한  깨달음 입니다

 

부처님의 깨달음은 시,공을 초월하여 영원한 진여 실상 입니다 

이 진리는 부처님이 나시기 전부터 있었고,지금도 여기에 살아 있으며,앞으로도 영원히 있을 진리 입니다  (돈오)

 

둘째,우리는 그 진리를 부처님을 통해 알게 되었고 이론적 연기법을 통해서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자기체험을 통해서 확신하게 되겠습니다 이것이 깨달음을 정견으로 한 닦음 입니다  (돈오점수)

 

셋째,닦을것이 더 없는 경지의 깨달음 입니다 이것만을 돈오로 말해야 한다는  입장임을 쉽게 알수 있습니다 (돈오돈수)

그러면 이것을 그 깨달음의 순서로 다시 한번 되돌아 보지요

 

처음 것은 누구나 다 본래 깨달아 있음을 전제로 하고 아는 깨달음 입니다(확정형)

다음은 그 깨달음에 의존해서 닦아가는 깨달음이 됩니다(진행형)

그 다음은 깨닫고 보니 그 깨달음은 본래 더러워 질수도 없고 다시 닦을것이 없는

 

것임을 확실하게 안 깨달음 입니다(완성형)

이 삼자는 따로 따로 인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사실은 하나로 관통되어 있습니다 본래 확정형이기 때문에 진행형이 있을수 있고 완성형이 있게 되는 것 이지요

 

본래 안에 있는것을 확인해가는 것이지 없는것을 깨달아 가는것이 아닙니다

이런 관점을 가지고 보면 어느 지점에 있드라도 그것은 돈오를 벗어나 있지않는 정견 에서의 삶 입니다

 

그런데 왜 보조스님은 돈오 점수를 말했고 성철스님은 돈오 돈수만을 얘기하고 있는가 그것이 궁금사가 아닐수 없습니다 보조스님때는 수행자는 많으나 어떻게 닦는것이 제대로 닦는것인가를 모르고 닦는자가 많으므로,

 

이를 바로 잡아주기 위해서 돈오를 세우고 닦아야 제대로 수행이 된다는 점에서 돈오점수를 강조 한것입니다

반면에 성철스님은 가만히 보니 도처에 한소식했다는자들은 많은데, 

 

막행막식 하므로 돈오이면 돈수가 되어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므로 뒤집어서 닦음이 완성되야 깨달음(돈오 돈수)이라고 말한 것 입니다 이는 방편으로 말한것이 아니고 그 분들은 진심으로 그렇게 말씀한 것이라 생각 합니다

 

성철스님의 담박 깨침을 강조하는 간화선의 입장을 충분히 이해 합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팔정도의 입장에서 말 안할수 없습니다 부처님의 깨달음이 본래적인 돈오이므로 팔정도에서는 양자를 다 똑 같은 출발점으로 본다는 뜻 입니다

 

돈오돈수라는 깨달음이 전제가 되므로 돈오 점수라는 수행이 가능한 것이지요 그래서 팔정도는 더 닦을것이 없는 돈오 돈수가 되었어도 이 길은 깨친자의 길이므로 자동적으로 굴러가는 중도의 길 일수 밖에 없습니다

 

팔정도를 벗어난 깨달음과 닦음은 있을수 없습니다 돈오 점수도 팔정도 안에서 보아야 하고,돈오 돈수도 팔정도 안에서 보아야 합니다

보조스님이 돈오 돈수를 몰라서 돈오 점수를 세운것이 아닙니다

 

돈오면 돈수여야 하는 것은 이치적으로 생각 해도 누구나 알수 있는 정도 아닙니까? 그분은 돈오다 점수다를 떠나서 수행자가 닦을때 불변의 진리인 돈오에다가 기준을 두고 점수를 해야 한다는 뜻으로, 점수에 초점을 맞춰 말한 것이지요

 

반면에 성철스님은 돈오에다만 초점을 맞추어서 돈오에는 점수가 붙을수 없다고 말한것 이지만 성철스님도 선오 후수(先悟後修)의 현실적인 중요성을 모르고 하신 말씀은 아니므로 두분 다 말은 맞으나 초점이 달라서 나온 말이라고 이해 해야 합니다

 

이문제는 이렇게 보는게 정답 아닐까요?

깨달음과 닦음은 근본불교인 부처님의 가르침 안에서 재 해석 되고 실천 되어야 한다고 확신 합니다 언제나 근본불교는 대,소승과 선불교의 스승 이니까요 

 

공덕총림의 세계덕림회

 




 



당신의 뒷모습








사람은 누구라도

앞모습보다 뒷모습이 실해야 한다...

살고 난 뒷자리도 마찬가지.

사람의 귀천은 뒷꼭지에 달려 있느니

뒷모습은 숨길 수가 없다...



- 최명희의 <혼불>중에서







뒷모습은

감추기 어려운

생의 빈틈과 취약성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생의 빈틈을 잘 보여주지 않으려고 합니다.

현대인들은 자기의 빈틈 보이는 일을

무언의 금기로 여깁니다.







사람들은 빈틈을 감추기 위하여

말과 표정과 몸짓을 철저하게 관리하기도 합니다.

그것을 관리하기 위한 입과 눈과 손은 모두

앞에 달려 있거나

앞으로 움직이는데 익숙합니다.







<뒷모습>은

대체로 패자의 고개 숙인 모습으로,

또는 소멸을 예비하는

生의 허무하고 쓸쓸한 모습으로 여겨질 뿐입니다.



<뒷모습>이 노출하는 빈틈, 때로는...

빈틈없이 관리되는 <앞모습>보다 절실하고

소중한 생의 가치들을 보여줄 때가 있습니다.







그리운 것은

모두 등뒤에 있다,라는 詩처럼...

앞모습은 말을 하지만,

뒷모습은 말이 없습니다.



뒷모습은 말이 없지만,

말없음 가운데 더 많은 말을 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뒷모습에서 삶의 고단함과

쓸쓸한 풍경을 무심히 느끼곤 합니다.







당신의 뒷모습을 보았습니까?

당신의 뒷모습은

당신이 그렇게 감추고 싶어하던

당신의 빈틈이었음을...



살고난 뒷자리...

뒷모습이 아름다운 사람이 되도록,

오늘도

당신의 앞모습이 뒷모습까지 투영되는

아름다운 삶이 되시길 소망합니다.
 

 




                                              


      
                            

- 박선희 시인의 <아름다운편지>

그림 : Roberto Lia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