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들 세월은 쉼 없이 흘러간다고들 합니다만 사실은 사람들이 만든 달력에서 숫자가 바뀔 뿐이지 세월은 마냥 낮과 밤이 바뀔 뿐이고 우리나라처럼 사계절이 있는 곳에서는 절기에 따른 계절의 변화만 있는 것이지 아무것도 흘러 가지 않습니다.
다만, 유한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의 몸이 늙어가고 큰 병이 없는 한, 마치 자동차가 세월이 가면 스스로 잔고장이 큰 고장으로 이어지다 결국에는 멈추고 말듯이 우리의 몸이라는 것도 이렇게 유한하게 무너지고 만다는 것은 세상을 웬만큼 살아오신 분들은 다들 아실 겁니다.
그런데 이런 내용들은 잘 아시면서 막상 경계에 부딪치는 순간에는 까마득히 잊어버리고 아득바득해지는 우리들이기에 우리는 결국에는 중생에 불과하게 살다가 금생의 이 모습, 이 이름을 쓰던 누군가는 한 줌 재로 변해버리던가, 땅 속에 묻혀 세월 지나 유기질 토양으로 변해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신중단에 반야심경을 외우면서 불생불멸이요, 불구부정이자 부증불감이라고 그리도 지극하게 했던 이치를 우리는 깨달아야 합니다.
요즘 인터넷에 들어가 보면 참 한심하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하고, 그냥 복잡해지기만 합니다.
지금 이 순간에 부처님이 계신다면 아프칸의 인질 문제를 어떻게 풀어나가셨을까? 하는 의문을 가지고 냉정하게 객관적으로 바라보기도 하고, 만일에 전지전능하시다는 하나님이나 우리 중생들의 모든 원죄를 다 짊어지시고 중생들을 대신하여 속죄로 죽어주셨다가 다시 부활하셨다는 예수님이 아프칸을 내려다보고 계신다거나, 죽기 살기로 당
신을 추종하는 종들이 쌔버린 한국 땅에서 탈레반의 인질이 되어버린 어린 종들을 어찌 해결하실 것인가를 혼자서 생각하다보면 우리 중생들이 얼마나 어리석게 살아가고 있는 미물들인가를 새삼 자탄하다 혼자서 차 한잔마시고 털어버리고 맙니다.
우리 불교는 부처님을 신으로 믿는 것이 아닙니다.
부처님께서 우리들에게 남겨주신 8만 4천의 무수종종의 가르침들이 거짓이 아니고 진리라는 사실을 믿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부처님께 예경을 하는 것은 부처라는 신에게 예경을 하는 것이 아니라 미혹한 무명의 중생들에게 참다운 무상의 도리와 인과와 연기의 법칙과 팔정도와 육바라밀이라는 인간으로서의 덕목을 깨닫고 끝없는 윤회의 사슬에서 벗어나 자성의 본래 면목을 찾도록 해주신데 대한 감사의 예경을 온 몸으로 표현하는 것이 조석예불이요, 지극한 감사의 뜻으로 108배, 천배 만 배로 공경하는 마음을 절로써 표현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생각과 말과 행동은 온갖 악행을 다하면서 믿기만 하면 천국으로 바로 간다는 이기적이고 자기 본위적인 그런 정신세계는 불교에서 가장 경계하는 마장인 것입니다.
천국이라고 하면 아주 먼 저 멀리 저 높은 하늘 위에 천국이 있는 줄로 알고 계십니다.
그런데 비행기를 타고 구름을 뚫고 아무리 올라가 봐도 보는 눈이 없어서인지 하늘에 천국은 없었습니다.
지하철 공사장이나 대형건물을 짓는 공사장에 가서 그토록 깊이 들어가는 땅 밑을 봐도 지옥 또한 보는 눈이 없어서 인지 볼 수가 없었습니다.
지혜로운 우리 조상님들은 사람이 죽어 매장을 하게 되면 예전부터 석자 이상은 파지 못하게 했습니다.
