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는 자력 종교인가 타력 종교인가?]

2009. 11. 4. 20:36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불교교리·용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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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는 자력 종교인가 타력 종교인가?]

 

흔히 불교는 자력 종교, 기독교는 타력 종교라고 합니다.

또한 불교 내에서도 참선은 자력, 염불은 타력이라고 합니다.

이런 말을 할 때는 자력은 훌륭한 것이요

타력은 남의 힘이나 빌리려 하는 못난 것이라는 생각이

은근히 내재되어 있는 듯 합니다.

 

그러나  불교는 자력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불교의 가르침은 본래 나와 남이 없는 것이요,

따라서 수행 역시 자력 타력이 없습니다.

있다면 오직 부처님이 있을 뿐입니다.

즉, '부처님 힘으로 수행하는 것(佛力)'이 불교입니다.

 

남의 도움 없이 혼자 힘으로 수행한다!

참 좋은 말입니다.

하지만 수행이란 것이 결코 혼자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 사 어느 것이 내 힘으로만 되는 것이 어디 있습니까?

얼핏 보기에는 내 힘으로 된 것 같지만,

좀더 성숙한 눈으로 보면 어느 것 하나 중생의 공덕 아님이 없는 것입니다.

 

부처님이 성불하신 것만 해도 그렇습니다.
얼핏 보기에는 스승도 없으신 부처님이 대각을 이루신 것 같지만,

사실은 부처님이 잘 나서 혼자 힘으로 성불하신 것이 아닙니다.

중생들이 그렇게 비참한 모습으로 죽어 가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면,

싯달다의 성불은 몇 겁이 미루어 졌을 것입니다.
부처님의 성불은 무명 중생의 끝없는 고통 속에서 비로소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깨달을 때도,

비록 내가 아무리 수행을 잘 했다 하더라도 내가 깨친 게 아닙니다.

내 주위의 모든 분들의 도움으로, 공덕으로 나에게 깨달음의 소식이 온 것입니다.
그러니 '내'가 깨친 게 아니라, '우리'가 깨친 것입니다!

 

 

자력 수행이라 할 때는 우리도 모르게 '나'라는 아상(我相)이 대단히 활개를 칩니다.
'내'가 깨닫고 '내'가 성불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나'라는 것이 있는 한, 깨달음은 오지 않습니다.

 

 

본래 나라는 생각, 나라는 형체가 부처님 원력 속에 완전히 녹아 없어지게 하는 것이
수행일진데, 내가 수행한다, 내 힘으로 깨닫는다, 하는 수행이 어찌 바람직한 수행이
되겠습니까? 그런 수행은 공부에 하나도 도움이 안 되고 아상만 더할 뿐인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타력 수행이란 생각도 하면 안됩니다.

부처와 내가 본래 둘이 아닌데, 부처님 힘을 빌리는 것이 어찌 타력이 되겠습니까?

 

 

부처님 앞에서는 나와 네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력이니 타력이니 하는 말이 예시당초 성립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오직 있다면, '부처님'만 있을 뿐입니다.

 

우리는 부처님 힘(佛力)으로 수행해야 합니다.

내가 수행하는 것도 아니요 남의 수행을 빌리는 것도 아닙니다.

오직 우리 앞에는 부처님만 있을 뿐입니다.

 

 

부처님이 밥을 먹는 것이고

부처님이 염불을 하는 것이고 부처님이 화두를 드시는 것입니다.

깨쳐도 부처님이 깨치시는 것이고

지옥에 떨어져도 부처님이 떨어지시는 것입니다.

 

내가 수행하니까 어렵지 부처님이 수행하시면 하나도 어려운 것이 없습니다.

부처님은 '프로' 이십니다.

수없는 생을 오직 중생 구제의 일념으로  수행을 밥먹듯(?) 하셨기에

그까짓(?) 화두 드는 것 좌선하는 것 등등, 하나도 힘든 것이 없습니다.

오직 제멋대로 욕망에만 살고 수행이라고는 해 본 적이 없는

우리 같은 범부나 힘들어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내가 수행하는 자리에 부처님을 갖다 놓을(?) 일입니다.

