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경의 아상(我相)없음과 화엄경의 아상없음은 어떻게 다릅니까?

2009. 10. 19. 21:14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불교교리·용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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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금강경의 아상(我相)없음과 화엄경의 아상없음은 어떻게 다릅니까?

화엄경에도 금강경과 같이

사상(四相=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 없음을 가르친다고 알고 있습니다.

금강경의 아상(我相) 없음과 화엄경의 아상 없음은 같은 건가요?
다르다면 어떻게 다릅니까?

 




[답변]


화엄경에도 금강경과 같이 제법의 무상함, 공함을 설하며
아상 등, 사상(四相)의 허무함에 관해 많은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러나 금강경이 '아상 등, 사상이 없어야 한다'고 가르치는데 비해.
화엄경은 '아상을 뛰어넘은 세계,
사상이 이미 없는 세계'에 대한 이야기가 주를 이룹니다.

똑같은 행을 하더라도 중생의 경우에는
사상(四相)을 떠나지 못하는 가운데 나옵니다.
그러므로 금강경에서는 '아상을 버려야 한다', 또는
'아상이 있으면 진정한 바라밀행이 아니다'라고 합니다.


그러나 화엄경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모든 행이, 이미 아상 같은 사상을 떠난 상태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따라서 화엄은 '아상을 없애라, 버려라'는 이야기는 아니 나옵니다.
단지 그런 사상이 없는 상태에서 이뤄지는 세계,
전개되는 세계를 끝없이 노래 부를 뿐입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화엄경은 끝없는 '자성 청정심'의 자기 전개라고도 합니다.)


가령 십행품의 환희행에서는
보살은 끝없이 중생을 이롭게 하며 보시를 하지만
거기에 나라는 생각이 이미 없습니다.

십지품의 이구지 보살은 열 가지 선행(十善)을 하지만,
'선업을 짓기 위해' 십선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악업을 지을 생각'조차 없으므로 십선이 자연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런 화엄의 관점으로 보면, 아상이 없는 것이 최후점은 아닙니다.
단순히 아상이 없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아상이 없는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진리의 세계,
그 세계를 이룩하는 '창조행'이 더 중요한 것입니다.

부처의 세계, 화엄의 연화장 세계는
단지 중생의 아상이 없어지는 것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아상 없는 수많은 중생의 맑은 창조행 에 의해 성립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화엄 세계는 이미 '아상을 뛰어넘은 세계' 입니다.

금강경에서도 인욕 선인의 몸이 갈갈이 찢어질 때,
이미 그 분은 아상이 없는 상태입니다.
그러니 노여움도 원한도 일어나지 않은 것이겠지요.

그러나 아상이 없다 하여 그 상태가 곧 바로 부처님은 아닙니다.
아상이 없는 그 세계에서부터 부처의 세계가 비로소 전개됩니다.
우리는 아상 없는 그 세계도 가지 못했지만,
그래서 그 세계도 한없이 부럽지만,
아상 없는 경지에 이르렀다 해도 그것이 끝은 아닙니다.
거기서부터 비로소 성불의 길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상의 소멸은 성불의 필요조건 일 뿐이요,
성불의 필요-충분 조건 은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이 금강경과 화엄경의  차이점 중 하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