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 법을 따르고 계를 지키며 기뻐한다/불설법멸진경

2009. 11. 12. 21:59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염불 불보살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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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십니까? 다들 건강하셨는지요.

 

21세기에 대한민국이라는 조그만 나라에서 태어난 우리는 핵을 앞세운 강대국들의  세력다툼과 무역을 앞세운 경제전쟁과 국내경제의 침체 등으로 시대를 공존하고 살아가는 우리는 혼란스럽습니다.


주변에 흔히 일어나는 가정의 해체와 늘어만 가는 이혼율, 충분히 의지만 있으면 이겨낼 수 있는 현실의 어려움이건만, 힘들이기 싫다는 이유만으로 자신들의 일상을 말초적인 퇴폐와 향락으로 불나방처럼 달려 들어가는 어리석은 중생들을 보면서 이 시대를 건강하게 하는 처방은 과연 없는 것인가? 하는 고민을 해보시기바랍니다.


내 자식만 잘 키우면 된다는 생각으로 남의 자식들을 무관심으로 대하지만, 내 자식이 나가서 만나는 친구들이 바로 내가 무관심하게 대했던 남의 자식들이고 금쪽같은 자식은 친구 따라 강남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세상에서 제대로 된 며느리는 어디서 만날 것이며 제대로 된 사위는 어디서 구할 것입니까?


거기다 결혼할 때 백년해로한다고 온 동네방네 아는 사람들 다 알리고 떠들썩하게 치룬 결혼식이 얼마 가지 못해 서로 등 돌리는 것은 요즘엔 흠도 되지 않지만, 다 늙어서 황혼이혼이라는 어처구니 없는 일들이 다반사로 일어나는 이 시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 이웃들의 자화상을 우리는 남의 일로 받아들이기보다는 되돌아 자기를 점검해보는 계기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다른 종교에서는 무슨 휴거다, 말세다 해서 우매한 신도들을 현혹해서 이성적, 상식적으로도 용납될 수 없는 참으로 어리석은 짓들을 하는 데도 많이 배웠다는 사람들마저도 거기에 현혹되는 기현상은 우리의 내면세계가 그만큼 약해져 있고 영양결핍이 되어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요즘 TV방송에서 “웰빙”이라는 이름으로 먹거리가 판을 치는 세상에 세끼를 먹던 두 끼를 먹든 칼로리를 재고 영양을 따지면서 예수님께서 “사람이 빵만으로 살수 없다”고 영혼의 양식이 필요함을 절절히 일러주고 있듯, 육신의 건강을 위해서는 편식하지 않고 골고루 음식을 먹어 건강이 유지되듯, 사람의 정신세계도 영혼도 다양한 정신세계를 공부해야 하건만, “오직 하나”에 빠져 “믿으면 천국, 불신지옥”이라는 허무맹랑한 공갈에 소위 지식인이라고 하는 사람들조차도 허우적대고 있습니다.


이렇게 불확실한 삶의 경계에서 인간의 내면이 나약해지고 있는 현세에서 부처님의 수승한 가르침을 통해 스스로가 한 생각에 자기로 부터 대 자유인이 되고 보이지도 않는 마음을 비운다고 해대기보다는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고, 만져지는 모든 것들로 인해 내면에서 불끈불끈 일어나는 자기의 욕구를 바로바로 알아차리고 들여다보며 부질없는 허욕을 경계할 줄 아는 참 사람 되는 길을 전해주어야 하건만 과연 이 시대의 불자는, 우리불교는 이에 걸맞고 있는가를 진단해 봐야 할 것입니다.


요즘, 학자요 박사인 분이 총무원장이 되셔가지고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종단이 되어가고 있고, 이번 14대 종회의원 선거는 6당 4락 이라고들 합니다.

소위 6억을 쓰면 종회의원에 당선되고 4억을 쓰면 낙선된다고들 하는 말이 공공연히 나돌고 있는 작금의 조계종단의 뒷모습일진대 참으로 부끄러움을 감출수가 없습니다.