이 어렵고 많은 일을, 내가 하는 게 아니라 '부처님이 하시도록 하는 것'입니다!

불교는 부처님이 수행하시는 종교라!
공부에 도움(?) 안 되는 자력 타력 분별내지 말고,

우리 모두 오로지 부처님 품으로 돌아 갈 일입니다...

 

 


 나무석가모니불
 나무아미타불
 나무마하반야바라밀...

                    
                         普賢合掌

 

[펌]'불교는 부처님 힘으로 수행하는 가르침'이라는데 대한 의문에 대한 답변들

一.

[질문]

 

좀 이해가 어려운 점이 있어 질문 드립니다.

번거롭더라도 답을 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편의 상 님의 글을 〈 〉로 따 왔습니다.


 

〈...있다면 오직 부처님이 있을 뿐입니다.

즉, '부처님 힘으로 수행하는 것(佛力)'이 불교입니다.〉


 

이 말은 ‘내가 부처다.’ 라는 말로 사용하시는 것인가요?

‘부처님 힘으로 수행하는 것이 불교다.’라는 말은 무슨 뜻인가요?

그리고 여기에서 ‘수행’이란 불교에만 있는 것이란 말씀인가요?

 

 

 

〈좀더 성숙한 눈으로 보면 어느 것 하나 중생의 공덕 아님이 없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중생공덕’이 어떤 것인가를 구체적인 예를 하나만 들어 주시겠습니까?

 

 

 

〈사실은 부처님이 잘 나서 혼자 힘으로 성불하신 것이 아닙니다.

중생들이 그렇게 비참한 모습으로 죽어 가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면,

싯달다의 성불은 몇 겁이 미루어 졌을 것입니다.

부처님의 성불은 무명 중생의 끝없는 고통 속에서 비로소 이루어진 것입니다.〉


 

부처님이 혼자 힘으로 성불을(깨달음을) 하지 않고,

중생들이 비참하게 죽어가는 모습이 깨달음을 도와줬단 말씀인데,

제가 아는 부처님은,

그런 중생들의 고통을 해결해보고자 출가를 결심한 것으로 아는데

깨달음을 도와줬다는 말씀은 이해가 어렵네요?

 

 

 

〈'내'가 깨친 게 아니라, '우리'가 깨친 것입니다!〉


 

제가 아는 상식으로는 ‘깨달음은 지극히 개인적인 일’이라고 아는데,

그것도 반대로 알고 있었나 봅니다?

 

 

 

〈우리는 부처님 힘(佛力)으로 수행해야 합니다.

내가 수행하는 것도 아니요 남의 수행을 빌리는 것도 아닙니다.

오직 우리 앞에는 부처님만 있을 뿐입니다.〉


 

‘내가 수행하는 것이 아니다.’ 라고요?

그럼 깨달음을 이루기 위한 수행의 주체는 누구란 말씀인가요?

‘오직 우리 앞에는 부처님만 있을 뿐입니다.’는

어머니도 아버지도 자식도 없다는 말씀인가요?

 

 

 

〈내가 수행하니까 어렵지 부처님이 수행하시면 하나도 어려운 것이 없습니다.

부처님은 '프로' 이십니다.〉


 

그럼 어쩌란 말씀이신가요?

다 된 ‘부처’야 쉬우리라 보지만

부처가 되려는 사람은 어쩌란 말씀인가요?


 

지금까지의 공부가 ‘도로 아미타불’이 된 것 같아 몹시 충격이 큽니다.

죄송하지만 어리석은 중생을 살피시어 쉽게 이해할 수 있게

답 해주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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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

一.

 

원만님!

님의 말씀처럼 저는 대단한 수행자도 그 무엇도 아닙니다.

각설하고 님의 말씀에 답변드리겠습니다.

 

 

불교인의 교주는 부처님이십니다. 오직 부처님이십니다.

부처님의 힘으로 수행한다함은 부처님의 가르침에 의지하여 수행한다는 뜻입니다.

