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부처님께서 남기셨던 말씀 중에 이런 말씀이 있어 전해드리고자 합니다.
우리가 법구경을 보면 노모품 중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何喜何笑 命常熾然 深蔽幽冥 如不求錠
하회하소 명상치연 심폐유명 여불구정이라.
풀이를 하게되면 “그대여! 어찌하여 즐거워하는가, 어찌하여 웃고 있는가.
생명은 언제나 소모되고 있거늘, 깊고 그윽한 어두움에 가려진 채, 어찌하여 등불을 찾지 않는가.” 이런 뜻입니다만,
법구경에는 이와 유사한 구절이 몇 개 있는데, 예정되어 있는 죽음은 가까워 오는데, 하루하루 나는 정작 무엇을 하고 있다는 말인가?
언젠가는 닥쳐올, 잠시 후, 아니면 낼이나 모레, 며칠 후, 몇 시간 후, 내가 죽는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는 사실로 문득문득 자각이 일어날 때, 나는 과연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가?
그 사실을 떠 올리기 조차 싫고, 피하고 싶은 진실을 가슴아프도록 후비듯이, 삶과 죽음의 양면성을 질타하는 구절입니다.
이 구절이 주는 의미는 일상에서 일어나는 喜怒哀樂 속에서도 늘 삶의 가치와 희로애락의 진정한 의미를 되새기며 그 속에서 당장 죽음에 임해도, 스스로 능히 초연히 당해낼 수 있는 ‘마음’을 키워야 된다는 말씀입니다.
이 도리를 모르면 “깊은 어두움과 두려움과 공포와 삶에 대한 한없는 집착과 번뇌만이 주변을 휘감고 있게 되지만, 이 경계의 진실을 알게 되면 등불을 찾은 것과 같다는 뜻입니다.”
불법을 통한 크고 작은 깨달음은 등불을 찾은 첫 인연에서 시작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말세 중생들이 살아가는 데는 만년에 남기셨던 법화경의 세계에서 지혜로운 삶을 익혀가야 하겠지만, 세상을 살만큼 살았고 삶에 대한 통찰을 하실 수 있는 중년이 되면 삶에 대해 보림을 하고 갈무리할 시기인지라 여러분 들께서 금강경을 공부를 하셔야만 하는 것입니다.
혹자는 절에 조금 다니고 법문을 들었다는 분들께서 하시는 말씀이 에~구! 금강경을 공부하다보니 모두가 다 공이라, 너무 허무해서 싫어,! 하는 참으로 가슴처지는 말들을 하시는 분들을 종종 보게 됩니다.
금강경을 공부하다보면 경의 첫 머리에 금강이라는 말도 나오고 반야도 나오고 또 여러 가지 사구게송도 나옵니다.
우리가 주로 독송하는 구마라즙 조사의 번역본인 금강반야바라밀 경전에서 금강이라는 뜻은 부처님의 말씀은 그 무엇보다도 순수하고 단단함이 다이아몬드처럼 견고하고 예리해서 무명을 잘라내고 밝게 빛나는 지혜의 완성을 설하는 경전으로 그 어떤 번뇌라도 능히 끊을 수 있다 해서 금강이라 합니다.
그러나 이런 해석과는 다른 해석도 있습니다.
구마라집과 함께 2대 역경승으로 불리는 현장법사의 해석이 그것입니다.
현장법사는 이 경의 이름을 “능단금강반야바라밀경(能斷金剛般若波羅密經)”이라고 번역했습니다.
금강경을 이렇게 번역할 경우 구마라집의 해석과는 다른 의미를 나타내는데, 여기서는 금강을 지혜를 나타내는 반야의 형용사가 아니라 번뇌(煩惱)로 비유합니다.
즉, 인간에게서 번뇌란 금강석처럼 단단해서 그 무엇으로도 쉽게 끊을 수 없는 것임을 강조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끊기 어려운 중생의 집착과 오욕과 아집이라는 무명과 번뇌일지라도 금강경에서 설하는 무분별지(無分別智)는 금강석처럼 단단한 번뇌도 끊을 수 있다는 것을 나타내는 강조의 의미인 것입니다.