물론 풍수적으로 매장지의 상황에 따라 다르기도 합니다만, 대체적으로 석자, 90㎝를 넘지 않았습니다.
바로 예전부터 발아래에 석자 밑을 지하라 했던 것이고, 머리 위로 석자 위를 천상이라 했던 것입니다. 너무 멀리들 보려고 하지 마십시오.
이렇게 천상과 지하는 우리머리 위에 불과 1m도 안되게 너무도 가까이 공존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백중기도가 벌써 4재에 들었습니다.
백중기도 입재 때에 백중기도를 왜? 해야 하는가에 대해서 말씀드렸었습니다만, 오늘은 백중기도가 생기게 된 유래의 주인공인 나복이의 이야기와 부처님 십대제자 중에 신통제일로 인정받는 목련존자가 어머니를 찾아 들어가 본 지장경에서 묘사되는 지옥이 아닌 보다 더 현실적인 지옥세계에서 겪게 되는 인과의 과정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옛날 왕사성에 한 장자가 있었다. 그의 이름은 ”부상“이라 했다. 그는 큰 부자여서 낙타와 나귀와 코끼리와 말이 산과 들을 덮었으며, 비단과 지주가 창고에 가득하였을 뿐만 아니라 여러 사람에게 꾸어준 빚도 그 수를 알 수 없을 만큼 많았다.
그는 말할 때는 언제나 웃음을 머금어서 인정을 거스리지 아니하고 육도 가운데서 한상 육바라밀을 행하였다.
그러던 그가 어느 날 갑자기 병이 들어 죽고 말았다.
그의 부부 두 사람은 오직 아들 하나를 길렀으니 그 이름은 “나복”이라고 했다.
그 아들은 아버지의 죽음을 보고 장례를 모시고 산소를 써 3년 동안의 복을 벗고 나서 어머니께 여쭈었다. (이 부분은 상당히 의심스러운 유교적인 대목이지만 ) 아버님이 계실 때는 돈과 재물이 한없이 많았으나 지금은 창고가 비게 되었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는 돈을 가지고 외국으로 나아가 장사를 하고자 합니다.
그리고 종 “익리”로 하여금 돈을 가져오게 하여 계산해보니 3천관이었다.
이를 셋으로 나누어서 하나는 어머니께 드려서 집안을 보전케 하고 또 하나도 역시 어머니께 드려 삼보를 공양하며 매일 백승재를 베풀게 했으며, 아들도 하나를 가지고 금지국에 가서 장사를 경영했다.
어머니는 아들이 떠나는 것을 보고나서 종들을 불러 놓고 말하였다. 너희들은 다 이리 오너라.
우리 집은 큰 부자다. 만약 사문들이 우리 집 문 앞에 와서 교화하려 하면 나를 위하여 뭉둥이로 쳐주어서 목숨이 남아나지 않도록 하라.
그리고는 아들이 재를 올리라고 한 돈으로 돼지, 양, 거위, 오리, 닭, 개를 널리 사들여서 배불리 먹여 살찌워서 양을 기둥에 달아놓고 피를 내어 동이에 받으며, 돼지를 묶어놓고 몽둥이로 때리니 슬픈 울음소리가 그치지를 않고 배를 가르고 간을 꺼내 귀신에게 제사하는 것으로 모든 즐거움을 누리고 있었다.
나복은 본전 1천관을 가지고 외국에서 3년 만에 본국으로 돌아왔다.
집에 40여리 떨어진 곳에 이르러 성 서쪽의 버드나무 밑에서 쉬면서 종 익리로 하여금 집으로 먼저 돌아가 어머니께 귀향을 말씀드리도록 했다.
나복이 혼자서 생각하기를, 만일 착한 인연을 지으셨으면 내가 이 돈을 가지고 돌아가 어머니께 공양할 것이고 만일 악업의 인연을 지었으면 나는 이 돈으로 어머니를 위해 보시하는데 바치겠나이다.
익리가 집에 돌아오니 금지가 멀리서 보고 마님인 “청제부인”에게 사실을 알렸다. 서방님이 돌아오십니다.
