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10. 14. 22:23ㆍ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화엄경·보현행원품
[감로탱화 - "동원불교미술원"의 작품. 상업적용도로 사용은 법의 저촉을 받는답니다.]
[행원은 영원한 나의 생명 나의 노래]
보현행원은 '매사에 원(願)을 가지고 행(行)'하며,
모든 것을 '부처님께 바치고(廣修供養)',
일상 생활에서는
'고맙다, 잘했다, 미안하다(禮敬諸佛, 稱讚如來, 懺悔業障)'
는 말을 지어나가는 수행입니다.
그러다 보면 깨달음 유무에 상관없이
우리는 부처님으로 살아가게(行佛) 되고,
내가 있던 자리에 부처님이 찾아오시게 되며
온 세상이 부처님으로 가득 차게 될 뿐(행원은 '見佛成佛'법) 아니라
모든 것이 '저절로' 이루어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아상과 집착을 없애려 하지 않아도 저절로 없어지며,
계를 지키려 하지 않아도 저절로 계가 지켜지며,
그토록 갈망하던 깨달음(見性)마저
'저절로' 오게 되는 것입니다.
고향 떠난 중생이
한사코 고향인 부처 자리로 돌아가려는 노력이 수행이라 할진대,
우리는 그동안
너무 낯선 방법으로 고향에 돌아가려 했던 경향이 있습니다.
평소에 하지도, 익숙지도 않은 여러 방법을
부처 자리로 가는 지름길로 소개받아 하다 보니,
마음만 급하고 성과는 별로 없으며
어렵고 재미(?)도 없을 뿐 아니라 무척 힘이 듭니다.
그러다 보니 '아, 수행은 힘들어! 불교는 어려워!' 하는 마음이 들어
수행을 포기하거나 심지어 불교를 떠나기도 합니다.
우주는 대자비로 충만한 곳 이라,
우리에게 진정으로 소중하고 필요한 것 은,
누구나 언제 어디에서건 쉽게 구할 수 있도록 만들어 놓았습니다.
따라서 진실로 깨달음이 중생에게 필요한 것이라면
특별한 방법이 있어야만 오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싸고 좋은 물건을 브랜드가 없다고 구박하며
굳이 이름 난 백화점에서 비싸게 사야만 직성이 풀리는 분들처럼,
수행이라면 대단한 무엇을 꼭 해야만 하는 줄 알고
내 삶 속에서 수행을 찾는 대신
어렵고 낯선 방법들로 애써 수행을 지어가다
곧잘 좌절하곤 했던 것입니다.
생사를 해결하는 데는
반드시 어렵고 고상하며 낯선 방법이 꼭 필요한 것은 아니니,
'평범하고 일상적인 일을
열심히 행하여 지극해지면 되는 것(印光大師)'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꼭 어려운 방법이 아니라
'우리에게 익숙한 삶을 수행으로 바꿔 지어나가면' 되는 것입니다.
보현행원은
누구나 다 알고 누구나 익숙하며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평범한 삶'을 '수행의 도구'로 삼아
'부처를 지어 가는 수행법'입니다.
원이란 것도 알고 보면
누구나 갖고 있는 욕망을 한 생각 바꾼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내'가 있던 자리에 '부처님'을 갖다 놓은 것뿐인데,
단순한 그 한 마음이 지금까지 하늘을 찌르던 '욕심'을
하루아침에 위대한 불보살의 '원'으로 변하게 합니다.
고맙다 잘했다 미안하다!
이 말 역시 우리가 어릴 때부터 들어 온 말입니다.
그런데 이런 평범한 몇 마디가 우리의 삶을 바꾸고 어둠을 몰아내며
부처님을 출현시키고 부처님을 만나게 합니다.
또한 믿음(決定信心)을 가져오고 닫혀진 내 마음을 열어,
마침내 감사하지 못할 일에도 감사하고
찬탄할 수 없는 일마저도 찬탄하게 합니다.
행마다 원을 세우면 일체 행이 보현행이라!
가수는 노래로 운전하는 분은 운전으로,
주부는 가사(家事)로 학생은 공부로써
법계에 가득한 부처님을 찬탄하며 섬기고 공양하여,
지금 있는 이 자리에서 우리는 바로 성불의 길로 가는 것입니다
(바보 주리반특 역시
참선이나 주력을 잘 하여 성불한 것이 아니라
청소하다 성불하십니다).
