淨諸業障菩薩章(정제업장보살장) 2
"선남자여, 무엇이 아상(我相)인가?
이른바 중생들이 마음으로 증득한 바이니라.
선남자여, 비유하면 어떤 사람이 온몸이 건강하고 평안해서
홀연히 나의 몸을 잊었다가 섭양(攝養)하는 방법이 어긋나서
사지가 불편할 때 조금만 침을 놓거나 뜸을 뜨면
곧 나[我]가 있는 줄 알게 된다
그러므로 증득해 취하여야 비로소 나의 본체[體]가 나타
나느니라
선남자여, 그 마음이 여래께서 필경에 분명히 아신 청정 열반
까지 증득할지라도 모두 아상이니라
선남자여, 무엇이 인상(人相)인가?
이른바 중생들이 마음으로 증득한것을 깨닫는 것이니라
선남자여,
나[我]가 있다고 깨달은 이는 다시는 나를 잘못 집착하지 않거
니와 나[我]가 아니라고 깨달은 깨달음도 그와 같나니
깨달음이 이미 일체 증득한 것을 초과하였다는 것이 다
인상이니라
선남자여,
그 마음이 내지 열반이 함께 나[我]라고 뚜렷이 깨달을지라도
조금이라도 마음에 깨달았다는 생각을 두면 진리를 증득했다
는 생각을 다 없앴다고 하더라도 인상이라 이름하느니라
선남자여, 무엇이 중생상(衆生相)인가?
이른바 중생들 스스로 마음으로 증득하거나 깨달음으로
미치지 못하는 바이니라
선남자여,
비유하면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나는 중생이다'고 하면
그 사람이 중생이라 말한 것은 나도 아니며 저도 아닌 줄 아는
것과 같다
어찌하여 나[我]가 아닌가?
내가 중생이므로 나[我]가 아니다.
어찌하여 저가 아닌가?
내가 중생이라 했으므로 저의 나가 아닌 까닭이다.
선남자여,
단지 중생들의 증득함과 깨달음이 모두 아상, 인상이니, 아상
인상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 요달한 바를 두면
중생상이라 이름하느니라.
선남자여, 무엇이 수자상(壽者相)인가?
이른바 중생들의 마음의 비춤이 청정하여 요달한 바를 깨닫는
것이니 일체 업지(業智)가 볼 수 없는 것이
마치 목숨[命根]과 같느니라.
선남자여 마음으로 일체 깨달음을 비추어 보는 것은 다 티끌
이니 깨달은 이와 깨달은 바가 티끌을 여의지 못한 때문이니라
마치 끓는 물로 얼음을 녹임에 따로 얼음이 있어 얼음이 녹은
것인 줄 아는 이가 없음과 같아서 나를 두어 나를 깨닫는 것도
이와 같느니라
선남자여, 말세 중생이 네 가지 상[四相]을 알지 못하면 비록
여러 겁을 지내도록 힘써 도를 닦더라도 단지 유위(有爲)라
이름할 뿐이요
마침내 능히 일체 성스러운 과보를 이루지 못하리니 그러므로
정법(正法)의 말세라 이름하느니라.
무슨 까닭인가?
일체 나를 잘못 알아서 열반을 삼기 때문이다.
비유하면 어떤 사람이 도적인 줄 모르고 아들로 삼음에 그 집
의 재산을 마침내 보전하지 못하는 것과 같다.
무슨 까닭인가.
나를 애착함[我愛]이 있는 이는 또한 생사도 미워하는지라
사랑하는 것이 참으로 생사임을 알지 못하는 까닭에 따로
생사를 미워하나니 해탈하지 못한 것이니라
어찌하여 마땅히 법이 해탈치 못함을 아는가?
선남자여, 저 말세 중생으로서 보리를 익히는 자가 자기의
조그마한 증득으로써 스스로 청정을 삼음은 능히 아상의 근본
을 다하지 못함이니라
만일 다시 어떤 사람이 그 법을 칭찬하면 곧 환희를 내어서
문득 제도하려 하고 만일 다시 그가 얻은 것을 비방하면
문득 화를 내나니 곧 아상을 견고하게 집착해 가져 장식(藏識)
에 잠복하고 여러 감관[根]에 유희해서 일찍이 끊이지 않은
줄 알 수 있느니라.
- 원각경(圓覺經)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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