마님이 금지에게 묻는다. 네가 어찌 아느냐. 금지가 대답하되, 문 앞에서 익리를 보고 서방님께서 돌아오시는 것을 알았습니다. 부인이 금지에게 명했다.
네가 나가서 문을 닫아걸어서 익리가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내가 창고에 들어가 당번을 꺼내어 후원에 늘어놓아 거짓 재를 지낸 모양을 꾸며놓거든 그때를 기다려 문을 열고 익리가 들어오게 하여라.
익리가 들어오자 말하기를, 네가 서방님과 함께 떠난 이후로 나는 집에서 날마다 “5백승재”를 지냈다.
네가 만일 믿어지지 않으면 후원 불당 앞에 가서 내가 재 올린 것을 보아라.
익리가 가서보니 수저는 이리저리 흩어져 있고 향불의 연기는 아직도 서려 있었으며 사발이며 대접의 설겆이도 아직 마치지 못한 채로 있었다. 익리는 급히 달려가 주인에게 보고했다. 마님께서는 보통 어른이 아니더이다.
마님께서는 날마다 5백승재를 올렸습니다.
나복이 익리에게 물었다. 네가 어찌 알았느냐.
제가 집에 돌아가 보니 수저가 이리저리 엇갈려 놓여 있고 향을 사룬 연기는 자욱하고 스님네들도 방금 헤어져 그릇들의 설거지도 아직 끝내지 않은 채로 있었습니다.
나복은 이 말을 듣고 부끄러운 마음이 생겼다.
나는 여기서 멀리 어머니를 향해서 1천 번 절을 하리라. 하고 1천배를 드리고 있었다.
이때 동. 서 마을의 이웃과 집안 식구들이 나복이 돌아온다는 말을 듣고 그를 영접하기 위하여 성문 밖에까지 모두 나왔다.
그러나 나복이 절을 하느라고 일어나지 않음을 보고 물었다. “저 앞에는 부처님이 안 계시고 위에도 스님 네가 보이지 않는데 예배함은 어찌된 일인가.” 나복이 대답했다.
나는 어머님께 부끄럽습니다.
어머니께서는 집에 계시면서 삼보를 공양하고 매일 5백승 재를 지냈다 합니다.
이 말에 이웃 사람들이 대답하되, 그대의 어머니는 그대가 집을 떠난 후 곧바로 집에서 삼보사승이 찾아오면 몽둥이로 때려쫓고 재를 올리라는 돈으로는 돼지와 염소와 거위와 오리와 닭, 개들을 많이 사서 잘 먹여 살찌게 하여 염소를 기둥에 달아매어 피를 내어 동이에 받으며, 돼지를 묶어 몽둥이로 때려 끓는 물로 몸을 튀기니 그 비명소리가 끊이지 않았을 뿐 아니라 이것을 또 배를 갈라 간을 꺼내어 귀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등 갖은 환락을 다했다네, 하자, 나복이 드디어 이 말을 듣고 몸을 들어 땅에 부딪치니 온 몸에서 피가 흐르며 까무라쳐 쓰러진 채 오래도록 깨어나지 못했다.
어머니는 아들이 돌아온다는 말을 듣고 성 밖으로 그를 맞으러 나왔다.
그는 아들이 땅에 쓰러져 일어나지 못함을 보고 손을 잡고 아들에게 말하기를, “너는 나의 맹세하는 말을 들어라. 강물이 저렇게 넓고 커도 그 위에는 출렁이는 파도가 있는 것과 같이, 사람들 성공케 하는 사람은 적고 사람을 망하게 하는 자는 많으니라.
네가 떠난 뒤에 내가 너를 위하여 5백승재를 지내지 않았다면, 이제 내가 집에 돌아가는 대로 문득 중병을 얻어 이레를 넘기지 못하고 죽어 아비대지옥에 들어갈 것이다.”
나복이 어머니의 맹세가 너무나 중대함을 듣고는 그만 일어나서 집으로 돌아갔다.