 

이 산중의 저로서는 이런 현실이 상상이 가질 못하고 있습니다.

거기다, 종단에서 하나 뿐인 중앙승가대학을 유지하고 지원하고 발전 시켜나가야 하는 시점에서 지원이 절실하다고 하는데도 나 몰라라 하고 종권유지와 기득권의 도심 대형사찰의 주지인사에 말도 많고 탈도 많다고 강남 봉은사에서는 승가대학 학인 스님들이 단식농성을 한다고 합니다.

이런 현상을 직접 현장에서 보면서 제 마음 속에서는 부처님께서 입멸하시기 직전에 남기셨던 불과 일천자에 불과한 “불설법멸진경” 의 대목들이 가슴을 짓누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지금 일요법회에 여러분들이 전혀 듣도 보도 못하셨던 불설법멸진경에 대해 설해드리며 이 시대 승가에 법고를 울리고 싶은 것입니다.


지금부터 “불설법멸진경”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이 경은 부처님이 열반에 들기 직전에 설한 경이라고 합니다.

한자(漢字)로 불과 1천자에 불과한 아주 작은 분량의 경입니다.

부처님은 이 작은 분량의 경을 설하는데 아주 침통해 하시는 인간적인 모습이 묘사되어있습니다.

대부분의 다른 경을 설할 때는, 설하기에 앞서 여러 가지 상서로운 징조가 나타나는 것으로 경에 묘사가 되는데, 대지가 진동하고 하늘에서는 여러가지 서상(瑞相)이 나타나며 부처님의 백호(白豪)에서 방광(放光)을 하는 등, 자못 엄숙한 분위기가 고조되는 것이 상례입니다.

우리가 법당에서 대하는 불화인 탱화를 보더라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데 부처님 께서 이 경을 설하기에 앞서서는 아무런 징후가 나타나지 않을 뿐 아니라, 부처님은 전혀 설법을 하려 하지 않고 침묵을 지킵니다.

설법을 기다리는 대중 가운데 기다리다 못한 아난(阿難)이 일어나 세존께서 설법을 할 때면 언제나 위광(威光)이 나타났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고 또 설법을 하지도 않으시니 거기에는 반드시 깊은 까닭이 있을 것이므로 그것을 “일러 달라”고 세 번을 간청합니다.


그때서야, 부처님은 설법의 서두를 꺼내십니다.

“내가 열반에 든 뒤의 일이긴 하지만 불법이 멸하려고 할 때 오역(五逆)의 죄를 범하는 자는 많아지고 마도(魔道)는 치성하며 악마가 사문(沙門)이 되어 교단 내부에서 불도를 혼란하게 하고 파괴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래지 않아서 열반에 드실 부처님으로서는 불법이 멸할 장래의 일들을 생각하고 쉽사리 설법할 마음이 일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마음이 무거웠을 것이 분명합니다. 중생을 제도하기 위하여 이승에 나와 50년의 오랜 세월동안 교화를 펴고 이제 열반을 앞둔 부처님으로서는 법멸(法滅)에 관하여 설법한다고 하는 것은 괴로운 일임에 틀림없으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부처님은 당신이 열반에 든 뒤 1천 5백년 뒤에 올 말법시대의 중생을 위하여 괴로우나 설하지 않을 수 없었기에 지금의 이 경을 제가 말씀드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악마의 무리가 승려의 모양을 하고서 교단 안에 들어와 불도(佛道)를 내부로부터 혼란하게 하고 파괴한다.

그 마승(魔僧)들은 속인의 옷을 입고 5색의 가사를 즐겨 입는다.

그들은 술을 마시고 고기를 먹으며 살생을 하며 질리지도 않고 맛을 추구한다.

무릇 자비심은 전혀 없고 부처의 제자를 표방하면서 서로 미워하고 질투한다. 

