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불교의 근본원리
일체 만법이 나지도 않고(一切法不生), 일체 만법이 없어지지도 않는다.(一切法不滅). 만약 이렇게 알 것 같으면(若能如是解) 모든 부처가 항상 나타나 있다(諸佛常現前)
이것은 화엄경에 있는 말씀인데 불교의 골수입니다. 결국 팔만대장경이 그리 많고 많지만 한마디로 축소를 하면 “불생불멸(不生不滅)”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불생불멸이 불교의 근본원리고, 부처님은 뭘 깨쳤느냐 하면 불생불멸을 깨친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자세하게 설명하면 팔만대장경이 다 펼쳐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보통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면 세상 만물 전체가 생자필멸(生者必滅)입니다. 난 자는 반드시 없어진단 말입니다. 모든 것이 나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는다 하셨는가? 그것은 빨간 거짓말이 아닌가? 당연히 그런 질문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세상에 생자필멸 아닌 것이 무엇 있습니까? 무엇이든지 났다고 하면 다 죽는 판입니다. 그런데 왜 부처님은 모든 것이 다 불생불멸이라고 하신 것인지, 이것을 분명히 제시해야 안 되느냐 말입니다. 그것도 당연합니다. 이것을 참으로 바로 알려면 도를 확실히 깨쳐서 일체가 나지도 않고 일체가 멸하지도 않는 이 도리를 바로 알면 그때는 아무 관계없습니다. 그렇게 되기 전에는 누구든지 의심 안할래야 안할 수 없습니다.
모든 것이, 일체 만법이 불생불멸이라면 이 우주는 어떻게 되는가? 그것은 상주불멸(常住不滅)입니다! 그래서 불생불멸인 이 우주를 불교에서는 상주법계(常住法界)라고 합니다. 항상 머물러 있는 법의 세계다 이 말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바로 알면 불교를 바로 아는 동시에 모든 불교 문제가 다 해결되는데, 이것을 바로 모를 것 같으면 불교는 영영 모르고 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누구든지 모두 다 산중에 들어와서 눈감고 앉아 참선을 하든지 도(道)를 닦아 결국에는 깨쳐야지 안 깨치고는 모를 형편이니 이것도 또 문제 아니냐? 그것도 당연한 질문입니다. 그런데 설사 도를 깨쳐서 불생불멸하는 이 도리를 확연(確然)히 자기가 알고 보지는 못하더라도 요새는 과학만능시대 아닙니까? 과학만능시대가 되어서 이것을 과학적으로 좀 근사(近似)하게 풀이를 할 수 있다 이 말입니다.
그렇다면 불생불멸하고 과학하고 무슨 관계가 있는가? 자고로 여러 가지 철학도 많고 종교도 많지만 불생불명에 대해서 불교와 같이 이토록 분명하게 주장한 철학도 없고 종교도 없습니다. 그래서 이 불생불멸이라는 것은 불교의 전용(轉用)이요 특권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과학이 자꾸 발달되어서 요새는 불교의 불생불멸에 대한 특권을 과학에 빼앗기게 되었습니다.
어째서 빼앗기게 되었는가? 원자물리학(原子物理學)에서 자연계는 불생불멸의 원칙 위에 구성되어 있음을 실험적으로 증명하는데 성공해 버린 것입니다. 말이 좀 어렵게 되는 것인지 모르겠는데, 이 이론을 처음으로 제시한 사람이 누구냐 하면 아인쉬타인(A.Einstein)입니다. 아인쉬타인이 상대성이론에서 등가원리(等價原理)라는 것을 제시했습니다. 등가원리!
이 자연계를 구성하고 있는 모든 것은 에너지와 질량 두 가지로 구성되어 있는데, 고전물리학에서는 에너지와 질량을 두 가지로 각각 분리해 놓고 보았습니다. 그러나 등가원리에서는 결국 에너지가 즉 질량이고 질량이 곧 에너지이다. 같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전에는 에너지에서는 에너지 보존법칙, 질량에는 질량불변의 법칙을 가지고 자연과학에서 모든 것을 설명하였는데, 요새는 에너지와 질량을 분리하지 않고 에너지 보존법칙 하나만 가지고도 설명이 되고 또 하나 밖에 없습니다.
즉 질량이란 것은 유형인 물질로서 깊이 들어가면 물질인 소립자(素粒子)이고, 에너지는 무형인 운동하는 힘입니다. 유형인 질량과 무형인 에너지가 어떻게 서로 서로 접할 수 있는가? 그 것은 상상도 못해 보았던 일입니다.