그 후, 어머니는 갑자기 중병에 걸려 이레를 넘기지 못하고 그만 죽어 버렸다.
나복은 어머니 산소에서 풀을 매어 암자를 짓고 어머니의 무덤을 지키며 3년 동안 고행을 했다.
낮에는 삼태기로 흙을 담아다가 어머니 무덤에 흙을 더하고, 밤에는 대승경전을 읽으니 그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그 효성에 감동되어 아홉 가지 빛이 나는 사슴이 무덤 앞에 나타나기도 하고 흰 학이 나타나 상서로움을 표하기도 했으며, 자오는 두 눈에서 피가 흐르기도 했고 여러가지 새들이 흙을 물어다가 무덤 만드는 일을 도와주기도 했다.
나복은 새들이 흙을 물어옴을 보고 기쁜 마음이 생겨 사람을 불러다가 불상을 조성하고 3년 동안을 공양하다가 복을 마치고는 무덤을 하직하고 떠났다.
그 길로 기사굴산에 이르러 세존을 뵈옵고 부처님께 사뢰었다.
세존이시여, 부모가 이미 다 돌아가시고 복입기를 마쳤음에 부처님을 따라 출가하고자 원하온데 무슨 공덕이 있어야 하겠습니까.
세존께서 말씀하시기를, “나복아, 잘 왔다. 남염부제 중에 서 만약 한 사람의 남자나 여자 또는 한 남자 종이나 여자 종이라도 부처님을 따라 출가케 하는 것은 8만 4천의 부도와 보탑을 조성하는 것보다 나은 것이며, 이로써 이 세상에 살아 있는 부모는 백년동안 복락을 누리게 되고 7대를 거슬러 올라가 조상까지도 마땅히 정토에 태어날 것인데, 하물며 너는 너 스스로 보리심을 낸 것이 아니냐.” 세존께서 곧 아난에게 명하여 나복의 머리와 수염을 깎게하고 이마를 만져 수기하시며 이름을 “대목건련”이라 고쳐 주시었다. 목련이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보탑을 넓고 크게 세운다면 그 공덕이 어떠한 것입니까. 세존은 이에 대답하여, 목련아, 보탑이 높고 커서 처마와 처마가 서로 맞닿아서 범천까지 통할지라도 백년 후에 비가 부처님 얼굴에 새게 되면 당장 죄를 얻게 되거니와 경전을 외우는 공덕은 금강과 같이 무너지지 않는 몸을 이루나니라. 목련이 다시 세존께 여쭈었다.
지금 스승과 하직하고 산에 들어가서 도를 닦고자 합니다.
세존이 이에 대답하여, 목련아, 네가 만일 도를 닦고자 할진대 다른 곳에 가지 말고 나를 따라 기사굴산에서 도를 닦도록 하여라. 목련이 다시 세존께 여쭈되, 그 산중에 무슨 양식이 있어서 머무를 수 있단 말씀입니까.
이에 부처님은, 목련아, 산중에는 호랑이와 이리, 그리고 새, 짐승들이 있어서 매양 재식할 때가 되면 입으로 향기나는 꽃을 물어다가 스스로 와서 공양해 주느니라.
목련이 이 말씀을 듣고 나서 발우를 던져 공중으로 솟아 올라 기사굴산의 빈바라암이라는 절에 이르러 왼쪽 다리로 오른쪽 다리를 누르고 오른쪽 다리로 왼쪽다리를 누르며 혀로써 입천장을 받치고 三十三천을 관하다가 화락천궁에 이르러 보니 그 아버지는 하늘의 복을 누리고 있으나 그 어머니는 볼 수 없었다.
목련은 돌아와서 세존께 사뢰었다. 어머님께서 세상에 계실 때 저에게 말씀하시기를 날마다 5백승재를 올렸다고 하셨습니다.
죽어서는 마땅히 화락천궁에 태어날 것이온데 천궁에는 어머니가 보이지 않으니 지금 어디 계십니까.
