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받는 길 (2)/성철스님

2009. 11. 12. 20:13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불교교리·용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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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구원받는 길 (2)


    인간의 근본존재는 무량아승지겁 전부터 성불하여
    무량아승지겁이 다하도록 무량불사를 하는 그런 큰 존재입니다.
    다만 병은 어느 곳에 있느냐?
    눈을 감았어!
    눈을 뜨지 못하여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우리가 눈을 뜨겠느냐 이것입니다.

    -스님도 딱하시네.
    내 눈은 멀쩡한데 내가 기둥이라도 들이받았는가?
    왜 우리 보고 자꾸 “눈 감았다” “눈 감았다” 하시는고?

    이렇게도 말할지 모르겠습니다만
    그 껍데기는 그것 가지고는 소용없습니다.
    아무리 밤중에 바늘귀를 볼 수 있어도
    그런 눈 가지고는 소용없습니다.
    그런 눈은 안 통합니다.
    속의 눈, 마음의 눈, 마음눈을 떠야 하는 것입니다.
    명경에 끼인 때를 벗겨야 합니다.
    명경의 대를 다 닦아내어 마음의 눈을 뜨고 보면
    해가 대명중천(大明中天)하여 시방세계를 고루 비치고 있는 것이,
    맑고 맑은 거울에 고요하고 고요하게 그대로 확 드러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거울의 때를 벗기고
    우리가 마음의 눈을 뜰 수 있는가?
    가장 쉬운 방법으로 제일 빠른 방법이 참선(參禪)입니다.
    화두(話頭)를 배워서 부지런히 부지런히 참구하는 것입니다.
    그러하여 화두를 바로 깨칠 것 같으면
    마음의 눈을 안 뜰래야 안 뜰 수 없습니다.
    마음의 눈이 번쩍 뜨이고 맙니다.
    일초직입여래지(一超直入如來地),
    한 번 뛰면 부처에 들어간다고,
    한 번 훌쩍 뛰면 눈 다 떠버린단 말입니다.
    그래서 제일 쉬운 방법이 참선하는 방법입니다.

    그 외에는 방법이 없는가? 또 있습니다.
    우리 마음의 눈을 무엇이 가리고 있어서 캄캄하게 되었는가?
    그 원인, 마음눈이 어두워진 원인이 있으니
    그것을 제거하면 될 것 아닙니까?

    불교에서는 그것을 탐, 진, 치(貪, 瞋, 癡) 삼독(三毒)이라고 합니다.
    욕심내고, 성내고, 어리석은 이 삼독이 마음의 눈을 가려서,
    본래 부처이고 본래 불국토인 여기에서
    중생이니, 사바세계니, 지옥을 가느니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마음눈을 가린 삼독, 삼독만 완전히 제거해 버리면
    마음의 눈은 저절로 안 밝아질래야 안 밝아질 수 없습니다.

    그 삼독 중에서도 무엇이 가장 근본이냐 하면 탐욕입니다.
    탐욕! 탐내는 마음이 근본이 되어서
    성내는 마음도 생기고 어리석은 마음도 생기는 것입니다.
    탐욕만 근본적으로 제거해 버리면
    마음의 눈은 자연적으로 뜨이게 되는 것입니다.

    탐욕은 어떻게 하여 생겼는가?
    “나”라는 것 때문에 생겼습니다. 나! 나!
    남이야 죽든가 말든가 알 턱이 있나
    어떻게든 내만 좀 잘 살자 내만! 내만! 하는 데에서
    모든 욕심이 다 생기는 것입니다
    “나” 라는 것이 중심이 되어서 자꾸 남을 해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마음의 눈은 영영 어두워집니다.
    캄캄하게 자꾸 더 어두워집니다.