현장법사는 이에 대해 자신의 견해를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습니다.
“보살은 분별로써 번뇌를 삼는다. 그런데 분별이라는 번뇌의 견고함은 금강에 비유되므로 이 경에서 설하는 무분별 지혜는 능히 금강과 같이 견고한 번뇌를 모두 끊음(除斷)을 밝히고자 하기 때문에 “능단금강반야바라밀다경(能斷金剛般若波羅密經)”이라 하는 것이다.” 라고 밝힙니다.
여기서 분명한 것은 반야란 번뇌를 끊는 것이라는 점입니다.
반야란 지혜라고 해석하는데, 혜(慧)는 지(智)의 인(因)으로 진리를 깨달아 아는 것이고, 지(智)는 혜(慧)의 과(果)로 모든 것의 실상을 바르게 보고 판단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금강경을 공부하게 되면, 일체의 실상을 바로 보게 되면서 끝없는 윤회의 씨앗이 되고 악연의 에너지가 되는 네 가지의 사사오욕으로 인한 부질없는 집착과 헛된 무명으로부터 자유로워지게 되는 것입니다.
간단히 말해서, 지금 이 순간의 존재하고 있는 자신과 더불어 주변의 가족들과 일체의 모든 것들에 대한 유한성을 철저히 깨닫고 거기서 허무에 떨어지는 것이 아니고 이 모든 것이 수없이 많은 모습으로 돌고 돌아 몸을 바꾸며 뿌려오고 심어온 과거 전생의 생각과 말과 행동의 신구의 삼업이 만들어 온 업의 결과요, 덩어리로 인함이라는 것을 깨닫고 지금 이 순간부터 부질없는 잠시 한 순간의 달콤한 업에 매이지 않고 지혜로운 신구의 삼업의 에너지를 만들어가는 삶을 찾는 것을 가르치는 것이지, 허무에 빠지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금강경을 공부하다 보면 네 가지 수의 사구게(四句偈 )를 접하게 됩니다.
금강경 제5품에 보면,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 (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 )
무릇 형상이 있는 것은 모두가 허망할지니, 만약 모든 형상을 형상이 아닌 것으로 보면, 곧 여래(진실)를 보리라.
하는 대목으로 사구계 내용을 보면, 첫째와 둘째 구절은 현실의 허망함을, 셋째와 네째 귀절은 허망한 내면에 허망치 않은 존재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사구게들은 경의 골수일 뿐만 아니라 불교의 교리 전체를 대표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불교에서 모든 사물을 관찰할 때에 공(空) · 가(假) · 중(中), 삼제(三諦)의 원칙에 의합니다만,
공(空)은 모든 현실을 실재하지 않는 것으로 보는 것으로 눈앞의 모든 물건들을 부수거나 태워 버린 뒤의 허공의 상태를 말하는 것은 아니고, 그저 있는 그대로를 관찰하고 분석한 결과, 즉 모두가 잠시 일시적으로 인연에 따라 나타난 현상이요 절대적인 실체는 없다고 보는 것을 말합니다.
가(假)는 有라고도 하므로 空의 반대 현상으로, 모든 사물이 空한 자리에 나타나는 모든 사물의 현상을 그대로 인연이 존속하는 한, 존재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空의 반대현상인 有라 하는 것이며 우리들이 흔히 ‘있다’고 말하는 따위의 완유(頑有)는 아닙니다.
중(中)은 중도(中道)로서 空인 동시에 有요, 有인 동시에 공(空)임을 바로 알아 어느 한 쪽에 치우치지 않는 진공묘유(眞空妙有)를 말합니다.
이러한 이치를 거울로써 예를 보면, 거울 속에 비친 그림자는 아무리 울긋불긋하여도 그 실체가 공합니다.
그것은 아무 것도 없는 거울에 일시적인 인연이 맞아서 사물이 비친 현상에 불과하기 때문이기에 空인 것입니다.