부처님께서 목련에게 이르시되, 너의 어머니는 세상에 있을 때 삼보를 믿지 않고 간탐하고 극악했기 때문에 죄를 지은 것이 마치 수미산과 같아서 죽어서 지옥에 들어갔느니라.
목련은 이 말을 듣고 몸을 던져 땅에 부딪쳐 슬프게 목놓아 울다가 땅에서 일어나 여러 지옥으로 어머니를 찾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이제부터 지옥의 묘사가 나옵니다.)
목련이 앞으로 가다가 보니 한곳의 지옥을 보니 거기에는 남염부제의 중생들이 방아 속에서 몸이 천 토막으로 끊겨 피와 가중이 어지러이 흩어져서 하루에도 만 번씩이나 죽었다 깨어나곤 한다.
목련이 슬퍼하며 그 지옥의 옥주에게 물었다.
이 지옥에 있는 중생들은 전생에 무슨 죄업을 지었기에 이러한 괴로움을 받습니까. 옥주는 대답한다.
이들은 남염부제의 사람인데 생전에 모든 중생들을 잘라 죽이고 남녀들이 둘러앉아 함께 음식을 먹으면서 입으로 그 맛이 좋다고 떠들다가 이제 제자들의 수중에 떨어져서 오직 죄를 달게 받고 있는 것이지요.
목련이 다시 앞으로 가다가 검수지옥을 보니 남염부제의 중생이 검수 끝에 있어 손으로 칼나무를 휘어잡으니 온몸이 모두 갈라지고, 발로 칼날을 밟으니 사지가 모두 부서진다. 목련이 슬프고 서러워서 지옥주인에게 묻는다.
이 지옥에 있는 중생들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기에 이제 이러한 괴로움을 받는 것이오? 지옥 주인이 대답했다.
이것은 남염부제의 사람들이 인과를 믿지 않아 중생을 꼬챙이에 꿰어 가지고, 구워서, 남녀가 둘러 앉아 머리를 모으고 함께 먹으면서 입으로 맛있다고 소리치다가 이제 제자의 수중에 떨어져서 다만 형벌을 달게 받고 있는 것입니다.
목련은 다시 앞으로 가다 보니 한 석합지옥이 있었다. 두 덩어리 큰 돌이 뭇 죄인들을 갈아서 피와 살덩이가 흐트러진다. 목련은 슬퍼하면서 옥주에게 물었다.
이 지옥의 중생들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기에 이런 고통을 받는 것입니까? 옥주가 대답했다.
이것은 남섬부주의 중생들이 개미와 벌레들을 많이 죽였기 때문에 이제 제자의 수중에 떨어져서 이렇게 괴로움을 달게 받고 있는 것입니다.
목련이 다시 앞으로 나가다가 한 떼의 아귀를 보았는데, 그들의 머리는 태산만큼 크고, 배는 수미산처럼 부른데 목구멍은 바늘과 같았다.
그들은 걷는데 항상 五백 채나 되는 수레가 부서지는 것 같은 소리를 냈다. 목련이 그 아귀들에게 물었다. 너희들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는가. 아귀들이 대답했다.
나는 전생에 죽은 사람을 위해서 재 올리는 것을 못하게 하고, 삼보를 공경하지 않았기 때문에 여러 겁 동안 좁쌀미음의 이름도 듣지 못하고, 음식도 맛도 보지 못해서 이런 꼴이 되었습니다.
목련이 다시 앞으로 나가니 한 회하지옥이 보인다.
거기에서는 모든 남섬부주 사람들이 잿물의 물결 속에 밀려다니고 있는데, 온 몸뚱이가 데어서 타고 있다.
동쪽 문이 열린 것을 보고 동쪽 문으로 달려가면 동쪽 문이 닫히고, 서쪽 문이 열린 것을 보고 서쪽 문으로 달려가면 서쪽 문이 다시 닫힌다.