알고 보면 삶 자체가 그 어떤 뛰어난 수행 못지 않은 수행이니,
진정한 수행이란 절, 진언, 좌선 등을 더 많이 더 오래 하는 것이 아니라,
'삶 자체가 수행'임을 아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을 모르고 살아 왔고
그것을 깨우쳐 주는 것이 행원입니다.
행원은 어렵고 힘든 것이 하나도 없으니,
오로지 나의 생명, 나의 삶을 찬탄하고 노래하는 것뿐!
그런 찬탄이 온 법계에 가득할 때,
중생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모두가 성불의 길로 가게 됩니다.
수행하는 분 덕분에
수행 안 하는 분들마저 함께 성불하는 것입니다
(진정한 삼매도 어느 특정인이 수행으로 드는 것이 아니라,
이 우주 법계 자체가 본래 '거대한 삼매'임을 아는 것입니다).
행원은 모든 분들에게 회통 원만한 수행입니다.
불교를 모르는 분들은 모르는 그대로
단지 몇 마디 행원으로 부처님 무량공덕 속에 들어가게 되며,
불교를 잘 아는 분, 또는 타 종교인들은
'수행을 행원으로 지어나감'으로써
더 성숙되고 원만한 수행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그것은 보현행원이
'지혜와 자비로 기름진 논밭'과 같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수행을 외롭고 척박한 땅이 아니라,
지혜와 자비 넘치는 기름진 땅에 씨를 뿌리고 지어나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지어지는 수행 농사는,
해마다 풍년이요 곳곳마다 과일과 열매가 넘쳐납니다.
지혜를 말하는 분이 지혜가 없고,
자비를 말하는 분이 자비가 없다면 얼마나 딱한 일이겠습니까?
그러나 행원으로 수행을 지어나가면 그런 일이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수행을 행원으로 지어나갈 일 입니다.
깨닫기 위해 화두를 드는 것이 아니라
부처님 기쁘게 하기 위해 들며,
업장 참회를 위해 주력을 하고 절을 하는 것이 아니라
부처님을 찬탄하고 공양하기 위해 하는 것입니다.
미래에 업장을 지닌 채 정토에 태어나려 염불하는 것이 아니라,
업장 가득한 지금 이 자리에서
부처님처럼 살아가기 위해 명상하고 염불하는 것입니다
(행원으로 염불하면 바로 '念佛禪'이 됩니다).
또한 행원은 좋은 악기나 좋은 물감과 같습니다.
행원으로 연주하는 노래는 그 어떤 악기보다 뛰어나고,
행원으로 그리는 그림은 그 어떤 그림보다 황홀합니다.
우주는 어떤 곳인가? 생명이 가득 찬 자리 입니다.
생명으로 나타난 진리 가 바로 '부처님' 이요,
진리 생명 이 저마다 등가(等價) 의 가치로
법계를 장엄하는 세계가 '화엄'입니다.
그 사실을 아는 것이 '깨달음(覺, 智慧)'이요
그 마음이 '자비'입니다.
깨달음에 몇 가지 착각이 있으니,
깨달음이란 수행을 하는
특별한 이들에게나 오는 '특별한', '순간적' 사건이며.
작은 깨달음은 깨달음이 아니며
깨닫지 못하면 깨달은 자로 살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그래서 한사코 더 큰 깨달음, 더 큰 수행에 매달립니다.
그러나 행원에서는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깨달음은 '누구'에게나, '늘' 일어나는 '보편적 사건'이며
또한 '영원한 사건'입니다.
큰 깨달음만 깨달음이 아니라
작은 깨달음도 틀림없는 깨달음이며,
깨달은 이로 살아가는 것은 깨달음과 상관없다는 것입니다.
미운 오리 새끼가 백조가 되어 하늘을 날아간 것은,
미운 오리가 자신이 백조임을 알아서가 아니라
본래 생명이 백조였기 때문입니다.
그와 같이 우리의 본래 생명이 부처라면,
우리가 부처의 삶을 사는 것은
깨달음과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내가 본래 부처이기에
우리는 깨닫든 깨닫지 못하든
부처의 삶을 살아 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부처님 삶!
그것은 선택 이 아니라 필연 입니다.
'보현행원으로 보리 이룬다(以普賢行悟菩提)'는 말은
'보현행을 해서 깨달음을 구한다' 는 말이 아니라,
지금 이 자리에서
'보현행으로 깨달은 이의 삶을 살아간다' 는 말입니다.