불교인의 수행은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부처가 되고자 하는 것이 궁극적인 목표입니다. 부처님은 법왕이시니 부처님의 말씀대로 믿고 행하면 묘력이 발현합니다. 이것을 부처님의 힘 즉 불력이라 합니다.

 

수행은 닦음을 말하는 것으로 수행자란 스스로 체험하고 닦아서 증득하려고 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기독교인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오로지 복종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수행자라 하지않고 성직자 혹은 신앙인이라 합니다.

 

 

기독교가 수행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기독교에서는 수행보다는 성직자의 말에 복종하는 하는 것을 전제로 하기에 수행이라는 말이 합당하지 않습니다.

수행은 불교, 흰두교, 쟈이나교등 동양권 종교에서 통용되는 말입니다. 

 

 

 

중생의 공덕이라함은 이 세상 모든 것은 인연연기의 관계속에서 생겨나고 없어지는 것으로써 모든 중생은 인연관계속에서 주고 받는 삶을 살아간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르므로 중생없는 어떤 사물도 존재할 수 없으며 중생없는 부처도 존재할 수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세상은 중생과 더불어 공존함으로 이러한 인드라망을 중생공덕이라고 하는것입니다.

 

 

부처님의 깨달음은 중생의 고통속에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만일 중생이 아무런 고통이 없이 마냥 행복하다면 부처님께서 과연 깨닫고자하는 발심을 내셨겠습니까? 중생의 고통이 곧 자신에게 닥칠 미래의 고통임을 절감하시고 이를해결하고자 출가를 단행한 것입니다. 그르므로 부처님의 깨달음이 중생의 고통속에서  이루어 졌다고 하는 것입니다. 진흙이 없는데 어찌 연꽃이 뿌리를 내리겠습니까..

 

 

내가 깨친 것이 아니라 우리가 깨친 것이라 함은 나란 존재는 결코 홀로 존재할 수 없으며 깨침이란 것도 무명이라는 상대적 관계속에서 이뤄짐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그대 혼자 존재한다고 생각하고 그대 혼자 그 깨침을 지니고 있다한들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러한 깨침은 아무런 쓸모도 없고 깨침 자체가 필요하지도 않습니다. 깨침은 나와 우리모두를 위해 필요한 것이며 따라서 우리의 깨침입니다. 중생이 없는 부처님이 무슨 소용이 있으며 고통받는 인간이 없는데 무슨 하나님이 필요하단 말입니까....

 

나의 수행이란 것도 관계속에서 이루어지기에 나의 수행은 단순히 내수행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앞에 오직 부처님만 있다는 것은 불자는 부처님의 가르침대로 바른 삶을 살때 번민과 고통 죽음으로 부터의 공포등에서 벗어나 비로소 행복한 삶을 누릴 수가 있다는 뜻이지 부모와 자식을 외면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부모와 자식을 외면하는 가르침이 어떻게 깨달은 자의 가르침이 겠어요..

 

 

내가 수행하니 어렵지만 부처님이 수행하시면 어렵지 않다는 말은 온갖 망상과 번뇌를 안고 수행한다고 해보지만 망념에 사로잡혀 수행이 어렵다는 것입니다. 제대로 수행하려면 모든 망념을 떨쳐버리고 무념의 상태에서 부처님과 내가 하나임을 인식하고 모든번뇌와  고통을 초월한 금강불괴의 불신의 몸이라는 오직 한마음으로 수행한다면 어떤수행도 어려울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원만 법우님!

제가 모자라 원만한 답변을 드리지 못해 죄송하지만 제 답글이 님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매사를 내 주의주장이나 기존관념으로 포섭하려고 하기보다는 항상 열린마음으로 넓게 보아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부처님의 가피로 깨달음을 성취하시길 기원드리면서 졸변을 거두옵니다.  카페 지우마을 운영자 합장_()_
 
 

 

二. 또 다른 분의 답변

 

청화스님 법문에 나무아미타불 염불수행시 오직 아미타부처님 한 분만 서게 하라는 법문이 있습니다.나도 없이 오직 아미타부처님 한 분만 서게 하라는 법문입니다.그래야지 아상을 세우면 안 됩니다.