그러나 그러한 말법시대에도 보살과 벽지불(酸支佛)과 아라한이 출현하여 정진하고 수행해서 덕을 쌓는다.

세상 사람들은 모두가 그들을 존경하며 그들은 모든 사람을 평등하게 교화하고 가난한 사람을 동정하며 노인을 걱정하고 의지할 곳이 없는 사람들을 구조한다.

그들은 항상 불상과 경으로써 사람들에게 봉사할 것을 가르치고 온갖 공덕을 짓고 그 뜻과 성품은 선하여 사람들을 해치지 않는다.

자기의 몸과 재물을 바쳐 남을 구제하고 인욕하여 사람들을 화합하게 한다.


그러나 이러한 사람이 있으면 마승(魔僧)의 무리들은 함께 질투하며 비방하고 세상 사람들에게 보살의 욕을 퍼뜨리고 내쫒아 절에 살지 못하게 한다.

그리고 그러한 보살을 내쫒은 다음에는 함께 불도를 닦지도 않고 절이 황폐하여도 수리하지 않고 도리어 절이 무너지도록 방치한다.

다만 재물을 탐하여 축적하는 데만 힘쓰고 남에게 재물을 나누어 주지도 않으며 복덕을 짓지도 않는다.

그들은 노비를 사고팔며 밭을 갈고 씨를 뿌리며 산과 숲에 불을 질러 중생을 상해(傷害)하는 등 자비심이 전혀 없다.

야비한 사람이 비구가 되고 비구니가 된다.

그러니 도덕이 있을 리가 없고, 그러한 사람은 음란한 짓을 일삼고 남녀를 구별하지 않는다.

불도가 희박해지는 것은 모두가 다 이들의 탓이다.

그들 마도의 자식들은 혹은 나라의 법을 피하여 승려가 되고, 그러니 매월 15일과 30일에 같은 지역의 승려들이 모여 계목(戒目)을 읽으며 반성하고 죄를 고백하고 참회하는 포살(布薩)을 행하지 않고, 비록 계목을 읽는다 해도 싫어하면서 읽고 권태(倦怠)로와 하며 앞뒤를 줄여버리고 다 읽지도 않을 뿐 아니라 열심히 듣고자 하지도 않는다.


경을 읽지도 않고 배우지도 않으며 설사 읽는 이가 있다고 해도 자구(字句)의 뜻도 모르고 읽으면서도 굳이 아는 이에게 물으려 하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유명해지기를 바라고 거만하고 겉모양은 당당하고 뽐내며 남으로부터 끊임없이 칭찬을 받고 공양받기를 바란다.”


법이 멸하려고 할 때, 여인은 정진하며 항상 공덕을 짓는다.

그러나 남자는 게으르고 부처의 가르침을 따르지 아니하며 사문(沙門)을 마치 분토(糞土)와 같이 여기고 신심(信心)이 없다.

그러니 법이 멸하려고 할 때, 모든 하늘은 눈물을 흘려 슬퍼하고

오곡(五穀)은 여물지 않으며 질병이 퍼지고 죽는 사람은 많아지며 중생들은 괴로움에 시달리고 관리는 도리에 따르지 아니하고 빼앗는 것만을 꾀한다.

사람들은 혼란을 일으켜 그 기회를 이용해서 일시에 욕망을 성취하고자 한다.

그러니 악인은 바다의 모래와 같이 많으나 선한 사람은 한 두 사람 뿐이다. 

세계의 종말 직전이 되면 해와 달이 짧아지고 사람의 수명도 줄어 나이 40에 머리가 희어진다.

남자는 음란을 일삼다가 정력이 다하여 젊어서 죽으며 혹 수명이 60이라 해도 여자보다는 짧다.

세계의 종말에는 갑자기 홍수가 일어나지만 사람들은 세계의 종말을 믿지 않는다.

그러나 홍수는 빈부와 귀천을 가리지 아니하고 삼켜 물고기의 먹이가 된다.