50여 년 전 아인쉬타인 등가원리에서 에너지와 질량 두 가지가 별개가 아니다, 같다, 하나다, 하는 이론을 제시하였을 때 세계의 학자들은 모두 다 그를 몽상가니 미친 사람이니 하였습니다. 그런 이론, 즉 에너지와 질량이 어떻게 합할 수 있는가 하고. 그래도 아인쉬타인이라는 사람이 미친 사람이 아니고 함부로 말하는 사람이 아닌 만큼, 학자들이 수 년 동안 연구하고 실험에 실험을 거듭한 결과 마침내 질량을 에너지로 전환하는데 성공했습니다.
그 성공의 첫 응용단계가 무엇이냐 하면 원자탄 수소탄입니다. 질량을 전환시키는 걸 핵분열이라고 하는데 핵을 분열시켜보면 거기에는 막대한 에너지가 발생한다고 합니다. 그때 발생되는 에너지, 그것이 천하가 다 아는 원자탄 아닙니까? 이것은 핵이 분열하는 경우이고 핵이 융합하는 경우에도 그렇습니다. 수소를 융합시키면 헬륨이 되면서 거기에서 막대한 에너지가 나온다고 합니다. 이것이 수소탄이 되는 거 아닙니까?
이렇든 저렇든 그전에는 에너지와 질량을 완전히 분리하여 보았던 것입니다만 과학적으로 실험한 결과 질량이 에너지로 완전히 전환하는 것입니다. 그러하여 원자탄이 되고 수소탄도 된다는 말입니다.
그런 실험에 처음으로 성공한 사람은 미국의 유명한 물리학자인 앤더슨(Carl-D. Anderson) 이라는 사람으로, 그는 에너지를 질량으로 또 질량을 에너지로 전환하는 실험에 성공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실험은 광범위하지 못하였습니다.
그 후 세그레(Emilio Segre)라는 이탈리아의 학자로서, 무솔리니에 쫓겨서 미국에 가서 산 유명한 학자가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여러 방면으로 실험한 결과 여러 형태의 각종 에너지가 전체적으로 질량으로 전환되고 또 각종 질량이 전체적으로 에너지로 전환되는 것을 입증했습니다. 그래서 자연계를 구성하고 있는 근본요소인 에너지와 질량이 불생불멸이며 부증불감(不增不減)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자연계는 어떻게 되는가? 자연계라는 것은, 우주법계라는 것은 근본적으로 봐서 에너지와 질량 두 가지로 구성되어 있는 만큼 에너지가 질량이고 질량이 에너지여서 아무리 전환을 하든지 증감이 없이 불생불멸 그대로입니다. 이렇게 하여 우주는 이대로가 불교에서 말하는 상주불멸 안될래야 안 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아안쉬타인의 등가원리가 없었으면 불생불멸이라는 것은 거짓말인가? 그것은 아닙니다. 부처님께서는 2500여 년 전에 진리를 깨쳐서 이루 말할 수 없는 혜안(慧眼)으로 우주 자체를 환히 들여 다 본 그런 어른입니다. 그래서 일체 만법이 전체가 그대로 불생불멸이라는 것을 선언하였습니다.
그러나 보통 사람은 그런 정신력을 갖지 못했기 때문에 2500여년이 지나도록 이리 연구하고 저리 연주하고 연구와 실험을 거듭한 결과, 이 자연계를 구성하고 있는 근본 요소인 에너지와 질량이 둘이 아니고, 질량이 에너지이고 에너지가 질량인 동시에 서로 전환하면서 증감이 없어서, 부처님이 말씀하신 불생불멸이라는 그 원리가 과학적으로 입증이 되어버렸다 이것입니다.
그러니 원자물리학이 설사 없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사람들이 이해를 못해서 그런 것이지 부처님이 본시 거짓말할 그런 어른은 아니다 이 말입니다.
요새 그냥 불교원리를 이야기하면 “너무 어려워서 알 수 없다”는 말을 많이 하기 때문에, 내가 한 가지 예로서 불교의 근본원리인 불생불멸의 원리를 상대성이론, 등가원리에서 입증하여 증명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불교라는 것은 허황한 것이 아니고, 거짓말이 아니고 과학적으로도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냐 하는 것입니다.
흔히 또 이렇게도 많이 말합니다. 불교란 것이 어떤 것인지 알 수 없지만 말을 들어보자면 너무 높고 너무 깊고 너무 넓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현실적으로는 거짓말 같고 허황하여 꼭 무슨 번갯불에 콩 구워 먹는 식으로 접근하기가 어렵다고 한다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렇지만 금방 내가 설명한 바와 같이 불교의 근본원리인 불생불멸 이것이 상대성이론에서 출발하여 현대원자물리학에서 과학적으로 완전히 증명이 다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런데도 이 불교 원리가 현실에 적용 안 된다고 해서는 곤란한 것입니다.
