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산의 화두는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의 의미를 암시한다.
꿈과 생각은 의식의 소산이다.
수행자에게 의식은 반야의 씨앗을 죽이는 차별과 분별에 다름 아니다.
동산은 미래의 제자에게 번뇌망상의 근원인 의식을 여읜 자리에서
본래면목을 찾아보라고 주문한 것이다.
“일주일간 매일 아침 문안을 드릴 때 마다 ‘일러라, 일러!’,
이렇게 다그치셨습니다. 그 때만해도 그 뜻을 몰랐죠.
온갖 이론을 다 꾸며내 답을찾으려고 했지요.
그러니 매일 방에서 쫓겨날 수 밖에. ”
사물의 실상은 본디 집착해야 할 아무 것도 없는 절대무다,
분별이 떨어져나간 경계가 본래무일물이다.
상대적 관념의 찌꺼기는 들러붙을 데가 없다.
인간의 삶 역시 이처럼 본래무일물의 세계다.
빈 손으로 와서 빈 손으로가는 게 삶이 아니던가.
광덕은 몇 년 뒤 금정사에서 반야의 눈을 뜬다.
그는 당시의 심정을 오도송 대신 ‘한마음헌장’에 재현한다.
‘부처, 한마음, 생명, 마하반야바라밀(대지혜의 완성)’은
광덕불교를 떠받치는 4대지주로 한마음헌장에서 파동치고 있다.
동산과의 만남은 금하광덕(金河光德ㆍ1927~1999)의 삶을 결정짓는
전환점이 된다. 불교계에서 아주 독특한 위상을 차지하는
선사 소천(韶天)도 광덕의 구도여정에 스승이 되어주었다.
만주에서 독립투쟁을 벌이던 시기에
금강경을 보고 일찍이 한 소식을 얻은 소천은
52년 쉰 여섯의 나이에 동산을 은사로 머리를 깎는다.
광덕의 반야바라밀사상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용성선사로부터 혈맥을 이어받고,
동산선사로부터 몸을 지어받고,
소천선사로부터 안정(眼精)을 밝혀 받았다.”
법사 김재영은 일대기에서 광덕이 한국불교의 정맥을
이어받았음을 설명하고 있다.
사형인 당대의 본분종사 성철도
종단의 대소사를 물어오면 “광덕 사제하고 상의하라”고
할 정도로 그의 인품은 종단 안팎에서 오롯이 빛을 발했다.
가정 형편이 어려웠던 광덕은 스무 살의 나이에
야간대학인 한국대학에 입학한다.
주로 서울대 교수들이 강사로 가르쳤는데 광덕은 철학자 박종홍의 지도로
학문의 기초를 다진다.
한국대학은 국제대학을 거쳐 현재 서경대학으로 바뀌었다.
수행은 끊임없는 자기탈피의 과정이다.
구도의 길에서 광덕은 위의 일부와 한쪽 폐를 잘라내는 암초를 만난다.
그러나 육신의 고통을 수행의 과정으로 삼았다.
“괜찮아. 내가 이제 육신 껍데기를 벗을 때가 된 줄로 알고,
이제 이 육신에 연연하지 않기로 했어.”
도반의 근심을 오히려 씻어주려고 노력했다.
“바라밀의 눈에는 조국을 떠난 개인이 없고,
세계를 떠난 조국이 없으며, 개인을 떠난 세계나 조국도 없다.
우리는 보현을 배워 세계를 뒤덮은 미망의 구름을 세척하여
조국과 나와 세계에 평화 번영과 지혜가 충만하기를기원해야 한다.”
광덕불교의 두 법륜은 반야바라밀사상과 보현보살의 행원이다.
광덕은 개인ㆍ사회ㆍ인류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유일한 통로로
보현의 행원을 내세운다.
반야바라밀은 이를 뒷받침하는 사상적 기반인 셈이다.
보현행원은 일체를 이루는 불가사의의 방망이다.
적어도 광덕에게는 그러했다. 가정의 평화, 사회의 번영, 국토의 안녕,
그리고 필경 피안으로 건네주는 반야의 뗏목인 것이다.
보살은 두 모습이다. 인간으로서 깨달음을 향해가는 수행자의 모습,
부처가 인간을 향해 대자비의 손길을 내미는 모습이다.
보현은 불과(佛果)를 증득한 보살로 중생구제를 위해 인간의 모습을 하고
세상에 나타났다.
보현의 사명은 모든 중생의 교화다.
광덕은 보현행원의 실천이 부처의 가르침을 이행하는 일이며
피안의 세계로 나아가는 길임을 강조한다.
광덕이 92년 국악교성곡 ‘보현행원송’을 발표한 까닭이다.
“수행자는 부처님이 키우시는 나무의 꽃이다.
중생은 저마다 부처님의 생명을 이어받은 꽃이다.
중생의 갖가지 특징은 부처님 마음바다에 핀 아름다운 꽃이다.
중생은 중생이 아니오,
기실 여래의 청정자성을 분별하는 존재이다.”
그래서 광덕은 ‘내 생명 부처님 생명’이라고 외친다.