    그런 욕심을 버리고 마음눈을 밝힐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나”라는 것, “나”라는 욕심을 버리고
    “남”을 위해 사는 것입니다. 남을 위해서!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누구나 무엇을 생각하든지 무슨 일을 하든지
    자나 깨나 내 뿐 아닙니까?
    그 생각을 완전히 거꾸로 해서
    자나 깨나 남의 생각, 남의 걱정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행동을 남을 위해 사는 데에 기준을 둡니다.
    남 도우는 데에 기준을 둔단 말입니다.
    그러면 자연히 삼독이 녹아지는 동시에
    마음의 눈이 자꾸자꾸 밝아집니다.
    그리하여 탐, 진, 치 삼독이 완전히 다 녹아버리면
    눈을 가리고 있던 것이 다 없어져 버리는데
    눈이 안 보일 리 있습니까?
    탐, 진, 치 삼독이 다 녹아버리는 데에 가서는 눈이 완전히 뜨여서
    저 밝은 광명을 환히 볼 수 있고,
    과거 무량아승지겁부터 내가 부처라는 것을 알 수 있는 동시에,
    시방세계가 전부 불국토 아닌 곳이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미래겁이 다하도록 자유자재한
    대해탈 생활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누가 “어떤 것이 불교입니까?” 하고 물으면 이렇게 답합니다.
    세상과 거꾸로 사는 것이 불교다.
    세상은 전부 내가 중심이 되어서 나를 위해 남을 해치려고 하는 것이지만,
    불교는 “나”라는 것은 완전히 내버리고 남을 위해서만 사는 것입니다.
    그러니 세상과는 거꾸로 사는 것이 불교입니다.
    그렇게 되면 당장에는 남을 위하다가 내가 배가 고파 죽을 것 같지만,
    설사 남을 위하다가 배가 고파 죽는다고 해도,
    남을 위해서 노력한 그것이 근본이 되어서
    내 마음이 밝아지는 것입니다.
    밝아지는 동시에 무슨 큰 수익이 오느냐 하면
    내가 본래 부처라는 것을 확실히 알게 되는 것입니다, 본래 부처라는 것을!
    자기는 굶어 죽더라도 남을 도와주라고 하면

    -스님도 참 답답하시네. 자신부터 한번 굶어 보지.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70평생을 산다고 해도, 80살을 산다고 해도 잠깐 동안입니다.
    설사 100살을 살면서 지구 땅덩어리의 온 재산을
    전부 내 살림살이로 만든다고 해봅시다.
    부처님은 무량아승지겁 전부터 성불해서
    또 무량아승지겁이 다하도록
    온 시방법계를 내 집으로 삼고 내 살림살이로 삼았는데
    그 많은 살림살이를 어떻게 계산하겠습니까?
    인생 100년 생활이라는 것이 아무리 부귀영화를 하고 잘 산다고 해도,
    미래겁이 다하도록 시방법계 시방불로에서
    무애자재한 그런 대생활을 한 그것에 비교한다면
    이것은 티끌하나도 안 됩니다.
    조그마한 먼지 하나도 안 됩니다.
    내용을 보면 10원짜리도 안 됩니다.
    그러나 10원짜리도 안 되는 이 인생을 완전히 포기해서
    남을 위해서만 살고 어떻게든 남을 위해서만 노력합니다.
    그러면 저 무량아승지겁 억천만겁 전부터 성불해 있는
    그 나라에 들어가고 그 나를 되찾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에는 10원짜리 나를 희생하여
    여러 억천만원이 넘는 참 나를 되찾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장사가 괜찮은 것 아닙니까?
    장사를 하려면 큼직한 장사를 해야 합니다.
    공연히 10원 20원 가지고 죽니사니 칼부림을 하고,
    전부 그런 식 아닙니까?

    아주 먼 옛날
    부처님께서는 배고픈 호랑이에게 몸을 잡아 먹히셨습니다.
    몸뚱이까지 잡아 먹히셨으니 말 다한 것 아닙니까?
    이것은 무엇이냐 하면 배고픈 호랑이를 위한 것도 있었지만
    그 내용에는 큰 욕심, 큰 욕심이 있는 것입니다.
    물거품 같은 몸뚱이 하나를 턱 버리면
    이것을 버리는 동시에 시방법계 큰 불국토에서 미래겁이 다하도록
    자유자재한 대해탈을 성취할 수 있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출가하신 것도 그런 것입니다.
    나중에 크면 임금이 될 것이지만
    이것도 가져봐야 별 것 아닙니다.
    서푼어치의 값도 안 되는 줄 알고 왕위도 헌신짝같이 차버리고
    큰 돈벌이를 한 것 아닙니까?

    근래에 와서 순치황제(順治皇帝) 같은 분,
    만주에서 나와서 18년 동안 전쟁을 하여
    대청제국(大淸帝國)을 건설한 분 아닙니까?
    이것은 중국 역사상 가장 큰 나라입니다.
    중국 본토 이외에도 남북만주 내외몽고 서장(티벳)
    그리고 안남(인도지나)에 이르는 대제국을 건설한 것입니다.
    그래놓고 가만히 생각해보니
    참으로 눈을 떠서 미래겁이 다하도록 해탈도를 성취하는 것에 비하면,
    이것은 아이들 장난도 아니고 10원짜리 가치도 안 되는 것이거든요.
    그래 대청제국은 헌신짝처럼 팽개쳐 버리고 그만 도망을 가버렸습니다.