이처럼 과학이 발달함에 따라 불교이론을 증명해 준다고 하기에는 이르지만 불교원리를 설명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고 있고 또 현대물리학이 불교에 자꾸 접근해 오고 있는 것만은 사실입니다.
우리 불자들은 이런 훌륭한 부처님의 가르침을 만나게 된 것을 항상 다행스럽게 생각하고 더욱 힘써 정진합시다.
* 법문 출처 : 해인지 <해인법문> 대한불교 조계종 홈페이지
성실이라는 보석
이런 생각을 할 때가 있습니다.
고단한 내 현실에 뜻하지 않는 행운이 찾아왔으면
좋겠다는 생각...,내 인생을 뒤바꿔버릴 만한
그런 행운이 찾아오는 상상을.
하지만 나는 그것이 얼마나
부질없는 욕심인가를 알고 있습니다.
세상에서 내 자신이 노력도 해보지 않고
얻을 수있는 행운이란 그리 흔치가 않을 뿐더러,
어떤 행운으로 인해 노력도 없이 물질이나
명성을 얻게 된다 해도 그것은 손안에 쥔 모래와 같을
뿐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지요.
꼭 움켜쥐었지만
이내 다빠져 나가버리는 손안의 모래.
때때로 내가 노력한 것 이상으로
무언가를 성취하거나
얻게 될 때면 기쁨보다 오히려 두려움을 느낍니다.
내 노력보다 부풀려져 찾아오는 물질이나 성공은
내 인생에 든 노력과 성실이란 보물을
하나 하나씩 갉아먹고 있다는 생각 때문이지요.
그래서 나는 러스킨의 말을
항상 가슴에 새겨두고 오늘을 살아 갑니다.
만약에 당신이 일을 하지 않았는데
보수를 얻었다면 반드시 일을 하고도 보수를
받지 못하는 사람이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삶이 나에게 주는 선물' 중에서-
깨끗하고 투명한 유리잔 두 개가 있습니다.
한 잔에는 맑은 물이 가득 채워져 있고,
다른 한 잔은 비워져 있습니다.
전자는 "순수" 라는 것이요,
후자는 "순진"이라는 것이죠.
순수라는 것은 물이 가득 채워져 있어
더 이상 들어갈 틈이 없으니,
깨끗함 그 자체이고요.
순진은 비어 있으므로,
그안에 순수처럼 깨끗한 물이 담길 수도 있고,
더러운 물이 들어갈 수도 있는 것입니다.
어떤 누군가가
"순수"와 "순진"의 차이를 묻더군요.
순수의 사전적 의미는
"잡것의 섞임이 없는 것", 사사로운 욕심이나
못된 생각이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순진"의 사전적 의미는
"마음이 꾸밈이 없이 순박하고 참되다",
세상 물정에 어두워 어수룩함 입니다.
그런데 곰곰히 생각해 보면
우리 삶의 의미를 되새겨 보게 됩니다.
살아가면서 "순진하다" 라는 말은
어리석다는 의미일 수 있습니다.
반면 "순수하다" 라는 말은
자신의 소신이 있고, 주관이 뚜렷하다는 것이며
세속에 물들지 않는다는 것을 뜻하는 것 같습니다.
"순진" 이란 말은
어릴 때만 간직할 수 있는 말입니다.
어른이 되어도 순진하다면
세상을 모르는 무지한 사람입니다.
반면 순수는 누구나 가질 수 있습니다.
나이가 들어도 순수한 사람이 있습니다.
순수한 사람은 거짓이 없습니다.
순수한 사람은 자기 말에 책임을 집니다.
순수한 사람은 주관이 뚜렷합니다.
순수한 사람은 어떤 상황이든 흔들리지 않습니다
순수한 사람은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습니다.
순수한 사람은 겸손의 미덕을 갖고 있습니다.
순수한 사람은 남의 잘못은 용서하지만
자신에게는 엄격합니다.
순수하게 살아간다는 게 쉽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좋은 습관을 가지려 노력하면
순수해질 수 있습니다.
진정 순수해
누가 봐도 아름다워서 나를 닮고 싶어하는
사람 들이 많았으면 좋겠습니다.
누가 봐도 아름답고,
누가 봐도 부담이 없는,
순수를 사랑하는 삶을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인생속에 실어온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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