새로운 인간선언이다. 부처나무에 무성하게 자라는 뿌리와 가지,
꽃과 열매-이 것이 생명의 진실상이다.
그러니 우리의 생명은 부처의 생명인 것이다.
그렇다고 중생이 부처의 피조물이나 종속자는 아니다.
반야의 눈으로 보면 생명의 세계는 절대평등하다.
중생은 모두 불성을 갖고 있다
(一切衆生悉有佛性ㆍ일체중생실유불성). '
마음과 부처와 중생, 이 셋이 차별이 없다
(心佛及衆生 是三無差別ㆍ심불급중생 시삼무차별).
석가는 열반경과 화엄경에서 설했다.
석가는 평등대비의 마음으로 모든 중생을 고루 소중히 여겼다.
평등은 깨달음과 진여의 다른 얼굴인 것이다.
무엇보다 ‘내 생명 부처님 생명’의 선언은 반야활구다.
광덕은 이 반야활구를 앞세워 수많은 사람을 구했다.
광덕은 보현행원의 실천도량으로 잠실에 불광사를 창건했다.
광덕불교의 회향은 전법이다. 부처의 법을 널리펴는 것이다.
그 자신이 새 생명을 불어넣은 반야바라밀사상이나
보현행원의 원력은 모두 전법의 방편일지도 모른다.
“범어사로 가지.”
보현의 삶을 살았던 광덕은 입적 전날 제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범어사는 마음의 고향이 아니던가.
99년 2월27일(음력 1월 12일) 낮 1시40분,
“육신의 소멸, 죽음이 아니다”는 임종게를 남기고 열반에 들었다.
연보
1927.4.4. 경기 화성군 오산읍에서 출생, 속성은 제주 고(高)씨
1956. 범어사에서 동산을 은사로 비구계 받음, 법명 광덕, 법호금하
1965. 대학생불교연합회 창립, 초대지도법사
1965. 봉은사 주지
1974.11.1. 포교지 월간 불광 창간
1982.10.24. 잠실에 불광사 준공
1999.2.27. 세수 73, 법랍 43세로 입적,
'반야심경강의' '보현행원품강의' '삶의 빛을 찾아' 등 다수의 저서와 법문집 남김
[광덕 스님 열반송]
울려서 法界를 振動하여 鐵圍山이 밝아지고
잠잠해서 劫前 봄소식이 劫後에 찬란해라
일찍이 形相으로 沒形相을떨쳤으니
金井山이 당당하여 그의 소리 永遠하리
*큰스님 열반송에 대한 간결한 보충 설명을 드립니다.
1.철위산은 불교에서 말하는, 이 세상을 구성하는 한 부분으로,
‘철위산이 밝아진다’함은, ‘이 세상이 밝아진다’는 것과 같은 말씀으로 이해하시면 됩니다.
따라서 ‘울려서 法界를 振動하여 鐵圍山이 밝아지고 ’는 말씀은,
‘우리 본성의 생명이 약동함으로 해서 이 세상이 밝아지고..’.라는 말씀이 됩니다.
그리고 이런 우리 본성 생명의 약동은,
‘우리 마음의 약동’도 됩니다.
그러니 화엄경은 ‘일체유심조’라 말하는 거겠지요...
‘우리 생명의 약동’은 소위 물리학에서 말하는,
대폭발, ‘빅뱅’에 비유될 수 있습니다.
우리 생명이 울려, 이 거대한 우주가 형성되는 것이지요...
뉴턴, 아인슈타인의 거시적 물리학이 이 세상이 ‘고요한 곳’으로 본 데 비하여,
현대 양자물리학은 이 세상을 ‘요동이 빗발치는 세계’라고 설명하는 것을 보면,
광덕 큰스님의 열반송의 첫 구절이 단순한 한 고승(高僧)의 열반구는 아님을 느끼게 합니다...
2.‘잠잠해서 劫前 봄소식이 劫後에 찬란해라’는 문구에서
'겁전 봄소식'은 태초의 진리를 말하며,
'겁후에 찬란해라'는 세상의 나툼, 창조 이후의 현 세계를 뜻합니다.
이것은 또한 이 세상을 나툰 우주의 제일 원인이 ‘생명의 요동’이라면,
'잠잠한 것' 역시 우리 생명의 한 속성임을 알리는 말씀입니다.
즉, 요동칠 땐 천지를 나툴 정도로 요동치지만,
잠잠할 땐 숨 소리 하나 안 들릴 정도로 잠잠한 것이 우리 생명의 본래 모습이지요...
앞의 말씀과 뒷말씀을 종합해서 말씀드리면,
이것은 ‘우리 마음의 묘용(妙用), 즉 불가사의함’을 표현하신 겁니다.
요동치는 것이 우주의 한 모습이라면,
잠잠한 것도 우주의 한 모습인 것.
그러므로 무량한 시공의 침묵 역시,
겁 이전의 봄소식을 겁후에 나투는 것이 됩지요!
이 말씀은,
흔히 우리가 일으키기 쉬운 차별, 분별하는 마음,
즉 ‘이분법의 소멸’을 일러주는 말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