    금산사(金山寺)라는 절에 가서
    다른 것도 아니고 나무하고 아궁이에 불이나 때는
    부목(負木)이 되었습니다.
    대청제국을 건설한 만고의 대영웅 순치황제 같은 사람이,
    절에 가서 공부하기 위해 나무해 주고 스님네 방에 불이나 때주고,
    이렇게 되면 그 사람은 공부를 성취 안 할래야 성취 안 할 수 없습니다.

    순치황제가 출가할 때 뭐라고 했느냐 하면,
    나는 본시 서방의 결식하며 수도하는 수도승이었는데,
    어찌하여 만승천자로 타락하였는고?
    (我本西方一納子 緣何流落帝王家)하고 탄식하였습니다.
    만승천자의 부귀영화를 가장 큰 타락으로 보고
    만승천자의 보위(寶位)를 헌신짝같이 차버린 것입니다.

    이것도 생각해 보면 욕심이 커서 그렇습니다.
    대청제국이란 그것은 10원짜리도 못되고,
    참으로 눈을 바로 뜨고 보면
    시방법계에서 자유자재하게 생활할 터인데
    이보다 더 큰 재산이 어디 있겠습니까? (계속)

     

    * 법문 출처 : 해인지 <해인법문>
                       대한불교 조계종 홈페이지


    [가야산의 메아리]

     
     

    내가 엄마가 되기 전에는

     

    내가 엄마가  되기 전에는

    언제나 식기전에 밥을 먹었다.

     

    얼룩 묻은 옷을 입은 적도 없었고

    전화로 조용히 대화를 나눌 시간이 있었다.

     

    내가 엄마가 되기 전에는 원하는 만큼 잠을 잘 수 있었고

    늦도록 책을 읽을 수 있었다.

    날마다 머리를 빗고 화장을 했다.

     

    날마다 집을 치웠었었다.

    장난감에 걸려 넘어 진적도 없었고,

    자장가는 오래 전에 잊었었다.

     

    내가 엄마가  되기전에는

    어떤풀에 독이 있는지 신경쓰지 않았었고

    예방주사에 대해선 생각 해보지도 않았었다.

     

    누가 나한테 토하고, 내 급소를 때리고,

    침을 밷고, 머리카락을 잡아 당기고

    이빨로 깨물고, 오줌을 싸고 손가락으로 나를 꼬집은 적이 한번도 없었다.

     

    엄마가 되기전에는 마음을 잘 다스릴 수가 있었다.

    내생각과 몸까지도,

     

    울부짖는 아이를 두팔로 눌러

    의사가 진찰을 하거나 주사를 놓게 한적이 없었다.

     

    눈물어린 눈을 보며 함께 운 적이 없었고

    단순한 웃음에도 그토록 기뻐한 적이 없었으며

    잠든 아이를 보며 새벽까지 깨어 있은 적이 없었다.

     

    아이가 깰까봐 언제까지나  두팔에 안고 있었던 적이 없었다.

    아이가 아플 때 대신 아파줄 수가 없어서 가슴이 찢어 진 적이 없었다.

     

    그토록 작은 존재가 그토록 많이 내 삶에 영향을 미칠 줄  생각조차 하지 않았었다.

    내가 누군가를 그토록 사랑하게 될 줄 결코 알지 못했었다.

     

    내가 엄마가 되는 것을

    그토록 행복하게 여길 줄 미쳐 알지 못했었다.

    내 몸 밖에 또 다른 나의 심장을 갖는 것이

    어떤 기분인지 알지 못했했었다.

     

    한 아이의 엄마가 되는 그 기쁨.

    그 가슴 아픔, 그 경이로움, 

    그 성취감을 결코 알지 못했었다.

     

    그토록 많은 감정들을,

     

    내가 엄마가되기 전에는..... 

     

    -작자미상-

     

    이 글을 읽노라니 누군가와 만나 결혼하고 한 아이를 낳고 한 생을 살아가는 모습들이 돌고 도는 사람들의 삶속에 한 부분이란 생각이 들어 마음이 아프기도 합니다.

    저렇게 어머니 당신의 마음을 담아내어 키운 자식이 효순치 못하고 바르지 않다면 그 마음 또한 오죽할까요?