거울속의 그림자가 공하여 실체가 없는 것임을 알았으니, 인연이 비쳐진 그 그림자는 분명 다양하고, 그 다양한 그림자는 보는 이의 감정을 돋우기도 하고, 낮추기도 하며 자재자유(自在自由)하기에, 그러므로 아주 없다는 생각에 치우칠 것이 아니라 현실적으로 있는 그림자의 상태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假라 하는 것입니다.
끝으로 그렇다면 거울속의 그림자는 실재로는 없는 것이나 현실적으로는 없지 아니하니 없는 듯 하되 있고 있는 듯도 하되 없다고는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공이라 할 때에 공에 치우치지 않고 가유(假有)를 전제한 공이어야 하며, ‘있다’라고 할 때에 ‘있다’라는 사실에만 치우치지 말고 공을 전제한 가유(假有)이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바로 다겁생을 윤회하는 우리의 삶을 비유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거울 앞에 선 모습은 우리의 업이요. 거울은 윤회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존재의 실상과 의미를 바르게 보는 방법이 곧 중도(中道)인 것이며, 극단에 치우친다거나 자기의 알음알이에 떨어져 아견에서 옳다는 견해에 떨어지지 않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금강경 제10품에 “ 불응주색생심 불응주성향 미촉법생심 응무소주 이생기심” 不應住色生心 不應住聲香 味觸 法生心 應無所住 以生其心 이라,
응당, 색(물질)에 머물러서 마음을 내지 말며 응당, 성향미촉법에 머물러서 마음을 내지 말 것이요. 응당, 머문 바 없이 그 마음을 낼지니라.
(육조혜능대사 출가동기)
금강경 제 26품에 “ 약이색견아 이음성구아 시인 행사도 불능견여래”라 若以色見我 以音聲求我 是人行邪道 不能見如來. 만약 형상으로 나를 보거나 음성으로서 나를 구하면 이 사람은 삿된 도를 행함이라, 능히 여래(진실)를 보지 못하리라. 하는 대목도 있으며,
금강경 제32품에는 “일체유위법 여몽환포영 여로역여전 응작여시관”하라. 一切有爲法 如夢幻泡影 如露亦如電 應作如是觀. 일체 현상계의 모든 생멸 법은 꿈과 같고 환상과 같고 물거품과 같고 그림자 같으며, 이슬과 같고 번개와 같으니 응당 이렇게 관할 지어다.
이와 같이 금강경에서는 존재의 실상과 존재의유한과 무한을 가르쳐주며 지혜로운 삶의 본질을 보는 지혜로운 반야의 도리를 고구정녕히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한 백천간두의 반야일성은 바로 “대방광불화엄경 제일 사구게”로 함축하고자 합니다.
“약인욕요지 삼세일체불 응관법계성 일체유심조”라 若人慾了知 三世一切佛 應觀法界性 一切唯心造. “만약 사람들이 과거. 현재. 미래의 부처(진실)들을 알고 싶거든 마땅히 법계의 근원을 꿰뚫어 볼지니 그것은 다름아닌 그 모든 것이 그대 마음으로 지어졌음이라!
여러분 우리 지혜롭게 살아가십시다.
그래서 다음 생을 기약할 수 없다 해도, 출산율은 점점 떨어져 사람 몸 받기도 참으로 어려운 일인데 슬프게도 참으로 어리석은 부모 만나는 악연으로 태어나자마자 쓰레기통에 버려지고 화장실에 버려져 이 아까운 사람 몸 받아 불법은 만나보지도 못하고 죽는 신생아들 또한 얼마나 많습니까?
何喜何笑 命常熾然 深蔽幽冥 如不求錠
하회하소 명상치연 심폐유명 여불구정이라.
“그대여! 어찌하여 즐거워하는가, 어찌하여 웃고 있는가. 생명은 언제나 소모되고 있거늘, 깊고 그윽한 어두움에 가려진 채, 어찌하여 등불을 찾지 않는가.”
이제로부터 “능단 금강이라” 부질없는 것에 집착말고 허망한 순간적인 오욕의 번뇌에 떨어지지 마시고 반야의 금강도로 능히 끊어 우리 인연 잘 짓고 복덕선근 잘 쌓고 살아 갑시다.
모두 모두 성불하십시오.
- 《만추의 해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