그러한 때에 보살과 벽지불과 아라한은 온갖 마군(魔軍)에게 쫒기어 삼승(三乘)의 산, 복덕의 땅으로 들어간다.

그들은 스스로 법을 따르고 계를 지키며 기뻐한다.

그리고 월광(月光)보살이 나와 불법이 잠깐 흥할 것이다.

이것은 마치 기름등잔의 불이 꺼지기 직전에 불꽃이 커져서 밝아지는 것과 같다.


“이 이상은 더 설하여 자세히 들려 줄 수가 없다.” 하시고 침통하게 앉아계셨다. 한문으로 의역된 경에 이렇게 씌어져 있습니다.


이 경은 부처님께서 돌아 가시고난 후, 불법(佛法)이 멸하여 다한 말법시대를 경고하는 부처님의 말씀으로 정법시, 상법시, 말법시라는 삼시관을 기준으로 나누게 되는데, 이 삼시관이라는 것은 정법(正法)과 상법(像法)과 말법(末法)이라고 하는 불교에 대한 역사관으로 이것을 삼시관(三時觀)이라고 합니다.


정법시대라고 하는 것은 부처님의 가르침과 그것을 따르는 행과, 가르침과 행에 의해 깨달음을 성취한다는 세 가지 것이 갖추어져서 사람들이 깨달음을 얻을 수 있고 불법이 살아 있는 시기를 말합니다. 

이때 정법(正法)이라고 하는 정(正)은 살아 있는 부처님의 바른 법을 뜻하면서 동시에 사람들이 그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제로 경험할 수 있는 증험(證驗)을 뜻하기도 합니다.

정법이 지속하는 시기는 5백년이 정설이 되고 있습니다.


상법시대라고 하는 것은 정법의 시기와 닮은 시대를 말합니다.

이때 상법(像法)의 상(像)은 비슷하다는 뜻으로 부처님의 가르침과 가르침을 따르는 행은 있어서 정법시대와 그 점에 있어서는 같으나 그 가르침과 힘에 의해서 깨달음을 성취하는 일은 없는 시대입니다.  이 시기는 1천년이 정설입니다.


그리고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시대를 말법시대라고 하는데 이 시기는 다만 부처님의 가르침만이 있고, 그 가르침을 따르는 행도 깨달음도 없는 시기입니다.

이 시기는 1만년이 지속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1만년이 지나면 다른 부처님이 세상에 나와 정법을 펴 다시 정법시대가 오고 상법시대를 거쳐 말법시대가 오는 주기가 되풀이 된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삼시관(三時觀)이 부처님 당시부터 명확하게 있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부처님 당시나 부처님이 입멸(入滅)하신 직후, 즉 초기불교 시기에는 정법은 1천년 동안 지속될 것이라고 말해지고 있었으므로 그 시기에는 상법이라든가 말법이라고 하는 문제는 일어나지 않고 있었습니다. 


부처님이 입멸하신지 5백년경이 되었을 때, 불교교단은 분열에 분열을 거듭하게 되고 교단내부의 대립은 심화되었고 이로 인해 부처님의 진실한 가르침의 귀추를 알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때, 사람들은 1천년이 지속한다고 했던 정법이 부처님 입멸하신지 500년에 이르러 이같이 혼란 상태에 놓이게 된 것은 여자의 출가(出家) 떄문에 정법시대가 5백년으로 줄 것이라고 한 부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이제 정법시대는 끝났다고 생각한 것 입니다.


정법시대가 끝났다고 생각한 사람들은 이제 부처님의 가르침도 없고 그 가르침을 따르는 행도 없으며 깨달음도 없는 시대를 어떻게 헤쳐 나아갈 것인가 걱정을 하지 않을 수 없었고, 순간 절망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정법시대가 끝났다고 해서 결코 불법이 멸하여 없어진 것은 아니다.