 

우리는 잘은 모르지만 살림살이란 것이 있습니다.부처 보살 성문 연각 독각 아라한 야차 아수라등 이런 살림살이가 있습니다.대부분의 우리는 부처의 살림살이는 더뭅니다.

 

 

그리고 대승은 아닌데 소승은 본래성불을 안 믿습니다.부처님께서 모든 중생이 불성이 있다고 하셨지 않습니까?그런데 나의 작은 살림살이를 깰려면 소아인 내가 서서는 깨어지지가 않습니다.

 

그리고 바른 믿음의 인연을 만나고 생기기가 얼마나 선근이 있어야 되는 일인지 우리는 모릅니다.이런 말씀에도 소아인 내가 서면은 부처라도 어찌 할 수 없습니다.부처라도 다음 인연을 기다릴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분명히 부처님께서는 아라한도 외도라고 하셨습니다.이렇듯이 소아인 나를 깨기가 힘이 듭니다.아라한도 외도인데 그런데 조그만 견처가 열린 분들은 지 경험이 다인 줄 알고 이런 말씀을 안 믿습니다.

 


그러면서 아상을 자꾸 세우면 저의 가슴을 후벼팝니다.저는 이런 질문을 받으면 저의 가슴을 막 후벼파는 고통을 받습니다.그리고 나서 그 얼마 뒤 상대방을 보게되면은 그 사람이 저의 가슴에서 후벼파진 진기를 먹고 나아진 모습을 보기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아상을 세우는 사람을 제가 일부러 피합니다.제 수행에 방해가 되어서말입니다.이것이 서로간의 인연에 의한 거래입니다.알고나서는 이제는 제가 피합니다.

 


물론 저도 상대방의 예리한 그런 것을 먹고는 저도 달라집니다.하지만 이제는 피합니다.

 


화두수행중에도 마찬가지 입니다.조그만 견처가 열렸다고 만족하면 절대 부처님 법은 못 봅니다.그리고 화두를 수행을 하면 생사심을 타파할때까지 해야 합니다.그 전에는 어떤 견처가 열려도 다 과정이라 생각하시고 오직 생사심을 타파하여 생사에 자재해야 됩니다.

 


생사심도 몸이 나고 죽는 것이 생사심이 아닙니다.한 생각일어나고 한 생각이 멸하는 것이 생사심입니다.그런 생사심을 타파하여 생사에 자재하기가 쉬운일이 아닙니다.그것이 부처님법입니다.그것이 제법무아입니다.그것이 대아인나요.대승입니다.그 인과법이 대승기신론이고 진성연기입니다.

 


그런데 소승은 지 제주 버리기가 힘이듭니다.우선의 지 제주에 안주하고 지를 깨기가 두렵고 무서운 것입니다.소승이 깨치기는 더 쉽습니다.그리고 우리가 소승에 혹하기가 더 쉽습니다.

 

 

그런데 소승도 깨치면 도인이라서 소승의 눈에 부처는 보이는 것입니다.그 사람이 아직 깨치지는 않았어도 부처의 살림살이를 하는 사람이 있기 때문입니다.우리는 원에 의해 살기 때문에 깨치지 않고 그냥 지나는 생도 있습니다.하지만 그 사람이 과거생의 수행의 공덕으로 부처의 살림을 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큰 스님들도 예우를 합니다.비록 그 사람이 속인이고 아직 깨치지를 않았다고 하더라도 그리고 그 사람이 어는 먼 생에 깨닫게 되더라도 큰 스님들께서는 예우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소승들은 지 작은 살림살이를 깰려고 하지 않고 보이는 부처의 살림살이를 탐하고 그 아직 깨치지 않았을때의 부처를 죽일려고 하는 것입니다.하지만 부처는 깨치지 않았더라도 과거생의 수행공덕으로 소승한테 당하지는 않습니다.

