靜坐無人識 조용히 앉아 있으니 아는 사람 없고
孤月照寒泉 찬 샘물에 외로운 달이 비쳐 있다.
歌中不是禪 노래 가운데 선(禪)이 있지 아니한가.
첫 두 구절은 참된 실상이 홀로 드러나 일체에 구속되지 않고,
온 대지에 빛이 밝아서 터럭만큼도 장애가 없음을 말한 것이다.
그 다음 네 구절은 진여(眞如)의 미묘한 본체를 설한 것이니,
범부는 애당초에 알 수 없고 3세 제불도 나의 그 자리를
찬 샘물에 외로운 달이 비쳐 있다는 말은 이러한 경계를
최후의 두 구절은 사람들이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을
참선요지(參禪要旨) - 16
◎ 구참자의 어려움과 쉬움
어떤 것이 구참자의 어려움인가.
구참자는 참된 의심이 눈앞에 나타날 때면
깨달음도 있고 비춤도 있지만 생사(生死)에 속해 있으면
깨달음도 없고 비춤도 없고 허무에 떨어진다.
이 경지에 이르면 참으로 어려움이 많다.
대개는 여기에 이르면 깨끗이 벗어나지 못하고
백척간두(百尺竿頭)에 서서 나아갈 방법을 모른다.
어떤 이들은 이 경지에 이르면 정(定) 가운데서
조그만 지혜가 일어나, 옛 사람의 몇몇 공안을 건성으로
알아채고서는 곧 의정을 놓아버린다.
스스로 확철대오(確撤大悟) 했다고 생각하여
시를 읊조리고 게송을 지으며 눈을 끔벅이고
눈썹을 치켜올려 선지식이라고 떠들면서 자기를
알아주지 아니하는 자들은 마군의 권속이라고 한다.
또 어떤이는 달마스님의 「밖으로는 모든 반연을 쉬고
안으로는 헐떡이는 마음이 없어서, 마음이 담장과
같아야 도에 들어갈 수있다」는 뜻과 육조스님의
「선도 생각지 말고 악도 생각지 말라. 바로 이러한 때에
어느 것이 명(明) 상좌의 본래 면목인가?」라는 뜻을
잘못 알고서는 고목이나 바위덩이처럼 앉아 있는 것만으로
지극한 원칙으로 삼는다.
이와 같은 사람들은 신기루를 보배 있는 장소로 알며
타향을 고향으로 여기는 것이니, 노파가 암자를 불사른 것도
바로 이러한 꽉 막힌 자들을 꾸짖기 위한 것이다.
어느 것이 구참자의 쉬움인가.
이 때에 이르러서는 다만 자만하지 말고, 중간에서
걷어치우지도 말고, 면밀하게 공부해나가야 한다.
면밀한 가운데 더욱 면밀하게, 미세한 가운데
더욱 미세하게 해야 한다.
시절이 한번 이르면 통의 밑바닥이 저절로 떨어질 것이다.
만약에 그렇지 아니하면 선지식을 찾아서 못을 뽑고
쐐기를 빼야 한다.
⊙ 결론(結論)
이제 나는 한 강설을 마쳤다.
그러나 이것 또한 넝쿨을 펴는 것이오
쓸데없는 길을 갈래 내는 것이다.
무릇 언설은 모두 참다운 뜻이 없다.
그러므로 옛 스님네들은 몽둥이로 때리지
아니하면 고함을 질렀다.
어찌 이처럼 너절하게 늘어놓는 일이 있었겠는가.
그러나 요즘은 옛날과 같지 않아 억지로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을 만들지 않을 수 없다.
그대들은 동참하라.
구경(究竟)에 있어서 손가락은 무엇이며
달은 무엇인가. 참구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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