다만 교단의 분열로 인하여 정법이 우리 눈앞에서 보이지 않을 뿐이다.” 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이때 그들은 역사적으로 실재한 세존에 한하지 않고 모든 부처님이 설한 가르침, 즉 진리는 그것 자체가 변하거나 없어지거나 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전달되는 과정에서 여러 영향으로 변화할 뿐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가르침을 받는 자의 성격과 능력에 따라서, 가르침을 전하는 사람의 성격과 능력에 따라서, 그 시대와 사회에 따라서 변화하며 부처님으로부터 직접 가르침을 받는 경우와 부처님이 없는 시대에 부처님을 상상하면서 간접적으로 가르침을 받는 경우와는 차이가 있음을 그들은 깨달은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어떻게 하면 부처님의 가르침을 더 유지하고 수행할 것인가 생각하였고 그것이 상법시대에 대한 자각입니다.


불법의 지속을 바라는 이들에 의해서 상법시대는 1천년이라고 설하는 대집경(大集經)과, 정법 1천년, 상법 5백년이라고 설하는 비화경(悲華經)과, 정법과 상법이 각각 5백년이라고 설하는 현겁경(現劫經)과 말법이 1만년이라고 하는 대비경(大悲經) 등이 결집됩니다.


부처님이 입멸한 1천 5백년 뒤에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행(行)과 행에 의한 꺠달음이 불가능한 시대가 온다고 하는 말법사상의 자각은 그 당시의 불교인들로 하여금 깊은 반성을 하게 하였습니다. 

즉, 행과 깨달음이 없는 시대에서 어떻게 하면 성불(成佛)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가 고심(苦心)하게 되었고, 고심한 사람들 중에는 중국의 삼계교(三階敎)의 주창자인 신행(信行540∼594)과, 정토교를 주장한 도탁(562∼645)이나,선도(善導613∼681)

스님 등은 스스로 성불하는 길을 찾아 아미타불을 신앙해야 한다고 하였으며,

우리나라에서는 신라시대 신방(神肪)은 지장십륜경(地藏十輪經)의 가르침에 따를 것을 주창하기도 했습니다.


중국 당나라의 도세(道世)가 저술한 법원주림(法苑珠林)에는 말법 시대가 되면 다섯가지 혼란한 현상이 나타난다고 했습니다.


첫째는 비구가 속인에게서 법(法)을 배우며,

둘째 속인이 윗자리에 앉고 비구는 낮은 자리에 앉으며,

셋째 비구의 설법은 받아들여지지 않고 속인의 설법을 으뜸이라 고 하며, 

넷째 비구가 악마의 집에 스스로 태어나 세속의 생활을 하며 그것이 옳다고 하므로 불법(佛法)의 옳고 그름이 분명하지 않으며,

다섯째 비구가 아내와 자식과 하인과 하녀를 두고 생활하면서 세속 사람과 다름없이 다투기를 일삼는다고 하였습니다.

 

이 시대의 불교와 종교계의 실정을 보면 지금이 바로 도세가 말하는 말법시대가 바로 이게 아닌가 여겨집니다.


그러나, 도세가 지적한 말법시대의 이러한 다섯 가지 혼란상(混亂相)을 오란(五亂)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도세가 처음으로 말한 것은 아닙니다. 

많은 경전 속에서 설해지고 있는 것을 도세가 묶어서 말하였을 뿐 입니다. 

말법시대를 말하는 경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법멸진경(法滅盡經)은 정신은 황폐화되어가고 물질의 편리함을 편리함만을 누리고 마는 것이 아니라 물질을 소유하고자 하는 욕구의 노예로 전락되어 못 저지르는 짓이 없는 사람들이 넘쳐나는 이 난세를 살아가는 우리는 위기의식을 느껴야 합니다.


법멸진경에서 남기신 승단에 관한 부처님의 말씀은 오늘의 우리로 하여금 승속(僧俗)을 막론하고 평소에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기 때문에 봉은사에 갔던 날 더욱 가슴이 짓눌렸던 것입니다.