또 남쪽 문이 열린 것을 보고 남쪽 문으로 달려가면 남쪽 문이 다시 닫히고, 북쪽 문이 열린 것을 보고 북쪽 문으로 달려가면 북쪽 문이 다시 닫힌다. 이렇게 물결을 따라 달리느라고 다시 조금도 쉴 새가 없다. 목련이 옥주에게 묻는다. 이 지옥의 중생들은 무슨 죄를 지었나요? 옥주가 대답한다.
이 사람들은 전생에 달걀을 삶아먹었기 때문에 이제 제자의 수중에 떨어져서 그 괴로움을 달게 받고 있는 것입니다.
목련이 다시 앞으로 가다가 보니 한 확탕지옥이 있는데, 남섬부주의 중생들을 물이 끊고 있는 이 가마솥에서 삶고 있었다. 목련은 이것을 보고 슬퍼하여 옥주에게 물었다.
이 지옥에 있는 사람들은 무슨 죄를 지었기에 이런 고통을 받는 것입니까. 옥주가 대답한다.
이 사람들은 남섬부주 사람으로서 삼보를 믿지 않았을 뿐 아니라, 큰 부잣집에 태어나서 뭇 생명 있는 것들을 삶아 먹었기 때문에 이제 제자들의 수중에 떨어져서 이 고통을 달게 받고 있는 것입니다. ~ 이하 생략하고 다음 법회 때~
지옥은 꼭 죽어서만 가는 것이 아닙니다.
철없는 맹신에 떨어졌거나 봉사와 선교라는 엄청 복을 지을 거라는 착각에 들뜬 마음으로 그곳에 갔던 철없는 중생들이 지금 탈레반에게 붙들려 겪고 있을 고통이 바로 지옥 고통인 것입니다.
천상과 지옥이 우리 머리 위아래 석자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듯이 우리가 일상에서 자신의 욕구와 생각이 이루어지지 않을 때 스스로 번뇌와 갈애를 일으켜 겪는 고초가 바로 지옥고이지만, 이러한 지옥 고는 일념돈탕제라 한 생각에 소멸시킬 수 있지만, 인과 연으로 인한 과보는 자신만의 생각으로 해결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끝없는 윤회의 업연을 만들고 인과의 씨앗을 뿌리는 생각과 말과 행동의 신구의 삼업으로 뿌려온 열 가지의 악업을 참회하고, 참회하는 것만으로 끝나는게 아니라 새로운 선업을 지어야 하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우리에게 카르마 업이라는 것에 대한 말씀의 핵심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기왕에 지어진 업의 과보는 피할 수 없다 해도 지금부터 의업을 새롭게 하여 선의업과 선행과 선한 구업은 스스로 지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기왕에 지어진 업이라도 해도 이기적이고 자기 본위적인 참회와 회개가 아닌 지극한 참회의 기도를 통하여 자신과 연결된 악연을 통해 오는 인과를 겸허하게 수용하여 큰 인과는 작아지고 작은 인과는 소멸시킬 수 있는 것이 진정한 참회이자 진정한 회개인 것입니다.
성불하세요.
여름에 보는 시원한 정물화..
세개의 바이올린
누드
흰 꽃병과 빨간 꽃
빨간 부케
바이올린
금빛 햇살
욕망
거울앞의 소녀
아늑한 휴식
사과와 배
누드
튤립
테이블 위의 바이올린
흰 꽃다발
바이올린이 있는 정물
과일과 빨간꽃
이사벨
꽃과 과일
당구 클럽
항해2
풍경
Claude GAVEAU (끌로드 갸보)
(1940~ - FRANCE)
1940년 파리 근교 네이(Neuilly) 출신의 프랑스 화가.
1980년 이후 그는 미국의 뉴욕, 시카고, 비버리 -
힐 등지에서 매년 개인전을 개최하고 있다.
프랑스, 가나, 알제리 정부로부터 의뢰를 받아 여러 작품을 제작한 바도 있다.
현재 그의 작품은 프랑스를 비롯,
일본, 미국, 영국, 독일, 스위스, 덴마크, 이태리 등지의
유명 미술관이 전시·소장하고 있다.
파리의 하늘 아래
(Sous Le Ciel De Paris)