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오심을 부추기는 사람들

2009. 10. 23. 00:45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화엄경·보현행원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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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남원 교룡산성 선국사의 벽화. 

 사자를 탄 대지문수보살님과 코끼리를 탄 대행보현보살님. 출처:전라도닷컴]

 

 

 

[증오심을 부추기는 사람들]


사람들이 남의 허물을 집요하게 들추지 않는 것은 여러 이유가 있습니다.
물론 사람들이 못나고 용기가 없는 것이 가장 큰 이유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직접적 이유 외에도 여러 이유로
우리는 남의 허물을 그다지 집요하게 따지지 않습니다.


먼저 우리는 죄 없는 자 돌로 쳐라는 예수님 말씀처럼,
남의 허물을 단죄할 수 있을 만큼 그렇게 선하지 못합니다.
따지고 보면 우리는 오십보 백보인 것입니다.
그러니 양심이 있는 분이라면 그렇게 집요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또한 사람의 마음 속엔 누구나 남의 허물을 애처롭게 여기는 마음이 있습니다.
(이를 불교에서는 佛性이라 합니다).
그러기에 악인도 상처를 입거나 고통받으면 불쌍한 마음이 드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우리는 대개 남의 허물을 비판은 하되,
사람을 미워하고 저주할 정도로까지  나아가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의 선한 의지를 가만 두지 않고,
집요하게 사람의 증오심을 부추기고 끝까지 사람을 파멸시키려는 분들이 있습니다.


이런 분들의 특징 중 하나는,
적개심의 대상만 다르지 실은 미워하는 대상과 똑같은 증오를 발하면서도
자신들은 정의롭다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실지로 지금도 지구 상에 이루어지는 많은 폭력적 비극들,
가령 사상, 종교가 다르다고 무자비한 살육을 한다든가 인종 청소나 각종 테러 등은,
그 대상만 다를 뿐 근본 잠재 의식 속엔 모두 '증오'가 스며 있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명분으로 미화하고 어떤 논리로 합리화시킨다 하더라도,
지금 당장은 합리화가 되고 면피가 될지 모르나,
근본적으로는 비극이며 당사자는 반드시 그 인과응보를 피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지금은 착각 속에 의기양양하게 사람을 죽이고 망신을 주고 있으나,
알고 보면 참으로 안타깝고 가여운 일인 것입니다.


또한 이런 분들은 스스로는 건설적 창조행은 단 하나도 이루지 못하면서,
남이 정성껏 일구는 건설적 창조행은 집요하게 부정하고 파괴합니다.


따라서 이런 분들이 가는 곳은 모든 것이 파괴적입니다.
용서와 화해가 있던 곳에 용서와 화해는 사라지며 갈등과 증오가 난무합니다.
그리하여 평화롭고 온화하던 사람들의 마음은 무너지고 모든 것이 황폐해 갑니다.
넉넉하던 마음은 사라지고,  증오의 바람만  황폐해진 마음을  불어 다닙니다.



스스로는 풀 한 포기 꽃피우지 못하면서도,
남이 정성껏 일구어 놓은 꽃밭은 함부로 들어가 마구 짓밟고 유린하는 것이
이러 분들의 삶의 형태입니다.


비료를 제 때 줬니 못 줬니, 그 비료를 제대로 구입했니 못 했니를 따지며
어떻게든 허물을 찾아 비판하고 망신을 주어,
사람들의 악의 없는 선한 의지를 기어이 꺾고 절망하게 하고야 마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모든 선한 의지를 접고 모든 것을 포기하며 그 자리를 떠날 때,
황폐해진 꽃밭에서 자기들끼리 자기들만의 승리의 축제를 벌이며 서로를 치하합니다.
그러나 그 뿐, 아름다운 꽃들로 화려하던 꽃밭은 영영 다시 올 길이 없습니다.  



뭇 생명들로 북적이던 꽃밭엔 결국 모든 창조 행이 사라지고 모든 생명은 숨어버려,
적막한 사막, 일체의 생명, 일체의 창조 행이 없는 어둡고 황량한 폐허로 변해갑니다.
그리고 자신들만의 정의(正義)로 그렇게 적막한 결과를 초래한 그 분들마저,
마침내는 생명과 창조 행이 끊어진 어둠 속에서 흔적도 없이 소멸되고 맙니다.
그렇게 미워하고 타도하던 증오의 불길이,
남뿐만 아니라 자신마저 태워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우리는 과연 어떤 사람일까요?
티끌 만한 풀이라도 꽃 피우는 '창조적인 사람' 일까요,
아니면 남이 애써 피운 꽃을 잘잘못을 따져 기어이 시들게 하고 마는
'파괴적인 사람'들일까요?


작금에 벌어지는 우리 사회의 혼란스런 모습들은,
이런 아픔을 되돌아보게 합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시아본사아미타불

이 아침 당신께 드리는 글



좋은 말은 아침 이슬과 같습니다.

이슬은 양은 많지 않지만

식물에게 큰 영향을 줍니다.

특히 사막 같은 지역에서는

이슬이 식물의 생존에

지대한 영향을 주고 있습니다.


좋은 말은

많은 말을 하는것이 아닙니다.

한 마디의 좋은 말은

사람에게 많은 영향을 줄 수 있으며

때로는 사람을 살리기도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게 됩니다.


내가 한 좋은 말 한 마디로

사람을 살릴 수 있다면

그것보다 귀한 일은 없을 것입니다.


이슬이 아침에

식물을 적셔주는 것과 같이

좋은말을 해서

사람의 마음을 촉촉히 적셔준다면

좋은말을 듣는 사람은

생명수를 공급 받는 것과 같을 것 입니다.

 
좋은 말은

소망이 있는 말입니다.

내 생각이 아무리 옳을 지라도

상대를 설득하려는 말과

책망하는 말은

때로는 소망을 끊을 수 있습니다.

 
사람은 모두 다르게 자기만의

은사를 가지고 태어났습니다.

그런데 내가 잘하는 것이 있다고 해서

상대가 못하는 것을 책망하고

권면하면서 따라 하라고 할 때

상대는 죽어도 못 할 수도 있다는 사실 입니다.


그것을 너무 강하게 요구하면

상대의 소망을 끊어 버리는 것과 같이 됩니다.

실제적으로 부모의 지나친

요구에 미치지 못하는 아이들이

생명을 끊는 경우도 종종 일어 납니다.


소망을 주는 말을 하세요

이슬과 같이 그 사람에게

유익을 줄 수 있는 말을 하세요

소망을 주는 말은 진실되어야 합니다.


좋은 미사여구를 써서 우유보다

매끄럽게 말을 할 지라도

진실되지 못한 말은 결국 상대를 찌르는

비수와 같은 것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