승단의 혼란은 출가한 스님들에게는 곧바로 자신의 일이지만, 수행자의 공덕과 수행은 스님 개인을 넘어서서 중생제도와 연결되는 일이기 때문에, 재가신도의 입장에서도 바람직한 일이 못되는 것이기에 시주은혜를 축내고 있지는 않은지 반문해봐야 할 것입니다.

동시에 재가신도에게는 불법을 지키고 스님들이 수행을 잘 할 수 있도록 의식주를 도울 외호(外護)의 의무가 있으므로, 수행자의 일상의 수행을 지켜보고 그릇됨은 지적해주어야 하며 승단의 혼란은 재가신도에게도 책임이 있다고 느껴야 할 것입니다.

또, 항상 말법을 자각하면서 말법시대에 어떻게 하면 불도(佛道)를 성취할 수 있을까 전념해야 할 것입니다.

더 쉽게 말하면 내 죽는 순간에 걸림 없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또, 전등록에 보면 우바국다 존자께서 삼매에 들으셨을 때, 마왕이 우바국다 존자를 우롱하다가 도리어 나중에 우바국다 존자님의 신통력에 곤혹을 치르고 마왕이 마지못해 존자님 앞에서 존자님께서 시키신 대로 삼귀의를 하여 풀려난 뒤에 도망가면서 다시 외치길, “내가 말법시대에 가면 내 권속(마졸)들을 풀어 출가스님을 만들어서, 모두 고기 먹고 술 마시고 춤추며 온갖 계율을 무너뜨려 기어코 불법을 망하게 하고 말겠다.”라고 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일상에서 어려운 일을 당하거나 도저히 미움이 지나쳐 해결할 수 없을 때, 적어도 불법을 믿고 따르는 불자라면 지금 이 순간에 부처님은 이일을 어떻게 바라보고 어떻게 해결하셨을까? 를  생각해볼 줄 아는 지혜로움이 항상 그림자가 되어있어야 할 것입니다.


매사에 부딪치는 일들에 대해 정말 부처님의 바른 가르침에 비추어 보고 정견(正見)에 의지하여 어떤 길이 우리 중생들을 바른 길로 이끌어 주는 것인지 잘 판단하여, 하루 빨리 이 몸이 생명을 다하여 저 죽음의 세계로 가더라도 윤회로부터 벗어나고 구경에는 불도를 이룰 수 있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허나, 지금시대는 정말 말법시대임이 분명하며, 이런 말법시대에 태어나는 중생들은 부처님 당시처럼 근기가 수승하지 못하여 도를 이루는 것은 고사하고, 십악을 범하지 않고 살아가기도 어려운 것이 현실입니다. 

하물며 세속에서 온갖 경계에 부딪쳐, 때로는 싸우기도 하고 때론 남을 속이기도 하며, 울고 웃고 살아가는 인생살이 속에서 어떻게 해야만 할 것인가?

 

그것은 바로 염불입니다.


화장실에 있어도 몸이 화장실에 있을 뿐이지 내 마음은 간절히 기도를 한다면 주인공은 정토에 있는 것이며, 내가 설거지를 하거나 걸레질을 하고 있다 해도 내 입과 생각이 간절하게 염불을 하고 있다면 주인공은 부처님의 세계에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시대의 이러한 난세를 벗어날 수 있는 것은 스스로가 노력하시면, 생각만 한번 일으키면 할 수 있는 염불이라는 자력수행으로 이겨내고 헤쳐나가시기 바랍니다.

부디 성불하십시오.