    우리 인연의 엄마, 아빠들도 서로 '내 와이프는 엄마가 되기전에 참 고왔지..' ' 내 신랑도 아빠가 되기전에는 참 좋았었는데...'라고 생각만 하지 마시고 그렇게 한 사람의 마음을 올곧이 쏟아 나와 자식들을 위해 헌신하는 모습에 감사하고 한번쯤은 따뜻한 가슴으로 안아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아직 엄마나 아빠가 되기전인 분들은 이렇게 나를 핏덩이때부터 키워준 부모님을 생각하며 부모님 팔다리라도 주물러 드릴 시간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날이 추워지지만 마음만은 내 주변에 사람들에게 정말로 고맙고 따스하게 간직하시기를 불전에 축원드립니다.^^()

     



    지내고 보면 모두가  그리운 것 뿐인 데




    그때는 뼈를 녹일 것같은
    아픔이나 슬픔이었을지라도
    지나고 보면 그것마저도
    가끔은 그리워질 때가 있습니다.




    어떻게 견디고 살았던가 싶을 만치
    힘들고 어려웠던 일도
    지금 조용히 눈을 감고
    그때를 추억하다 보면
    더욱 생생하고 애틋한 그리움으로
    가슴에 남아 있는 것을 보면
    더욱 그렇습니다.

    어찌 생각해보면
    이시간이 세상이 무너지는 듯한
    절망과 고통스러운
    삶의 질곡에 서있다 할지라도
    결코 이겨내지 못할 일은
    없다는 뜻이 아닐런지요 

    가진 것의 조금을 잃었을 뿐인데
    자신의 전부를 잃었다고 절망하는 것은
    남이 가지지 못한 것을 보지 못함이요




    남이 가진 것을
    조금 덜 가짐에서 오는 욕심이며
    비워야할 것을
    비우지 못한 허욕 때문이며
    포기와 버림에
    익숙하지 못해서 일수도 있습니다.

    생사를 넘나드는 기로에 서있는
    사람들의 기도는 참으로 소박합니다.




    비록 평생
    일어서지 못한다 할지라도
    살아 숨쉬고 있음 그 하나가
    간절한 기도의 제목이 되고
    살아 있음 그 하나만으로도
    더없는 기쁨과 감사의
    눈물을 흘리는 이들을 보게됩니다. 

    남의 가슴에
    들어 박혀 있는 큰 아픔 보다
    내 손끝에 작은 가시의 찔림이
    더 아픈 것이기에




    다른 이의 아픔의 크기를
    가늠하긴 어렵지만
    더이상 자신만의 생각과 판단으로
    스스로를 절망의 늪으로
    밀어넣는 일은 말아야 합니다.

    지난 날을 되돌아보면
    아쉬움도 많았고 후회와 회한으로
    가득한 시간이였을지라도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새 날의 새로운 소망이 있기에
    더 이상은 흘려보낸 시간들 속에
    스스로를 가두어 두려하지 마십시요




    아픔없이 살아온 삶이 없듯이
    시간속에 무디어지지 않는 아픔도 없습니다.




    세상을 다 잃은듯한
    아픔과 슬픔마저도
    진정 그리울때가 있답니다.




    병실에서 아스라히 꺼져가는
    핏줄의 생명선이 안타까워
    차라리 이순간을
    내 삶에서 도려내고 싶었던 기억마저도




    그런 모습이라도 잠시
    내곁에 머물 수 있었던
    그때가 그립습니다.




    부족함 투성이로 아웅다웅 살았어도
    자츰 멀어저 가는 현실의 정들이 아쉬워 

    사탕 한알 서로 먹으려던
    시절이 그리운 것은
    사람사는 정이 있었기에
    돌아올 수 없기에 더 애틋함으로 아려옵니다.




    지금의 힘겨움
    또 어디쯤에선가 그리워하게 될지




    살아온 시간들속에
    참 많이도 겪은 경험으로 분명하답니다.




    주저앉고 싶었고
    생을 포기하고 싶을 만큼의
    고통 한두번쯤 우리곁을 스쳐갔습니다.

    사는 일이 이런것이라며
    주어진 고통의 터널을
    헤쳐나가려 안간힘 쓰던 때에는
    지금보다는 패기가 있어 좋았고
    당당함이 있어 좋았답니다.




    그 어려움의 시간들을
    좋았다라고 표현할수 있는건
    지금에 없는 젊음이 있기때문입니다.

    사람사는 일은 지나간 것에는
    모두가 그리운가봅니다. 

    이별의 고통 마저도
    시간속에 아름다움으로 승화할 수 있으니
    시간은, 세월은 약인가봐요 

    지금 너무 힘들어 하지말아요
    가슴을 파고드는 현실의 비수가
    우리 삶 어디쯤에서
    둥글게 닳아져 있을테니까요.





    - 문경찬/ 삶의 재생 중에서 -


     
     옮겨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