 

 

 

 

소승도 처음에는 지 수가 먹혀드니까 자꾸 죽이는데 결굴에는 아직 깨치지 않은 그 부처가 이깁니다.아직 깨치지도 않은 사람이 깨친 도인을 이깁니다.

 


 

 

그렇듯이 우리는 대아인 나를 세워야지 부처님 법을 보지 소아인  나라는 아상이 서면은 부처님 법은 못 봅니다.이것이 불력으로 수행하는 것입니다.자력이 서면은 부처님 법을 보기는 어렵고 힘이 듭니다.

 

 

 

 

그리고 마조스님도 여러 법이 모여 이몸을 이루었기 때문에 일어날 때는 법만 일어날 뿐이며 멸할 때도 법만 멸할 뿐이다.하였습니다.그러므로 이 법이 일어날 때 내가 일어난다 하지 않으며 멸할 때도 내가 멸한다 하진 않는다.고 하셨던 것입니다.

 

 

 

 

전념 후념 중념이 생각생각 서로 의지하지 않아서 생각생각 고요함을 해인삼매라고 부르는데 그것은 일체법을 다 포섭한다.고 햐셨던 것입니다.이 말씀도 이해를 먼저할려고 마시고 먼저 받아들이십시요.그리고 이해를 회의를 반조를 하십시요.그것이 올바른 마음입니다.

 

 

 

안자는 물음이 없어도 공자의 가르침을 다 알았습니다.하지만 여러제자들은 묻고 또 물어도 공자를 못 보았던 것입니다.그리고 우리가 큰 스님 법문에도 그 자리에서는 의문과 의심이 일어도 물렀다가 다시 들어와서 여쭙는 것이 사람된 도리입니다.

 

 

제 머리 믿다가는 부처님 법은 못 봅니다.지가 자꾸서는데 어찌 부처님 법이 서겠습니까.제법무아.대아.대승.진성연기....

 

 

그리고 한 말씀 덧붙치면 마조스님의 내가 일어난다 멸한다 하지 않는 것도 진성연기요.대승이라서 그렇습니다.소승은 자랑하고 재주피우기좋아해서 뭐든지 지가 했다그럽니다.그래서 불력으로 수행하는 것입니다.

 

그러다보면 가피로 나도 어느새 열반의 언덕에 가 있는 것입니다.이것이 정견이 서는 것입니다.제가 아직 깨치지는 못했어도 정견은 섰다고 자부하기에 이런 글을 올리는 것입니다.  석가모니불 석가모니불 나무시아본사 석가모니불.
 

 

*普賢註

'불교는 부처님힘으로 수행하는 가르침'이라는 저의 말씀에 아마 충격(?)을 받으신 분이 더러 계신 모양입니다.  질문을 하신 분은 그 중 한 분으로 , 저의 본글에 일일이 토를 달아 구체적으로 질문을 하셨습니다.

그 분의 질문에 마침  답변을 드린 또 다른 분들의 글이 있기에 여기 퍼옵니다.

 

 

다시한번, 답변하신 분들은 제가 아닌 다른 분들임을 말씀드립니다.

판단은 이 글을 읽으시는 불자님들께 맡깁니다.

 

마음도 쉬어야 넓고 부드러워집니다.

 "잘하겠다"는 정성입니다.
"더 잘하겠다."는 욕심입니다.

"사랑한다."는 아름답습니다. 
"영원히 사랑한다."는 허전합니다.
"감사합니다."는 편안함 입니다. 
"너무 감사합니다."는 두렵습니다.

 

우리 마음이 늘 지평선 같았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여러 번 하였습니다.

 

일도 사랑도 감사도 늘 평평하고 잔잔하여
멀리서 보는 지평선 같기를 바랍니다.

 

아득한 계곡이나 높은 산 같은 마음이 아니라
들판같이 넉넉하고
순박한 마음이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이 이렇게 되기 위해서
꼭 필요한 것은 바른 마음입니다.

 

앞만 보고 오를 때는 발끝만 보이지만
멈추어 서서보면..
내 앞에 지평선이 펼쳐집니다.

 

마음도 쉬어야 넓고 부드러워집니다.

 

석가모니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