 

 

 

 

 

 

고민은 십분을 넘기지 마라

 

우리가 하는 걱정거리의 40%는

절대 일어나지 않을 것에 대한 것이고

30%는 이미 일어난 사건들

22%는 사소한 사건들

4%는 우리가 바꿀 수 없는것들에 대한 것들이다

 

나머지 4%만이

우리가 대처할 수 있는 진짜 사건이다

즉, 96%의 걱정거리가 쓸데없는 것이다

 

고민이 많다고 해서 한 숨 쉬지마라

고민은 당신의 영혼을 갉아 먹는다

문제의 핵심을 정확히 파악하고

해결책을 찾아 그대로 실행하라

해결책이 보이지 않으면 무시하라

고민하나 안하나 결과는 똑같지 않는가

그러므로 고민은 10분만 하라

 

잊어버릴 줄 알라

잊을 줄 아는 것은 기술이라기 보다는 행복이다

사실 가장 잊어버려야 할 일을

우리는 가장 잘 기억한다

기억은 우리가 그것을 가장 필요로 할 때

비열하게 우리를 떠날 뿐 아니라

우리가 그것을 가장 원하지 않을 때

어리석게도 우리에게 다가온다

 

기억은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는일에는 늘 친절하며

우리를 기쁘게 해줄 일에는 늘 태만하다

고민은 10분을 넘기지 마라

 

-어니 J.젤린스키 <느리게 사는 즐거움> 중에서-

 

 

고민해야 할것이 있고 걱정해야 할것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정말 고민할것, 정말 걱정해야 할것은 아니하고

엉뚱한 고민과 걱정을 하게 됩니다.

저 또한 위에 글을 보면서 많이 부끄러워지기도 합니다.

성격이 꼼꼼하고 남을 많이 의식하는 사람, 스스로 구속이 심한 사람들은 정말 고민걱정이 많은것 같습니다.

도리어 스스로를 갉아먹고 구속하여 힘들어 하는데, 그것도 자기 혼자서만 말이죠.

지금 인연님의 마음에 있는 고민,걱정은 쓸데없는 고민,걱정은 아닌지 한번 살펴보시고 10분후엔 웃으시기 바랍니다.^^

 

맨위 사진은 인도 사위성에서 사진찍어 달라던 누나와 남동생.

저 남동생은 뭐가 그리 심통이 났는지 누나들이 계속 놀리던데..저 심통난 꼬마의 고민처럼 우리들은 의미 없는 고민을 하기도 합니다.

그 아래는 사위성 가는길 버스가 잠시 정차하자 까만머리 이방인인 저에게 달려들어 사진기 후래쉬에 환호성을 지르던

동네 아이들..어찌나 무안하던지..ㅡㅡ;마치 제가 스타가 된듯 인도 시골완행 버스창가에 앉은 내게 매달리던..

세번째 사진은 인도 간덴대사원에서 만난 꼬마 순례객. 저 마음씨 좋아보이던 누나가 동생을 참 잘 챙기던 아이.

네번째 사진은 사원 앞에서 소떼를 방목하고 돌보던 13살 소녀..부끄러워하던 그 웃음이 참 맑았던 아이.

우리도 그러했듯 저 아이들은 나머지 4%에만 충실한 듯합니다.

 

만추(晩秋)의 계절.... 그 화려함 속으로.....






































































































가을이 가네

      용 혜 원

                    빛 고운 낙엽들이 늘어놓은
                    세상 푸념을 다 듣지 못했는데
                    발뒤꿈치를 들고 뒤돌아보지도 않고
                    가을이 가네

                    가을이 가네
                    내 가슴에 찾아온 고독을
                    잔주름 가득한 벗을 만나
                    뜨거운 커피를 마시며 함께 나누려는데
                    가을이 가네

                    가을이 가네
                    세파에 찌든 가슴을 펴려고
                    여행을 막 떠나려는데
                    야속하게 기다려주지 않고
                    가을이 가네

                    가을이 가네
                    내 인생도 떠나야만 하기에
                    사랑에 흠뻑 빠져들고픈데
                    잘 다듬은 사랑이 익어가는데
                    가을이 가네


Autumn Leaves

Clarinet : Acker Bilk


Piano : Giovanni Marradi


Piano : Roger William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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