행원에서의 깨달음은 이미 끝난 논제이니,
석가모니 부처님의 성불 이래
깨달음은 '영원한 나의 사건'이 되었으며,
우리는 헛되이 깨달음 유무를 따지기보다
'부처님처럼 살아가는데' 더 힘을 쏟아야 할 것입니다.
불교의 최종 목표는 깨달음이 아니라,
부처님처럼 살아가는 것!
행원을 할 때 우리는 이미 깨달음을 넘어
반야의 삶, 부처님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행원의 공덕은 무엇인가?
부처님이 나타나시고(現前) 업장이 소멸되며
반가운 손님, 좋은 인연들이 내게 오고,
공부는 날로 쉬워지며 온 세상이 깨달음(華嚴)입니다.
또한 이 밝은 소식을 모르고 살아가는 이웃에 대해
한없는 연민의 마음이 일며,
그 마음은 뜨거운 전법 의지 로 이어집니다.
따라서 이런 마음이 일지 않으면
아직 행원이 익지 않았다 할 것입니다.
보현행원은 생명을 살리는 수행입니다.
행원을 하다보면 내 마음은 한없이 열리고 밝아지며
자비의 물결이 끝없이 밀려옵니다.
우주의 근본이 생명이요,
칭찬하고 공경, 공양하는 행원은
그 생명의 문을 활짝 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행원은 영원한 나의 생명의 노래요,
생명의 환희인 것입니다.
행원을 하게 되면 흘러가는 흰 구름도 이름 모를 풀 하나도
무심한 무정물이 아니라,
내 생명 다 바쳐 섬기고 공양해야 할
'부처님 생명' 으로 다가옵니다.
나 역시 못난 범부가 아니라,
나의 생명이 비록 작고 보잘 것 없지만
저 찬란한 부처님과 근본적으로
조금도 차이가 없는 것을 알게 합니다.
그리하여 만인이 존경 받고
만인이 서로 존경해야 함을 알게 됩니다.
저 금빛 부처님이 찬란한 것처럼
내 생명 역시 찬란하며,
부처님이 존경 받듯
나 또한 존경 받아야 마땅한
귀하고 귀한, 존엄한 존재인 것입니다.
내 생명 부처님 무량공덕 생명!!!
이제 불보살님 전에 내 생명 다 바쳐 서원하오니,
저희는 지금부터 못난 중생이 아니라
당신처럼 그렇게 밝고 그렇게 자비로운
부처님 생명으로 살아가겠습니다!
대자대비 세존이시여,
저희들의 이 서원을 증명하소서...
생각을 다스리면 감정이 조절된다
보통 사람 같으면 '불행'이 될 일을
긍정적으로 생각해서 '행복'으로
전환시킬 줄 알았던 사람이 대철학자 소크라테스였다.
그는 어떤 악조건 속에서도 행복의 기회를
발견할 줄 아는 긍정적 발상의 주인공이었다.
소크라테스의 아내 크산티페는 말이 많고 성미가 고약했다.
사람들이 묻기를 "왜 그런 악처와 같이 사느냐"고 하니
소크라테스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고 한다.
"마(馬)술에 뛰어나고자 하는 사람은
난폭한 말만 골라서 타지.
난폭한 말을 익숙하게 다루면
딴 말을 탈 때 매우 수월하니까 말이야.
내가 그 여자의 성격을 참고 견디어 낸다면
천하에 다루기 어려운 사람은 없겠지.
또 한번은 부인의 끊임없는 잔소리를
어떻게 견디느냐고 사람들이 물었다.
그랬더니 소크라테스는
"물레방아 돌아가는 소리도
귀에 익으면 괴로울 거야 없지"
라고 대답하며 웃더란다.
어느 날은 부인이
소크라테스에게 잔소리를 퍼붓다가
머리 위에 물 한 바가지까지 휙 끼얹었다.
그래도 소크라테스는 태연히 말했다고 한다.
"천둥이 친 다음에는 큰비가 내리는 법이지."
보통 사람 같으면 크산티페의 고약한 언동 때문에
같이 감정이 폭발하여 화병이 들고도 남을 일이었다.
하지만 소크라테스는
재치 있게 긍정적으로 생각함으로써
아예 분노라는 감정을 생기지 못하게 하였다.
이것이 생각의 힘이다.
우리가 느끼는 모든 감정 이면에는
생각이 자리 잡고 있다.
따라서 생각을 긍정적으로 다스리면
감정은 그에 따라갈 수 밖에 없다.
- 좋은글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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